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6.8.11 (통일의병) 동북아 역사기행 7일째
“청산리 전투터, 대종교 3인묘, 일송정... 독립운동 유적지를 찾아”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동북아 역사기행 7일째를 맞이하여 청산리전투터, 대종교 3인묘, 일송정 등 독립운동 유적지를 둘러보고 ‘조선족의 이주 역사’에 대해 강연했습니다. 

 

오늘은 평소보다 이른 3시 30분에 일제히 기상했습니다. 아침 식사는 연길의 새벽 시장에 가서 하는 것으로 하고 4시까지 버스에 짐을 싣고 연길 새벽 시장으로 향했습니다. 시장에는 두부, 야채, 어류, 과일 등 없는 것이 없었습니다. 식사를 하고 시장을 볼 수 있도록 허용된 시간은 30분, 서둘러 식당에 들어가 아침을 먹고 간식거리를 구입해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오늘 첫 방문지는 청산리 전투터입니다. 햇살이 강하게 내리쬐는 무더운 날씨 속에 역사기행단은 산으로 난 비포장 도로를 달려 청산리 백운평에 도착했습니다. 백운평은 청산리 전투에서 패한 일본군이 후퇴를 하다가 화가 나서 무고한 양민을 학살한 마을이 자리했던 터입니다. 지금은 사람의 흔적이 없고 잡초만 무성한 쑥대밭이 되어 있었습니다. 

 


▲ 청산리 백운평

 

대중이 모두 백운평 한쪽 기슭에 자리하자 스님은 그 때의 정황을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당시 독립군 부대는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부대와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부대, 이렇게 두 축이 있었어요. 홍범도 부대는 와룡 계곡으로 해서 완루구 쪽으로 올라가기로 했고, 김좌진 부대는 청산리 쪽으로 올라가기로 했어요. 왜냐하면 한꺼번에 가다가는 습격당하기 쉬우니까요. 김좌진 장군이 도착한 이곳 백운평 마을에는 20여 호의 조선족이 살았다고 해요. 여기서 주민들한테 식사를 요청해서 밥을 먹고 밤에 이 산길로 피신을 해서 올라갔습니다. 추격을 하던 일본군 300여 명이 여기에 도착해 보니 독립군들이 지나간 지 얼마 안 되었던 겁니다. 이 길로 간 이유는 당시에는 이 길이 백두산으로 가는 최초로 난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부터 한 2km 정도 올라가면 물이 곧바로 떨어지는 협곡이 있는데 그것을 동네 사람들은 ‘직소택’이라고 불렀습니다. 협곡이 나오니까 김좌진 장군은 ‘도망만 갈 게 아니라 여기서 매복을 해서 공격하자’고 한 겁니다. 일본군이 무기가 아무리 좋아도 밤인데다 협곡에다가 기습을 당했으니까 적게는 200명, 많게는 300명 정도의 사망자를 내고 후퇴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천수평이란 곳에서 일본군이 야영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기습공격을 가하여 기마병 120명이 전멸하고, 그들이 갖고 있는 무기도 포획하고, 군사기밀도 알아내서 어랑촌에 본대가 진주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봉오동 전투에서 매복해서 승리했듯이 이번에도 추격해오는 부대를 공격했고, 일본군 지원군이 도착했지만 밤이 깊어서 일본군들 저희끼리 또 밤새도록 총질을 하며 싸우면서 사상자를 더 많이 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21일부터 26일까지 이곳 청산리 일대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전투에서 일본군 사망자와 부상자가 3천 5백여 명이 되었다고 합니다. 한 개의 사단 병력이 1만2천 명 되니까 4분의 1이 넘게 타격을 받은 겁니다. 이것은 작은 유격부대가 당시 세계 최강의 일본 정규군에게 승리한 거니까 이것은 당시 조선에서 3.1운동의 탄압으로 인한 패배로 실의에 빠져있던 조선 백성들한테는 엄청난 희망의 소식이 되었던 겁니다. 

 

일본군 정규군에게 처음으로 승리한 게 봉오동 전투라면 청산리 전투는 굉장히 큰 규모의 승리이기 때문에 조선에 더욱더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청산리 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들이 후퇴하면서 화가 나니까 백운평 마을에 있는 20여 채의 집에 불을 질러버리고 집에서 뛰쳐나오는 사람들을 전부 총으로 쏴서 전멸시켜버렸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질 수 있었던 이유는 동네 사람 한 분이 전 날 다른 동네에 볼 일이 있어서 갔다가 아침에 와보니까 동네가 다 불타버리고 다 죽어 있는 모습을 봤기 때문입니다. 이 외에도 일본군이 화가 나서 학살한 민간인이 3600여 명이라고 하고, 불태워진 집이 3500여 채이고, 곡식을 불질러버린 게 6만 여 섬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경신참변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전쟁에 승리했다는 것만 생각할게 아니라 민간인 입장에서는 어떤 희생이 있었는지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여기에 살던 조선족들 입장에서는 나라가 자기들을 보호해준 것도 아니고, 나라의 핍박을 받다가 건너와서 맨주먹으로 개척해서 살았을 뿐이거든요. 그런데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고 하기에 자기들은 아들도 독립군으로 보내줬지, 양식도 대줬지 그런데도 돌아온 것은 전 재산이 소실되고 가족이 학살당하는 그런 피해를 입은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청산리 전투를 생각할 때 늘 ‘승리했다’, ‘김좌진 장군’ 이런 것만 생각하면 안 돼요. 이 땅에 있었던 무수히 많은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희생 위에 일어난 일들이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들의 후손들이 바로 연변에 살고 있는 조선족들인데, 지금 우리가 좀 잘 산다고 그들을 차별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이런 역사를 모르니까 그런 차별이 발생하는 거예요.”

 

잠자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일본군들의 총칼 앞에 목숨을 잃었을 조선족 민간인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련해졌습니다. 선조들의 희생이라는 기반 위에서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존재하고 있는 것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설명을 마친 후 스님이 “백운평에서 죽은 민간인 100여명의 원혼을 기리며 묵념을 하자”고 제안해서 다함께 묵념을 했습니다.  

 


 

이어서 청산리 전투가 벌어졌던 직소택이라는 곳까지 왕복 4km를 함께 행군했습니다. 땀으로 옷이 젖고 등 뒤로 햇살이 뜨겁게 비추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일렬로 줄을 서서 행군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스님은 “의병이 되려면 이 정도 훈련은 해야지” 하며 선두에서 행군을 이끌었습니다. 

 

예전에 독립군들도 이 길을 따라 올라갔을 것을 상상하며 걷고 있는데, 갑자기 얼음처럼 차가운 개울이 나타났습니다. 신발을 벗고 건너기에는 물살이 세어서 스님은 “그냥 신발 신고 건넙시다” 하며 앞장을 섰습니다. 물살에 밀려 넘어지려고 하면 서로가 버팀목이 되어 주며 150명 모두가 무사히 개울을 건넜습니다. ‘독립군들도 이렇게 서로 의지하며 지냈겠구나’ 헤아려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모든 대중이 직소택에 다다르자 스님이 짧게 직소택에 대해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 청산리 전투가 벌어졌던 직소택

 

“이곳이 청산리 전투가 벌어졌던 직소택이라는 곳입니다. 이 협곡에 독립군이 매복을 하고 있다가 쫓아오는 일본군을 공격했습니다. 이곳은 또한 해란강의 원류입니다. 여기서 전투가 벌어졌기 때문에 저희들도 이곳까지 와서 독립군들에게 인사를 드리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해서 이렇게 온 것입니다. 힘들었지만 잘 왔죠?” 

 

대중들도 “네” 하고 힘차게 대답했습니다. 이어서 이곳에서 숨져간 호국 영령들에게 간절한 마음을 담아서 편안하게 계시라는 뜻으로 묵념을 했습니다. 

 


 

더불어 해탈주 일 편을 함께 독송했습니다. 무참하게 학살된 수많은 양민들, 나라로부터 보호받지 못했지만 독립군들을 후원하고 아들 딸들을 독립군으로 보냈고, 자신들의 재산마저 다 불타버리는 고통을 겪었던 수많은 이주민들, 일본에서 태어나 군국주의에 의해 징집되어 이 먼 곳에 와서 비명횡사한 일본의 젊은 청년들을 모두 생각하며 이곳에서 고이 잠들길 기원해 봅니다.   

 

산길을 내려온 역사기행단은 이제 북간도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던 용정으로 향했습니다. 용정으로 가는 길에 대종교 3인묘를 먼저 참배했습니다. 

 


▲ 대종교 3인묘

 

참배를 하는 도중 대중교 3인 중의 한 분인 나철 선생이 1916년에 서거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올해가 서거 100주년이 되는 해인 것입니다. 오늘 역사기행단이 묘소를 참배할 수 있게 된 것이 더욱 뜻깊게 다가왔습니다.  

  

이곳에 영면한 세 분의 무덤 비석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반일지사 나철, 서일, 김교현은 20세기 전반기에 동북지구에서 한때 화룡시 청파호를 기지로 반일 계몽 운동과 반일 교육 활동을 진행하였다. 그들은 민중의 반일의식을 높이고 인민의 반일사상각오를 높이기 위하여 많은 일들을 하였으며 반일 무장투쟁을 준비하고 전개함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서일이 령도한 <북로군정서> 소속의 반일무장부대와 <국민회> 소속의 반일무장부대가 1920년 10월 화룡지구에서 협동 작전을 한, 국내외에 널리 알려진 ‘청산리 전투’는 일본 침략군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으며 반일 운동이 깊이 있게 전개되도록 힘있게 추동하였다.”

 

무덤 앞에서 다함께 절을 하면서 그 넋을 기렸습니다. 이분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오늘날 우리가 해야 할 역할을 다시 되새겨 봅니다. 

 


 

용정으로 향하는 도로 위를 한참 달려가고 있는 가운데 차창 밖으로 비암산과 일송정이 보였습니다. “저기 산 위에 정자가 보이시죠? 저것이 일송정입니다.” 스님의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습니다.  

 


▲ 일송정

 

일송정에 올라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당시 이곳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선조들의 마음을 잠시 느껴보았습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고향을 떠나 낯선 중국 땅에서 어렵게 생활하면서도 조선 민족의 기개를 놓치지 않았던 그분들의 마음을 노래로 표현한 ‘선구자’를 다함께 부르니 가슴은 더욱 애잔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용정 시내에 접어들자 ‘선구자’ 노래에 나오는 용문교가 가장 먼저 기행단을 반겼습니다. 삼거리에서 좌회전을 하는 도중에는 용두레 우물도 창밖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 용두레 우물

 

용정 시내에서는 냉면으로 유명한 맛집에서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그릇이 얼마나 큰지 양이 한국 것의 두 배는 되는 것 같았습니다. 빈그릇 운동을 하기 위해 대중들은 2인당 한 그릇씩 시켜먹기도 하면서 알뜰하게 식사를 해결했습니다.  

 


 

다음은 중국과 북한의 국경 지대인 ‘도문’으로 향했습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동쪽에 위치한 도문시는 변경도시로서 북한이 고난의 강행군 시기를 겪을 때 수많은 탈북자들이 이곳을 통해 국경을 넘어왔다고 합니다. 지금은 철조망이 높게 드리워져서 경계가 삼엄해졌지만, 당시에는 대낮에도 초병의 눈을 피해 도강을 하는 탈북자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 두만강

 

중국과 북한을 연결하는 조중우호다리 앞에서 1990년대 후반 탈북자들이 겪었던 처참한 아픔에 대해 설명을 들은 후 간단히 기념사진을 찍고 다시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 조중우호다리 

 

이제 역사기행단은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 도시 ‘훈춘’으로 향했습니다. 훈춘은 중국에서의 마지막 여정입니다. 도문에서 훈춘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는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대중들은 그동안 역사기행을 하며 궁금했던 점들에 대해 틈틈이 스님에게 송수신기로 질문을 했고, 스님은 다양한 질문에 대해 답변을 들려주었습니다.  

 

훈춘에 도착해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권하해관’입니다. 권하해관은 중국과 북한 사이를 이어주는 세관 중 두만강의 최하류에 위치한 곳입니다. 강 건너 북한쪽은 라선시 원정리입니다. 중국의 물류는 이 권하해관을 통해 라진항으로 연결된다고 합니다. 

 


▲ 권하해관에서 바라본 북한 원정리 세관

 

버스에서 내린 대중들은 철조망 앞에 서서 북한 원정리 세관과 신두만강 대교를 바라보았습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어서 북녘 동포들에 대한 생각에 더욱 애잔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다음은 고구려 시대 때 쌓았던 성인 ‘책성’에 가보았습니다. 훈춘시의 외곽에 위치한 ‘고성촌’이라는 마을에 고구려 성벽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해서 찾아갔습니다. 

 

스님은 “10여 년 전에는 이곳까지 역사기행을 다 왔었다”고 설명하면서 10여 년 전보다 더욱더 많이 훼손되어 있는 모습에 안타까운 마음을 내비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성벽 위에 옥수수를 가득 심은 모습을 본 대중들은 고개를 저으며 인상을 찌푸리기도 했습니다. 

 


▲ 고구려의 책성. 성벽 위로 마을 주민들이 옥수수를 가득 심은 모습.

 

고구려 책성까지 모두 보고 나니 해가 저물고 저녁이 되었습니다. 훈춘 시내에서 저녁 식사를 하면서는 버스 기사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특별 프로그램을 가졌습니다. 버스 기사분들은 심양에서 훈춘까지 7일 간의 대장정에서 기행단의 발이 되어준 분들입니다. 스님이 “이번 역사기행에서 가장 큰 공로자들이에요”라고 소개하자 대중들은 우레와 같은 함성과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이어서 1,2,3호차를 대표해서 차장님들과 조장님들이 나와 버스 기사분들에게 선물을 전달했습니다. 

 


 

버스 기사 분들과의 작별을 끝으로 지난 7일 동안의 중국 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 

 

숙소에 도착하자 훈춘에 살고 있는 조선족인 김태선씨가 꽃다발을 들고 나와 스님을 마중했습니다. 김태선씨는 5년 전 SBS힐링캠프에 출연한 법륜 스님을 보고 스님의 팬이 되었는데 작년에는 직접 한국으로 와서 달서 정토법당에서 정토불교대학을 졸업하기도 했는데, 오늘 스님이 훈춘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온 것입니다.  

 


▲ 훈춘에 살고 있는 조선족 김태선씨

 

저녁 8시 30분부터는 저녁 강연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은 항일독립운동이 가능하도록 하는 토대가 되었던 ‘조선족의 이주 역사’를 주제로 스님의 강연이 이어졌습니다. 

 


 

조선족의 이주는 북간도, 서간도, 연해주 세 곳을 중심으로 이뤄졌는데, 오늘은 그 중에서 북간도에서 이뤄진 조선족의 이주 역사에 대해 자세한 설명이 있었습니다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게 되자 많은 사람들이 해외로 나와서 독립운동을 하게 됐습니다. 왜 독립운동을 미국이나 중국 상해로 가서 하지 않고, 주로 북간도나 서간도, 연해주에 가서 했을까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이 지역들이 지리적으로 국경에 면해 있기 때문입니다. 국경에 면해 있어야 국내로 들락날락하면서 진공작전을 펼 수 있잖아요. 요즘처럼 비행기 타고 다니던 시대가 아니니까요. 두 번째는, 거기에는 이미 조선 사람들이 많이 가서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선 사람이 많이 살고 있어야 독립자금을 모으든 독립군 병사를 모으든 할 수 있을 것 아닙니까.

 


 

이런 이유로 러시아 연해주, 두만강 너머 북간도, 압록강 너머 서간도, 이렇게 세 군데에 ‘3대 독립운동기지’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미국에도 그 전부터 사탕수수 농사 지으러 가기도 하면서 샌프란시스코나 로스엔젤레스에 조선 사람들이 좀 살고 있었습니다. 특히 샌프란시스코에서 독립운동이 활발했는데, 여기까지 포함하면 ‘4대 독립운동기지’가 됩니다. 

 

그럼 당시 조선 사람들은 언제쯤 거기로 건너갔을까요? 1860년이에요. 1860년대에 대기근이 일어났을 때 평안도 사람들은 압록강을 건너가서 지금의 통화시가 있는 그 지역의 빈 공간으로 들어가서 농사짓고 살았어요. 뙈기밭 만든 솜씨를 보면 그 정도는 개간하고도 남겠지요?” 

 

“네.”(모두 웃음)

 


 

“뙈기밭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도 만드는데, 그곳은 넓은 평지인데 왜 농사짓고 살지 못 하겠어요? 그리고 연해주에는 조선 사람들이 1863년에 처음으로 이주해 온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보고 ‘이때 처음으로 조선 사람들이 이주해 갔다’고 생각하면 어리석은 거예요. 가서 살은 건 그 전에 이미 가서 살았어요. 러시아가 공식적으로 중국으로부터 연해주를 할양받은 게 1860년이에요. 그 전에는 연해주에 정부가 없었는데, 러시아 정부가 중국으로부터 연해주를 할양받은 후에 거기 사는 사람들에 대해 호구조사를 처음으로 한 겁니다. 그 첫해에 13가구가 등록을 한 것으로 기록이 돼 있다는 것이지 그 전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이주해서 살고 있었던 겁니다. 

 

여기 압록강, 두만강 주변도 이미 그 전부터 많이 건너와서 살았어요. 처음에는 아침에 넘어가서 일하고 저녁에 넘어오는 식으로 하다가 다음에는 봄에 넘어가서 가을에 추수해서 넘어오고 했습니다. 거기엔 아무도 없었을 때이니까 뙈기밭처럼 일궈서 농사지어서 가져오고 그랬던 거예요. 전에는 감시를 하니까 조심했는데, 점차 변해서 여름 내내 초막을 치고 일을 하다가 가을에 추수하면 들고 와서 겨우내 살고, 또 봄 되면 건너가서 초막 치고 살다가 넘어오는 식으로 반 년씩 산 거예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 거기 가서 농사지어 온 사람은 밥 먹고 살고, 이쪽에 남아 있는 사람은 밥도 못 먹고 사는 겁니다. 더욱이 이쪽에 남아 있는 사람은 안 내는 세금까지 내야 하니까,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건너가기 시작한 겁니다. ‘건너가면 잘 산다’는 소문이 나니까 또 한 집 건너가고, 또 한 집 건너가고 그랬던 거예요. 

 

북한 난민이 처음 생길 때 꼭 이랬거든요. 처음에는 넘어가면 죽는 줄 알고 안 넘어갔는데, 하나가 넘어갔다가 뭘 얻어서 돌아오니까 ‘와!’ 하고 놀랐다가, 그 다음에는 두 명이 넘어가고, 그 다음에는 네 명이 넘어가고, 처음에는 넘어가서 며칠 있다가 돌아오고, 일주일 있다가 돌아오고, 나중에는 여기 와서 일해 주고 돈 벌어서 돌아가고 그랬던 거예요. 이제는 여기에 붙어서 더 오래 사는 사람도 있고요. 또 ‘누가 그렇게 넘나들면서 돈을 벌었다’고 소문이 나자 자기도 돈 벌어보겠다며 먼저 넘어갔던 사람에게 돈 좀 주고 넘어왔는데, 생각보다 돈이 안 벌리니까 돌아갈 수가 없는 거예요. 빚져서 왔는데 갚을 길이 없는 거죠. 조선족이 한국으로 오게 된 과정도 똑같아요. 갚을 길이 없으니까 돌아오지는 못 하고 거기서 헤매게 되죠. 

 

북한 난민들도 왔다 갔다 하다가 중국에서 잡히면 북한으로 돌려보내져서 처벌을 받게 되니까 안 잡히려면 안전한 곳에 숨어야 되잖아요. 숨기에 제일 안전한 방법이 여자들의 경우에는 결혼이에요. 넘어온 사람 중 여자의 비율이 70~80%나 되는 이유가 그겁니다. 넘어오기는 남자가 먼저 넘어왔고, 많이 넘어왔는데, 남자는 여기 살 수 있는 근거도 별로 없고, 집에 두면 좀 위험한데, 여자는 집에 놔둬도 별로 안 위험하잖아요. 그러니 남자는 남아 있기가 어려웠던 겁니다. 또 여기엔 젊은 여자들이 다 도시로 가거나 한국으로 돈 벌러 가버려서 결혼 못한 남자가 많은데, 누구 한 사람이 ‘조선여자 소개받아서 장가갔다. 조선여자 착실하다’고 하니까 너도 나도 소개해 달라는 요청을 많이 할 거 아니겠어요? 처음에는 그냥 ‘소개해 줘서 고맙다’며 100원, 200원 준 게 ‘야, 내가 500원 줄 테니까 하나 소개해줘’, ‘천원 줄 테니까 하나 소개해 줘’ 이렇게 된 거예요. 그러다가 처녀는 오천  원, 아줌마는 삼천 원, 할머니는 천 원, 하다가 나중에는 처녀는 만 원, 아줌마는 오천 원, 할머니는 삼천 원, 이런 식으로 바뀌다가 결국 인신매매로 변질된 거예요. 이런 게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있었던 게 아니라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생겨나게 되는 거예요. 이런 현상을 소상히 보면서 ‘아, 이주가 어떻게 일어났구나’ 하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북한 난민이 처음 시작될 때부터 20년 동안 저는 전 과정을 다 지켜봤거든요. 이렇게 이주가 일어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이곳 북간도에도 제일 처음으로 국경 도시인 도문에 첫 번째 마을이 생겼습니다. 거기 일찍 온 사람들이 그 입구 쪽은 다 차지하고 있으니까 늦게 온 사람은 안으로, 안으로 들어가야 했을 거 아니에요? 그렇게 해서 용정 마을이 형성된 겁니다. 국경 가까이에 제일 들판이 넓은 곳이 용정이었습니다. 점점 마을이 많이 생기고, 마을이 넓어지니까 용정이 이 지역의 중심도시, 북간도의 중심도시가 된 겁니다. 지금은 연길이 중심도시이지만요. 

 

그리고 문익환 목사님, 윤동주 시인의 생가는 다 용정 시내가 아니고 거기로부터 조금 떨어진 명동이라는 마을이에요. 마을이 그렇게 점점 생겨나다다가 1910년 한일합방 즈음에 연해주 쪽은 벌써 인구가 몇 만 명 수준으로 늘어납니다. 그리고 여기 연변에도 인구가 10만 명 이상으로 늘어났어요. 인구는 어떤 일을 도모하는데 있어서 상당한 기반이 되잖아요. 그러니까 합방 이후에 국내에서 의병을 했거나 뜻이 있는 애국지사들은 재산을 판 돈을 가지고 여기로 와서 학교도 세우고 그랬던 거예요. ‘배워야 된다. 우리가 무식해서 나라를 빼앗겼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첫 번째로 세운 게 학교입니다. 그렇게 해서 여러 사립학교가 생겨났습니다. 1920년대에 무장투쟁을 할 때는 대부분 그 학교 출신들이 독립군으로 참여하게 됐습니다.  

 

지리적인 위치 때문에 이곳 북간도가 이주민이 제일 많았으니까 여기가 독립운동의 첫 번째 중심지가 됐고, 두 번째로 많았던 연해주가 두 번째 중심지가 됐습니다. 특히 당시엔 중국이 러시아보다 뒤처져 있다 보니까 여기는 누가 간섭하는 사람이 없다는 면에서 유리했습니다. 반면 러시아는 서구사회이다 보니까 서구의 민주주의나 러시아혁명의 영향 때문에 연해주의 경우 혁명의식이 가장 일찍 깨어날 수 있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3.1운동도 연해주에서 먼저 임시 정부를 세웠고, 먼저 주도해 나갈 수 있었던 겁니다. 연해주에서 펼쳐진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내일 러시아로 넘어가서 더욱 자세히 공부하겠습니다.

 

중국 국민 중에 200만명이 조선족이라고 합니다. 이들이 실제로는 중국 국민이기는 하지만 마음의 고향은 한국에 두고 있는 사람들이 된다면 어떨까요. 중국 사람 중에 친한파가 200만명 있다는 것은 국익에 굉장히 도움이 되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이런 사람들이 중국 안에서 출세를 하게 되면 우리에게 엄청나게 도움이 됩니다. 그러니 조선족들이 중국 안에서 출세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중요하지 조선족들을 한국에 데려와서 3D 업종에 종사해서 돈 벌도록 해주는 것이 뭐 그리 중요합니까. 그런 일들은 동남아 사람들도 이미 충분히 와서 하고 있잖아요. 

 


 

물론 일시적으로는 조선족들이 한국에 와서 돈도 벌고 하는 것이 좋을 겁니다. 그러나 중국이 점점 성장해가면 농촌이 다 비게 되는데 그러면 한족이 그 빈집에 다 들어가게 됩니다. 그렇게 조선족 인구가 줄어들면 조선족자치주도 폐지되게 될 겁니다. 그렇게 이 사람들이 한국으로 다 넘어온다고 해서 뭐가 그리 큰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러니 한국은 조선족들이 중국에서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정책을 취해야 합니다. 물론 지금은 많이 늦긴 했습니다. 그러나 20년 전에 이런 정책이 제대로 추진되었다면 조선족들의 상당수가 성공적인 기업인이 되고, 사회 지도층이 되어서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중국 안에서 가장 잘 사는 주가 되었을 수도 있을 겁니다. 

 

사실은 이런 이주 역사는 나라를 읽고 떠돌이한 비극일 수도 있는데, 좋게 보면 이들이 만약 세계 곳곳에서 뿌리를 잘 내리면 한민족의 확장이라고 볼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현재 전 세계에 나가 있는 한국 사람들이 700만 명 정도 됩니다. 앞으로 4차 산업혁명이 일어나면 영토 개념에 너무 연연하며 안 됩니다. 영토의 기반은 중요하지만 영토를 갖고 내 땅이니 네 땅이니 하기 보다는 새로운 영토 개념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네트워크입니다. 이 새로운 네트워크는 배타적 민족주의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열린 민족주의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배타적 민족주의는 독재를 합리화하는 데에 주로 쓰였는데 이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내 민족도 소중하면 다른 민족도 소중한 줄을 알아서 어떤 민족도 모두 소중하다고 여기면서 서로 협력하는 열린 민족주의로 나가가야 합니다.

 

그런데 북한은 너무 폐쇄적인 민족주의인 반면 남한은 너무 민족의식이 없어요. 서로 반반 섞이면 참 좋을텐데 말이에요. 자주 의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이웃에 대한 협력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한국 사회도 이제 단일 민족을 너무 주장할 수가 없게 되었어요. 벌써 외국인들이 200만 명이 들어와서 살고 있거든요. 10년 후에는 300만 명을 넘어설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다인종 다민족 사회로 점차 전환이 되어 나갈 겁니다. 이 때 자기 정체성이 없으면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모든 창조적인 문화는 자기 정체성이 어느 정도 있는 상태에서 외부 문화를 능동적으로 수용할 때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역사기행을 하는 이유도 단순히 과거를 알고자 하거나 민족의식을 고취하자는 차원이 아닙니다. 창조성을 갖기 위해서는 자기 정체성을 먼저 확보하고 그 위에 이웃의 좋은 점들을 수용하는 열린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역사기행을 하는 것입니다.” 

 

저녁 강연을 끝으로 오늘 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 아침에는 청산리전투터에서 독립운동이 있기까지 조선족의 많은 희생을 접했고, 저녁에는 조선족들이 어떻게 이주를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들으면서 조선족의 이민사와 독립운동사에 대해 더욱더 깊은 이해를 할 수 있었습니다. 대중들은 큰 박수로 열강을 해준 스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내일은 훈춘 시내에 있는 새벽시장에 가서 아침 식사를 한 후 점심 끼니까지 구입해서 중국 국경을 넘어 러시아로 넘어갑니다. 러시아 국경을 통과한 후에는 제일 먼저 크라시키노에 있는 발해 성터 ‘염주성’을 둘러본 후 독립운동과 발해 유적지가 많이 남아 있는 우수리스크에서 하룻밤을 자게 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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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의 통일을 발원하면서 러시아 연해주의 독립운동 성지 '신한촌'의 역사 회복과 재건을 위한 대중 여러분들의 후원금을 받습니다. 소정의 기금 출연으로 역사 회복에 동행하는 마음과 정성을 함께 모아 주시기 바랍니다.

 

- 계좌번호 : 국민은행 578601-01-272869

- 예금주 : (사)좋은벗들 

전체댓글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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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자

올바른 가르침으로 깨달음 주시는 스님께 감사드립니다.

2016-08-15 11:31:55

오유진

감사합니다 ~~♡♡

2016-08-15 01:03:09

완숙

아침부터 햇빛 눈부시게 쏟아지고 매미들이 합창을 시작 하는 지금 모두 행복한날 되시길 관세음보살(♡)

2016-08-14 09: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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