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0.1.4. 제31차 성지순례 2일째(사르나트 A팀)
“붓다가 자신이 깨달았을 때보다 더 기뻤던 순간”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성지순례 A팀과 부처님께서 처음 법을 설하신 사르나트를 순례하고, 저녁에는 B팀 입재식을 했습니다.

새벽 4시 30분, 각자 방에서 천일결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절을 하니 순례를 시작했구나 와 닿습니다. 어제 일어난 마음을 살피며 불편한 가운데 편안해지는 연습을 합니다.

스님은 6시 10분에 사르나트로 출발했습니다. 대중은 6시 30분에 버스로 이동하고 스님은 50분을 걸어 사르나트에 도착했습니다. 걷는 사이에 날이 점차 밝았습니다.

“첫 번째 설법하신 장소를 한 바퀴 돌고, 두 번째 설법하신 장소를 한 바퀴 돌아서 공터에 자리를 깔고 참배하도록 하겠습니다. 천천히 따라오시기 바랍니다.”

처음 설법하신 장소에 세워진 다르마라지크 스투파는 허물어져 터만 남아있었습니다. 두 번째 설법하신 장소에 세워진 다메크 스투파는 탑 모양이 남아있었습니다. 한국에서 보던 탑과 다르고 거대했습니다. 성지순례 참가자들은 ‘석가모니불’을 입으로 외우고 마음으로 떠올리며 스님을 따라 스투파를 돌았습니다.

이어서 다메크 스투파가 잘 보이는 너른 공터에 자리를 깔고 먼저 예불을 드렸습니다.

“이 곳이 부처님께서 처음 법을 설하셨다고 하는 사르나트입니다. 몸을 단정하게 해서 예불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탑을 바라보며 예불을 시작했습니다.


예불 후에는 명상을 했습니다. 부처님의 숨결이 코 끝에 와 닿는 듯합니다.

눈을 뜨자 다메크 스투파가 뚜렷이 보였습니다. 스님은 사르나트에서 부처님이 처음 설법하던 장면을 들려주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얻고 모든 의문이 다 풀어져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고뇌의 최후라 선언 하노라. 나는 신과 인간의 모든 굴레로부터 벗어났다. 해탈을 얻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하셨습니다.

‘이 좋은 법을 누구와 나눌 수 있을까? 정말로 지혜롭지 못하다면 이 미묘한 법을 이해할 수가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당시에 가장 지혜로운 사람을 생각해보니 자신을 가르쳐준 두 분의 스승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그다음으로 자신과 함께 전정각산에서 6년간 고행했던 옛 다섯 도반들을 떠올렸습니다. 이들은 부처님이 고행의 무익함을 알고 고행을 그만두자 부처님이 타락했다고 비난하며 부처님 곁을 떠나버렸지만, 그들이라면 이 좋은 법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지금 어디에 머무는가 알아봤더니 그들은 함께 수행하던 전정각산(前正覺山)을 떠나 이곳 바라나시(Varanasi) 근교의 시타림(Sitavana, 屍陀林)인 사르나트(Sarnath, 鹿野園)에서 수행정진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옛 도반을 찾아 사르나트까지 오셨습니다. 부처님이 깨달은 보드가야(Bodhgaya)로부터 여기 사르나트까지 250km로 대략 600리 정도 됩니다. 이곳까지 보름 만에 오셨다고 하니까 하루에 대략 15km씩 걸어서 이곳에 이르렀습니다.

부처님은 강가 강을 건너 바라나시에 이르러 탁발을 한 뒤에 바라나시 북쪽 바루나 강을 건너 사르나트로 오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에서 남쪽으로 700m 정도 가면 부처님과 다섯 비구가 처음 만난 곳을 기념해서 세운 탑이 있습니다. 여기 말로는 차우칸디 스투파(Chaukhandi Stupa), 우리말로는 영불탑(迎佛塔)이라고 해요. 다섯 비구가 부처님을 환영한 곳입니다. 다섯 비구가 앉아 있다가 멀리서 다가오는 부처님을 보고 이런 대화를 했습니다.

‘저기 한 수행자가 오는데 누구지? 고타마 아니야?’
‘맞아. 그런데 저 사람은 수행을 포기한 사람 아니야?’
수행을 그만뒀으니 타락한 사람 아니냐고 말했던 거죠. 그러니 그가 가까이 오더라도 한 사람의 수행자로서는 대우하지 말자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당시에는 수행자를 대우하는 예법이 있었습니다. 먼 길을 걸어온 수행자에게 발 씻을 물을 떠주어서 발을 씻게 하고 앉을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이 예법이었어요.
‘그는 수행자가 아니니까 우리는 그런 예우를 하지 말자.’

이렇게 서로 다짐을 한 거죠. 그런데 고타마가 점점 가까이 오자 자기도 모르게 한 사람은 일어나서 물을 떠 오고, 한 사람은 자리를 마련해서 발을 씻으라 하고, 앉으라고 권했습니다. 다짐했는데도 불구하고 마음이 이미 움직였던 거예요. 보통은 대우를 해주자고 다짐을 해도 귀찮아서 안 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이 경우에는 원래 함께 수행할 때부터 존경했기 때문에 생각은 ‘수행자가 아니다’라고 해도 고타마가 가까이 오자 자기도 모르게 수행자로서 예우를 했던 거죠.

부처님이 다섯 비구에게 인사를 하고 앉자마자 다섯 비구가 부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타마여, 신수가 참 좋구려.’

얼굴도 환하고 참 좋아 보인다는 얘기죠. 일반적으로 이렇게 말하면 칭찬이지만 수행자에게 이 말은 약간의 힐난입니다. ‘고행을 포기하고 맛있는 거 먹더니 때깔이 좋아졌구나’ 이런 힐난이 섞인 얘기예요.

그러자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더 이상 고타마(Gautama)라 부르지 마시오. 여래(如來)라고 부르시오.’
이렇게 얘기하니까 다섯 비구가 깜짝 놀랐습니다.
‘뭐라고? 여래라고?’
‘여래(如來)’는 이미 깨달음을 얻었다는 뜻이에요. 오고 감이 없다, 오고 감이 자유롭다는 뜻입니다. 산스크리트어로는 ‘타타가타(Tathagata)’라고 합니다.
‘옛날에 그렇게 고행을 하고도 깨달음을 얻지 못했잖습니까? 하물며 당신은 고행을 포기했는데 어떻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 내가 당신들과 지난 6년간 생활하면서 한 번이라도 거짓말한 적이 있습니까?’
‘없죠,’
‘내가 당신들에게 거짓말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아... 그렇다면 그 미묘한 법을 우리를 위해 설해주시오.’

이렇게 해서 부처님께서 처음으로 다섯 비구에게 법을 설하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영불탑은 탑 이름이 부처를 환영한다는 뜻이지만 엄격하게는 ‘부처님이 다섯 비구에게 환영받지 못한 탑이다’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모두 웃음) 부처님과 다섯 비구는 그곳에서 북쪽으로 700m 정도 떨어진 나무 밑에 가서 초야분(初夜分), 즉 초저녁까지는 조용히 명상을 하며 선정에 들었습니다. 중야분(中夜分), 즉 한밤중에는 명상을 풀고 편안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새벽녘인 후야분(后夜分)에는 부처님께서 다섯 비구에게 법을 설하셨습니다.

첫 번째 설한 법이 중도(中道)에 대한 겁니다. 수행자는 고행과 쾌락을 다 버려야 한다는 중도를 설하셨어요. 그리고 두 번째로 사성제(四聖諦)와 팔정도(八正道)를 설하셨습니다. 여기서 중도, 사성제, 팔정도를 처음 설법하신 거예요.

이 법문을 듣고 가장 먼저 콘단야(Kondanna)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한국말로는 ‘교진여(倧蓮如)’라고 합니다. 콘단야가 깨달음을 얻자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습니다. 부처님께서 그 얼굴을 보자 이미 콘단야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부처님께서는 자신이 깨달음을 얻었을 때보다 더 기뻐하셨습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깨달을 수 있다는 걸 확인했기 때문이었어요.

‘오, 콘단야가 깨달았다. 콘단야가 깨달음을 얻었어!’

그러나 나머지 네 사람은 무슨 얘기인지 아직 감을 못 잡았어요. 콘단야가 자리에서 일어나 친구지간이었던 부처님께 스승의 예를 취하니까 네 사람은 무슨 일인지 어리둥절했습니다.

그리고 자리를 옮겨서 다시 법을 설하셨어요. 사흘이 지나자 두 명이 또 깨달음을 얻었어요. 그때까지 식사도 하지 않고 정토회에서 ‘깨달음의 장’을 하듯이 계속 명상하고 대화를 나누었나 봐요. 넷째 날이 되니 깨달음을 얻은 세 사람은 일어나서 공양을 얻으러, 즉 걸식하러 가고 부처님과 나머지 두 사람은 계속 정진을 했습니다. 세 사람이 얻어온 밥으로 여섯 사람이 나눠먹었다고 경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사흘이 지나자 나머지 두 사람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다섯 명 중에 마지막으로 깨달음을 얻은 분이 앗사지(Assaji, 阿說示, 아사지)라는 분입니다. 그래서 일주일 만에 다섯 명 모두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걸 본떠서 만든 ‘깨달음의 장’은 원래 5일 프로그램이 아니라 7일짜리였습니다. 7일짜리로 수련 프로그램을 마련했다가 직장 다니는데 7일이 너무 길다고 하도 아우성쳐서 5일짜리로 바꾸게 된 거예요. (모두 웃음)

이처럼 이곳 사르나트는 처음으로 부처님의 법이 설해진 곳인 초전법륜지(初轉法輪地)입니다. 보드가야에서 고타마가 깨달으면서 이미 붓다는 출현했지만 다섯 비구에게 법을 설하심으로 해서 중생에게 비로소 붓다가 나타났 겁니다. 그렇게 해서 붓다(Buddha, 佛), 담마(dhamma, 法), 상가(sangha, 僧)로 이뤄진 삼보(三寶)가 성립됐습니다. 붓다는 스스로 깨달은 이를 말하고, 담마는 깨달은 이가 깨닫지 못한 이를 깨닫게 해주는 진리의 가르침을 말하고, 상가는 깨닫지 못한 이가 깨달은 이의 가르침을 듣고 깨달은 이들의 모임을 말합니다. 출가한 스님들을 상가라고 하는 것은 형식만을 따르는 거예요. 원래는 부처님 법을 듣고 깨달은 이가 모여야지 상가가 될 수 있습니다.

이곳 사르나트에서 불법승 삼보가 성립되고 200여 년이 지난 후대에 아쇼카 왕(Ashoka Maurya, 阿育王)이 전 인도를 통일했습니다. 아쇼카왕은 불법에 귀의하고 사르나트를 방문해서 ‘이곳이 부처님께서 처음 설법하신 곳이다’하고 알리는 아쇼카 석주를 세웠습니다. 저 뒤쪽에 가보면 석주가 있습니다. 현재 석주의 머리 부분은 박물관에 있고 기둥은 여기에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이 처음 설법한 곳과 두 번째 설법한 곳에 기념탑을 세웠습니다.”

부처님이 콘단야가 깨닫자 자신이 깨달았을 때보다 더욱 기뻐하셨다는 대목에서 진한 감동이 느껴졌습니다. 이어서 스님은 야사비구의 출가, 첫 재가 수행자인 구리가 장자, 이 곳에서 이루어졌던 전법 선언에 대해서도 들려주었습니다. 40분간 설명을 마치고 경전을 독송하며 그 내용을 깊이 느껴보았습니다.

“여기에서 있었던 일들이 머리에 싹 들어옵니까? 경전에 나오는 감동적인 이야기들이 이 곳 사르나트와 다음에 갈 바라나시에서 있었던 옛 이야기입니다.”

사르나트는 녹야원이라고도 불립니다. 사슴 동산에 있는 수행처라는 뜻인데요. 지금도 스투파 뒤편에는 사슴이 살고 있습니다.
이어서 첫 설법이 이루어진 곳에서 수계식을 진행했습니다.

“남자들은 구리가 장자처럼, 여자들은 야사의 부인 또는 야사의 어머니처럼 비록 출가해서 수행은 안 하지만 재가에 있으면서 수행정진을 하겠습니다는 마음으로 수계식을 하겠습니다. 가사를 받고 상카시아에서 가사를 반납할 때까지는 수행자로서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순례자들은 지난날의 잘못을 참회하고 오계를 지킬 것을 약속하는 연비를 하고 가사를 받았습니다.




수계식까지 마치니 10시가 다 되었습니다. 각자 앉은자리에서 도시락을 꺼내 아침 겸 점심을 먹었습니다.

순례자들이 도시락을 먹는 사이 스님은 순례자 한 명, 한 명과 개인 사진을 찍었습니다.

“이 인연으로 다음 생에는 머리 깎으세요. 증명사진까지 찍었는데 안 깎으면 어떡해요.”(웃음)

노란 가사를 걸친 순례자들은 활짝 웃으며 사진을 찍었습니다. 다메크 스투파를 배경으로 차량별로 사진도 찍고, 이백 명이 함께 사진을 찍었습니다. 사진을 찍느라 스님은 식사를 못했습니다.

수계식을 마치고 가사를 벗고 다시 앉자 스님은 부처님의 일화 외에도 유적지와 인도 문화를 보는 관점에 대한 설명도 해주었습니다.

“당시에 여기 있던 나라 이름은 카시(Kashi)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바라나시(Varanasi)라고 불립니다. 바라나시는 바루나 강(Varuna)과 아시 강(Asi) 사이에 있다는 뜻이에요. 영국 식민 지배를 받던 시대에는 영국식으로 발음해서 베나레스(Benares)라고 불렀습니다.

사르나트는 카시 국의 시타림(Sitavana, 屍陀林), 즉 카시 국에서 시체를 갖다 버리는 숲이었습니다. 당시에는 가장 외진 곳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체를 갖다 버리니까 가장 부정하고 더러운 곳이었지만, 거기에 부처님이 머무르셔서 성스러운 곳이 돼 버렸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가장 부정한 곳이 지금은 성지가 됐습니다.

불법대로 표현하면 ‘본래 깨끗한 것도 없고 더러운 것도 없다’라고 할 수 있어요. 더럽다고 생각하면 부정한 곳이 되고, 깨끗하다고 생각하면 청정한 곳이 됩니다. 다 마음에 따라 이루어지는 도리입니다.”

순례자들은 차량별로 법사님의 안내에 따라 아쇼카 석주, 녹야정사 터를 둘러보고 나왔습니다. 이어서 사르나트 박물관을 방문했습니다. 스님에게 미리 설명을 들었던 ‘마투라 양식’, ‘사르나트 양식’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박물관을 나와 영불탑까지 10분 정도 걸어가서 버스를 탔습니다. 영불탑에서 녹야원까지, 부처님도 걸으셨던 길입니다. 박물관을 나오자 장사하는 사람들이 물건을 들고 달려오고 헐벗은 어린아이, 앳된 임신부, 병든 노인이 다가와 구걸을 합니다. 평화로운 성지와는 다른 풍경이었습니다. 다 함께 행복한 길을 찾았던 부처님의 고뇌는 이런 거리 속에서 꽃 피웠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혼잡한 거리 속에서 부처님의 발자취가 보이는 듯했습니다.



다음은 강가강으로 이동했습니다. 산스크리트 대학까지는 버스를 타고, 배를 타는 다샤수와메드가트까지는 릭샤를 타고 갔습니다.

교통체증이 심한 고돌리아부터는 배 타는 곳까지 걸어갔습니다. 경적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려오고 사람과 소와 오토바이, 자전거, 릭샤, 자동차가 한데 어우러져 걸어갔습니다.

배를 타고 강가강으로 나아갔습니다. 푸른 물 위로 화장터에서 떠내려온 것인지 까만 재가 떠다니고 갈매기가 먹이를 찾아 이리저리 날고 있었습니다.

배 위에서 스님은 강가강에 대해서 설명해주었습니다. 강가강은 인도인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곳으로 힌두교 순례자들은 강가강에 몸을 담급니다. 모든 죄를 씻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손만 담그면 손만 천국에 가요.”(모두 웃음)

인도인의 믿음은 부처님이 살아계시던 시대에는 더욱 강력했습니다. 스님은 이와 관련해 부처님의 제자 가미니의 일화를 들려주었습니다.

가트 위에서는 빨래를 하고, 아이들이 뛰어놀고, 거지들이 구걸을 하고, 장사하는 사람들이 즐비해있었습니다. 장작불 위에서는 시신을 태우고 있었습니다. 이 곳에서 화장하면 윤회를 벗어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에 장작불이 쉴 새 없이 타고 있었습니다. 강 한복판에 죽은 물소의 시체가 떠있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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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중하류에서 라즈가트까지 배를 타고 내렸습니다. 배에서 내리자 계단에 사람이 누워있습니다.

“숙소에서 방 빼고 침낭 가져와서 여기서 잘 까요?”(웃음)

사람이 지나다니는 거리에는 움막을 쳐놓고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열악한 환경에도 생기 있는 얼굴들입니다.

“이래 놓고도 사는데 뭐 때문에 못 살겠다고 하는 거예요?”(웃음)

강가강까지 둘러보고 A팀은 숙소로 돌아가 내일 도시락을 준비하고 자체 일정을 가졌습니다.

저녁 6시 30분부터는 B팀 만찬과 더불어 입재식이 열렸습니다. 비행기가 지연되어서 식사를 하는 도중에 B팀 225명이 모두 도착했습니다. 4백여 명이 함께 성지순례를 시작할 계획이었지만, 예약한 항공사 한 곳이 부도가 나서 비행기 시간에 맞춰 부득이하게 두 팀으로 나누어 일정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참가자, 스텝, 운전기사들을 소개하고 스님이 입재 법문을 해주었습니다. B팀은 서울 제주, 대전충청, 부산 울산, 인천 경기 지역에서 오신 분들입니다.

참가한 모두에게 서로 박수를 쳐주고 스님께 입재 법문을 청해 들었습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신 성지 보드가야에서 만난 상인과의 대화를 이야기해주며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순례를 할 것을 당부했습니다.

“그 상인은 보드가야 앞에서 20년 장사를 했지만 자비심을 내는 불교인은 본 적이 없대요.

‘세계 각국에서 엄청난 수의 불교인들이 와서 각자 자기 나라 식대로 절하고 기도하고, 자기 나라 절을 짓고, 거기에 묵으면서 먹고 잠자고 머무르다가 가는 모습은 많이 봤습니다. 그러나 이곳에 사는 우리들한테 관심을 가진 사람은 한 명도 못 봤습니다.’

20년 동안 여기에 오는 전 세계 불교 순례객을 다 봤는데도 제가 말한 자비를 행하는 사람은 단 한 번도 못 봤다는 거예요. 그때 제가 굉장히 충격을 받았어요.

성지는 돈을 들여서 가꾼다고 되는 게 아니라 여기에 사는 사람들이 이곳이 소중한 줄 알면 저절로 깔끔하게 가꿔질 텐데, 여기 사는 사람들은 외국인들이 많이 오니까 그 사람을 상대로 장사하는 장소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거예요. 처음에는 저도 성지에 와서 성지마다 한국 절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이 대화 이후로는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성지에 건물을 짓는 게 성지 가꾸기가 아니구나. 이분들에게 필요한 뭔가를 하는 실천적인 모습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것이 인도에 수자타 아카데미가 들어선 몇 가지 이유 중 한 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인도에서 여러 활동을 한 지 25년이 지났지만, 20년이 지날 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먼저 묻기 전에는 제가 불교 얘기를 한마디도 안 하고 학교에서 불교를 가르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20년이 넘었을 때쯤 학교 선생님들이 궁금해 하기 시작했어요. 매년 순례객이 다녀가고 제가 안내하는 모습을 보다 보니 궁금해진 거예요. 정작 자기들은 보드가야에 살아도 보드가야에 대해서 모르고, 둥게스와리(Dongheswari, Dhungeshwari)에 살아도 둥게스와리에 대해서 잘 모르잖아요. 맨날 델리(Delhi), 파트나(Patna), 콜카타(Kolkata) 같은 대도시에 여행 가게 해달라고 하던 사람들이 하루는 이런 요청을 했습니다.

‘올해는 우리도 우리가 사는 지역이 어떤 곳인지를 알고 싶습니다. 그러니 스님이 한국 사람에게 안내하듯이 우리에게 안내를 좀 해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이렇게 해서 처음으로 불교 얘기를 하고 명상도 하게 됐습니다. 그러다가 재작년에는 인도인 활동가들을 대상으로 ‘깨달음의 장’도 하고, 올해는 인도인 활동가들 전부가 명상수련을 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불교에 대한 얘기보다는 이들의 삶을 함께하는 일이 우선 과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 보드가야에서는 각 절에서도 학교나 조그만 병원을 운영하는 자선사업을 많이 합니다. 현지의 사회 유지들이 각국 절에다가 대놓고 ‘수자타 아카데미 봐라. 저 사람들은 저런 일을 하는데 너희는 뭐하느냐?’ 이렇게 얘기하니까 등쌀에 못 이겨서 절마다 조금씩 인도 현지인을 위한 사업을 흉내라도 내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어요.(모두 웃음)

우리가 성지에서 맞닥뜨리는 구걸하는 사람들 주위를 살펴보면 빈민촌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의 굶주림은 신경 안 쓰고, 그저 성지에 가서 절하고 좋은 차 타고 가서 좋은 음식 먹고 좋은 호텔에서 자는 생활을 하잖아요. 정작 이곳에 사는 사람에게는 관심이 없고 허물어진 유적지에만 관심을 가지는 거예요. 부처님의 가르침을 본받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정작 빈민촌에 사는 사람에게는 관심이 없고 그저 편하게 성지순례를 다닌다는 것은 좀 모순이에요. 물론 성지순례도 해야겠지만 이 사람들에 대해서도 조금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불법이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이지, 벽돌에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순례를 하는 동안은 ‘부처님이 살았던 삶을 흉내 낸다, 즉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간다’는 관점을 잡으셔야 합니다. 부처님은 맨발로 걸어 다니셨어요. 말을 타거나 수레를 타는 일을 일절 하지 않았습니다. 밥은 얻어 드셨고 나무 밑에서 주무셨어요. 우리는 그래도 차를 타고 다니고, 비를 피할 수 있는 집에서 잠을 자고, 밥도 해 먹고 다니잖아요.

식사를 직접 해 먹는 것은 검소하게 생활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가장 효과적으로 순례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다니는 곳들은 오늘과 마지막 날을 제외하면 이렇게 많은 대중이 한꺼번에 식사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춘 곳이 없어요. 우리가 다니는 부처님의 유적지는 오늘날에는 인도에서도 좀 시골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생활과 비교해서 보면 낮은 수준의 생활일지 모르지만, 여기 사람들의 삶에 비교하면 이렇게 다니는 우리의 생활마저도 이 사람들에게는 과분한 생활입니다. 이런 점을 이해하셔서 생활하는 것에 너무 힘들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순례자로서 ‘원래 걸어 다녀야 하는데 차를 타고 다니는구나. 원래 얻어먹어야 하는데 그나마 밥이라도 해 먹는구나’ 이렇게 생각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스님은 인도의 자연환경과 역사에 대해 설명해 준 후 순례하는 과정에 대해서 설명해주었습니다.

“저희가 부처님이 처음 설법하신 사르나트에서 순례를 시작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을 기준으로 한다면 보드가야에서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에 보드가야에서 순례를 시작해야 합니다. 그런데 고타마 싯다르타(Gautama Siddhartha)든 부처님이든 둘 다 같은 육신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부처님은 태어날 때부터 부처라고 볼 수 있어요. 그런 관점에서는 룸비니(Lumbini)가 중요해집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태어났든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었든, 설법을 안 하시면 우리한테는 의미가 없죠. 그러니까 설법을 하실 때부터 중생에게는 비로소 부처인 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라나시에서 성지순례를 시작하는 거예요. 다섯 비구는 이곳 바라나시의 사르나트에서 부처님의 법을 듣고 깨달음을 얻었어요. 그래서 부처님만 깨달은 게 아니라 부처님의 법을 듣고 다른 사람도 깨달음을 얻은 이곳에서 우리도 순례를 시작하는 거예요.

그렇게 출발해서 ‘부처님은 어떤 분인가?’를 알아보게 됩니다. 그래서 보드가야에 가서 부처님의 수행과 깨달음을 살펴보고, 다음에 라즈길(Rajgir, 王舍城)로 가서 부처님의 교화 사례를 살펴보고, 그다음으로는 쿠시나가라Kushinagar, 쿠시나가르)에 가서 부처님 열반의 의미를 새겨볼 예정입니다. 다음으로 ‘부처님이 어디서 태어나서 자랐느냐?’를 살펴봅니다. 그래서 룸비니를 보고, 마지막으로 상카시아(Sankasia)에서 일정을 마치게 됩니다.

우리가 엄청나게 차를 많이 타고 다니면서 여행을 하지만, 인도 전체 지도에서 보면 북쪽에서만 돌고 있습니다. 산이 하나도 없는 평지인 힌두스탄 평원만 뱅뱅 돌고 있는 거예요. 인도 고대 문명의 중심지가 이 지역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이 지역이 인도 문명의 중심지였지만, 지금은 인도에서 이 지역이 가장 낙후된 지역입니다. 오히려 뭄바이(Mumbai)나 벵갈루루(Bengalury)처럼 소수 민족들이 사는 인도 대륙의 변두리 지역이 훨씬 더 발전한 상태예요. 현재 인도 최대의 도시는 수도인 델리예요. 여기에 동쪽으로는 벵갈인들이 사는 콜카타(Kolkata), 서쪽은 뭄바이, 남쪽은 현대자동차가 있는 첸나이(Chennai)가 인도의 4대 도시로 손꼽힙니다.

그런데 우리는 델리와 캘커타 사이에 있는 힌두스탄 평원을 주로 여행하게 됩니다. 옛날에는 캘커타로 들어와서 델리로 나가는 일정이어서 중간에 기차를 이용했는데, 지금은 델리로 들어와서 바라나시까지 비행기를 타고 와서 돌아보고 다시 델리로 나가는 일정입니다.”

설레는 마음과 달리 이틀 동안 이동을 하면서 몸은 지쳤는지 눈이 무겁습니다. 스님은 한 시간 정도 순례에 중요한 것들을 짚어주고 입재식을 마쳤습니다.

내일 A팀은 새벽 4시에 수자타 아카데미로 출발하고, B팀은 오늘 A팀과 같이 사르나트와 강가강을 둘러볼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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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주

부처님의 일생을 책으로만 읽었는데, 직접 가보는 경험을 저도 해보고 싶었습니다. 글과 사진으로 접해볼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2020-06-10 10:41:11

김은경

불법이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이지, 벽돌에 있는 건 아니잖아요.
설법을 하실 때부터 중생에게는 비로소 부처인 셈입니다. 왜 사르나트에서 시작 하셨는지 궁금했었습니다
처음 읽었을 때와 또다른 느낌입니다

2020-04-21 05:16:15

임규태

스님께 감사드리며 여러 봉사자님들과 참가자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_^

2020-02-25 19: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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