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8.11.18. 가을 불교대학 특강 수련
“종교와 상관없이 깨달을 수 있나요?”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불교대학생들을 위한 법문을 하고, 김장을 마무리하였습니다.

어제 김장을 하고 잠깐 눈을 붙인 스님은 새벽 3시, 문경 수련원으로 향했습니다. 다른 행자들이 깰까 봐 아침도 먹지 않고 조용히 나섰습니다. 문경에 도착하면 3시간 법문을 해야 해서 휴게소에 들러 따끈한 우동으로 요기를 했습니다.

문경 수련원에는 서울 제주와 대전충청 지역에서 4백여 명의 가을 불교대학생들이 스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병원에 가서 나아졌던 감기 몸살기가 어제 김장 울력을 하며 다시 도졌는지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습니다.

“원래 학습은 1시간 강의를 들으면 30분은 질문하는 시간을 가져야 해요. 제가 여러분 앞에 동시에 나투는 도는 얻었는데, 여러분들을 제 앞에 동시에 나투도록 하는 쌍방향 도는 아직 못 구했습니다.(모두 웃음) 과학이 좀 더 발전하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되기 전까지는 이렇게 모여서 질문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은 불교대학 공부 과정 중에 의문이 생겼던 것을 질문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스님은 질문이 15개나 된다며 서론 없이 바로 질문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실천적 불교사상에서 배운 오계와 상에 대한 질문이 주로 많았습니다. 그중 자기를 비우면 종교와 상관없이 깨달을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과 답변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불교인이 아니라도 깨달을 수 있나요?

“불교에서는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자기가 옳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 이야기를 하고, 기독교에서도 하느님께 순종하고 복종하면 그래서 자기를 비우면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느님께서 하신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깨달음을 얻는다는 건 스스로를 비워내면 할 수 있는 건가요? 그렇다면 불교인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자신을 비워내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여러분 눈이 아파서 안과에 가서 치료를 받을 때를 생각해봅시다. 안과 의사는 눈을 치료하는 기술을 가진 사람이니 의사 선생님이 불교를 믿든 기독교를 믿든 그것과 관계없이 그 사람에게 치료를 받으면 눈을 회복할 수 있겠죠?”

“네.”

“그때 의사가 불교를 믿거나 기독교를 믿어서 내 눈이 치료가 된 거예요, 눈을 치료하는 기술이 있기 때문에 치료가 가능한 거예요?”

“기술이요.”

“네, 그래요. 그런데 이럴 때 그 사람이 불교를 믿어서 혹은 기독교를 믿어서 내 눈이 치료가 되었다고 생각하면 치료에 대해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절에 가든 교회에 가든, 불교를 믿든 기독교를 믿든, 그것과 괴로움이 없어지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괴로움이 없어지는 것도 마치 병이 낫는 것과 같아요. 괴로움의 원인을 밝혀서 치료를 하면 교회에 다녀도 괴로움이 사라져요. 아무리 절에 다녀도 그 괴로움의 원인을 치료하지 않으면 괴로움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병의 원인이 밝혀지고, 그에 따라 어떤 처방이 주어졌는가가 핵심입니다.

우리에게 괴로움이 생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의 심리를 잘 관찰해보면 우리에게는 복은 짓지 않고 복을 받으려고 하는 심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살다 보면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데, 벌은 받기 싫어합니다. 나의 이런 마음을 세상이 알아주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아요. 복은 짓지 않고 복을 받으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그렇게 해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잘못은 저지르고 벌을 받지 않으려면 다른 사람들이 그런 나를 허용해주지 않아요. 그러니 내가 바라는 바와 달리 세상은 각박합니다.

마음 같아서는 내가 조금 놀아도 월급은 주고 (모두 웃음) 일은 조금 덜 해도 월급을 많이 주며 좋겠는데, 사람들이 그렇게 안 해줍니다. 그렇게 내가 원하는 대로 잘 안 되니까 살기가 힘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나 부처님에게 빌면 내가 복을 안 지어도 복을 받고 죄를 지어도 벌을 안 받는다는 이야기를 하니까 얼마나 좋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교회나 절에 많이 다니는 거예요. (모두 웃음)

그런데 예수님이나 부처님은 이런 허황한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펴셨습니다. 좋음과 싫음, 즐거움과 괴로움이 반복되는 삶에 들떠서 인생을 낭비하지 말고 진실에 입각해서 살라는 가르침을 펴셨어요.

노력은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결과가 좋을 것이며, 복을 짓지 않았는데 어떻게 복을 받겠어요. 복을 받고자 하면 그저 ‘복 주세요’할 게 아니라 스스로 복을 짓고, 잘못을 했다면 도망 다니지 말고 벌 받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벌을 받기 싫으면 앞으로 나쁜 짓을 하지 않으면 되고요. 이것은 누가 들어도 지당한 이야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고 하셨고, 부처님은 ‘눈 있는 자 와서 보라’라고 말씀하셨던 겁니다. 진리는 비밀스러운 게 아니라 조금만 생각해보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진리에 어떤 비밀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여러분이 허황한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진리란 허황한 것에 빠져 눈을 감고 있으면 잘 안 보이지만, 거기서 벗어나 눈만 뜨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눈 있는 자 와서 보라는 말씀을 하신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지금 눈 뜨기가 싫은 거예요. 눈을 뜨면 현실을 직면해야 하고, 눈을 계속 감고 있으면 그 속에서나마 왕이 되는 꿈을 가질 수 있으니까 계속 눈을 감고 싶은 거예요. (모두 웃음)

종교에서는 복을 짓지 않고도 복을 받고, 나쁜 짓을 하고도 벌을 받지 않는다고 해요. 그런데 그건 이치에 맞지 않잖아요. 그래서 저는 늘 불교를 믿든 기독교를 믿든 종교의 문제는 개개인이 각자 알아서 하라고 말합니다. 그것과 진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요.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나쁘다고도 말을 하지 않는 이유는 세상이라는 게 원래 그렇기 때문이에요. 또 그렇기 때문에 중생이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인지 불교인지 따지지 말고 그저 눈 뜬 자의 입장만 따져봅시다. 부처님과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복을 짓지 않고 복을 받으려는 허황한 삶을 살지 말고, 오히려 남에게 베풀어라’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은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로 볼 것이 아니라 세상과 진리와의 차이로 바라봐야 합니다. 세상은 복을 빌라고 말하지만 성현의 가르침은 복을 베풀라고 말합니다. ‘도움을 받기보다는 도움을 주어라’, ‘사랑받고자 하기보다는 사랑을 하라’ 하는 말씀도 다 같은 맥락이에요. 절에 가든 교회에 가든 다 공통적인 가르침입니다.

베풀라는 것은 곧 복을 짓는 거예요. 복을 지으면 자연적으로 복이 돌아옵니다. 복을 받고 싶다는 게 잘못된 게 아닙니다. 복을 받고 싶다면서 아무것도 안 하고 ‘복 받고 싶습니다’ 한다고 복을 받는 게 아니에요. 복을 받고 싶으면 그만큼 복을 지어야 한다는 말이에요. 또 잘못을 하고도 ‘벌 받기 싫습니다’ 할 게 아니라 앞으로 나쁜 짓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예요. 들어보면 이렇게 이치에 맞습니다.

이 가르침을 따르면 과거에는 그저 복을 바랐지만 이제는 복을 받기 위해 복을 짓는 단계로 나아갑니다. 그런데 여전히 복을 받기 위해 복을 지었으니 복을 받고자 하는 기대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빌려준 돈에 이자가 붙어서 돌아오면 좋겠는데, 만에 하나 중간에 일이 생겨서 이자가 붙어오지 않으면 괴로운 것과 같습니다. 이 세상은 반드시 어떻게 된다는 것이 없고 늘 중간에 일이 생길 수 있잖아요. 이 경우에는 베풀어도 괴로움이 생깁니다.

베풀지 않고 복을 받겠다는 것도 가능성은 아주 낮지만, 소발에 쥐 잡는 식으로 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아주 낮은 확률이에요. 반면에 복을 짓고 복을 받겠다는 것은 대부분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지만 마찬가지로 중간에 사고가 생기면 가끔 그렇게 되지 않을 때가 있어요.

그래서 괴롭지 않을 가능성이 100%가 되려면, 베풀되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베푸는 것은 필요조건입니다. 이것이 충분조건으로 나아가려면 기대하는 마음조차 없어야 합니다. 이렇게 된다면 100%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기독교와 불교의 차이가 있어요. 불교에서는 베풀되 기대하지 말라고 하는데, 서양 문화에서는 베풀되 기대하지 말라고 하면 받아들이기 어려운 면이 있는지 그 말을 ‘이 생에서는 기대하지 말라’는 이야기로 합니다. 이 말은 다음 생에는 기대해도 좋다는 말도 되잖아요.

드러나는 현상만 보면, 전혀 기대를 하지 않는 사람이나 이 생에서는 기대를 하지 않고 내생에 받겠다는 사람이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효과가 똑같이 나타나는 거예요. 그렇지만 이것을 다음 생까지 확장해서 본다면 차이가 있습니다. 전자는 다음 생까지 가도 부작용이 없지만, 후자는 혹시라도 하나님의 나라에 갔는데 복을 주지 않으면 문제가 생길 수 있어요. 마치 이 생에서 복을 받으려고 기대했는데 복이 돌아오지 않으면 생기는 부작용처럼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 생에서는 부작용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이 생만 두고 보면 별 차이가 없는 거예요.

깊이 보면 이 둘도 차이는 있는 거예요. 전자는 어떤 경우에도 부작용이 없지만 후자는 시간을 길게 놓고 보면 괴로움이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철학적으로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생에 드러나는 현상만 놓고 보면 둘은 차이가 없기 때문에 이 둘을 놓고는 얼마의 시간을 두고 보느냐에 따라 같다고 볼 수도 있고 다르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을 분명히 가지면 성경을 읽어도 이해가 잘 됩니다. 성전에 가서 복을 비는 게 일반적으로 하는 일인데, 이제는 이렇게 하지 말고 복을 빌기 전에 형제와 다툰 일이 있으면 돌아가서 화해부터 해야 하는 거예요. 복을 받으려면 성물을 올릴 게 아니라 마음에서 미워하는 사람을 용서해주어야 하는 겁니다. 가르침 속에 이러한 진리가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성인(聖人)이라고 하는 거예요.

어디에 가든 주인으로서 역할을 하라는 의미로 불교에서는 ‘수처작주(隨處作主)’라고 합니다. 같은 개념을 성경에서는 ‘겉옷을 달라면 속옷까지 주라’, ‘5리를 가달라면 10리를 가주라’, ‘왼뺨을 때리면 오른뺨도 내어주어라’라고 세 가지 비유를 들어서 설명합니다. 5리를 가달라고 해서 억지로 따라가면 그 사람이 주인이 되고 내가 종이 되는데, 그때 10리를 가주겠다는 마음을 내어버리면 그 상황에 내가 주인이 됩니다. 이것이 주인이 되는 방법이에요.

이런 가르침을 보면 불교냐 기독교냐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종교로서의 불교와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유사합니다. 그런데 진리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진리적 측면의 예수님 가르침과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하늘과 땅 차이고, 진리적 측면의 부처님 가르침과 종교로서의 불교도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진리적 측면에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부처님의 가르침은 유사한 게 많습니다. 물론 두 분의 가르침이 똑같지는 않습니다. 차이가 있긴 하지만 진리적 관점에서는 비슷한 내용이 아주 많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기독교냐 불교냐를 논쟁하기보다 세속적인 기복이냐 진리적인 수행이냐 하는 큰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스님의 즉문즉설도 불교를 믿든, 기독교나 천주교를 믿든, 큰 차이 없이 많은 사람들이 보는 이유는 믿음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에요. 반대로 불교를 믿지만 불교 신자라고 해서 특별히 즉문즉설을 많이 듣는 것도 아닌 이유는 세속적으로 복을 비는 내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불교를 믿는 사람이 정토회에 오면, 스님의 모습이나 절을 하는 등의 불교문화가 같기 때문에 적응하는데 조금 수월하고, 기독교를 믿는 사람은 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처음에는 조금 어색한 거예요.

1년 동안 불교대학을 공부하다 보면 시간이 흐를수록 교회에 다니던 사람들보다 절에 다니던 사람들이 더 헷갈려합니다. 처음에는 교회에 다니던 사람들이 여기서 사용하는 용어가 생소하니까 적응하기 어려운데 시간이 흐를수록 ‘아, 불교가 이런 거구나’하고 적응을 해나갑니다. 반면 절에 다니던 사람들은 처음에는 문화가 비슷하니까 친근감 있게 시작을 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자기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복 비는 종교로서의 불교와 점점 거리가 멀어지니까 점점 더 헷갈려합니다. (모두 웃음)

그러니 기존의 불교나 기존의 기독교와 비교할 필요가 없어요. 여러분들이 정토불교대학에서 배우는 내용은 기존에 복을 비는 종교와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예요. 깨달음의 장에 다녀오고 불교대학 강의를 들으면 오히려 성경을 읽으면 예수님이 어떤 분이셨는지 가슴에 다가오고, 불경을 읽으면 부처님이 어떤 분이셨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즉문즉설도 늘 쉬운 용어를 사용하잖아요. 용어는 쉬운 반면 그 내용을 살펴보면 또 어렵습니다. 달리 어려운 게 아니라 평소 알고 지내던 ‘복 빌면 복 받는다’는 내용과 다르기 때문에 어렵게 다가오는 거예요. 남편한테 잘하면 그만큼 사랑받을 거라 기대하는데 인생이라는 게 그렇지가 않잖아요. (모두 웃음)

복을 비는 것이 우리 삶의 현실이에요. 다만 그 현실 위에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어리석음을 깨우치는 것입니다. 어리석음을 깨우치는데 용어를 어렵게 사용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분의 남편이 돌아가셔서 너무나 슬프다고 호소했습니다. 자기는 가톨릭 신자라고 했어요.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하느님을 믿으세요?’
‘네. 하느님을 믿으니까 매일 미사에 참석해서 겨우 슬픔을 이겨내고 있어요.’
‘그런데, 왜 하느님 하시는 일에 불만이에요?’
‘예?’
‘사람이 나고 죽는 일은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에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에요?’
‘하느님요.’
‘그런데 왜 하느님 하시는 일에 불만이냐고요.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해야죠.’

그러면 아들이 시험을 쳐서 대학에 가고, 내가 결혼을 하고, 가게를 열어서 장사를 하는 일들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에요, 내가 하는 일이에요?”

“내가 하는 일입니다.”

“사람이 죽고 사는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에요, 내가 하는 일이에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왜 내가 하는 일은 하나님 보고해달라고 그러고, 하나님 하시는 일을 내가 하려고 해요? 이걸 경상도 사투리로 디비 쫀다고 해요. 일을 거꾸로 하고 있다는 말이에요. 이건 어리석음이지 신앙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거예요. 기독교 신앙을 제대로 가진 사람이라면 내가 할 일은 내가 책임지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네, 잘 알겠습니다.”

“불교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도 하지 않고도 그 사람을 얼마든지 고뇌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안 믿고가 아니라, 심리적으로 분석하면 괴로움은 집착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깨달음은 자각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모든 깨달음은 자각에서 일어나고, 모든 변화는 자각에서 일어납니다. 제가 변화를 만들어준 게 아니라 저와 대화를 하다가 본인이 자각을 하게 되는 거예요. 제가 여러분 인생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다만 여러분과 대화를 하다가 자각의 계기를 마련해주는 거예요. 거기서 여러분에게 자각이 일어나면 변화가 시작되고, 자각이 없으면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지식으로 자각이 생기지 않습니다. 나무아미타불 할 때 ‘나무(南無)’가 ‘귀의한다’는 뜻이라고 안다고 해서 자각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건 그저 지식을 알게 된 거예요. 오히려 자각은 지금 질문자와의 대화에서 ‘어, 내가 지금까지 종교를 잘못 이해하고 믿었네’ 할 때 생길 수 있어요. 물론 불교대학에서 지식도 공부하겠지만, 그건 부차적이고 근본적인 것은 자각에 있습니다. ‘어, 이건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어, 이건 내가 잘못했네’ 이렇게 자각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 나무아미타불에서 나무가 무슨 뜻입니까?
  • 오계 중 불살생계에 질문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전생 설화에서 독수리가 비둘기를 잡아먹으려고 하자, 부처님이 자신의 살을 떼주었다고 했는데요. 불살생계가 가능할까요?
  • 불투도계를 설명에서 그냥 버려진 물건도 주우면 안 된다고 배웠습니다. 버린 물건을 재활용하기 위해서 가져오는 것도 안 되나요? 또 태어나자마자 아프거나 죽는 이들은 왜 그런 과보를 받는 건가요?
  • 옳고 그름이 없는 것을 깨달아야 모든 괴로움이 없어진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일상에서는 옳고 그름을 따져 올바른 행동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헷갈립니다.
  • 부처님께서 여성의 출가를 허락하셨는데 사회적 약자, 장애인, 성소수자 등의 출가를 허락하신 바도 있나요?
  • 상을 버리라고 배웠는데요. 긍정적인 생각도 버려야 하나요?

하나하나 자세히 설명하다 보니 금방 3시간이 흘렀습니다. 스님은 다 하려고 했는데 어차피 다 못하겠다며 강의를 마무리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정리를 하면, 불교대학은 불교신자 되라고 만든 것이 아니에요. 그렇다고 불교신자가 되지 말라는 것도 아니에요. 신자가 되는 것과 불교대학은 관계가 없다는 이야기예요.

불교대학의 목적은 기독교인이든 불교인이든 신자가 아니라 ‘수행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아니라도 수행자가 될 수 있어요. 어떤 종교를 가지든지, 종교를 가지지 않든지 정토불교대학은 수행자가 되는 것이 목표입니다.”

스님은 불교대학생들에게 마음의 이치를 알아가는 한편 실제로 연습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며 다닌 김에 끝까지 공부를 해볼 것을 독려하였습니다.

강의를 시작할 때는 갈라지고 쉰 목소리였는데, 강의가 끝나갈 때쯤 힘찬 목소리가 되었습니다. 아무리 아프고, 힘들어도 법문만 하면 힘이 나는 스님이었습니다.

스님은 강의가 끝나자마자 행자들이 한참 김장을 하고 있을 두북으로 바로 달려왔습니다. 다음 이야기에 계속...

전체댓글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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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나

맡기고 니려놓고 다시 살피고~
감사합니다 꾸벅^^

2018-12-08 09:42:11

규원

스님 좋은법문에 오늘하루가 행복합니다.

2018-12-03 11:22:59

임무진

베풀고 베풉니다. 그러나 돌아온다는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괴로움이 없습니다

2018-11-21 11:5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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