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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3시 30분에 두북 수련원을 출발해 서울로 향했습니다. 서울에서 전국비구니회 초청 강연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두운 새벽녘을 부지런히 달려 7시에 서울 정토회관에 도착했습니다. 공양간에서 발우공양을 하고 남은 음식으로 간단히 요기를 한 후 곧바로 8시부터 정토회 천일준비위원회와 화상으로 회의를 했습니다. 2-1차 천일결사의 시작을 앞두고 여러 가지 점검할 내용을 검토하고 스님의 조언을 들은 후 회의를 마쳤습니다.
이어서 오전 10시 정각에 수행법회 생방송을 시작했습니다. 스님이 방송실 카메라 앞에 자리하자 정토회 회원들도 화상회의 방에 모두 입장했습니다.
먼저 스님이 인사말을 건넸습니다.
“지난 3일 동안 제가 있는 경주 지역은 30도 가까이 올라서 무더웠습니다. 농사일을 할 때는 한여름처럼 땀이 날 정도여서 숨이 차고 힘들었어요. 봄꽃들은 이제 지고 있습니다. 개나리꽃, 벚꽃, 진달래, 목련은 모두 졌고, 이제 연달래와 철쭉이 막 피어나기 시작한 상태예요.
요즘 두북 수련원에서는 밭에 온갖 씨를 뿌리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모종을 옮겨심기는 일러요. 꽃샘추위 때문에 냉해를 입을 수 있거든요. 4월 말이나 돼야 모종을 옮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씨앗 심는 작업이 한창입니다. 온실에서는 봄채소가 먹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자랐고요. 오늘부터는 기온이 조금 떨어져서 평년 기온을 유지한다지만, 지난 주말은 정말 여름이나 다름없는 날씨였습니다. 저희가 농사짓는 모습을 영상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지난주에 씨앗을 심는 모습을 영상으로 함께 본 후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지난 한 달 동안 대승불교의 수행법인 육바라밀(六波羅密)을 공부했습니다. 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 지계바라밀(持戒波羅蜜), 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 정진바라밀(精進波羅蜜), 선정바라밀(禪定波羅蜜), 지혜바라밀(智慧波羅蜜), 이렇게 여섯 가지 바라밀에 대해서 공부를 했는데요. 이제 다시 또 한 달 동안은 여러분의 수행이나 개인사에 관한 것들을 자유롭게 질문하고 대화할 수 있는 즉문즉설 시간을 갖겠습니다.”
즉석에서 자유롭게 손들기 버튼을 누르고 질문을 했습니다. 계속 이어지는 질문에 대해 답변을 한 후 11시 30분이 다 되어 생방송을 마쳤습니다.
점심 식사를 한 후 오후에는 전국비구니회관으로 향했습니다. 차가 막히지 않아 예상보다 일찍 도착했습니다.
스님은 회관에 도착해 떨어진 가사를 수선하려고 가사원을 찾았지만, 아쉽게도 가사원이 이전을 했습니다. 점심 공양 시간이라 스님들이 불편할까 봐 스님은 회관의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강의 전에 전국비구니회 회장인 본각 스님과 간단히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스님, 작년 6월에 이어 이렇게 와주시니 저희들이 너무 기쁩니다. 작년에 법문을 듣고 대중들이 무척 좋아했습니다. 저희가 수행적으로 놓쳤던 것을 깨우쳐주셔서 고맙습니다.”
오후 1시에 법회가 열리는 만불전으로 이동했습니다. 작년 4월부터 전국비구니회에서는 승가공동체 정신을 회복하기 위한 수행결사를 시작했습니다. 작년에도 스님을 초청해 법회를 열었습니다. 이제 결사를 시작한 지 1년이 지났습니다. 전국에서 결사를 함께 하고 있는 비구니 스님들이 오늘 법문을 듣기 위해 모였습니다.
스님은 먼저 축하의 말을 전하며 법문을 시작했습니다.
“먼저 수행결사 1주년을 축하드립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무슨 결정을 하면 오래 하는 법이 없잖아요. (웃음) 시작은 거창해도 끝마무리가 잘 안 되는 게 특징인데, 회장 스님께서 3년 결사를 시작하셔서 여러분 모두가 1년이 지나도록 이렇게 꾸준히 해나간다는 것은 정말 장한 일이고 큰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정토회를 창립하고 나서 만일결사를 시작했습니다. 부처님도 혼자서 불법을 일으켰는데, 자꾸 불평하기보다는 우리가 다 혼자라는 생각으로 한번 전법을 해보자는 뜻이었어요. 1만 일은 약 30년입니다. 불교 전통에서는 백일 동안 기도를 하면 자기 꼬라지를 좀 알게 된다고 말합니다. ‘내가 고집이 세구나’, ‘내가 욕심이 많구나’ 이런 걸 좀 알 수 있어요. 천일, 즉 3년 동안 수행이나 기도를 해야 뭔가 좀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때는 옆에서 다른 사람이 봐도 ‘좀 변했네’ 이렇게 느낄 수 있습니다. 만일, 즉 30년을 정진하면 본인이 소속된 단체나 세상을 좀 바꿀 수 있습니다. 불교에도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 게 필요하지만, 우리가 사는 이 세상도 좀 변화를 일으켜 보자는 뜻에서 30년 만일 결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척불을 당하다 보니 대중은 불법이 담겨 있는 바른 불교를 배우기보다는 복을 비는 쪽으로 갈 수밖에 없었어요. 경전을 읽을 수가 없었으니까요. 스님들이 팔천(八賤, 여덟 가지 천민) 가운데 하나였잖아요. 이런 상황에서 세속의 리더십을 가진 유생들은 불교를 믿을 수가 없었고, 평민이나 여성들, 사회로부터 소외된 사람들만 불교를 믿다 보니 그들은 문자를 몰라서 마음의 위안과 복을 비는 것 이상의 활동을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이처럼 출가하신 스님들만 불법을 배울 수 있었고 대중은 불법을 알지 못하던 시대에 용성조사님의 활동은 한국 불교에 새로운 희망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용성조사님께서 제창하신 3대 교화 지침의 첫 번째가 불교의 지성화입니다. 두 번째가 불교의 대중화입니다. 세 번째가 불교의 생활화입니다. 불교의 생활화의 대표적인 사례가 선농일치의 실천입니다. 그래서 용성조사님께서는 백운산에는 화과원을 만들고, 중국에는 선농당을 만드셨습니다. 지금의 연변 조선족 자치주 안도현 명월촌에 30만 평, 봉녕촌에 30만 평의 농장을 만드셨어요. 이는 독립운동가 가족들과 독립운동가들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었고, 한편으로는 불교의 이상형을 실천하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용성조사님이 꿈꾸는 불교의 이상형은 농사짓고 참선하는 선농일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생활화’라는 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불교를 생활화한다고 할 때의 의미를 넘어서는 겁니다. 다시 말해 사회운동에 관여하는 게 불교의 생활화예요. 그렇기 때문에 용성조사님께서는 독립운동에 참여하셨던 겁니다. 상해에 있는 임시정부 요원들과 만주에서 무장 투쟁하는 분들에게 많은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서 지원하셨고, 그런 지원을 위장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화과원을 경영했습니다. 실제로는 전라도에 있는 만석꾼들의 돈을 받아서 독립운동을 지원했지만, 자금 출처를 들키면 큰일이 날 테니 그걸 화과원으로 옮겨서 화과원 수입인 것처럼 꾸민 뒤에 독립운동 지원 자금으로 보냈습니다. 본인이 직접 무장투쟁을 하거나 싸우는 것은 계율에 어긋나니까 하지 않으셨지만 이처럼 많은 지원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김구 선생이 귀국하자마자 대각사를 방문해서 용성조사님의 영정 앞에서 ‘큰스님께서 보내주신 돈으로 임시정부를 잘 운영했습니다’라고 감사 인사를 했고, 임시정부 요인 30여 명과 함께 그 앞에서 사진을 찍은 자료가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김구 선생이 귀국하자마자 맨 먼저 방문했던 게 손병희 선생의 묘소이고 그다음이 용성조사님의 대각사였어요. 그만큼 용성조사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많은 활동을 하셨습니다.
오늘날에 견주어 표현하자면, 사회 민주화 운동이든, 정의 구현 운동이든, 이런 활동들을 하는 게 불교의 생활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광복 이후 남북이 분단되고 대립하면서 이런 근본정신들이 제대로 계승되지 못한 부분이 많습니다. 요즘도 자료를 보면 용성조사님께서는 불교 의식집을 만들어서 병문안 할 때 기도하는 법도 다 정해 두었어요. (웃음) 천도재도 전부 한글로 바꾸어서 노래로 만드는 등 지금 봐도 혁신적이라고 할 만한 안을 벌써 1920년대와 1930년대에 걸쳐 시행하셨습니다. 그런 씨앗들이 있었기 때문에 저희가 이런 활동들을 하는 것이 더 수월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런 용성조사님의 모습을 보면, 오늘 우리가 하는 일이 꼭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을 굳이 할 필요가 없는 것 같아요. 우리가 3.1 운동을 했을 때 성공한 게 아니잖아요. 3.1 운동은 실패했지만 그로부터 30년이 안 되었을 때 우리나라가 독립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우리 역사에서 3.1 운동이 없었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이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그냥 ‘일본이 미국에 패하면서 독립했다’ 이런 평가밖에 더 있겠어요? 자주적인 요인이 없잖아요. 3.1 운동이 그 당시에는 실패한 것으로 보였을지 몰라도, 3.1 운동이 있고 한 달 후에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임시정부 수립도 3.1 운동에 큰 영향을 받았어요.
임시정부 수립 시에 사용한 국호가 ‘대한민국(大韓民國)’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대한제국(大韓帝國)이 멸망했기 때문에 대한제국을 부흥시켜야 하잖아요. 그런데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새로 정했어요. 여기에서 우리 고유의 민주주의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민주주의라고 하면 서양만 생각하는데, 자생한 우리 고유의 민주주의가 있었던 거예요. 그게 바로 최제우 선생이 1860년에 깨달음을 얻고 말한 후천개벽(後天開闢)입니다. 후천개벽이라는 게 딴 게 아닙니다. 핵심 내용은 선천(先天)의 시대가 5천 년간 왕(王)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시대였다면, 후천(後天)의 시대는 민(民)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시대라는 거예요. 이런 내용을 절대 왕정의 시대에 선언을 했으니 당시에 임금이 듣기에는 반역의 논리였습니다. ‘혹세무민(惑世誣民)한다’라고 치부될 수밖에 없었어요.
최제우 선생은 경주에서 깨달음을 얻고 포교를 시작했지만 이상한 소리를 한다며 감옥에 잡혀갔습니다. 감옥에서 풀려나자마자 전라도로 피신해 혜월 화상이 있는 남원 교룡산성 덕밀암 은적당에서 1년간 숨어 지냈습니다. 거기에 숨어 살면서 혜월 화상과 최제우 선생은 많은 교류를 하면서 오늘날 천도교의 중요한 글을 썼어요. 최제우 선생의 뒤를 이어 2대 교주가 된 분이 최시형 선생이고, 최시형 선생의 제자가 손병희 선생입니다. 또 혜월 화상의 제자가 용성조사님이십니다. 손병희 선생과 용성조사님의 나이도 한두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어요. 이런 인연으로 두 분이 3.1 운동의 실질적인 막후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겁니다.
용성조사님의 활동 뒤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어요. 불교 쇄신뿐 아니라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을 가졌던 겁니다. 그래서 3.1 운동 때도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는 독립을 외친 것은 물론이고, 우리가 세우고자 하는 나라는 새로운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그 방향성을 제시했던 겁니다. 그게 바로 민(民)이 주인이 되는 나라예요. 그래서 ‘대한제국’이 ‘대한민국’으로 바뀐 겁니다. 그런 보이지 않는 역할을 용성조사님이 하셨던 거예요. 불교는 항상 드러내지 않고 뒤에서 활동을 하듯이 용성조사님도 그런 역할을 하셨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불교인들이 좀 자부심을 느꼈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불교를 새로이 하자는 운동뿐 아니라 사회에서도 앞서가는 운동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어차피 한 생을 살다가 가게 되는데 먹고 입고 자고 명예를 얻는 것만 바라보며 우리가 산다면 세속 생활과 무슨 차이가 있겠어요? 설령 지금 이 시대에서는 빛을 발하지 못하더라도 다음 시대에는 새로운 세상의 기초가 될 수 있는 일을 우리가 해나가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뭐든지 성질이 급해요. 대통령도 임기 5년 안에 모든 걸 다 해치우려 들고, 그다음에 새로 대통령이 된 사람은 전대의 것을 다 뒤집고 또 자기 것을 새로 합니다. 작은 단체의 회장으로 선출이 되어도 아마 그럴 거예요. 이처럼 자신의 임기 내에 모든 것을 다 하려는 태도는 너무 조급한 태도입니다.
우리는 멀리 봐야 합니다. 10년을 보고, 30년을 보고, 100년을 보고 꿋꿋이 그 길로 가야 해요. 우리가 가야 할 길에 내가 하나의 주춧돌을 놓는 것이고, 또는 하나의 계단을 만드는 것이고, 다음 사람이 또 그다음을 해 나갈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이런 관점을 가지면 우리가 좀 더 여유 있고 좀 더 탄탄하게 기초를 다져나갈 수가 있습니다.
새로운 것을 만들었는데 다음 사람이 대표가 되면 그것이 없어지는 일을 반복하는 것보다는 어떤 일을 지속적으로 해나가는 게 조금 더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변화를 하려면 좀 꾸준히 해야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마지막 유훈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잖아요.
‘조급하지도 말고, 게으르지도 말라. 꾸준히 정진하라.’
여러분들이 1년간 꾸준히 결사를 해오셨으니 앞으로도 2년간 더 꾸준히 해나가시길 바라며 축하와 응원을 드립니다. 좋은 점을 계속 계승해 간다면 비록 지금은 작은 물결이지만 시간이 흐르면 큰 물결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축하와 응원의 말과 더불어 스님은 정토회를 시작하게 된 계기와 온라인 정토회로 전환하는 과정에 대해서도 자세히 들려주었습니다. 이어서 즉문즉설을 시작했습니다. 비구니 스님들은 즉석에서 손을 들고 다양한 질문을 했습니다.
두 시간이 넘도록 대화를 나눈 후 법문을 마쳤습니다.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와 사회문제, 그리고 현재 승가의 문제를 정확하게 통찰하시고 거기에 맞는 활동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계신 스님의 모습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강연을 마치고 비구니 스님들의 요청으로 이야기를 더 나누었습니다.
“스님, 앞으로 이 나라가 어떻게 될까요?”
“잘 될 거예요. 대한민국을 국민이 지켰지 대통령이 지켰습니까? 국민들이 지금까지 일하고 싸워서 여기까지 왔잖아요.”
“앞으로 에너지와 곡물이 큰 문제가 될 거라는데 스님은 어떻게 보고 계신가요?”
“우크라이나가 전쟁으로 벌써 식량 문제가 닥치고 있죠. 우크라이나는 밀 생산을 많이 해왔잖아요. 구소련 시대에도 밀 생산량이 소련 내의 35%였으니까요. 아프리카나 중동에서는 우크라이나 밀을 주로 수입했기 때문에 벌써 식량 위기를 예측하고 있어요. 지금 전쟁 때문에 우크라이나에 있는 밀을 수출 하지 못하는 것만 문제가 아니라 올해 농사를 못 지으면 앞으로 더 큰 문제가 되겠죠.
그래서 저희는 미리 시골로 가서 농사짓고 있어요. 미래에는 농업에 또 비전이 있습니다. 식량의 양도 문제지만 환경오염으로 먹거리를 안전하게 공급할 수 있는 대책을 세우는 것도 중요해요. 앞으로 20년, 30년이 지나고 기후변화가 일어나면 식량 위기가 어떻게 찾아올지 모르거든요.”
“20년, 30년이 지났을 때는 우리는 다 죽었을 나이인데요.”
“선조들이 열심히 독립운동해서 우리가 살 듯이 우리도 후배를 위해서 뭘 좀 해놓고 가야죠.(웃음) 열심히 수행하시고 또 불러주세요. 나중에 또 오겠습니다.”
“스님은 정말 세간해 같으십니다. 고맙습니다.”
4시가 넘어 전국비구니회관을 나와 다시 서울 정토회관으로 돌아왔습니다.
스님을 기다리는 손님들과 미팅을 하고 저녁 7시 30분부터는 저녁반 회원들을 위한 수행법회 생방송을 시작했습니다. 저녁에도 즉석에서 손들기 버튼을 누르고 누구나 자유롭게 스님에게 질문할 수 있었습니다.
다양한 질문들이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 한 분은 말이 많거나 목소리가 큰 상대를 만나면 마음이 불편하다며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지 질문했습니다.
“저는 목소리가 크고 말이 많은 상대를 만나면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예를 들면 마음 나누기를 유독 길게 하는 도반님이나, 묻지도 않은 사생활 얘기 등을 장시간 하는 직장 동료를 만나면, 분별심이 올라오고, 이야기를 다 들어주다 보면 기운이 빠집니다. 이럴 때 관점을 어떻게 잡아야 분별이 나지 않을지 여쭙고 싶습니다.”
“제 얘기를 조금 해드릴게요. 저희 스승님이신 불심도문 큰스님은 진짜 말씀을 많이 하세요. 한 번 만나면 세 시간은 기본입니다. 지금 나이가 88세이신데도 며칠 전에 찾아뵙고 발우공양을 같이 했는데, 밥을 먹으면서 세 시간 동안 말씀을 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지금도 저러시는데 50년 전에는 어떠셨겠느냐’ 하며 웃었습니다. (웃음)
제가 큰스님을 뵌 지가 올해로 53년째입니다. 53년 전에 처음 뵈었을 때는 초저녁에 만났을 경우 얘기가 12시 전에 끝난 적이 거의 없고, 길어지면 새벽 3시에 끝날 때도 있었어요. 서너 시간씩 얘기하다가 ‘이제 가야 합니다’라고 하면 ‘그래’라고 하세요. 그래서 절을 하고 일어났다가 방 안에서 선 채로 한두 시간씩 얘기를 더 해요. 그러다가 또 ‘가야 합니다’라고 말씀드리고 문 밖에 나와 신발까지 다 신었는데 거기에서 또 두 시간을 더 얘기하신 적도 있어요. 이럴 정도로 하나라도 더 가르쳐 주려고 하셨습니다. (웃음)
어릴 때는 학교 공부하느라 바빠서 큰스님의 깊은 뜻을 잘 몰랐어요. 그래서 친구들끼리 ‘큰스님한테 잡히면 안 된다. 한 번 붙들리면 오늘 하루 종 친다’ 이러면서 큰스님을 좀 피해 다녔습니다. 그런데 시험 기간 중 어느 날, 저녁 예불을 하고 나오는데 큰스님께서 ‘아무개야, 이리 와라’ 하고 부르시는 거예요. 그래서 덜컥 겁이 났죠.
‘내일 시험을 쳐야 하는데, 오늘 큰스님한테 잡히면 또 밤늦게까지 얘기를 들어야 할 테니 큰일이다.’
그래서 제가 선수를 쳤습니다.
‘오늘 제가 좀 바쁩니다.’
이렇게 말씀드렸더니 큰스님께서 물으셨어요.
‘그래? 너 어디서 왔어?’
‘학교에서요.’
‘학교에서 오기 전에는?’
‘집에서요.’
이렇게 자꾸 물으시는 거예요. 그때는 ‘왜 이런 쓸데없는 말씀을 하시나?’라는 생각만 들었죠. 그렇게 질문이 계속 이어지다가 결국은 태어날 때까지 거슬러 올라갔어요.
‘어머니 배 속에서 나왔죠.’
‘어머니 배 속에서 나오기 전에는?’
‘몰라요. 제가 그걸 어떻게 압니까?’
그랬더니 스님께서 이번에는 이렇게 물으시는 거예요.
‘너 어디 갈 거니?’
‘도서관에요.’
‘도서관에 갔다가는?’
‘집에요.’
‘집에 갔다가는?’
‘내일 시험이 있으니까 내일 아침에 학교 가야죠.’
이렇게 또 자꾸 물어서 결국은 죽을 때까지 갔어요.
‘죽죠.’
‘죽은 뒤에는?’
‘몰라요.’
그랬더니 스님께서 벽력 같은 고함을 치시는 거예요.
‘야, 이놈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놈이 바쁘기는 왜 바빠!’
방금 전까지만 해도 ‘쓸데없는 것을 물으신다’ 이렇게 생각했는데, 그때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너 어디서 왔니?’ 하니까 ‘몰라요’라고 했고, ‘너 어디로 가니?’ 하니까 ‘몰라요’라고 했어요. 그런데 제가 바쁘다고 했잖아요. 그러니 이 일은 제가 바쁘다고 먼저 말씀드리는 바람에 생긴 일이에요.
‘저 바빠요.’
‘너 어디서 왔니?’
‘몰라요.’
‘너 어디 가니?’
‘몰라요.’
‘그런데 왜 바쁘니?’
이렇게 된 거예요. 이 말씀은 저에게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것처럼 당장은 쓸데없는 말같이 들려도 지난 뒤에 돌아보면 아주 큰 깨우침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상대의 말을 짧은 시간 내에 내 생각대로 듣고 ‘쓸데없는 말을 한다’, ‘말이 길다’ 이렇게 너무 단정적으로 듣지 마세요.
‘지금 내 생각엔 그렇지만 이분 입장에서는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있겠구나’
이렇게 상대를 이해하는 관점에서 들어보면 좋겠어요. 그 사람은 나름대로 어떤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말하는 겁니다. 내가 원하지 않으니까 ‘말이 길다’, ‘말이 많다’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건 내 입장에서 그런 거예요. 부모는 자식에게 하나라도 더 해주려고 하지만, 자식의 입장에서는 ‘부모가 간섭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상대가 큰소리를 치거나 말이 길 때는 그 사람이 평소에 목청이 높거나, 본인의 가슴이 답답해서 뭔가 내놓고 싶거나, 그 사람 나름대로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요. 그러니 ‘무슨 말을 하고자 저러실까’ 이렇게 좀 귀담아듣는 자세를 갖는 게 좋습니다. 혹시 그 속에서 저처럼 큰 깨달음을 얻는 기회를 만날지 누가 압니까?
그리고 말이 좀 길다 싶으면 질문자도 저처럼 바쁘다고 한번 얘기해 보세요. (웃음)
‘말이 조금 기네요. 좋은 말씀이지만 제가 사정이 있어 장시간 듣기가 좀 힘듭니다.’
말이 길어서 나쁘다는 게 아니라 ‘장시간 듣기에는 제가 조금 힘이 듭니다’ 이렇게 자기의 입장을 얘기하는 거예요. ‘네가 틀렸다’가 아니라 ‘내 상태가 이렇게 어렵다’ 하는 것을 솔직하게 한번 표현해보는 것도 괜찮습니다. 속으로 ‘말이 길다’, ‘목청이 높다’ 이렇게 불만을 품은 상태에서 억지로 듣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아요. 기쁜 마음으로 들어주든지, 아니면 내 상태를 솔직하게 드러내서 ‘제가 좀 듣기가 힘듭니다’ 이렇게 표현을 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네가 말이 많은 게 아니라 내가 좀 힘들다’ 이런 뜻을 표현해 보라는 거예요.
다음으로는 자기 점검을 해볼 필요가 있어요. 혹시라도 질문자가 어렸을 때 엄마가 말이 많았거나 목소리가 컸거나, 아빠가 말이 많았거나 목소리가 컸거나, 할아버지가 말이 많았거나 목소리가 컸거나, 선생님이 그랬거나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질문자가 심리적 상처를 입거나 저항을 느낀 경험이 있다면 지금의 반응은 트라우마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건 저 사람이 문제인 게 아니라 내가 가진 트라우마이구나’ 이렇게 자기를 아는 과정이 필요해요.
그런 상황이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좀 힘들게 느껴진다 싶으면 표현을 하면 됩니다. 불만으로 표현하지 말고 그냥 가볍게 표현해 보는 거예요.
‘마음 나누기는 조금 짧게 해 주면 좋겠습니다. 마음 나누기가 너무 기니까 집중도 안 되고. 제가 조금 불편합니다.’
이처럼 대화를 나누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마음 나누기를 하는 것 아니겠어요?”
“잘 알겠습니다. 그렇게 해보겠습니다. 대화 중 분별이 올라올 때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라는 말씀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말씀이 많았던 할머니와 목소리가 컸던 아빠를 싫어했던 제 마음도 점검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외에도 다양한 질문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대화를 마치고 나니 밤 9시가 훌쩍 넘었습니다.
생방송을 마치고 스님은 곧바로 차에 올라 봉화 수련원으로 향했습니다. 밤새 차를 달려 12시에 봉화 수련원에 도착했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봉화 수련원 뒷산에서 두릅을 딴 후 다시 두북 수련원으로 돌아와 저녁에는 정토불교대학 실천적 불교사상 6강을 생방송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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