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1.7.21 농사일, 정토대전 회의, 수행법회
“누군가 나에게 기대려고 하면 짜증이 나요. 왜 그렇죠?”

안녕하세요. 두북 수련원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오늘도 스님은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치고 농사일을 시작했습니다. 어젯밤에 문경 수련원에서 온 법사님들도 함께 농사일을 도왔습니다.

새벽예불과 천일결사기도를 마치고 아침 해가 떠오르는 시간, 스님은 오늘도 작업복을 입고 밭으로 갔습니다. 농사 담당 행자에게 오늘 할 일을 확인했습니다.

“오늘은 무슨 일을 하나요?”

“앞밭에 잡초매트를 깔려고 합니다.”

“안거 전에 비닐하우스 옆에 풀도 매야하는데 그 일을 할 사람은 없어요?”

“그건 주말에 봉사자들과 하겠습니다.”

“풀 매는 게 더 어려운 일이니까 우리가 하도록 해요.”

앞밭에 배정된 사람 중 두 명은 비닐하우스 옆 풀 매는 일을 하기로 했습니다. 예초기를 돌렸지만, 비닐하우스 바로 옆에 난 풀은 손으로 직접 베야합니다. 스님과 행자 두 명은 각각 비닐하우스 옆 한 줄씩 맡아 앞에서부터 끝까지 풀을 맸습니다.




1시간여 만에 비닐하우스 끝에 다다랐습니다.

비닐하우스 뒤에는 칡덩굴이 또 울타리를 뒤덮고 있었습니다. 줄기를 슥슥 베어주고 비닐하우스 안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비닐하우스 안쪽에도 풀이 자라 있었습니다. 끝에서부터 앞으로 나오며 풀을 뽑았습니다.



비닐하우스 앞에는 모종을 키우는 작은 하우스가 있습니다. 그 사이사이에도 풀이 비집고 자라나 있었습니다. 사이사이에 난 풀도 다 뽑았습니다.


온몸이 땀으로 젖었습니다. 뚝뚝 흐르는 땀이 눈으로 들어가 따끔거렸습니다. 농막에서 잠시 땀을 닦고 다른 곳을 살펴보았습니다.

2,3동 사이와 3,4동 사이에는 풀을 매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아무도 없는 비닐하우스 4동 옆으로 가서 다시 풀을 매기 시작했습니다.




“스님, 곧 발우공양할 시간입니다.”

“아이구, 다 해주고 가야 하는데...”

어쩔 수 없이 손을 놓고 일어섰습니다.

농사일을 마치고 두북 수련원으로 돌아와 발우공양을 했습니다.

아침에 수확해 온 유기농 채소로 공양을 한 후 두북 공동체 대중이 스님에게 한 말씀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안거에 임하는 자세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했습니다.

“내일모레부터 안거가 시작됩니다. 안거 기간에는 개인 업무를 일절 보지 않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래서 ‘스님의 하루’도 안거가 끝날 때까지는 발행하지 않는 것으로 합시다. ‘스님의하루’ 제작팀도 업무를 다 내려놓고 안거에 집중하는 것으로 해요. 이번에는 안거 기간이 총 17일 간입니다. 이 기간에는 일체 모든 업무를 내려놓고 수련에 집중하겠습니다.”

발우공양을 마치고 오전 10시 30분부터 정토대전 회의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지난주에는 법사님들이 다들 바쁘셨는지 발표를 준비해 온 사람이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오늘은 발표를 한 사람만 준비했습니다.”

스님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럼 공부는 간단히 하고, 농사일이나 좀 거들어 주고 갈래요?” (웃음)

“좋습니다. 그래도 뜨거워지기 전에 일을 해야 더위를 안 먹을 텐데요.”

“전부 안거에 들어가야 해서 시간이 없어요. 뜨거워도 일을 해야 되는 상황이에요. 코로나가 확산이 되는 추세여서 자원봉사자를 받기가 어려우니까 우리가 농사일을 최대한 마무리 지어 놓고 안거에 들어갑시다. 공부를 못하면 일이라도 해야죠.”

“네.” (웃음)

오후에는 다 같이 농사일을 하기로 하고 회의를 시작했습니다. 사회사상팀에서 부처님이 설법한 육화합으로 사회 문제를 새롭게 바라보는 관점을 정리해 와서 발표했습니다. 법사님들끼리 토론을 먼저 한 후 마지막으로 스님이 이에 대해 최종 정리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안거가 시작되면 3주 동안은 공부를 하지 않게 됩니다. 8월에 다시 공부를 시작하기로 하고 회의를 마쳤습니다. 12시, 가장 뜨거울 시간이지만 다 같이 작업복을 입고 밭으로 향했습니다.

스님은 다시 비닐하우스 4동 옆으로 가서 아까 풀을 매다 만 곳부터 다시 풀을 맸습니다. 행자 한 명도 반대편 끝에서부터 함께 풀을 맸습니다.

법사님들은 앞밭에 가서 잡초매트를 까는 일을 했습니다. 아침에 비닐하우스 풀 매는데 두 사람이 빠져서 앞밭에 일을 다 못했습니다. 고랑에 풀을 뽑고 잡초매트를 깔고 철심으로 고정시켰습니다.


스님과 행자도 곧 비닐하우스에서 풀을 다 매고 앞밭으로 갔습니다.

스님도 잡초를 뽑고 매트를 까는 일을 함께 했습니다.




잠시 구름에 숨어있던 해는 이내 모습을 완연히 드러내고 햇살을 쨍쨍 비췄습니다.

“법사님들 일 시키려다 내가 죽겠어요. (웃음) 그래도 농사 담당자에게 약속했으니 다 해주고 가야죠.”

스님과 법사님들은 붉어진 얼굴로 계속 일을 했습니다. 끝내 마지막 잡초매트까지 다 깔았습니다.



남은 잡초매트를 깔끔히 접어 정리하고 울력을 마쳤습니다.


농사일을 마치고 다시 두북 수련원으로 돌아와 4시 30분부터 공동체 법사단회의를 시작했습니다.

전국 으뜸절에서 원장 소임을 맡고 있는 법사님들이 모두 화상회의 방에 입장했습니다. 안거 진행 계획과 여름 온라인 명상수련 등 급히 처리해야 할 안건들을 하나씩 의논한 후 회의를 마쳤습니다.

해가 지고 잠시 휴식 시간을 이용해 스님은 원고 교정을 보았습니다.

저녁 7시 30분부터는 온라인 수행법회를 시작했습니다. 정토회 저녁반 회원 800여 명이 생방송에 접속한 가운데 스님이 인사말을 건넸습니다.

스님은 곧 시작되는 안거의 취지와 그 의미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요즘 날씨가 많이 덥습니다. 더운 날씨에 다들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제가 생활하는 두북 수련원도 날씨가 더워서 아침저녁으로만 일을 하고 한낮에는 농사일은 하지 않습니다. 한낮에는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거나 창고 일을 하면서 지내요. 그런데 오늘은 어쩔 수 없이 1시부터 3시 사이에 뙤약볕 아래에서 농사일을 했습니다.

며칠 후면 일체 외부와 차단하고 정진하는 안거(安居)에 들어가는데, 그러려면 그전에 농사일을 채비해 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일주일 전부터 수확할 건 수확하고, 풀 벨 건 베어놓고, 손볼 것도 손보고 있는데, 아직 일을 다 못 끝냈어요. 농사일이 밀려 있어서 오늘은 법사님들과 공부하다가 공부를 절반만 하고 낮인데도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뙤약볕에 일을 하니까 정말 땀이 많이 나서 기운이 다 빠졌습니다. (웃음)

안거를 하는 이유

이번 주말부터 공동체 대중은 모두 안거에 들어갑니다. 안거란 부처님 당시에 수행자들이 우기(雨期) 때마다 한 곳에서 수행하던 풍습입니다. 부처님은 한 자리에서 이틀을 이어 주무시지 않고 늘 유행(遊行)을 하셨어요. 한 자리에 있지 않는 것은 집착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먹고 입고 자는 것에 집착하지 말라는 뜻에서 늘 이동을 하셨는데, 이걸 ‘유행’이라고 해요. 이렇게 유행을 하시면서 만나는 사람들이 괴로움을 하소연하면 그 괴로움을 덜어주는 법담(法談)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인도에는 비가 집중적으로 쏟아지는 우기가 있습니다. 우기에는 하루에 한 번 이상 비가 쏟아지기에 이동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기 때는 수행자들이 한 곳에 3개월간 머무르며 수행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우기 때 한 곳에 머물러도 좋다’ 이렇게만 허용이 되었다가, 점점 시간이 흐르면서 후대에는 오히려 ‘1년에 3개월은 움직이면 안 되고 한 곳에서 수행을 해야 한다’ 이렇게 규정이 바뀌게 된 거예요.

그러다가 우리나라로 넘어오면서 날씨가 추운 겨울에도 안거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하안거(夏安居)와 동안거(冬安居)라고 해서 여름에 3개월, 겨울에 3개월, 이렇게 두 차례 안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토회는 여러분과 같은 대중과 함께 생활하는 대중 불교를 하고 있기 때문에 비록 출가해서 산다고 하지만 여름에 3개월, 겨울에 3개월 모두 안거에 들어가 버리면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안거 없이 살아도 문제이고요. 그래서 정토회는 여름에 3주간 안거를 합니다. 3개월까지는 못하더라도 3주간은 모든 업무를 내려놓고 자기 정진을 하는 거예요. 이 시기에는 농사짓거나 법문하는 등의 평소 활동을 모두 멈춥니다. 안거를 하는 3주 동안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명상과 자기 정진에 집중합니다.

자신에게만 오롯이 집중하는 시간

저도 이번 안거 기간 동안에는 12일 동안은 명상을 한 후 6일은 공동체에 들어와 사는 분들과 같이 농사일도 하고, 수행에 대한 대화도 나누고, 토론도 할 예정입니다. 그동안 어떤 분들은 저에게 이런 비판을 종종 했습니다.

‘스님도 일에 집착하는 거 아니에요? 저녁이 되면 ‘아야야야’ 하면서 앓다가 아침에는 호미 들고 또 일하러 나가잖아요!’

그런데 스님이 일에 집착하는지 안 하는지는 이번 안거 때 보면 알아요. 저는 안거가 시작되면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딱 명상만 합니다. 명상을 할 때는 밥도 안 먹습니다. 늘 하던 일도 안 하고, 늘 먹던 밥도 안 먹고, 늘 하던 법문도 안 하고, 오롯이 자신에게만 집중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안거가 시작되면 ‘스님의 하루’도 쉴 예정이에요. ‘스님의 하루’를 쓰는 사람도 다 안거에 들어가기 때문에 쓸 사람이 없습니다. (웃음)

여러분이 보기에는 20일 가까이 모든 업무가 정지된 것 같이 느껴질 수 있지만, 정지된 게 아니고 내부에서는 계속 정진을 하고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대외적인 관계는 멈춘다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이어서 질문을 받았습니다. 3명이 사전에 질문을 신청하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누군가 자신에게 의지를 하려고 하면 귀찮고 화가 난다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질문했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기대려고 하면 짜증이 나요

“저는 누군가 저에게 의지를 하면 귀찮고 화가 납니다. 최근 저에게 의지를 많이 하는 후배 직원이 못마땅해서 냉랭하게 대하고, 돌아서면 또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잘 살펴보니, 저는 누가 저에게 기대려고 하면 질색을 합니다. 더 살펴보니, ‘나는 누군가에게 기대면 안 된다’라는 생각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좀 더 살펴보니, 저도 기대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화가 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기대고 싶어 하는 제 마음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이런 경우를 한마디로 ‘기지도 못하는 게 날려고 한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 가랑이 찢어진다’라고 표현하기도 해요.

중생의 특징이 의지하는 겁니다. 부처의 특징은 일체 의지하는 바가 없는 거예요. 즉, 자기 인생의 주인이 자기라는 뜻입니다. 중생은 돈에 의지하고, 권력에 의지하고, 부모에 의지하고, 가족에 의지하고, 안 되면 신에게 의지하고, 이렇게 뭐든지 의지합니다. 의지한다는 것은 거기서 뭔가 도움을 얻고자 한다는 뜻이에요. 그것이 경제적인 도움이든, 보호든, 위로든, 도움을 얻고자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도움을 얻고자 하는 것이 이루어지면 행복을 느끼고 즐거워하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불평과 불만이 생기고 괴로워하는 게 중생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의지처를 불태워버려라’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이 말은 ‘모든 것의 주인으로 살아라’ 이런 얘기예요. 부처님은 어디에도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천상천하의 모든 사람과 신들 가운데 우뚝 서신 분, 가장 존귀하신 분입니다. 모든 사람과 신들이 더 큰 힘에 의지하잖아요. 그런데 부처님은 의지처가 없어요. 의지처를 불살라버렸습니다. 그래서 ‘대웅(大雄)’, 큰 영웅이라고도 부릅니다.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이라고 말하기도 해요.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신 분이라고 해서 ‘세존(世尊)’이라고도 하고, 사람과 신들의 스승이라 하여 ‘천인사(天人師)’라고도 표현합니다.

그러면 부처님의 제자를 자처하는 우리도 부처님처럼 의지하지 않고 자기가 자기 인생의 책임자가 되어야겠죠. 잘못했으면 기꺼이 손실을 감수하고, 과보를 받고, 또 필요하다면 자기가 자기 인생을 개척해 나가야 합니다. 바라는 게 없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바라는 게 있으면 자기가 바라는 만큼 노력해서 이루면 된다는 얘기예요. 누군가가 공짜로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질문자는 아직 중생인데 벌써 부처님 흉내를 내려고 하고 있어요. 그래서 처음부터 ‘기지도 못하는 게 날려고 한다’ 이렇게 말한 겁니다. 본인이 중생인 것을 먼저 인정하세요. 중생이니까 의지심이 있는 건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는 게 필요합니다. 그런 다음에 의지심이 없는 쪽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보고 듣고 느끼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고 생각하고 이런 걸 갖고 괴로워하고 즐거워하고 하는 것으로부터 좀 자유로워져야 해요. 그러나 이것은 목표이지 지금 당장 그렇게 되는 건 아닙니다.

반면에 부처님은 중생의 의지처가 되어주는 사람입니다. 내가 의지하는 건 없지만 오히려 중생이 나한테 의지하겠다고 하면 기꺼이 의지처가 되어주는 겁니다. 그래서 중생은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에 의지해서 나아간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불법승 삼보에 의지한다’, ‘부처님께 의지한다’ 이런 말은 영원히 의지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래에게 의지하는 건 좋다. 그런데 수행자의 목표는 의지하지 않는 경지로 가는 것이다. 그러니 여래에게 의지하더라도 잠시 의지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의지해라. 여래의 가르침은 지팡이와 같다.’

다리가 아플 때는 잠시 지팡이가 필요하지만, 고맙다고 영원히 지팡이를 짚고 다니면 다리 아픈 환자라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다리가 나으면 지팡이를 버려야 하지만, 다리가 낫기 전에는 지팡이가 필요해요. 그러니 중생의 상태인 지금은 의지처가 필요한 거죠. 그러나 다리가 나은 뒤에는 지팡이를 버려야 합니다. 부처님의 역할은 지팡이와 같습니다.

부처님은 의지하지 않는 분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필요로 한다면 의지처가 되어줍니다. 그런데 의지처가 되어줄 때 영원히 기대야 하는 의지처가 되어주면 종교가 되어버려요. 우리가 지금은 비록 의지하지만, 불교의 목표는 의지하는 않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목표로 가는 동안에 잠시 의지처가 되어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에요. 보살도 부처님처럼 중생이 필요로 할 때 잠시 의지처가 되어주는 존재입니다.

질문자는 아직 부처가 아니니까 의지심이 있는 건 당연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부처의 길로 가겠다고 발심한 수행자, 즉 보살이니까 다른 사람의 의지처가 되어주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질문자는 두 가지를 모두 거꾸로 하고 있어요. 자기가 의지심을 가진 존재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의지심이 없어야 할 것처럼 착각하고 있습니다. 또 수행을 하면 나에게 의지하는 사람에게 잠시 의지처가 되어주는 걸 기꺼이 해야 하는데 의지처가 되어주는 건 싫어하고 있습니다. 단지 의지만 하고 싶어 해요. 이것은 가장 어리석은 중생에 해당합니다.

‘나는 의지하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타인이 나에게 의지하는 것은 기꺼이 수용한다.’

관점을 이렇게 잡으면 됩니다.”

“네, 스님. 그래서 질문드렸어요. 저는 제가 굉장히 독립적이고 의지 안 하고 산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살펴보니 의지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더라고요. 반면에 남이 저한테 의지를 할 때마다 자동적으로 짜증이 올라오고요.”

“속마음은 의지하고 싶지만 의지할 데가 없는 것만 해도 속상한데, 나한테 덤터기로 다른 사람들이 의지하니까 기분이 나빠서 그렇게 짜증이 나는 거예요. 질문자는 의지처는 되어주기 싫고, 의지만 하고 싶다고 하니까, 가장 하층인 범부 중생에 들어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수행을 굳이 상중하로 나누어 표현해 본다면, ‘나는 의지하지 않지만 중생의 의지처가 되어주겠다’ 이러면 상급에 들어가고, ‘내가 의지처는 못 되어주더라도 의지하지는 않겠다’ 이러면 중급에 들어갑니다. 질문자는 그 밑에 하급에 속합니다.

질문자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 대부분이 그래요. 주기는 싫고 받고만 싶어 합니다. 그다음 단계가 ‘주는 것도 싫고 받는 것도 싫다. 내 인생은 내가 살겠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다음 단계가 ‘나는 받지 않지만, 필요한 사람에게 주겠다’라고 하는 거예요. 이런 사람이 바로 보살입니다.

첫째, 의지처를 버리는 공부를 먼저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의지처를 버리는 공부를 한다는 말은 의지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지금은 있다는 말이기도 해요. 세상 사람들은 다 의지하고 싶어 하는 심정이 있습니다. 그러니 후배 직원이 나에게 의지하고 싶어 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의 의지처가 되어줄 건지 말 건지는 내가 결정하면 돼요.

그런데 후배 직원이 나에게 의지한다고 해서 짜증을 내는 것은 좀 잘못됐어요. 상대가 의지하면 ‘나는 의지처가 되기 싫어요’ 이렇게 표현하면 되잖아요. 누가 나더러 ‘사랑해요’ 이러면 ‘노 땡큐’라고 하면 되지, 짜증을 내는 건 바람직한 태도가 아닙니다. 누가 나한테 ‘돈 빌려주세요’ 이러면 안 주면 되지, 성질을 내는 건 올바른 행동이 아니에요. ‘없어요’라고 하든지 ‘빌려주기 싫어요’라고 하면 되지, 성질은 왜 내느냐는 거죠. 짜증을 내는 건 잘못된 행동이에요.”

“네, 잘 알겠습니다.”

“상대가 의지를 하면 성질은 내지 말라는 거예요. ‘나도 의지하고 싶듯이 저 사람도 의지하고 싶어 하는구나’ 이렇게 알면 됩니다. 의지처가 되어주고 안 되어주고는 내 선택이에요. 의지처가 되어주든지, 안 그러면 이렇게 말하면 돼요.

‘나 살기도 힘들어. 그래서 네 의지처가 되어줄 수준이 안 돼. 나를 좋게 봐주는 건 고맙지만, 내 수준이 그 정도가 안 된다. 알았지?’

이렇게 웃으면서 말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질문자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습니다. 다음 질문자와 대화를 계속 이어갔습니다.

  • 코로나 양성 판정을 받고 생활치료센터에 입소하였습니다. 역학 조사 과정에서 동선을 진술한 결과 그로 인해 자가격리를 당하신 분으로부터 원망을 많이 받았습니다.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쳐 정말 죄송한데, 제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행동해야 할까요?
  • 백중 기도에서 천도재를 지낼 때 ‘사대육신 흩어지고 업식만을 가져가니’라고 염불을 합니다. ‘무아’를 가르치는 불교의 가르침에서 볼 때 그 무엇도 가져갈 것이 없어야 되는 게 아닌가요?

두 명의 질문에 답변을 하고 나니 마칠 시간이 되었습니다. 대기하고 있던 한 명의 질문자가 더 있었지만 법회 후 온라인 백중 기도를 해야 하기 때문에 한 줄 소감을 물어볼 여유도 없이 법문을 마쳤습니다.

의지하는 마음에 대해 물어본 질문자는 유튜브 실시간 댓글창에 자신의 한 줄 소감을 남겼습니다.

“오늘 스님께 소감을 말씀 못해서 아쉬웠습니다. 여기라도 남깁니다. 제 인생의 핵심적인 문제였기 때문에 무겁게 질문했는데, 기지도 못하면서 날려고 한다는 스님의 답변에 너무 가벼워졌습니다. ‘지금 이대로 괜찮다’, ‘자기 마음을 자기가 받아줘라’ 이런 말들보다 더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 말씀에 핵심이 다 담겨있구나 느꼈습니다. 스님, 감사합니다.”

홀가분해진 질문자의 소감 한 줄을 뒤로 하고 온라인 백중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전 세계가 온라인으로 연결되어 여법하게 천도재 의식을 한 후 수행법회가 끝났습니다.

내일은 새벽에 서울로 이동하여 병원 진료를 받은 후 문경 수련원으로 이동해 저녁에는 청춘톡톡 즉문즉설 강연을 생방송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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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근

감사합니다

2021-08-18 21:33:54

은주

“ 의지처를 불사르라 “
제가 제 인생의 주인입니다

2021-08-08 10:00:37

성선희

40년 동안 의지하고만 살아왔습니다.(너무 많이 받았지만 그 소중함을 몰랐을 때)--새로운 식구들의 의지처가 되겠다 했습니다.(7년간 사회를 얕보고 부딪혀 깨지고 건강과 가족 모든 걸 잃을 뻔)--의지처는 못 되어 주더라도 의지하지는 않겠다(근래 2년)--7년 전 하급이던 남편이 그 사이 상급이 되어 저에게 의지하라 하니 매사에 감사하고 행복입니다^^

2021-08-04 23:4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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