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1.10.5 용성조사 오도일 기념법회
“100년 전 그 암울한 시기에 백성이 주인이 되는 대한민국을 꿈꾸었던 분”

안녕하세요. 음력으로 8월 29일인 오늘은 용성조사님이 깨달음을 얻으신 지 135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정토회에서는 매년 이 날을 기념해 용성조사님의 삶을 되새기는 시간을 갖습니다.

기념법회가 열리는 죽림정사로 가기 위해 새벽 4시에 두북 수련원을 출발했습니다. 먼저 부산에 들러 도문 큰스님에게 농산물을 전달했습니다.

스님이 직접 농사지은 고구마, 토란, 밤, 땅콩과 채소를 상자에 정성껏 담아서 문 앞에 두고 시봉 하는 분에게 말씀드린 후 다시 차에 올라탔습니다. 고속도로 위를 달리는 동안 해가 떴습니다.

잠깐 휴게소에 내려서 우동 한 그릇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오전 8시에 장수 죽림정사에 도착했습니다.

행사를 시작하기 전에 경내를 잠깐 둘러보았습니다. 올해 봄에 스님과 몇몇 거사님들이 나무 가지치기를 해놓았고, 주말마다 봉사자들이 와서 관리를 구석구석 해준 덕분에 도량이 깔끔해져 있었습니다.


죽림정사 교육관으로 이동해 먼저 1부 행사로 역대 전등 조사들을 기리는 다례재를 지냈습니다. 코로나 확산을 막기 위해 내빈들과 스태프 일부만 자리했습니다.

다례재를 마치고 장수군 장영수 군수님이 찾아와서 용성 교육관 건립에 대해 차담을 나눈 후 10시 30분에 용성조사 오도일 기념법회를 시작했습니다.

삼귀의와 반야심경을 봉독 한 후 국기에 대한 경례, 애국가 제창,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을 하고, 용성진종 조사가 깨달음에 이르기까지의 생애를 영상으로 함께 보았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국립 민속국악원 지도단원인 김승정 님의 해금 연주가 있었습니다. 연주곡은 “세상에서 아름다운 것들”이었습니다.

두 줄에서 어떻게 저런 아름다운 소리가 나는지 모두 큰 박수를 보냈습니다.

전라북도 도의원님, 장수군 군의회 의장님, 번암면 면장님, 백용성 기념사업회 이사님 등 여러 내빈들의 소개와 축사가 있은 후 참석자 모두가 스님에게 기념 법문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먼저 용성조사님이 어떤 삶을 살다 가신 분인지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법문은 2천여 명의 정토행자들에게 생중계되었습니다.

“용성조사님께서는 나라가 한창 어려울 때인 1864년에 이곳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에서 태어나셨습니다. 14세에 덕밀암에서 출가를 하셨다가 아버지에 이끌려 집에 돌아온 후 다시 17세에 해인사에서 정식 출가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견도(見道), 수도(修道), 무학도(無學道)를 거쳤습니다. 용성조사님께서는 23세가 되는 해인 8월 5일 신라시대 때 불교를 공인받기 위해 순교하신 이차돈 선사님을 기리기 위해 신라불교 초전법륜 성지인 구미 아도모례원을 방문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도모례원에서 21일간 용맹 정진하시고 8월 29일에 이르러서 마침내 완전한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용성조사님의 삶과 사상

13년 후인 36세까지 전국을 돌아다니시면서 당신의 깨달음이 일상 속에서도 여여하게 유지되도록 하는 보림(保任) 수행정진을 하신 후 37세부터 교화와 전법 활동에 전념하셨습니다. 나라가 점점 기울어져가는 시기였기에 조사님께서는 불교를 새롭게 하는 수행정진과 교화 전법만이 아니라 백성들을 위하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독립운동에도 참여를 하셨습니다. 공식적으로는 3.1 독립운동의 불교계 대표이셨고, 비공식적으로는 실질적으로 3.1 독립운동이 일어날 수 있도록 막후에서 기둥 역할을 하셨습니다. 그로 인하여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조사받는 기간까지 2년여의 시간 동안 옥고를 치르셨습니다. 그 후 평생 동안 불교를 지성화하고, 생활화하고 대중화하는 일을 하셨고,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고 백성이 주인 되는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 생의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그러나 끝내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40년 음력 2월 24일에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그래서 정토회에서는 용성조사님께서 태어나신 5월 8일, 깨달음을 얻으신 8월 29일, 열반하신 2월 24일, 이렇게 연중 총 세 번에 걸쳐서 용성조사님의 뜻을 기리는 행사를 갖습니다. 보통 은 태어나고 죽는 탄생일과 기일만 기념합니다. 그러나 용성조사님께서는 수행자이셨습니다. 수행자에게는 깨달음이 생명이기 때문에 육신이 태어나고 죽는 것보다도 깨달음을 얻은 오도일을 가장 중요한 날로 기리고 있습니다.”

이어서 스님은 용성조사님의 생애를 교훈으로 삼았을 때 오늘날 우리가 가장 명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얼마 전에 UN연설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한국전쟁이 멈춘 지 70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에서 한반도가 아직도 정전(停戰) 상태에 있음을 상기시키며 이제는 전쟁을 완전히 종식시키는 선포인 ‘종전(終戰) 선언’을 했으면 좋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국제사회에 전달했습니다. 이 제안이 온전히 받아들여지지는 못했지만, 전쟁이 완전히 끝나고 평화가 정착되기를 바라는 것은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염원임을 확인하는 자리였습니다.

종전 선언 제안을 통해 되돌아보는 과거 100년

용성조사님께서 살고 계셨던 시대에는 나라를 외세(外勢)에 빼앗겼기 때문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것이 온 국민의 염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반인들은 하루하루 먹고살기 바빴습니다. 농사꾼은 농사일하느라, 장사꾼은 장사하느라, 학생은 공부하느라, 각자 일상생활이 바빠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온 국민의 염원은 하루빨리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용성조사님께서는 생계가 급급하지 않은 사람들 중에서 뜻이 있는 사람들을 모아서 나라의 독립을 선언하는 3.1 독립운동을 주도하셨습니다. 물론 세력적으로는 천도교가 주도를 했습니다. 당시 교세(敎勢)는 천도교인이 약 300만 명 가까이 되었고, 개신교인이 약 20만 명 정도 되었습니다. 불교는 스님들만 불교인의 범주에 귀속되었고 불교 신자들은 불교인의 범위에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불교 신자가 몇 명이라는 통계가 없었습니다. 당시에 천주교는 한국 출신 주교가 아직 배출되지 못해서 프랑스 출신 주교가 한국 천주교를 관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라의 독립보다는 선교의 자유를 더 중요시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세력으로나 뜻으로나 독립운동을 주도를 할 만한 세력은 천도교였습니다. 그래서 용성조사님은 천도교 교주인 손병희 교주님을 찾아가게 됩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민족자결주의가 팽배하는 이 시기에 우리가 나라의 독립을 선언한다면 온 국민이 독립을 위해 일어나는 데에 큰 기여를 하게 될 겁니다.’

이렇게 손병희 교주님을 설득하고 의기투합해서 3.1 독립운동 준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천도교가 주도하던 3.1 독립운동을 온 국민이 주도하는 독립운동으로 확산해 가자는 뜻으로 당시 비교적 세력이 약했던 불교와 개신교도 참여하도록 향도하셨습니다. 반면 천주교는 한국인 주교가 없어서 이 일에 대한 결정을 내릴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천도교, 불교, 개신교가 힘을 합해서 3.1 독립선언을 하게 되었고, 그 이후에 요원의 불길같이 3.1 운동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어났습니다.

여기에 용기를 얻은 지도자들이 우리나라를 되찾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나라를 건립하자는 뜻을 세우게 됩니다. 망한 대한제국을 다시 일으키는 ‘대한제국 부흥운동’이 아니라 백성이 주인이 되는 새로운 나라를 만들자는 ‘대한민국 수립 운동’을 하기로 뜻을 모은 겁니다. 그 결과 3.1 운동이 일어나고 한 달 정도 지난 시점에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이러한 조직적인 움직임은 미리 계획을 하는 수뇌부가 없었다면 이렇게 빨리 이루어지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이미 용성조사님께서는 한일 합방이 되기 전 1905년 을사조약이 맺어지는 것을 보고 ‘이미 나라가 기울었구나’ 생각하시고 미리 중국을 방문해서 상해에 나라를 되찾을 근거지를 마련해 두셨습니다.

용성조사님께서는 3.1 운동에 참여한 죄로 옥살이를 한 후 곧바로 만주, 북간도, 안도 지역으로 가서 독립운동가들과 그 가족들을 보호하기 위해 명월촌과 봉녕촌에 각각 30만 평의 농장을 마련했습니다. 그곳에 독립운동가 가족들과 그 지역의 가난한 주민들이 살 수 있도록 기틀을 마련하셨습니다. 그 후 용성조사님께서는 용정에 대각교당을 세워서 ‘선농일치’라는 생산하는 불교를 주창하셨는데, 이런 일들을 펼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독립운동가들을 보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용성조사님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많은 애를 쓰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독립자금을 모아서 상해 임시정부로 계속 보냈고, 만주에서 무장 독립운동을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지원을 이어가셨습니다.

그 암울한 시기에 백성이 주인이 되는 대한민국을 꿈꾸었던 분

용성조사님의 이러한 공적들을 살펴보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당시 지도자라는 사람들도 ‘나라의 독립’이라고 하면 대개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다는 것만 생각할 뿐 새로운 나라를 세운다는 생각을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용성조사님은 멀리 내다보시고 3.1 독립운동의 방향을 ‘대한제국 부흥운동’이 아니라 ‘대한민국 수립 운동’으로 잡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당시에는 민(民)이 주인이 된다는 생각을 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의 대부분은 서양에서 만든 정치체제를 벤치마킹하고 그들에게서 배워 온 것입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출발은 서양에서 배워온 것이 아니라 개벽사상, 동학사상, 그리고 고조선의 홍익인간 정신을 계승한 것입니다.

1945년 해방이 되면서 나라를 되찾긴 했지만 우리가 원했던 건 민(民)이 주인이 되는 ‘대한민국’이었기 때문에 아직 완성된 나라는 아니었습니다. 국토는 되찾았지만 진정으로 민(民)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이루기 위해 우리는 독재에 맞서서 4.19 혁명, 5.18 광주 민주화운동, 6월 항쟁을 이어나갔고, 그 정신을 계승해서 오늘날 대한민국은 경제적 성장뿐만 아니라 정치적 민주주의도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용성조사님께서 살던 그 시대에는 우리나라가 이렇게 경제적으로 발달하고, 민주주의가 정착된 나라가 될 거라는 것을 꿈꾸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용성조사님께서는 그 암울한 시기에 원하는 것이 현실적으로는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먼 미래를 내다보시고 활동을 이어가셨습니다. 1939년에 본인이 만주에 건설해 놓은 독립운동가 조직이 일망타진되었을 때 큰 실망을 하셨으면서도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앞으로 60년 후 우리 민족은 세계적인 국가로 새롭게 일어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실의 실패에 낙담하지 말고, 미래를 위해서 복을 지어라.’

이렇게 해서 10가지 유훈을 남기셨습니다. 이렇게 남기신 10가지 유훈을 많은 제자들이 다 잊고 살았는데, 독립운동을 함께 뒷바라지 한 동헌 완규 조사님과 그 법을 계승하신 불심 도문 큰스님께서 지금까지 대를 이어 계승해오고 계십니다. 이렇게 용성조사 탄생지에 죽림정사를 세우고, 또 용성조사의 10가지 유훈을 그 어려운 가운데서도 꾸준히 실천해오셨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면, 우리 국민들이 열심히 일해서 경제를 건설하고, 열심히 투쟁해서 민주화를 이루었습니다만, 정신적으로 깊이 들여다보면 용성조사님의 이러한 유훈을 쉼 없이 계승해 온 불심 도문 큰스님의 은혜 또한 한없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용성조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앞으로 대한민국의 국운은 융성할 것이다. 원래 우리 민족은 한나라, 배달나라, 단군나라를 이어서 고구려, 발해까지 동북아의 대제국을 이루었는데, 발해 멸망 이후부터 한반도에 갇혀서 약소민족으로 전락한 채 천 년의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우리 대한민국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을 통합한 기세를 되찾아서 국운이 융창할 것이다.’

이렇게 도덕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번성하는 새로운 대한민국을 발원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를 처음 들은 사람들은 모두 ‘어떻게 우리가 그렇게 될 수 있을까?’ 하고 회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대한민국은 경제적으로도 세계 10대국이 되었고, 군사적으로도 세계 6대국이 되었고, 문화적으로도 한류가 세계를 휩쓸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새로운 기운이 일어나고 있지만 우리에게는 여전히 ‘코리아 리스크’라는 불안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전쟁입니다. 우리나라는 아직까지도 언제든지 전쟁이 일어날 위험에 놓여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간절히 염원해야 할 것

어떤 특정 정파나 정당을 넘어서서 국가 전체의 발전을 생각한다면 온 국민이 마음을 내서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 분명해야 합니다. 전쟁이 없어야 우리가 지난 70년 동안 피땀 흘려 일구어 놓은 경제적 번영과 민주화를 계속 유지할 수 있습니다.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이 모든 것이 한순간에 잿더미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번 UN 총회에서 대통령이 ‘전쟁을 종식시키는 종전선언을 하자’ 하고 국제사회에 호소를 한 겁니다. 이제 현 정부의 임기가 얼마 안 남았기 때문에 현 정부의 임기 안에는 힘들다고 하더라도, 다음 정부에서는 반드시 전쟁의 위험을 없애야 합니다. 어느 당에서 어떤 정부가 들어서더라도 네 편 내 편을 떠나서 대한민국의 미래 발전을 위해 위험 부담을 없애야 합니다. 하루빨리 전쟁을 종식시키고 항구적인 평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나아가 남북이 서로 교류하고 협력하는 시스템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완전한 정치적 통일은 당장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적어도 경제적 통일은 할 수 있는, 사실상의 통일국가를 우리가 만들어 가야 합니다. 더 나아가 남북이 통일된다면, 우리나라는 과거 천 년의 한(恨)을 풀고, 한나라, 배달나라, 단군나라의 기상과 고구려의 기상을 되살려서 세계 문명의 중심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용성조사님의 오도일을 맞이하여, 그분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것을 기념하는 걸 넘어서서 그분의 이런 원(願)을 되새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분은 씨앗을 심고 가셨지만, 그 씨앗이 자라고 꽃 피우고 열매를 맺도록 하는 것은 우리 후손들의 사명입니다. 용성조사님께서는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자는 발원을 하셨다면,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완성하자는 것을 발원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전쟁을 종식시키고 남북이 하나 되는 통일을 이루는 것입니다.

또 용성조사님께서는 조선왕조 500년 동안 탄압을 받으면서 기복신앙으로 변질된 불교의 본래 모습을 복구하고자 하셨습니다. 불교의 지성화, 대중화, 생활화를 주창하고 ‘대각교(大覺敎)’라는 새로운 불교 운동을 제시하셨지만, 그 뜻이 계승되지 못하고 지지부진하게 흘러간 측면이 있습니다. 그 결과 아직도 한국불교가 새로운 희망을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미래에는 한국의 많은 젊은이들이 참여하고, 세계인들도 믿고 배울 수 있도록, 부처님의 본래 가르침을 이 땅에 실현해 나가야 합니다. 용성조사님께서 도심 포교당을 만들고, 어린이 포교를 하고, 한문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고 했던 이런 불교혁신 운동 역시 우리가 계승하고 완성해야 합니다.

용성조사님의 뜻은 컸지만 시절 인연의 한계로 당대에 완성하지는 못하셨습니다. 그러나 조사님이 심으신 씨앗이 지금까지 자라서 오늘날 융성한 대한민국이 되었습니다. 우리 불교도 세상을 뒤따라가는 불교가 아니라, 국민들에게 사랑받고 신뢰받고 앞서가는 불교가 되도록 우리 모든 불자들이 마음을 새롭게 가지면 좋겠습니다. 용성조사님 오도 135주년을 기념해서 우리가 다시 한번 다짐을 해보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저희들이 오늘을 기념할 수 있도록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시대에도 50여 년 동안 혼자서 용성조사님의 유훈을 계승해 오신 불심 도문 큰스님께 깊이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스님이 법상에서 내려온 후 사홍서원으로 기념식을 마쳤습니다. 참석한 내빈들에게 스님이 직접 줍고 삶고 포장한 밤을 한 봉지씩 선물했습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내빈들을 떠나보내고 간단히 비빔밥으로 점심 식사를 한 후 죽림정사를 출발했습니다.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오후 2시 무렵에 대전 교도소에 들렀습니다. 소장님과 면담을 한 후 스님과 면회를 하고 싶다는 분이 있어서 상담을 하고 다시 서울로 향했습니다.

다시 고속도로 위를 달리는 동안 해가 저물었습니다.

저녁 6시에 서울 정토회관에 도착하여 두북 수련원에서 갖고 온 농산물을 내렸습니다.

저녁에는 여러 가지 업무들을 본 후 오늘 일정을 마쳤습니다.

내일은 새벽에 서울 공동체 발우공양에 참석하고, 오전에는 백일법문 콘텐츠팀과 화상회의를 하고, 전국 지부장 소임자들을 위해 온라인 교육을 한 후 오후에는 평화재단 연구 세미나에 참석하고, 저녁에는 수행 법회 생방송을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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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은

용성조사님의 역사를 이제야알게되었네요.개인의 삶에 안주해 사는 제가 많이 부끄럽습니다.기억하겠습니다.그리고.행하겠습니다.

2021-11-11 11:12:40

박용삼

용성조사님 감사합니다
동헌완규조사님 감사합니다
불심도문 큰스님 감사합니다
법륜스님 감사합니다

2021-10-19 15:24:28

굴뚝연기

목숨의 위협이 심한 그 암울하고 혹독한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하시고,독립운동을 후원하신 용성조사님의 행적이 묻혀있어 많이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또한 조선조 끊어진 법맥을 이으시고,유일하게 이 땅에 올곧은 불교의 명맥을 이어오신 수많으신 행적들이 더 알려졌으면 하는 바램입니다~아울러 묵묵히 그 유훈을 이어오신 도문큰스님께도 감사드려요^^죽림정사 예쁘네요^^

2021-10-18 03: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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