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청산리전투터 ► 대종교 3인묘 ► 일송정 ► 도문 ► 한반도 최북단
2016.8.16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 4일째 "발해의 역사"


 

안녕하세요? 오늘은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을 시작한 지 4일째 날입니다. 스님은 청산리 전투터를 시작으로 대종교 3인묘, 일송정, 도문을 지나 한반도 최북단까지 청년들을 안내했습니다. 저녁에는 발해사에 대해 강의를 했습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새벽 3시가 조금 넘자 스텝과 조장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청년들을 깨우기 시작했습니다. 방문이 하나 둘씩 열리면서 가벼운 옷차림을 한 청년들이 숙소 로비 1층에 모였습니다.

 

오늘 아침은 러시아에서와는 달리 다르게 조별로 새벽시장에 가서 먹을 만한 것들을 직접 사서 먹기로 했습니다. 청년 역사기행단 전체가 시장으로 이동을 하고, 마치 미션을 수행하는 것처럼 조별로 흩어져서 음식을 구입하였습니다.

 


▲ 연길 새벽 시장

 

김밥, 떡, 만두, 옥수수, 과일등 한국 시장에서도 볼 수 있는 것들이 있어서 모두들 어려움 없이 음식들을 구했습니다. 조별로 옹기종기 모여서 사온 음식들을 먹으면서 이 음식은 어떻고 저 음식은 어떻다는 등 비슷하면서도 다른 것 같은 음식 맛에 대해서 얘기를 해가며 식사를 하였습니다.

 


 

잠시 후에 버스가 도착했고, 첫 번째 목적지인 청산리 전투터로 향했습니다. 스님은 “지금은 버스가 최대한 깊숙한 곳까지 들어갈 수 있어서 예전에 비해서 크게 걷지는 않는다”며 청년들을 안심시켜 주었습니다. 하지만 길이 좁고 평탄하지가 않아서 간혹 버스가 크게 흔들릴 때도 있었습니다. 

 

버스는 ‘백운평’이란 곳에 멈춰 섰습니다. 청년들이 자리를 잡아 앉았고, 청산리 전투에 대한 스님의 강의가 시작되었습니다. 

 


▲ 청산리 백운평

 

강의가 끝나고 실제로 청산리 전투가 벌어졌던 산 속으로 깊숙이 들어갔습니다. 걸으면서 이어폰에서 노래가 흘러 나왔습니다. 행진곡 같은 느낌의 노래를 들으면서 걸으니 청년들의 발걸음이 더 힘차 보였습니다. 

 


 

산속으로 들어가는 중간에 개울물을 두 번이나 만났습니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개울물이 나타나자 바지와 신발이 젖거나 말거나 씩씩하게 건너는 청년도 있었고, 최대한 조심조심 건너는 청년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얼굴은 모두가 신나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청산리 전투가 실제 벌어졌던 직소택이라는 곳에 도착해서 모두가 자리를 잡고 섰습니다. 먼저 순국선열을 기리는 묵념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기행단을 대표하여 한 청년이 나와 이곳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넋을 기리는 시를 낭독했습니다. 시 낭독을 하던 청년은 이곳에서 쓰러져간 같은 또래 청년들의 아픔이 고스란히 느껴졌는지 끝내 눈물을 흘렸습니다. 

 

“산내음과 물안개가 어우러진 이 아름다운 계곡에서

96년 전 이름없이 쓰러져간 당신들을 떠올리며 

대한민국 청년 대학생 142명이 여기 섰습니다. 

 


 

꽃다운 열여덟 그 새파란 생명 앞에서 

당신의 군복이 무슨 색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펜이 쥐어져야 할 그 보드란 손 앞에서

당신의 그 총이 조국을 위한 것인지 

조국에 의한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살기위해, 조국을 살리기 위해

내 친구일 수 있는 말 다른 낯선 이를 죽여야만 했던

그 시대의 ‘당신’ 앞에

그저 일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며 살아온 ‘우리’는 

하염없이 미안해집니다. 

 

손 떨리며 너를, 나를 죽여야 했던 

그 아픔 이젠 잊으소서. 

조국의 이름 아래 마음 절절히 맺힌 

그 분노 이젠 잊으소서. 

낯선 땅에서 부모 형제 그리워하며

이름없이 쓸쓸히 쓰러져간 

그 슬픔 이젠 잊으소서. 

피흘리며 쓰러짐에도 가해자라 욕 받는 

그 서러움 이젠 잊으소서. 

 

이 모든 아픔, 이 모든 슬픔이 

날줄되고 씨줄되어

얽히고 엉켜버린 우리네 이 역사

이제 여기 선 저희 142명의 청년 대학생이

한 올 한 올 고이 풀어가겠습니다.  

 


 

바위에 스며있는 당신의 붉은 피가 

풀잎에 아롱진 당신의 눈물이 

바람결에 전해지는 당신의 한숨이 

이제 모두 잊고 자유로이 훨훨 날아가소서.”

 

청산리 전투를 하면서 독립운동가들이 느꼈을 수많은 감정들이 고스란히 시 한편을 통해 느껴졌습니다. 독립운동가라고 하지만 사실은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꽃다운 나이의 20대 청년들이었을 것입니다. 많은 청년들의 가슴에도 적지않은 울림이 있었다는 것을 붉어진 눈시울을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스님은 “우리의 독립운동가 뿐만 아니라 징집된 일본군인과 민간인 희생자 모두의 넋을 함께 기려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또한 더 나아가 동양 평화를 넘어 세계 평화를 위해서라도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한다고 당부했습니다. 

 

이어서 방문한 곳은 대종교 3인의 묘와 발해의 두 번째 수도였던 중경현덕부 유적지입니다. 대종교 3인의 묘는 사람 키보다 더 높은 옥수수밭을 가로 질러서 조금 올라가니 언덕에 아주 정갈하게 모셔져 있었습니다. 묘 주변에 충분한 공간이 있었기에 청년 기행단 모두 묘 주변에 서서 다함께 큰 절로 인사를 했습니다. 

 


 


▲ 대종교 3인묘

 

발해 중경현덕부 유적지는 현재 발굴이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안에 들어가 볼 수는 없었지만 먼발치에서나마 그 규모를 짐작해볼 수는 있었습니다. 발해 중경현덕부는 현재 ‘서고성’이라고 불리우고 있었는데, 서고성의 북쪽 성벽 앞에 선 기행단을 향해 스님이 간단히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 발해의 중경현덕부

 

“여기가 발해 중경현덕부인 서고성의 북쪽 성벽입니다. 발해는 첫 번째 왕이 고왕인 대조영이고, 두 번째 왕이 무왕인 대무예이고, 세 번째 왕이 문왕인 대흥무입니다. 발해는 3대 문왕 때 구국인 돈화에서 이곳 화룡골로 이사를 왔습니다. 이사를 온 이곳이 중경현덕부입니다. 왜 이사를 왔을까요? 돈화보다 화룡이 훨씬 더 따뜻합니다. 화룡은 돈화보다 기온이 평균 2도가 더 높을 정도로 아주 따뜻하고 벼농사도 잘 되었기 때문입니다. 돈화는 냉해를 입기가 쉬웠거든요. 

 

중경현덕부가 있었던 위치가 어디인지 아무도 몰랐는데, 이곳에는 ‘동고성’과 ‘서고성’이 있었어요. 동쪽에 옛날 고성이 있다고 해서 ‘동고성’, 서쪽에 옛날 고성이 있다고 해서 ‘서고성’이라고 오래전부터 불렀는데, 이 서고성이 중경현덕부라고 밝혀졌습니다. 이곳이 바로 중견현덕부가 있었던 자리이고 지금 한창 발굴 중에 있습니다. 

 


 

예전에는 이곳에 마을이 있었어요. 마을 주위에는 전부 논이었습니다. 10여년 전에는 저희들이 마을과 논 안으로 들어와서 여기가 중경현덕부 자리라고 하면서 성벽의 일부를 보고 갔는데, 발굴이 시작되면서 여기 있는 마을을 다 철거해서 밖으로 내보내고 출입금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안에는 들어가 보지 못하고요. 밖에서 성벽과 푯말만 잠깐 보겠습니다.” 

 

설명을 마친 후 스님은 청년들과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간단히 설명을 듣고 버스로 돌아가는데 하늘을 보니 비가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이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습니다. 아니다 다를까 버스가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나기가 매섭게 내렸습니다. 뜨겁게 느껴졌던 주변이 한순간에 식는 것이 느껴졌고, 버스 안에서 비내리는 바깥 풍경을 보는 것도 처음 느껴보는 모습이었습니다.

 


▲ 비오기 직전 먹구름이 잔뜩 낀 모습

 

다음 목적지는 용정에 있는 일송정이었습니다. 이곳에 도착해서도 비는 계속 내렸습니다. 청년들은 미리 준비한 우비를 입고 일송정으로 올랐습니다. 정상에 올라 주변을 둘러보니 가슴이 뻥 뚫리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드넓은 들판과 저 멀리 보이는 산세는 탄성이 나오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 일송정

 

‘일송정 푸른 솔은~’ 으로 시작하는 선구자라는 노래가 있는데, 이 노래의 일송정이 바로 이곳이었습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중국까지 와서 독립 운동을 해나가고 있었지만, 자유시 참변으로 인해 통합 독립군은 와해되고 일본의 탄압은 더 거세지면서 독립운동에 어려움을 겪게되자 답답한 마음에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이 노래를 모르는 청년들을 위해서 실제 어떤 노래인지 한 청년이 하모니카로 반주를 하고 다른 한 분이 직접 노래를 불러주었습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가운데 하모니카 소리 위에 읊어지는 목소리는 애잔함과 감동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 당시 선조들의 마음을 작게나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어서 청년 기행단 모두가 ‘고향의 봄’ 노래를 부르며 고향을 그리워했던 선조들의 마음도 느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어느덧 점심 시간이 가까이 다가왔고, 용정 시내로 냉면을 먹으러 갔습니다. 시내에 들어가자마자 용문교과 용두레 우물도 볼 수 있었습니다. 

 

청년들이 식당에 들어서자, 한꺼번에 들이닥친 손님들이어서 그랬는지, 그곳의 종업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였습니다. 하나둘 자리가 생기면서 조별로 둥그런 식탁에 자리를 잡고 앉아 냉면이 나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잠시후 냉면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냉면 위에 올려진 수박이었습니다. 평양식과 함흥식 냉면과는 또 다른 맛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 용정 냉면

 

점심을 먹고 다음 목적지인 도문으로 향했습니다. 도문은 중국과 북한의 국경 지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버스는 두만강을 옆에 두고 계속 달렸습니다. 강 건너 북한의 모습은 평화로워 보였습니다. 청년들 모두 창밖의 두만강과 북녘땅을 하염없이 쳐다보았습니다. 

 


▲ 두만강

 

그리고 도문으로 가는 중에 월청진 마패촌에 내려 잠시 마패 24개석을 보았습니다. 특이한 점은 대부분의 24개석이 3줄씩 8개인데 이곳은 4줄씩 6개였습니다. 스님도 “이곳에 24개석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답사는 처음”이라며 “4줄씩 6개인 것이 가장 특이하다”고 했습니다. 

 


▲ 마패 24개석

 

곧이어 도착한 곳이 조중 우호교입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마침 북한에서 트럭 두 대가 다리를 건너오고 있었습니다. 다리 위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막대기가 세워져있었는데, 중국쪽 다리는 그 막대기의 색이 흰색으로 되어 있고 북한쪽 다리는 그것이 파란색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 조중우호교. 북한 쪽에서 트럭이 나오고 있는 모습

 

청년 기행단은 그곳에서 북녘땅을 배경으로 사진 촬영을 한 후에 한반도의 최북단으로 향했습니다. 계속해서 버스는 두만강을 옆에 두고 달렸습니다. 두만강과 들판 그리고 그 뒤에 있는 산들이 절경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버스에 탑승한 청년들 모두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에 스님이 “저곳이 바로 한반도의 최북단이예요. 북위 43도인 함경북도 온성군 풍서리입니다.”라고 알려주셨습니다. 그곳은 두만강이 이어지다가 동그랗게 북쪽으로 휘어지는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 한반도 최북단. 함경북도 온성군 풍서리

 

버스는 온 길을 다시 돌아서 달렸고, 다음 목적지인 봉오골 반일전적지로 향했습니다. 봉오동 전투 기념탑은 봉오골 중턱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버스에서 내린 청년 기행단은 기념탑 앞에서 스님으로부터 봉오동 전투에 대해 설명을 들었습니다. 

 


▲ 봉오동 전투 기념비

 

봉오동 전투가 있기까지의 배경과 과정, 이후에 미친 영향에 대해 스님은 한 눈에 알 수 있게 짚어 주었습니다. 

 

“1919년 3.1운동이 쇠락해질 때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이제 무장 투쟁을 해야 되겠다’라고 결심하고 그 해 가을부터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곳은 북봉오골입니다. 앞산 너머에는 남봉오골이 있습니다. 북봉오골의 전체 골짜기를 최진동, 최운산, 최치흥 삼형제가 개간을 해서 일구었습니다. 아마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세 분 다 청나라 군대에서 관리를 했었어요. 그래서 이 지역 전체에 대한 개발 허가를 받아서 하동, 중동, 상동 세 개의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고 합니다. 이 분들이 청나라 군대에서 나올 때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을 일종의 사병처럼 함께 데리고 나왔는데, 이때부터 이곳이 독립군의 근거지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수백 명 정도의 병력을 갖고 있는 가운데 농사도 짓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1920년 4월에 러시아에서 4월 참변이 일어나자 홍범도 장군이 이곳으로 넘어와서 최진동 삼형제의 후원을 받아서 군사적인 책임을 맡게 됩니다. 6월에는 소규모 부대를 갖고 국경을 넘어 삼둔자라는 곳에서 일본군 초소를 공격했습니다. 그러자 수비병이 추격해 왔고, 다시 두만강을 건너서까지 추격해 왔습니다. 이 때 사람들이 후안산에서 회의를 하고 있는데 일제 추격병들이 들이닥쳤습니다. 거기에 독립군들이 있는 줄 모르고 방문을 열고 들어왔는데, 이들을 독립군들이 다시 공격을 해서 여기서 전투가 붙었습니다. 즉 6월 4,5,6일 3일 동안 이미 소규모의 전투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벌어졌는데, 이렇게 되니까 본거지 점령을 위해서 일본군은 대대 병력을 데리고 6월 7일에 봉오골 골짜기로 쳐들어왔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독립군들은 하동, 중동, 상동 마을을 다 비워 놓았습니다. 일본군들은 하동에 독립군들이 없으니까 중동으로 올라오고, 중동에도 없으니까 상동까지 올라온 겁니다. 상동은 협곡이면서 아주 좁게 되어 있었어요. 이 때 매복해 있던 독립군이 일본군을 기습 공격해서 일본군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었습니다. 300여 명이 공격했는데 일본군 157명이나 전사를 했으니 절반 이상을 사망하게 한 전과를 올린 곳이 봉오동 전투입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서 일본군은 본격적으로 사단 병력을 데리고 와서 독립군 토벌을 하게 되었고, 그 명분을 얻기 위해서 훈춘사건을 만들게 되고, 그로 인해 독립군들도 모두 백두산 쪽으로 몸을 옮기게 되고, 그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 청산리 전투입니다.”

 

스님의 설명이 끝나자 몇몇 분들이 탑 앞에서 인사를 올렸고, 청년 역사기행단은 아래쪽에서 반배로 인사를 대신했습니다. 

 


 

오늘의 일정을 모두 마치고 연길에 있는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숙소로 돌아와서 저녁식사를 하고 잠시 휴식을 취한 후에 스님의 강의가 시작되었습니다. 오늘은 ‘발해의 역사’에 대한 스님의 설명이 있었습니다. 

 


 

내일부터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용천부를 비롯해 발해 유적지를 주욱 둘러보게 되는데, 스님의 강연은 내일 기행에 소중한 영양분이 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특히 스님은 발해가 멸망하게 된 과정을 설명하면서 발해의 역사를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고 계승하는지 여부가 남북의 통일에도 많은 시사점이 준다고 강조했습니다. 

 

“옛 고구려의 영토는 발해가 다 차지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발해는 698년에 건국되어서 926년 요나라에게 멸망하기까지 229년 동안 유지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큰 제국이 왜 그렇게 제대로 싸워보지 못하고 요나라한테 순식간에 멸망했을까요? 

 


 

고구려의 경우는 수나라, 당나라의 침공을 막아내기 위해 거의 70년 전쟁을 하면서 결국 망했는데 이 대제국인 발해는 한 번에 멸망한 겁니다. 그래서 일부 학자는 발해가 멸망한 그 시점에 백두산이 대폭발을 해서 그 먼지가 태양을 감싸 곡식에 흉년이 들어서 망했다고 주장하는 일본 학자도 있어요. 왜냐면 그 재가 일본 지층에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유추를 하기도 합니다. 확실한 것은 발해는 철저히 파괴 되었습니다. 역사가 제대로 남은 것이 없어요. 만약에 발해가 멸망할 때 당나라가 강성했으면 발해와 관련된 자료가 당나라의 기록에 남아 있을텐데 발해보다 당나라가 먼저 멸망했어요. 그리고 당나라 다음에는 5대 10국이라는 혼란기가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면 신라에서라도 제대로 기록했으면 좋았는데 그때 신라도 제 코가 석자였어요. 후삼국이 일어나서 936년에 신라가 망하고 발해는 10년 전에 망했지만 그때 신라는 있으나마나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니 누가 발해를 도와줄 수도 없었어요.

 

누가 발해를 위협한 것도 아니고 태평성대로 지내다가 서쪽에서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가 갑자기 힘의 공백기에 일어났던 겁니다. 새롭게 일어난 요나라는 발해를 제일 먼저 쳐서 멸망시켰습니다. 서쪽에 있던 부여성은 거란과의 교통요지였는데, 이 부여성이 며칠 만에 함락되었어요. 그리고 대군이 공격해 와서 바로 상경용천부가 함락되었던 겁니다. 왕이 항복했던 거지요. 태평성대를 거치면서 그만큼 나약해졌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역사적으로 어떻게 이렇게 손쉽게 망했느냐 싶었기 때문에 백두산 폭발설까지 제기된 것이지요.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는 점점 강성해져서 제 민족을 통합해서 발해를 멸망시키고 북방의 대제국을 건설하고 송나라와도 싸웁니다. 북경까지 계속 영토를 확보해서 송나라를 압박하고 고려와도 갈등을 빚었습니다. 결국 발해는 요나라한테 망했고, 발해의 부흥군들이 거의 200년간 요나라에 저항했지만 독립을 쟁취하지는 못했습니다.

 


 

발해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고구려의 흔적을 발견하게 됩니다. 발해는 고구려의 후계자였습니다. 민족사의 전통사적 측면에서 고구려의 후계자였습니다. 그러나 발해의 후계자가 끊어지면서 역사의 단절이 생겼어요. 

 

우리의 역사를 살펴보면 신라로부터 내려오는 것은 아귀가 맞는데 신라 이전의 역사에는 단절이 있어요. 이것이 고구려로 연결이 되어야 앞으로는 환인 환웅 단군까지 연결이 되고, 뒤로는 고려로도 연결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통일신라와 발해를 따로 보지 말고 남북국 시대로 봐야 합니다. 즉, 발해도 통일신라도 다 우리의 역사로 같이 봄으로써 역사적 단절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남북한이 통일이 될 때도 똑같이 안는 문제입니다. 그런데서 우리가 큰 역사인식을 가지고 통일문제를 다루어야지 현재의 감정과 이해만 가지고 다루게 되면 한편으로는 현실적인 승리를 할지라도 장기적으로는 민족사의 큰 왜곡을 가져오게 됩니다.

 


 

또 너무 민족사만 보지 말고 크게 문명사적으로 보면 원나라, 금나라, 요나라, 청나라 모두 우리 역사의 일부라고 볼 수 있습니다. 동북 민족의 역사로 봐야합니다. 동북 민족인 우리들의 갈래가 순번을 바꿔가며 만주를 지배했던 것입니다. 발해까지는 우리민족이, 그 다음에는 거란족이, 여진족이, 몽골족이, 만주족이 순번을 바꿔가며 차지했다는 관점입니다. 조금 더 문명사적으로, 다시 말하면 우랄알타이어족과 차이나티벳어족의 상호 협력과 경쟁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민족사의 폭을 넓힐 수 있겠지요. 그렇게 되면 너무 좁게 내 민족만 생각하는 배타성을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마지막에 동북 민족의 역사라는 큰 눈으로 보는 시각이 필요하고 그렇게 해야 배타성도 극복할 수 있다는 말씀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습니다. 청년들은 열정적으로 강연을 해준 스님에게 큰 박수로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내일은 발해 시대의 대표적인 절인 흥륭사를 시작으로 상경용천부와 동모산 등 발해 유적지를 집중으로 돌아볼 예정입니다. 

 

※ 동북아 역사기행 기간 동안 발행되는 글은 참가자들의 도움으로 작성됩니다. 오늘 글의 스케치는 <지형준>님이, 강연 정리는 <신인정>님이, 사진촬영은 <권성준>님이 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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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의 통일을 발원하면서 러시아 연해주의 독립운동 성지 '신한촌'의 역사 회복과 재건을 위한 대중 여러분들의 후원금을 받습니다. 소정의 기금 출연으로 역사 회복에 동행하는 마음과 정성을 함께 모아 주시기 바랍니다.

 

- 계좌번호 : 국민은행 578601-01-272869

- 예금주 : (사)좋은벗들 

전체댓글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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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선

시가 참 좋군요...여기 참여한 젊은이들이 미래의 우리 민족의 지도자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_()_...!!!

2016-08-21 18:03:54

오유진

감사합니다 ~~♡♡

2016-08-19 01:25:05

박귀봉

스님 고맙습니다 덕분입니다

2016-08-18 20: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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