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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오전 10시 30분에 수원 SK아리트리움에서 수원시민들을 위해 즉문즉설 강연을 한 후 저녁 7시에는 대전으로 이동하여 충남대 정심화홀에서 대전시민들을 위해 즉문즉설 강연을 했습니다.
전날 단비가 내려서 그런지 4월 내내 이어지던 미세 먼지 가득 찬 뿌연 공기가 한풀 씻겼습니다. 맑고 상쾌한 날씨처럼 수원 SK아트리움에서 열린 즉문즉설 또한 가슴 속까지 뻥 뚫리는 청량함을 선사해 주었습니다.
날씨, 시간, 장소를 가리지 않고 수원 곳곳을 누비며 홍보에 힘쓴 수원정토회 회원들의 홍보 덕분인지 강연 시작 두 시간 전인 아침 8시 30분부터 청중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입장 직전인 9시 30분에는 행사장 로비 밖까지 그야말로 큰 뱀이 꿈틀 대는 듯 장사진을 이루었습니다.
지난 번 같은 장소에서 열린 강연에서 1000석의 자리가 다 차서 100여명이 돌아갔었는데, 이번 강연 역시 평일 오전임에도 1000석이 꽉 차서 100여명은 돌아가고, 90여명은 로비에서 모니터로 강연을 마지막까지 경청했습니다.
▲ 강연장이 만석이 되어 로비에 남은 시민들
질문자 신청은 추첨식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졌는지 전과는 다르게 강연장에 오자마자 질문신청 부스를 찾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질문 신청자들은 로비 한 쪽에 앉아서 백일장에 참여하듯이 자신의 문제를 글로 풀었습니다. 질문자가 많아서인지 질문함은 반 이상 찼습니다.
1,2층 강연장을 가득 메운 1000여 명의 청중들은 스님이 나오자 모두 환한 표정과 큰 박수로 환호했습니다. 스님은 강연을 시작하기에 앞서 즉문즉설에 어떻게 참여하면 되는지 간단히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즉문즉설에 어떻게 참여하면 되는지 잘 아시죠? 질문이 있거나 자기 의견이 있거나 의문이 있으면 그냥 내지르면 돼요. 옆 사람 눈치 볼 것 없이 속 시원하게 가슴 터놓고 이야기하시면 됩니다. 여기 온 사람들은 누가 누구인지 서로 몰라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이야기하고, 스님 이야기가 마음에 안 들면 반론도 제기하고, 의문이 안 풀리면 끝까지 마이크를 쥐고 제가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계속 이야기 해야 해요. 어지간한 경우가 아니면 제가 그만하란 소리를 안 합니다.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말이 나올 때까지 마음껏 하세요. 혼자서 한 시간 내내 해도 괜찮아요. 다른 사람들이야 듣기가 싫으면 나가겠죠. 하하하.(모두 큰 웃음)
여기에 돈 내고 온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요. 혹시 돈 내고 온 사람 있어요?”
“아니요.”
“네. 모두 무료 강의예요. 저도 무료입니다. 강연을 준비하시는 분들도 다 자원봉사자들이에요. 그래서 시민들 누구나가 선착순으로 참석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많은 분들이 오셨네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질문함에 질문이 너무 많이 들어와서 스님은 거두절미하고 바로 즉문즉설에 들어갔습니다.
총 7명이 질문을 했는데, 오늘은 그 중에서 딸이 아홉 살 된 손자를 때려 때리지 말라고 말리는 과정에서 딸과 싸운 것이 고민이 되어 딸과 연락을 끊고 산다는 60살 여성분의 질문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제 딸이 아홉 살 된 자기 아이를 잘못했다며 제 앞에서 때렸어요. 제가 때리는 걸 말렸더니 딸이 저한테 실수하는 거라며 굉장히 화를 냈어요. 그래서 딸과 싸웠습니다. 저는 ‘아이가 크게 잘못한 것도 아닌데 왜 아이를 때리느냐’라고 했고요. 딸은 부산에 살고 저는 수원으로 돌아왔는데 한 달 반째 전화 통화를 안 하고 있어요.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서 고민 중입니다.”
“딸에게 전화를 다시 하고 싶어요? 하기 싫어요?”
“전에는 늘 제가 먼저 했는데 이번에는 안 하고 싶어요.”(모두 웃음)
“혼내주고 싶고 버릇 고치고 싶어서요? 그런 목적으로 전화를 안 한다면 안 고쳐져요. 딸은 누구 닮았을까요?”(모두 박장대소)
“......”
“질문자는 아이 키울 때 안 때렸어요?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질문자가 잊어버린 거겠죠. 딸의 버릇을 고치려면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딸이 손자를 때릴 때 질문자도 딸을 때려보지 그랬어요?”(모두 웃음)
“아, 그래서 저도 큰 소리를 냈어요.”
“큰 소리를 낼 게 아니라 때리라고요.”
“이야기는 하고 왔어요. ‘또 때리면 나도 널 때릴 거다’라고 했어요.”
“그렇게 해도 되긴 됩니다. 그런데 요즘은 내 자식이라도 때리면 안 된다고들 하죠? 그리고 요즘 뉴스에 보면 아이를 학대하는 부모들 가끔 나오죠? 질문자가 볼 때 아이를 때리는 정도가 학대하는 수준이라면 그때는 신고를 해야 해요. 내 딸이라도 신고를 해야지, 내가 딸을 때리면 내가 폭행죄로 들어가게 돼요. 스님 말을 잘 들었다면 때리면 안 돼요. 알았죠?(모두 웃음)
그런데 가능하면 관여하지 않는 게 좋아요. 내가 봤을 때 학대하는 수준은 아니라면, 남의 일에는 간섭을 안 하는 게 좋아요.”
“그런데 딸이 나무 몰딩으로 때렸거든요. 그래서 제가 말렸어요.”
“그래서 상처가 났어요?”
“아뇨, 때리기 전에 제가 못 때리게 말렸죠.”
“질문자가 없었으면 안 때렸을 거예요. 겁주려고 하는 건데 질문자가 너무 미리 나선 것일 수도 있어요.”
“아, 그런가요? 그래도 한 대는 맞았어요.”
“그 정도는 괜찮아요. 개입하는 게 좋지 않다는 건 이런 뜻입니다. 예를 들어 아내가 아이를 야단치는데 남편이 개입하거나 남편이 아이를 야단치는데 아내가 개입하는 건 좋지 않아요. 그러면 조그마한 아이가 벌써부터 엄마가 뭐라고 하면 아빠한테 딱 달라붙고, 아빠가 뭐라고 하면 엄마한테 딱 달라붙는 기회주의자가 됩니다. 자기가 잘못한 걸 반성하지 않고요. 그래서 할머니가 아이들을 귀해 하는 것은 좋지만 ‘할머니 손에 자라면 아이 버릇 망친다’는 옛말이 있잖아요. 남의 자식 키우는 것에는 관여를 안 하는게 좋아요.”
“그런데 저는 어린애들이 맞았다면서 방송에 나오는 걸 보면 그날 밤에 잠을 못 자요.”
“네, 그건 잘못됐어요. 때리는 건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데 질문자가 거기에 관여하면 더 잘못되기 쉬워요. 질문자의 딸은 질문자가 키웠잖아요. 질문자가 딸을 키울 때 딸을 학대했어요? 안 했어요?”
“학대는 안 했어요.”
“그러면 딸도 절대로 자기 자식을 학대하지 않을 테니까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학대를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학대받으면서 자라서 자기도 모르게 자식을 학대하게 돼요.”
“그런데 딸이 별로 성질이 안 좋아요.”(모두 웃음)
“질문자가 보기에 자기 딸이 성질이 안 좋다면 질문자도 성질이 안 좋아요.(모두 웃음) ‘내림’이라는 게 있어요. 딸이 아이한테 짜증내고 성질내면 ‘나는 몰랐는데 나도 딸에게 저랬겠구나’ 이렇게 알면 돼요. 그래서 오히려 그럴 때는 딸한테 ‘아이고, 내가 너한테 미안하다’라고 해야 합니다. ‘엄마가 왜?’라고 하면 ‘네가 아이한테 하는 걸 보니 나도 너한테 그랬겠다. 나는 몰랐는데, 이제 생각해보니 네가 어릴 때 내가 너한테 짜증을 많이 냈겠다고 알게 됐다. 그래서 내가 사과한다’ 이렇게 하면 돼요.”
“그렇게 하면 돼요?”(모두 웃음)
“질문자는 그렇게 안 했겠죠.”
“아뇨. 딸한테 미안하다는 편지를 써놓고 오긴 왔어요.”
“그 때의 ‘미안하다’는 ‘내가 지금 너한테 짜증내고 성질내서 미안하다’라는 이야기잖아요. 그게 아니라 ‘네가 네 아이한테 짜증내는 걸 보니 나도 예전에 네게 그랬겠구나. 그래서 미안하다’라는 거예요. 질문자의 딸도 아이에게 짜증낸 걸 나중에는 기억 못할 거예요.”
“하여튼 제가 보면 딸이 손자한테 짜증을 많이 내요.”
“그런데 딸은 자기가 짜증낸 줄을 나중에 가면 모른다니까요.”
“그러면 이번에는 제가 전화해야 해요?”(모두 웃음)
“전화하고 않고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딸이 아이에게 자꾸 짜증을 내는 것을 보았을 때 ‘내가 저 애를 키울 때 짜증을 많이 냈구나’ 이걸 질문자가 깨달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딸의 모습이 내 거울이니까요.”
“저는 그렇게 짜증을 많이 안 낸 걸로 알고 있는데요.”(모두 박장대소)
“질문자가 지금 객관적으로 보기에 딸이 손자에게 신경질을 많이 내는 것 같다면 질문자도 딸이 어릴 때 딸한테 신경질을 많이 냈다는 거예요. 이게 거울인 줄 질문자가 깨달아야 해요. 그래서 지금 딸이 하는 걸 보면서 ‘아, 저래서는 아이한테 안 좋겠다’ 싶으면 ‘아, 나는 그때 별 문제의식 없이 내 성질대로 그냥 애 잘 키운다고 했는데 그게 아이한테는 상처가 됐겠다’ 이렇게 질문자가 자각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딸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질문자가 참회를 해야 해요. ‘아이고, 미안하다. 네 하는 걸 보면서 네가 참 손자한테 잘못한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널 키울 때 너한테 그렇게 했겠구나. 나는 그냥 너 키울 때 힘들었다는 생각밖에 없었지만 네가 어릴 때 엄마한테 상처 입은 게 많겠다는 걸 내가 깨닫게 됐다. 미안하다. 옛날 일을 돌이켜서 사과할게’ 이렇게 해야 한단 말이에요.”
“그런데 딸이 일곱 살 때까지 할머니 손에 컸거든요. 이어서 아들이 태어나니까 시어머니가 딸을 데려가서 키웠고요. 그리고 유치원 들어가면서 저한테 와서 컸거든요.”
“딸이 상처를 입었다면 그 상처는 할머니한테서 받았을 거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죠? 아이고, 참.”
“그러지 않았나 싶어서요.”(모두 웃음)
“오늘 아주 좋은 사례를 얘기해 주시네요. 그래서 할머니가 손자를 봐주면 안 된다는 거예요. 결과가 나쁘면 다 할머니 때문에 아이 버렸다고 하잖아요. 돌봐주면 저런 일이 벌어지니 절대로 돌봐주면 안 됩니다. 질문자도 손자한테 괜히 관심 가지면 나중에 또 그런 욕을 얻어먹어요. 그러니 신경 쓰지 말아야 해요. 손자를 돌봐주면 대부분 이렇게 말합니다. ‘아이고, 애가 왜 저러냐? 제 할머니 닮았나? 제 할머니 손에 크더니 애가 저리 됐구나’ 이런 식으로 이야기한단 말이에요.”
“그러면 제가 전화해야 돼요? 스님?”(모두 웃음)
“전화하고 안 하고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질문자는 딸이 손자한테 하는 걸 보면서 ‘애가 야단맞아야 해. 저래야 애가 잘 크지’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조그마한 애가 뭘 안다고 저렇게 짜증내고 성질내느냐? 한 번 해서 안 되면 두 번, 세 번 설득을 하지’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예, 잘 알겠습니다.”
“잘 알겠다고 꽁무니 빼지 말고 이야기해 봐요. 짜증내고 자기 성질대로 하는 게 좋아요? 아이한테는 좀 차근차근하게 대하는 게 좋아 보여요?”
“차근차근한 게 좋아 보이죠.”
“질문자도 딸한테 그렇게 했었으면 좋았을텐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60이에요.”
“질문자는 지금 60살이나 되었는데도 딸이 손자한테 그럴 때 조용히 딸을 불러서 ‘얘야, 아직 어린 아이인데 그렇게 하면 안 좋지 않냐?’ 이렇게 차근차근 이야기하지 않잖아요. 60살이나 되었는데도 ‘애한테 그러면 어떡하냐!’ 이렇게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그 딸도 아이한테 ‘조그마한 게 왜 말 안들어!’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모두 웃으면서 큰 박수)
“네.”
“교회 다녀요?”
“절에 다녀요.”
“이런 사람은 교회를 다녀야 해요. 교회에서는 이런 걸 ‘남의 눈의 티끌은 보면서 제 눈의 대들보는 못 본다’라고 해요. 내가 잘못한 건 하나도 모르고 딸이 잘못한 것만 눈에 보이는 거예요. 교회를 다녔으면 이런 걸 빨리빨리 깨달았을 텐데 절에 다니면서 복만 비니까 모르잖아요.”(모두 웃음)
“그리고 제 딸이 정토회 홈페이지와 법륜 스님의 카카오스토리 희망편지, 즉문즉설 유튜브 동영상을 많이 봐요.”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정토회에는 절대 그런 딸 없어요. 애를 때리면서 야단치는 사람은 정토회 회원이 아니에요.”(모두 웃음)
“그런데 딸이 저한테 법륜 스님의 카카오스토리를 보여주면서 정토회를 알게 해줬어요.”
“아이고, 창피하다. 그 이야기를 왜 지금 해요?”(모두 웃음)
“잘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모두 박수)
“다시 말씀드릴게요. 질문자의 딸이 어린아이에게 하는 것은 다른 데서 배워온 게 아닙니다. 자기도 어릴 때 엄마인 질문자에게 받았던 게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거예요. 아이를 딱 보면 그냥 팍 짜증이 나고 성질이 나는 거지, ‘야단쳐야지’ 하고 의도해서 하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의도하지 않고 저절로 나오는 건 다 환경에서 형성된 거예요. 이걸 업식이라고 해요. 이건 거의 다 엄마로부터 물려받은 거예요. 질문자도 지금 다 큰 딸한테 자기 성질대로 이야기하잖아요. 그러니 딸의 모습을 거울삼아서 자기를 되돌아봐야 합니다.
엄마가 자기 아이에게 야단을 칠 때는 그 엄마를 존중해줘야 해요. 그래서 주변에 사람이 없을 때 딸을 조용히 불러서 ‘아이고, 애 키울 때 그러면 안 좋다. 나는 너를 키울 때 몰라서 그렇게 키웠지만 너는 그래도 공부하지 않았니. 그러니까 이렇게 하면 어떨까?’ 이렇게 의견을 이야기하세요.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말고요. 야단을 치고 있는데 그 자리에서 ‘그러면 어떡하냐!’ 이렇게 끼어들면 엄마의 체면이 안 서버려요. 그러면 아이한테 엄마의 교육이 안 먹히고 무시당해요. 할머니가 엄마더러 나쁘다고 하니까 아이도 ‘엄마 나빠!’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나쁜 사람 말을 왜 듣겠어요? 그래놓고도 잘했다고 계속 우길 거예요?”
“아니요, 잘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모두 웃음)
“전화만 할 게 아니라 전화해서 잘못했다고 사과해야 해요.”
“아, 예.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모두 큰 박수)
“할머니가 되어서 자식 집에 가면, 자식 부부가 싸우든, 자기네 아이를 야단치든, 못 본 척 하는 게 제일입니다. 남의 집 일에는 관여하면 안 돼요. 20살 넘은 성인이 스스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가능하면 관여를 안 하는 게 좋아요. 필요 없다는데 자꾸 김치며 감자며 뭘 가져다주는 것도 지나치면 안 됩니다.
아파트나 가정집에서 쓰레기를 분류해서 쓸 만한 걸 골라내는 환경운동 하시는 할아버지가 계세요. 그런데 그 집에는 시장 볼 일이 없대요. 시골에서 시어머니나 친정어머니가 감자며 토마토 같은 걸 박스째로 보내주면 열어보지도 않고 박스째로 갖다버린대요. 다 그렇다는 게 아니라 그런 집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다 가져와서 먹어요. 그런데 그럴 수 있겠다 싶은 이유가 있어요. 백화점이나 마트에 가면 감자든 토마토든 상품을 좋은 것만 담아놓잖아요. 그런데 시골에서 할머니들이 오래 살아온 습관은 어떤 상품을 생산했을 때 좋은 것은 팔고, 중간쯤 되는 건 아들딸한테 보내고, 상품 값어치가 제일 떨어지는 건 자기가 먹잖아요. 서울에서 돈만 주면 사먹는 입장에서는 시골에서 보내온 게 시장에서 산 것보다 겉보기에 안 좋아 보이니까 그냥 폐기하는 거예요. 이건 아들이나 딸이나 며느리가 잘못했다고 말하기도 어려워요.
그러니 이런 건 필요하다고 할 때만 주는 게 좋습니다. 항상 그냥 갖다주면 안 돼요. 김치를 담아서 딸이며 아들한테 가져다준다는 사람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그런데 아무리 부모라고 해도 내 집에 다른 사람이 불쑥불쑥 들어오면 안 좋아하잖아요. 그게 눈치가 보여서 1층에서 전화를 하면 ‘거기 놔두고 가세요’라고 해서 자식 집에 올라가보지도 못하고 김치만 두고 온대요. 추하게 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자청해요? 그렇게 하는 젊은 사람도 문제라고 하지만, 그렇게 하는 어르신들도 스스로 자기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거예요.
며칠 전에도 제가 상담을 하면서 ‘요즘은 딸네 집이나 아들네 집에 갈 때도 미리 전화하고 가야 한다’라고 했어요. 그러자 누가 말하길, ‘아버님 오실 때 전화 좀 하고 오세요’라는 말을 듣고 너무너무 섭섭해서 1년을 안 갔대요.(모두 웃음) 섭섭하게 생각하면 섭섭하지만 또 생각해보면 이해가 돼요. 부부끼리 편하게 살다가 부모든 시부모든 오면 약간은 신경 쓰이잖아요. 미리 전화를 주면 조금이라도 준비를 할 수 있지만 어느 날 갑자기 덜컥 초인종 누르고 들어오면 부담스럽잖아요. 꼭 신고를 하고 가라는 게 아니라, 서로 사는데 약간의 예의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질문자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면 그래요. 일단 결혼을 하면 독립된 가정을 이룬 거잖아요. 거기 가서 간섭을 하는 건 좋은 게 아니에요. 딸네 집이어서 그나마 덜 하지, 아들네에 가서 그랬으면 쫓겨났을 거예요.(모두 웃음) 딸네 집이니까 그렇게 한 번 싸우고 한 달 전화 안 하는 정도로 그치죠. 며느리 집에 가서 자꾸 그렇게 하면 아들이 혼자 살아야 해요. 요즘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요.(모두 웃음)
어쨌든 질문자가 딸의 모습을 보고 ‘아, 내가 아이를 키울 때 나도 저렇게 키웠구나’ 이렇게 반성하면서 자기를 돌이킬 일이지, 간섭할 일은 아닙니다. 알았어요?”
“네.”
질문한 60살 여성분은 마침내 환한 웃음을 보였습니다. 질문자가 마음이 편안해질 때까지 반복해서 친절히 설명해주는 스님의 자상한 모습에 잔잔한 감동이 일었습니다. 질문자가 조금 더 편안해지기를 기원해 봅니다.
이 외에도 아이를 출산했는데 친정 엄마가 집에 오시면 부담스럽고 안오면 섭섭하다는 30대 여성, 자신이 일중독인지 묻는 40대 기혼 여성, 온가족이 트럭에 부딪치는 교통사고를 당한 뒤 삶이 무의미 해져 사고 전의 활기찬 삶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40대 여성, 야권이 총선에서 이겼으니 이제 개성공단을 다시 되돌릴 수 있는지 묻는 60대 남성, 부모님이 사이가 좋지 않아 아버지를 요양원에 모시고 죄책감을 느끼는 40대 여성까지 총 7명의 다채로운 삶의 고민이 이어졌습니다.
이번 강연은 자신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내어놓는 질문자들, 어떤 문제든 지혜롭게 풀어주고 북돋워 주는 스님, 두 시간 반이 넘는 강연임에도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처음이나 마지막이나 같은 자세로 집중해서 듣는 청중,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함께한 봉사자까지 모두가 출연하는 큰 공연처럼 느껴졌습니다. 처음에는 질문자 개개인의 지극히 사적이고 개별적인 고민이었는데, 스님과 질문자의 대화를 듣다보면 어느새 내 이야기가 되고 우리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2시간 30분 동안의 강연을 마무리하면서 스님은 나도 행복할 권리가 있고, 상대도 행복할 권리가 있음을 강조해 주었습니다. 마지막 정리 말씀이 오래도록 여운이 남았습니다.
“여기 연세 드신 분들은 잘 들으세요. 아무리 자식이 어렵다고 해도 내 먹을 것, 내 집, 일정한 수준의 재산은 죽을 때까지 갖고 있어야 합니다. 내어주면 자식이 돌봐준다는 말을 믿으면 절대로 안 돼요. 정 아무것도 없으면 보따리에 신문지라도 둘둘 말아서 늘 껴안고 있어야 해요. 그래야 자식들이 ‘뭐가 있나’ 싶어서 한 번이라도 더 옵니다.(모두 웃음)
자기 사는 것까지 포기하면서 자식에게 지원해주는 건 헌신이 아니라 바보 같은 짓이에요. 자기가 자기 사는 걸 최소한도로 단도리 하는 것은 욕심이 아니라 생존의 본능입니다. 그걸 넘어가면 욕심이에요. 그러니까 그걸 나쁘게 생각하면 안 돼요. 자기에게 주어진 권리를 찾지 못하는 것은 바보이지 착한 게 아니에요. 요즘 착한 바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남의 권리를 침해하는 건 나쁜 사람이에요. 우리는 남의 권리를 침해하지 말아야 하지만 자기 권리도 행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민주시민이 되셔야 합니다.
나도 행복할 권리가 있지만 내 배우자도 행복할 권리가 있고, 내 자식도 행복할 권리가 있고, 내 부모도 행복할 권리가 있고, 내 회사에 다니는 직원도 행복할 권리가 있습니다. 일하는 지위가 서로 다를 뿐 그 사람도 다 누군가의 소중한 아들 딸이고 중요한 사람들이에요. 그러니까 식당에서 종업원 한다고 함부로 사람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그 사람이 맡은 역할이 그것일 뿐이에요. 우리가 그런 정신으로 산다면 지금보다 훨씬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강연이 끝나고 로비에서 진행 중인 책 사인회장으로 나가 보았습니다. 다른 때 보다 긴 사인줄에도 스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분 한 분의 눈을 맞춰주었고, 미처 스님과 눈을 맞추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눈을 맞춰야지’ 하며 시원하게 웃어주기도 했습니다. 틈틈이 농사를 짓느라 그런지 검게 그을린 손이 사인을 할 때 유독 눈에 띄었습니다.
사인회를 마치고 권선 정토법당, 수원 정토법당, 영통 정토법당 순으로 봉사자들과 사진을 찍었습니다. 스님은 강연장과 세 법당이 어느 정도 거리에 있는지 일일이 물어본 후 시간이 안 되어 못들른다고 미안한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강연 후 모금함에 감사의 편지와 함께 백만원이 들어있어 봉사자들 모두 감동을 받았습니다. 감사편지에는 이렇게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안녕하세요. 법륜 스님 덕분에 매일 감사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제가 깨달은 바에 비하면 약소한 금액이지만 좋은 일에 잘 쓰이길 바랍니다. 스님, 늘 건강하세요.
정토회 회원님들 항상 감사드립니다. 참고로, 이 돈은 저의 달라진 모습을 보고 남편께서 기꺼이 보시를 하라고 주셨습니다. 오늘도 행복한 하루 되세요.”
자신의 변화로 고마워하는 남편이 주었다는 백만 원, 그 부부가 느낀 행복의 깊이가 얼마나 컸을지 편지를 통해 전해져 뭉클했습니다.
우리들 각자가 맡은 일은 역할일 뿐이라는 스님의 말씀이 마음에 남습니다. 오늘 내가 돌아갈 내 가정에서의 위치가, 내일 마주할 내 직장의 직책이, 다만 ‘나의 역할’일 뿐 그것이 ‘나’는 아니라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돌아갑니다. 강연장을 나서며 우리는 전보다 더 가볍고 행복해졌습니다.
강연장을 나온 스님은 곧바로 대전으로 강연을 하기 위해 떠났습니다. 대전에 조금 일찍 도착해 찾아온 사회 인사분과 미팅을 가진 후 저녁 7시부터 충남대 정심화홀에서 즉문즉설 강연이 열렸습니다. 대전 강연 소식은 다음 이야기에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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