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6.6.30 정토회 해외지부 총무단 수련 1일째_통일의병대회
"신라와 가야의 합의통일은 어떤 시너지 효과를 가져왔나요?"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정토회 해외지부 총무단 수련 1일째를 맞이하여 경주 지역 일대를 순례하며 통일의병대회 및 사찰순례를 했습니다. 

 

어제 오후 베트남에서 귀국한 후 밤12시까지 평화재단에서 미팅을 가진 스님은 밤12시 30분에 서울을 출발해 경주로 향했습니다. 새벽 5시에 경주에 도착해 잠시 눈을 붙인 후 아침 7시부터 법흥왕릉을 시작으로 통일의병대회를 시작했습니다. 국내에서는 이미 1차, 2차, 3차에 거쳐서 통일의병대회를 진행했었는데, 오늘은 해외에 계신 분들만 모아서 통일의병대회가 마련됐습니다. 

 

삼귀의 반야심경으로 입재식을 한 후 스님은 누가 어디에서 왔는지 참가자 한 명 한 명을 호명하며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 법흥왕릉

 

뉴욕, 워싱턴DC, LA, 콜럼버스, 샌디에고, 벤쿠버, 워털루, 시드니, 베를린, 프랑크푸르트, 뒤셀도르프, 런던, 마닐라, 방콕 등 세계 곳곳에서 정토회를 운영하고 있는 총무님들 25명이 참석했습니다. 한자리에 모이기가 정말 어려운 분들인데 한두 명을 제외하고 대부분이 집결한 모습을 보면서 대단한 열정과 신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스님은 보통 500명이 넘는 대중들을 이끌고 경주역사기행을 안내하는데, 오늘 참석자들은 전세계에서 모인 별들의 군단인 만큼 스님도 각별한 애정을 갖고 마치 과외를 하듯이 정성껏 안내를 했습니다. 

 

첫 번째 순례지인 법흥왕릉에서는 신라와 가야의 합의통일이 가져온 시너지 효과를 소개하면서 이것이 지금의남북 통일에 시사하는 점을 설명했습니다. 

 

“법흥왕 대에 오면서 신라의 국력은 커진 반면 가야의 국력은 작아졌어요. 마치 예전에는 북한이 더 강하다가 지금은 남한이 훨씬 더 강한 것처럼, 또 북한이 강할 때 남한을 침공해서 6.25전쟁이 발발했던 것처럼, AD 400년에는 가야가 신라를 침공해서 신라가 위기에 처한 적도 있었습니다. 신라와 가야는 이웃에 있지만 그런 원한관계에 있었습니다. 신라가 커지고 가야가 작아지면서, 이웃한 둘 사이에 어쨌든 합병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면 보통 무력으로 침공하는 게 일반적이잖아요. 예를 들어 신라는 ‘과거의 원수를 갚는다’ 하면서 무력으로 침공하고, 가야는 ‘옛날에 우리보다도 못했던 놈들이 우리를 공격하다니’ 하면서 저항하고, 보통 그렇게 해서 엄청나게 죽고, 한쪽이 이기면 상대를 학살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신라의 강경세력은 ‘옛날의 원수를 갚아야 된다’고 하고, 가야의 강경세력은 ‘우리가 신라한테 절대로 굴복해서는 안 된다’라고 주장하는 게 일반적이고요. 

 

그런데 신라의 젊은층, 소위 전후세대인 온건 세력들은 ‘굳이 전쟁할 게 뭐가 있나? 가야의 요구조건을 들어주면서 서로 합의통일을 하는 게 낫지 않느냐?’고 했고, 가야의 온건세력들은 ‘어차피 전쟁해 봐야 질 건데, 끝까지 전쟁해서 인명과 재산을 날릴 게 뭐 있느냐? 우리가 꼭 필요한 요구조건을 제시해 보고, 신라에서 그것을 들어주면 합의통일을 하는 게 낫지 않느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가야에서 제시한 가장 핵심적인 요구조건은 두 가지였어요. 첫째, 가야의 왕족, 귀족들이 ‘우리를 지금 이대로 신원보증을 해달라. 신라로 통합하되 우리를 신라의 왕족으로 인정해서 신분적 차별을 하지 않도록 해달라’는 것이였습니다. 보통 무력으로 통합하면 왕족이나 귀족들은 죽이거나 노비로 삼았는데, 그러지 말고 지금과 똑같이 귀족으로서 대우해 달라는 거였죠. 우리도 만약 남한 중심으로 통합한다면 북한의 고위직을 처단하지 않고, 예를 들어 북한에서 사단장을 했다고 하면 통합군대의 사단장으로 임명한다든지 하는 식의 요구조건이 있었다는 거죠. 그런 요구를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지요. 그런데도 가야는 그런 요구를 했어요. 

 

둘째, 불교를 공인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신라는 불교가 처음 전래되었을 때부터 국가에서 불교를 금지하기 시작해서 150년 동안 철저하게 불교를 금지한 국가였고, 가야는 나라가 세워질 때부터 시작해서 그때까지 500년 간 불교국가였어요. 왜냐하면 가야 김수로왕의 부인이 인도인 아유다 공주였는데, 당시 인도 공주가 여기까지 스님들과 함께 와서 가야왕과 결혼을 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니까 요즘으로 말하면 남북이 남한으로 통합된 뒤에도 북한 출신 간부들의 신원을 다 보증해서 전과 같은 지위를 유지할 수 있게 해 주고, 공산주의 정치활동을 인정해달라고 요구하는 격이니까, 이것은 남한의 보수세력이 받아들이기 굉장히 어려울 것입니다. 신라에서도 이런 가야의 요구조건을 받아들인다는 건 쉽지 않았던 겁니다. 

 


 

그런데 결국 신라는 가야를 포용했습니다. 과거의 원한에 사무치지 않고 합의통일을 했습니다. 나라를 신라로 통일하는 대신에 가야의 요구조건을 들어준 겁니다. 이럴 때 신라가 양보했다고 보면 안 돼요. 실제로는 신라가 중심이 됐기 때문에 가야의 요구조건을 받아들였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남한 중심으로 통일하려면 북한의 핵심적인 요구조건을 수용해 줘야 된다’고 말하는 것을 ‘북한에 끌려가는 것이다’라고 비난하는 것은 전쟁하자는 얘기밖에 안 되는 겁니다. 만약 북한 중심으로 통일하겠다면 북한이 남한의 요구조건을 받아들여줘야 되겠죠. 전쟁 없이 통일을 하려면 말이에요. 어쨌든 이것이 우리 역사에서 실제 있었던 굉장히 현명한 두 나라의 통합과정이라는 겁니다. 지금 이 시대에서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델이 있다면 물론 독일 통일이겠지요. 그런데 독일의 통일은 동시대의 일이지만 남의 나라 얘기이고, 가야와 신라의 통합은 옛날 얘기지만 우리의 역사였습니다. 

 

신라와 가야의 통합은 ‘1+1’이 2가 되는 통일이 아니고, ‘1+1’이 5가 되고 10이 되는 통일을 한 거예요. 다시 말하면 가야는 낙동강 유역에 있기 때문에 물산이 풍부했고, 철기문명도 굉장히 발달했어요. 신라는 그때까지도 농기구가 대부분 석기였고요. 그런데 가야의 발달된 철기문명이 신라에 들어오면서 농업생산량이 급격히 증가하게 됩니다. 그리고 가야의 인재들이 신라에서 지도자급 인재로서 자리매김하기도 했고요. 또 영토도 동남쪽에 치우친 작은 나라였는데 법흥왕과 진흥왕을 거치면서 경상도 유역을 다 차지하고도 위로 올라가서 충청북도, 강원도, 함경남도까지 기존 영토의 3배 이상 커지는 비약적 성장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통일의 시너지 효과였습니다. 

 

이처럼 지금 남과 북도 만일 전쟁을 통해서 통일한다면 ‘1+1’이 1.5나 2가 되는 정도일 텐데, 합의통일을 한다면 우리가 중국과 적대해야 될 이유도 없고, 일본이나 미국과 적대해야 될 이유도 없기 때문에 통일한국은 주변국들과 평화적 연대를 하면서 동아시아 공동체로 나아갈 수 있는 기초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남북한이 무력충돌을 해서 통일을 하게 되면, 설사 통일을 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중국이 개입하고 그러면 우리가 중국과 적대관계가 됩니다. 그렇게 통일하면 오히려 주변국들과의 갈등이 심화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통일을 하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신라가 무력으로 삼국 통일을 했을 때와 가야와 합의통일을 했을 때의 효과가 서로 달랐거든요. 무력으로 삼국통일을 했을 때는 오히려 영토가 줄어들고, 민족사가 축소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신라 입장에서는 영토가 늘었지만 민족사 전체로 보면 줄어든 결과가 빚어진 건 전쟁을 통한 무력통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라와 가야는 합의통일을 했기 때문에 굉장한 시너지 효과를 본 겁니다. 그러니 법흥왕릉에서 이런 교훈을 배우자는 의미에서 우리가 여기까지 온 거예요.”  

 

독일 통일처럼 외국의 사례가 아니라 우리 역사 속에서도 배울점이 많다는 사실에 자부심이 느껴졌습니다. 이 부분은 역사학자들도 거의 언급하지 않는 부분인데 스님의 통찰력 있는 설명에 모두 공감하며 큰 박수를 보냈습니다. 

 

다음은 태종무열왕릉으로 향했습니다. 입구에는 이곳이 태종무열왕릉임을 알려주는 비석이 있었는데 비신은 없고 거북이를 조각한 귀부와 6룡을 조각한 이수만이 뛰어난 조각 솜씨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비신이 없는 이유에 대해 “비신은 대부분 냇가에서 빨래돌로 쓰던 것이 발견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설명해 모두 크게 웃기도 했습니다. 

 


▲ 태종무열왕릉비

 

태종무열왕릉에서는 대당 외교를 통해 삼국통일의 시초를 마련한 김춘추의 업적에 대한 스님의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 태종무열왕릉

 

“이곳은 김춘추의 무덤입니다. 김춘추는 왕이 되기 전에는 대당외교, 요즘으로 말하면 외교부장관 같은 역할을 주로 했습니다. 당태종과 담판을 지어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면 대동강 이남 땅은 신라에게 주겠다’라고 밀약을 하는 등 당나라와의 외교관계를 아주 돈독히 하는 공을 세웠고, 왕위에 오르자 나당연합군을 결성하여 백제를 쳐서 660년에 백제가 멸망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 김춘추는 삼국통일의 시작을 이룩한 분입니다. 

 

그런데 백제가 멸망하고, 이듬해에 김춘추가 죽고, 김춘추의 아들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분이 문무대왕입니다. 문무대왕이 왕위에 오른 뒤 668년에 고구려가 멸망하고, 동맹국인 당나라와 신라가 다시 전쟁이 붙어서 8년 동안 전쟁을 했습니다. 쉽게 얘기하면 한·미연합군이 북한을 점령을 했는데 미국이 북한에 독자적으로 임시정부를 수립시키고 미국이 컨트롤하는 미군정을 실시하자, 여기에 한국군이 반발해서 미군을 공격하고 한·미 간에 전쟁이 붙은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나당전쟁입니다. 8년 동안이나 전쟁을 한 거예요. 결국 미국의 한국 침공이 월남 침공처럼 성공을 못하고 결국 남한이 통일을 이룩한 형국이 신라의 통일입니다.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해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건 민족적 입장에서 비판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신라가 완전한 당나라의 주구는 아니었습니다. 당나라에 맞서서 8년 전쟁을 했고, 결국 당나라 군대를 대동강 이북으로 물리치고, 원래 약속한 대로 대동강-원산만을 잇는 국경을 확보했거든요. 이를 두고, 3국을 이뤘던 백제, 고구려가 멸망하고 신라만 남았다는 측면에서는 ‘신라의 삼국통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영토적 측면에서 보면 ‘삼국통일’이라고 할 수가 없어요. 고구려의 옛 땅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 고구려의 옛 땅에 고구려의 후예들이 다시 나라를 세운 게 발해입니다. 그러니 정확하게 민족사적으로 보면 ‘신라의 삼국통일’이라는 말보다는 신라와 발해의 2국시대, 즉 남북국 시대가 되었다고 표현하는 게 더 합당합니다.

 

그 통일의 영웅이 대표적으로 세 사람입니다. 첫째가 태종무열왕인 김춘추, 둘째가 김유신 장군, 셋째가 문무대왕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서 있는 이곳이 바로 그 세 영웅 중에 한 분인 무열왕의 묘입니다.”

 


 

신라는 국난을 극복하고자 비록 당나라를 끌어들이긴 했지만, 다시 당나라를 한반도에서 쫓아내는 자주성도 있었다는 사실이 무척 인상깊었습니다. 한쪽 면만 보고 무조건 비난하기 보다는 다른쪽 면도 고려하면서 항상 그 속에서 역사적 교훈을 얻고자 하는 스님의 관점을 곳곳에서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이어서 태종무열왕릉 뒤편으로 나란히 놓여 있는 4개의 큰 무담 사이를 한 바퀴 돌아본 후 태종무열왕릉을 나왔습니다. 걷는 도중 스님은 김춘추가 김유신의 동생과 결혼을 하게 된 스토리, 김유신 장군의 성품을 알 수 있는 재미있는 일화 등을 아주 실감나고 재미있게 설명했습니다. 

 


 

다음은 김유신장군묘로 향했습니다. 4월에 이곳에 오면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데, 오늘은 그 모습을 보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대신 스님은 설명하고 안내하는 것에 대해 더욱더 정성을 기울이는 모습이였습니다. 

 


▲ 김유신 장군묘

 

“김유신 장군은 태생적으로 담이 커서 두려움을 몰랐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화랑으로도 유명했던 분이에요. 군인이면서도 정치적 감각이 뛰어나서 김춘추와 친구인 동시에 혈연적인 관계를 맺어서 김춘추를 도와 신라의 왕권을 안정시키고 삼국통일의 구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을지문덕 장군은 군사적인 파워만 있는 분이었다면 김유신 장군은 정치적 파워도 갖춘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신라시대에는 결혼제도가 좀 복잡합니다. 김유신의 여동생 둘이 모두 김춘추의 부인이 됐고, 거기에서 난 김춘추의 딸, 즉 공주가 나중에 김유신의 부인이 됩니다.” 

 

“아유, 복잡하네요.”(모두 웃음) 

 


 

“뭐가 복잡해요? 남자와 여자가 만난 건데요.(모두 웃음) 하나도 복잡하지 않아요. 김유신이 워낙 공로가 크니까 김춘추가 그를 잘 돌보라며 자신의 딸을 보내어 김유신을 받들게 했던 것입니다.” 

 

설명을 마친 후 김유신장군묘를 한 바퀴 돌며 무덤 둘레에 새겨진 12지신상을 살펴보았습니다. 선명하게 조각된 모습이 마치 무덤 주위를 늠름하게 지키주고 있는 장병들 같았습니다. 

 


 

낮이 되면서 점점 햇살이 뜨거워지고 땀도 많이 나고 목도 말랐습니다. 해외에서 온 대중들은 커피 먹는 것이 익숙한 문화에 사시는 분들인데, 몇몇 분들이 스님에게 “커피 사주시면 안 돼요?”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스님은 이런 요청을 들어주신 적이 거의 없는데, 날이 너무 덥다 보니 뜻밖에 허락을 해주었습니다. 

 

스님은 경주 최부자집 고택 주위에 커피집이 하나 있다고 하면서 그쪽으로 함께 이동했습니다. 스님은 커피 뿐만 아니라 황남빵도 사주어서 모두들 무척 기뻐했습니다. 

 


▲ 스님이 사준 황남빵

 

커피집에서 커피를 내리는 동안 경주 최부자집이 오랫동안 부를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 스님이 설명했습니다.   

 

“이곳이 경주 최부자가 살았던 고택이예요. 최부자집이 오랫동안 부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육훈(六訓)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첫째,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 벼슬을 하지 마라. 둘째,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셋째, 흉년에는 남의 땅을 늘리지 마라. 넷째, 과객에게 후하게 대접하라. 다섯째, 사방 100리 안에 굶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 여섯째, 시집온 며느리들은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 이렇게 여섯가지 원칙을 지키고 살았습니다.  

 


 

즉 검소하게 살면서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있으면 자기 책임이라며 구호활동도 했던 겁니다. 흉년에는 절대로 논을 안 샀어요. 흉년에는 식량이 귀하니까 논이 헐값에 나올 수가 있는데 그런 방식으로 재산 증식을 하지는 않았다는 겁니다. 또 재산은 만석 이상으로는 안 늘렸어요. 관직은 명예직인 진사 이상에는 등용되지 않도록, 즉 공식적 관직에는 오르지 않도록 삼갔습니다. 즉 부와 권력을 동시에 향유하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랬던 최부자집이 몰락한 이유는 독립운동자금을 댔다는 게 제일 큰 원인이고, 그 다음 원인은 지금의 영남대학교를 이 집안의 자본으로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 후 직접 경주최씨 고택으로 대중들을 안내했습니다. 고택 안에는 대청마루도 있고 작은 텃밭도 있는 등 정말 부자집다운 품격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 경주 최씨 고택

 

경주 최부자집에서 나오는 길에는 원효대사가 요석공주와 스캔들이 났던 곳으로 유명한 월정교를 잠시 보았습니다. 지금은 낮이어서 그런데 밤에 오면 야경도 참 멋있다고 합니다. 

 


▲ 월정교

 

다음은 황룡사지로 향했습니다. 황룡사지는 그늘이 하나도 없는 허허벌판이어서 스님은 그늘진 입구에서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잠시 후 9층목탑지에 앉아서 통일을 발원하는 기도를 할 예정인데, 스님은 왜 이곳에서 통일발원 기도를 하고자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이 황룡사는 완성되기까지 90년 이상이 걸렸습니다. 즉 100년에 걸쳐 큰 역사를 한 것입니다. 즉 진흥왕 때 짓기 시작해서 금당은 진흥왕 때 세웠지만 9층목탑은 선덕여왕 때 세웠습니다. 선덕여왕 재위 당시에 백제가 엄청나게 침공해서 신라가 국난에 처했는데, 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9층목탑을 세운 겁니다. 처음에는 국난 극복을 위해 당나라에 가서 부탁하는 등 이웃 나라에 손을 벌리고 다니기도 했고, 그래서 국난 극복을 발원하면서 탑도 세운 것이죠. 그런데 ‘최고의 방어는 공격이다. 바로 통일을 해 버리면 국난 극복이 되지 않느냐’라고 마음을 바꿔서 이때부터는 통일을 발원하기 시작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 황룡사 9층목탑은 통일발원탑입니다. 

 

선덕여왕이 이 탑을 세우고 통일을 발원한지 15년 만에 백제가 멸망했고, 22년 만에 고구려가 멸망했고, 결국 당나라 군대까지 쫓아내어서 선덕여왕 사후 딱 30년 만에 신라가 삼국통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오늘 여기서 통일 발원기도를 하러 온 겁니다. 그러니까 이 탑을 세울 당시에는 국난 극복과 통일을 발원했다면, 우리는 오늘 여기서 평화 기원과 통일 발원을 함께 하고자 하는 겁니다.”

 

이렇게 그늘에서 스님의 설명을 들은 후 장육존불이 있었다고 하는 금당지로 이동해 추가로 설명을 들었습니다. 

 


▲ 황룡사지 금당터

 

마지막으로 9층목탑지에 자리를 잡고 앉아 통일 발원기도를 했습니다. 평화를 이루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바로 남북한의 평화적인 통일임을 가슴에 새기며 각자 자신이 할 수 있는 실천을 다짐했습니다. 

 


▲ 9층목탑지

 

10분 남짓한 시간 동안 기도를 했는데 33도를 웃도는 무더운 날씨로 앉아만 있었는데도 땀이 줄줄 흘러내렸습니다. 

 

기도를 마친 후 스님은 기복적인 신앙을 배격하고 수행을 강조하는 스님이 왜 가는곳마다 이렇게 기도를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 잠깐 설명했습니다. 

 


 

“해외에서 오신 여러분들께서도 이렇게 통일을 발원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정토회에서는 지난 1차, 2차, 3차에 걸쳐서 통일의병대회를 하면서 통일을 발원함과 동시에 보시를 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만 통일을 발원하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5,000만 명이 다 통일을 발원한다는 의미에서 국민 1인당 1원씩은 보시해야 한다고 봐서 1차로 5,000만 원을 보시했어요. 2차로 북한동포 2,300만을 대신해서 2,300만 원, 해외동포 700만을 대신해서 700만 원, 합해서 3,000만 원을 보시했습니다. 해외동포를 대신한 700만 원은 사실 여러분들이 내야 할 몫이에요.(모두 웃음) 

 

그 다음으로 얼마 전 3차 통일의병대회를 했는데, 이때는 중국 인구 14억, 일본 1억 3천, 러시아 1억 7천, 미국 3억, 합쳐서 20억 명인데, 20억 인구가 1원씩만 낸다고 쳐도 20억 원인데, 그건 너무 큰 금액이라 1전씩은 내야 된다고 봐서 2,000만 원을 보시했습니다. ‘천지신명이 옹호해 주시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한 건데, 댓글들을 보니 ‘스님께서 불교는 스스로 깨달아서 성불하는 것이라고 법문해 놓고, 왜 빌고 그러느냐’ 하는 비판이 있었어요. 이렇게 했던 이유는 ‘온갖 잡신들도 다 돕도록 해야 통일이 된다’는 의미로 그렇게 한 것이예요. 그렇게 이해해 주시고, 여러분들도 오늘 이렇게 정성스럽게 발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스님의 감사 인사에 대중들은 박수로 화답한 후 자리에서 일어나 능지탑으로 향했습니다. 

 

능지탑은 삼국통일을 달성한 문무대왕을 화장했던 곳에 세워진 탑입니다. 스님은 문무대왕의 애국심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를 소개했습니다. 

 


▲ 능지탑

 

“어쨌든 신라는 당나라의 침공을 8년 전쟁을 통해 물리쳤습니다. 당나라를 물리친 그 때를 ‘삼국통일’이라고 부릅니다. 660년에 백제가 멸망하고, 668년에 고구려가 멸망했지만, 우리는 676년, 즉 고구려 멸망 8년 후에 당나라가 신라 침공을 포기하고 신라와 화해를 했던 그 해를 우리는 삼국통일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걸 이끈 분이 문무대왕입니다. 그래서 문무왕에 ‘대(大)’자까지 붙여서 ‘문무대왕’이라고 하는 겁니다. 신라인들은 문무왕을 굉장히 존경했던 겁니다.  

 

이제 고구려가 망하고, 백제가 망했으니까 문무대왕 당시 신라에는 이제 적이 다 없어진 것 같지만 사실은 한 나라가 더 남아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바다 건너 ‘왜’였습니다. 문무대왕은 당나라의 거대한 군대로부터 두 번 침공을 당했는데 그걸 서해바다 폭풍이 막아줬다고 하잖아요. 신라 당시에는 바다에 바람을 일으켜 폭풍을 만들고 비가 오게 하는 것은 ‘용’이라고 생각하는 토속신앙이 있었어요. 그러니 용이 신라를 보호해 주었다는 믿음이 있어서 그 용을 ‘호국용’이라고 불렀을 정도였습니다. 그런 경험이 있다 보니까 문무대왕은 당신이 죽으면 용이 되어서 왜를 막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당신이 죽으면 동해바다에 묻어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위에 있던 스님들이 ‘아무리 용이 힘이 있다 하더라도 축생 아니냐? 축생은 인간 밑인데, 천상으로 가야지 축생으로 가면 되겠느냐?’ 라고 했는데 문무대왕은 ‘축생이 된들 어떠랴? 나라만 지킬 수 있다면’이라고 얘기했다고 합니다. 지도자가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이 이 정도였습니다.”

 


 

오늘날 지도자들은 그러지 못한 모습이 대비가 되면서 쓸쓸한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능지탑을 한바퀴 돌아 이제 선덕여왕릉으로 향했습니다. 솔숲을 지나니 선덕여왕릉이 모습을 드러내자, 이미 묘당 법사님과 스텝들이 수박을 가져와서 한 접시씩 나눠주었습니다. 땀을 많이 흘리고 난 뒤여서 그런지 그 맛이 일품이었습니다. 

 


 

선덕여왕릉에서는 선덕여왕의 지혜로움을 보여주는 세 가지 일화를 소개하면서 선덕여왕의 리더십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그런 후 선덕여왕릉 아래에 사천왕사가 지어진 배경애 대해서도 함께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 선덕여왕릉

 

“당시 신라군은 당나라군처럼 20만은커녕 5만 정도였어요. 당시 인구가 한 200만밖에 안 되었을 테니까요. 그러니 당나라군과 싸우기에는 어림도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이건 사람의 힘으로는 안 된다’고 여기고 명랑법사한테 물었어요. 그 당시에 명랑법사는 신라에서 신통력으로 유명한 스님이었거든요. 명랑법사가 ‘이건 사람 힘으로는 막을 수 없고, 신들의 힘을 빌려야 막을 수가 있다’라고 하면서 신들이 노는 숲이라는 의미의 신유림에 터를 닦아서 사천왕사라는 절을 짓게 했습니다. 신라인들이 가장 신성시하는 곳이 아래쪽에 있는 신유림터였거든요. 그 신들의 힘을 빌려야 막을 수 있다고 했던 거예요. 

 


 

그래서 사천왕사를 지으려고 터를 닦는데 당나라군대가 벌써 출발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러니까 언제 절을 완성하겠어요? 임시로 대나무를 세우고, 천으로 벽을 만들고, 짚으로 신상을 만들어서 명랑법사가 12명의 밀교 승려와 주력을 했더니, 서해바다에 폭풍이 일어나서 그 20만 대군이 수몰되어 결국 침공을 막을 수 있었다는 겁니다. 믿거나 말거나 입니다.(모두 웃음) 

 

그런데 당나라 황제가 다시 공격을 명령해서 2년 후에 또다시 10만 군대를 징발한 거예요. 10만 군대만 해도 신라군의 2배잖아요. 그런데 그때는 이미 절이 완공된 뒤였고 게다가 역시 문두루 비법까지 하니까 또 폭풍이 일어나서 당나라 군대가 수몰한 겁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그러니 안 믿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공격을 멈추게 되었죠. 제가 인도에 갈 때마다 가뭄 끝에 단비가 오니까 우리 인도 둥게스와리 주민들은 가뭄이 계속되면 ‘법륜스님 안 오시나?’라고 한 대요. 그것과 비슷했던 겁니다.(모두 웃음)

 


 

즉 통일 과정에서 당나라와 신라가 싸우면 신라가 백전백패할 수밖에 없을 만큼 두 나라의 국력이 차이가 났는데, 그걸 극복하기 위해서 기도한 곳이 바로 사천왕사지입니다. 그래서 거기서 문두루 비법이라는 기도를 했는데, 그 기도는 통일을 완성시키고자 하는 기도였던 셈입니다. 그러니 우리들도 통일과정에서 강대국의 간섭을 잘 극복하기 위해 오늘 이렇게 사천왕사에서 기도를 하고자 하는 겁니다.” 

 

이렇게 설명을 마친 후 통일의병대회의 마지막 순례 코스인 사천왕사지에 도착했습니다. 

 


▲ 사천왕사지

 

신라인들이 당나라를 물리치기 위해 정성을 다해 기도를 했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들도 남북통일을 이뤄보자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10여 분간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사홍서원을 끝으로 통일의병대회를 모두 마쳤습니다. 

 


 

인원이 작아서 아주 재바르게 이동을 하면서 스님의 설명도 어느 때보다 자세히 들을 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그런데도 시간은 아직 12시 30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배가 고파질 무렵 스님은 점심 식사로 칼국수를 사주었습니다. 모두가 땀을 뻘뻘 흘리며 칼국수 한 그릇씩을 뚝딱 비우자 스님은 “지난 1년 동안 정말 수고 많았어요”라고 격려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오후에는 동해바다로 이동해 문무대왕의 수중능인 대왕암과 문무대왕의 업적을 기리며 그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신문왕이 세운 감은사지를 둘러보았습니다. 

 


▲ 대왕암

 

바닷가를 보자 대중들은 어린 아이마냥 기뻐하면서 신발을 벗고 파도에 발을 담그기도 했습니다. 나머지 일정을 취소하고 바닷가에서 계속 놀고픈 마음이 컸지만 아쉬움을 뒤로 하고 기념사진만 찍은 후 감은사로 향했습니다. 

 

감은사지에서도 스님의 설명을 들은 후 파란 하늘 위로 우뚝 솟은 두 개의 탑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은 후 다음 장소로 이동했습니다. 

 


▲ 감은사지

 

마지막으로 기림사와 오어사를 각각 찾아가 사찰 순례를 했습니다. 해외에 계신 총무님들 대부분이 “저희는 절이라곤 정토회 밖에 몰라요. 다른 절도 좀 구경해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라고 몇 번의 건의가 있어서 오늘은 이 지역 일대에서 가장 유명한 사찰을 순례해 보기로 했습니다. 

 

먼저 기림사에서는 보물 제415호인 건칠보살반가상이 모셔져 있어 눈길을 끌었습니다. 건칠불이란 나무로 골격을 만든 뒤 삼베를 감고, 그 위에 진흙을 바른 다음 속을 빼낸 불상을 말합니다. 스님은 “우리나라에는 남아 있는 예가 매우 적어 불상의 가치가 큰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 기림사

 

이 외에도 500나한이 모셔져 있는 곳, 대적광전, 삼성각 등 다양한 건물들을 살펴본 후 오어사로 향했습니다. 오어사는 ‘오어지’라는 큰 호수 위에 세워진 절입니다. 스님은 호수를 배경으로 멋지게 세워져 있는 절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인데, 막상 오어사에 도착해 보니 가뭄으로 인해 저수지 물이 많이 말라 있었습니다. 

 


▲ 오어지

 

올해 1월1일에 정토회 실무자들과 왔을 때만 해도 물이 가득해서 정말 호수 위에 절이 떠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는데, 오늘은 수량이 많이 줄어서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대웅전을 참배한 후 산꼭대기에 지어진 자장암을 먼 발치서 바라보는 것에 만족하고 주차장으로 나왔습니다. 

 


▲ 오어사

 

주차장 앞에는 ‘원효교’라는 큰 다리가 놓여져 있어서 스님은 대중들을 데리고 다리를 건너며 저수지를 더 가까이에서 내려다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다리 위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것을 마지막으로 오늘의 여행 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    

 


▲ 원효교

 

저녁 식사는 스님이 안강에서 고디탕을 사주었습니다. 하루종일 걷고 땀을 흘려서 얼큰한 탕이 더욱더 맛있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스님은 “내일 오전에 서울에서 회의가 있어서 다녀오겠다”고 하면서 “내일 오후에 입재식에 다시 보자”고 인사한 후 문경 정토수련원으로 향했습니다. 

 


 

내일은 새벽 4시에 문경 정토수련원을 출발해 아침 7시부터 10시까지 평화재단에서 회의를 한 후 다시 문경 정토수련원으로 내려와 오후 1시 30분부터는 해외지부 총무단 수련 2일째를 맞이해 입재 법문과 더불어 본격적은 수련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

 

※ 한반도의 통일을 발원하면서 러시아 연해주의 독립운동 성지 '신한촌'의 역사 회복과 재건을 위한 대중 여러분들의 후원금을 받습니다. 소정의 기금 출연으로 역사 회복에 동행하는 마음과 정성을 함께 모아 주시기 바랍니다.

 

- 계좌번호 : 국민은행 578601-01-272869

- 예금주 : (사)좋은벗들 

전체댓글 25

0/200

오유진

감사합니다~~♡♡

2016-07-06 01:30:51

김정화

덕분입니다.감사합니다.().

2016-07-05 07:27:28

김현수

감사해요.^^

2016-07-04 16:07:07

전체 댓글 보기

스님의하루 최신글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