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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기도로 일과를 시작한 스님은 이른 아침공양을 한 후 날이 밝아지자 바로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그동안 손보지 못해서 무성해진 장미, 수국, 코스모스 등 나무와 꽃들을 가지치거나 잎을 솎는 정비를 하였습니다.
나뭇가지는 땔감으로 쓰기 위해서 장작과 함께 말려두었고, 연한 꽃대나 잎은 말려서 거름으로 쓰려고 따로 쌓아두었습니다.
올해는 스님의 해외강연일정 때문에 일찍 배추를 심었더니, 어느새 속이 차고 있어서 올해는 어느 해보다 김장을 일찍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또, 지속적으로 관리를 해주지 못하다보니 배추벌레가 잎을 갉아먹고 있어서 손으로 벌레를 잡기도 하였습니다. 매일 잡아주면 좋다지만, 일정상 며칠에 한번씩만 가능해서 완전소탕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아직 못다 캔 고구마의 잎과 줄기는 걷어서 소를 키우는 옆집에 소먹이로 가져다 주었습니다.
미리 잘라서 말려놓은 깨는 맑은 날 털기로 하고, 남은 뿌리 부분이 남아 있는 밭은 다른 작물은 심기 위해 뿌리를 뽑아내는 작업을 하였습니다. 깨라고 할 때 가벼운 작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잔뿌리가 많고 흙을 많이 안고 있어서 뽑아내는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또, 마당 한켠에 심어둔 부추를 베어서 부추김치를 담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아침 작업을 마친 후 이른 점심을 먹었습니다. 오후 2시부터는 구미 아도모례원 개관식에 참석하여 법어를 하기로 되어 있어 11시 경에 길을 나섰습니다.
가는 길에 경주귀빈여행사에 들러서 인도성지순례 비행일정을 확인하고 다시 참가 인원에 따른 비행 스케쥴을 조정하는데, 항공사와의 관계에서 피해가 가지 않으면서도 우리에게 가장 유리한 일정으로 다시 조정을 한 후 구미 아도모례원으로 출발하였습니다.
스님은 오후 1시에 아도모례원에 도착해서 대웅전과 새로 점안식을 한 부처님을 둘러보고 대웅보전 현판식을 거행 하였습니다.
개관식에 앞서 오늘 행사에 참석하신 여러 귀빈들과 오늘 행사를 주관하신 구미시 관계자들과 인사를 나눈 후 구미시장님과 간단히 차담을 나누었습니다. 스님은 시장님께 감사 인사를 표시하면서도 아도화상의 시상을 국민들에게 심기 위해서는 청소년 수련원이 필요함을 역설하였습니다.
스님은 행사장으로 이동 후 본 행사에서 15분 정도 법어를 했습니다.
스님은 아도화상과 모례장자에 대해서 자세히 법문을 했습니다.
“이곳 아도모례원은 1600년 전에 아도화상이 처음 불법을 전한 곳입니다. 하지만 이곳은 신라불교와 고려 불교의 부흥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에 들어와 불교가 탄압을 받게 되자, 이곳은 폐허가 되고 잊혔습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약 150년 전에 근세 불교의 중흥조이시자 3.1운동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불교계를 대표해서 서명하신 백용성 조사님께서 이곳 모례정(毛禮井) 가에서 용맹정진하신 후 크게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그게 1886년입니다. 그래서 이곳은 ‘용성조사 오도성지’가 됩니다. 그리고 용성조사님께서는 나라를 일제에 빼앗기고 국민들이 핍박 속에 살게 되자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평생 애를 쓰셨는데도 나라의 독립을 보지 못하시고 1940년도에 입적을 하셨습니다.
조사님께서 입적하실 때 ‘역사를 아는 국민이 되어야 한다. 제 뿌리를 알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 불교인들은 이 땅에 불교를 처음 전래한 전래자들의 전법 정신에 감사할 줄 알아야 되는데, 지금 우리는 그 초전법륜지를 다 잊어버리고 있다’ 라고 하셨어요.
고구려에 처음 불교를 전한 순도화상이 첫 번째로 세운 절이 초문사입니다. 그리고 백제에 처음 불교를 전한 마라난타 대사의 초전법륜지가 서울에 있는 대성초당입니다. 그때는 한성 백제라 그래서 백제의 수도가 지금의 서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훨씬 더 앞선, 300여 년 더 앞서서 가야에 처음 불교를 전한 분이 장유화상입니다. 그분이 처음 지은 절이 창원시 봉림동에 있는 가야정사입니다. 그리고 서역승 아도화상이 중국을 거쳐 고구려에 오셨다가 고구려에서 다시 이곳 도개리 모례장자의 집으로 와서 처음으로 신라에 불법을 전하셨습니다. 백용성 조사님께서는 초전법륜성지를 잘 가꾸라고 유언을 남기신 겁니다.
그 말씀의 의미는, 단순히 불교인들이 제 뿌리를 숭상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렇게 뿌리를 잘 가꾸는 공덕이 있어야 우리 민족이 독립도 할 수도 있고, 미래에 번영도 꾀할 수 있다는 뜻이셨어요. 그 유언을 동헌 완규 대사께서 잇고, 다시 불심도문대사께서 이어서 지금으로부터 45년 전에 민가로 남아있던 모례장자 집터를 구입하셔서 그 유언을 받드는 씨앗을 심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씨앗이 오랫동안 자라지 못하고 있다가 남유진 구미시 시장님의 큰 원을 만나 이렇게 활짝 꽃피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 번 시장님과 구미시에 감사드립니다. (모두 박수)
불교인들에게 이곳은 불교의 성지입니다. 그럼 기독교나 다른 종교인들에게는 성지가 아니냐 하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불교는 하나의 종교를 떠나서 이미 우리 민족의 정신세계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은 단순히 불교신자들만 올 게 아니라 이 땅의 모든 국민들이 와서 아도화상의 정신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아도화상의 정신’이 뭘까요? 다른 나라에 불교가 전법된 예를 보면, 중국에서 왕이 전법승을 파견 하면 그 파견승을 받는 나라에서도 왕이 접대를 해서, 다시 말하면 나라에서 절을 지어주는 등 불법을 전파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신라는 외래사상의 유입을 금지했기 때문에 불교 전법도 국가로부터 금지되어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도화상이 직접 경주에 가서 불법을 전파할 수가 없었습니다. 승복을 입고 불법을 전하면 바로 체포가 되어서 처벌을 받던 시절이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분께서는 변복을 하고, 즉 속복을 입고 이 모례장자의 집에 하인으로 들어오셔서 양떼를 키우는 목동으로 일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워낙 착실하고, 성실하게 했기 때문에 모례장자의 재산을 많이 늘려주게 됩니다. 그래서 모례장자는 비록 자기 집 하인이지만 이 하인을 존경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또 모례장자의 여동생이 자기보다 신분이 낮은 이 하인을 사모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마침 중국 양나라에서 신라에 공식적으로 사신을 보내서 향을 선물했습니다. 그런데 신라의 왕은 그게 무엇인지, 그걸 어디에 쓰는지 몰랐어요. 그래서 그걸 가지고 전국으로 다니면서 ‘이것이 무엇이며, 이 용도를 아는 사람?’ 하고 묻고 다녔는데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그런데 당시 신라의 국경변이었던 이곳에 와서 그 용도를 물으니 이 집 하인이 ‘그건 향입니다’ 한 거예요. 그래서 깜짝 놀라며 ‘네가 어떻게 아느냐?’ 했는데 그때서야 하인이 ‘사실은 제가 스님입니다. 그런데 변복을 하고 이곳에 있었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도화상은 바로 신라의 서울인 경주로 불려가게 됩니다.
그래서 왕을 만나게 되었을 때 왕에게 '이것은 향이라고 하는 물건입니다.' 하니, 왕이 ‘향을 어디에 쓰느냐?’ 물으니 아도화상이 ‘이 연기를 피우면 그 신령함이 불신, 즉 부처나 신하고 통하게 됩니다’ 하니 왕이 ‘그래? 지금 내 딸에 중병이 들었는데 백약이 무효다. 네가 한번 고쳐보라’ 라고 해서 아도화상이 향을 피우고 기도를 했더니 공주의 병이 나았습니다. 그에 감동한 왕이 흥륜사를 지어줬는데, 몇 년 후에 왕이 죽자 다시 보수 세력이 등장해서 탄압을 하니 아도화상이 이곳으로 도망을 왔습니다. 모례장자는 아도화상이 훌륭한 분인 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 집에 땅굴을 파서 거기에 아도화상을 숨겨주었고, 모례장자의 여동생은 사모하던 마음이 바뀌어서 출가를 하여 처음으로 비구니 스님이 되셨습니다.
법어 시간이 짧게 주어졌는데도 제가 이렇게 길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바로 이 아도화상의 정신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처음 불교를 전할 때 전래자들이 절부터 지었던 게 아니라 머슴살이를 하면서도, 탄압을 받으면서도, 인격으로 주변을 감동시켜서 불법의 씨앗을 뿌렸다는 것입니다.
그 씨앗이 150년 후에 싹을 틔우게 되는데요, 그로부터 150년이 지났을 때도 민중은 불교를 믿었지만 국가에서는 금지를 시켰는데, 이차돈의 순교로 비로소 공인을 받게 됩니다. 이게 신라불교의 정신입니다. 처음 전해질 때 아도화상의 정신이 있었고, 불교가 공인될 때 이차돈이라는 한 청년의 희생정신이 있었습니다. 신라불교가 이렇게 시작을 했기 때문에 백제나 고구려보다도 훨씬 늦게 전파가 되었지만 그 뿌리는 너무나 깊고 단단했기 때문에 신라가 삼국 가운데 제일 작은 나라였는데도 통일의 중심이 되면서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겁니다.
보통 유물이라고 하면 주춧돌이 남거나 하는데 마치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깊은 샘은 물이 마르지 않는다’는 옛말처럼, 모든 것이 변했는데도 이 모례장자의 집 우물은 기적처럼 아직도 마르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모두 박수)
방금 전 시장님께서는 오늘 이 맑은 날씨가 부처님의 가피라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이 우물 물이야말로 기적 같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방치하다시피 했던 이곳이 오늘 시장님의 원과 도지사님의 협력과 국가의 지원으로 이렇게 좋은 문화체험지로 거듭 났습니다.
그러니 전국에 계신 불자님들은 말할 것도 없고, 종교를 넘어서서 이 땅의 청년들, 젊은이들은 이곳으로 와서 아도화상의 정신을 배워야 합니다.
이런 정신이 우리에게 남겨졌기 때문에 가난했던 나라가 50년 만에 경제대국이 되었고, 명령에 복종만 할 줄 알던 나라가 세계에서 앞서 가는 민주국가가 된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남북이 분단되고, 전쟁까지 치른 악조건 속에서도 산업화에 성공하고, 민주화에 성공했으니, 이제 남은 게 있다면 통일을 평화적으로 이루어 통일대한민국을 만드는 일입니다.
그런 일을 해낼 젊은이들을 양산하려면 이곳에 청년들을 위한 연수원,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원을 마련하여, 이왕에 있는 문화 시설에다가 대한민국의 새 시대를 대비할 젊은이들을 통일일꾼으로 양성하는 연수 시설까지 겸하게 하면 좋겠다는 당부를 시장님께 드립니다.(모두 박수)
다시 한 번, 오늘 참석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고, 허허벌판이었던 이곳에 이렇게 아름다운 문화시설을 만들어주신 시장님과 구미시 관계자 여러분께 다시 한 번 더 감사말씀을 드립니다.” (모두 박수)
마을주민, 공무원 등 많은 분들이 참석한 가운데 아도화상 동상 제막식을 진행했습니다.
스님은 불교전시관, 전통가옥 체험마을을 직접 둘러보며 몇 명 정도 수련할 수 있는지 집 한 채 한 채마다 들어가서 크기를 확인하고 불편한 점이 없는지 체크했습니다.
그 이후로는 문경 정토수련원에서 이강준 법사 천도재가 있어서 빠르게 이동하셨습니다.
문경정토수련원에 상주하는 법사님, 실무자, 상근자, 행자대학원·백일출가 행자님들 대부분은 구미 아도모례원 행사에 참석했지만, 남은 문경 공동체 행자님들은 오늘 지도법사님을 맞이하는 날이라서 도량 정비와 천도재 준비 등으로 아침부터 설렘으로 가득했습니다.
LA 정토회 초창기 시절, 한의원을 운영하시면서 출가한 스님은 아니지만 재가에 있으면서 부지런히 수행 정진 하시고, 또 법사 수계를 받으셔서 LA 지역뿐만이 아니라 달라스등 미국 전역에 부처님의 법을 전하기 위해서 평생을 바치셨던 이강준 법사님께서 지난 6월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이강준 법사 사모님 박명귀 보살님께서 법사님의 유골을 들고 오늘 새벽 인천공항에 도착하여 법륜스님께서 아도 모례원 행사 마치고 도착하는 시간에 맞추어서 천도재를 올리게 되었습니다.
천도 법문 시 스님은 이강준 법사와의 인연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말했습니다.
“한의사로서 육체의 병을 치료함과 동시에 마음의 병인 괴로움을 덜어주기 위해서 본업에 지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늘 이 절, 저 절로 법회를 다니셨습니다. 스님이 계시지 않는 지역일수록 더 정성을 기울여서 법문을 하셨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꿈은 한국의 청소년들, 특히 순간의 잘못으로 학업이 중단되고 부모와 떨어져 교화소에 있는 청소년들을 바르게 이끄는 것이 원이셨는데 이것은 저의 원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힘을 합쳐서 청소년들을 교화하자’ 함께 마음을 합했습니다. 그러나 당장 귀국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기복적인 종교적인 행위로만은 부처님의 바른 법이 실현되기 어렵기 때문에 오히려 절보다는 사무실에서라도 생활인들을 위한 불교로서 ‘신행회’를 설립하여 재가 수행자들을 열심히 지도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나라 불교인들은 스님이 있어야 되고, 복을 빌어야 되는 현실 앞에서 법사님의 꿈이 이뤄지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저와 힘을 합해서 LA 정토회 설립을 하고 상임 법사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사모님 박명귀 보살님이 총무 소임을 맡으면서 두분이 LA 정토회의 실질적인 창설자가 되셨습니다. 또 LA 회원들과 힘을 합해서 꾸야마 밸리에 LA 정토 수련원을 마련하고, 매 달 그 먼 거리를 오고 가면서 법회를 했고, 정토회 만일결사에도 참여했습니다. 그래서 ‘저와 만일결사까지는 함께 끝을 내야 된다. 또 정토회가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면 청소년 교화도 함께 하자.’고 원을 세웠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강준 법사님을 정토 수련원에 모시게 된 것은 본인이 한국에서 청소년들을 교화하는 것을 평생의 원으로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정토회 본부도 건립이 되면 이강준 법사님의 숭고한 뜻을 이어 받아서 ‘정토회가 청소년 포교와 교화를 법사님 대신해서 하겠다.‘ 하는 언약을 겸해서 이 곳 정토 수련원에 모시게 되었습니다.”
스님이 들려주는 이강준 법사님과의 인연은 가슴 뭉클했습니다. 청소년 포교에 대한 새로운 다짐의 시간이 되기도 했습니다. 부처님의 바른 법을 전하는 영가 법문에 이어, 증명법사로서 천도재에 끝까지 참석하고, 박명귀 보살님과 천도재에 참석해 주신 한 분 한 분과 인사하고 다시 두북으로 이동하였습니다.
함께 만든 사람들
김경희, 최선희(글) 신용상(사진) 정란희(녹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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