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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두북 수련원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두북 수련원 주위를 비롯해 경주 시내 전체가 벚꽃으로 하얗게 물들었습니다.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친 후 오늘은 벚꽃 구경을 하러 나가 보았습니다.
“지금 벚꽃이 절정이에요. 차를 타고 경주 시내에 벚꽃 구경 좀 시켜줄게요.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스님.”
스님의 제안으로 두북 공동체 전체 대중이 꽃구경에 나섰습니다.
“창밖을 보세요. 길 양쪽에 벚꽃이 활짝 피었어요.”
먼저 불국사 앞에 가보았습니다. 경주에서 벚꽃으로 가장 유명한 곳입니다.
활짝 핀 벚꽃을 보고 행자님들 모두 탄성을 질렀습니다.
“우와!”
스님도 웃으며 말했습니다.
“꽃이 한 뭉치씩 꽉 달려 있죠? 저는 어렸을 때 시커먼 나무에서 하얀 꽃이 피는 게 정말 신기했어요.”
다시 차를 타고 보문단지를 지났습니다. 도로가 온통 벚꽃으로 가득했습니다.
김유신 장군 묘로 향하는 길인 흥무로에는 도로 폭이 좁아서 벚나무가 아치형을 하고 있어 더욱 장관이었습니다. 차에서 내려 다시 꽃구경을 했습니다.
스님은 벚나무 아래 가로수길을 걷다가 강변으로 내려갔습니다. 강변에서 위로 올려다보니 풍경이 더욱 멋있었습니다.
“벌써 꽃잎이 떨어지기 시작하네요.”
산들바람이 불자 꽃잎이 흩날렸습니다.
벚꽃 구경을 마치고 스님이 대중들에게 물었습니다.
“혹시 시간이 더 돼요? 오늘이 최제우 대신사가 깨달음을 얻은 날이에요. 그래서 최제우 대신사가 깨달음을 얻고 동학을 창시한 곳인 용담정을 참배하려고 하는데, 같이 갈래요?”
“네, 스님!”
벚나무 아래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후 다시 차를 타고 용담정에 도착했습니다. 용담정 앞에는 진달래가 활짝 피어서 오늘 이곳을 찾는 이들을 반겨주고 있었습니다.
용담정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스님은 최제우 대신사의 영정 앞에 절을 했습니다.
그리고 대신사의 뜻을 기리며 방명록에 글을 한 줄 남겼습니다.
“백성이 주인이 되는 후천개벽의 시대를 여시다. 사람이 한울님이시다.” - 2022년 4월 5일 법륜
스님은 참배를 마치고 나서 주위를 둘러본 후 최제우 대신사와 용담정에 대해 잠깐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최제우 대신사는 이곳에서 1860년 4월 5일에 한울님으로부터 무극대도를 받아 동학을 창시하셨어요. ‘사람이 한울님이다. 앞으로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후천개벽의 시대가 열린다’ 하는 깨달음을 얻고 대중 교화를 시작하신 곳이 바로 여기입니다. 1863년 12월 10일에 체포되실 때까지 가르침을 펴신 천도교 제일의 성지라고 할 수 있어요.”
임금이 나라의 주인인 절대왕정의 시대에 어떻게 100년 앞을 내다보고 백성이 나라의 주인인 시대를 내다봤을까요? 스님의 설명을 듣고 나니 이곳에 서린 정신이 더욱 뜻깊게 다가왔습니다.
용담정을 나와 다음은 최제우 대신사님이 묻혀 있는 묘소를 참배했습니다. 처음 가보는 곳이어서 길을 잘 몰라 길 없는 산길을 헤집고 올라 도착했습니다.
“저 위가 무덤이네요. 같이 참배하고 가겠습니다.”
천도교 신도들이 모여서 기념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먼발치서 참배를 하고 조용히 산을 내려왔습니다.
다음은 최제우 대신사가 태어난 생가를 찾아가 보았습니다. 문이 잠겨 있어서 안에 들어가 보지는 못하고 담 너머로 생가를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생가 앞에 세워진 유허비에 함께 참배를 한 후 다시 차에 올랐습니다. 마지막으로 삼릉길 앞 벚꽃을 차창 밖으로 구경하며 다시 두북 수련원으로 돌아왔습니다.
오후에는 정토불교대학 강의 준비와 여러 가지 업무들을 처리했습니다. 해가 지고 저녁 8시부터 정토불교대학 실천적 불교사상 제3강을 시작했습니다.
화상회의 방에 학생들이 모두 입장하자 스님도 방송실 카메라 앞에 자리했습니다. 스님은 지난 수업 시간에 배운 내용을 간단하게 언급하며 오늘 공부할 주제에 대해 소개했습니다.
“지난 수업 시간에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가?’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습니다. 그 결과 지금은 괴롭게 살고 있지만 앞으로는 괴로움 없이 살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어떻게 하면 괴로움 없이 살 수 있는가’ 하는 주제에 대해서 여러분과 조금 더 대화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안다고 할 때 도대체 안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어떤 과정을 거쳐서 알게 되는가 하는 문제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눈으로 보고 압니다. 둘째, 귀로 듣고 압니다. 셋째, 코로 냄새 맡고 압니다. 넷째, 혀로 맛을 보고 압니다. 다섯째, 손으로 만져보고 압니다. 여섯째, 생각을 해서 압니다. 이렇듯 우리는 뭔가를 안다고 할 때 우리 몸에 있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바깥 대상과 접촉을 해서 ‘보고 안다’, ‘듣고 안다’, ‘냄새 맡고 안다’, ‘맛보고 안다’, ‘감촉해서 안다’, ‘생각해서 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세계를 아는 방법이에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세계라는 것은 나를 떠나서 별도로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각자 개인으로 돌아가서 살펴보면 어떻습니까? 내가 알면 세계가 있는 것이고, 내가 모르면 세계가 없는 거예요. 내가 알든 모르든 세계는 있다고 생각할 수가 있는데, 개인에게 돌아와서 보면 내가 모르는 것은 이 세상에 없는 거예요. 내가 아는 것이 곧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아는 이 세계라는 것은 보고 알고, 듣고 알고, 냄새 맡고 알고, 맛보고 알고, 감촉해서 알고, 생각해서 아는 것입니다. 만약에 사람마다 다른 것을 보고, 다른 것을 듣고, 다른 냄새를 맡고, 다른 맛을 보고, 다른 것을 감촉하고, 다른 생각을 하게 되면 어떨까요? 그가 아는 세계는 내가 아는 세계와 다른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나의 세계와 너의 세계가 다른 거예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의 세계와 너의 세계가 같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다릅니다.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세계의 전부라는 착각을 나도 모르게 하고 있어요. 그래서 나와 다른 사람을 보았을 때 ‘틀렸다’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각자의 경험이 다르기 때문에 각자가 아는 세계도 달라요. 서로 다르다는 것만이 진실입니다. 피부색이 다르고, 눈 모양이 다르고, 귀 모양이 다르듯이, 사람들이 아는 것도 서로 다른 겁니다. 그리고 그 아는 것에 바탕을 둔 믿음이나 생각, 판단 역시 서로 다를 수밖에 없어요. 이 사실을 알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니까 갈등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와 다른 사람을 보고 ‘넌 틀렸다’, ‘넌 잘못 봤다’, ‘넌 잘못 안다’ 이렇게 주장하면 서로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어요.
여기서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서로 다르게 알고 있다는 건 이해가 되죠? 그런데 같은 환경에서 자랐는데도 서로 다른 경우가 있습니다. 심지어 같은 곳에서 같은 것을 봤는데도 느낌이 서로 다를 때가 있어요. 한 사람은 기분이 나쁘다고 하고, 한 사람은 기분이 좋다고 하고, 한 사람은 아름답다고 하고, 한 사람은 아름답지 않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똑같은 걸 봤는데 말이에요.
카메라의 경우 이 카메라로 찍든 저 카메라로 찍든 똑같은 형상과 소리가 저장이 됩니다. 그런데 사람은 같은 것을 보거나 들어도 우리의 과거 경험이 지금 내가 아는 데에 영향을 끼칩니다. 카메라처럼 그냥 바깥의 모양과 빛깔을 그대로 비춰주거나, 녹음기처럼 바깥에 있는 소리를 그대로 녹음하는 것이 아니에요. 사람에게는 과거의 경험이 개입을 해서 같은 것을 봐도 달리 보이고, 같은 소리를 들어도 달리 들립니다. 서로 다르게 들리는 이유는 사람이 카메라나 녹음기가 아니기 때문이에요.
사람에게는 과거의 경험이 현재에도 작용을 합니다. 이 과거의 경험을 ‘식(識)’이라고 합니다. 보통 ‘업식(業識)’이라고 말하고, 줄여서는 ‘식(識)’이라고 부릅니다. 사람에게는 항상 ‘식(識)’이 작용하기 때문에 달리 보이고 달리 들리는 거예요..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목욕탕에 갔습니다. 아버지가 먼저 물에 들어가서 ‘시원하다’ 이렇게 말하는데, 아들이 따라 들어갔다가 ‘앗! 뜨거워’ 이렇게 말합니다. 왜 이렇게 느낌이 다를까요? 서로 경험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는 것이 곧 세계의 전부입니다. 내가 모르는 세계는 없는 세계이고, 내가 아는 세계만이 나에게 있는 세계입니다. 그러면 내가 아는 것과 세계의 실제 모습은 같은 걸까요? 아닙니다. 세계의 실제 모습이 어떤가 하는 것은 나도 잘 모르고 너도 잘 몰라요. 내가 아는 것이 나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는 것이 곧 일체입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 들어보셨죠? 일체(一切)가 다 마음의 작용이라는 표현도 결국 내가 아는 것이 세계의 전부라는 이 사실에서 유래한 겁니다. 예를 들어 신이 있다고 믿는 사람한테는 신이 있는 거예요. 객관적으로 있느냐 없느냐 하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을뿐더러 있는지 없는지 알 수도 없습니다. 각자가 아는 것이 각자의 세계인 겁니다. 그런데 각자가 자란 환경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아는 것도 서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서로 다름을 인정해야 해요. 서로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늘 갈등이 생기는 겁니다.
오늘 이렇게 법문을 듣고도 잠시 후 소감 나누기를 하면 서로 느낀 것이 다릅니다. 이것은 왜 그럴까요? 우리가 어떤 것을 보고 알 때 거기에 색안경 같은 것을 끼고 있기 때문에 약간 변형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걸 식(識)이라고 합니다. 식(識)은 눈으로 볼 때도 작용하고, 귀로 들을 때도 작용하고, 코로 냄새 맡을 때도 작용하고, 혀로 맛볼 때도 작용하고, 손으로 감촉할 때도 작용하고, 머리로 생각할 때도 작용합니다.
부인이 만든 음식을 남편이 맛보고 좀 싱겁다고 느꼈어요. 그때 남편이 ‘내 입맛에는 좀 싱거운데’ 이렇게 표현하면 좋잖아요. 그런데 ‘너는 간도 못 맞추나?’ 이렇게 말해요. 그러면 부인이 ‘음식 간이 어떤데?’ 하고 음식을 떠먹어 보고 ‘간이 맞는데’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남편이 ‘너는 혀가 잘못된 것 아니야?’ 합니다. 이렇게 갈등이 생기는 이유는 서로 다름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똑같은 음식을 먹었는데도 불구하고, 과거에 조금 싱겁게 음식을 먹는 집에서 자란 사람은 간이 딱 맞다고 하고, 과거에 조금 짜게 음식을 먹는 집에서 자란 사람은 싱겁다고 합니다. 이럴 때 진실은 무엇일까요? 입맛이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넌 너무 싱겁게 먹는다’, ‘넌 너무 짜게 먹는다’ 이렇게 자기를 기준으로 해서 상대가 문제가 있는 것처럼 얘기합니다.
이런 일은 모든 경우에서 나타납니다. 냄새를 예로 들어 볼게요. 청국장 끓일 때 한국인은 냄새를 맡고 ‘구수하다’ 하면서 침이 꼴깍 넘어갑니다. 그런데 외국인은 ‘구역질이 난다’라고 합니다. 스위스에 사는 사람들은 치즈 만드는 냄새를 맡고 ‘아주 구수하다’ 하는데, 한국 사람이 직접 그곳에 가서 냄새를 맡으면 구역질이 난다고 해요. 이렇게 냄새에 대한 느낌도 서로 다른 이유 역시 자신의 업식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객관적으로 냄새에는 좋고 나쁨이 없어요. 그냥 냄새만 있는 겁니다. 그런데도 그 냄새가 나에게는 좋게 느껴지고, 상대에게는 나쁘게 느껴지는 이유는 다 자신의 업식 때문이에요.
불교에서는 우리 몸에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라고 하고, 감각기관이 인식할 수 있는 바깥 경계를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인식을 이렇게 열두 가지로 표현할 수 있다고 해서 이것을 ‘12처설’이라고 부릅니다. ‘일체가 무엇이냐?’ 하고 물으면 한마디로 ‘12처이다’ 하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사람마다 대상을 인식하는 차이인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까지 설명한 것이 ‘18계설’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교리와 학문 체계를 안 외워도 됩니다. 오늘 여러분이 확실히 기억해야 할 것은 바로 이겁니다.
‘세계란 각자가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각자 알고 있는 게 서로 다르기 때문에 각자의 세계 역시 서로 다르다. 그러니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자.’
누가 어떤 얘기를 하면 이렇게 말해보면 어떨까요?
‘당신은 그렇게 알고 있군요.’
‘당신은 그렇게 믿고 있군요.’
‘당신은 그렇게 느끼고 있군요.’
‘내 눈에는 그 물건이 빨갛게 보이네요.’
‘제가 보기에는 안 좋게 보이네요.’
이렇게 ‘그거 안 좋아’ 하고 단정을 짓는 게 아니라 ‘내가 보기에는’, ‘내가 느끼기에는’, ‘내가 알기에는’ 이렇게 얘기해보는 습관을 가져보면 좋을 것 같아요. 지금 당장은 안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각자가 알고 있는 세계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나와 다른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세계가 옳다고 하는 데서 갈등은 시작됩니다. 그로 인해서 화, 스트레스, 미움, 원망, 이런 많은 괴로움들이 일어나게 되는 거예요.
제가 오늘 건강검진을 받으러 갔다고 합시다. 검진이 끝나고 결과가 나왔는데 암이라고 해요. 그러면 기분이 우울하고 불안하죠. 그런데 암이 오늘 진찰할 때 생긴 거예요, 원래 있었던 거예요? 원래 있었잖아요. 원래 암이 있었는데 어제까지 웃으면서 잘 살다가 암이 내 몸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오늘 갑자기 우울한 거잖아요. 왜 그럴까요? 암이기 때문에 우울할까요? 암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우울할까요? 암은 오늘 생긴 게 아니라 어쩌면 1년 전부터 생겼거나 6개월 전부터 생겼을 텐데 말이에요. 어제 검사할 때나 오늘 결과가 나올 때나 암세포의 크기는 별 차이가 없을 텐데 왜 어제는 웃다가 오늘은 울까요?
어제는 몰랐고, 오늘은 알아서 그렇다고 대답할 겁니다. 어제는 몰랐으니까 암이 없었고, 오늘은 알게 되니까 암이 있게 되었죠. 그것처럼 모르면 없는 것이고, 알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암이 있었는 줄 모르는 게 좋은 것일까요? 아는 게 낫잖아요. 아는 게 더 낫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공부하는 거잖아요. 병원에서 일어난 일이라곤 원래 있던 병을 그동안 모르고 있다가 새로 알게 된 것 밖에 없습니다. 오늘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오늘 일어난 일은 모르는 것을 알았다는 겁니다. 모르는 것을 알았다는 것은 좋은 일이잖아요. 좋은 일이 일어났는데 왜 괴로울까요? 박수를 딱 치면서 ‘선생님 드디어 발견하셨네요. 감사합니다!’ 하고 말해야죠.
이렇듯 객관적 사실에 근거해서 우리의 기쁨과 괴로움이 일어나는 게 아니에요. 만약 의사가 ‘조금 더 자세하게 검사를 좀 해봐야겠습니다’ 하고 얘기해서 내내 우울했다고 합시다. 며칠 후에 연락이 왔는데 ‘악성종양이긴 한데 암은 아닙니다’ 하면 또 기분이 좋아져요. 이런 모습을 보면 우리는 진실과는 거리가 먼 이런 것들에 놀아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그렇게 인식했을 뿐인데 객관적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진짜 사실일까요? 이것을 불교용어로 ‘상을 짓는다’라고 합니다. 주관을 객관이라고 착각하는 거예요. 객관이라고 생각하니까 고집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집착’이라고 해요.
옛날에는 지동설을 주장하는 학자를 죽였잖아요. 자신들의 경험을 종합해 봤을 때 태양이 지구를 돌도록 하느님이 만들었다고 알고 있었는데 그걸 반대하니까 나쁜 놈이라고 치부한 겁니다.
모든 것에는 나쁘다고 할 근거가 없고 오직 ‘무지(無知)’만 있을 뿐입니다. 모든 괴로움의 근본 원인은 ‘무지’라고 하는 오류에서 비롯된 거예요.”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 시간에는 ‘진실은 무엇인가’에 대해 배워보기로 하고 생방송을 마쳤습니다. 방송실을 나오니 하늘에는 초승달이 떠 있었습니다.
내일은 하루 종일 손님들을 모시고 천룡사를 안내하고 경주 남산을 함께 산행한 후 저녁에는 수행법회 생방송을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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