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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두북 수련원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치고 농사일을 하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스님은 일찍 나와 비닐하우스 4동에서 비트를 다 뽑고 근대를 수확하고 있었습니다. 지난번에 물길을 내고 물 양을 조절한 결과 이제 비닐하우스에 물이 고이지 않았습니다.
“스님, 손님들은 함께 울력하러 안 오셨네요?”
“어제 새벽 2시 반 까지 이야기를 나눠서 다들 쉬고 있어요.”
“스님도 쉬셔야 하지 않으세요?”
“나야 매일 하는 일이니까요.”
스님은 평소와 다름없이 울력을 계속했습니다.
근대를 한 바구니 가득 수확하고 비트를 다듬었습니다. 누렇게 상한 잎은 뜯어내고 잔뿌리를 잘라냈습니다. 잎은 잎대로 뿌리는 뿌리대로 다듬어 따로 담았습니다.
비트를 다 다듬고 상추도 뽑아 다듬었습니다.
비트, 비트잎, 근대, 상추를 다 수확하고 울력을 마쳤습니다.
농사일을 마치고 두북 수련원으로 돌아와 발우공양을 했습니다. 어제 이곳을 방문한 도법 스님과 지홍 스님 일행분들도 발우공양에 함께 참석했습니다.
발우공양을 마치고 두북 공동체 대중이 도법 스님과 지홍 스님 일행분들에게 삼배로 인사드리며 한 말씀을 청했습니다. 두 분은 두북 수련원을 둘러본 소감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먼저 도법 스님이 소감을 이야기했습니다.
“요즘 대부분의 절에서는 발우공양을 하지 않는데, 정토회는 발우공양을 약식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전통적인 방식 그대로 하고 있네요. 그래서 마치 수련하러 온 기분이 들었습니다. (웃음)
한국 불교 전체 차원에서 봤을 때 정토회는 꼭 있어야 할 단체라고 생각될 정도로 활동을 참 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점에 대해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고, 그에 따라 기대도 많이 하게 되는 단체인 것 같아요.
자연 생태적인 가치가 화두가 되고 있는 시대에 정토회가 이렇게 농촌에 자리 잡고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습니다.”
도법 스님은 특별히 한국 불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말씀도 나누어 주었습니다. 법문을 경청한 후 궁금한 점에 대해 묻고 답하는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습니다. 지홍 스님이 먼저 두북 공동체 대중들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법륜 스님이 대중들 중에 힘들어서 우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나름대로 각오를 하고 여기에 들어와서 살 건데 왜 우는지 궁금하네요.”
한 명씩 가볍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밭이 계속 많아져서... 일이 성질대로 안 될 때 분노의 표현인 것 같아요.”
“법당 철수하면서 물건들이 막 밀려들어오는데 정리를 다 해낼 수가 없으니까 그냥 눈물이 났어요. 아마도 처음 여기 들어올 때 각오를 하고 들어오지 않아서 그랬나 봐요.” (웃음)
“저는 가끔 개인생활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올라올 때가 있습니다. 정토회는 전체 대중이 한방에서 자지 각 방을 쓰는 사람이 없거든요.”
대중의 이야기를 듣고 지홍스님도 한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일이 많아서 힘들고, 규칙이 있어서 힘들고, 그런 말씀들을 하셨는데, 그래서 밖으로 나가서 살면 정말 달라질까요? 밖으로 나가면 더욱더 오욕의 노예가 되는 삶을 살게 된다고 봐요. 저는 정토회가 해탈 특공대라고 생각합니다. 조금 힘든 부분이 있더라도 인류 사회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간다는 측면에서 이 안에서 사는 것이 더욱더 가치가 있다고 봐요. 여러분들이 한국 불교의 미래를 만들어간다는 책임감을 좀 가져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에 대해 스님이 웃으며 한마디 덧붙였습니다.
“책임감 때문에 힘들다고 하는데 또 책임감을 더 주시면 어떡해요?” (웃음)
마지막으로 같이 온 일행분들도 소감을 말했습니다.
“정토회가 특공대인 줄 알았는데 여기도 사람이 사는 곳이구나 느껴져서 안심이 되었습니다. 일사불란하게 활동하는 속에서도 인간적인 따뜻함을 많이 느끼고 갑니다.” (웃음)
“실상사에서는 4시간만 일하면 나머지는 자유롭게 쉴 수 있도록 해주거든요. 여러분들이 실상사에 오시면 아주 행복하게 잘 사실 것 같아요. 정토회와 실상사가 서로 교류를 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시 법륜 스님이 한마디를 덧붙였습니다.
“실상사는 4시간을 제외하고 자유롭게 일한다고 하는데, 정토회는 24시간 자유롭게 일하고 있어요.” (웃음)
짧은 시간이었지만 법담을 나눌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두북 공동체 대중은 도법 스님과 지홍 스님 일행분들에게 삼배로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발우공양을 마치고 스님은 손님들이 떠나는 길을 배웅했습니다.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도 언제든지 오세요.”
발우공양이 늦게 끝나서 정토대전 회의 시간도 한 시간 늦어졌습니다. 문경수련원과 아도모례원에서 법사님들이 두북 수련원에 속속 도착해 회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11시가 되어서야 정토대전 경전팀 회의를 시작했습니다. 오늘도 지난주에 이어서 부처님의 다양한 교화 사례를 준비해 와서 발표했습니다. 함께 읽고 나서 최종적으로 스님의 점검을 받는 과정을 반복했습니다.
부처님의 일생에 관계된 경전 검토가 일차적으로 거의 마무리되었기 때문에 오늘은 근본 교리에 대한 내용 중 ‘중도’, ‘사성제’에 대한 경전 속 부처님 말씀에 대해 정리해 와서 스님의 점검을 받았습니다. 그중 ‘사성제’에 대한 부처님 말씀 중에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르게 다가오는 부분을 새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 네 가지 법이 있다. 그것을 성취하면 큰 의왕(醫王)이라 부르나니 왕의 필요와 왕의 분별에 호응하는 것이니라. 무엇이 그 네 가지인가? 첫째는 병을 잘 아는 것이요, 둘째는 병의 근원을 잘 아는 것이요, 셋째는 병을 치료하는 방법을 잘 아는 것이요, 넷째는 병이 치료된 뒤에 다시 도지지 않게 하는 것을 잘 아는 것이니라.” - 잡아함 제15권 양의경(良醫經)
이 구절을 읽고 나서 스님이 사성제에 대해 새롭게 해석해 볼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고집멸도(苦集滅道)를 새롭게 해석해 봐도 괜찮을 것 같네요. ‘병을 알고, 병의 원인을 알고, 병의 치료법을 알고, 병이 재발하지 않도록 한다’ 하는 비유를 참고한다면 고집멸도를 ‘괴로움을 알고, 괴로움의 원인을 알고, 괴로움의 소멸을 알고, 괴로움이 재발하지 않도록 한다’ 이렇게 해석해 볼 수 있을 것 같거든요. ‘멸(滅)’이 병이 치료된 것을 뜻한다고 한다면, ‘도(道)’란 그 병을 재발하지 않게 한다는 의미가 되는 거죠. 즉, ‘도(道)’를 통해서 괴로움을 없애나간다는 뜻이 아니라 괴로움의 원인을 알아서(집, 集) 그 즉시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데(멸, 滅) 그 괴로움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늘 깨어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 ‘도(道)’라고 해석해 볼 수 있는 거죠.”
“즉문즉설이 진행되는 과정과 같네요.”
“그동안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해석이 애매했거든요. 그런데 새롭게 고집멸도(苦集滅道)를 해석해 본다면, 괴로움의 원인이 집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집(集)이고, 그 집착을 놓아버리면 괴로움이 없어져버린다는 것이 멸(滅)이고, 그런데 또 괴로움이 발생하니까 괴로움이 다시 일어나지 않으려면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 도(道)라는 겁니다.
‘이렇게 수행하면 괴로움이 소멸된다’ 하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기존의 해석은 부처님이 병의 치료에 대해 비유한 말씀과 그 뜻이 안 맞거든요. 기존의 해석은 ‘점수돈오(漸修頓悟)’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꾸준히 닦으면 괴로움이 소멸되어 깨달음에 이른다는 의미죠. 이것은 깨달으면 즉시 괴로움이 소멸되고 괴로움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점점 닦는다는 ‘돈오점수(頓悟漸修)’와는 다른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문즉설에서도 그렇죠. 괴로움을 자각해서 말하고, 그 괴로움의 원인을 알게 되고, 즉시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데, 다시 그 괴로움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지죠. 부처님이 대중과 대화했던 모습을 보면 바로 깨달음을 얻잖아요. 이에 따르면 ‘이렇게 수행하면 괴로움이 없어진다’ 하는 의미라기보다는 ‘괴로움이 재발하지 않도록 늘 깨어있도록 수행해라’ 하는 의미로 볼 수 있죠.”
“명상과 깨어있음도 같은 선상에서 볼 수 있나요?”
“명상을 해서 깨닫는다는 말은 현실적으로는 안 맞습니다. 오히려 명상을 해서 깨어있는 상태를 유지한다고 봐야죠. 지금까지는 고집멸도를 ‘괴로움의 원인을 밝히면 괴로움을 소멸할 수 있다. 이렇게 수행하면 괴로움이 없어진다’ 이렇게 해석해왔거든요. 그런데 부처님이 말씀하신 병의 비유에 따르면 일단 병의 원인을 알아 병을 치료해버리고, 그 다음에 재발하지 않도록 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외에도 경전 속에 등장하는 중도와 사성제에 대한 다양한 부처님 말씀을 함께 검토해 보았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합시다.”
법사님들은 스님에게 삼배로 인사를 한 후 회의를 마쳤습니다.
곧바로 오후 4시 30분부터는 공동체 법사단 회의를 시작했습니다. 여름철 온라인 명상수련과 공동체 하안거 일정, 정토사회문화회관 관리방안 등 다양한 현안에 대해 토론하고 점검한 후 회의를 마쳤습니다.
하루 종일 회의를 하다 보니 해가 저물었습니다. 저녁 7시 30분부터는 금요 즉문즉설 생방송을 시작했습니다. 오늘도 2천여 명의 시청자들이 시도별 즉문즉설 밴드를 통해 생방송에 접속했습니다.
오늘부터는 스님이 연단 앞에 서서 강의를 해보기로 했습니다. 그동안 온라인 방송을 하면서 앉은 채로 법문을 하다 보니 역동성이 조금 떨어진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예전에 강연장에서 강의할 때처럼 서서 강의를 해보았습니다.
먼저 스님이 인사말을 건넸습니다.
“지난 한 주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저는 요즘 매일 농사를 지으면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는 수확한 농산물을 트럭에 싣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배달을 해주는 일을 했습니다.
불교에서 운영하는 요양병원에도 나누어주고,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급식센터에도 나누어주고, 개신교에서 운영하는 장애인 거주시설에도 나누어주었습니다.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서 우리만 먹을 게 아니라 주위의 어려운 이웃들과 나눠먹는 일 또한 농사짓는 것만큼이나 큰 기쁨이었습니다.
요즘은 여름작물을 수확한 자리에 가을에 수확할 작물들을 심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주말에 집에서 스마트폰만 보지 말고 이웃이나 자연과 벗하는 시간을 가져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시간을 갖는 것은 우리의 정신건강에 도움이 되니까요. 물론 코로나 방역 수칙을 꼭 지켜주시고요. 그럼 오늘도 대화를 나눠 봅시다.”
이어서 즉문즉설을 시작했습니다. 다섯 명이 사전에 질문을 신청하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저의 고민은 친정어머니와의 관계입니다. 저는 무남독녀입니다. 저를 사랑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하지만 만나면 불편하고 화가 납니다. 어머니가 근심 걱정이 워낙 많아서 제가 많이 힘듭니다. 그런 제 모습을 보고, 제 딸이 할머니와 닮았다고 해서 마음에 걸립니다. 어떻게 하면 어머니를 이해하는 너그러운 딸이 될 수 있을까요?”
“어머니가 어떻게 할 때 화가 나고 스트레스를 받습니까?”
“만나면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하세요. 저를 걱정하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저도 오십이 다 되어 가는데 잔소리로 들려요. 좋은 마음으로 만나러 갔다가 다투고 오는 일이 반복되면서, 어머니를 만나는 것이 두렵기도 합니다.”
“그럼 만나지 않으면 되잖아요?”
“만나지 않으면 제 마음이 불편합니다.”
“만나도 불편하고 만나지 않아도 불편하면 어머니 문제예요, 질문자 문제예요?”(웃음)
“제 문제입니다.”
“자기 문제라고 봐야 해결책이 나와요. 어머니와 관계없이 내 마음을 바꾸면 되기 때문이에요. 어머니 문제라면 어머니가 바뀌거나 어머니를 만나지 않으면 됩니다. 그런데 질문자는 어머니를 만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잖아요. 그럼 만나면 돼요. 만났더니 어머니가 잔소리를 해서 또 힘들면 만나지 않으면 됩니다. 만나고 안 만나고는 질문자의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질문자가 어머니를 만나도 불편하고 만나지 않아도 불편하다면 어머니의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에요. 질문자는 지금 어머니가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어머니가 문제라는 생각을 내려놓아야 해결책을 찾을 수 있어요.
이렇게 저와 대화할 때는 자신의 문제라고 받아들여지지만, 일상으로 돌아가면 다시 잔소리하는 어머니가 문제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고치기가 어렵기 때문에 제가 안 만나면 되지 않냐고 물어본 거예요. 어머니를 만나지 않아도 됩니다. 어머니를 변화시키기는 어려워요. 다른 사람을 바꾸고 싶다면 강력한 힘을 가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한 번만 더 잔소리하면 다시는 안 올 거예요!” 하고 일 년 동안 가지 않는다면 어머니도 조금은 바뀔 수도 있겠죠.
어머니가 잔소리하지 않겠다고 하고 또 잔소리하는 거나 질문자가 어머니를 만나지 않겠다고 하고 또 만나는 거나 똑같아요. 보통 사람들이 술 마시지 않겠다고 하고 술 마시고, 화내지 않겠다고 하고 화내고, 잔소리하지 않겠다고 하고 잔소리 하잖아요. 모두 습관이 되어서 그렇습니다. 질문자와 어머니도 습관이 된 것이에요. 이걸 까르마라고 합니다. 질문자의 딸이 ‘엄마도 할머니랑 똑같아’라고 한 말을 잘 생각해 봐야 합니다. 딸이 보기에는 질문자가 할머니를 문제로 삼지만, 질문자도 할머니처럼 또 반복한다는 것이지요. 질문자는 어머니가 하는 것을 보고 듣고 자랐기 때문에 좋고 싫은 마음에 관계없이 자기도 모르게 그대로 따라 하는 것입니다. 옛말에 ‘모진 시어머니 밑에 모진 며느리 난다’라는 말이 있잖아요. 듣고 본 것이 그것밖에 없어서 좋든 싫든 자동으로 따라 하게 된다는 거예요.
어머니의 눈에는 자식이 오십이 되어도 어린아이로 보입니다. 그래서 팔십 넘은 어머니가 육십 넘은 아들에게 ‘길 조심해라, 밥 잘 챙겨 먹어라’하고 잔소리를 하는 거죠. 어머니가 성인 수준이라면 몰라도 세상 모든 어머니가 다 그렇습니다. 자식을 어릴 때부터 돌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늘 근심 걱정하는 습관이 든 거예요. 게다가 자식이 하나밖에 없으면 더하겠죠? 오랫동안 밴 습관은 고치기 힘듭니다. 만약 어머니가 수행을 한다면 변할 수도 있겠지만, 질문자도 못 하는 걸 어머니에게 바랄 수는 없잖아요.
질문자는 어머니를 뵐 때마다 모순된 감정을 느낄 겁니다. 사랑하는 마음에 어머니를 찾았지만 잔소리를 들으면 화가 나고, 화내고 돌아오면 또 어머니의 사랑이 떠올라서 가슴 아픈 모순이 반복되는 거예요. 어머니의 잔소리는 습관입니다. 술 먹는 습관, 화내는 습관처럼 자식을 돌보던 습관이 배어서 자동으로 말이 나오는 거예요. 어머니는 그 습관을 고치기가 어려워요. 질문자가 어머니의 잔소리를 듣고 싶지 않으면 어머니를 만나지 않으면 돼요. 스무 살이 넘었으면 부모를 만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질문자도 어머니를 찾아뵙는 게 습관이 되어서 가야 한다면 가야겠죠. 질문자는 나이가 오십이 다 되었다고 하지만 아직도 엄마가 그립고 어리광을 피우는 습관이 남아 있는 거예요. 어머니를 위해서 만나는 게 아니라 본인이 허전하고 그리워서 어머니를 찾는 겁니다. 만약 어머니가 돌아가신다면, 의연하게 장례를 치르고 집안 정리를 하겠어요, 아니면 슬퍼서 울고 있겠어요?”
“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아직 어린아이라는 거예요. 질문자가 어린아이 같은 행동을 하니까 어머니가 계속 걱정하는 겁니다. 보통 사람들처럼, 어머니는 잔소리하고 질문자는 어머니에게 잔소리한다고 화내고, 돌아서면 화낸 걸 후회하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울고 그러면서 사세요.
그렇게 살기 싫다면 본인의 습관을 바꾸어야 하고, 바꾸기 어렵다면 어머니에게 가지 않아야 합니다. 계속 어머니를 만나고 싶다면, 어머니의 습관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노인의 습관은 바꾸기 어렵습니다. 노인의 습관은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길 말고는 달리 길이 없습니다. 나이가 들면 대부분 했던 말을 하고 또 합니다. 노인에게 젊은 사람처럼 행동하라고 할 수 없듯이 어머니에게 어머니가 아닌 것처럼 행동하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어머니는 자신이 키운 자식이기 때문에 나이와 관계없이 자식이 어린아이로 보입니다. 어머니가 걱정하시면 이렇게 말하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어머니. 걱정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렇게 어머니의 걱정하는 마음을 감사하게 여기면 어머니가 잔소리를 해도 화가 나지 않을 거예요. 그게 싫다면 어머니를 만나지 않아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어머니를 만나지 않는다는 것은 어머니를 고쳐보겠다는 거예요. 질문자는 어떻게 하겠어요?”
“제가 변해보겠습니다.”
“어떻게 변할 거예요?”
“어머니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겠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들지 않으면 어떻게 해요?”
“노력해 보겠습니다.”
“노력하는 게 아니라 진짜 고마운 마음이 들어야 해요. 어머니는 어릴 때 키우던 그 생각에 젖어 있어요. 자식의 겉모습이 어른이 되어도 어머니의 마음에는 아직도 어린아이입니다.”
“그런데 스님, 제가 고민이 있어도 친정 부모님께는 말을 잘 못 해요. 만약 건강 문제나 고민이 있을 때 말씀을 드리면 저보다 더 힘들어하시거든요. 그런 모습을 보면 더 힘들어집니다.”
“그런데 건강 문제를 의사와 상의하지 왜 부모와 상의해요? 그런다고 치료에 무슨 도움이 돼요?”
“제가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우연히 알게 되면 그걸 너무 크게 생각하세요.”
“모든 부모가 자식이 아프면 다 걱정을 해요. 질문자도 아이가 아프면 걱정을 하지 않나요? 자식이 없는 나도 아는데 아이를 키우는 질문자가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해요? 나 아픈 것은 참아도, 아이가 아플 때는 내 살이라도 떼어주고 싶은 게 부모 마음이잖아요. 그런 부모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지요. 건강 문제는 가능하면 어머니에게 말하지 않으면 돼요. 어머니가 다른 사람한테 듣고 알게 되더라도 ‘어머니,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심할게요.’라고 하면 됩니다.
저도 손가락을 다쳤는데 걱정하는 댓글을 많이 올리잖아요. 여러분이 걱정한다고 제 손가락이 낫는 게 아니죠. 손가락이 빨리 나으려면 일을 잠시 놓아야 하는데, 저는 일을 해야 하니까 다친 부분이 영향을 받지 않도록 깁스를 하고 조심해서 일을 합니다. 그러면 불편하죠. 세수할 때도 불편하고 일할 때도 불편하지만 불편을 감수해야 합니다. 인생은 주어진 조건에서 선택하고, 그 선택의 결과를 받아들이고 책임을 져야 합니다. 달리 뾰족한 수가 없어요. 어떤 사람은 하나님, 부처님한테 빌면 뾰족한 수가 나온다고 하지만 제가 살아보니 그런 뾰족한 수는 없습니다. 저는 그런 요행을 바라지 않고 제가 한 선택을 책임지고 살뿐이에요.
어머니가 걱정하는 게 싫다면 어머니에게는 이야기하지 말아야 해요. 비밀이라서가 아니라 도움이 되지 않으니 알릴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만약 어머니가 알게 되면 자식을 걱정하는 것은 당연하니까 감사하다고 하고 넘어가면 됩니다. 제가 다쳤을 때 여러분이 걱정해주면 고맙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사실 어머니는 많이 걱정하지는 않을 거예요. 마음 쓸 일이 자식밖에 없어서 그렇죠. 자식이 아프다고 하니까 볼 때는 걱정하지만 심하게 걱정하지는 않아요. 그런데 질문자가 그걸 심각하게 받아들여 자꾸 해명하려 드니 힘들어지는 거예요. 그럴 때는 그냥 가볍게 ‘괜찮아요’ 하고 받아넘기면 됩니다.
어린아이에게는 부모가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아이에게 이래라저래라 한다고 바뀌지 않습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아이에게 하라고 하면 안 됩니다. 나는 늦게 귀가하면서 아이에게는 빨리 오라고 하거나 나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아이에게는 공부하라고 하면 반발만 사게 됩니다. 부모라서 표현하지 못할 뿐이지 아이 마음속으로는 ‘너는 잘하나!’ 이런 저항감이 쌓여요. 크면 반항하게 됩니다.
노인에게는 내가 맞춰야 합니다. 하라고 하면 ‘네 알겠습니다.’ 하고 해보고, 그 다음에 ‘안 되네요.’ 하면 돼요. 먼저 안 된다고 하지 말고 나중에 안 된다고 하는 거예요. 내일 오라고 하면 ‘네’ 하고 이튿날 전화해서 ‘바빠서 못 갑니다’라고 하면 됩니다.”
이 외에도 사전에 질문을 신청한 4명에게 질문을 받고 현장에서 2명 더 질문을 받았습니다.
질문에 대해 답변을 다 한 후 화상회의 방에 입장한 분들 중에 즉석에서 두 명의 질문도 추가로 받았습니다. 질문자들의 한 줄 소감을 듣고 나서 마지막으로 스님이 닫는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만큼 이루어질 수가 없어요. 자신이 원하는 만큼 이루어지지 않아서 실망을 하게 되는 것이지, 세상에 무슨 특별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농사도 그렇습니다. 적절하게 비가 오고, 적절하게 온도가 조절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날씨는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습니다. 어떨 때는 홍수가 나도록 비가 많이 오고, 어떨 때는 가뭄이 들도록 비가 안 옵니다. 어떨 때는 폭염이 오고, 어떨 때는 냉해가 옵니다.
그렇지만 또 달리 생각해보면 자신이 바라는 만큼은 농사가 안 되었다고 해도 툰드라 지대처럼 농사가 불가능한 날씨는 아니잖아요. 그러니 이 조건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충분히 감사한 마음을 가질 수도 있는 겁니다. 이런 마음가짐을 가져야 어떤 일이든 지속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도중에 그만두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세상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을 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전에 백만 원 받던 사람이 지금 칠십만 원 받는 상황이 되었다면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때도 직장이 없는 사람과 비교해본다면 월급을 받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만족해버리라는 의미는 아니에요. 일단 최소한의 몫이라도 확보한 후에 그다음에 더 크게 도약할 기회를 준비할 때 안정적인 생활을 유지해나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지 않고 무턱대고 기다리다 보면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해질 수밖에 없어요. 발이 땅에서 떨어져 공중에 둥둥 떠 있으면 불안한 것과 같습니다. 두 발을 땅에 딱 딛고 나서 멀리 봐야 합니다.”
손을 흔들며 시청자들에게 인사를 하고 생방송을 마쳤습니다. 밤 9시가 넘었습니다.
내일은 새벽에 천일결사 기도 생방송을 한 후 아침 일찍 농사일을 하고, 하루 종일 경주 남산 순례를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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