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단지동맹비 ► 발해 염주성 ► 권하해관 ► 봉오동 전투터
2016.8.15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 3일째 "발해 염주성 그리고 항일독립운동사"


 

안녕하세요? 오늘은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의 3일째인 동시에 러시아에서의 기행을 마무리하고 중국으로 이동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8.15 광복절인데요. 스님과 청년 역사기행단은 항일독립운동의 유적이 남아 있는 러시아 연해주에서 8.15 광복절을 맞이했습니다.  

 

청년 역사기행단은 새벽2시에 우수리스크를 출발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가로등도 없는 허허벌판을 버스는 구비구비 달렸고, 새벽 하늘에는 별이 쏟아지는 와중에 청년들은 못다 채운 꿀잠을 잤습니다. 밤새 버스로 3시간을 달려 새벽 5시에 안개가 자욱한 안중근 의사의 단지동맹 기념비에 도착했습니다.  

 


▲ 안중근 의사의 단지동맹 기념비

 

단지동맹 기념비 위에는 안중근 의사가 단지동맹을 결의하기 위해 왼손 무명지를 잘랐던 손 모양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잠이 덜 깨 비몽사몽 중이었던 청년들은 스님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정신을 번쩍 차렸습니다. 안중근 의사를 포함한 12인의 동의단지회 열사들이 얼마나 동아시아의 평화를 간절하게 바랬던가를 알고나니 애국가를 부르며 참배하는 도중에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다시 버스를 타고 도착한 곳은 발해 시대의 염주성이 있었던 크라스키노 마을이었습니다. 스님은 앞장서서 염주성으로 출발하였고, 청년 역사기행단은 안개가 자욱한 늪지대를 걸어가기 위해 미리 준비한 비닐 장화를 신거나 우비를 입는 등 만반의 준비 태세를 갖추고 스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 발해의 염주성

 

염주성 가는 길은 늪지대라 진흙탕에 발이 빠질까 염려를 많이 하였으나 어제 갑자기 맑아진 날씨 덕분에 늪이 그리 깊지 않았고, 게다가 지난주에 다녀간 통일의병 역사기행단이 닦아놓은 푹신한 야생초 길 덕분에 청년들은 한결 가볍게 염주성에 도착했습니다. 앞서서 길을 닦아준 통일의병 선배님들에게 모두들 감사한 마음을 느끼며 한발 한발 걸었습니다. 

 


 

염주성 가는 길은 늪 뿐만이 아니라 사람키보다 더 높은 야생풀들과 야생화들이 끝도 없이 가득했습니다. 노란 아침해가 드넓은 대평원에 서서히 내리쬐기 시작하자 수풀에 맺혀 있던 안개와 이슬이 수풀이 보석처럼 반짝거렸습니다. 청년들은 아직 아침식사도 하지 않고 30여 분을 갈대숲을 헤치며 걸었습니다. 미끄러운 늪을 피해 요리조리 걸어다니느라 지칠 법도 했지만 사람 손이 닿지 않은 길이 너무나 아름다워 힘든 것도 금세 잊혀졌습니다. 어떤 청년은 “이 숲길을 걸은 것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염주성 발굴터에 도착하여 아침 도시락을 먹은 후 스님과 겔만 교수님의 안내에 따라 발굴터를 4군데 정도 둘러보았습니다. 겔만 교수님은 이곳 염주성 발굴을 책임지고 있는 분입니다. 발굴터라고 알려주기 전에는 전혀 알아보기 어려울 것 같은 흙더미나 돌무더기 같은 곳이었지만 겔만 교수님의 세세한 설명을 들으며 이 발굴터가 정말 발해인이 살고 생활했던 곳이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역사인 발해 유적지를 러시아 사람인 겔만 교수님이 발굴하고 연구하고 있다는 것에 정말 감사했고, 당장 연구비가 없어서 발굴을 진행할 수 없다는 이야기도 들으니 안타깝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스님은 겔만 교수님의 설명을 다 듣고 나서 통역을 거치느라 제대로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 청년들을 위해 겔만 교수님이 말해준 내용의 요점을 큰 틀에서 다시 정리해 주었습니다. 

 

“발해는 5경 15부 62주로 되어있습니다. 염주성의 염은 무슨 염자일까요? 소금 염자 입니다. 발해에서 쓰는 소금을 전부 여기서 생산했습니다. 그래서 이 주가 염주입니다. 이 부는 동경용원부에 소속이 되어있습니다. 동경용원부의 중심도시는 훈춘입니다.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곳이 훈춘이죠. 염주는 현재 러시아 땅이지만, 솔빈부에 소속되었던 것이 아니고 동경용원부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수도가 상경용천부이든 동경용원부이든 중경현덕부이든 관계없이 이 염주는 일본으로 통하는 교통로 역할을 주로 했습니다. 첫째는 소금 생산지의 역할을 했고, 둘째는 일본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 역할을 했습니다. 발해 229년 동안 발해에서 일본으로 간 사신은 34회가 있었고요. 일본에서 발해 쪽으로 온 사신은 13회가 있었다고 합니다. 사신들이 오면 영접하는 곳이었고, 사신으로 가는 사람들도 하룻밤 머물고 가는 그런 곳이었던 것 같아요. 중앙 관리, 즉 중요한 관리들이 늘 사신으로 오고간 곳입니다.

 

그래서 도시 자체가 대외적으로 보여줘야 하는 면이 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계획도시로 만들어졌던 것 같아요. 도로도 자갈과 돌을 깐 포장된 도로이고, 구역도 기능에 맞게 나뉘어져 있는 그런 도시입니다. 

 

성벽은 지도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북문이 없고 동문, 서문, 남문이 있습니다. 우리가 버스에서 내려서 주욱 들어가게 되면 서문으로 들어가게 되고, 강을 따라 내려가게 되면 동문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남문으로 나가서 바다로 갔을 확률이 높은데 혹시 항구가 강 하구에 있었다면 동문으로 나가서 항구로 갔을 것입니다. 겔만 교수님의 설명을 들으니 동문으로 난 길이 포장도로였다고 하니 혹시 항구가 강 하구에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성벽의 폭은 5미터 정도 되고 높이는 얼마인지 교수님도 얘기가 없었어요. 또 성문에는 옹성이 있었습니다. 옹성은 주로 적의 성문 공격을 막기 위해 쌓는데 여기는 적의 공격을 막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홍수 피해를 막기 위해 쌓은 것 같다고 교수님이 설명을 했는데 이 부분은 더 조사가 필요한 것 같아요.

 


 

그리고 치가 있었다고 합니다. 성벽밖에 성벽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치가 있었는데, 동쪽에서 발견이 됐습니다. 앞으로 발굴하면 더 발견할 지도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치는 고구려 성에 있기 때문에 고구려 문화의 계승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제 갔던 성은 솔빈부성이니까 그 곳이 소위 도청 소재지라면 여기는 그 아래에 있는 큰 시청 소재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스님의 요점 정리에 청년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해 했습니다. 

 

그리고 스님과 청년들은 정성껏 안내를 해준 겔만 교수님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 후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다음은 하산 전투 승전기념탐으로 향했습니다. 승전기념탑에 도착한 청년들은 모두 일제히 감탄의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승전기념탑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러시아가 일본의 공격을 막아낸 것을 기리는 동상이 세워져 있는 전망대입니다. 승전기념탑 앞에 서니 염주성과 염주성 너머의 바다, 북한으로 향하는 길까지 크라스키노 지역 일대가 모두 내려다보였습니다. 고개를 돌릴수록 장면마다 장관이었습니다. 

 


▲ 하산 전투 승전기념탑에서 바라본 염주성과 동해바다

 

스님과 청년 역사기행단은 저 멀리 북한 땅을 바라보며 8.15 광복절 기념식을 하였습니다. 한반도를 바라보며 다같이 애국가를 부르니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벅찬 감동이 올라왔습니다.

 


▲ 8.15 기념행사

 

이제 스님과 청년들은 버스를 타고 중국 훈춘으로 넘어가기 위해 러시아 국경지대에 도착했습니다. 러시아에서 출국하는 수속 시간이 생각보다 길어졌고 더운 날씨에 조금 지치기도 했습니다. 3~4번에 걸쳐 여권 확인을 하면서 러시아 출국과 중국 입국을 완료하는 데에 6시간이 걸렸습니다. 어렵사리 국경을 넘는 모습을 보면서 스님도 “유럽은 국경을 오가는 것이 참 쉬워졌는데, 아시아는 언제쯤 그렇게 될 수 있을까”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 러시아와 중국의 국경

 

국경을 넘어와 중국에서 대기하던 버스를 탄 청년들은 러시아 버스보다 훨씬 신식의 버스와 건물들을 보며 약간 놀라워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국경에서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 점심을 먹지 못한 청년들은 중국 훈춘시에서 점심을 든든히 먹고 난 후 '권하해관' 으로 향하였습니다. 

 

스님은 권하해관에 가는 길에 북한과 중국의 교류가 가장 많이 이루어지는 대표적인 지역들에 대해 알려주었고, 그 중에서 두번째로 많은 물류가 오가는 세관이 바로 권하해관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권하해관에서는 북한 원정리에 있는 세관의 모습과 새로 건설된 신두만강대교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청년들은 처음으로 두만강과 두만강 건너의 북한을 보고 신기해하였습니다. 

 


▲ 권하해관에서 바라본 북한의 세관

 

두만강을 바라보면서 스님은 식량난으로 고통받는 북한 주민들을 돕기 위해 지난 20년 동안 어떤 활동을 해왔는지 이야기하면서 북한을 대하는 중국과 한국의 태도를 비교하기도 했습니다. 

 

“20년 전부터 북한의 식량난을 해결해보고자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했었습니다. 특히 JTS는 97년부터 라진 선봉에 있는 탁아 유치원 아이들 1만1천 명의 영양실조를 해결하기 위해 5년 동안 옥수수, 콩가루, 쌀가루, 우유를 볶아 넣어 영양식을 만들어 공급을 했습니다. 라진 선봉으로 가는 이 다리로 계속 물자를 넣었습니다. 그리고 온성군 지역에는 농자재, 비료, 비닐 이런 것들을 지원했습니다. 그 때 비료 1800톤을 공급해서 온성군은 북한 전역에서 농업 생산량이 2위가 된 적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저희들은 북한의 식량난 해결을 위해, 또 농업 식량 증산을 위해, 어린이들 의료 건강과 영양식 지원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었습니다. 

 


 

그러다가 나진선봉 지역은 점차 개방이 되면서 사정이 많이 나아지게 되어서 그 다음부터는 함경북도의 고아원과 양로원에 지원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이명박 정부 때는 조금씩 지원했다가 또 무슨 사건이 나서 지원을 못했다가 이렇게 왔다갔다 했는데, 박근혜 정부가 들어오고부터는 지난 4년 동안 쌀 한 톨도, 밀가루 한 포대도 못 보내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곳은 훈춘시의 동남쪽 끝입니다. 그리고 중국 전체 국경의 동남쪽 끝입니다. 중국은 동해로 진출하고 싶은 야망이 큽니다. 지금은 나진선봉이 중국의 물류 기지가 되어가고 있는 수준이지만 만약 북한과 중국의 관계가 좋아지게 된다면 중국은 틀림없이 동해 함대를 만들거예요. 그렇게 되면 일본이나 미국에게는 동아시아 방어에 심각한 타격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북한을 잘 달래서 북미 관계를 개선하고, 북한 체재를 안정시켜서 미래의 불상사가 안 일어나도록 해야 하는데 지금 상황을 봐서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미국은 지금 중국을 봉쇄하는 전략에 한국을 끌어들이려 하고 있죠. 남북관계 갈등이 심화되는 것이 한국을 한미일 삼각 군사동맹체제에 합류시키는 데에 유리하지 않습니까. 사드 배치의 경우, 남북관계가 전쟁이 날 듯 해야 한국이 동의를 하니까요. 지금 북한핵 때문에 북중 관계가 좋지 않지만, 북중 관계가 개선이 된다면 이 나진선봉이 중국의 이런 오랜 소망을 달성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리라 봅니다. 중국은 북한이 개방될 것을 대비해서 신의주, 훈춘 등 국경 도시의 모든 곳에 만반의 준비를 해놓고 있습니다. 고속철도, 고속도로가 여기까지 오도록 하고 있고, 북한으로 넘어오는 다리도 다 중국 돈으로 건설을 해놓은 상태이고요. 신압록강 대교, 신두만강 대교도 지금 다 건설을 해놓은 상태입니다. 지금 당장 북한에 못 들어가니 일단 중국에 공장을 세우고 여기에 북한 노동자를 데려와 합작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지난 20년 동안 북한의 식량난 해결을 위해 온갖 노력을 했지만 지금은 쌀 한 톨도 보낼 수 없는 상황이라는 얘기에 가슴이 답답해졌습니다.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다가갈 수 없는 분단의 현실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권하해관에서 두만강을 보고 나오는 길에는 두만강에 대한 노래를 함께 불러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라구요’, ‘눈물 젖은 두만강’ 등 너무나 익숙한 노래를 조용히 불러보았습니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젖는 뱃사공 ♬

 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

 떠나간 그 배는 어디로 갔고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강물도 달밤이면 목메어 우는데 ♬

 눈물진 두만강에 밤새가 울면 

 떠나간 그 님이 보고 싶구나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노래 가사 중에 눈물진 두만강이라는 표현이 자꾸만 구슬프게 다가왔습니다. 역사기행을 하며 두만강을 건너 온 사람들의 수많은 고통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스님은 두만강을 건너면서 눈물을 흘렸던 사람들 중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었는지에 대해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노래 가사처럼 두만강을 건너면서 눈물을 흘렸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 있었을까요? 첫째, 굶어죽지 않으려고 살길을 찾아서 이곳에 넘어온 사람들이 있었죠. 둘째, 일제 치하에서는 잃어버린 나라를 구하려고 이곳으로 넘어온 사람들이 있었죠. 그렇게 두만강을 건너면서 눈물을 흘렸는데 1994년부터 거의 10년 동안은 그것보다 더한 피눈물을 흘렸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북한의 고난의 행군 시기에는 엄청난 사람들이 굶어 죽으면서 수많은 난민이 넘어 왔습니다. 예전에는 넘어만 오면 살 수가 있었는데, 이 고난의 행군 시절에는 넘어오면 중국에 잡혀서 다시 북한으로 보내졌고, 중국에서는 밀입국죄로, 북한으로 돌아가게 되면 민족 배신자로 낙인 찍혀 처벌받았습니다. 그래서 감옥에서 죽은 사람, 또 감옥에서 나와서 탈출한 사람, 또 잡혀서 강제 송환되고 또 처벌받고 그랬습니다. 

 


 

저희들이 구제한 사람 중에는 우리가 ‘빠삐용’이라고 이름 붙힌 24살 젊은이가 있었는데, 북한 감옥을 다섯 번이나 탈옥하며 오고 갔어요. 그리고 여섯 번째 들어갔는데 안 돌아 왔습니다. 아마 죽었지 않았나 싶어요. 그 청년이 북한의 그 어려운 시기에 전국을 다니면서 자기가 보고 느낀 것을 다 기록하고 원고로 만들어 쓴 책이 저희 '좋은 벗들'에서 출판한 ‘고난의 행군’이라는 책입니다. 그 책을 한번 읽어보면 그 당시 북한의 실정이 어떠했는지를 다 알 수가 있습니다. 저희가 이 청년에게 ‘한국에 가서 살아라’라고 했는데, 청년은 ‘아닙니다. 저는 죽은 몸인데 살았으니 어쨌든 북한에 가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돕다가 죽어야 될 몸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사실 그 청년은 백두산에서 거의 얼어 죽을 뻔 했는데 저희가 발견하고 데리고 와서 살렸기 때문입니다. 

 

그 청년이 여기 중국에서 식당에 숨어서 일을 좀 했어요. 어느 날은 저한테 씩씩 대면서 ‘저 개새끼 죽여버릴려다 놔뒀어요’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왜?" 그러니까 자기가 일하는 식당의 주인집 개가 이밥(쌀밥)을 줘도 안 먹더라는 겁니다. 식당에서 먹다 남은 밥을 줘도 안 먹다가 따로 고기를 주니까 그제서야 먹는 것을 보고 엄청 화가 났다는 겁니다. ‘북한에서는 강냉이도 못 먹는데 어디 개가 이밥도 안 먹나’ 싶어서 반 죽여버리고 싶었다는 얘기였습니다. 이런 얘기를 듣고선 그 굶주림의 아픔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습니다. 

 

또 두망강을 넘어온 사람들이 ‘중국은 사회주의 천국입니다’라는 말을 자주 했어요. ‘왜?’ 라고 물어보면 ‘여기는 개도 이밥을 먹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개가 쌀밥 먹는 걸 보고 사회주의 천국이라고 한 겁니다. 

 


▲ 두만강

 

또 어떤 사람이 넘어와서 글을 쓴 것을 보면 자기가 북한에서는 계란 10개만 먹어보고 죽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소원이었다고 쓴 사람도 있었고요. 그리고 제가 느끼기에 북한 민중의 한이 가장 적나라하게 표현된 것은 이런 겁니다. ‘다 죽고 지 혼자 왕 하면 뭐하노?’ 그래서 원래 '고난의 행군'의 책 제목도 그렇게 하려 했었어요.”

 

역사상 가장 처절한 눈물을 흘리며 두만강을 건너야 했던 북한 동포들이 있었다는 사실에 정말 가슴이 아팠습니다. 버스는 두만강과 작별을 고하고 모퉁이를 돌아 다시 연길시로 향했지만, 북한동포들이 겪어야 했던 수많은 고통들이 자꾸만 생각나면서 가슴이 아련해졌습니다. 

 

훈춘시를 떠나기 전 고구려의 최변방 지역이었던 책성을 둘러보았습니다. 책성 성터 안에는 현재 고성촌이라는 마을이 들어서서 마을 사람들로 인해 성의 대부분이 훼손되어 있었습니다. 다만 마을이 끝나는 지역에 성으로 추정되는 높은 언덕만이 과거에 이 곳이 성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 고구려 책성

 

책성을 보고 나오는 길에는 발해 시대 때 동경용원부의 수도였던 팔련성의 발굴터를 먼 발치에서 보았습니다. 현재 발굴이 진행 중이고 중국에서는 아직 공개를 안 하고 있기 때문에 버스 위에서만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 발해의 동경용원부, 팔련성

 

버스를 타고 연길에 도착하여 본 도시의 풍경은 참으로 신기하였습니다. 대부분의 건물 간판이 한국어와 중국어를 함께 쓰고 있는 모습을 보니 정말로 이곳은 우리와 같은 동포인 조선족이 사는 곳임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저녁식사를 한 후에는 스님이 초청한 반가운 손님들을 만났습니다. 반가운 손님들은 96년부터 북한동포돕기 운동을 함께해 온 조선족 동포분들, 그리고 발해사를 연구하는 학자이면서 동북아 역사기행을 스님과 함께 만들어 온 방학봉 교수님이었습니다. 

 


▲ 조선족 동포분들

 


▲ 방학봉 교수님 내외

 

스님으로부터 조선족 동포분들이 북한 동포들을 돕기 위해 펼쳐온 숨은 노력들을 듣고 나니 존경스럽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는데, 오히려 그분들이 역사기행을 온 우리에게 감사하다는 표현을 하니 부끄러운 마음이 올라왔습니다. 평소 조선족에 대해 무관심했었는데 이번 역사기행을 통해 직접 만나보고 경험해보니 소중한 우리 민족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녁식사를 한 후에는 스님의 강연을 들었습니다. 오늘은 북간도에 정착한 조선족의 이주 역사와 북간도에서 펼쳐진 독립운동의 역사를 주제로 강연이 있었습니다. 스님은 북간도에서의 역사는 연해주에서의 역사와 비슷한 점이 많다고 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는 8.15를 건국절로 만들려는 행위가 얼마나 역사의식이 부재한 행위인지 지적하면서 새로운 100년을 희망적으로 열어가기 위해서는 독립운동사가 사실대로 복원되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우리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의 승리만 생각하는데, 이 전투의 승리로 3600여 명의 민간인이 학살을 당하게 됩니다. 또 3500여 채의 집과 6만 석의 식량이 불살라졌습니다. 연해주에서는 4월 참변을 통해 300~400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면, 봉오동 청산리 전투 이후에는 3600여 명의 민간인들이 학살당하게 된 겁니다. 이것을 볼 때 전쟁에서의 승리만 얘기할 게 아니라 그것의 결과로 엄청난 민간인이 희생된 것도 함께 알아야 합니다. 

 


 

백성들 입장에서는 얼마나 억울합니까. 도대체 나라가 자신들을 도와준 적도 없고 착취만 했잖아요. 그래서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 도망와서 황무지를 일구고 살았던 겁니다. 감정만 생각하면 나라가 망하든 말든 그게 자신들과 무슨 상관이 있었겠어요? 그런데도 나라를 빼앗기니까 결국 자식을 독립군으로 보내고, 양식도 대어주고 했는데, 그런 결과로 학살당하고 집이 불태워지고 전답이 파괴되게 된 겁니다. 

 

이런 희생의 기반 위에서 오늘날 대한민국이 있는 겁니다. 이것을 무시하고 1948년 8월 15일이 건국일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얼토당토 않은 얘기인 겁니다. 이 모든 희생 위에 오늘날 대한민국이 있기 때문입니다. 북한도 마찬가지예요. 이런 희생 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있는 것이지 김일성 자기 혼자서 일군 것이 아닙니다. 이런 측면에서는 남북이 모두 과거 항일투쟁의 역사를 되돌아봐야 합니다. 이런 인식은 역사의식의 부재에서 빚어지는 현상입니다. 

 

우리는 조선 사람으로서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싸웠던 겁니다. 그 사람이 민족주의자로서 싸웠든, 공산주의자로서 싸웠든, 모택동 부대 아래에서 싸웠든, 러시아 적군 아래에서 싸웠든, 장개석 부대 아래에서 싸웠든, 미국에서 싸웠든, 젊을 때는 싸웠지만 늙어서는 일제에 아부를 했든, 중요한 것은 사실을 사실대로 아는 것입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알면 우리의 독립운동사가 굉장히 풍요로워집니다. 저 사람은 장개석 밑에서 싸웠기 때문에 안된다, 저 사람은 모택동 부대 밑에서 싸웠기 때문에 안 된다, 저 사람은 러시아 적군 밑에서 싸웠기 때문에 안 된다, 저 사람은 동북항일연군 소속이었기 때문에 안 된다, 저 사람은 나중에 북한정부에 참여했으니까 안 된다, 저 사람은 늙어서 친일을 했기 때문에 안 된다, 이렇게 다 빼버리면 남는 사람이 없어요. 그렇게 해서 남을 수 있는 사람은 요절한 사람들 뿐이에요. 이제는 수많은 독립운동의 역사가 제대로 정립이 되어야 합니다. 

 


 

상해임시정부는 어땠을까요. 상해임시정부는 장개석 정부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분이 잘 아는 윤봉길의 의사의 도시락 폭탄 투척사건이 계기가 됐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투척사건이 있고 나서 장개석 총통이 한 말이 ‘4억 중국 인민보다 대한의 한 청년이 더 위대하다’입니다. 4억의 중국 사람들은 일본 군대에게 쩔쩔매는데 대한의 한 용기 있는 젊은이가 그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겁니다. 이 사건으로 장개석 정부는 이 상해임시정부에 대해서 아주 적극적인 지지를 표현하고 지원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무장투쟁이 국경으로까지 연결은 안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국경이 인접한 쪽은 모택동 부대가 장악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일 전쟁이 일어나자 장개석 부대는 중경으로 피신을 가게 되는데, 이 때 상해임시정부도 따라서 같이 이동을 했습니다. 카이로 회담에서 장개석, 루즈벨트, 처칠이 만났을 때 조선의 독립을 처음으로 꺼낸 사람도 장개석입니다. 그러나 이 회담에 스탈린은 참가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장개석은 자격이 없다는 거였어요. 장개석이 참가하려면 모택동도 참가를 해야한다고 하면서 스탈린은 회담에 참가를 안 해 버린 거에요. 그 다음 포츠담 회담을 할 때는 장개석이 참가 안 하고 처칠, 스탈린, 루즈벨트 셋이 참가했는데, 여기서는 아예 조선의 독립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논의가 안 됐습니다. 

 

어쨌든 이런 결과로 결국 해방이 되었을 때 ‘조선’의 이름으로 무장투쟁한, 즉 초기 청산리 전투처럼 ‘대한’의 이름으로 싸운 독립운동이 거의 없게 된 겁니다. 상해임시정부가 마지막으로 500명을 조직해 광복군을 만들었지만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도 한 번 못해보고 일본이 항복해 버렸습니다. 우리에게는 독립운동을 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이것이 ‘대한’ 또는 ‘조선’의 이름으로 투쟁하지 못했다는 것이 전후 독립을 하는데 결국 큰 약점이 되었습니다. 러시아 연해주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은 소비에트의 적군에 소속되어 참여했고, 여기 만주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은 동북항일연군에 소속되어 참여했기 때문입니다. 

 

일본이 패망하자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를 서로 차지하려고 했고, 결국 한반도를 38선을 경계로 잘라서 반반씩 나누어 무장해제를 하고, 신탁통치를 하고, 그래서 남쪽에는 미군정을, 북쪽에는 소련군정을 실시했습니다. 미국은 친미파를 내세워야 하니 이승만을 내세우고, 소련은 친소파를 내세워야 하니 김일성을 내세우고, 이렇게 해서 강대국이 내세운 정권이 각각 들어서게 됐습니다. 결국 독립을 했다 하더라도 분단이 되어 서로 주도권 다툼을 하다가 북한의 공격으로 6.25 전쟁이 일어났고 그래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이렇게 오늘날 분단의 원인은 앞서 전개된 독립운동과 관련이 있습니다. 해방 이전의 어떤 내용들이 해방 이후의 어떤 결과들을 만들어 냈다는 얘기에요. 지금 우리가 이렇게 미일, 미중의 강대국 사이에 계속 자충수를 두는 이유도 결국은 이 분단의 조건들 때문입니다. 변화된 시대에 계속 자충수를 두게 되어 남북 간의 분쟁이 지속화되면 앞으로 새로운 100년도 분열과 고통의 위험이 계속되게 됩니다. 그래서 이것을 막아내는 것이 우리들의 앞으로의 과제입니다.”

 

스님이 던져 준 새로운 100년의 과제에 대해 청년들은 뜨거운 박수갈채로 화답했습니다.

 


 

오늘은 러시아에서 새벽 1시에 기상해서 아침부터 염주성의 갈대숲을 걸었고, 또 국경을 넘어 오느라 다소 무리한 일정을 가졌습니다. 스님은 피곤한 기색의 청년들을 배려해서 평소보다 일찍 강연을 마쳤습니다. 

 

내일은 새벽 3시에 기상해서 4시에 연길 시장에서 아침식사를 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오전에 청산리 전투터와 대종교 3인묘, 일송정을 참배하고, 오후에는 도문으로 가서 두만강을 따라 북한 국경변을 바라본 후 봉오동 전투터까지 참배하고 다시 연길시로 돌아올 예정입니다.

 

※ 동북아 역사기행 기간 동안 발행되는 글은 참가자들의 도움으로 작성됩니다. 오늘 글의 스케치는 <이진>님이, 강연 정리는 <김재우>님이, 사진촬영은 <권성준>님이 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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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의 통일을 발원하면서 러시아 연해주의 독립운동 성지 '신한촌'의 역사 회복과 재건을 위한 대중 여러분들의 후원금을 받습니다. 소정의 기금 출연으로 역사 회복에 동행하는 마음과 정성을 함께 모아 주시기 바랍니다.

 

- 계좌번호 : 국민은행 578601-01-272869

- 예금주 : (사)좋은벗들 

전체댓글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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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소리

교과서나 제도권 역사 교육에서는 배울 수 없었던 역사를 스님께 배울수 있어서 감사한 마음 뿐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2016-08-25 00:38:26

자라나는 청년

참 다행입니다. 이러한 역사와 사실을 알고 공부를 하고 사회생활을하고 결혼을하고 자식낳아 키우면 지금까지와는 뭔가 다른 사회구성원이 될것 같습니다, 법륜스님을 만난것이 행운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2016-08-18 13:57:56

오유진

스님은 같은 길을 가시는데도 얼굴표정과 걸음걸이가 참 신나보입니다. 이글을 읽고 보는 저도 덩달이 신납니다. 감사합니다~~♡♡

2016-08-18 01:5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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