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0.4.27 법사단 수련 5일째, 정토불교대학 제3강, 산나물 캐기
“착각을 하는 이유”

안녕하세요. 법사단 수련 5일째입니다. 오늘 수련은 밭에서 시작했습니다. 트럭에 거름을 싣고 산 윗 밭으로 올라갔습니다. 어제 쌓아놓은 축대 덕분에 차가 안정적으로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밭에 도착하니 스님은 30분 일찍 나와 울타리 주변을 정비하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찔레순을 한 다발 꺾어 내려왔습니다.

“고사리를 뜯으려고 일찍 나왔는데 고사리가 없네요. 오늘 참은 찔레순이에요.”

어릴 적 찔레순을 먹어보았던 법사님들은 반가워하며 찔레순을 받아 들었습니다. 찔레순 껍질을 까서 연한 순을 씹으니 달큼한 맛이 입 안 가득 퍼졌습니다.

찔레순 향이 가시기도 전에 울력을 시작했습니다. 먼저 거름을 밭으로 내렸습니다.


두 두둑에 거름을 골고루 뿌려주고 흙과 잘 섞어 주었습니다.




다시 고랑을 평평하게 만들어 준 다음 비닐을 덮어주었습니다. 도라지를 심은 두둑을 빼고 나머지 세 두둑에도 거름을 섞어주었습니다.


“아이쿠, 시간이 벌써 9시 30분이 다 되었네요. 저는 10시부터 불교대학 생방송 촬영이 있어서 먼저 내려가 볼게요.”

“예, 스님.”


날이 따뜻해져서 땀을 많이 흘렸습니다. 스님은 밭에서 내려와 간단하게 세안을 하고 생방송 시작 시간인 10시 5분 전에 카메라 앞에 앉았습니다.

“안녕하세요. 지난 일주일 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지난주에 2강을 한 후 일주일 만입니다. 3강은 강의 주제가 ‘사성제와 인연과’입니다. 스님은 코로나 사태의 추이에 대해 간단히 언급한 후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정토불교대학 세 번째 강의 시간입니다. 국민 여러분들이 사회적 거리두기에 협조를 잘 해준 덕분에 코로나바이러스 감염 확진자가 하루 평균 10명 이내로 안정된 상태입니다. 이번 주까지도 안정된 상태를 계속 유지하게 되면, 아마 사회 전체적으로 우리의 일상생활도 조금 더 자유로워질 것으로 예상합니다.

정부의 방침이 바뀌게 되면, 여러분도 다음 주부터는 법당에 나와서 불교대학 수업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입학하고 나서 서로 얼굴도 못 보고 온라인으로만 수업을 진행했는데, 이제 곧 얼굴을 볼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러나 5월 6일부터 국가적인 차원에서는 사회적 거리두기가 해제된다고 하더라도 정토회는 곧바로 오프라인으로 전환하지는 않을 생각입니다. 추이를 지켜보고 정부의 방침보다 한 주 정도 늦춰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해제할 예정입니다.”

온라인으로만 수업을 진행한 지 한 달이 지났습니다. 이제 법당에 나갈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기대감에 학생들의 마음도 조금은 설레었을 것 같습니다.

이어서 지난 2강 때 설명한 내용의 요점을 정리한 후 3강의 강의 주제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여기, 나에게 깨어있기

“불교는 깨달음의 가르침입니다. 괴로움은 무지 때문에 생겨나고, 무지를 깨우치게 되면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자유롭고 행복하게 인도할 수 있는 가르침이 불교입니다. 여기까지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자유롭고 행복한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지금’, ‘여기’, ‘나’에게 깨어 있어야 합니다. 지나간 과거에 사로잡혀 있거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염려하지 않고, 지금 여기 나의 상태에 깨어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지난주에 여러분께 실천 과제로 내 마음 알아차리기를 연습해 보라고 했습니다. 화가 나면 ‘화가 나는구나’, 욕심이 나면 ‘욕심을 내는구나’, 미움이 생기면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는구나' 이렇게 알아차려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화내고 욕심내고 미워하면 안 된다는 뜻이 아니라 나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먼저 알아차리는 연습을 해보라는 겁니다. 직접 해보니까 어떠셨습니까?”

실시간 채팅창에 소감이 올라왔습니다.

“호흡이 거칠어지는 것을 보고 마음이 조급하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인간관계로 괴로운 마음이 들었는데, ‘내가 지금 괴로워하고 있구나’ 하고 알아차리니 천천히 마음이 편안해지는 걸 느꼈습니다. 편안한 마음이 드니 내가 어떻게 해야겠구나 하는 해결책도 찾을 수 있었습니다.”
...

소감을 들어본 후 강의를 계속 이어갔습니다.

“지금까지 불교란 무엇인지에 대해 배웠는데요. 그러면 이제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셨다고 하는데 무엇을 깨달았다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 거예요.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깨달음이라는 것은 알지 못한 상태에서 '어, 그게 아니고 이거네!' 하고 알아차리는 겁니다. 무지를 깨우치는 걸 깨달음이라고 해요. 우리가 잘못 알고 있거나, 모르고 있거나, 착각하고 있는 상태에서 깨어나서 '어, 그게 아니고 이거네!' 하는 게 깨달음입니다.

인식 상의 오류가 생기는 이유

제 손을 한 번 보세요. 손가락이 다섯 개입니다. 그런데 멀리서 좁은 홈을 통해서 제 손가락을 보면 엄지손가락 한 개 밖에 안 보여요.

한참 이동하면 두 번째 손가락이 보이고, 또 이동하면 세 번째 손가락이 보이고, 또 이동하면 네 번째 손가락이 보이고, 또 이동하면 다섯 번째 손가락이 보입니다. 보이는 손가락의 모양과 크기도 각각 다릅니다. 그래서 ‘각각의 손가락이 별도로 떨어져 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보는 세계예요. 잘못 보려고 그런 게 아니라 세상을 인식할 때 그렇게 인식이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손으로 만지고, 머리로 생각하는, 이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해 세상을 인식하는데, 여기에는 시간과 공간의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착각은 사람을 인식할 때도 마찬가지예요. 남편이 나한테 돈을 제대로 안 준다는 한 면만 보고 내 욕구의 관점에서 ‘남편은 인색한 사람이다’ 이렇게 인식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남편의 전체 모습이 아니라 한 면일뿐입니다.

이런 현상을 두고 부처님께서는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것에 비유했습니다. 장님한테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냐고 물으면, 코를 만져본 사람은 ‘뱀 같이 생겼네’, 배를 만져본 사람은 ‘벽 같이 생겼네’, 다리를 만져 본 사람은 ‘기둥 같이 생겼네’, 꼬리를 만져 본 사람은 ‘빗자루 같이 생겼네’, 이렇게 서로 다른 대답을 합니다. 그런데 각각의 답이 모두 일리가 있어요.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 자기가 경험한 수준에서 대답을 한 겁니다. 그러나 그건 코끼리의 본래 모습은 아닙니다. 코끼리의 본래 모습을 알기 위해서는 눈을 뜨고 코끼리의 전체 모습을 봐야 합니다. 코끼리의 전체 모습을 보는 것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통찰력’ 또는 ‘지혜’라고 하는 겁니다.

이렇게 우리는 인식상의 오류를 많이 범하게 되는데, 가장 근본적인 오류는 이 세상 만물에는 어떤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작은 물방울이 많이 모이면 양동이에 있는 물이 되기도 하고, 강에 있는 물이 되기도 하고, 호수에 있는 물이 되기도 하고, 바다에 있는 물이 되기도 하죠. 그 물방울을 쪼깨고 또 쪼개면, 어느 순간에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최소한의 알갱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과학적으로 물 분자가 물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천하 만물이 각각의 자기 본성을 갖고 있는 어떤 실체가 있고, 그런 존재들이 모여서 이 세상을 이루고 있다는 거죠.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생각합니다. 너는 너의 본성, 나는 나의 본성, 저 사람은 저 사람의 본성이 본래부터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 세상이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개별 존재들의 집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개별 존재들의 집합을 ‘삼라만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개별 존재들은 변하지 않는 실체가 있고, 그게 천국에 갔다가 지옥에 갔다가 한다. 윤회를 한다면, 그 실체가 전생에서 현생으로, 현생에서 내생으로 이동하고, 개로 태어나면 개가 되었다가, 소로 태어나면 소가 되었다가 한다.’

이렇게 근본 실체가 있다는 전제 하에 우리는 세상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내가 흰 옷을 입고 있든, 검은 옷을 입고 있든, 어떤 종류의 옷으로 갈아입는다 하더라도 ‘나’라는 존재는 그대로 있고 옷만 바뀌는 것처럼 모든 것들이 이 전제를 바탕에 두고 성립한다는 거죠.

깨달음의 눈으로 본 존재의 참모습

그런데 부처님께서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깊이 정진을 한 결과 가려져 있던 무지가 벗겨지면서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존재들은 개별적 존재의 집합이 아니라 서로 연관되어 있음을 인식하게 된 겁니다. 깨닫기 전에는 세상을 개별 존재의 집합으로 인식했는데, 깨닫고 나서 보니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된 거예요. 그것을 ‘연기(緣起)’라고 합니다.

연기의 뜻은 ‘말미암아 일어난다’, ‘연결되어 일어난다’라는 뜻입니다. A가 A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B와 연관되어서 A로 인식이 되고, B 또한 A와 연관되어서 B로 인식이 된다는 겁니다. A는 B가 없는 단독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A가 단독으로 존재한다는 생각은 마치 태양이 지구를 돈다는 착각처럼 인식상의 오류일 뿐입니다.

‘A로 말미암아 B가 일어난다.’
‘B로 말미암아 A가 일어난다.’

이것이 존재의 실제 모습입니다. 삶 따로 죽음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에요.

‘삶으로 말미암아 죽음이라는 인식이 일어난다.’
죽음으로 말미암아 삶이라는 인식이 일어난다.’

선과 악이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선으로 말미암아 악이라는 인식이 일어난다.’
‘악으로 말미암아 선이라는 인식이 일어난다.’

이것이 존재의 참모습입니다. 우리가 인식상의 오류에 빠지게 되면 손가락을 다섯 개의 개별 존재의 집합으로 인식하게 되지만, 오류에서 벗어나게 되면 한 손에 다섯 개의 손가락이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손가락이 개별적 존재의 집합에 불과하다면, 엄지손가락이 살고 죽는 것과 두 번째 손가락이 살고 죽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을 겁니다. 그런데 실제의 모습은 한 손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엄지손가락이 다치는 것은 두 번째 손가락의 불편으로 이어집니다.

손가락만 보면 엄지손가락과 두 번째 손가락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팔을 자르면 엄지손가락과 두 번째 손가락이 같이 죽게 됩니다. 왜냐하면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좁은 눈으로 보면 그 연결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개별 존재의 집합이라고 인식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섯 개의 손가락은 하나다’라고 해도 맞지 않습니다. 하나의 덩어리가 아니고 각각이 존재하면서 상호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연기법입니다.”

스님은 삼귀의, 수행문, 사성제, 연기법, 인연과에 대해 90분 동안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강의를 마칠 무렵 오늘 공부한 내용을 다시 정리해 주면서 지난주에 이어 실천 과제를 하나 정해 주었습니다.

“괴로움이 생기는 이유는 나의 무지 때문입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알지 못하면 괴로움이 발생하지만, 연기법을 알게 되어 무상과 무아를 깨닫게 되면 괴로움이 소멸됩니다.

이번 주에도 과제를 하나 드리겠습니다. 지난주에는 ‘지금 여기 내 상태 알아차리기’를 과제로 드렸습니다. 이번 주 과제는 지난주보다는 조금 어렵습니다.

‘내 상태에 대한 원인 알아차리기’

두려움이 일어나는 원인, 화가 나는 원인 등 내 상태에 대한 원인을 알아차려 보시기 바랍니다.

고치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우선 내 상태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넘어지면 ‘넘어졌구나’ 하고 알아차리고, 일어서면 ‘일어섰구나’ 하고 알아차리고, 걸으면 ‘걷는구나’ 하고 알아차리고, 화가 나면 ‘화가 나는구나’ 하고 알아차리면 됩니다. 그런데 이번 주 과제는 알아차리기보다 조금 더 어렵습니다. 내 상태를 먼저 알아차리고, 그런 후 그런 마음이 일어난 원인도 알아차려보는 겁니다. 예를 들면, 화가 났을 때 ‘화가 난 원인이 무엇일까?’ 하고 탐구를 해보는 겁니다.

오늘 수행문에 대해 배웠으니까 화가 나는 원인을 남편이나 아이에게서 찾지 말고 나에게서 찾아보는 공부를 해보시면 좋겠습니다.”

생방송이 끝나자 불교대학 학생들은 모둠별로 화상 채팅 방에 입장하여 마음 나누기를 했습니다. 내 상태에 대한 원인 알아차리기 과제가 일주일 동안 내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다줄지 기대감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점심을 먹고 스님은 농사팀 행자님들과 함께 수련원 뒷산을 함께 올랐습니다. 산나물을 가득 따올 생각으로 큰 가방을 하나씩 둘러멨습니다.

스님이 어릴 적 친구들과 뛰놀던 뒷산입니다. 좁은 길을 따라 한 줄로 산을 올랐습니다. 길옆으로는 가파른 암벽이 있었습니다.

“옛날에 친구들과 내기를 하며 이 바위를 기어오르기도 했어요.

‘갈 수 있나?’
‘갈 수 있지! 가면 뭐 줄래?’

이렇게 서로 내기를 걸고 오르기도 했었어요.” (웃음)

20분 정도 산을 올라 숲길 옆으로 흐르는 계곡에서 잠시 쉬었습니다.


“이렇게 가까이에 심심산골이 있는 줄 몰랐죠?”

과거로 돌아간 듯한 자연 그대로의 모습에 마음이 저절로 맑아집니다. 계곡에는 올봄에 깨어난 올챙이들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가재가 많았는데 지금도 있을까요?”

스님은 옛날 생각을 떠올리며 돌을 하나 들춰보았습니다. 놀랍게도 아기 가재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이야, 가재가 아직도 있네요!”

가재는 깨끗한 1급수에서만 살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하천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가재였지만, 환경 오염이 심해져서 이제는 가재를 쉽게 볼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 가재를 만나니 무척 반가웠습니다. 가재를 처음 보는 행자도 있었습니다.

떠들썩한 인간의 소리에 놀랐는지 가재는 금세 몸을 감추었습니다. 어미 가재가 있나 돌을 더 들추어보았지만 더 이상 가재를 만날 수 없었습니다. 다시 산을 올랐습니다. 스님은 산에서 만나는 나무를 알려주었습니다.

“이게 옻나무예요.”

“이건 제피나무예요.”

망개잎, 모시잎, 둥글레도 볼 수 있었습니다. 조금 더 산을 오르자 가파르던 길이 완만해지고 저수지가 나타났습니다. 저수지에는 연둣빛 산과 파란 하늘이 담겨있었습니다.

“이 일대를 말그미(맑음이)라고 해요. 예쁜 이름이죠. 산 위에 이렇게 넓은 땅이 있어요. 옛날에는 이 위에 농장도 있었는데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고 있어요.”

꼭 평지를 걷는 듯했습니다. 인적이 드물어 자연 그대로 원시적이고 이색적인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그런데 산나물을 캐러 왔는데 눈을 씻고 찾아봐도 산나물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커다란 가방을 멘 서로의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났습니다.

산나물은 못 찾았지만 연달래와 발 아래 피어있는 작고 예쁜 꽃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곳곳에 못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넓은 땅에 물도 있는 것을 보니 사람이 살 수 있었겠죠?”

산 깊은 곳까지 둘러보고 돌아 나왔습니다. 스님이 앞서가고 있는데 뒤에서 산나물을 찾았다는 기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스님! 산나물을 찾았어요.”

왔던 길을 돌아 가보니 고사리 사촌 고비나물, 우산 모양을 한 삿갓 나물이 있었습니다.


엄청난 양의 산나물을 찾은 줄 알았는데, 사람들이 한차례 산나물을 따갔는지 한 줌도 안 되는 양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도 산나물을 본 것만으로도 기뻤습니다. 산 깊은 곳까지 둘러보고 산을 내려오니 3시간이 지났습니다.

예불을 마치고 저녁 8시부터 마음 나누기와 농사회의를 한 후 하루를 마무리했습니다.

“오늘 하루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내일은 공동체 법사단 수련이 계속 이어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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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남

산길을 걸으며 옛날 어릴적 이야기를 하시는 스님의 모습은 너무나도 인간적인데 그 인간적임과 수행자적 모습을 잘 겸비하고 갈고 닦는 것이 큰 스님의 그릇이라고 느껴집니다.

2020-05-03 15:45:37

조수연

삼라만상은 변하지 않고 존재들이 연기 되어
있다는 사실을 다시 알게되었습니다

2020-05-01 12:20:05

문병식

말미암아 일어남을 알겠습니다.

2020-05-01 07: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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