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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재심자 온라인 명상수련 2일째 날입니다.
스님은 새벽 4시 전에 일어나 먼저 명상을 시작했습니다. 4시가 되자 300여 명의 참가자들에게 온라인으로 종송 소리가 전해졌습니다. 곧이어 생방송 카메라에 불이 켜지고 새벽 4시 20분부터 명상을 시작했습니다.
“둘째 날 새벽입니다.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가집니다.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면 이 곳이 한국인지 미국인지 공간을 초월하고, 아침인지 저녁인지 시간도 초월합니다. 오직 이 시간에 실재하는 것은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뿐입니다. 이 천지 우주 간에 숨이 들어오고 숨이 나가는 것 외에는 모든 것이 다 적막합니다. 긴장하지도 말고 애쓰지도 말고 편안한 가운데 오직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립니다.”
탁, 탁, 탁
죽비 소리와 함께 눈을 지그시 감았습니다. 천지간에 오직 호흡뿐입니다.
40분간의 명상을 마치고 이어서 천일결사 기도를 함께 했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6시 20분부터 다시 30분 간 네 번의 명상을 연달아했습니다. 오전 9시부터 아침 식사 시간을 가졌습니다.
“공양 시간입니다. 공양은 조금만 먹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먹습니다. 준비하는 과정도 천천히 합니다. 공양게송 하겠습니다.”
밖으로 나오니 어둠이 걷히고 해가 떠올랐습니다. 식사를 하기 전에 참가자들은 몸과 마음의 상태를 써서 제출했습니다. 명상 이틀째, 상황은 조금씩 달랐지만 피로하고 졸린 참가자들이 많았습니다.
“졸음이 계속 오고, 한쪽 다리 전체가 휴식 중에도 심하게 저립니다. 계속해보겠습니다.”
“굉장히 피곤합니다. 명상 중 거의 졸게 되는 상태가 많습니다.”
“많이 졸았습니다. 조느라 다리의 통증도 못 느꼈습니다.”
“오전 내내 졸았습니다. 짜증이 올라옵니다.”
“중간에 포행이라는 말도 못 들은 채 계속 졸기도 했습니다. 어제보다는 나은 것 같습니다.”
스님은 참가자들의 상태 보고를 쭉 읽어본 후 오전 명상을 시작했습니다. 오후에는 40분씩 명상을 이어갔습니다.
“자세를 바로 합니다.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합니다. 아무 할 일 없는 사람처럼 긴장하지 않고 애쓰지 않고 편안한 자세로 마음을 콧구멍 끝에 모아서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립니다.”
네 번의 명상을 연달아 한 후 오후 공양을 하고 5시부터 다시 명상을 시작했습니다. 40분 간 두 번의 명상을 더해 하루 종일 열 번의 명상을 마쳤습니다.
그 사이 해가 지고 산 너머로 저녁노을이 붉게 물들었습니다.
저녁 7시 20분이 되자 오늘 하루를 마무리하는 스님의 법문이 시작되었습니다. 참가자들이 오후에 제출한 상태 보고에도 졸리고 피곤하다는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스님은 힘들어 하는 사람들을 다독이며 법문을 시작했습니다.
“명상 2일째 저녁입니다. 많이 힘드시죠? 여러분이 써 낸 소감을 보니 초심자들이 겪는 어려움과 거의 비슷하네요. 4박 5일 명상을 3번 이상 했더라도 반 년 이상 안 하다가 명상을 하니까 몸이 적응하는데 2-3일은 걸릴 거예요.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명상을 하며 힘들어하는 게 뭔지 점검해보려고 합니다.”
명상을 하는데 참가자들이 공통으로 어려워하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졸음, 다리 통증, 망상’입니다. 스님은 참가자들이 고비를 잘 넘길 수 있도록 이 세 가지 장애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과정을 알려주었습니다. 또 졸다가 입재 법문을 제대로 못 들었을 참가자들을 위해 명상의 목표와 계율의 중요성도 다시 한번 알려주었습니다.
“중요한 이야기는 어제 입재식 법문에서 다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피곤하다 보니 입재 법문에서 통상적으로 절반 이상이 졸아요. 명상을 시작할 때 딱 관점을 잡고 해야 합니다. 어제 한 이야기를 다시 요점 정리해드리겠습니다.
명상은 ‘어떻게 앉느냐, 어떻게 호흡하느냐’ 같은 기술을 훈련하는 문제는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목표는 해탈과 열반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해탈’은 모든 속박에서 벗어난 자유를 뜻합니다. ‘열반’은 모든 괴로움이 사라진 행복을 뜻합니다. 즉 괴로움과 즐거움이 윤회하지 않고 자유와 행복이 지속 가능한 상태를 해탈과 열반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모든 사람은 다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지만 현실은 그 반대입니다. 현실이 어쩔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자유와 행복으로 나아가는 방향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길을 잘못 들어섰기 때문에 아무리 열심히 가도 목적지에 도착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럼 왜 길을 잘못 들었다고 하는 걸까요?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졌을 때 일어나는 기분 좋음을 행복으로 삼습니다. 반대로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일어나는 불쾌한 감정을 불행이라 여겨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을 자유라 생각하고, 못하게 되는 것을 속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의 행복관과 자유관입니다. 그런데 실제 세계에서 이런 가치관은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욕망이 채워졌을 때는 잠시 즐겁습니다. 욕망이 채워지지 않았을 때는 괴로워요. 욕망은 끝이 없기 때문에 이 즐거움과 괴로움이 늘 반복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괴로움(苦)과 즐거움(樂)의 윤회가 우리 삶에서 필연적인 모순이고 한계라고 하셨습니다. 괴로움과 즐거움은 나눌 수가 없습니다. 어제의 괴로움이 오늘의 즐거움이 될 수 있고, 오늘의 즐거움이 내일의 괴로움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이치를 모르기 때문에 고와 락을 나눠서 고는 없고 락만 있는 세상을 원하고 또 그런 세상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으니 죽어서는 즐거움만 있는 세상에 나기를 염원하기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종교마다 천당, 천상, 극락이라는 이상 세계가 나오는 겁니다.
현재 우리의 소비 수준은 옛사람들이 꿈꿨던 천상 이상으로 누리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욕망은 점점 커졌기 때문에 남이 볼 때는 천상이라고 할 만해도 지금 우리가 볼 때는 지옥이나 다름없어졌습니다.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것만 보기 때문에 이 모순이 안 보이는 거죠. 사람들은 능력과 노력이 부족해서 행복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능력이 있는 제 3자에게 부탁해서 이루려고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무한한 능력을 갖춘 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종교가 생겨난 겁니다.
종교는 이미 5천 년 전에 생겨났습니다. 부처님이 태어나신 2천6백 년 전에도 당시 사람들은 세상의 모순을 종교로 해결하려 했어요. 그러나 종교의 가르침은 사람들에게 마약처럼 일시적인 위안은 줄 수 있어도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습니다.
부처님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깊이 탐구하셨습니다. 그래서 고락(苦樂)이 윤회하는 뿌리가 욕망이라는 것을 발견하셨습니다. 욕망이 이루어지면 즐겁고, 욕망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괴롭습니다. 그런데 이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즐거움도 괴로움도 사라져 버립니다. 윤회가 끊어져 버리는 거죠. 세상 사람들은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은 상상도 하지 못했어요. 욕망에 대응하는 길은 욕망에 항복하거나 욕망에 저항하는 두 가지 뿐이었습니다. 서양에서는 이 두 가지 길을 쾌락주의와 금욕주의라고 표현했고, 인도에서는 쾌락주의와 고행주의라 표현했습니다. 부처님은 실제로 그 쾌락의 극치, 고행의 극치라 할 수 있는 경험을 다 해 보시고 그 두 길 모두 해탈과 열반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는 걸 아셨어요. 그리고 제3의 길, 중도(中道)를 발견하셨습니다. 결국 중도의 길을 가셔서 해탈과 열반을 성취하셨습니다.
중도란 욕망을 따르지도 않고, 욕망을 억제하지도 않고 다만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욕망을 따르면 과보가 따릅니다. 욕망을 억압하면 스트레스를 받아요. 사람들은 욕망을 따르면 손실이 생기니까 참지만, 참으면 답답해서 언젠가 터져요. 그러면 손실이 생기니까 다시 참고, 참다가 터지고를 반복합니다. 다만 욕망을 알아차리는 길은 욕망을 따르거나 억압하지 않고 욕망에 상대를 하지 않는 것이에요.
진정한 자유는 다만 욕망을 알아차려서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욕망은 어디에서부터 일어나는 것일까요? 욕망의 뿌리는 업식입니다. 바깥 경계와 업식이 부딪치면 느낌이 일어나고, 그 느낌에 기초해서 욕망이 일어나요. 사람마다 가진 업식이 다 다르기 때문에 욕망도 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돈에 대한 욕망이 아주 강한데 또 어떤 사람은 돈에 대해 아무 욕망이 없어요. 어떤 사람은 음식에 대한 욕망이 강한데 또 어떤 사람은 거의 수행자처럼 아무거나 먹어도 되는 수준입니다. 이렇게 욕망이 서로 다릅니다. 인간이 욕망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지만, 욕망이 서로 다른 걸 보면 희망이 있습니다. 보통사람도 어떤 욕망에 대해서는 벗어나 있잖아요. 그러니 욕망으로부터 자유는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누구나 다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생을 내가 사는 것 같지만 사실 업식이 자동으로 반응을 할 뿐입니다. 그 자동 반응을 기초로 욕망이 일어나고 그 욕망에 또 이끌려서 살고 있습니다. 업식과 욕망이 반복되는 삶을 살고 있는 거예요. 사람들은 바깥에 어떤 조건 때문에 행복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아주 부차적이고 부분적인 이유입니다. 자기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괴로워하거나 속박받을 일이 거의 없어져요.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나의 욕망과 업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가 지금 명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명상을 하면서 먹고 싶다고 다 먹고, 눕고 싶다고 다 눕고, 하고 싶은 걸 다하고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겠다는 것은 모순이에요. 먹고 자는 것 외에도 어마어마한 업식이 있잖아요. 먹고 자는 것에 구애받지 않아도 어려운데 그것도 안 되면서 해탈을 바라는 것은 모순입니다.
예를 들어 나에게 담배를 피우는 습관이 있다고 합시다. 담배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해탈과 열반을 추구하면서 담배 하나 못 끊는다는 것은 모순이라는 얘기예요. 몇 년, 몇십 년 밖에 안 된 습관 하나도 못 끊으면서 옛날식으로 표현하면 다생겁래로 지어온 모든 업식으로부터 어떻게 자유로워지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해탈과 열반으로 나아가는 사람이라면 계율은 기본으로 지켜야 하는 겁니다. 계율을 소중하게 여겨야 해요.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서 해탈과 열반을 성취한다고 수행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어제 제가 여러분에게 욕망을 절제하는 규칙들을 눈치 보지 말고 자발적으로 지켜보자고 말씀드렸습니다. 자발적으로 계율을 지키면 속박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5리를 가자면 10리를 가라’ 하셨고, ‘겉옷을 달라면 속옷까지 벗어주라’고 하셨고, ‘왼뺨을 때리면 오른뺨을 내주라’ 하셨잖아요. 그렇게 적극적으로 마음을 내어보는 겁니다. 누군가에게 끌려가면 종이지만, 내가 한 발 앞서 가버리면 주인이 되는 거예요.
밥을 많이 먹어도 된다고 하더라도 ‘명상할 때 에너지를 많이 안 쓰니까 적게 먹겠습니다’라고 마음을 내보는 거예요. 누워도 된다고 하더라도 ‘저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수련을 하는 동안은 정해진 시간에만 눕겠습니다.’ 이렇게 자발적으로 마음을 내면 아무런 속박을 받을 일이 없어요.”
여기까지 법문을 하고 예정보다 40분 일찍 법문을 마쳤습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설명하고 내일은 업식으로부터 어떻게 욕망이 일어나는지, 그 과정 중 어디서 어떻게 끊어야 욕망으로부터 내가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조는 사람이 많으니까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법문을 마치겠습니다. 푹 주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내일은 다시 가벼운 마음으로 하루 종일 호흡을 알아차리는 연습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영하로 떨어지는 기온에 스님의 목소리도 조금 잠겼습니다. 내일도 새벽부터 저녁까지 명상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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