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0.12.4 온라인 주말 명상수련 1일째
“명상을 하면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이유”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2박 3일간 문경 수련원에서 온라인으로 주말 명상수련을 진행합니다.

기도와 아침 공양을 마치고 두북 수련원에서 문경 수련원으로 출발했습니다.



문경에 도착해 휴식하고 원고 교정을 본 후 오후 4시부터는 방송팀과 사전 연습을 하며 세세한 부분을 맞추어보았습니다.


해가 지고 저녁 7시부터 온라인 주말 명상수련 생방송을 시작했습니다. 지난 여름과 추석에 온라인으로 4박 5일간 명상수련을 진행하고 이번이 세 번째 온라인 명상수련입니다. 계속되는 코로나 19 바이러스의 확산으로 외부 활동이 어렵고,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에게 명상에 참여할 기회를 마련하고자 이번에는 주말을 이용해 2박 3일간 명상수련을 기획했습니다. 4박 5일이 부담스러웠던 분들이나 처음 명상수련을 해보는 분 등 7백5십여 명이 주말 명상수련에 참여했습니다.

오늘은 1일째 명상수련을 시작하며 입재 법문과 명상하는 자세에 대해 안내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긴장이나 초조 불안, 근심이나 걱정, 미움이나 원망, 화나 짜증, 외로움이나 슬픔, 방황 없이 좀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것은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의 바람입니다. 또한 모든 사람은 그렇게 살 권리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두고 ‘모든 사람은 다 부처가 될 성품을 가지고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말로는 ‘모든 사람은 다 불성이 있다’ 이렇게도 표현하셨습니다. 불성이 있다는 것은 뭔가 구슬 같은 그런 성스러운 존재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사람은 어떤 한경에 처해도 행복하게 살 수가 있고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행복하지 못한 이유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이 아주 드물어요. 행복하기 위해서 평생을 노력하는데 죽을 때 ‘나 행복하게 살았다’, ‘내 인생에 만족한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드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길을 잘못 들었기 때문입니다. 길을 잘못 들었기 때문에 한평생을 노력해도 자기가 목표한 바에 이르지 못한 겁니다.

길을 잘못 들게 되는 이유는 인생에서 추구하는 가치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주로 무엇을 행복으로 삼습니까? 기분이 좋을 때 ‘아, 행복하다’ 이럽니다. 즉, 기분 좋음을 행복으로 삼습니다. 반대로 기분이 나쁘면 ‘나는 불행하다’ 이렇게 느껴요.

그러면 이 기분 좋음은 어떨 때 일어납니까?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이렇게 욕구가 충족이 되면 기분이 좋음이 일어납니다. 이때의 기분 좋음을 행복으로 삼습니다. 반대로 욕구가 충족이 안 되면 기분이 나쁘고, 그 기분 나쁜 상태를 불행으로 삼습니다.

누구나 욕구가 있어요. 우리가 원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은 수만 가지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게 다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루어지는 것도 있고, 안 이루어지는 것도 있어요. 이루어지면 기분이 좋고, 이루어지지 않으면 기분이 나쁘고, 그래서 기분 좋음과 기분 나쁨이 계속 반복됩니다. 어떤 날은 기분 좋음이 많을 때도 있고, 어떤 날은 기분 나쁨이 많을 때도 있고. 한 해 평균을 내보면 어떤 해는 기분 좋음이 많은 해도 있고, 어떤 해는 기분 나쁨이 많을 때가 많습니다. 이렇게 기분 좋음과 기분 나쁨, 즉 즐거움과 괴로움이 되풀이되는 것을 ‘윤회’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원하는 것은 조금만 살펴보면 현실에서 다 이루어질 수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해요. 하지만 현실적으로 다 이루어질 수 없어요.

아름다운 한 여인이 있다면 백 명의 남자가 결혼하고 싶어 하고, 대통령 선거에 열 명이 출마했다면 모두 다 대통령이 되길 원합니다. 그런데 모두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루어질 수 있다면 대혼란이 옵니다. 이 세상이 그나마 유지되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것이 다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다 이루어질 수도 없고, 이루어진다고 반드시 좋은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현상을 깊이 살피는 통찰력이 부족하다 보니 뭐든지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천국이다 극락이다 정해 놓고 거기 가서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이치로 보면 그렇게 될 수도 없고, 또 설령 된다고 하더라도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하여 세상이 엄청난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이것을 모르니 어리석음이라고 합니다.

노력을 해서 돈을 버니 기분이 좋다, 돈을 더 벌고 싶은데 안 벌려서 기분이 나쁘다, 벌어 놓은 돈을 잃어서 괴롭다, 이렇게 즐거움과 괴로움을 되풀이하는 것을 ‘어리석다’라고 말합니다. 노력을 해서 어릴 때보다 돈을 더 많이 벌었는데도 괴로움이 줄어들지 않고 늘어납니다 지식이 늘었는데도, 나이가 많아졌는데도, 경험이 풍부해졌는데도, 지위가 높아졌는데도 더 괴롭습니다. 지위가 낮을 때는 높으면 좋은 것 같고, 돈이 없을 때는 있으면 좋은 것 같고, 어릴 때는 나이 들면 좋은 것 같고, 결혼 못할 때는 결혼하면 좋은 것 같은데, 막상 나이가 들면 더 괴롭고, 돈이 있으면 더 괴롭고, 결혼하면 더 괴롭습니다.

노력을 하면 할수록 더 커지는 괴로움

왜냐하면 우리의 욕구라는 것은 한정되어 있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돈이 없을 때는 백만 원만 있으면 좋겠다 싶지만, 막상 백만 원이 생기면 천만 원은 있어야겠다는 욕구가 생깁니다. 그래서 천만 원을 가지면 또다시 어림도 없이 부족하게 됩니다. 이렇게 아무리 가져도 욕구는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만족과 불만족, 괴로움과 즐거움이 언제나 되풀이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게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모습입니다.

중학생이 되면 ‘고등학생이 되면 낫겠지’ 하고, 고등학생이 되면 ‘대학만 가면 낫겠지’ 하고, 대학생이 되면 ‘취직만 하면 낫겠지’ 하고, 취직이 되면 ‘결혼만 하면 낫겠지’ 하고, 결혼을 하면 ‘애만 낳으면 낫겠지’ 하고, 애를 낳으면 ‘집만 사면 낫겠지’ 합니다.

그렇다면 돈이 많은 재벌 회장이거나, 지위가 가장 놓은 대통령이거나, 인기가 많은 연예인이라고 하면 괴로움이 없을까요? 그들이 우리보다 더 행복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욕망은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는 지속 가능한 행복을 이룰 수가 없는데 마치 불나방처럼 계속 날아듭니다.

먹는 것 좀 더 먹고, 입는 것 좀 더 입고, 지위가 좀 더 높아지면, 인기가 좀 더 있어지면, 모든 게 다 해결될 것 같지만, 다시 더 큰 욕망이 생깁니다. 여기에 모순이 있습니다. 이 한계와 모순을 정확하게 인식해야 수행을 왜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조금만 노력하면 괴로움 없이 살 수 있을 거야’ 이렇게만 생각하면 아무리 좋은 이야기를 해도 그때뿐이고 늘 거기에 전전긍긍하게 됩니다. 쥐가 고구마의 맛에 딱 꽂히면 거기에 쥐약이 들었다고 아무리 얘기해줘도 ‘없을지도 몰라’, ‘조금 먹는 정도는 괜찮을 거야’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기독교인이냐, 불교인이냐, 종교가 있느냐 없느냐, 나이가 많으냐 적으냐, 재산이 많으냐 적으냐, 흑인이냐 백인이냐, 장애가 있느냐 없느냐, 대학을 나왔느냐, 박사냐 아니냐 이런 것으로 인생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요. 그건 이미 여러분들이 하고 있는 거예요. 그것을 통해서는 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이 점에 대해 먼저 스스로 확실히 이해가 되어야 합니다.

‘아, 이렇게 해서는 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 없겠구나’

이렇게 자기 정리가 확실하게 되어야 해요. ‘법륜스님이 그렇게 말하니까 그렇구나’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윤회하는 인생을 살고 있어요. ‘윤회한다’라는 말은 즐거움과 괴로움이 반복된다는 뜻입니다. 즉, 이 즐거움이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말이에요. 그 즐거움의 원인이었던 것이 지나 놓고 보면 괴로움의 원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괴로움과 즐거움을 딱 잘라서 괴로움은 없애 버리고 즐거움만 갖겠다는 것은 불가능해요. 오히려 ‘괴로워하기도 하고, 즐거워하기도 하면서 인생을 사는 것이지’ 하면서 괴로움과 즐거움을 같이 갖고 살겠다고 하는 것도 하나의 인생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괴로움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면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괴로움은 욕구가 충족이 안 돼서 생기는 겁니다. 그러면 욕구가 충족되면 없어질까요? 일시적으로 없어지지만 금방 욕구가 변해서 또 괴로움이 생깁니다. 그래서 괴로움이 완전히 없어지려면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해요. 욕구에 목매달지 말아야 합니다. 욕구가 충족되느냐 안 되느냐 이런 것을 놓아버려야 해요. 욕구가 없어야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욕구가 일어나는 건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욕구의 충족을 통해서 행복을 얻고자 하는 가치관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져 버리면 괴로움도 사라지지만, 즐거움 또한 사라집니다. 욕구가 충족돼서 즐겁다는 건 마음이 들뜨는 거예요. 마음이 들뜨니까 시간이 지나면 다시 떨어집니다. 그래서 마음이 좋았다 나빴다 하면서 널뛰기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욕구에 끌려가지 않고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어떻게 될까요? 마음이 고요해집니다. 마음이 널뛰기를 하지 않아요. 적어도 널뛰기의 높낮이가 아주 작아집니다. 옛날 같으면 상황에 따라 기분이 확 올라갔다가 뭐가 안 되면 기분이 팍 떨어졌다가 했다면, 요즘은 뭐가 돼도 빙긋이 웃고, 뭐가 안 돼도 빙긋이 웃을 수 있게 됩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욕구에 끌려가지 말아야 합니다. 욕구에 끌려가면 욕구가 충족되기도 하고, 안되기도 하기 때문에 즐거움과 괴로움이 계속 반복되는 윤회의 과보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욕구를 따라가지 않고 억제하면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인과응보는 안 생기지만 스트레스를 받으니까 이것도 괴로움이에요. 그래서 참다 참다 못 참으면 터지고, 터지면 과보가 따르니까 손해가 생기고, 손해가 생기니까 또 이를 악물고 참고, 참다 참다 못 참으면 또 터지고, 또 손실이 생기고, 우리의 삶이 지금 이렇게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참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에요. 참는 것도 괴로움입니다. 욕구를 따라가면 과보가 생기고, 참으면 스트레스가 생기는데, 그렇다면 욕구가 일어나는데도 따라가지도 않고 참지도 않는 길이 있을까요?

먹고 싶은데 먹지도 않고 이를 악물고 참지도 않고, 담배를 피우고 싶은데 피우지도 않고 참지도 않고, 우리로서는 ‘그런 방법이 어디에 있나?’라고 생각하지만, 부처님께서는 그 길을 처음으로 발견하셨습니다.

중도, 위대한 새로운 길

욕구를 따라가는 길은 ‘쾌락주의’라고 하고, 욕구를 참는 길을 ‘고행주의’라고 합니다. 부처님이 출가하시기 전에는 욕구를 따라가는 쾌락주의의 길을 걸었어요. 즉,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길을 걸으신 거예요. 출가하고 나서는 왕위도 버리고 재물도 버리고 가족도 버리고 욕구를 억제하는 고행주의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길은 모두 진정한 자유의 길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이 두 길을 다 버리고 새로운 길, 제3의 길을 발견하셨습니다. 그것이 ‘중도(中道)’입니다.

중도란 욕망을 따르지도 않고, 욕망을 억제하지도 않고, 다만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담배 피우고 싶어 하는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겁니다. ‘안 피워야지!’ 하고 결심하는 것도 아니고, ‘피워야지!’ 하고 결심하는 것도 아닌 그냥 ‘그런 욕구가 일어나는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겁니다.

다리에 통증이 있으면 ‘통증이 있구나’ 하고 알아차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통증은 싫어. 다리를 펴야지’ 하고 다리를 폅니다. 또 한편으로는 다리를 펴면 안 된다고 하니까 ‘참아야지’ 합니다. 펴고 나면 후회하고, 참으면 고통스러워합니다.

명상수련을 하는 이유

욕구를 따라가거나 참는 것이 아니라 알아차림을 유지하면 스트레스가 없습니다. 그런데 막상 직접 해보면 안 돼요. 현실은 다리를 펴든지 참든지 두 가지밖에 안 됩니다. 알아차린다고 말은 하지만 결국은 이를 악물고 참게 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욕구를 따라가거나 참는 이 두 길만을 걸어왔고, 이것밖에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연습이 필요한 거예요. 그 연습이 우리가 하려고 하는 이 명상수련입니다.

그런데 욕구는 사람마다 다 달라요. 같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돈 안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나?’, ‘출세 안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나?’, ‘칭찬하면 안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나?’ 이렇게 말할 수는 있어요.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왜냐하면 까르마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까르마(Karma)를 불교 용어로는 업식(業識)이라고 해요. 쉬운 말로 하면 습관입니다. 즉, 습관이 서로 다릅니다. 음식의 맛을 보는 습관뿐만 아니라 모든 습관이 다릅니다.

그러면 습관은 태어날 때부터 가져온 것인가? 그건 아니에요. 이 모든 업식은 형성된 겁니다.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부모의 영향을 받고, 사회의 영향을 받으면서 형성된 거예요. 형성된 그 업식을 바탕으로 해서 내가 자동 반응을 하는 겁니다. 옳다 그르다 맞다 틀리다 하지만 그건 객관적인 것이 아니에요. 형성된 업식에 의해서 자동으로 그렇게 반응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나는 강아지를 좋아하는데 다른 사람은 강아지를 싫어하고, 나는 고양이를 좋아하는데 다른 사람은 고양이 싫어합니다. 이럴 땐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형성된 업식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감정에 내가 놀아나게 되는 거예요.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자기의 업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뜻입니다. 감정은 눈으로 보는 것에 의해 일어나고, 귀로 듣는 것에 의해 일어나고, 냄새를 맡는 것에 의해 일어나고, 맛을 보는 것에 의해 일어나고, 감촉을 하는 것에 의해 일어나고, 생각을 하는 것에 의해 일어납니다. 즉, 보고 듣는 경계와 바깥 환경에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나 수행을 하게 되면 주위의 환경에 영향을 덜 받게 됩니다. 즉 내 업식에 내가 놀아나지 않게 됩니다.

이런 목표와 원리에 의해서 명상을 하는 겁니다. 건강해지기 위해서 명상을 한다는 식의 작은 이익을 추구하지 마세요. 명상은 건강하고 안 하고, 돈 벌고 안 벌고, 시험에 합격하고 안 하고, 이런 것들을 훨씬 뛰어넘는 거예요. 시험에 합격해도 편안하고, 시험에 떨어져도 편안하고, 먹어도 편안하고, 안 먹어도 편안하고, 이런 경지로 나아가는 것이 명상입니다. 뭐가 되면 좋고, 안 되면 괴롭고, 이런 게 없어집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경지로 나아가게 됩니다.”

명상의 목표를 설명하고 처음 명상수련에 참여한 분들을 위해 스님은 자세부터 호흡에 알아차리는 법까지 하나하나 안내해주었습니다.

스님의 안내에 따라 30분 명상을 하고 10분간 포행을 하고, 다시 30분간 명상을 했습니다.

10시에 첫째 날 수련을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내일은 새벽 4시에 기상해 명상으로 시작해 밤 10시까지 명상으로 하루를 마무리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63

0/200

김민정

감사합니다

2020-12-14 21:39:01

명상

스님 법문 감사합니다.

2020-12-13 13:55:12

개잡부

감사합니다.
기분좋음ㅡ빙긋ㅡ미소ㅡ세르토닌ㅡ이시형
즐거움ㅡ엔돌핀ㅡ황수관

2020-12-12 13: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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