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2.1.22. 천일결사 기도 생방송, 경전대학 즉문즉설, 행복학교 특강
“진급에서 밀리고 나니 속상한 마음이 들어요, 어떡하죠?”

안녕하세요. 두북 수련원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오늘은 하루 종일 온라인 생방송이 연이어 진행되는 날입니다.

천일결사 기도 생방송

먼저 새벽 4시 30분에 천일결사 기도 생방송을 하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예불, 삼귀의, 수행문, 참회, 108배, 명상을 한 후 다 함께 경전 독송을 했습니다. 이번 천일결사에서 함께 읽기로 한 경전은 빠알리어로 전해지는 초기불교 경전입니다. 부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설한 짧은 산문이나 시구를 모은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것을
아라한 세존께서 설하셨다고 나는 들었다.

“비구들이여!
세 가지 구하는 마음이 있다.
세 가지란 어떤 것인가?
욕망의 즐거움을 구하는 마음,
생(生)을 구하는 마음,
청정행에 따른 명성을 구하는 마음이다.
비구들이여!
참으로 이것이 세 가지 마음이다.”

사홍서원으로 천일결사 기도를 마치고 오늘 읽은 경전에 대한 스님의 법문이 이어졌습니다. 그중 경전 문구 중 ‘청정행에 따른 명성을 구하는 마음’에 대해서는 이와 같이 해석을 해주었습니다.

“집을 떠나서 욕망을 절제하며 출가 생활을 하는 수행자들도 다른 사람이 자신을 좀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내가 어려운 생활을 해나가고 있고, 내가 청정하게 수행하고 있으니 그걸 다른 사람이 좀 알아주기를 원하는 마음이에요. 이 마음이 바로 ‘명성을 구하는 마음’입니다. 어쩌면 선행을 하는 사람, 청정하게 수행을 하는 사람, 헌신적인 사람일수록 이 명성을 구하는 마음을 내려놓기가 더 어렵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를 희생하고 욕망을 제어하는 건 잘 해내는데, 오히려 자기가 이렇게 하고 있다는 걸 알아달라는 마음을 없애기가 더 어렵습니다.

남이 나를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 알아차리고 내려놓기

여러분도 일상에서 ‘내가 당신을 좋아하는 걸 좀 알아달라’, ‘내가 당신을 위해서 헌신하는 걸 좀 알아달라’ 이런 마음 때문에 상대방에게 서운함을 느낄 때가 많죠. 많은 사람들이 ‘당신이 알아만 주면 내가 보시도 할 수 있고, 당신이 알아만 주면 내가 사랑도 할 수 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주위 사람들은 대부분 그걸 알아주지 않습니다. 부모도 알아주지 않고, 남편도 알아주지 않고, 아내도 알아주지 않고, 자식도 알아주지 않고, 심지어 같이 수행하는 도반들도 알아주지 않을 때가 많아요.

출가해서 수행공동체에서 같이 생활하는 분들을 보면, 아직 욕망의 즐거움을 끊지 못해서 그 욕구를 극복하는 수행이 필요한 사람도 있고, 다음 생에는 좋은 일이 생길까 하고 기대하는 마음을 극복하는 수행이 필요한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과제는 ‘나를 좀 알아달라’ 하는 마음이에요.

‘내가 정토회에서 봉사를 얼마나 많이 하고 있는데 그걸 왜 알아주지 않느냐’
‘내가 보시를 얼마나 많이 하고 있는데 그걸 왜 알아주지 않느냐’
‘내가 얼마나 많은 기여를 했는데 그걸 왜 알아주지 않느냐’

이런 마음이 모두 명성을 구하는 마음입니다. 명성을 구하는 마음이 꼭 사회에서 유명해지는 욕망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누가 나를 좀 알아주면 좋겠다는 마음도 명성을 구하는 마음입니다.

출가해서 살아가는 수행자들도 아직 닦아야 할 다른 과제들이 많이 있지만 그중 누가 좀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이 가장 큰 과제입니다. 누가 알아만 준다면 죽는 것 빼곤 다 하겠다는 마음을 낼 정도로 헌신적이에요. 그런데 그렇게 헌신적으로 활동을 하는데도 알아주거나 인정해주지 않으면 금방 섭섭해하면서 의욕을 점차 잃어갑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알아주는 표현하기

수행자는 우선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을 알아차려서 거기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동시에 이 마음이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생기는 마음이라는 점도 알아서 다른 사람을 알아주는 표현을 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나는 내 마음을 알아차려서 섭섭함, 원망, 실망의 근원이 되는 이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을 내려놓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길옆에 난 한 포기 풀과 같이 살아가는 거예요. 다른 사람이 나를 신경 쓰고 안 쓰고 와 관계없이 그저 내가 알아서 피고 지는 거예요.

이렇게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을 내려놓는 게 우선입니다. 동시에 이것이 중생심이기도 하니까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알아주는 태도와 표현이 필요합니다. 누가 좀 알아줬으면 하는 내 마음을 보면서 ‘다른 사람도 그런 마음이 들겠구나’하고 헤아리는 겁니다. 대신 내가 너를 알아주니까 너도 나를 알아달라고 요구하는 자세를 버리지 않으면 열반과 해탈에 이르기가 어렵습니다. 나는 알아달라는 마음을 알아차려서 그 마음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알아달라는 그 마음을 이해해서 알아주는 표현을 할 때 나도 자유로워지고 타인과의 관계도 좋아집니다.”

생방송을 마친 후 두북 공동체 대중들과 발우공양을 함께 했습니다.

“계공다소 양피래처 촌기덕행 전결응공...”
(計功多少 量彼來處 村己德行 全缺應供.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가. 덕행이 부족하여 받기가 부끄럽네.)

식사를 마치고 스님은 이번 주에 해야 할 농사일에 대해 행자님들과 의논을 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경전대학 즉문즉설

오전 10시부터는 정토경전대학 학생들을 위한 즉문즉설 강연을 시작했습니다. 정토경전대학 학생들은 얼마 전에 반야심경 수업을 종강하였습니다. 국내외에서 1천 여 명이 생방송에 접속한 가운데 많은 학생들이 수업 중 궁금했던 내용에 대해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다섯 명이 질문자로 선정되어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중 한 명은 반야심경 구절 중 ‘불생불멸’과 ‘죽음’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죽음을 생각하면 두려운 마음이 들어요, 어떡하죠?

“저는 두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첫째, 반야심경 수업에서 ‘모든 법이 공(空)한 도리에서는 생(生)도 아니고 멸(滅)도 아니다’라고 하셨는데요. 사람은 태어나서 죽기 마련인 걸 떠올리면 ‘생도 아니고 멸도 아니다’는 구절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구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둘째, 생이 있으면 멸이 있듯이 태어났으니 죽는 것은 당연하지만, 죽음을 경험하지 못하기에 막연한 두려움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죽으면 슬프고, 나의 죽음에 대해 생각해도 두려움을 느낍니다. 죽음에 대한 관점을 잡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죽은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할까요, 죽지 않은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할까요?”

“죽지 않은 사람이요.”

“죽지 않은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건 죽음 때문에 두려운 걸까요, 죽음에 대한 생각 때문에 두려운 걸까요?”

“죽음에 대한 생각 때문에 두려워합니다.”

“죽음에 대한 ‘생각’에서 두려움이 생겨나는 거예요. 그 두려움은 사실 죽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니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으면 두려움이 생기지 않습니다.

첫 번째 질문인 ‘생도 아니고 멸도 아니다’라는 구절에 대해서는 파도가 치는 바다를 떠올려보세요. 바다를 보면 파도가 일어나고 사라지고를 반복합니다. 파도를 하나씩 관찰을 해보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게 맞습니다. 이처럼 ‘파도가 생겨나고 사라진다’라고 말을 해도 되지만, 바다 전체를 보면 물이 출렁거린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바다 전체의 관점에서는 다만 물이 출렁거릴 뿐 새롭게 생겨나는 것도 없고 사라지는 것도 없습니다. 좁은 관점에서 파도를 하나씩 관찰을 할 때는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으로 보이지만, 넓게 전체를 보면 생겨난다고 할 것도 없고 사라진다고 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생겨났다’, ‘사라졌다’고 말하는 건 표현에 불과해요.

지구 전체를 보면 풀이 나고 죽고, 나무가 나고 죽고,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게 마치 바다 전체에서 파도가 일렁이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넓은 관점에서 보면 다만 출렁거릴 뿐 태어났다, 죽었다고 할 게 없습니다. 따라서 본질의 차원, 공(空)의 차원, 위에서 넓게 내려다보는 차원에서는 생긴다고 할 것도 없고 사라진다고 할 것도 없어요. 그렇다고 아무것도 생겨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좁은 관점에서 보면 개체가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넓게 보면 사실 생겨난다고 할 것도 없고 사라진다고 할 것도 없는 도리입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은 안 생겨나고 안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생겨났다, 사라졌다고 말은 하지만 넓게 보면 굳이 생겨난다고 말할 것도 없고 사라진다고 말할 것도 없다는 의미입니다.

학교를 다닐 때는 입학과 졸업이 있습니다. 한 과정을 놓고 보면 입학과 졸업을 하지만,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동시에 중학교에 입학하고, 또 고등학교에 입학을 했다는 건 얼마 전에 중학교를 졸업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크게 보면 이 학교에 다니다가 저 학교에 가고, 또 그 학교에서 다른 학교로 가는 것이지, 사실 입학과 졸업이라고 할 것이 없습니다. 그저 일상적으로 한 과정에 들어갈 때 입학이라고 말하고, 한 과정이 끝날 때 졸업이라고 말할 뿐이에요. 이건 입학을 안 한다, 졸업을 안 한다는 말이 아니라 한 과정을 시작하고 마칠 때 입학과 졸업이라고 이름을 붙이긴 하지만, 크게 보면 이 학교에서 저 학교로 옮기는 것일 뿐 입학이라고 할 것도 없고 졸업이라고 할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이 방에 갔다가 저 방에 갔다가 할 때, 방 하나만 놓고 보면 사람 수가 늘어났다가 줄어들었다가 하지만 집 전체를 보면 사람 수에 변화가 없습니다. 집 안에서 이 방에 갔다가 저 방에 갔다가 한 거예요. 그러니 좁게 보는가, 넓게 보는가에 따라 표현이 달라지고, 현상으로 보느냐 본질적으로 보느냐에 따라 표현이 달라집니다. 현상에서 보면 생멸(生滅)이라고 말하지만, 본질에서 보면 생이라고 할 것도 없고 멸이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경전에서 불생불멸이라는 구절 앞에는 ‘시제법공상(是諸法空相)’, 즉 ‘공(空)의 관점에서는’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습니다.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이라는 말은 ‘모든 법이 공하다는 관점에서 보면 생하다고 할 것도 없고 멸하다고 할 것도 없고, 깨끗하다고 할 것도 없고 더럽다고 할 것도 없고, 늘었다고 할 것도 없고 줄었다고 할 것도 없다’라고 표현한 겁니다.

이렇게 공(空)의 차원이 아니라 현상의 차원, 색(色)의 차원에서 보면 생하고 멸하는 게 있습니다. 현실에서는 간다, 온다고도 표현을 하지만 본질의 차원에서 보면 간다고 할 것도 없고 온다고 할 것도 없습니다. 부처의 관점에서 보면 간다고 할 것도 없고 온다고 할 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여래(如來)’ 또는 ‘타타가타(tatha-gata)’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간다, 온다고 할 게 없다’는 뜻입니다.

집에서 가족이 화투를 치다가 형이 동생의 돈을 따면 형과 동생은 서로 누가 돈을 잃고 땄는지를 따지지만 부모의 입장에서는 그 돈이 그 돈입니다. 부모는 집 전체의 입장에서 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어리니까 자기 호주머니에 있는 돈만 봐요. 자기 호주머니만 쳐다보면 따기도 하고 잃기도 하지만, 집안 전체에서 보면 딴 것도 없고 잃은 것도 없습니다. 여기서 ‘공(空)의 관점’은 부모의 입장에서 본다는 말입니다. 아이의 입장에서는 분명히 돈을 잃었고 형이 돈을 땄지만, 부모의 입장에서는 늘어난 것도 없고 줄어든 것도 없습니다.

이처럼 넓은 시선에서 보면 괴로울 일이 없습니다.”

“네, 이해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이해하는데도 현실에서 어떤 문제에 부딪히면 적용이 잘 안 됩니다. 왜냐하면 습관적으로 자꾸 좁은 범위로 바라봐지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좁게 봐 온 습관이 있기 때문에 자꾸 좁게 보는 거예요. 이런 도리를 배울 때는 알 것 같다가도 갑자기 일이 닥치면 자기도 모르게 시야가 탁 좁아집니다. 급할 때는 무의식적으로 늘 지금까지 봐온 관점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법문을 들을 때는 진정된 마음으로 넓은 눈으로 바라보다가도 현실에 부딪히면 탁 좁아져서 감정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법문을 듣고 난 다음에 반드시 연습이 필요합니다. 현실 속에서도 자꾸 본질을 보고 넓게 보는 연습을 꾸준히 해나가야 합니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 어떤 분의 수행담을 들으면 잔잔한 감동과 울림을 받지만, 어떤 분의 수행담에는 전혀 감흥이 없어요. 마음의 감동도 공이라고 생각하니 내 좌표를 잃어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 생깁니다.
  • 사사무애법계를 설명하시면서 구제할 중생이 없다고 하셨는데, 사홍서원에서는 이 땅에 고통받는 중생이 한 사람도 없는 정토세계를 이루겠다고 발원합니다. 둘 중에 어느 게 맞는지 헷갈립니다
  • 짜증과 화를 관찰하는 일상 수행 과제를 하며 ‘내가 옳다’ 하는 생각을 내려놓으니 상대가 이해되고 화가 사라짐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상을 살려면 다시 기준을 세워 선택을 해야 합니다. 어떤 기준으로 선택을 해야 괴로움을 줄일 수 있을까요?
  • 마음이 생각, 감정, 의식, 무의식과도 다르다면 부처님께서는 마음을 어떻게 정의하고 설명하셨는지 궁금합니다.
  •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세상을 보고 집착을 내려놓았으면, 더 이상 산꼭대기에 집착을 하면 안 되고 이제는 내려와서 사는 것이라고 하셨는데요. 무슨 의미인가요?

대화를 마치고 나서 스님은 질문자들에게 한 줄 소감을 물어본 후 12시가 넘어서 생방송을 마쳤습니다.

행복학교 특강

점심식사를 한 후 오후 2시부터는 행복학교 특강 생방송을 했습니다. 행복학교 참가자들이 수업과정 중에 생긴 궁금증을 해소하고 다음 과정으로 이어질 수 있게 안내하는 시간입니다.

먼저 행복학교를 졸업하고 행복시민이 된 한 분의 사례 발표를 듣고 나서 스님이 인사말을 건넸습니다.

“여러분이 행복학교에 다니면서 행복해졌다고 하니 저도 기쁩니다. 우리가 조금만 자기 마음을 살피고, 조금만 주위를 살피고, 조금만 진실이 무엇인지 살피면, 우리가 안고 살아가는 대부분의 문제가 사실 별 문제가 아닌 줄 알게 돼요.

별 일 아니구나!

별 일 아닌 줄 알게 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눈을 뜨고 보면 아무 일도 아닌데, 눈을 감은 채 보면 엄청난 일처럼 보입니다. 눈을 뜨고 보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말해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눈 있는 자 와서 보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꾸 눈을 감은 채 이야기하지 말고, 눈을 떠서 진실을 보라는 의미예요. 눈을 떠서 보면 해결됩니다. 악몽을 꾸면서 잠꼬대를 할 때는 괴롭지만, 잠을 깨면 다 해결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어서 즉문즉설을 시작했습니다. 사전에 네 명이 질문을 신청하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최근 몇 년 동안 진급에서 밀렸다며 속상한 마음을 이야기했습니다.

진급에서 밀리고 나니 속상한 마음이 들어요, 어떡하죠?

“저는 아이 셋을 둔 워킹맘입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진급에서 밀렸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저와 진급하는 사람들의 실력이 비슷한 것 같은데, 제가 육아휴직을 쓴 것, 나이 그리고 여성이라는 점이 불이익으로 작용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도 나름 열심히 하면서 제가 성취하는 것을 어필하고 있습니다. 진급에 대해 편하게 생각하려고 하지만 가끔씩 속상한 마음에 화가 나기도 합니다. 이것도 욕심일까요?”

“우선 욕심인지 아닌지를 떠나서, 승진을 하고 싶은데 승진을 하지 못하니까 기분이 나쁜 건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먹고 싶은 게 있는데 못 먹을 때 기분이 안 좋은 것과 같아요. 누구나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하면 기분이 좋아지고, 하고 싶은 걸 하지 못하면 기분이 나빠져요. 그래서 기분 좋음과 나쁨이 늘 되풀이됩니다. 이를 가리켜 ‘고(苦)와 락(樂)이 윤회한다’고 표현합니다.

인도 전통문화에서는 사람이 죽은 뒤에 사람이나 동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윤회라고 합니다. 불교가 인도 문화권에 바탕을 두고 생겨나고 발전했기 때문에 불교에서 사용하는 ‘윤회’라는 용어도 인도 전통문화 방식으로 잘못 해석이 되는 경우가 많아요. 부처님이 말씀하신 윤회는 인도 전통문화에서 말하는 윤회가 아닙니다. 부처님은 즐거움과 괴로움은 늘 한 쌍으로 붙어있기 때문에, 즐거움을 추구하는 한 늘 즐거움과 괴로움을 오가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의미로 ‘윤회’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즐거움과 괴로움 중 즐거움을 따로 떼어내서 즐거움만 영원히 추구하고 싶어 합니다. 그렇게 즐거움만 가득한 곳을 천당이라고 하고, 괴로움만 가득한 곳을 지옥이라고 하죠. 그렇게 분리한 다음 천당에 가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즐거움과 괴로움을 따로 떼어낼 수가 없다는 걸 자각하셨어요. 그 즐거움과 괴로움의 뿌리는 욕망입니다. 욕망대로 되면 즐거움이 생기고, 욕망대로 되지 않으면 괴로움이 생기는 겁니다.

이 세상은 내가 원하는 대로 다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항상 즐거움만 있을 수가 없어요. 설령 내가 원하는 대로 된다고 해도 그 결과가 반드시 좋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즐거움과 괴로움은 늘 되풀이될 뿐만 아니라, 즐거움이 이내 괴로움이 될 때도 있어요. 또,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은 일이 결과적으로 좋은 일이 될 때도 있습니다. 가끔 정치권에서 장관으로 지명을 받아서 우선은 잘 된 것처럼 보였는데, 정작 청문회에서 망신을 당하고 후보직에서 사퇴를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아니면 장관으로 임명돼서 장관직을 수행하는 도중에 잘못해서 사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결과적으로 장관에 지명되거나 장관에 임명된 일이 좋은 일이 아니었던 겁니다. 이처럼 처음에는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결국 재앙이 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러니 지금 당장은 잘된 일처럼 생각되어도 그게 정말 좋은 일인지 판단을 내리기가 어렵고, 지금 당장은 안 좋은 일처럼 생각되어도 그게 정말 나쁜 일인지 판단을 내리기가 어렵습니다.

욕망을 따라가는 한 고와 락은 늘 윤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고와 락을 통틀어 ‘괴로움’이라고 표현한 거예요. 즐거움마저도 자세히 살펴보면 결국 괴로움의 한 종류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인생은 괴로움이라고 말하는 거예요. 이는 즐거움은 없고 괴로움 밖에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즐거움과 괴로움이 늘 되풀이되는데 그 즐거움이라는 것도 깊이 살펴서 정확하게 바라보면 괴로움의 한 종류라는 거예요.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면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욕구를 따르면 과보가 생기고, 욕구를 억제하면 스트레스를 받아요. 이래도 저래도 다 힘든 길입니다. 즉, 욕구를 참아도 힘들고, 욕구를 따라가도 힘이 듭니다. 참지도 않고 따라가지도 않는 제3의 길이 ‘알아차림’입니다. 이 길을 중도(中道)라고 합니다.

승진을 하고 싶은데 승진이 되지 않아서 괴로움이 일어나는 건 욕심 여부와 관계없이 마음이 그렇게 작동하는 것입니다. 만약 질문자가 승진을 원하는데 승진이 되면 즐거움이 생길 거예요. 그런데 승진을 원하는데 승진이 되지 않으니까 괴로움이 생긴 겁니다. 만약 승진을 바라는 그 마음이 없으면 즐거움도 괴로움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대부분 ‘어떻게 사람이 직장에 다니면서 승진을 바라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하고 되묻습니다. 그 심정은 이해가 됩니다만, 내가 승진을 바란다고 승진을 시켜주는 것도 아닙니다. 승진을 시켜주는 사람이 자기가 필요해서 또는 자기가 보기에 적절하다고 판단해서 승진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죠. ‘이 사람은 간절히 원하니까 승진을 시켜주고 저 사람은 간절히 원하지 않으니까 승진을 시키지 말자’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질문자가 회사의 시스템을 보면 어때요? 내가 승진을 원한다고 승진시켜주는 거예요, 아니면 상사가 판단해서 승진을 시키고 싶으면 그때 승진을 시켜주는 거예요?”

“그들이 판단하는 거예요. 그런데 육아휴직을 쓰거나 나이, 성별에 따라 불이익이 작용한다고 생각이 드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관점을 잡아야 할까요?”

“만약 성별에 따라 불이익을 주거나, 나이에 따라 불이익을 주는 등 노동법을 위반하는 불이익은 차별에 해당합니다. 그런 일이 발생하면 법적으로 고소를 해서 시정을 요청해야 해요. 그런데 법적으로 위배되지 않고 임명권자의 재량에 따라 승진을 선택하는 일이라면 그건 문제제기를 하기가 어렵습니다. 질문자는 ‘내가 저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질문자의 생각이지 임명권자는 다르게 판단할 수 있잖아요. 질문자는 ‘내가 저 사람보다 이 일을 오랫동안 했기 때문에 더 낫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도 질문자의 생각이지 임명권자는 다르게 판단할 수 있어요. 내가 저 사람보다 잘한다고 생각할 순 있지만, 임명권자는 그렇게 볼 수도 있고 그렇게 안 볼 수도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 이런 경우에 임명권자의 판단을 문제 삼으면 질문자만 피곤해질 수 있습니다.

그저 시키는 대로 가만히 있으라는 게 아니에요. 법에 위배될 정도로 명백히 차별을 하는 경우에는 문제 제기를 해서 시정을 요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건 꼭 나의 이익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 정의를 위해서도 필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법적으로 위배되는 경우가 아니라 인사권자의 재량에 속한 일을 문제 제기하기 하면 어려울 수 있어요. 물론 질문자의 입장에서 불공정하게 느껴질 수 있는 건 맞습니다. 그런데 만약 질문자가 승진을 했다면, 다른 경쟁자의 입장에서는 또 그들 나름대로 불공정하게 느껴지는 면이 있었을 수 있습니다.

승진 심사 결과 나이가 많은 사람이 승진을 하면 그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젊은 사람은 ‘요즘 시대가 어느 때인데, 나이 서열로 승진을 하나’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또 젊은 사람이 승진을 하면 나이가 많은 사람은 ‘내가 이 분야에서 훨씬 더 경험이 많은데 왜 저 사람이 승진을 하나’ 이렇게 생각을 해요. 그러니 안 된 사람의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불만을 토로할 수 있는 근거가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 봐도 공정하다거나, 누가 봐도 불만이 없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 법적으로 문제가 될 정도로 명백한 문제가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리고 그 결정이 나의 권한이 아니라 임명권자에게 권한이 있는 경우에는 임명권자의 선택을 받아들이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요. 나의 권한이 아닌 문제에 대해서 자꾸 생각해봐야 결국 나만 기분이 나빠지고 나만 괴롭습니다.

만약 나보다 젊은 사람이 먼저 승진을 하면 ‘요즘 젊은 사람들이 일을 잘하니까 먼저 올라가야지’ 이렇게 생각하고, 만약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먼저 승진을 하면 ‘나보다 먼저 들어온 사람이니까 먼저 올라가야지’ 이렇게 긍정적으로 생각을 해보세요. 다만 누군가 뒷돈을 주고 먼저 승진을 한다거나 명백하게 법을 어기면서 인사 조정을 하는 경우에는 법규를 알려주고 시정을 요청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내 마음은 그런 결정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는 수행적 자세를 가지되 사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시정 요청을 하는 게 필요해요. 사회 정의를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정해진 규칙을 지킬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 질문자도 이런 관점을 가지면 어떨까 싶어요.”

“네, 감사합니다.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내 일 부지런히 하면서 즐겁게 지내겠습니다.”

“승진에 대한 욕망을 탁 내려놓아야 회사 생활이 편안할 수 있습니다.

‘과연 내가 승진에 대한 욕망을 가진다고 승진이 잘 되고, 승진에 대해 신경 쓰지 않고 내 일만 부지런히 한다고 승진이 안 될까? 내가 승진에 대한 욕망을 가지는 것이 실제 승진하는 데 얼마만큼의 영향을 줄까?’

아마도 전혀 영향을 주지 않거나, 설령 영향을 준다고 해도 5~10% 이상은 안 될 거예요. 반면 승진에 대한 욕망을 내려놓고 살면, 승진에 영향을 줄지도 모르는 5~10%를 양보해야 하긴 하지만 대신 그 욕망이 없기 때문에 마음 편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 욕망 하나만 내려놓아도 마음이 전보다 훨씬 편해져요. 그런데도 여러분은 승진에 대한 욕망 때문에 늘 눈치를 보면서 전전긍긍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렇다고 대충 살라는 말이 아니에요. 직장에서 주어진 일을 나름대로 부지런히 해나가되 남한테 잘 보이려는 마음이 지나쳐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남에게 잘 보이려고 하면 늘 조마조마하면서 살고 남의 노예생활을 하게 됩니다. 남이 나를 잘 안 봐주더라도 잘 봐주고 안 봐주고는 그 사람의 일이지 내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의 몫으로 놔두고 신경을 끄는 게 좋아요. 다른 사람을 무뚝뚝하게 대하라는 게 아니에요. 기본적인 예의는 갖추되 나머지는 자기를 중심에 두는 자세로 살아야 오늘부터 편안하게 살 수 있습니다. ‘지금 죽을 고생을 해서 나중에 행복하게 살아야지’ 이렇게 생각을 하면 죽을 때까지 한 번도 못 편해보고 죽게 됩니다. 그러니 지금부터 편해야 해요. 결과도 좋지만 과정도 좋아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알았습니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 남편과 대화할 때 의견 충돌로 목소리가 커지다가 결국 해결점 없이 서로 회피하며 마치게 됩니다. 아이가 있는 앞에서 서로 좋은 대화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데 쉽지가 않습니다. 노후에 남편과 단 둘이 살 생각을 하면 답답하고 숨통이 막힐 것 같아요.
  • 행복학교 수업 중 마음 나누기하는 게 힘들어 겨우 따라가고 있습니다. 지인을 행복학교에 입학시켰더니 공부는 하고 싶은데 나누기를 못해서 결국 포기하고 말았어요. 마음 나누기를 가볍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 수행을 하면 감정의 높낮이가 줄어들고 큰 괴로움이나 큰 즐거움이 없어진다고 하는데, 동시에 인생살이의 재미까지 줄어드는 것은 아닌지 궁금합니다.

대화를 마치고 나니 오후 4시가 넘었습니다. 다음 달에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생방송을 마쳤습니다.

곧이어 오후 5시부터는 3월에 개강하는 정토불교대학 교과 개편을 위한 회의를 시작했습니다. 공동체 법사단과 준비팀 실무자들이 모두 화상회의 방에 입장하고, 각자 준비해 온 안건을 발표하고 스님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실천적 불교사상에 대한 강의 주제, 부처님의 일생에 대한 강의 주제, 그리고 그에 따른 수행 연습 과제에 대해 열띤 토론이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의 정리 말씀을 듣고 회의를 마쳤습니다.

“다들 준비하시느라 수고들 많이 하셨습니다. 오늘 토론하지 못한 내용은 내일 또 토론합시다.”

해가 지고 저녁 7시가 넘어서 회의를 마쳤습니다.

두북 공동체 대중은 다 같이 모여 지난 한 주를 돌아보며 마음 나누기를 하였고, 스님은 밤늦게까지 정토불교대학 교과 개편 준비를 하고 원고 교정도 보았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외국인을 위한 영어 즉문즉설을 하고, 2차 만일준비위원회와 기획위원회 산하 사회사업 분과와 합동으로 회의를 한 후, 오후에는 정토불교대학 교과개편 회의를 하고, 저녁에는 온라인 일요명상 생방송을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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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진

감사합니다 스님

2022-01-28 19:08:05

윤태훈

감사합니다

2022-01-27 09:01:04

김종서

남에게 잘 보이려고 스스로 노예처럼 살아왔군요. 꾸준히 수행정진하면서 여여하게 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스님! ㅎㅎ

2022-01-26 19:5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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