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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정토회 공동체에서 상주하는 대중들과 함께 경주 남산으로 봄소풍을 다녀온 후 오랜만에 대화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아침 8시에 두북 정토수련원에 도착한 스님은 곳곳에 흩어져 있던 공동체 대중들을 운동장으로 불러 모았습니다.
▲ 두북 정토수련원
대중들이 모두 모이자 오늘 봄소풍 일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다들 안 죽고 살아 있네요. 반갑다는 표현을 경상도 식으로는 이렇게 말해요.(웃음) 오늘 봄소풍 일정에 대해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오전에는 경주 남산을 종주할 거에요. 그런데 몸이 아픈 환자들이 있으니까 오후에는 차를 타고 백운산 자락을 한 바퀴 돌 예정입니다. 소방도로가 나 있어서 차를 타고 가면서도 꽃구경을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남산의 북쪽 상서장에서 출발해서 남쪽 끝 새갓골로 내려오겠습니다. 환자들은 상서장에서 같이 출발을 하되 남산 아래를 차를 타고 돌면서 부처 바위 보고, 보리사 보고, 창림사지 보고, 포석정 보고, 삼불사 보고 오면 되겠습니다. 아시겠죠? 자,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몸이 아픈 환자들까지 배려하는 스님의 깨알 같은 배려에 대중들은 기쁜 마음으로 환호를 했습니다. 또 오랜만에 사무실을 벗어나 자연을 만끽한다는 설레임에 모든 대중들이 들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차량 여러 대에 나눠서 탑승한 후 상서장으로 향했습니다. 대중들이 모두 도착하자 스님은 경주 남산에 대해 개괄적인 설명을 우선 해주었습니다.
▲ 상서장
경주 남산은 정토불교대학에 입학하면 봄과 가을마다 순례를 오게 되는데, 공동체에 상주하는 대중들은 오래 전에 정토불교대학을 졸업한 경우가 많아 오랜만에 스님의 안내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며 무척 기뻐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는 남산은 경주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산이라 부릅니다. 2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하나는 금오산, 하나는 고위산이에요. 고위산과 금오산 사이로 흐르는 계곡이 용장계곡이고, 남북으로 8㎞, 동서로 4㎞로 뻗어 있는 산입니다.
옛날엔 남산에서 옥돌이 많이 났다고 해서 속담에 ‘남산 돌이라고 다 옥돌인가?’ 하는 말도 있습니다. 아무리 남산에서 옥돌이 많이 난다고 해도 남산 돌이 다 옥돌은 아니라는 뜻인데, 쉽게 설명을 드리면 ‘정토행자라고 해서 다 정토행자인가?’ 하는 뜻입니다. 정토행자라고 해도 그 중에는 정토행자가 아닌 사람도 좀 섞여있다는 겁니다.(모두 웃음)
보통은 주로 남산의 서쪽으로 올라가서 동쪽으로 내려오든지, 동쪽으로 올라가서 서쪽으로 내려오든지 합니다. 동서의 종단 길이가 4㎞로 비교적 짧으니까, 주로 등산을 동서로 하는 겁니다. 그리고 남북은 길다 보니까 남쪽과 북쪽은 골짜기 수가 적어요. 그러다 보니 대중들을 데리고 남북으로 종주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남쪽으로 올라가는 건 부처바위 골이 거의 유일합니다.
그리고 남산은 현재 47개의 골짜기가 있고, 각 골짜기마다 절터, 탑, 불상, 무덤, 민속신앙, 전설 등 약 700개의 문화유적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현재 유네스코에도 등록된 자연박물관입니다. 지금 우리가 서있는 곳은 북쪽 끝으로서, 시내 쪽으로 가장 튀어나온 부분입니다. 우리는 여기로부터 출발해서 올라갈 겁니다.”
스님의 설명대로 일반 사람들은 거의 가지 않는 코스를 선택해서 가게 되었지만, 막상 걸어보니 코스가 완만해서 정말 산책하듯이 걷기에 아주 좋았습니다.
이어서 스님은 우리가 출발하는 이곳이 상서장인데, 상서장에 대한 설명도 해주었습니다. 상서장은 신라 말기의 대학자 고운 최치원 선생이 나랏일을 걱정하여 시무십여조의 글을 진성여왕에게 올렸던 곳입니다. 최치원 선생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데, 매년 4월에 이곳에서 제사를 지낸다고 합니다.
더욱이 스님은 최치원 선생의 후손인지라 얼마 전에 최치원 선생 문집 출판 기념회에 초청을 받아 축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스님의 최치원 선생의 삶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현재의 상서장은 조선 말에 지었는데, 최치원이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여조를 건의한 곳이라고 합니다. 왕궁이 바로 앞이니까 여왕이 산책을 나오거나 하는 자리에서 건의를 했는지도 모르겠네요.
최치원은 신라 말에 6두품으로 태어나서 12살에 당나라로 유학을 갔습니다. 신라 말에는 골품제도라는 신분제도가 있어서 재주가 있어도 등용이 잘 되지 않으니까 최치원의 부친이 아들의 미래를 걱정해서 당나라에 유학을 보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최치원은 당나라에 유학을 가서 6년 만에 외국인을 위한 ‘빈공과’라는 과거에 급제했습니다. 당시 당나라 안에는 자국민을 위한 과거가 있고, 외국인을 위한 과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외국인이란 신라인, 발해인 및 티벳인 등 여러 동남아인들을 뜻하는데, 당시 외국인이 당나라에서 과거급제를 한다는 것은 요즘 우리가 미국에 유학 갔다가 거기 정부 관리가 된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과거급제 후 지방관리가 되었다가 나중에는 높은 관리까지 올라간 겁니다. 병마도총 고변 대장군의 막후로 들어가서, 주로 당나라 말에 있었던 ‘황소의 난’에 대해서 ‘토황소격문’이라는 글도 쓰는 등 해서 당나라에서 출세를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최치원이 외국인이니까 당나라에서 출세하는 데 한계가 있었는지, 신라에서 불렀는지, 어쨌든 29살의 젊은 나이에 이미 당나라에서 문장가로서 이름을 날린 뒤 귀국을 했습니다. 당시 신라에는 신분제도, 즉 골품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인재등용이 제대로 안 됐습니다. 특히 당시는 신라 말 진성여왕 때였는데, 최치원은 당시의 정국 혼란을 개혁하기 위해 시무십여조를 왕에게 바쳤습니다. 6두품으로서 가장 출세하는 게 지방군수 수준이었는지, 최치원은 당시 두 군데의 지방군수를 하다가 관직을 그만두고 해인사로 들어가서 평생을 보내셨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중국에 널리 이름을 알린 사람 중에 신라시대에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원효와 최치원입니다. 그런데 원효는 국내파로서 외국의 문물을 국내에서 연구하여 깨달은 뒤 중국에까지 이름이 난 세계적인 불교학자가 되었고, 최치원은 유학파로서 중국으로 가서 유학을 전공한 뒤 신라로 들어왔는데, 선진 문물인 당나라 문화를 익힌 후에 우리의 전통사상적 입장에서 재해석함으로써 중국에까지 널리 이름을 떨친 분입니다.
시진핑 주석이 우리나라 대통령을 만났을 때 최치원의 시를 읊고 얘기했는데, 대통령이 못 알아들었다고 해요.(모두 웃음) 또 옛날에 일본 총리가 한국에 와서 불국사를 가고 싶다고 해서 우리나라 대통령이 데리고 갔는데, 일본 총리는 불국사 법당에 가서 절을 하고 우리나라 대통령은 기독교인이라고 밖에 서있었다는 우스운 일화도 있습니다.(모두 웃음)
반면에 인도의 모디 총리는 중국을 방문할 때 제일 먼저 백마사를 찾아갔습니다. 즉 인도에서 불경을 처음으로 중국에 가져와서 세운 절인 ‘백마사’를 제일 먼저 방문한 후 그 다음으로 현장법사가 경전을 번역한 곳을 방문했습니다. 그 의미가 뭐겠습니까? ‘너희 중국이 아무리 잘났다 해도 우리가 옛날에 불교라는 선진 문물을 전해준 덕분이다’ 라는 뜻이 있겠고, 또는 문화교류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먼저 문화를 내세우고, 그 다음에 북경에 가서 정치를 논하고, 상해에 가서 경제를 얘기했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대통령마다 외국에 가면 경제문제부터 얘기하잖아요. 그런데 문화국가에서는 경제가 중요하긴 하지만 문화도 굉장히 중요시 합니다. 문화는 품위의 문제이거든요. 우리의 수준이 아직 그 수준이에요.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쓴 시들을 모아서 국내에서 최초로 만든 개인 문집이 ‘계원필경’입니다. 최치원 선생은 원래 유학자이지만 도교와 불교를 같이 공부해서 유불선 3교를 융합했는데, 그것을 또 우리의 전통신앙인 선도의 입장에서 융합했기 때문에 ‘풍류도’, ‘현묘지도(玄妙之道)’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워낙 명문장가였기 때문에 신라 말에 유명한 스님들인 국사들이 돌아가시면 비문을 다 써주셨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사산비문(四山碑文)’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지요.
최치원 선생은 불교에도 굉장히 조예가 깊은 분이라 이황 등 유학자들은 고운 선생을 별로 안 좋아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불교를 배척했기 때문에 최치원 선생은 유교의 시조임에도 불구하고 불교와 타협했다는 이유로 한때 서원에 모셔진 최치원의 위패를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얼마나 편협하고 배타적인 생각입니까? 그런 면에서 원효가 화쟁사상으로 불교의 제 종파를 통합하는 관점을 가졌다면, 최치원은 유불도선 사상을 융합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동양과 서양, 종교와 과학을 융합하여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기 위한 하나의 원형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님의 설명이 끝나자마자 다함께 상서장을 참배했습니다. 영정이 모셔져 있는 영정각 앞에 선 대중 일동은 합장 삼배로 인사를 올렸습니다.
이어서 경주 남산 산행이 시작되었습니다. 스님의 설명대로 남산의 북쪽 끝에서 출발해 남쪽 끝으로 내려오는 종주 산행이 되겠습니다.
▲ 경주 남산. 상서장에서 새갓골까지.
출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산성처럼 쌓여진 둑을 만났습니다. 스님은 이것이 신라 시대 때 서라벌을 지켰던 ‘남산신성’ 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산성을 가로지르도록 만들어진 산길을 지나갈 때는 양 옆으로 높이 쌓은 산성의 윤곽을 더욱 확연히 볼 수 있었습니다. 비교적 야트막한 산봉우리와 계곡을 이어 쌓은 성인데, 울창한 나무들이 없었을 당시에는 왕성인 월성과 경주평야를 훤히 내려다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 남산신성
상서장을 출발해 이영재를 지나 새갓골로 내려오는 길은 약 4시간이 소요 되었습니다. 산길에는 진달래 꽃잎이 흩뿌려져 있어서 마치 꽃길을 걷는 기분이었습니다. 스님은 “산에 나무들도 우리가 온 것을 축하해 주려고 이렇게 꽃비를 내려주었네요” 하며 웃음을 보였습니다.
어느 시 구절처럼 진달래 꽃잎을 사뿐히 즈려 밟으면서, 도반들과 정다운 이야기도 나누며 오랜만에 자연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경주 남산을 내려와서는 다시 두북 정토수련원으로 돌아와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묘덕 법사님과 최말순 보살님이 정성껏 국과 반찬을 준비해주어 맛있게 식사를 한 후 오후 소풍을 위해 다시 차량에 올라탔습니다.
오후에는 백운산 자락에 진달래가 산 전체를 물들인 곳이 있는데 그곳을 찾아갔습니다. 환자들을 배려해서 차를 타고 이동했는데, 마침 소방도로가 산 주위를 빙 돌 수 있게 잘 정비가 되어 있어서 차를 타고 가면서도 봄구경을 실컷 할 수 있었습니다.
진달래는 이미 꽃이 진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연달래는 이제야 곳곳에 활짝 피어 있었습니다. 흐드러지게 핀 연달래를 바라보며 스님은 진달래와 연달래에 대한 스님의 생각을 말해주기도 했습니다.
“저도 젊을 때는 진달래를 더 좋아했어요. 색깔이 더 진하고 예뻐보이잖아요. 그런데 나이가 드니까 요즘은 연달래가 더 좋아 보여요. 왜냐하면 연달래는 약간 색이 연하긴 하지만 잎이 진달래처럼 뾰족하지 않고 둥글거든요. 마치 귀부인을 보는 것 같아요. 여러분들은 어때요?”
스님의 진달래와 연달래 사랑은 언제 들어도 대중들을 웃음 짓게 하는 것 같았습니다. 어떤 행자님은 꽃을 보고 좋아하는 스님을 보고 “그럼에도 우리들에겐 꽃보다 스님”이라며 웃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오늘은 하루 종일 자연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스님으로부터 그 어떤 비싼 선물보다 더 큰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습니다.
저녁 7시부터는 스님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정토회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며 작년 8월부터 24시간 1초도 쉬지 않는 1000일 기도를 시작했고, 또 평화재단을 통해 많은 사회활동을 하고 있는데, 수행자로서 공동체 대중들은 어떤 마음으로 사회 활동에 임해야 하는지 소중한 가르침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그저께 총선이 끝나고 투표 결과에 대해 수많은 평가와 예측이 난무하고 있지요. 이에 대한 스님의 견해도 함께 들려주었습니다.
“봄을 맞아서 이렇게 같이 산책도 하고 식사도 하니 참 좋습니다. 업무가 나뉘어 있다 보니까 한꺼번에 만나서 생활하기가 조금 어려워지네요. 정토회가 커갈수록 더할 것입니다. 해외에 나가 계신 분들은 더 말할 것도 없지요. 앞으로 우리가 큰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면, 가능한 도시생활은 대중부에서 하고, 본부는 산속이나 농촌에서 농사지으면서 같이 모여 살면 제일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꼭 결혼을 해서 애기를 낳아야 가족이 되는 게 아니라 같이 밥 먹고 살면 가족이 되는 거니까요.
그런데 우리가 속한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아서 우리가 수행공동체를 구성하는 것만으로 우리의 할 일을 다 했다고 할 수 없는, 즉 우리가 우리들의 삶만을 위해 살 수 없는, 여러 가지 사회적인 문제까지도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되는, 이런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우리가 태평성대에 태어났다면 수행에만 집중할 수 있었을 테지만, 물이 고이면 수평을 이루다가 경사가 지면 졸졸졸 흐르듯이,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이 사회는 아직 분단이 극복되지 못한 상태이고, 여러 사회적 문제들도 있어서 우리가 거기에 대응을 하다 보니 사회적인 실천 활동도 함께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수행이라는 것은 상황에 따라서 하는 것입니다. 혹시 어떤 분들은 ‘우리가 사회적인 활동을 하는 게 과연 수행인가?’ 이렇게 달리 생각하는 분도 물론 있겠습니다. 그러나 애초에 저희가 이 공동체를 구성할 때는 ‘우리가 사는 이 사회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외면하지 말고, 나의 문제로 받아들여서 문제들을 풀어가자’ 하는 원을 세웠습니다. 그 ‘원’이란 사회적으로는 분단을 극복하고 평화통일을 이루는 것이고, 불교적으로는 부처님의 본래 가르침에 충실하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공동체에 참여하는 분들은 이런 방향으로, 즉 이 두 개의 수레바퀴를 굴리며 생활을 해 나가야 합니다. 예를 들어 임진왜란 시기에는 백성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지옥으로 떨어질 과보를 각오하고 창과 활을 들어 전투를 했지 않습니까. 그런 때에 비하면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평화롭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관점하에서 현재 우리 사회의 어떤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요? 현 시스템에서 그 변화의 계기는 독립운동 같은 무장투쟁도 아니고 투표, 즉 선거라고 할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옛 선조들에 비해 우리는 훨씬 더 적법하고, 지옥 갈 각오까지는 안 해도 되는 평화로운 시대를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저께 투표를 통해서 우리들의 권리를 최대한 행사해 봤습니다.
보름 전까지만 해도 힘을 가진 사람들은 그 힘을 지나치게 믿고서 우리가 ‘대한민국이 과연 민주공화국인가?’ 하는 회의를 할 만큼 지나친 권력행사를 해 왔는데, 그것이 선거를 통해서 보름 만에 국민의 심판을 받는 걸 볼 수 있었죠. 역시 우리가 민주공화국인 게 맞긴 맞는 것 같습니다. 만약 권력이 국민들에게 있지 않고 특정한 계급이나 사람에게 있다면 국민이 이렇게 반대한다고 해도 눈도 깜짝 안 했겠지만, 현재의 제도가 국민의 의사를 따라야 한다는 민주주의이기 때문에 선거를 무시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제도적 권리를 최대한 활용해서 결국 조금 개선될 가능성은 열어놓은 셈입니다. 진짜 개선될지, 안 될지는 이제부터 지켜봐야 하겠지만요. 그러나 힘을 가진 자들이 국민을 두려워하는, 그래서 만용을 부릴 수 없게 하는 계기를 만들었고, 또 지나치게 실망해서 의기소침해 있던 사람들로 하여금 ‘가능성이 있겠다. 희망을 가져도 되겠다’라고 하는 계기도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일에 여러분들이 작은 기여라도 하게 된 것이고, 그 힘이 미약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바로 민심이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민심이 있어도 그게 효과적으로 드러나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이번에도 아주 절묘하게 민심이 드러났는데, 사실 교차투표를 하지 않았다면 결과적으로 정부 여당이 다수의석을 차지할 가능성이 컸거든요. 그래서 이번 선거결과는 기적이라고 할 만합니다. 종교적으로 말하면 기도의 공덕이라고 볼 수 있고, 사회적으로 말하면 국민의 올바른 주권행사의 결과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은 더 험난할 것입니다. 선거결과를 봤을 때 누가 승리했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누가 가장 나빴느냐의 문제였습니다. 첫 번째로 정부여당이 최악의 행패를 부렸기 때문에 국민은 일단 그것을 견제해서 여당에게 표를 안 줬다고 볼 수도 있고요. 두 번째로 야당도 정말 꼴불견이었습니다. 지역주의에 안주한 야당에게 전라도에서는 ‘이건 아니다’라고 명확하게 의사표시를 했잖습니까. 또 경상도에서는 그렇게까지 표현은 안됐지만 20년 만에 처음으로 대구에서 야당이 당선되고, 경상도 전체에서는 무소속 야당이 17명이나 당선됐잖습니까. 이것은 전라도에서 국민의 당이 이긴 것이나 다름없는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수도권에서도 최악을 막기 위해서 차악인 야당을 선택했을 뿐이지, 야당을 지지하지 않았다는 것은 정당투표에서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습니까. 국민들은 ‘너희가 좋아서 투표한 거 아니다’라는 말을 정당 투표로 표현한 겁니다. 그러면 제3당인 국민의당이 정말 잘해서 그렇게 높은 지지를 받았을까요? 아니지요. 새로 생긴 정당이라 아직 구체적으로 잘못한 것이 없기에, 또 최악과 차악을 피하다 보니까 국민의당도 마음에 안 들지만 선택했을 뿐입니다. 그것을 국민들이 국민의당을 지지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만약 그렇게 오해한다면 짧게는 1년, 길게는 4년 안에 그 결과가 다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정당은 반성하면서 겸손한 자세로 길을 모색해야 할 텐데, 제가 볼 때는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또 실망해서 ‘진짜 꼴보기 싫다’ 라고 할 게 아니고, 다음 대선에서 다시 심판해서 확실하게 국민의 뜻을 보여줘야 합니다.
그래서 다음 대선에서는 좀 더 좋은, 국민들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결과가 나왔으면 합니다. 또 그렇게 되어야 지금 남북 간의 극단적 안보위기, 즉 전쟁위기까지 거론되는 작금의 상황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또 미중 또는 중일이 벌이는 강대국의 각축전 속에서 갈팡질팡하면서 우리의 운명을 강대국 손에 쥐어주고 있는데, 우리가 오히려 강대국들의 힘의 역학관계를 이용해서 평화통일도 달성하고, 또 우리로 인해서 주변국들의 갈등이 오히려 융화되는, 그래서 동아시아의 평화를 가져오고 동아시아 공동체의 번영을 가져올 수 있는 쪽으로 방향을 틀 수 있다면, 작은 힘이지만 오히려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중생을 편안하게 하는 중요한 방법인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깨우치게 하여 그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중생이 사는 환경 자체를 개선해 줌으로써 그 속에 사는 중생들의 고통이 덜어지도록 하는 게 중요할 때도 있거든요.
다시 강조하지만 사회변화와 개인변화를 동시에 추구하는 게 정토회의 설립 목표이자 취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수행을 통해서 어떤 상황에서도 괴로움이 없는 자유로운 사람으로 거듭 나야 하고, 동시에 우리가 사는 이 사회를 보다 평화롭고, 보다 평등하고, 보다 자유로운 곳으로 만드는 일도 꾸준히 해 나가야 합니다.
이번 선거 결과를 보면서 다들 많은 것을 느끼셨을 텐데요. 조금 잘 됐다고 들뜨거나 조금 안 됐다고 가라앉는 것은 수행의 원칙에 맞지가 않습니다. 성공했을 때는 들뜨지 않고 오히려 그 성과를 바탕으로 해서 더 큰 성공을 향해 노력하는 게 필요하고, 실패했을 때는 실패한 것을 교훈삼아 다음에 성공할 수 있는 기회로 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게 수행자의 본분입니다.”
선거 결과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스님의 말씀을 듣고 나니 관점이 명확히 잡히고,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 앞으로 남은 과제가 무엇인지도 다시 정리해 볼 수 있었습니다.
이어서 궁금한 점이 있으면 무엇이든 물어보라며 대중들과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대중들은 그동안 총선을 앞두고 벌어진 한국사회의 모습을 보며 들었던 많은 의문들을 스님에게 질문했습니다. 스님은 각각의 질문에 대해 명쾌한 답변을 들려주었습니다.
모든 질문에 대해 답변을 마치고 나니 밤 10시가 다 되었습니다. 모임을 마치면서 스님은 “내일은 세월호 참사가 있은지 2주기가 되는 날”이라며 “내일은 정토불교대학생들과 함께 경주 남산순례를 하게 되는데, 순례를 시작하기 전에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의식을 꼭 하면 좋겠다”고 당부했습니다. 스님의 제안에 따라 법사님들은 세월호 노란 리본을 가슴에 단 후 오늘 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
내일은 정토불교대학생들과 함께 봄소풍을 겸한 경주 남산순례를 할 예정입니다. 오후에는 통일암에 모여서 장기자랑 한마당과 즉문즉설 시간도 가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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