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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문경수련원에서 생방송으로 천일결사 기도를 하고 하루 종일 공동체 상근자들과 새해맞이 수련을 했습니다.
어제 저녁 문경수련원에 도착해 9시 전에 잠이 든 스님은 잠깐 눈을 붙인 후 12시에 일어나 새벽 4시까지 원고 교정을 하였습니다. 4시부터는 촬영을 시작하기 전 꺼진 카메라 앞에 앉았습니다. 연말 명상 수련을 마치고 매일 새벽 명상을 이어오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새해 첫 천일결사 기도 생방송이 있습니다. 명상을 하고 4시 45분부터 온라인으로 함께 예불을 드렸습니다.
온라인으로 접속한 4천여 명과 함께 정성껏 예불을 한 후 5시 정각에 천일결사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삼귀의, 수행문, 참회, 108배, 명상, 경전 독송을 차례대로 함께 했습니다.
사람들이 어떤 것을 희망할지라도
결과는 다르게 나타난다.
기대에 어긋나는 것도 이와 같느니라.
보라, 세상의 저 모습을!
사람이 백 년을 살거나
그 이상을 산다 할지라도
결국은 친족들을 떠나
이 세상에서의 생명을 버리게 된다,
그러므로 존경하는 사람의 말씀을 듣고,
죽은 사람을 보았을 때에는
‘그에게는 이미 내 힘이 미치지 못하게 되었구나’라고 깨달아
슬퍼하거나 탄식하지 마라.
기도가 끝나고 스님은 카메라를 향해 돌아앉아 법문을 시작했습니다.
“기도 잘하셨습니까? 오늘은 10차 천일결사 3차 백일기도 마지막 날입니다. 내일은 3차 백일기도를 회향하고 4차 백일기도를 입재합니다. 입재식에 다 참여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읽은 경전에는 세 가지 생각해볼 점이 있습니다. 첫째, 인생에서 원하는 일이 다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둘째,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해서 고통이 따릅니다. 셋째, 가족이나 친지가 죽었을 때 슬피 운다고 살아 돌아오는 게 아닙니다. 자기와 타인을 소모시키는 행동일 뿐입니다.”
스님은 세 가지를 하나하나 자세하게 설명해주었습니다.
“누구나 100년을 전후로 해서 목숨이 다하게 되어 있습니다. 다만 평균보다 일찍 생명을 다하면 60년 또는 그보다 적게 살다가 갈 수도 있고, 평균보다 길게 살면 100년 남짓 살다가 가게 됩니다.
생명이 일찍 다하면 아쉬워하고 100년 가까이 살면 좋아하기도 하는데, 하루살이가 오후 5시에 죽으나 저녁 10시에 죽으나 사람이 볼 때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이러나저러나 하루살이는 하루를 살다가 가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천상의 시간에서 내려다보면 사람이 60살에 죽으나 100살에 죽으나 큰 차이가 없습니다. 일찍 죽는다고 슬퍼할 일도 아니고, 또 100살까지 살았다고 좋아할 일도 아닙니다.
문제는 몇 살까지 사는지가 아니라 사는 날까지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산에 심은 나무도 자라다가 언젠가 죽고, 동물들도 제각각 언젠가 죽습니다. 사람 역시 생명의 일부이기 때문에 태어나면 마땅히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죽지 않는 것은 자연의 법칙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형성된 것은 소멸하기 마련입니다. 존재하는 동안에는 유용하게 잘 쓰여야 하고,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존재가 흩어질 때가 되면 아쉬워할 것도 없습니다. 특히 나이가 들어서 욕심을 내거나 재물을 모으거나 권력을 탐하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짓입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도 충분히 다 쓰지 못하고 죽을 텐데, 그때 새로운 것을 더 모아서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죽어서는 한 푼 가져갈 수도 없고, 사람 하나 데려갈 수도 없습니다.
인생을 행복하게 살려면 이 부분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냥 평소에 들었던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말고 내가 이 부분을 정말 알고 있는지 직시해야 합니다. 직시할 수 있으면 늙고 죽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슬픔을 없앨 수 있습니다.
가족이 세상을 떠나게 될 때 너무 슬피 우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만약 슬퍼한다고 죽은 가족이 다시 돌아올 수 있다면 한번 해볼 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슬퍼한다고 해서 죽은 가족이 돌아올 수 없다면 ‘도대체 무엇을 위해 우는가’ 하고 생각해봐야 합니다. 떨어진 낙엽을 보면 슬퍼할 게 아니라 거름으로 쓰고, 아직 살아있는 잎들은 굳이 낙엽으로 떨어뜨리지 말고 더 살도록 놔두어야 합니다. 아직 붙어있는 잎들도 때가 되면 다 떨어집니다. 가을이 돼서 낙엽이 떨어진다고 슬퍼하거나, 다른 잎들보다 더 일찍 떨어졌다고 해서 슬퍼할 일이 아닙니다.
가족 중 누가 돌아가시게 되면 죽고 나서 장례를 성대하게 치르기보다는 살아있을 때 찬물 한 그릇 더 떠드리고 대화 한 번 더하는 게 훨씬 낫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슬픈 감정이 일어나는데, 상대방이 떠나서 슬픈 것이 아니라 사실은 내가 가지고 있던 것을 잃어버렸을 때 느끼는 상실감 때문에 슬픈 것입니다. 그때는 자신의 모습을 직시하고, 지나친 감정 낭비를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그렇다고 기뻐하라는 게 아니라 슬퍼할 일이 아님을 직시하라는 겁니다.
이번 주 읽은 경전에는 이런 가르침이 요약해서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 글을 잘 읽고 그 뜻을 잘 새긴다면 하루를 살더라도 괴로움 없이 조금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앞으로 읽을 경전에도 좋은 말씀들이 계속 나오니까 꾸준히 읽으시기 바랍니다. 내일 10-4차 입재식에 다시 뵙겠습니다.”
방송을 마치고 아침을 간단히 먹은 후 오전 8시부터 3수련장에서 3년 이상 공동체에 상주한 상근자들과 새해맞이 수련을 시작했습니다.
먼저 새해를 맞아 스님께 삼배를 드렸습니다.
“원래 연말연시에 다 함께 일출도 보러 가곤 했었는데요. 올해는 정부가 협조를 요청했기 때문에 저희들부터도 일출은 보러 가지 않기로 했습니다. 오늘 함께 이야기 나누어 보도록 합시다.”
상근자들은 연말에 문경에서 4박 5일간 명상수련을 하고, 어제는 도반들과 탁마 하며 자신의 수행 과제를 돌아보았습니다. 먼저 돌아가며 명상수련을 마치고 작성한 소감문을 읽고 자신의 수행과제를 발표했습니다. 진솔하고 공감되는 대목마다 웃음이 터졌습니다.
스님은 한 명 한 명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정리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도반들의 조언이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 변화에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다시 한번 짚어주었습니다.
“말씀 잘 들었습니다.
도반들이 나에게 조언해주는 것이 수행에 큰 도움이 되는 이유는 내가 나 자신을 잘 아는 것 같지만 우리의 무의식에는 항상 자신을 합리화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내가 문제입니다’라고 말을 해도 마음속에서는 ‘그래도 내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이렇게 합리화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어떤 사건이 생기면 자기의 과거 경험 등 온갖 것을 뒤져서 변명 거리를 만들고 자기 입장을 정당화 하려는 정신작용이 일어나게 됩니다.
요즘 유튜브에서 동영상을 보다 보면 옆에 연관 동영상이 계속 뜨는데, 그 연관 동영상이 뜨게 하는 알고리즘이 우리의 정신작용과 아주 비슷합니다. 우연히 동영상 하나를 보면 그것과 관계된 동영상이 계속 옆에 뜹니다. 그것처럼 어떤 사람과의 관계에서 기분이 나쁘면 그 사람에 대해 기분 나빠할 수밖에 없는 모든 과거의 사건들이 머릿속에서 매우 빨리 돌아갑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 내면에 그 사람을 미워할 수밖에 없는 정당성을 확보합니다. 이는 우리의 정신작용이 갖는 특성입니다.
또 반대로 자기에게 어떤 문제가 있다는 것이 자각되면 그것을 시정하려는 정신 작용이 무의식 속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이런 계기는 명상수련을 통해 일어날 수도 있고, 도반들이 나에게 해주는 조언을 통해 만들 수도 있습니다.
자기를 고쳐야겠다고 아무리 각오해도 잘 안 고쳐집니다. 그 결과 자기를 자책하는 병이 또 생깁니다. 자기 변화를 하려면 각오를 할 게 아니라 자각을 해야 합니다. 자기 모습을 자각하게 되면 안 되는 자기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자기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기를 합리화하는 것과는 전혀 의미가 다릅니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할 때 변명하는 게 합리화라면 인정하는 것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자기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할 때 변명을 하거나 안 되는 자기를 문제 삼아서 자신을 학대합니다. 그런데 자각을 하게 되면 못 고치는 자기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저도 그걸 과제로 삼고 있습니다’ 하고 편안하게 받아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입으로는 자기가 잘못하고 있다고 계속해서 말을 하는데도 그 밑바닥에 자각이 없기 때문에 가만히 말을 들어보면 첫 두 마디는 잘못했다고 하면서 끝 두 마디는 그래도 내가 이럴 수밖에 없었다는 말을 합니다. 이야기를 계속 들어보면, 잘못했다고 했다가 또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했다가 다시 또 잘못했다고 했다가 또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합니다. 이 사람은 마음 밑뿌리에서는 아직 자기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냥 자기 정당성을 주장하는 사람은 고집이 세다고 말합니다. 늘 자기가 잘못했다고 말은 하는데 끝에 가서는 그런 자기를 이해해달라는 변명이 붙습니다. 이런 사람은 어찌 보면 엿처럼 끈적거리는 사람입니다. ‘그건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렇게 깔끔하게 끝이 나야 하는데, ‘잘못은 했지만 나에게 이런 사정이 있으니 이해해 달라’ 하고 자꾸 말을 덧붙이게 되면 끈적끈적하게 되는 거예요. 아직 마음속에서 자각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변명과 자학이 겹쳐져서 생기는 문제예요.
어떤 사람은 변명을 하고, 어떤 사람은 자학을 하고, 어떤 사람은 변명과 자학이 섞여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자기를 자각하게 되면, 상대방이 지적을 할 때도 엿처럼 끈적끈적하게 말하는 게 아니라 ‘아, 그렇습니다. 제가 봐도 그런 문제가 있네요’ 하고 딱 끝이 납니다. 수행자라면 한두 마디를 하더라도 뒤에 끈적끈적한 변명이 따라오지 않고 깔끔하게 끝이 나도록 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의 지적을 받았을 때 ‘나는 안 그렇다’ 하고 받아치거나 변명하는 게 대부분입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고 그 생각이 무너지면 자학이 일어납니다. 그런 다음에는 변명과 자학이 섞여서 나옵니다. 사람에 따라 증상이 조금씩 달라도 모두 자기를 움켜쥐고 자기 정당성을 주장하는 태도입니다. 아직 자각이 정확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단계이기 때문입니다. 이 단계를 넘어서서 자각이 이루어지면 아무런 변명 없이 ‘아, 나에게 이런 문제가 있구나’ 하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자각이 일어나서 자신의 과제를 명심하고 있으면, 굳이 그 문제들을 고치려고 결심을 하지 않아도 같은 잘못을 반복하는 자기를 삶 속에서 늘 발견하게 돼요. 화를 내지 않는 것을 과제로 삼고 있으면 ‘지금 화를 내고 있네’ 이렇게 자각이 일어나게 됩니다. 예전에는 하루에 한두 번 정도 자각이 되었다면, 과제를 계속 명심하고 있으면 시간이 흐르면서 하루에 열 번, 스무 번 자각을 할 수 있게 돼요.
이렇게 자각이 정확히 되면 굳이 노력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바뀌는 쪽으로 마음이 움직입니다. 그렇게 공부를 해나가시길 바랍니다.”
이어서 명상을 하면서 궁금했던 점이나 평소 개인적으로 고민이 있었던 내용을 질문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한 명의 질문을 받고 나니 공양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럼 잠시 쉬었다가 12시에 다시 이야기 나눕시다.”
공양 시간에 스님은 자행 스님과 3년 이하 상근자들을 만나 새해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먼저 자행 스님께 인사를 드렸습니다.
“스님,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구십 이세입니다.”
“백세까지 건강하세요. 요새는 백이십 세입니까?”(웃음)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상근자들에게도 인사를 건넸습니다.
“명상 수련은 다 했어요?”
“네!”
행자원, 수련팀, 살림팀 등 문경수련원에서 각자 하는 일을 소개했습니다.
“내일 행자대학원 졸업식이 있으니까 그때 또 이야기 나눕시다. 수고하세요.”
“네, 고맙습니다.”
스님은 명상원으로 내려가 급한 업무를 처리하고 12시가 되어 다시 3수련장으로 올라왔습니다.
오후에도 이어서 질문을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먼저 도반들로부터 받은 수행과제가 구체적으로 와 닿지 않는다는 질문이 나왔습니다.
“오전에 스님께서 사람은 항상 자신을 합리화하는 성향이 있다고 해주신 말씀이 와 닿았는데요. 어제 저는 도반들에게 ‘마음을 좀 더 내라’라는 조언을 받았습니다. 백일출가 때부터 받은 조언인데 항상 억울한 마음이 남아 있어요. 나는 한다고 했는데 뭘 어떻게 더 해야 하는 건지,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에서 마음을 내라고 하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행자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른 사람들이 마음을 조금 더 내라고 하는 건 이해가 되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몰라서 생기는 문제 같아요. 내 입장에서는 마음을 낸다고 냈는데 더 내라고 하니까요.
이럴 때는 두 가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첫째, 내 나름대로 마음을 냈는데 상대방의 기대가 커서 생기는 문제인가. 둘째, 내 마음속에 움츠러드는 게 있는 문제인가.
지금 행자님의 마음속에 ‘나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당신들의 기대가 커서 나한테 자꾸 마음을 더 내라고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밑에 깔려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럴 때 변명을 하거나 항변을 할 게 아니라,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더 하라는 것인지 물어보면 됩니다.
‘주어진 조건에서 저는 제가 가진 역량껏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무엇을 어떻게 더 하라고 요구하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알려주십시오.’
이렇게 요청해서 내가 할 수 있는데 움츠려 들어서 안 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일을 더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내 나름대로는 이게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인지, 대화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상대방이 이야기를 하는데도 감이 안 잡히면, 꼭 이런 수련 시간이 아니라도 언제든지 알려달라고 요청해보세요. 그래야 구체적인 상황을 파악할 수 있죠.
이야기를 더 해봤는데 만약 사람들의 기대가 자기의 역량보다 커서 생기는 문제라면 그걸 다 맞출 순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다 이루어질 수 없듯이 상대방이 기대하는 것도 내가 다 들어줄 수 없습니다. 그럴 때는 이렇게 다시 요청하는 겁니다.
‘나를 좋게 생각하고 높이 평가해주는 것은 좋지만, 실제로 내가 그 기대에 미치질 못하니 이 부분을 감안해주세요’
마음을 더 내어달라고 요청을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더 내야 하는지 모르겠으면 ‘모르겠다’ 하고 있는 그대로 고백을 하면 됩니다. 그러면 조금 더 지켜보고 서로 알려줄 수가 있으니까요.
이건 시비가 아니라 요청에 의해서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것이니까 상처를 덜 받을 수가 있습니다. 바로 이 부분이 도반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내가 나를 다 모를 수 있어요. 내가 다 아는 것 같지만 상대방의 문제제기를 들어보면 누가 옳은지 말할 수가 없습니다. 서로 입장이 어떻게 다른지 이야기를 해봐야 알 수 있어요.
상대방이 자꾸 요구한다고 해서 형식적으로 ‘알겠습니다, 마음을 더 내겠습니다’ 하고 말하는 건 인사치레일 뿐이기 때문에 변화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럴 때는 자기 상태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여기서 어떻게 더하면 되는지 지금 말할 수 없으면 상황이 발생할 때 그 자리에서 바로 알려달라고 요청을 하면 돼요.
오늘 대중들에게 요청을 하면 대중들이 같이 살다가 그런 일이 생기면 바로 말해 줄 거예요. 대신에 그때 지적을 해도 성질을 안 내겠다는 약속을 미리 해야 됩니다. (모두 웃음)
‘지적을 해주면 흔쾌히 받고, 나를 위해 지적해줘서 고맙다고 삼배를 하겠습니다.’
이렇게 지금 약속하면 대중들도 마음 놓고 알려줄 겁니다. 속으로는 분별하면서 개선을 위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으니까 발전이 없는 거예요. 대중들에게 정말 청하고 싶어요? 별로 청하고 싶지 않아요?”
“청하겠습니다.”
“그럼 삼배를 하면서 청해 보세요.”
질문한 상근자는 벌떡 일어나 두 손을 모으고 삼배를 했습니다. 도반들도 합장을 하며 삼배를 받았습니다. 삼배를 마치자 스님이 말했습니다.
“따라 해 보세요.
‘여러분께서 저를 아끼고 사랑한다면 여러분이 볼 때 제가 고쳐야 할 점과 관계돼서 적절한 시점이라고 생각된다면 거침없이 저를 위해서 말씀해주십시오. 감사히 받아들이겠습니다.’”
진심을 다해 스님의 말을 따라 하는 상근자의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그를 지켜보는 도반들도 따라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용기를 내는 도반의 모습이 아름다웠습니다.
“슬퍼서 우는 거예요, 기뻐서 우는 거예요?(웃음) 앞으로 제일 거침없이 이야기해주는 사람이 나를 가장 아끼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바꾸고 적극적으로 임하면 됩니다. 개선을 하려면 그렇게 해야 해요.”
함께 눈물짓던 다른 상근자도 도반들에게 받은 조언이 미진했다며 질문을 이어갔습니다.
“저도 방금 행자님을 보며 눈물이 났어요. 부서원으로 있을 때는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됐는데 팀장이 되니까 ‘일을 잘 받지 않는다’라고 문제 제기를 받아요. 방금 전 대화를 보며 저도 구체적으로 물으면서 해야겠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번에 힘들다고 나누기를 했는데 도반들이 제가 많이 좋아졌다고 이야기를 해주어서 의아했어요.”
“행자님은 목표를 100으로 정해놓고 아직 60밖에 못 고쳐서 나머지 40이 개선되지 않아서 힘들다고 말을 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행자님이 목표로 세운 100만큼 기대를 안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어요. 70을 기대했는데 요즘 60만큼 변한 것 같으니까, 옛날에 비해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옛날에 비해 많이 좋아졌다는 평가이지 완전히 좋아졌다는 평가는 아니니까, 옛날에 비해 좋아졌다는 평가는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아직 부족한 점은 개선의 과제로 삼아야 합니다.
나는 이 점을 문제 삼는데 다른 사람은 아무도 그 점을 문제 삼지 않는다면, 그런 경우에는 자학 증세나 자기 결벽증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살펴봐야 합니다. 무엇을 기준으로 보는가에 따라 평가가 달라집니다. 다리가 있어서 걸어 다니고, 손이 있어서 잘 집어 먹고, 화장실도 제 발로 다녀오는 정도면 기본적으로는 괜찮은 거예요. 대중의 요구는 대부분 ‘조금 더 중요한 일을 하려면 이 부분이 부족하니까 이걸 조금 개선하면 어떻겠느냐’ 하는 정도예요. 그런데 본인 스스로 ‘얼굴이 못생겼다’, ‘키가 작다’, ‘몸이 뚱뚱하다’, ‘학벌이 낮다’, ‘일을 능숙하게 못한다’ 이렇게 문제 삼습니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그런 걸 요구하지 않는데도 자기 스스로 나는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 경우는 자기만 그 점을 문제 삼지 다른 사람은 아무도 문제 삼지 않는 경우입니다.
여기서 수행하는 대중들은 대학을 나왔는지 안 나왔는지,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 무슨 학과를 나왔는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요. 이력서를 보다가 특정한 과를 나왔으면 그 분야를 잘 알 테니까 관련된 내용을 물어볼 수는 있지만 그런 걸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그런 걸 자기 스스로 문제 삼아서 열등의식을 갖고 인생을 괴롭게 사는 겁니다.
이런 경우는 다른 사람이 괜찮다고 하면 자기가 내려놓는 게 좋습니다. 자기만 그런 게 아니라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게 살아갑니다. 다른 사람이 문제 삼는 건 안 고치려고 하고, 다른 사람이 문제 삼지 않는 건 고치려고 합니다.
혼자 살면 아무 것도 고칠 필요가 없어요.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면 됩니다. 고치고 안 고치고는 다른 사람과 같이 사는 데서 생기는 문제예요. 서로 생각과 습관이 다르니까 같이 살려면 맞춰야 하는 데서 생기는 문제입니다.
왜 식사 시간을 정하겠어요? 혼자 살면 식사 시간을 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 먹고 싶을 때 먹으면 돼요. 산에 있는 짐승이 식사 시간을 정해놓고 먹는 거 봤어요? 산에 사는 짐승은 먹을 게 있으면 먹고, 없으면 안 먹잖아요. 그런데 같이 살면서 각자 먹고 싶을 때 먹으면 일이 아주 복잡해집니다. 자는 시간이 서로 다르면 어떤 사람은 자는데 어떤 사람은 기도한다고 옆에서 목탁을 치게 되어서 서로 불편해집니다. 그래서 잠자는 시간을 정해놓고 자는 거예요.
이렇게 정해놓은 기준을 가지고 같이 지내지만, 서로의 습관이 다르기 때문에 고칠 부분과 고치지 않아도 되는 부분이 생깁니다. 평소에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습관이 있는데 여기 들어와서 살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되니까, 아침마다 자꾸 졸게 되어서 문제제기를 받게 됩니다. 다른 사람은 다 자는데 자기 혼자서 밤늦게 컴퓨터 작업을 하면 문제제기를 받게 되고, 새벽 예불 시간인데 자기는 자고 있으니까 또 문제제기를 받게 됩니다.
만약 혼자 집에서 살았다면 아무런 문제제기를 받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같이 공동체 생활을 하면 신경질을 내었을 때 다른 사람들이 불편해집니다. 그래서 문제제기를 하는 거예요. 원래 그 사람에게 어떤 문제가 있어서 문제제기를 받는 게 아닙니다. 서로 습관이 다른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서 살다 보니까 문제제기를 받게 되는 거예요. 만약 혼자 사는 사람이면 지나가다가 나무를 발로 차든지, 혼자 신경질을 내든지 누가 뭐라고 하겠어요. (웃음)
누구든 원래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나무 자체에는 원래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나무를 기둥으로 쓸 것인가, 연목으로 쓸 것인가에 따라서 깎아야 하는 부분이 생깁니다. 여러분도 역할에 따라서 나무 깎듯이 자기를 깎아야 하는 거예요.
팀장을 맡으면 팀장에 맞게 깎아야 하니까 팀원으로서는 문제가 되지 않던 부분이 팀장으로서는 문제가 될 수 있는 겁니다. 밖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 공동체 생활을 하면 문제가 되는 겁니다.
회사에 다닐 때는 늘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수행공동체 들어오면 갈등의 원인이 되어서 문제제기를 받기도 합니다. 반대로 회사에서는 늘 문제제기를 받았던 것이 여기 수행공동체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기도 합니다. 집에서의 생활도 마찬가지예요. 집에서 살 때 제기되는 문제와, 회사생활하면서 제기되는 문제와,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제기되는 문제가 조금씩 다 다릅니다.
어디를 가나 사람이 사는 세상이니까 지켜야 하는 원칙이 있고, 그걸 못 지키면 문제제기를 받는 부분이 생기기 마련이에요. 인간 사회 안에서도 미국에서 살면서 지켜야 하는 부분이 있고, 한국에서 살면서 지켜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지켜야 하는 부분이 조금씩 다릅니다.
그러니 꼭 내가 무슨 큰 문제가 있어서 고친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돼요. 현재 내가 하는 역할에 따라 요구되는 사항이 다르기 때문에 기존 생활에 비해 고쳐야 하는 게 생기는 겁니다. 가령 행자 반장을 한다면 행자 반장이라는 역할 때문에 사람들이 기대하는 바가 생기고, 그 역할에 맞춰서 개선해야 하는 부분이 생깁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행자 반장으로서 조금만 개선하면 더 좋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느냐?’ 이렇게 문제제기를 하는 거예요.
결혼해서 생기는 문제도 다 이런 문제예요. 혼자 살 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던 게 결혼을 해서 다른 사람과 같이 살면 문제가 되기 시작합니다. 문제가 되어도 잘 고쳐지지 않는 이유는 혼자서 살았던 기간 동안 아무런 문제가 없던 걸 갑자기 다른 사람이 문제제기를 하기 때문이에요. 겉으로는 고치겠다고 해도 속에서는 ‘지금까지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갑자기 왜 그러느냐’ 하는 마음이 깔려있기 때문에 잘 고쳐지지 않습니다.
가족들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고 직장에서도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으니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고 살았던 거예요. 그런데 결혼하고 나서부터는 새롭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또한 가족들과 같이 살 때는 문제가 되던 것이 결혼하고 나서부터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결혼생활을 할 때는 아주 문제가 많았는데, 출가해서 승려생활을 하면서 그 문제들이 모두 사라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체질이 승려다’라고 말하곤 합니다. (모두 웃음)
체질이 승려가 아니라 결혼생활에서 요구되는 것과 승려생활에서 요구되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일입니다. 그 사람의 생활방식과 습관은 승려생활에서 요구되는 것과 잘 맞기 때문에 출가 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지는 거예요.
수행이란 자기를 움켜쥐지 않고 여기에서 요구가 있으면 여기에 맞게 살아가고, 저기에서 요구가 있으면 저기에 맞게 살아가는 겁니다. 만약 요구에 맞추지 못할 것 같으면 거기에 안 가는 결정을 하는 거예요. 누군가 결혼을 하고자 한다면 그에 맞춰 적응을 해야 하고, 그 요구에 맞추지 못할 것 같으면 거리를 두고 살면 되는 겁니다.
무유정법(無有定法)입니다. 원래 정해진 방향이 없어요. 근본적으로는 그 누구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여러분도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그러니 열등의식을 가질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 누구도 문제가 없어요. 다만 우리 각자가 어떤 역할을 맡으면서 살아가니까 그 역할에 맞춰 내가 변해야 하는 부분이 생기는 거예요. 이것이 공즉시색(空卽是色)입니다.
주어진 시간과 공간 속에서 동쪽과 서쪽이 정해지는 겁니다. 그것처럼 주어진 역할에서는 마땅히 해야 하는 바가 있고, 거기에 맞출 필요가 있어요. 인천에서 서울로 가려고 하면 동쪽으로 가야지, 그 상황에서 ‘원래 정해진 방향이 없다’ 이렇게 말하면 그건 맞지 않는 판단입니다. 주어진 그 상황에서는 동쪽으로 가야 하는 겁니다. 이곳에 오면 이 원칙을 따르고, 저곳에 가면 저 원칙을 따라야 합니다. 여기 수행공동체에서 생활을 하려면 기본적으로 지켜야 하는 계율이 있습니다. 주어진 계율을 지키면서 나머지는 상황에 따라 행동하는 겁니다.
우리 마음속에 정함이 없어야 여기에 가면 이렇게 맞추고, 저기에 가면 저렇게 맞출 수 있어요. 물은 본래 모양이 없기 때문에 그릇에 따라 모양을 바꿀 수 있는 거예요. 수행이 되었는지 알려면 이렇게 인연을 따라서 몸을 나툴 수 있는지 보면 됩니다. 그래서 수행의 마지막 단계는 화작(化作)입니다.”
사업적인 질문도 뒤섞여서 자유롭게 대화가 계속되었습니다. 스님은 각각에 대해 자세하고 넓게 설명해주었습니다.
4시간이 금세 흘러갔습니다. 수련을 마치며 마지막으로 스님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자신감을 갖고 사세요. 자신감이 없으면 기운이 빠지고 헤매게 돼요. 나가서 세상일을 안 하려거든 여기서 새로운 걸 창조하고 세상에 앞서가는 사람이 됩시다.”
“네!”
상근자들은 씩씩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스님은 다시 명상원으로 내려가 원고를 교정했습니다.
해가 지고 저녁 7시부터는 명상원에서 2차 만일결사 준비위원들과 온라인으로 회의를 했습니다.
“스님, 새해 인사드립니다.”
온라인으로 마주한 만준위원들은 화면을 향해 삼배를 드렸습니다.
2시간이 지나 밤 9시가 넘어 회의를 마쳤습니다.
내일은 10차 천일결사 3차 백일기도를 회향하고 4차 백일기도를 시작합니다. 오전에는 온라인으로 입재식을 하고, 오후에는 행자대학원 15기 졸업식에 참여한 후 저녁에는 온라인 일요명상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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