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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 동국대 중강당에서 열린 ‘2016 출가콘서트’를 마치고 평화재단에 도착한 스님은 국수 한 그릇으로 저녁식사를 한 후 곧바로 평화리더십아카데미 특강이 열리는 평화재단 강당에 들어섰습니다.
제14기 평화리더십아카데미 수강생들은 지난 3월 17일부터 12주 과정의 커리큘럼을 갖고 매주 목요일마다 다양한 강의와 토론을 펼쳐오고 있는데요. 오늘은 법륜 스님으로부터 ‘갈등의 대한민국, 화합과 통합의 길찾기’란 주제로 강연을 듣는 날입니다.
스님이 평화재단 3층 강당에 들어서자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이 쏟아졌습니다. 지난 4월에는 경주역사기행을 하며 하루종일 스님과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이제 제법 스님이 더 친근하게 다가오는지 그때보다 더 큰 환호성이 나왔습니다.
연단에 앉은 스님은 가장 먼저 “갈등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라고 질문을 던지며 강연을 시작했습니다. 우선 수강생들이 갈등이 일어나는 이유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예를 하나 들어 주었습니다.
“갈등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기 산이 하나 있는데 이 동네 사람은 ‘동산’이라 부르고 저 동네 사는 사람은 ‘서산’이라 불러요. 동산인지 서산인지 증명하기 위해서 동네사람에게 물어보자고 할 때 각자는 자기 동네 사람만 생각합니다. 자기 동네 사람에게 물어보면 틀림없이 자기와 생각이 같아요. ‘그러면 옛날 사람들 기록을 한번 볼까?’ 해도 자기 동네 역사 기록을 보면 다 자기 생각과 똑같이 되어 있어요. ‘그러면 해가 산 쪽으로 지는지 뜨는지 우리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자’라고 해도 동산이라 부르는 동네에서는 분명히 해가 뜨고, 서산이라고 부르는 동네에서는 분명히 해가 집니다.(모두 웃음)
이렇게 우리는 주관을 객관화해요. 그래서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인식되어진 것을 객관적 사실인 것으로 받아들이는데, 이렇게 착각으로 인해서 갈등이 빚어집니다.
여기에서 제일 좋은 해결책은 자기 동네에서 나와 보는 거예요. 자기 동네에서 나와 보면 ‘어, 동산이 아니네. 남산이네’, ‘어, 서산이 아니라 북산이네’ 이렇게 될 수 있어요. 핵심은 북산이냐, 남산이냐가 아니에요. 이 동네에서 나오면 ‘동산이라고 생각했는데 동산이 아니네’, 저 동네에서 나오면 ‘서산이라고 생각했는데 서산이 아니네’ 하고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니다’라는 말이에요.
그런데 여기서도 종교나 진리를 따지는 사람을 보면 오류가 있어요. ‘동산’이라고 불러도 동산이 아니고, ‘서산’이라고 불러도 서산이 아니라면 이 산은 뭐냐는 거예요. ‘그러면 진짜는 뭐냐?’ 라고 해서 결국 ‘비동비서산, 즉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닌 산이다.’ 이렇게 또 규정하게 됩니다. 이럴 때 누가 동산이라고 하면 또 싸우게 돼요. ‘야, 네가 몰라서 그래. 깨달아봐라. 그 산은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닌 산이야.’ 하고 주장하게 되는데, 그러면 동산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보면 더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서산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숫제 틀리긴 틀렸지만 그래도 그렇게 말할 수는 있을 것 같거든요. 동산이니 서산이니 하면서 적어도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용어를 쓰잖아요. 그런데 비동비서산이라고 하는 사람이 끼어들면 ‘저 자식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니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저건 또라이다’ 이렇게 돼서 여기에서도 또 갈등이 생기는 거예요. 이렇게 네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 하는 갈등이 생길뿐만 아니라 진리와 진리 아닌 것 사이에 또 갈등이 생깁니다.
이 중 어느 게 더 고집이 셀까요? 네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 하는 고집보다 이 ‘진리냐, 진리 아니냐’의 고집이 백 배는 더 세요. 그래서 종교가 평화를 이야기하면서도 종교끼리 싸웠다 하면 그 원한이 천 년을 가는 거예요. 나라는 싸웠다 하면 그 원한이 30년만 가면 되고, 부부는 싸웠다 하면 그 원한이 하룻밤만 가도 해결되는데, 종교는 싸우면 천 년을 갑니다.(모두 웃음)
‘진리’라고 하는 상을 짓는 것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그래서 북한 같은 유일사상이나 종교 원리주의자, 유일신교가 무서운 거예요. 목숨 걸고 지키려 드니까요. 자기의 인식을 객관화시켜 확신해버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문제를 풀려면 자기 동네에서 나오면 돼요. ‘어, 동산이 아니네’ 하고 알면 돼요. 끼고 있던 안경만 벗으면 됩니다. ‘어, 빨간색이 아니네’, ‘어, 파란색이 아니네’ 이렇게 알면 이 문제는 해결이 돼요. 안경을 벗는 것, 자기 마을에서 나오는 것이 깨달음이에요. 무지에서 벗어나면 저절로 해결이 됩니다.
그런데 이 세상 사람들이 다 무지에서 벗어날 수 있고 안경을 벗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날 때부터 안경을 끼고 있기 때문에 자기가 안경을 끼고 있는 줄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런 확신이 드는 거예요.(모두 웃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런 철학적이고 합리적인 설명을 잘 듣고 ‘아, 내 눈에는 빨갛게 보이는구나’라고 아는 것입니다. ‘빨갛다!’가 아니라 ‘내 눈에는 빨갛게 보이는구나’이고, ‘파랗다!’가 아니라 ‘내 눈에는 파랗게 보인다’라는 거예요. 그러면 서로 견해가 달라도 갈등이 안 생겨요. ‘저 벽은 색깔이 빨개!’ 이게 아니라 ‘내 눈에는 빨갛게 보여’라고 하면 상대가 ‘어, 그래? 네 눈에는 빨갛게 보이는구나. 왜 내 눈에는 파랗게 보이지?’라고 합니다.
그러면 연구를 하게 돼요. 왜 한 사람 눈에는 빨갛게 보이고, 다른 사람 눈에는 파랗게 보이는지 원인을 연구하게 되겠죠. 상대가 ‘빨갛다’라고 해도 미친놈이라느니 눈 삐었다느니 하지 않고 ‘음, 저 사람 눈에는 빨갛게 보이는구나. 저 사람은 저렇게 생각하는구나. 저 사람 입맛은 저렇구나. 저 사람 취향은 저렇구나’라고 인정할 수 있어요. 그러니 첫째, 서로 달리 보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게 중요합니다. 서로 다르다는 걸 인정해야 해요.
둘째, 상대를 이해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 사람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들은 그렇게 알고 행동할 수도 있다,’ ‘그 사람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이게 이해입니다. 이해는 옳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아, 내가 그 사람 말을 이해했다’ 이 말은 ‘그 사람 말이 옳다’는 말이 아니에요. ‘네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하고 말할 수도 있겠네’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북한과 남한이 같아야 한다고들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우리 눈에 저쪽은 미친놈들로 보여요. 사실 우리와 저들은 서로 달라요. ‘서로 다르니까 그들의 처지에서 보면 그렇게 볼 수도 있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 이러면 화가 안 일어나요. 그들이 하는 게 잘했다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그러면 다음으로는 ‘이 문제를 어떻게 풀까?’ 하고 연구를 해야 하겠죠. 서로 달리 인식해도 같이 한 집에 사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어요. 예컨대 음식을 만들었는데 한 사람은 짜다고 하고, 한 사람은 싱겁다고 하면 보통은 싸웁니다. 한쪽은 ‘소금만 먹고 살았나, 그게 뭐 싱겁냐’ 이러고, 상대는 ‘저거는 간도 볼 줄 모르냐’라고 합니다. 부부가 사는데도 그렇게 생각이 달라요. 그런데 저 사람은 자기 혓바닥에 길들여진 습이 그런 거예요. ‘저 사람 입맛에는 싱겁겠다’, ‘저 사람 입맛에는 짜겠다’ 이렇게 이해하면 해결이 얼마나 쉬워요? 오늘 이야기 듣고 집에 들어가면 싸울 일이 없을 거예요.(모두 웃음)
갈등이 있어도 ‘애 입장에서는 공부하기 싫겠다. 애 입장에서는 게임하고 싶겠다. 쟤 입장에서는 저럴 수도 있겠다’, ‘아내 입장에서는 저럴 수도 있겠다,’ ‘남편은 저럴 수도 있겠다’라고 이해하면 갈등이 쉽게 풀립니다. 상대를 이해한다고 해서 상대가 잘 했다거나 못 했다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접근하지 않고 ‘이게 미쳤나!’ 이렇게 접근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면 대화를 해도 그건 대화가 아니라 설득입니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으니 네가 틀린 줄 깨닫도록 해 주겠다’라는 거예요. 자기가 어리석은 줄 모르고 남을 깨쳐주려고 합니다. 그게 말로 하다 안 되면 폭력으로 가는 거예요.
이런 데서 우리가 우리 사회에 대한 기본 인식을 새로이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 사회는 갈등이 많다고들 하잖아요. 그러나 갈등은 한국 사람만 겪는 게 아니라 전 세계가 다 겪어요. 어느 집에도 다 있고, 어떤 사람 관계에서도 다 있어요. 갈등이 없는 곳은 없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자기를 객관화하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를 고집해서 갈등이 일어나더라도 금방 ‘어, 내가 나를 고집하는구나. 내가 내 입장을 고집하구나’ 이렇게 자각을 해나간다면 서로 다른 속에서도 조화를 이루면서 공존할 수 있습니다.
그런 관점을 가지고 우리 사회의 문제를 바라보면 돼요. 사람들이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데는 다 환경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그는 그 집에서 그렇게 자랐기 때문에, 그렇게 교육받았기 때문에, 그 지방에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거예요. 북한 사람과 남한 사람을 보더라도 북한 사람은 거기서 태어나서 거기서 자랐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고, 우리는 여기서 태어나 자라서 여기서 교육받았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한쪽은 빨간 안경을 끼고, 한쪽은 파란 안경을 끼듯이 사고의 틀이 서로 다른 거예요. 그런 관점에서 사물을 보면 갈등 해결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상대를 이해하고 인정한다고 해서 꼭 그게 맞다는 것도 아니고, 그게 틀렸다는 것도 아니에요. 그저 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이런 데서 우리는 첫째로 서로 다름을 인정해야 합니다. 신앙체계든 사고방식이든 서로 다른 걸 인정하고 이해하면 분노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지만 우선 분노가 안 일어납니다. 분노가 안 일어나면 합리적인 해결책을 함께 찾아갈 수 있습니다.”
굉장히 어렵게 설명되어질 수도 있는 내용이었는데, 스님의 설명은 쉽고 간명했습니다. 아마 대학교 철학 교수가 강의를 했다면 더 어렵게 설명했을 것 같습니다.
스님은 이렇게 갈등이 생기는 이유에 대해 설명을 한 후 다음은 우리 사회에서 벌어진 구체적인 사례를 갖고, 갈등을 어떻게 풀어나갈 수 있는지 설명해 주었습니다. 8.15 건국절 논란, 원자력 발전소 유치 문제, 노동자와 자본가의 갈등, 남북의 갈등, 여야 갈등 등 다양한 현안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그 해법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들을 들려주었습니다.
그 중에서 4대강 개발 문제로 우리 사회가 첨예하게 대립했던 것에 대해서는 이런 해법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생겨났던 구체적인 예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4대강 개발 잘 아시죠? 개발론자는 4대강 문제를 개발의 관점에서 봅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 성장동력이 없잖아요. 그런데 경제성장 지표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생각해보면, 땅을 팠다가 그 자리를 다시 메워도 땅을 파는 활동과 땅을 메운 활동이 모두 경제활동에 들어갑니다. 그러니 어쨌든 4대강 개발을 하면 그냥 맨땅을 팠다 메우는 것보다는 낫다는 거예요. 어쨌든 성장에 들어가니까요.
그런데 환경론자의 입장에서는 ‘왜 가만히 있는 강을 파 뒤집어서 헛돈을 쓰냐’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서로 갈등이 생기는 거예요. 개발론자 입장에서는 ‘너희는 아무것도 모른다. 너희가 경제를 아느냐? 가만히 앉아서 환경 이야기만 한다고 누가 밥을 먹여주냐? 지금 경제가 얼마나 어려운데!’ 이렇게 생각하고, 환경론자 입장에서는 ‘왜 가만히 있는 강을 건드리느냐? 구불구불하게 흐르는 걸 똑바로 해봤자 달라지는 것도 없는데 왜 거기다 돈을 수십조씩 집어넣느냐? 지금 돈만 들어가는 게 문제가 아니라 나중에 유지관리하고 생태계를 복원하는 비용이 지속적으로 엄청나게 들어가게 된다’ 이렇게 해서 갈등이 충돌합니다.
이런 충돌은 있을 수 있어요. 환경론이 무조건 옳다거나 개발론이 무조건 옳다는 게 아니라, 견해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이런 충돌이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가난한 나라에서는 개발론자들이 10대 1 정도로 절대적 우위이기 때문에 충돌이 있어도 큰 문제가 안 돼요. 반면 독일처럼 개발이 이미 이루어진 나라에서는 환경론자들이 훨씬 우세하기 때문에 개발론자들이 개발을 하려 해도 아예 시작을 하기가 힘들어요.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 이 둘이 충돌한다는 건 어느 정도 먹고 살 만 하다는 뜻입니다. 과거의 개발 중심 논리, 즉 ‘아직 좀 더 성장해야겠다’라고 하는 논리가 남아 있는 가운데 ‘이만큼 해서 충분하니 더 이상은 안 된다’는 논리가 나와서 충돌하는 거예요. 세대로 구분한다면 개발론은 나이든 사람의 지지가 많고 환경론은 젊은 사람의 지지가 많습니다.
이런 충돌이 일어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느 한쪽이 양보하면 좋지만 누구도 양보를 못하겠다면 타협을 해야 합니다. 예컨대 4개 강 전부가 아닌 1개 강을 먼저 해보고, 그 결과에 따라 나머지를 할지 말지 정하는 거예요. 첫 번째 강을 한번 해보고 2년쯤 지켜봐서 괜찮으면 다른 곳도 마저 하고, 안 괜찮으면 하지 말자고 하든지요. 그렇게 한다면 어느 강을 할지를 두고 또 싸우겠죠. 그러면 4개 강을 다 하되 일부 구간만 해보자고 할 수도 있어요. 영산강도 일부 구간, 낙동강도 일부 구간, 금강도 일부 구간, 이렇게 각자 일부 구간만 해서 그 중에 홍수 피해니 물 저장이니 하는 개발론자의 주장 중에 환경론자가 그래도 조금 수긍할 수 있는 구간이 있다면 양해를 하는 거예요. 그렇게 일부 구간을 해보고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어요.
이게 타협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당연히 일부 극단적 개발론자는 ‘다 해야지, 왜 일부만 하느냐?’ 이렇게 반대하고, 일부 극단적 환경론자는 ‘애초에 잘못된 건데 일부 구간이라 해도 왜 하느냐? 아예 안 해야지’라고 반대하겠죠. 그러나 이렇게 두 세력이 대치하는 이 인연에서는 타협을 하는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결과적으로는 ‘개발한 게 잘못됐다’라는 판단이 나오거나 ‘그때 한꺼번에 개발을 했어야 하는데 찔끔찔끔 해서 돈만 헛되이 썼다’라는 판단이 나온다 하더라도 이 현실과 조건에서는 이게 바른 길이라는 겁니다.
바른 길을 ‘중도’라고 하는데 이걸 ‘시중’이라고 해요. 이 시점, 이 조건에서는 이게 중도라는 뜻입니다. 중도, 즉 바른 길이라는 게 꼭 어떤 하나로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이 인연에서는 그렇다는 거예요.
우리가 어떤 문제를 풀 때 자기만 옳은 게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상대가 주장하는 바에 다 끌려가라는 게 아닙니다. 어쨌든 민주주의 사회란 갈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해나가는 거잖아요. 물론 각자 주장은 할 수 있지만요.
동네 사람들끼리 원수가 되어 싸우다가도 사람이 죽으면 문상을 갑니다. 그런데 지금 남한에서는 만약 누군가가 북한에 가서 김일성 묘소를 참배하고 오면 난리가 나요.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자기들 왕국의 시조인데, 시조의 묘소에 가서 참배하라고 하는 것이니까 해야 할 거 아니에요? 그게 싫으면 아예 안 가든지 해야죠. 우리나라 대통령이 미국에 가면 미국 국립묘지에 헌화해야 하듯이, 그 나라 사람들이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데에 가자고 하면 가줘야 할 거 아니에요. 그런데 북한 갔다가 돌아오면 거기 참배했다고 처벌합니다. 예전에 일본 수상이 방한해서 두 정상이 불국사에 간 적이 있어요. 그런데 일본 수상은 법당에 들어가서 절하고 우리나라 대통령은 법당 밖에 서 있었어요. 자기는 기독교인이어서 법당 안에 안 들어간다는 거예요(모두 웃음)
이런 모습이 바로 우리의 사고가 너무 경직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그래서 상대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필요해요. 존중한다는 건 받들어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것을 ‘존중한다’고 합니다. ‘남편을 존중한다’ 이 말은 ‘남편이 훌륭합니다’라고 하는 게 아니에요. 남편이 나와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사람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 하고 이해하는 것을 ‘존중’이라고 하는 거예요.”
구체적인 사례를 듣고 나니 ‘중도’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존중’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더욱더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수강생들이 스님의 이야기에 완전히 몰입이 되어 분위기가 한층 무르익어 가던 찰나에 벌써 약속한 2시간이 다 지났습니다. 아쉬워하는 수강생들에게 사회자가 양해를 구하자, 마지막으로 스님은 정리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갈등을 얼마든지 해소할 수 있습니다. 해결이 불가능한 게 아니에요. 조금만 이렇게 대화하고, 토론하고, 관점을 조정하고, 이해관계가 있으면 이해관계를 조정하면 됩니다.
예컨대 ‘무상급식을 할 거냐, 언제까지 할 거냐’ 이런 논란도 그래요. ‘급식할 거냐, 말 거냐’ 하는 문제는 이제 더 이상 논쟁 거리가 안 돼요. 무상급식은 해야 해요. 하긴 하되 예산을 고려해서 몇 년도까지는 초등학교까지 하고, 몇 년도까지는 중학교까지 하고, 몇 년도까지는 고등학교까지 하자는 식의 순서와 절차가 남은 거예요. 이것은 반독재운동이나 독립운동 같은 게 아니란 말이예요. 독립운동은 중간에 타협하면 야합이 되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독립운동과 반독재 운동을 하면서 상대를 적으로 규정하는 사고방식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무상급식 문제 같은 것도 상대와 타협을 하면 ‘야합’이라고 비난해요.
그런데 이제 시대가 달라졌어요. 상대가 더 이상 적이 아니에요. 보수가 적이 아니고, 진보가 적이 아니고, 야당이 적이 아니고, 일본도 적이 아니에요.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적절하게 협력해서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가 사물을 바라본다면 가정사든 사회적인 문제든 남북 문제든 동아시아의 갈등 문제든, 여러 갈등들을 좀 완화시켜 나갈 수가 있습니다.
당이나 정치권이 분화된다고 해서 꼭 갈등이 심화됐다고 볼 게 아니에요. 그런 현상에는 어쩌면 지금 우리 사회의 한 측면이 반영되어 있는 거예요. 부부가 헤어진다고 반드시 나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이 좀 경직돼서 갈등이 생긴 경우라면 헤어진 뒤에 반드시 후회합니다. 서로 대화해서 합리적인 해결책을 찾아보니 ‘너도 불편하고 나도 불편하니 서로 헤어져 살자’ 이런 것은 괜찮아요. 일본에서 요즘 노인들이 ‘이혼’을 하는 게 아니라 ‘졸혼’을 한다고 하잖아요. 서로가 미워서 같이 못 살고 헤어지는 게 이혼이고, 서로 미운 건 아니지만 서로가 서로를 너무 속박하고 있으니까 합의해서 헤어지는 게 졸혼이래요.(모두 웃음)
이런 관점에서 사물을 보자는 겁니다. 분화는 돼야 해요. 분화가 되면서 통합을 해야 해요. 하나로 무조건 뭉치는 게 아니라, 손가락이 다섯 개로 나눠지면서 한 손에 붙어 있어야 작용을 잘 한다는 거예요. 하나로 죄다 뭉뚱그려도 안 되고, 이걸 다 따로따로 떼놔도 안 되고, 나누어지면서 하나로 통합을 해야 해요. 이것을 ‘분권과 통일’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통일도 이런 관점에서 봐야 해요. 남이니 북이니 이렇게 보지 말고요. 지방자치를 강화해서 남한부터 먼저 나누고, 북한도 나누되 그러면서도 다시 하나로 합치면 ‘북한이 남쪽에 흡수되니, 안 되니’ 이런 말이 없어질 수 있습니다. 독일은 그렇게 통일됐어요. 독일연방 안으로 동독도 서독도 각 주별로 나뉘어서 들어온 거예요.”
대화하는 것을 야합으로만 보는 우리들의 시선은 개선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에 많은 분들이 공감을 표했습니다. 달라진 시대를 이야기하며 통일까지 시야를 확대시켜 준 부분도 무척 좋았습니다.
마지막에 통일에 대해서도 큰 그림을 그려주자 수강생들은 큰 박수로 스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아쉽게도 시간이 다 되어 추가 질문은 받지 못하고, 스님은 강당을 나왔습니다. 수강생들은 이어서 평화재단 소개 영상을 시청한 후 오늘 강연을 들은 내용에 대해 조별 토론 시간을 가졌습니다.
다음주에 조민 교육원 원장님과 함께하는 라운드테이블을 끝으로 평화리더십아카데미 14기도 모두 종강을 하게 되는데, 끝무렵이 되어서 그런지 모두들 아쉬운 마음과 함께 더욱 열띤 토론을 펼쳤습니다. 어떤 분은 “스님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관점이 열리고, 부부싸움도 이제 덜 하게 될 것 같고, 사회 갈등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알게 되었고, 가슴이 시원해졌다”며 기쁜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평화재단을 나온 스님은 다시 서울 정토회관으로 들어온 후 오늘 일정을 마쳤습니다. 내일도 아침 7시부터 평화재단에서 하루 종일 미팅과 회의 일정을 가진 후 저녁 7시에는 부천시청 어울마당에서 ‘통일이야기’를 주제로 즉문즉설 강연을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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