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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온라인 주말 명상수련 2일째입니다. 새벽 4시, 몸과 마음을 깨우고 명상으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자세를 바로 합니다.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한 가운데 마음을 콧구멍 끝에 딱 모아서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립니다.”
탁, 탁, 탁!
참가자들은 명상을 한 번 하고, 명상을 한 번 더 하거나 천일결사 기도를 선택해서 했습니다.
오늘은 매주 진행하는 천일결사 기도 생방송이 있는 날이기도 합니다. 스님은 천일결사 기도자들을 위해 기도를 마치는 시간에 어김없이 생방송으로 법문을 했습니다.
“아침 기도 잘하셨습니까? 저는 지금 문경에서 온라인으로 주말 명상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요즘 천일결사 기도에서 독송하는 경전 숫타니파타(Sutta Nipāta)에는 ‘어떻게 보시를 하고 받아야 하는가’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스님은 이에 대해 자세하게 풀어서 설명해주었습니다.
“우리가 발우공양을 할 때 ‘삼륜이 청정(淸淨)하여지이다’하고 발원을 합니다. 여기서 삼륜(三輪)은 보시하는 사람, 보시받는 사람, 그리고 보시 물건, 이 세 가지를 의미합니다. 이 세 가지가 청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생색을 내려고 보시하거나, 복을 빌기 위해서 베풀기도 합니다. 베푸는 것이 그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베푸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시를 통해 얼마나 인기를 얻는지, 자랑을 할 수 있는지, 얼마나 복을 얻을 수 있는지, 나에게 얼마나 이익이 되는지를 생각합니다. ‘나에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뭐하러 베푸는가’, ‘나에게 복이 되지 않으면 베풀지 않는다’ 이런 자세로 보시를 하는 것은 진정한 복이 되지 않습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그들이 필요로 하기 때문에 베풀 때, 아무런 기대하는 바가 없이 베풀 때, 그럴 때 진정한 복이 됩니다. 이것을 ‘무루복(無漏福)’이라고 합니다. 보시하는 사람은 이렇게 청정하게 보시해야 합니다.
보시를 받는 사람은 그것을 아껴서 써야 하고, 적재적소에 써야 합니다. 그리고 보시하는 물건은 적절해야 합니다. 적절해야 한다는 것은 그것이 꼭 필요한 물건이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일러 삼륜이 청정하다고 말합니다. 경전을 읽으면서 이 부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새벽 명상과 법문을 마치고 잠시 휴식한 후 30분씩 네 번 명상을 했습니다.
명상을 하는 사이 서서히 날이 밝았습니다. 잎이 다 떨어진 빈 가지 사이로 붉게 물든 하늘이 보입니다. 잎이 무성할 때는 볼 수 없었던 풍경입니다. 명상이 깊어지고 비어 가는 마음에도 호흡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오전 공양 후에 다시 30분씩 네 번 명상을 하고 포행을 했습니다.
휴식시간에는 찢어진 가사를 바느질해 기웠습니다.
명상수련 참가자들은 하루에 한 번씩 자신의 상태를 글로 써서 보내고 있습니다. 스님은 휴식 시간에 참가자들이 보내온 글을 찬찬히 읽고 난 후 한 시간 동안 법문을 해주었습니다. 참가자들은 졸음, 망상, 통증. 배고픔 등을 호소했습니다. 스님은 갖가지 증상이 왜 일어나는지 알려주고 꾸준히 연습해나가도록 참가자들을 격려했습니다.
“오직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이 과제이지만, 호흡을 자꾸 놓치게 되죠? 호흡을 자꾸 놓치는 건 지금까지 산만하게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호흡을 놓치면 ‘놓쳤구나’ 알아차리고 다시 집중하고 돌아오면 됩니다. 이때 ‘나는 왜 안 될까?’ 하고 생각하는 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산만하게 살아왔고, 또 집중하는 연습도 많이 안 해왔으면서 하루아침에 집중이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입니다. 꾸준히 연습하면 됩니다.
어떤 사람도 태어나자마자 농구를 잘하거나, 운전을 잘하거나, 자전거를 잘 탈 수 없습니다. 처음에는 도저히 못할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자꾸 연습하다 보면 누구나 자전거를 탈 수 있고, 농구도 할 수 있고, 운전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것처럼 꾸준히 해나가면 호흡을 알아차리는 시간이 점점 길어집니다.
여러분도 명상을 하면서 몸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증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이런 증상도 있구나 하고 알면서 꾸준히 해나가길 바랍니다. 여러분이 지금 자신의 상태를 적어서 보내온 것들을 보면 모두 다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여러분은 처음 겪으니까 큰일이 일어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명상을 하다 보면 모두 다 일어날 수 있는 증상들이에요. 그래서 ‘괜찮습니다’, ‘별 일 아닙니다’, ‘그냥 하세요’ 이렇게 답을 하는 거예요.
여러분이 명상을 해보니까 다리가 아프고, 졸리죠. 이 역시 직접 해봤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거예요. 직접 경험하지 않고 명상에 대한 책을 아무리 많이 읽는다고 해도 어떤 증상이 나타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저 명상이 좋은 줄만 알지 막상 해보면 앉아서 집중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뭐든지 자기가 직접 경험해봐야 합니다. 내가 직접 해보고 내가 경험으로 극복해내야 자기 것이 됩니다. 그렇지 않고서 ‘부처님은 훌륭하시다’라는 말을 만 번 되뇐다고 해서 내 인생에 어떠한 변화가 생기지 않습니다.
운동장에 가서 누가 야구공을 잘 치는지, 얼마나 잘 던지는지에 대해 아무리 많이 안다고 해서 내 몸이 건강해지지 않습니다. 유명한 축구선수에 대해 아무리 많이 알아도 내 몸이 건강해지는 건 아닙니다. 내 몸이 건강해지려면 직접 운동장을 뛰거나, 직접 공을 던지거나, 직접 공을 차거나 내가 직접 운동을 해야 합니다. 되고 안 되고 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직접 해야만 내 것이 됩니다. 그것처럼 명상도 직접 해봐야 내 것이 됩니다.
주말 명상은 3일밖에 안 하니까 거꾸로 매달아 놓아도 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시작하면 됩니다. 그러나 각오와 결심으로 하는 게 아니라 편안한 마음으로 한가하게 해 봅니다. 전화를 받거나 다른 일상 업무는 모두 내려놓고 합니다. 그런 일들을 하게 되면 앉아서 계속 그와 관련된 생각을 하게 됩니다. 명상하는 동안에는 그런 일들을 모두 놓아버리고 명상에만 집중하고, 걸을 때도 걷는 것에만 집중하고, 밥을 먹을 때도 먹는 것에만 집중합니다. 그렇게 한번 해봅니다.”
오후 공양을 한 후 다시 30분씩 네 번 명상을 하고 포행을 했습니다.
“오후 법문에서 명상을 어떻게 하는지 왜 하는지 충분히 설명을 했으니까, 이제 연습을 꾸준히 해봅시다. 첫째, 몸과 마음을 편안히 합니다. 애쓰거나 긴장하지 않고 편안한 가운데 마음을 코 끝에 집중해서 호흡을 알아차립니다. 오직 지금 여기에서 집중해야 할 것은 들숨과 날숨입니다. 놓치면 다시 하고, 꾸준히 해 봅니다.”
탁, 탁, 탁!
그 사이 해가 지고 밤이 깊었습니다.
취침에 들기 전 오늘 하루를 마무리하며 스님이 다시 법문을 해주었습니다.
“기본적인 욕구는 누구나에게 있습니다. 생태계의 생물들에게 있는 생존 욕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상대적인 욕구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상대적 욕구가 큰 사람도 있고 작은 사람도 있고, 또 욕구의 종류도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음식에 대해 집착하고, 어떤 사람은 옷에 집착하고, 어떤 사람은 돈에 집착하고, 어떤 사람은 권력에 집착하고, 어떤 사람은 명예에 집착합니다. 이렇게 사람마다 다른 것을 보면 상대적 욕구는 사람에게 본래부터 있던 욕구라고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러한 상대적 욕구를 욕망이라 하고, 욕망은 형성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욕망이 왜 일어나는지 원인 분석을 해보셨습니다. 욕망은 무엇으로부터 말미암아 일어나는가 하고 원인을 분석을 해보니, 욕망은 느낌으로 말미암아 일어납니다. 내가 무언가를 보거나, 듣거나, 냄새 맡거나, 맛을 보거나, 감촉하거나, 생각했을 때 기분이 싹 좋게 일어나면, 이 느낌이 쾌(快)입니다. 유쾌하다는 의미입니다. 냄새만 맡았는데도 유쾌한 것이 있고, 냄새만 맡았는데도 불쾌한 것이 있습니다. 이때 유쾌하면 바로 ‘먹고 싶다’는 욕망으로 옮겨갑니다. 불쾌하면 바로 ‘싫다’는 혐오로 옮겨갑니다.
욕망은 ‘좋다’, ‘싫다’ 이렇게 두 가지입니다. 하고 싶다, 하기 싫다도 욕망입니다. 하고 싶다는 것도 욕망이고, 하기 싫다는 것도 욕망입니다. 이것을 애(愛)라고 합니다.
하고 싶다는 것은 탐하는 마음으로 드러나고, 하기 싫은 것은 성냄으로 드러납니다. 여러분이 성질이 날 때는 주로 무언가가 싫기 때문에 성질이 나는 것입니다. 이 탐하는 마음과 성내는 마음인 탐진(貪嗔)은 모두 그 뿌리는 욕망입니다.
좋고 싫음은 쾌와 불쾌라는 느낌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왜 어떤 것은 보자마자 기분이 좋고, 왜 어떤 것은 보자마자 기분이 나쁠까요? 이런 느낌은 어떤 생각이나 가치관이 개입하기 전에 자동으로 일어납니다. 또한 이런 느낌은 보거나, 듣거나, 냄새 맡거나, 맛보거나, 만지거나, 생각하는 여섯 가지 작용에 의해 일어납니다.
내 몸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바깥 대상과 접촉할 때 눈은 모양과 빛깔을 보고, 귀는 소리를 듣고, 코는 냄새를 맡고, 혀는 맛을 보고, 몸은 감촉을 느끼고, 생각은 법(法)을 인식합니다. 이렇게 바깥에 있는 대상과 내 몸의 감각기관이 만나는 것을 ‘촉(觸)’이라고 합니다. 이때 일어나는 것이 느낌인데, 이것을 ‘수(受)’라고 합니다.
이러한 촉(觸)은 내 몸에 여섯 가지 감각기관인 육처(六處)가 있기 때문에 생겨납니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은 몸과 마음인 명색(名色)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몸과 마음에는 업식, 즉 ‘식(識)’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반응이 일어납니다.
식(識)으로 인해서 명색(名色)이 있고,
명색(名色)으로 인해서 육처(六處)가 있고,
육처(六處)로 인해서 촉(觸)이 있고,
촉(觸)으로 인해서 수(受)가 있고,
수(受)로 인해서 애(愛)가 있고,
애(愛)로 인해서 취(取)가 있고,
취(取)로 인해서 유(有)가 있습니다.
이 과정을 되풀이하는 것이 생(生)과 노사(老死)입니다.
이것이 바로 12연기입니다. 쉽게 비유하면 씨앗을 땅에 심으면 자라서 싹이 트고 꽃이 핀 후 수정해서 열매를 맺는 것과 같아요. 그 열매 속 씨앗이 다시 땅에서 자라면 그 과정이 반복됩니다. 우리의 행위 하나가 하나의 생(生)입니다.
잡초의 경우에 가만히 놔두면 꽃피고 열매를 맺어서 이듬해 확대 재생산을 합니다. 이를 멈추려면 늦어도 꽃피고 수정을 하기 전에 잘라야 합니다. 그러면 적어도 확대 생산은 막을 수 있습니다. 열매를 맺은 뒤에는 잘라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때는 확대 생산을 하게 됩니다. 확대 생산을 막으려면 열매를 맺기 전에 잘라야 합니다. 그래서 늦어도 꽃이 필 때는 잘라야 해요.
꽃이 필 때 자르려고 해도 이미 너무 자란 때여서 베거나 뽑기가 쉽지 않습니다. 가장 힘이 안 드는 방법은 싹이 트자마자 호미로 긁는 겁니다. 그러면 10분의 1 또는 100분의 1만의 노력으로도 잡초를 제거할 수 있습니다.
이보다 더 좋은 건 씨앗을 없애버리는 겁니다. 씨앗을 안 뿌리도록 하는 게 가장 좋습니다. 잡초의 경우에는 내가 씨앗을 뿌린 게 아니라 이미 자연 상태에서 씨앗이 뿌려져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원리적으로는 씨앗을 뿌리지 않는 게 근본 해결책이지만, 현실에서는 이미 씨앗이 뿌려져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내가 무언가를 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미 자란 풀은 자란 상태에서 자르고, 가능하면 싹이 돋아날 때 뽑아버리는 것이 가장 일을 쉽게 하는 방법입니다.
이것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면, 욕구가 일어나고 욕망을 행하면 결과가 남습니다. 이것을 유(有)라고 합니다. 욕망이 일어날 때 그 행위의 결과가 나에게 손해라는 것을 알면 멈추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남의 종아리를 만지고 싶더라도 만진 다음 성추행범으로 망신을 사고 감옥에서 1년을 살아야 된다면 안 해야 합니다. 그때 가서 감옥 안에서 다시 생각을 해보면 ‘그 순간만 참았으면 괜찮았을 텐데 내가 왜 그랬을까’ 하고 후회가 됩니다. 그런 행위는 미리 멈추어야 합니다.
지금은 먹고 싶지만 저걸 먹으면 과체중이 되거나 건강을 해친다면 먹지 말아야 합니다. 욕구를 행함으로 인해 미래에 손실이 생긴다면 욕구가 일어나지만 멈추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계율입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반드시 계율을 지켜야 합니다.
명상을 하면서 계율을 안 지키고 먹고 싶은 것을 자기 마음대로 먹는다면 그 순간에는 좋을지 몰라도 그렇게 수행해서는 해탈과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그건 정신적인 쾌락을 구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일어나는 욕구를 행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이 계율입니다. 하기 싫어도 그 행위가 나에게 이익이 된다면 하기 싫어도 해야 합니다. 하고 싶어도 그 행위가 나에게 손해가 된다면 하고 싶어도 멈추어야 합니다. 미래의 손실을 막고 미래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현명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계율을 지켜야 합니다. 계율은 우리를 속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손실을 막아주고 이익을 보장해줍니다.
화가 나서 성질을 내면 다른 사람에게서 비난을 받습니다. 그렇다고 속으로 참으면 다른 사람에게는 좋은 소리를 듣거나 이익은 되지만 내가 스트레스를 받고 그로 인해 화병이 생깁니다. 그래서 화가 일어난 다음에 참는 것은 손해를 막아주긴 하지만 괴로움을 없애는 완전한 해결책은 되지 않습니다.
가능하면 욕망이 일어날 때 미리 알아차리는 것이 좋습니다. 이건 풀이 다 자란 다음 뽑으려면 힘드니까 싹이 트자마자 뽑는 것이 힘이 덜 드는 것과 같습니다. 화가 일어나거나 짜증이 일어나거나 욕망이 일어날 때 미리 알아차리면 제어하기가 수월합니다. 그만큼 스트레스가 적습니다. 그래서 ‘몸 알아차리기’, ‘느낌 알아차리기’, ‘마음 알아차리기’를 하는 겁니다.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화를 내버리면 이건 이미 열매를 맺고 확대 생산한 것과 같습니다. 이때 마음을 알아차리고 제어하려고 하면 힘이 많이 듭니다. 그래서 느낌 알아차리기가 필요한 겁니다.
12연기에서는 자신의 욕망을 갈애(渴愛)라고 합니다. 갈애를 알아차리고 멈추는 것이 계율을 지키는 것입니다. 갈애의 원인은 느낌입니다. 기분이 좋고, 기분이 나쁜 그 느낌이 갈애를 일으킵니다. 이 기분 좋음 또는 기분 나쁨이 일어날 때 바로 알아차려서 욕망으로 전이되지 않도록 제어를 하면 스트레스를 안 받게 됩니다. 정신없이 산만하게 살면 이 느낌을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마음 알아차리기도 어렵습니다.
호흡 알아차리기를 계속하다 보면 호흡을 하면서 일어나는 미세한 감각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이 과정을 계속하게 되면 점점 우리 몸에 일어나는 미세한 감각도 알아차리게 됩니다. 느낌이라는 건 감각에 기초해서 일어납니다. 느낌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감촉하고, 생각하는 데서 일어납니다. 그래서 미세한 감각을 알아차리면, 그 미세한 감각이 일어날 때의 느낌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불쾌하면 몸에 약간의 열이 나고 호흡이 가빠지는 걸 감지할 수 있습니다. 느낌이 일어날 때 감각을 같이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육체적 느낌을 주로 감각이라고 표현하고, 정신적 느낌은 주로 느낌이라고 표현합니다. 정신적 느낌은 육체적 감각과 함께 일어납니다. 그래서 육체적 감각을 아주 미세하게 알아차릴 수 있으면 육체적 감각이 일어날 때 정신적 느낌도 함께 알아차릴 수 있게 됩니다. 무언가를 볼 때 일어나는 느낌을 알아차릴 수 있고, 무언가를 들을 때 일어나는 느낌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이때 제어를 하게 되면 힘도 들지 않고 스트레스도 받지 않고 자기 마음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욕망이 일어난 다음에 다스리려고 하면 억눌러야 하고, 이 과정에서 스트레스가 발생합니다. 욕망이 일어나기 전에 마음을 다스리면 스트레스 없이 조절해나갈 수 있습니다. 이미 내 업식이 형성되어 있으니까 기분 나쁨은 일어나지만, 이걸 바로 알아차리면 기분 나쁨에 내가 휘둘리지 않게 됩니다.
이 느낌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긴장을 풀고 편안한 상태에서 집중을 한 다음 몸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감각을 알아차리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이 연습이 되면 무언가 볼 때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느낌, 무언가 들을 때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느낌, 무언가 냄새 맡을 때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느낌, 무언가 맛을 볼 때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느낌, 무언가 감촉할 때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느낌, 무언가 생각할 때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느낌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됩니다. 어떤 생각을 하면 기분이 좋아졌다가, 어떤 생각을 하면 한 순간에 기분이 팍 나빠지기도 합니다. 그런 걸 감지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은 하루 종일 앉아서 호흡 알아차리기 연습을 했는데, 만약 아주 집중해서 미세한 감각까지 알아차리는 정도가 되면 감각 알아차리기, 동작 알아차리기, 느낌 알아차리기, 마음 알아차리기가 다 저절로 됩니다. 그래서 미세한 감각을 알아차리는 것이 가장 기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긴 시간 동안 앉아서 연습을 하는 거예요.
이렇게 길게 설명을 하는 이유는 연습을 제대로 하자는 거예요. 여러분들은 하다가 조금만 힘들면 머릿속으로 ‘이걸 왜 하지?’, ‘이거 한다고 뭐가 좋지?’ 이런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들이 화를 잘 내고, 짜증을 잘 내고, 근심 걱정이 많고, 불안하고 초조한 건 모두 까르마의 작용입니다. 여러분의 업식으로부터 오는 감정들입니다. 꾸준한 명상을 통해 감각과 느낌을 미리 알아차릴 수 있게 되면, 우리의 감정적인 반응도 개선해 나갈 수 있습니다.
완전히 개선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런 느낌을 알아차리면 그 느낌을 수용하고 살 수 있기 때문에 그로 인한 과보가 훨씬 적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우리가 지금 꾸준히 연습하는 겁니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주무시고 내일 다시 연습을 해보겠습니다. 긴 시간 동안 법문을 듣느라 마음이 조금 들떴을 텐데 마치기 전에 마음을 가라앉히는 명상을 하겠습니다.”
참가자들은 잠깐 명상을 한 후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2일째 명상을 마치고 스님은 밤새 새책 원고 교정 업무를 보았습니다. 내일까지 출판팀에 원고 교정본을 넘겨야 해서 밤새도록 원고를 보았습니다.
내일도 새벽 4시에 명상으로 하루를 시작해서 온라인 주말 명상수련 마지막 3일째 일정을 이어나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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