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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10일 아침에는 INEB 동남아 스님들과 함께 발우공양을 하며 고국으로 떠나는 동남아 스님들을 환송했습니다. 발우공양을 마친 대중들은 동남아 스님들께 삼배로 인사를 올렸습니다.
▲ 발우공양
동남아 스님들은 서울 정토회관을 떠나기 전 법륜 스님에게 합장 공경의 예를 올리며 지난 일주일 동안 많은 가르침을 주신 것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 법륜 스님에게 감사 인사를 올리고 있는 동남아 스님들
발우공양을 마치고 스님은 곧바로 평화재단으로 이동해 아침 7시부터 하루종일 찾아온 손님들과 미팅 및 회의 일정을 가졌습니다. 그 사이 INEB 동남아 스님들은 인천공항을 출발해 모두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 정토회 견학을 마치고 떠나는 INEB 동남아 스님들
11일에도 스님은 아침 7시부터 조찬 모임을 시작으로 하루종일 미팅 및 회의 일정을 가졌습니다.
오늘은 장수 죽림정사에서 열린 용선진종조사 탄신 152주년 기념법회에 참석해 기념법문을 한 후 참석한 정토회 경전반 대중들과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새벽 5시에 서울 정토회관을 출발한 스님은 8시에 장수 죽림정사에 도착했습니다. 도착 후 가장 먼저 은사 스님인 도문 큰스님께 문안 인사를 올렸습니다. 스님은 최근 3개월 동안의 근황에 대해 큰스님께 보고 말씀을 드렸고, 큰스님은 용성진종조사님의 유훈 실현을 위해 더욱더 수고해 줄 것을 당부했습니다.
▲ 은사 스님인 도문 큰스님께 인사를 올리고 있는 법륜 스님
9시 30분이 되자 유수 스님의 진행으로 다례재가 열렸습니다. 다례재는 부처님의 법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전달되기까지 과거 7여래불과 69조사, 7대사 등에 대해 차공양을 올리는 예식입니다. 약 1시간 동안 정성껏 다례재를 올린 후 10시 30분부터 탄신 152주년 기념법회가 시작됐습니다.
▲ 다례재
오늘 기념법회에는 전국에서 정토회 봄경전반을 다니고 있는 700여 명의 대중들이 참여했습니다. 법회가 열린 용성교육관 안이 발디딜 틈 없이 꽉 차서 일부 대중들은 바깥 기단에 자리를 깔고 앉아 법회를 들었습니다.
▲ 죽림정사 용성교육관
삼귀의, 반야심경, 국민의례, 애국가 제창이 있은 후 죽림정사 정광 사무국장님이 용성진종조사의 행장 낭독과 세계불교 청소년교화 후원회 한명옥 회장님의 추모사가 이어졌습니다.
다음은 용성진종조사가 작사한 ‘온 겨레의 노래’를 함께 불렀습니다. 청년정토회가 앞에 나와 큰 목소리로 선창을 하자 이어서 대중들 모두가 따라 불렀습니다. 노래를 부르는 도중 ‘만세, 만세, 만만세’라고 외치는 부분이 나오자 도문 큰스님은 두 팔을 번쩍 들고 ‘만세’를 외쳐 흥을 돋우었습니다.
이어서 대한불교조계종 원로의원이시며, 죽림정사 조실이시고, 정토회 고문이시며, 법륜 스님의 은사 스님인 불심 도문 큰스님을 모시고 기념법문을 청해 들었습니다. 도문 큰스님은 주장자를 크게 내리치며 대방광불화엄경 제20품 무외림 보살의 찬불게송을 읊으며 법문을 시작했습니다.
“간절히 부지런히 다시 정진하여 견고한 마음을 버리지 않으면 마땅히 알지어다. 이와 같은 사람은 결정코 대도 대각인 보리도를 이루리로다.”
그런 후 정토회 행자대학원 최선희 간사를 일으켜 세운 후 몇 가지 질문을 하며 법문을 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무엇이 선이라고 하겠느냐? 진리를 따라서 도를 행하는 것이 선이니
라’ 하셨는데, 지광 법륜 선지식은 어떻게 선을 일러주던가?”
“지광 법륜 선지식은 맑은 마음을 가지고, 깨끗한 땅을 일구고, 좋은 벗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지도했다면 선지식이 맞어.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무엇을 가장 힘이 많다고 하겠느냐? 달게 참고 사는 사람이 힘이 많은 사람이다’라고 하셨는데, 법륜 스님은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궁금하네.”(모두 웃음)
“법륜 스님은 적게 먹고, 적게 입고, 적게 자는 구도자의 자세로 생활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외에도 도문 큰스님의 질문은 계속됐습니다. 묻는 질문마다 또박또박 답변이 이어지자 도문 큰스님은 아주 기뻐하며 말했습니다.
“그려. 이제 도문 스님은 조실방에서 밥이나 먹고, 차나 마시고, 가려우면 긁고, 고단하면 잠을 잘 일 밖에 없겠구나. 이렇게 훌륭하신 법륜 스님이 이 계대를 이었으니까 무슨 근심이 있겠습니까? 아무 근심이 없습니다.(모두 웃음)
오늘 여러분들은 관념의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관념의 승리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천지를 볼 때에도 ‘아, 무상한 것이로구나’라고 봐야 합니다. 만물을 볼 때에도 ‘세계와 우주는 성주괴공하는구나’라고 봐야 합니다. 이 몸을 볼 때에도 ‘생로병사하는 무상이로구나’라고 봐야 합니다. 이 마음을 볼 때에도 ‘생주이멸의 무상이로구나’라고 봐야 합니다. 이렇게 무상하다고 볼 수 있는 관법을 가진다면 관념의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나의 본성은 생로병사도 아니고, 생주이멸도 아니고, 성주괴공도 아니고, 그야말로 여여하다 이말입니다. ‘본성은 여여한데, 세상은 무상이로구나’ 이렇게 보는 것이 관념의 승리자입니다. 법륜 스님은 바로 관념의 승리자입니다. 관념의 승리자의 제자가 되었으니 여러분도 관념의 승리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네!”(모두 박수)
도문 큰스님의 우렁찬 목소리에 대중들도 큰 목소리로 호응하며 박수로 화답했습니다.
도문 큰스님이 법상에서 내려오자 정근과 희사의 시간을 가진 후 곧이어 법륜 스님과 함께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오늘이 용성진종조사님의 탄신기념일인만큼 스님은 먼저 용성진종조사님의 일생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습니다.
“이곳은 한국 근세불교의 중흥조이신 용성진종조사께서 태어나신 곳입니다. 이 건물 뒤로 올라가면 태어나신 생가가 복원되어 있습니다. 현재 대한불교조계종에 계시는 많은 스님들 중 절반 가까이가 용성진종조사님의 후손, 즉 후예들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용성조사님께서는 조선조 500년 동안 불교가 엄청난 탄압을 받은 결과 승려들의 신분이 격하돼서 세상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고, 승려들이 생존하기 위해 걸식을 하고 손금도 보고 사주도 보던 때에 태어나셨습니다. 좋게 말하면 대중과 하나가 됐고, 나쁘게 말하면 불교의 위신이 땅바닥에 떨어졌던 시대에 태어나셔서 불교의 본래 모습을 다시 일으켜 세우신 분이기에 ‘근세불교의 중흥조이시다’ 이렇게 말합니다.
용성조사님께서는 크게 세 가지를 주창하셨는데 첫째가 불교의 지성화입니다. 불교는 그저 복이나 비는 종교가 아니라 고통 받는 중생이 그 고통에서 벗어나 참 자유와 참 행복을 얻도록, 즉 해탈과 열반을 증득하도록 이끄는 위대한 진리의 가르침이라고 하시면서 불교의 지성화를 주창하셨습니다.
둘째는 불교의 대중화입니다. 경전이 한문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일반 신자들은 불교의 가르침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냥 부처님께 복을 빌면 액운이 없어지고 병도 낫고 복도 받는다고만 생각하며 절에 다녔어요. 그래서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시고, 누구나 다 불교를 쉽게 이해하고 접할 수 있도록 불교의 대중화를 주창하셨습니다.
셋째는 불교의 생활화입니다. 보통 불교는 우리의 일상과는 동떨어진 가르침이라고 여깁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세속이라 하고 수행하는 사람이 사는 세상은 출세간이라고 할 정도예요. 이 세간을 떠나 저 산속에 별도로 있어서 우리의 일상 삶과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밥 먹고, 똥 누고, 일하고, 자는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의 괴로움이 발생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상생활 속에서 괴로움이 없는 경지로 나아가는 것이 참다운 불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불교의 생활화입니다. 이렇게 불교의 지성화, 불교의 대중화, 불교의 생활화라는 3대 지침을 내걸고 실천하셨어요.
그리고 조선조 500년 동안에는 불교를 탄압했기 때문에 도성 안, 즉 서울 성곽 안에 스님들의 출입을 금지하고 사찰을 하나도 남김없이 없애버렸어요. 조선왕조가 망하고 불교 탄압이 철폐되자 처음으로 도성 안에 민간인 집을 사서 포교당을 만들고 그 이름을 ‘대각교당’이라고 지으셨습니다. 어린이 포교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재가수행자가 없어지고 신자로 전락해서 복이나 빌고 있던 사람들에게 삼귀의와 오계를 처음으로 실시해서 재가수행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또 근대 문물을 받아들이셔서 찬불가를 제작하셔서 가르치셨습니다. 이렇게 처음으로 근대적인 포교를 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근대불교의 중흥조가 되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라를 일본에 빼앗겼을 때 빼앗긴 백성들의 고통을 안타까워하시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평생을 바치셨습니다. 대한민국의 뿌리라고 하는 3.1 독립운동의 막후 기둥이셨습니다.
그리고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짓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원래 독립운동 하는 사람들은 ‘대한제국 부흥운동을 하자’라고 했는데 ‘아니다, 새로운 나라는 더 이상 임금이 주인이 될 수가 없고 백성이 주인이 돼야 된다’라고 하셔서 ‘대한제국’을 ‘대한민국’으로 향도하셨습니다. 또 사람들이 ‘한반도기를 가지고 만세를 부르자’라고 했을 때 ‘아니다, 우리 조선의 옛 영토는 저 광활한 만주까진데 반도기를 흔들어버리면 우리 스스로 한반도에 갇혀버린다. 그러니 태극기를 깃발로 써야 한다’라고 주장하셨어요. 이렇게 우리 민족과 우리 국가가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나라가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하지 못하고 외세의 힘에 의해서 독립을 얻었기 때문에, 외세의 이익에 따라서 남북이 분단되었고, 외세와 결탁한 사람들이 남북의 정부 수립의 중심에 서게 되면서 민족정기가 흐트러졌습니다. 그래서 남북을 막론하고 참다운 민족지도자들은 빛을 제대로 보지 못했고, 오히려 강대국과 결탁한 세력들이 나라의 중심 역할을 하게 되면서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 용성진종조사 영정
그런 데서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우리들은 위대한 선지식이자 위대한 애국자이신 용성조사님이 태어나신 날을 기해서 그분의 삶을 새겨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좋겠습니다. 일본이 우리를 침략하는 것은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만 제 나라 사람이 제 민족을 배신하고 억압하는 것을 보시고선 용성조사님은 너무나 안타까워하시면서 열반에 드셨습니다. 그분께서 그토록 염원하셨던 나라의 독립이 우리에게는 곧 남북의 평화적 통일입니다. 우리가 통일조국을 건설한다면 과거 100년의 과제인 민족의 독립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이런 뜻을 새기고자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것입니다.”
스님의 설명을 듣고 용성조사님이 탄생하신 바로 이곳에서 탄생 기념법회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더욱 새로웠습니다.
이렇게 설명을 마친 후 곧바로 즉문즉설이 시작됐습니다. 총 네 명이 스님에게 질문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정토회가 민족과 역사에 관련된 활동을 많이 하는 것에 대해 불편한 마음이 든다는 젊은 여성 분의 질문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합니다.
“얼마전 정토회 정회원으로서 통일의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저는 어릴 적부터 통일이 되기를 바랐고 애국 열사들에게 감사하는 마음도 크지만, ‘우리 민족’이라고 하는 것에 막연하게 불편한 마음이 생깁니다. 5천년을 이어져 왔다고 하는 우리 민족이라는 것이 과연 실체가 있는 것인가? 내가 외국인하고 결혼해서 낳은 아이는 우리 민족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해보면 순수혈통이라는 것은 세월이 자연스럽게 흐르면서 불가능해지는 것 같거든요. 족보라는 것도 유전자는 엄마 아빠 양쪽에서 받는 것인데 아버지 쪽의 혈통만 따지는 것이 아닌가 싶고요, 역사도 그런 식으로 주관이 개입되는 것이 아닌지 궁금합니다.
또 민족이라는 것을 강조할수록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중에서 ‘인상’에 해당하는 오류를 다시 범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고, 민족과 역사에 관련된 활동을 많이 하는 것이 단체의 성격을 민족주의적인 단체로 규정지어서 앞으로 정토회가 글로벌한 정토 세상을 만드는 데 방해가 되지 않을지 궁금합니다.”
“질문자 말이 다 맞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뭐가 의문이 난다는 거예요?”(모두 웃음)
“제가 정토회 활동을 계속하면 이런 민족과 역사에 관련된 활동을 하게 될 텐데, 민족이라는 것이 계속 공부해야 하는 것이 맞는지 마음속에 의문이 생겨요.”
“질문자가 하고 싶으면 하고, 안 하고 싶으면 안 하면 되는 거예요. 통일의병학교는 강제가 아닌 자율입니다. 가입하고 싶으면 가입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하면 돼요. 질문자처럼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어요. 문제가 아주 없진 않지만 거의 90퍼센트는 질문할 만한 질문을 했어요.(모두 웃음)
그런데 통일의병학교 공부는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하면 돼요. 그건 개인의 자유니까요. 그런데 뭐가 고민이냐는 말이에요.”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하기 위해 이 약간의 걸림을 없애고 싶어서 여쭤봤어요.”
“걸림이 왜 생기는지를 자기가 돌아봐야죠. 왜 걸림이 생길까요? 제가 질문자한테 한번 물어볼게요. 부처님의 가르침은 내 형제니 내 나라니 하는 걸 분별하라 그랬어요? 하지 마라 그랬어요?”
“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맞아요. 그러면 질문자는 엄마하고 이웃집 아줌마가 같이 물에 빠졌을 때 어떻게 할래요? 내가 도저히 둘 다 건질 수는 없어요. 둘 다 건질 수 있는데 내 엄마만 달랑 건지고 이웃집 아줌마는 물에 빠져 죽어도 상관없다고 하면 문제예요. 그건 이기주의입니다. 그런데 둘 중 하나밖에 건질 수 없다면 질문자는 엄마를 먼저 건질래요? 이웃집 아줌마를 먼저 건질래요?”
“엄마를 먼저 건질 것 같습니다.”
“그러면 질문자는 불자인데 왜 그렇게 해요? 구분 안 해야 하는데 왜 자기 엄마를 먼저 건져요?”(모두 웃음)
“머리가 생각하는 게 아니고 몸이 그렇게 갈 것 같아요.”
“그러면 또 생각해봐요. 내 엄마를 먼저 건지는 건 집착이라고 생각해서 자기 엄마는 놔두고 이웃집 아줌마를 먼저 건지면 이 사람은 더 훌륭한 사람일까요?”
“아니요. 가까이 있는 사람을 먼저 건지라고 들었는데요.”(모두 웃음)
“그래요. 지금 이 문답에서 ‘알겠는가?’ 해서 알아졌으면 좀 깨쳤고, 아직도 의문이 안 풀렸다면 이야기가 더 길어져야 해요. 어때요?”
“일부는 깨달았고요. 한 가지 안 풀린 것은 족보에 대한 겁니다. 족보랑 역사는 성격이 좀 다르겠지만, 족보를 따지는 것이 나의 뿌리를 아는 것에 도움이 되는지 궁금합니다.”
“‘족보가 절대적이다’라고 하면 조금 문제가 있지만 ‘족보가 필요 없다’라고 할 이유도 없어요. ‘네 아버지가 누구니?’ 하면 ‘이분이 우리 아버지입니다’라고 하고, ‘아버지의 아버지가 누구니?’ 하면 ‘이 분입니다’ 하면 되지 ‘필요 없다!’ 굳이 이렇게 말할 필요가 있어요?”
“없습니다.”
“아버지가 누구든 그게 뭐가 중요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아버지가 왕이면 이 사람이 아주 훌륭하고 아버지가 왕이 아니면 이 사람이 나쁘다는 식으로 혈통을 갖고 차별하면 문제입니다. 얼굴이 검든 희든, 남자든 여자든, 이 집안 출신이든 저 집안 출신이든 차별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한국 사람이다’ 하는 게 나쁜가요? ‘한국 사람은 훌륭하고 일본 사람은 나쁘다’ 이러면 문제지만 ‘나는 한국 사람이고 이 분이 우리 아버지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이 분은 우리 아버지니까 이 앞에 앉아야 한다. 너희는 우리 아버지가 아니니까 밖에 가서 앉아라’ 이러면 문제지만 ‘이 분은 우리 아버지입니다. 이 분은 할아버지입니다’ 이게 뭐가 문제예요?”
“문제없는 것 같습니다. 저는 엄마 쪽은 어찌 되는지 그냥 궁금했습니다.”(모두 웃음)
“아빠 쪽을 우선 따지는 건 문화예요. 민족이라는 것도 혈통이 아니고 문화예요. 지금 만주에 사는 사람들을 혈통적으로, 즉 DNA로 따져보면 옛날 고구려 사람도 많이 있겠죠. 그러니 ‘우리 나라’라는 말은 문화이지 혈통이 아니에요. 애가 태어났을 때 ‘내 자식이다’ 하는 것도 혈통이 아니라 사실은 문화예요. 내가 낳았어도 아기 바구니가 처음부터 딱 바뀌어 있으면 내 자식인 줄 그냥 계속 믿잖아요. 그러면 혈통은 달라도 계속 내 자식이에요.
여러분들은 부모가 다 혈통적으로 여러분들 부모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생각하겠죠. 그런데 아버지든 어머니든 혈통적으로 자기 부모가 아닌 사람도 이 중에 많이 있어요. 특히 아버지가 혈통이 아닌 사람은 더 많을지도 몰라요.(모두 웃음)
어머니가 혈통이 아닌 사람도 있을 수 있어요. ‘어머니가 아닐 수 없다, 어머니는 진짜다’ 하지만 어머니와 혈통이 다를 수도 있어요.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바뀐 경우도 있지만 아주 어릴 때 입양해서 데리고 왔다면 아이 입장에서는 죽을 때까지 알 수 없어요. 커서 보니까 자기 엄마가 백인이다, 이렇게 인종이 아예 다르면 좀 이상하다 해서 문제를 제기하겠지만 보통은 모릅니다. 애를 낳아서 일본에서 키우면 일본 사람이 되고, 한국에서 키우면 한국 사람이 되고, 중국에서 키우면 중국 사람이 되는 거예요.
지금 만주벌에 사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에요. 내가 한국 사람으로 자랐는데 중국의 지배를 받았다면 ‘내가 원래 한국 사람인데 지금은 중국 시민이다’라고 하지만, 세월이 많이 흘러서 태어날 때부터 자기가 중국 사람인 줄 알아버린 사람은 지금 중국 사람이 되어 있는 거예요.
그러니 민족이라는 건 문화이지 혈통이 아니에요. 그런데 옛날에는 사람들이 이동을 많이 하지 않았으니까 민족이 혈통하고 비슷하게 갔죠. 지금 여러분들은 엄마가 여러분들에게 혈통적으로도 생모, 즉 생물학적인 엄마일 확률이 높아요. 이동이 적으니까요.(모두 웃음)
그러면 엄마가 혈통적으로 같을 확률이 높을까요? 아버지가 혈통적으로 같을 확률이 높을까요? 엄마가 조금 더 높아요. 이치가 그렇다는 거예요. 옛날 사람은 혈통과 문화가 일치할 확률이 높은 반면, 앞으로 갈수록 혈통하고 문화는 일치하지가 않을 확률이 더 높아요.
그래서 민족을 차별하지 말아야지 민족 자체를 부정하면 안 돼요. 민족 자체를 부정하면 자기도 모르게 미국 문화에 찌드는 거예요. 질문자는 자기 생각이 굉장히 글로벌한 것 같겠지만 그게 미국식 제국주의의 이념이 강해서일 수도 있어요. 미국은 이민사회입니다. 다양한 민족들이 자기 문화를 보존하려고 자꾸 따지면 시끄러우니까 그런 걸 가능하면 나쁘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사회주의도 그런 걸 굉장히 나쁘게 이야기해요.
민족 문화 같은 걸 지나치게 강조해서 배타적으로 굴면 나빠요. 차별을 하니까요. 그런데 자기 전통문화를 지키겠다는데 시비를 걸 이유는 없죠. ‘스님, 무엇 때문에 자기가 불교 승려라고 티를 내고 옷을 그렇게 입고 다녀요? 우리하고 똑같이 입고 다녀요’라는 말도 맞아요. 그런데 좀 다르게 입고 다니면 뭐가 불만인데요?(모두 웃음) 질문자는 평등성이나 개방성을 또다시 절대화함으로 해서 다른 것을 자기도 모르게 또 배타하고 있는 거예요.”
“네, 해결됐습니다. 감사합니다.”(모두 웃음, 박수)
“젊은 사람들은 이런 비판의식을 갖는 경우가 많이 있어요. 민족을 강조하는 게 배타적 민족주의가 될 수도 있다고 우려하는 것이니 아주 좋은 비판의식이에요. 민족주의라고 해서 ‘우리 민족이 최고이고 일본은 나쁜 놈들이다’ 이런 민족주의로 가면 안 돼요. 반대로, ‘중국은 민족적으로 훌륭하고 일본도 훌륭한데 우리는 열등하다’ 이럴 때는 민족 정기를 바로 세워야 합니다. 열등의식은 극복해야 하는데 ‘우리는 좋고 저 놈들은 나쁘다’ 이런 식으로 배타적이 되면 글로벌 시대에 다 함께 살아가는 데 장애가 됩니다. 그래서 배타적 민족주의가 아니라 열린 민족주의가 되어야 해요. 굳이 민족주의를 주장한다면 자기의 정체성을 갖되 다른 이도 똑같이 존중하고 함께 갈 수 있는 열린 민족주의여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억압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배타적 민족주의가 다소 강한 편입니다. 억압받았던 민족 정체성을 회복하려다 보니 억압자에 대한 배타성을 갖지 않고는 회복하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이런 전통을 갖게 되었어요. 그러나 우리의 민족주의는 일본이나 중국, 또는 나치의 게르만 민족주의처럼 자기 민족의 어떤 우월성을 내세우는 민족주의와는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약소국의 민족주의는 우리가 이해하고 오히려 보호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강대국의 민족주의는 인류 평화에 굉장히 큰 장애가 되기 때문에 우리가 강력하게 거부해야 합니다.”
스님의 명쾌한 답변에 질문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큰 목소리로 감사 인사를 했습니다. 관점을 제대로 잡으니 가슴이 시원해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 외에도 세 명과 더 즉문즉설을 한 후 기념법회를 모두 마쳤습니다. 사홍서원을 끝으로 마당으로 나온 대중들은 3개 권역으로 나누어 대웅전 앞 계단에 나란히 서서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활짝 웃는 모습에는 행복이 가득해 보였습니다.
점심식사 후에도 3개 권역으로 나누어 죽림정사 경내 순례를 했습니다. 대웅전 외벽에는 십우도가 그려져 있고, 교육관 외벽에는 용성진종조사의 일대기가, 교육관 내벽에는 7여래불과 59조사, 7대사의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기념관에는 용성조사님의 유품과 기록물들이 전시되어 있고, 생가도 잘 가꾸어져 있었습니다. 대중들은 법사님들의 안내에 따라 곳곳에 담긴 의미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 경내 순례
한편 스님은 도문 큰스님과 함께 도량을 돌아보면서 용성진종조사님의 공적비, 유훈실현 공덕비 등을 어느 곳에 세울지 의논했습니다.
의논을 마치고 오후 4시에 죽림정사를 출발한 스님은 오후 6시 30분에 울산 두북에 도착했습니다. 스님은 도착 후 식사를 마치자마자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해가 지기 전에 30분은 더 일할 수 있겠다”며 농사일을 시작했습니다.
텃밭에는 호박이 무럭무럭 잘 자라 벌써 넝쿨마다 주렁주렁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스님은 “내일 아침에는 호박을 따서 먹어야겠다”며 웃음을 보였습니다.
고추도 주렁주렁 열려서 한 움큼 딸 수 있을 정도가 되었고, 수박도 줄기가 나오기 시작해서 얼마나 큰 수박이 달릴지 기대가 되었습니다. 고추 모종은 길게 자란 줄기들이 제법 있어서 대를 세운 곳에 묶어주었습니다.
매화나무와 복숭아나무는 웃자란 가지들이 많아 이발을 하듯이 깔끔하게 가지 치기를 했습니다.
텃밭에 들어간 스님은 쉼없이 여러 가지 일을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집중해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해가 지고 어두워져 더 이상 앞이 보이지 않자 그제서야 일손을 놓았습니다.
내일도 스님은 오랜만에 하루 종일 농사일을 하는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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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인도 성지순례' 참가자 접수가 시작됐습니다.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인도의 10대 성지를 내 발로 직접 밟아보고 그 감흥을 느껴보는 시간을 가져보세요. 아래 배너를 누르면 온라인으로 신청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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