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0.4.26 법사단 수련 4일째, 온라인 일요 명상 3주째
"명상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

안녕하세요. 새벽 정진을 마친 후 아침 일찍 농사일을 시작했습니다. 주말을 맞이해 서울에서 JTS 실무자들이 창고 정리를 하러 왔다고 해서 스님은 상추를 한가득 따서 서울로 올려 보내기로 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상추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습니다. 열심히 상추 잎을 따고 있는 스님의 손에 비닐장갑이 자꾸 눈에 들어와서 스님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이거요. 지난번에 투표소에서 받은 거예요. 환경 운동을 하기 때문에 원래 비닐장갑은 사용하지 않는데, 투표소에서 나눠주는 걸 안 받을 수가 없어서 받았어요. 이왕 받은 거 이렇게 상추를 수확할 때마다 계속 사용하고 있는 거예요. 쓰고 나면 깨끗이 씻어서 말려서 또 사용하면 돼요. 아침에 추우니까 이걸 끼면 수확하기가 훨씬 수월합니다. 채소는 아침에 해가 뜨기 전에 수확을 해야 싱싱함이 오래 가요. 우리는 저온 냉장고를 따로 갖고 있지 않으니까요.”

투표를 한 지 벌써 2주일이 지났지만 스님은 아직도 비닐장갑을 재활용해서 쓰고 있었습니다.

상추 잎을 네 바구니에 가득 담을 정도로 수확을 했습니다. 큰 봉지에 담아서 서울로 보낼 채비까지 마쳤습니다. 서울로 올라가는 실무자들의 손에 상추가 가득 담긴 봉지를 건네는 스님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합니다.

상추 수확을 마치고 법사단 수련이 시작되는 아침 8시에 맞춰 수련원 강당으로 들어갔습니다.

8시부터 수련을 시작했습니다. 어제까지 9개 분과의 발표와 토론을 마쳤습니다. 오늘은 결사행자회의에 발표를 하기 전에 분과별로 논의하고 싶은 사항이 있으면 이야기하고 의견을 수렴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오전에는 정토대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현재 정토대전은 전체 구성과 목차를 논의하고 있는 단계입니다. 의견을 주시면 반영해서 진행해보겠습니다.”

법사님들은 돌아가며 정토대전에 대한 의견을 냈습니다. 적극적인 의견 속에서 정토대전에 대한 기대와 필요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법사님들의 의견을 모두 들은 후 스님도 정토대전에 무엇이 담겨야 하는지에 대해 말했습니다.

“부처님은 처음으로 해탈과 열반을 증득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하신 분입니다. 당시에는 진리에 대한 독점권을 브라만 계급이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부처님이 이 법을 보편화했다는 것은 브라만 계급이 아니어도 누구나 다 해탈과 열반을 증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해탈과 열반을 증득한 사람들 중에는 브라만도 있었지만, 크샤트리아와 바이샤도 있었고, 심지어 수드라도 있고, 더 나아가서는 불가촉천민도 있었습니다. 즉, 누구나 다 이 법을 만나 깨달아서 행복에 이르렀습니다.

대중이 주체가 되는 길을 갈 것인가

이 법을 공부하는 이유는 출세하기 위해서, 많은 지식을 얻기 위해서, 복을 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 법을 알았다고 해서 천민의 신분이 해방되는 것도 아니었고, 죽은 아이가 살아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법을 알고 자유롭고 행복해졌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당시에 이 법을 사회 전체적으로 실현해 내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상가라고 하는 공동체 안에서는 평등성을 실현해 냈습니다. 우리가 ‘정의롭다’라고 말할 때 가장 핵심적인 가치는 평등성입니다. 누구나 다 거기에 도달할 수 있고, 누구에게나 다 기회가 주어질 때, 우리는 ‘정의롭다’ 이렇게 말을 합니다. 역사 속에서 인류는 이 평등성을 잃었다가 다시 회복하는 것을 반복해 왔습니다. 특히 중국이나 한국은 절대왕권 사회였기 때문에 불교는 그 지배 질서에 동조하는 역할을 주로 했습니다. 물론 일부는 거기에 저항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항하는 역할을 할 때는 평화적인 원칙에 어긋날 수밖에 없었고, 동조하는 역할은 평등성인 정의를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즉, 저항하는 쪽에 섰을 때는 정의와 평등성을 확보할 수는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평정심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열반과 가장 반대되는 분노와 폭력이 일부 합리화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정토회는 부처님의 원래 가르침대로 돌아가기 위해 창립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정토회가 세운 목표도 스님이냐 종교지도자냐 지식인이냐를 떠나서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다가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이 길을 가는 소수의 사람들과 그들을 후원하는 사람들로 나눌 것인지, 아니면 대중이 주체가 되는 길을 갈 것인지에 대해 많은 토론을 했지만, 결국 정토회는 출발할 때부터 대중이 주체가 되는 길을 가자고 결정했습니다.

점점 세속화되는 것을 막으려면

그러나 우리가 그때 가장 우려했던 문제는 대중이 주체가 되면 세속화되어 버릴 위험이 매우 높다는 것이었습니다.

세속화의 길을 막으려면 출가해서 정토회에 들어와 사는 사람들은 삶을 사는 방식에 있어서 출가자의 자세를 분명히 가져야 합니다. 어제 회의 때 ‘물건을 새로 사지 않기’에 대해서 잠깐 얘기했는데, 이런 식으로 삶을 사는 방식이 소박해야 합니다. 대부분이 말로만 출가를 했지 사는 방식은 출가가 안 된 세속적인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몸을 가정과 회사에 둔 채 활동하고 있는 대중부 활동가들은 더 어렵습니다. 수행자가 되었다는 의미로 정회원이라고 명명하긴 했지만, 아직도 직장, 가정, 자식에 대한 집착을 끊지 못하고 있어요. 몸이 세속에 있어서 직장도 다니고, 결혼도 하고, 자식도 기르지만, 수행자로서 거기에 대한 집착은 끊어야 합니다. 지금 집착이 잘 안 끊어지면, 앞으로라도 집착을 끊는 게 목표가 되어야 해요. 그런데 그런 목표를 분명히 세우지 않고 정회원이 되어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부처님이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의 차별을 없애고 누구나 수행자가 될 수 있다고 했는데도, 소승불교에서는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 사이에 차별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불교 안에 새로운 차별이 생겨났을 때 대승불교는 다시 평등성으로 돌아가기 위해 ‘누구나 다 발심하면 수행자가 될 수 있다’라고 하면서 상가 안에 사부대중이 다 포함된다고 주창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그냥 세속에 사는 머리 기른 남자 신자와 여자 신자도 상가의 구성원이 될 수 있다는 식으로 잘못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상가의 구성원이 될 자격

수행자가 되겠다고 할 때, 그가 크샤트리아 계급이든, 수드라 계급이든, 계급이 무엇이냐를 갖고 차별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누구나 다 상가 구성원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해탈과 열반을 추구하는 가치관을 가진 수행자만이 상가 구성원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과거에는 ‘브라만만 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부처님께서는 ‘다른 계급도 될 수 있다’라고 하셨어요. 대승불교에서는 ‘비구만 될 수 있는 게 아니라 비구니도 될 수 있고, 우바새도 될 수 있다’라고 주장을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놓치는 것은, 누구나 다 될 수 있지만 거기에는 ‘발심'이 전제되어 있다는 겁니다.

정토회에서도 누구나 다 정회원이 될 수 있습니다. 스님이든 아니든, 남자든 여자든, 기독교인이든 불교인이든, 한국 사람이든 외국 사람이든, 누구나 다 정회원이 될 수 있지만, 거기에는 ‘발심’이 전제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정회원이 된 사람들을 봤을 때 모두 발심이 되어 있느냐는 겁니다. 단순히 조금 괜찮은 신자인 수준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있지 않느냐는 거예요.

이것은 마치 사찰에서 아침마다 조석예불을 할 때 이 법이 널리 전해지고, 남북통일이 하루빨리 성취되기를 기도하지만, 그냥 입으로만 기도할 뿐 실제로는 전법이나 남북통일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처럼 정토회에서 정회원이 된 사람들도 말로는 ‘깨달음’, ‘열반’ 이런 용어를 쓰지, 정작 자신의 관심은 우리 아들이 어떻게 하면 좋은 대학에 가느냐, 돈을 얼마나 많이 벌 수 있느냐, 어떻게 하면 가게가 잘 운영될 것이냐, 이런 것에 집착되어 있는 수준이라는 겁니다.

부모를 돌볼 사람이 없어서 돌봐야 할 때도, 수행자는 내 부모이기 때문에 돌보는 것이 아니라 내 부모든 아니든 이 분은 마땅히 보호받아야 할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보호를 하는 겁니다. 수행자는 이렇게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 정회원들이 수행자로서 발심이 안 된 수준이라면 ‘정회원은 상가의 구성원이 된다’ 이런 규정은 잘못된 것이 됩니다. 수행자가 되기로 발심하지 않는 사람은 그냥 일반 회원으로 활동해야 합니다. 수행자가 되겠다고 원을 세우지 않은 사람들이 자꾸 정회원이 되면 정토회가 수행공동체로서 오랫동안 유지되기가 어렵습니다.

부처님에 이어 이런 운동을 한 사람들이 대승불교를 초기에 일으킨 대승보살들입니다. 그러나 대승불교 역시 결국에는 세속화의 길을 걸어갔어요. 그 후 선불교를 일으킨 사람들이 초기에는 불필요한 종교의식을 다 걷어내고 ‘직지인심 견성성불’을 내세웠지만 결국 또 세속화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대중 속에 살면서 수행자의 중심을 유지하는 방법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들도 정토회는 수행자들의 모임이라는 목표성을 조금 더 분명히 가졌으면 좋겠어요. 삶의 방식이 유연한 것과 가치관이 분명한 것은 구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삶의 방식을 유연하게 한다는 명목으로 세속에 살면서 속복도 입고 머리도 기르고 살다 보니, 이것이 오히려 세속에 물 들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게 아닌가 싶어요.

우리는 대중과 함께 생활하고 있기 때문에, 삶의 방식은 유연하되, 살아가는 삶의 방향은 칼로 베듯이 딱 구분을 해주는 입장을 가져줘야 흔들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수행자의 자세를 분명히 하지 않고 대중과 섞인 채 세속의 방식대로 살다 보니 점점 세속화된 길로 흘러가고 있어 저로서는 ‘대중이 수행의 주체가 된다’ 하는 우리의 원칙에 대해 좀 우려를 하고 있어요. 이 원칙이 과연 얼마나 오래갈까 싶거든요.

지금 정토회는 수행적 원칙과 대중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고 하다 보니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 같아요. 우리의 ‘원’ 중에 평화를 지키고 통일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 있다 보니 그러려면 사회적 영향력을 가져야 하고, 그러려면 대중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는 생각에 초기에 우리가 가졌던 출가의 원칙, 환경 운동의 원칙, 제3세계 구호의 원칙들이 점점 훼손되고 있지 않나 싶어요.

질이 보장되는 범위에서의 양적 확대

이런 원칙을 염두에 두고 전체를 다시 정비했으면 합니다. 불교대학 수업을 온라인 방식으로 바꾸는 문제는 사실 부차적인 거예요. 그래서 늘 제가 얘기하잖아요. 질이 보장되고 양이 커지는 건 괜찮지만, 질이 보장되지 않고 양적 확대를 하는 것은 안 된다고요. 그렇게 되면 당대에 끝나요. 다음 대에 넘어가면 양의 관리 때문에 분란이 생겨서 패가 갈리고, 재산을 갖고 싸우든지 아니면 기복적으로 흐르든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기존의 질서를 비판하지만 기존의 질서가 저렇게 된 데에는 사실 그만한 현실성과 원칙이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 선사들이 정말 올곧게 살아온 기준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선방에서 승려들이 잘못 살아도 유지가 되는 겁니다. 잘못을 비판할 때도 선사들이 세워 놓은 그 기준으로 비판을 하고, 잘못을 해도 자기가 잘못하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복으로 바뀐 경우에는 수행의 기준이 없어지고 복을 비는 게 기준이 되었기 때문에 잘못되고 있어도 잘못한 줄 모릅니다.

이런 문제는 우리도 지금 직면한 문제예요. 그래서 올바른 기준을 세우는 게 우리가 정말로 해야 할 일이에요. 남에게 이것이 진리라고 말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나부터 거기에 동의가 되느냐가 중요합니다. 내가 여기에 100% 동의해서 말을 해도 상대가 신뢰하고 믿기가 어려운데, 나도 동의가 안 되는 얘기를 하면 상대가 받아들이는 믿음의 강도가 굉장히 약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여러 가지 무리수를 쓰는 거예요. 신흥종교에서 하는 것처럼 구원이라고 하는 환상을 내걸든지, 어떤 세력을 만들든지, 호화로운 건물을 짓든지, 이렇게 여러 방법들을 써야 하는 겁니다. 거기에는 결과적으로 돈이 관여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원칙을 분명히 정립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경직될 필요는 없어요. 우리가 가져야 할 관점은 아주 분명히 갖되, 현실에서 이것을 적용하는 방법은 좀 유연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현실 적용의 유연성이 원칙의 훼손으로 이어지게 해서도 안 됩니다.

만약 우리가 산속에 들어가서 바깥세상과 단절하고 산다면, 우리 모두가 원칙대로 살아갈 수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원칙을 못 지킬 사람들은 다 나가버리고, 원칙을 지킬 수 있는 사람들만 남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대중과 늘 어울려서 살고 있죠. 사회활동 부서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수행적 관점을 유지하기 어려운 이유는, 똑같이 활동하고 있는데 외부 전문가들은 대우도 받을 뿐만 아니라 심포지엄에서 발표를 하면 돈도 받아 가는 모습을 늘 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는 일은 똑같은데 대우가 서로 다르니까 자기는 마치 희생되는 것 같은 느낌을 갖는 겁니다. 또 밖으로 문만 열고 나오면 술집과 식당이 지천에 깔려 있기 때문에 검소하게 사는 것에 당당하지 못하고 심리적으로 위축이 되는 거예요.

‘이렇게 살면 나중에 늙었을 때 나에게 남는 게 무엇일까?’

이런 생각이 자꾸 들게 되는 거죠. 문경 수련원 안에서만 살면서 밖을 안 보면, 마음이 좀 답답한 건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원래 이렇게 사는 거구나’ 하고 잘 살게 되거든요. 농촌 사람이 농촌에 살 수 있는 이유는 맨날 이곳에 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날 서울에 있는 부잣집과 교류를 하면 농촌에 못 살아요.

내 삶이 먼저 바뀌는 사회 운동

그런 의미에서 정토회가 대중화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세운 원칙이 공동체 안에서 더욱 분명하게 지켜져야 됩니다. 만약 우리가 대중 주체를 포기한다면, 우리는 지금처럼 살아도 괜찮아요. 대중은 그냥 후원세력으로 두면 되니까요. 그게 아니라 대중 주체를 목표로 하고 있다면, 우리의 삶이 먼저 바뀌어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정토행자가 정치를 하면, 정토행자가 회사를 운영하는 사장이 되면, 정토행자가 회사의 직원이 되면, 일반 사람들과 달라야 합니다. 정토행자가 결혼을 하면 어떤 관점을 가지면서 부부관계를 유지해야 되고, 정토행자가 선생님이 되면 어떤 관점을 갖고 학생들을 가르쳐야 하고, 이런 것들이 분명하게 수립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수행 따로 있고, 자기 생활 따로 있고, 직장 생활 따로 있는 상황이라는 거죠.

수행자는 분노에 의해 투쟁을 하는 일에 앞장서도 안 되지만, 불의에 의한 노동 탄압에 침묵하는 것도 맞지 않습니다. 수행자는 소수의 목소리가 대변되지 못하면 그들을 돕는 일에 앞장서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그들이 다시 자기 권리를 되찾으면 더 이상 거기에 관여를 안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그들이 기득권자가 되면 그들을 비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단순히 법당 운영을 대중이 한다고 해서 그걸 ‘대중 주체’라고 생각하시면 그건 굉장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자기 삶이 행복해질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실천도 수행적 관점을 갖고 해 나가야 ‘대중 주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내용들이 정토대전에 모두 담겨야 합니다. 이런 기준을 갖고 경전 모음, 불교사상서, 사회 사상서, 깨달음의 글, 그에 따른 의식들을 정리하는 것이 바로 ‘정토대전’입니다.

의식은 우리의 일상적인 행동을 어떤 정신에 입각해서 하느냐에 대한 하나의 생활 문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수행자는 사람이 죽으면 어떤 관점을 갖고 의식을 치를 것인가, 수행자는 결혼을 할 때 어떤 의식을 해야 수행적 관점을 놓치지 않을까, 이런 것들이 바로 정토 문화가 되는 겁니다. 옷을 입을 때 어떤 제복을 입을 것인가 하는 문제도 있지만, 옷을 입는 기본적인 자세가 어떠해야 하느냐도 중요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부처님 당시에도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게 계율입니다. ‘꽃으로 장식하지 않는다’, ‘술과 가무를 즐기지 않는다’, ‘높은 평상 위에는 앉지 않는다’, 이런 계율을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사치하지 않는다’, ‘유흥을 즐기지 않는다’, ‘잘난 체하지 않는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죠. 이렇게 삶의 원칙을 정리하는 것도 정토대전에 들어가야 합니다.”

이어서 개원 기념 법회에 대한 의견을 수렴한 후에 울력할 시간이 되어 수련을 멈추었습니다.

10시부터는 밭에서 울력을 했습니다. 오늘은 산 윗 밭에 거름을 섞어주었습니다.

먼저 밭 한편에 쌓아둔 소똥과 거름을 밭에 뿌려주었습니다.



큰 돌을 골라내고 거름을 밭 위로 골고루 펴주었습니다.


뒤이어 괭이나 삽으로 땅을 파면서 거름을 흙과 잘 섞어주었습니다. 거름과 잘 섞인 흙은 다시 레기로 평평하게 만들었습니다.

스님은 밭으로 오르는 길에 축대를 쌓았습니다. 차가 오를 수 있도록 길을 넓히기 위해서였습니다. 지난번에 축대를 쌓았는데 비가 많이 왔을 때 물이 빠지면서 길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에 그 옆으로 조금 더 축대를 쌓았습니다.


“밭에서 나온 큰 돌은 이리로 주세요.”

큰 돌을 단단히 고정시키기 위해 땅을 좀 파고 큰 돌을 이리저리 모양을 맞춰 쌓았습니다. 중간중간에 크기가 작은 돌도 채우고 흙도 채우며 축대를 단단히 만들었습니다. 농사를 잘 짓기 위한 공사였습니다. 금세 축대를 쌓았습니다.

공사가 빨리 끝나 스님도 거름을 밭에 섞어주는 일을 함께 했습니다.

두 고랑에 거름을 잘 섞어주었습니다. 시간이 남아서 스님은 위로 거름을 옮겨놓자고 했습니다.

“자, 그럼 윗 밭으로 거름을 옮깁시다.”

스님이 먼저 퇴비 한 포대를 들고 성큼성큼 위로 올라갔습니다. 법사님들도 혼자 혹은 둘이서 포대를 윗 밭으로 올렸습니다.

마지막으로 고수를 심어둔 밭 위로 퇴비를 살살 흩뿌려주었습니다.

“내일은 이 밭에도 거름을 섞어줍시다.”

밭을 한 번 둘러보고 울력을 마쳤습니다. 밭 주변은 하루가 다르게 연둣빛으로 물들고 있었습니다. 봄 풍경을 한가득 느끼고 두북 수련원으로 돌아왔습니다.

점심 식사를 하고 1시 30분부터 다시 법사단 수련을 시작했습니다.

오전에 이어 ‘본부 개원 기념법회’와 이후 일정에 대한 이야기까지 나눈 후 오후에는 다시 모이지 않고 분과별로 문서를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습니다.

저녁예불을 하고 7시부터 어김없이 마음 나누기를 시작했습니다. 생방송 일요 명상을 준비하는 담당자는 준비를 하느라 나누기는 빠지겠다고 했습니다.

“잠깐이라도 참가하고 가도록 하세요.”

스님은 먼저 나누기라도 하고 가도록 했습니다.

“생방송을 앞두고 있어서 약간 긴장이 됩니다. 지난주보다 준비를 철저히 해서 기대가 되기도 합니다.”

나누기를 다 듣고 스님이 한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일을 잘하려고 하면 긴장하게 됩니다. 그럴 때 ‘긴장하지 말아야지!’라고 다짐하는 것은 실제로는 아무 도움이 안 돼요. 그럴 때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만 ‘아, 지금 내가 긴장하고 있구나. 애쓰고 있구나’ 하고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오히려 긴장을 푸는데 도움이 돼요. 자꾸 각오하고 결심하기 때문에 수행을 한다고 하면서도 지치고 포기하게 되는 거예요. 마음을 알아차리면서 일을 해보세요.”

“감사합니다.”

생방송 담당자들은 스님의 말씀을 듣고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준비를 했습니다. 스님과 두북 공동체 성원은 마음 나누기를 이어갔습니다. 스님은 생방송 촬영 5분 전까지 나누기를 마치고 8시 29분에 카메라 앞에 가부좌를 하고 앉았습니다. 분과별로 발표 준비를 하던 법사님들도 잠시 멈추고 모두 명상수련에 참석했습니다.

“제이슨, 오늘도 통역을 맡아 주어서 고마워요.”

미국에서 전화 통화 방식으로 통역을 해주고 있는 제이슨에게 인사를 건넨 후 명상수련을 시작했습니다.

“제가 있는 한국의 남부 지방은 지금 완연한 봄입니다. 꽃들이 많이 피고, 산에는 나뭇잎들이 연초록색으로 바뀌어서 꽃처럼 아름답습니다. 계절의 풍경은 이렇게 아름다운데,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은 긴장되고 위축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은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지만, 세계 곳곳에서는 아직도 많은 확진자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두려움은 객관적인 상황에서 오기보다는 우리들의 마음에서 온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무언가에 대해 잘 모를 때 두려움이 일어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해서도 잘 모르기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두려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명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잘 모르기 때문에 감정에 치우치고 거친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일어나는 감정이나 느낌을 잘 알아차리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우리는 감정에 휩쓸리는 일을 줄여나갈 수 있습니다.

명상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

명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첫째, 편안함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둘째, 마음을 한곳에 집중해서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감각과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긴장하지 말아야지!’, ‘불안하지 말아야지!’ 이렇게 각오를 한다고 해서 마음이 그렇게 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마음이 불안할 때는 ‘불안했구나’ 하고 알아차리고, 긴장을 했을 때는 ‘긴장을 하고 있구나’ 하고, 지금 상태를 그대로 알아차리면 그 마음이 훨씬 수월하게 완화가 됩니다. 어려운 게 아니에요. 지금 내 상태에 대해 알아차림을 유지하면, 부정적인 마음이 저절로 사라지게 됩니다. 너무 잘하려고 애를 쓰거나, 긴장을 하거나, 노력을 할수록 오히려 상태는 더 나빠집니다.

그러니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해 보세요.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이 자연스럽듯이 그냥 자연스러운 자세를 취하면 마음의 긴장으로부터 훨씬 더 쉽게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스님의 명상 안내를 듣고 있으니 어느새 긴장된 마음이 편안해져 있었습니다.

지난주 온라인 명상 시간에 외국인들이 영어로 질문을 많이 올렸는데, 시간이 부족해서 답변을 하지 못했습니다. 먼저 지난주에 올라왔던 외국인들의 질문에 대해 간단하게 답을 한 후 명상을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명상을 할 때 눈을 감으면 어떤 형상들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런 형상들에 집중을 하면 안 되나요?”

“명상을 할 때 집중을 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가운데에 우리가 선택한 방법은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 이외에는 모두 망상에 불과합니다. 호흡 이외에 어떤 것에도 의미 부여를 해서는 안 됩니다. 눈을 감고 있으면 여러 가지 형상이 보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형상에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말고, 다만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리는 것에만 집중합니다.”

“명상 중에 살짝 졸고 있다면 그냥 자는 게 나을까요, 깨어 있으려고 노력하는 게 좋을까요? 명상 중에 졸게 되면 더욱 산만한 것 같습니다. 이런 게 정상입니까?”

“몸이 피곤하면 졸음이 오는 게 정상입니다. 누군가가 다리를 꼬집으면 통증을 느끼는 게 정상인 것과 같습니다. 통증을 느낀다고 해서 상대를 미워하거나, 다리를 펴거나 하는 것은 그 감각에 내가 끌려가는 것입니다. 끌려가지 않고 호흡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통증을 다만 느낄 뿐이지 마음은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에 집중되어 있는 것을 뜻합니다. 통증에 마음을 빼앗겨서 호흡을 놓쳤으면, ‘아, 놓쳤구나’ 하고 다시 호흡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졸면 호흡을 놓치게 됩니다. 그럴 때는 ‘내가 졸고 있구나’ 하고 알아차리고, 졸음이 오는 가운데도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을 과제로 삼아야 합니다. 졸면 호흡을 놓치게 되지만,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에 아주 집중이 되어 있으면 몸은 졸지만 호흡은 알아차릴 수 있게 되는 경지에까지 이를 수 있습니다. 바깥에서 소리가 들리든, 졸음이 오든, 이런저런 생각이 일어나든, 이런 것들은 하나의 현상일 뿐입니다. 그런 가운데도 알아차림을 유지하는 것이 우리가 체험해야 할 과제입니다.

다리가 아프다, 졸음이 온다, 이런 증상들은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런 증상들은 그냥 두면 됩니다. 졸음도 계속 오다가 끝이 나면 이제 졸리지 않을 것이고, 다리도 어느 정도 아프다 보면 어느 순간 괜찮아집니다. ‘다리가 아픈데 어떡하지?’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이미 거기에 마음이 끌려가는 겁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나는 호흡을 알아차린다’

이렇게 중심을 잡으면 명상은 아주 쉽습니다.”

질문에 대해 답변을 마친 후 명상을 시작했습니다. 죽비 소리가 세 번 울리고, 30분이 경과한 후, 다시 죽비 소리가 세 번 울렸습니다.

탁! 탁! 탁!

스님은 명상을 해 본 소감을 시청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명상은 잘하고 못하는 게 없습니다. 그냥 해봤을 뿐입니다. 해 본 소감이 어땠습니까?”

실시간 채팅창에 수백 개의 소감이 올라왔습니다.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지난주보다 한결 낫습니다.”
“시작하기 전에 외국인들을 위해 설명해준 것이 공부가 많이 되었습니다.”
“아직은 명상이 어렵습니다.”
“생각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

“졸았다는 사람도 있고, 힘들었다는 사람도 있고, 다리가 너무 아파서 중간에 풀었다는 사람도 있네요. 여러분이 올려준 소감을 보니까 명상을 하면 누구에게나 나타나는 증상들이에요. 이런 가운데에도 나는 얼마나 호흡 알아차림을 유지했느냐가 중요합니다. 자꾸 연습을 하시면 이런 가운데에도 호흡 알아차림이 조금씩 더 길게 유지가 됩니다.”

채팅창에는 외국인이 올린 질문도 올라왔습니다. 답변을 해주려고 했지만, 번역이 늦어지는 바람에 시간이 지체가 되었습니다. 외국인이 올린 질문에는 다음 주에 명상을 시작할 때 답변을 해주기로 하고 명상을 마쳤습니다.

온라인 명상 수련을 마치자 한 줄 소감이 채팅창에 더 많이 올라왔습니다.

“스님, 감사합니다.”
“코로나 덕분에 스님의 안내로 집에서 명상을 할 수 있어 너무 좋습니다.”

온라인 일요 명상이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내일은 정토불교대학 수업이 생방송으로 열리는 날입니다. 실천적 불교사상 세 번째 시간으로 삼귀의, 무아, 무상, 연기에 대해 강의를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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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나

그저 알아차릴 뿐 일어난 현상에 왔다갔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그저 살필 뿐입니다
감사합니다 꾸벅^^

2020-05-02 07:02:49

김현숙여래심

삶의 방식은 유연하게 방향과 가치관은 분명하게!
정리해 주십니다 감사합니다
지난 주 명상은 놓쳤어요 이번 주는 참여하여
제 호흡관 하겠습니다

2020-04-30 14:31:33

다보화

머리속 희미하게 형태가 잡히지 않았던 것들은 스님의 통찰력있고 지혜로운 말씀에 한순간 정리됩니다.

정의롭다의 가장 핵심적인 가치는 평등성이다
누구나 다 거기에 도달할 수,있고 누구에게나 다 기회가 주어질때 우리는 정의롭다고 말한다
-스님 말씀중에서-

2020-04-30 10:5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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