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요하문명 답사 4일째
2016.4.12 홍산 문화, 삼좌점 석성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요하문명 답사 4일째를 맞이해 고조선시대와 비슷한 시기의 삼좌점산성유적을 둘러본 후 홍산문화가 꽃을 피운 우하량유적과 홍산문화에 대한 이목을 다시 집중시키는 계기를 마련한 동취산유적을 답사했습니다.

오늘도 새벽 5시 30분에 숙소를 나왔습니다.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적봉시에서 북서쪽으로 약 40km 떨어진 삼좌점 산성유적입니다. 적봉시를 빠져 나오는 시 외곽에서는 수많은 아파트가 곳곳에서 건축되고 있었습니다. 흥기하는 중국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아파트가 여기저기 들어서고 있는 적봉시 외곽
▲ 아파트가 여기저기 들어서고 있는 적봉시 외곽

적봉시에서 약 1시간을 달려 6시 30분에 삼좌점촌에 도착했습니다. 삼좌점촌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유적지가 아니라 댐입니다. 더욱 놀란 것은 유적지 바로 옆에 댐이 덩그러니 자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2005년에 다목적댐 공사를 하는 가운데 이 유적이 발굴되었다고 합니다. 발굴이 끝나고 나서도 댐 공사는 계속 진행되어 지금의 모양이 된 것이라고 합니다.


소중한 유물이 발굴되었다면 당연히 공사를 멈추거나 변경했어야 할 텐데 거대한 규모의 댐 바로 옆에 제대로 된 안내 표지판도 없이 유적이 방치되어 있는 모습에 망연자실할 뿐이었습니다.

삼좌점 유적 바로 옆에 자리한 대형댐
▲ 삼좌점 유적 바로 옆에 자리한 대형댐

댐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산을 오르고나서야 비로소 역사의 흔적들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잘 드러난 집터와 적석총이 수없이 모여 있고, 치를 갖춘 성벽도 잘 조성되어 있었습니다. 모두 동그란 원형 모양을 하고 있어서 위에서 내려다보면 동글동글한 것이 수십 개가 모여 있어 신비로운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삼좌점석성.
▲ 삼좌점석성.

정상 부근에 오르자 성벽의 행렬이 한눈에 보이면서 감탄사가 절로 나왔습니다. 성벽의 한쪽 측면에는 치(적을 공격을 막기 위해 툭 튀어나오게 쌓은 성벽)가 여러 개 조성되어 있었는데 스님은 “도대체 치가 몇 개나 될까?” 하며 일일이 헤아려 보았습니다. 총 13개의 치가 있었습니다.

성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치
▲ 성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치

그런데 치와 치 사이의 간격이 5~6미터가 채 되지 않아 보였습니다. 그 이유를 스님에게 물어보니 “아마도 그 때는 돌을 던지면서 육박전 같은 전투를 했기 때문이 아닌가”라고 웃으며 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석성은 하나만 발굴된 것이 아니라 동쪽으로 하나가 더 발굴되어 나란히 마주하고 있었습니다. 나머지 다른 한 성벽에서도 여러 개의 치가 있었습니다.

2개의 성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모습
▲ 2개의 성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모습

어떤 성벽의 높이는 현재 남아있는 부분만으로도 사람의 키보다 훨씬 더 큰 3미터 정도는 되어 보였는데 자료에 따르면 이곳은 약 4,000년 전에 번성한 하가점하층문화 유적(기원전 2000년~1500년)이라고 합니다. 스님은 잘 쌓아진 성벽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4천년 전에 쌓은 성벽이 지금까지도 이 정도 높이로 남아 있다니 대단하지 않아요?”

스님의 설명을 들으며 성벽을 어떻게 쌓았는지 살펴보니 이것은 고구려가 성벽을 쌓는 방식과 비슷해 보였습니다. 한 면만 다듬어 삼각형으로 쌓고 그 다음 것은 역삼각형으로 쌓는 형식인데 이를 개이빨식 축조법이라고 합니다. 고구려의 성벽 또한 모두 이런 축조법으로 쌓았습니다. 그러니 이 석성을 쌓은 사람들은 어쩌면 고구려인들의 선조들인지도 모르는 셈입니다.

또 집과 집 사이에는 골목길처럼 통로가 나 있었는데 어떤 골목에는 움푹 들어간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여기 서서 보초를 서지 않았을까” 하며 그곳에 들어가서 서 있어 보기도 했습니다.

보초를 설 수 있는 공간이 되는지 가늠해보고 있는 스님
▲ 보초를 설 수 있는 공간이 되는지 가늠해보고 있는 스님

또 벽을 하나만 쌓은 것이 아니라 두 겹으로 쌓은 점도 눈에 띄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곳은 돌만 쌓은 것이 아니라 담벼락을 더욱 견고하게 하기 위해서 돌 사이에 흙을 같이 바르거나 돌에 회칠을 한 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두 겹으로 쌓은 담벼락 그리고 돌담 위에 소복히 쌓인 흙
▲ 두 겹으로 쌓은 담벼락 그리고 돌담 위에 소복히 쌓인 흙

성 안 가운데 지점에는 평평한 바위 위에 큰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스님은 “절구공처럼 생겼는데 제단이었지 않았을까” 추측했습니다. 어제 갔었던 성자산산성에서도 이와 비슷한 모양의 바위가 있었던 것이 생각났습니다. 삼좌점산성과 성자산산성 모두 하가점하층문화, 즉 우리나라 고조선 초기 시대의 석성이었음을 감안하면 이런 유사성은 충분히 이해가 되었습니다.

구멍 뚫린 평평한 바위
▲ 구멍 뚫린 평평한 바위

그런데 갑자기 스님이 “어, 태극 문양 같네” 하면서 한쪽 바위면을 가리켰습니다. 자세히 보니 정말 문양이 둥글게 퍼져나가는 모양으로 그려져 있어서 모두들 신기해 했습니다.

우연히 발견한 둥근 문양
▲ 우연히 발견한 둥근 문양

한쪽 편에는 적석묘로 보이는 무덤도 볼 수 있었습니다. 자료에 따르면 석관묘도 다량 발굴되었다고 하니 이것은 초기 국가의 형태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어제 성자산산성에서도 볼 수 있었듯이 산 위에 이런 큰 규모의 돌들을 운반해서 성곽을 쌓고 건축물과 돌무덤을 조성할 정도면 당시 지배자는 왕권 정도의 권력을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대형 적석묘
▲ 대형 적석묘

스님은 성 전체를 찬찬히 훑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고구려의 체취는 물론이고 고조선의 체취마저 풍겼습니다. 혹시 단군조선이 화려한 문화의 꽃을 피웠던 곳이 바로 이곳이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해보면서 산을 내려왔습니다.

한편 점심 때 찾아간 적봉박물관에는 삼좌점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어 유심히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삼좌점 석성에서 출토된 유물들 (적봉박물관 소장)
▲ 삼좌점 석성에서 출토된 유물들 (적봉박물관 소장)

다음은 적봉시의 북동쪽에 위치한 홍산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이 지역 일대에서 발굴된 모든 유물을 홍산문화라고 지칭하는데 그것은 홍산 주위에서 최초의 유물이 발굴되었기 때문입니다.

산이 붉기 때문에 멀리서 봐도 금방 저 산이 홍산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철성분이 많은 바위산이어서 그런지 나무가 자라지 않아 언제나 붉은색을 띠고 있다고 합니다.

홍산
▲ 홍산

입구에 비석이 세워져 있어 사진을 찍고 천천히 산 위로 올라가 보았습니다. 어제는 하루 종일 돌아다녔지만 비석 하나 찾기가 어려웠는데, 오랜만에 만난 비석에 스님은 반가운 웃음을 띠었습니다.

산을 오르는 길에는 곳곳에 선사시대 움막집을 복원해 놓아 신석기시대의 체취를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스님은 움막집 속에 들어가 당시의 생활상에 대해 잠시 설명해 주었습니다. 땅을 깊게 파고 그 위에 움막을 덮었는데, 땅을 깊게 판 이유는 추위와 더위를 막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움막집의 가운데에는 불을 피운 흔적도 볼 수 있었습니다.

산 정상까지 올라가지는 못하고 정자가 세워진 중턱까지만 올라가 보았습니다. 붉은 홍산을 배경으로 곳곳에 복사꽃이 화사하게 피어서 봄기운을 완연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주변을 조망해보다가 붉은 홍산을 배경으로 사진 한 장을 찍었습니다.

산 아래로 내려오는 길에는 이곳에서 제일 유명한 얼굴 모양의 바위가 눈길을 끌며 웃음을 자아내었습니다. 얼굴 모양을 한 바위에 염주로 치장을 한 후 바위 앞에는 기도를 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중국인들은 이 바위 얼굴을 미륵불이라고 부르면서 기도한다고 하는데, 스님은 포대화상 같이 생겼다며 웃음을 보였습니다. 우리도 함께 잠시 기도를 한 후 산을 내려왔습니다.

사람의 얼굴 모양을 한 미륵 바위
▲ 사람의 얼굴 모양을 한 미륵 바위

홍산을 내려와서는 적봉 시내에 있는 골동품 판매 거리를 찾아가 보았습니다. 이곳 주위에는 많은 유물들이 발굴되었기 때문에 길거리 시장에도 많은 골동품들이 나온다고 합니다. 대부분이 가짜이겠지만 홍산문화를 상징하는 옥기, 조각품 등이 정말 많았습니다.

골동품 판매 거리
▲ 골동품 판매 거리

스님은 골동품 거리에서 이것 저것을 둘러보면서 “아주 값이 싸면 진짜일 가능성이 높고, 좀 비싸면 대부분 가짜라고 보면 된다.”고 골동품 감정기준을 말해 주었습니다. 왜 그러냐고 이유를 물었더니 “밭이나 산에서 주운 것은 원가가 없기 때문에 값싸게 팔 수도 있지만, 가짜는 만드는 수공이 들기 때문에 일정한 값 이하로는 내려가지 않는다.”라고 하며 웃었습니다.

다음은 적봉 시내에 위치한 박물관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얼마 전 새로 개장했다고 해서 기대를 안고 들어갔습니다. 홍산문화 유물이 많이 전시되어 있기를 기대했는데 생각보다 많지는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대표적인 유물들은 잘 전시되어 있어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었습니다.

적봉박물관
▲ 적봉박물관

어제 하루 종일 답사를 했지만 비석 하나 발견하지 못했던 소하서문화에서 나온 유물을 이곳에서는 볼 수 있으려니 기대를 했는데 전시된 것이 없어 아쉬움이 남기는 했습니다.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나오니 버튼을 누르면 홍산문화 유적이 표시되는 큰 모형 지도가 있었습니다. 버튼을 누르니 지도의 대부분이 붉게 빛이 났는데, 홍산문화 유적은 이 일대 전역에서 광범위하게 발굴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적봉박물관을 나와서는 곧바로 홍산문화 유적이 대거 발굴된 우하량으로 향했습니다. 적봉에서 출발할 때의 시간이 오후 1시. 중국은 보통 4시 30분에 문을 모두 닫기 때문에 부지런히 달려가야 겨우 유물 박물관을 볼 수 있을 것 같아 발길을 재촉했습니다.

우하량촌 : 홍산문화 유물이 대규모로 발굴된 곳
▲ 우하량촌 : 홍산문화 유물이 대규모로 발굴된 곳

쉼없이 달려 오후 3시 30분이 되어 우하량에 도착했습니다.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박물관입니다. 박물관에는 이곳 우하량에서 출토된 수많은 홍산문화 유적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유물 하나하나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너무나 가치있는 것들이기에 유심히 살펴보아야 하지만 시간이 많지 않아 아주 빠른 걸음으로 전체를 둘러보았습니다.


홍산문화 박물관
▲ 홍산문화 박물관

자료에 따르면 이곳 우하량에서는 1983년부터 85년에 거쳐 대대적인 발굴 작업이 있었다고 합니다. 발굴이 마무리되던 1986년에 중국 언론은 우하량 유적에서 기원전 3500년(5500년 전)까지 올라가는 대형제단, 여신묘, 적석총군이 발굴되었다는 소식을 전세계를 향해 전했습니다. 고고학자들은 발굴 결과를 토대로 우하량 유적이 ‘초기국가단계’의 모든 조건을 갖춘 ‘초기문명사회’였다고 발표하기에 이릅니다. 그것이 바로 우하량 유적에서 발굴된 홍산문화입니다.

우하량에서 가장 많이 발굴된 옥저룡 앞에서
▲ 우하량에서 가장 많이 발굴된 옥저룡 앞에서

흔히 문명 탄생의 세 가지 조건이라고 하면 제단, 신전, 무덤을 듭니다. 그런데 우하량에서 제단, 신전, 무덤, 세 가지가 3위 일체로 출현한 것입니다.

기원전 3500년 때의 유물이라고 하기에 스님에게 이 때 중국은 어느 시기에 해당하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스님은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중국인의 시조라고 하는 황제 헌원씨가 왕위에 오른 해를 기준으로 유사 이전과 유사 이래를 나누는데, 그 시기가 지금부터 대략 5000년 전 쯤이야. 그러니 기원전 3500년(5500년 전)은 유사 이전의 이야기이니까 이 때 이미 초기국가단계의 대규모 유적이 발견되었으니 중국인들이 놀랄 수 밖에 없지. 홍산문화는 우리 역사에서 배달나라 환웅천왕 시대에 해당이 되거든. 그래서 우리는 요하문명, 홍산문명을 배달문명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중국은 그동안 황하문명을 자신의 뿌리로 생각했는데, 자신들이 오랑캐 땅으로 생각했던 만리장성 너머 동북 지역에서 그 보다 훨씬 앞선 문명이 발견되었던 것입니다.

그러고보니 어제와 그제 찾아갔던 소하서문화는 기원전 7000년까지, 흥륭와문화는 기원전 6500년까지 올라가는 유물이 발견되었으니 결국 홍산문화는 이를 모두 계승 발전시켜온, 황하문명과는 그 뿌리를 달리하는 요하문명의 꽃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역사적 흐름을 알고 나서 이곳 우하량 유적에 오게 되어서인지 정말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까지 했습니다.

박물관을 나와 여신상이 출토된 여신묘 유적을 먼저 찾아가 보았습니다. 여신묘가 가장 먼저 발굴되었기 때문에 제1지점이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여신묘 앞에 세워진 제1지점 비석
▲ 여신묘 앞에 세워진 제1지점 비석

여신묘를 발굴했던 현장에 커다한 건물을 세워 유리로 유적지를 볼 수 있게 해 놓았으며 2층에 올라가면 여신묘를 내려다볼 수 있게도 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여신묘의 윤곽만 표시해 두었을 뿐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은 모두 박물관이나 다른 곳으로 가져가고 이곳에는 모형으로 된 여신의 얼굴상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어 휑한 느낌만 들었습니다.

여신묘를 발굴한 현장
▲ 여신묘를 발굴한 현장

여기에서는 실제 사람보다 작은 것부터 사람의 3배 크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여신상의 부서진 일부가 발굴되었다고 합니다. 여신의 두상에서 눈동자는 옥으로 둥글게 다듬어서 박아 넣었고, 두상이 발견될 당시에는 코가 없었는데 코가 먼저 발견이 되었다고 합니다. 박물관에는 여신의 손 부분, 유방 부분, 귀 부분, 팔과 어깨 부분이 각각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손 부분은 곰의 것을 형상화 했다는 해석도 있었습니다.

여신의 두상
▲ 여신의 두상

곰의 발로 추정되는 진흙상
▲ 곰의 발로 추정되는 진흙상

또 여신묘에서는 진흙으로 만든 동물상도 잇따라 발견되었는데 주실에서 출토된 진흙상은 면밀한 검토 끝에 곰으로 인정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사실들을 종합해보면서 홍산인들은 웅녀를 신으로 모셨던 곰족의 자손들이지 않았을까 상상해 보았습니다.

다음은 제2지점이라고 표시된 제단 유적을 찾아갔습니다. 우주선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건물이 유적지를 뒤덮고 있어서 과연 저 안에 무엇이 들었을지 호기심이 가득 차올랐습니다.

제단이 발굴된 유적이 보존되어 있는 제2지점
▲ 제단이 발굴된 유적이 보존되어 있는 제2지점

입구에 들어서자 3원 구조로 된 거대한 원형 제단과 방형 제단이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큰 규모의 적석총이 여러 개 발굴되어 있었습니다.

3원 구조로 된 거대한 원형 제단
▲ 3원 구조로 된 거대한 원형 제단

방형 제단
▲ 방형 제단

큰 규모의 적석총
▲ 큰 규모의 적석총

아마도 여기서는 조상신과 하늘신에게 제사를 올렸을 것입니다. 박물관에는 이 모습을 직접 조형물로 만들어 표현해 놓기도 했습니다.

박물관에 조성해 놓은 제사 지내는 모습
▲ 박물관에 조성해 놓은 제사 지내는 모습

특이한 점은 제단의 주위에 붉은색 토기들을 빙 둘러서 꽂아 놓았다는 점입니다. 왜 이렇게 했는지 그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제단 주위에 박힌 붉은색 토기들
▲ 제단 주위에 박힌 붉은색 토기들

여기에서는 원형 제단 외에도 많은 옥기들이 발굴되기도 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돼지 형상의 저룡과 곰 형상의 웅룡입니다. 특히 곰의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이 많이 발굴된 것으로 보아 어떤 학자들은 홍산문화를 주도한 세력이 곰을 토템으로 하는 민족이었을 가능성을 논의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곰 토템은 단순히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웅족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을 것입니다. 물론 더 많은 연구와 발굴을 기다려봐야 하겠지만요.

제단에서 출토된 다양한 옥기들
▲ 제단에서 출토된 다양한 옥기들

돼지 형상을 한 옥저룡
▲ 돼지 형상을 한 옥저룡

용의 형상을 한 옥룡
▲ 용의 형상을 한 옥룡

제단 유적지를 나와서는 적석총 여러 곳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제3지점부터 시작해서 16지점까지 많은 적석총들이 이 주위에 분포되어 있었습니다. 모두 찾아가 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넉넉지 않아 대표적으로 3지점, 5지점, 13지점에 있는 적석총만 살펴보았습니다.

제5지점에서 발굴된 적석총
▲ 제5지점에서 발굴된 적석총

특히 5지점에서는 노인 남성 1구의 인골과 7점의 옥기가 출토되었는데, 양 귀 밑에는 옥벽, 가슴팍에는 구운형 옥장식, 그 아래에는 말발굽 모양의 옥기, 오른 팔에는 옥팔찌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재미있는 것은 양손에 옥거북이가 쥐어져 있었다는 점입니다. 발굴 조사단은 이 무덤의 주인공을 ‘무인’이라고 추정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무인은 무당의 개념이 아니라 제정일치시대의 제사장으로서 나라의 수장이었습니다. 즉 5지점에서 출토된 무인은 신령한 거북이를 쥐고 신과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인을 형상화한 옥기
▲ 무인을 형상화한 옥기

그리고 13지점은 그 규모가 가장 컸는데 대략 짐작만 하기로도 광개토대왕릉과 거의 크기가 비슷해 보였습니다. 자료에 따르면 한 변의 길이가 60m가 넘는다고 합니다. 또 40m 짜리 제단도 있었다고 하고요. 박물관에서는 제13지점의 적석총을 ‘피라미드’ 라고 표현했는데, 정말 피라미드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 같았습니다. 무덤의 크기가 클수록 옥기와 유물이 더 많이 출토되었다고 하니 무덤의 주인공도 아주 높은 신분이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을 겁니다.


제13지점에서 발굴된 대형 피라미드 앞에서
▲ 제13지점에서 발굴된 대형 피라미드 앞에서

무덤을 보면 판석을 두르고, 또 다른 판석으로 위를 덮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렇게 판석을 덮은 적석 석관묘는 만주, 한반도 일대에 나타나는 것으로 고인돌 문화와도 이어지는 것입니다. 옥기들이 발견되는 이런 석관묘는 중원 지역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옥기들이 발견된 석관묘
▲ 옥기들이 발견된 석관묘

또 자료에 의하면 이들 적석총의 석관묘에서도 시신과 함께 많은 옥기들이 발굴되었다고 합니다. 이를 두고 학자들은 홍산문화 시기에 이미 엄격하게 신분이 분화되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해석합니다. 또 옥기의 제작 수준이나 발굴된 엄청난 양을 보면 사회적으로 전문적인 장인이 분화되어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제3지점에서 발굴된 적석총
▲ 제3지점에서 발굴된 적석총

놀라운 것은 직경이 20~30m에 이르는 거대한 제단과 적석총들이 현재도 계속 발견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배달 문명과 단군조선이 이 지역 일대에서 발원했기 때문에 관련성이 매우 높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중대한 발굴과 연구 현장에 일본 학자들은 참여하고 있지만 우리나라 학자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점은 무척 안타깝게 여겨졌습니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객좌현 동산취촌입니다. 우하량에서 50km 정도 떨어져 있는 이곳 동산취촌 뒷산 정상에서 대형 제단 유적이 발견되면서 홍산문화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객좌현 동산취촌
▲ 객좌현 동산취촌

동산취촌에 도착하니 저녁 6시 30분. 해가 저물 무렵이었습니다. 펜스가 둘러쳐진 유적지 안으로 들어가니 직원은 퇴근하고 없었지만 땅을 고르는 정비 작업이 한창인 듯 했습니다. 한 가운데에 사각형 모양으로 땅을 파서 그 안에는 제단으로 사용되었던 유적들을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동산취에서 발굴된 제단 유적
▲ 동산취에서 발굴된 제단 유적

스님은 그 돌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는데 특히 땅에 박힌 채 넓은 면을 평평하게 드러낸 돌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곳에서 임신한 여성의 소조상을 비롯해 엄청난 규모의 제사 유적이 1979년 5월에 발굴되었다고 합니다. 자료에 따르면 중국 학계에서는 이 임산부상을 ‘중국의 비너스’라고 치켜세우며 5000년 전에 이미 모계 사회를 중심으로 한 원시문명이 존재했다는 증거로 해석했다고 합니다. 이 임산부의 인체 조각상은 방금 전 우하량박물관에서 사진으로나마 잠시 엿볼 수 있었습니다.

동산취에서 발굴된 임산부 모양의 소조상
▲ 동산취에서 발굴된 임산부 모양의 소조상

이에 고무되어 많은 학자들이 새로운 후보지를 찾아 나섰는데, 그 과정에서 제단과 신전, 적석총이 대규모로 발굴된 우하량촌이 발견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서막에 불과했고 동산취에서 멀지 않은 우하량촌에서 여신의 자태가 홀연히 나타난 여신상이 발굴되면서 또 한번 중국학계를 놀라게 했다고 합니다.

동산취유적비 앞에서
▲ 동산취유적비 앞에서

객좌현의 동산취유적을 끝으로 지난 4일 동안의 요하문명 답사 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 마지막 답사 장소가 홍산문화의 중요성을 전세계 사람들에게 다시 각인시킨 동산취유적이었다는 점이 무척 뜻깊게 여겨졌습니다.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유적과 유물이 이끄는 대로 요하 지역 곳곳을 누볐습니다. 운전을 해준 기사님의 계산에 따르면 4일 동안 2600km를 달렸다고 합니다.

답사를 마치면서 무엇이 진실인가를 기준으로 접근해야지 이런 소중한 유산들을 민족이라는 좁은 틀 안에 억지로 구겨넣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민족이 홍산문화를 꽃피운 선조들의 후예라는 점은 지난 4일 동안 많은 유물과 유적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동북아 전체를 국경 없던 시절의 역사로 바라보는 열린 시선을 갖지 않는다면 우리의 역사관은 편협해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번 답사 이야기가 좁은 틀에 갇힌 우리들의 사고의 폭을 조금이나마 넓혀주는 계기가 되었기를 바랍니다.

내일은 심양공항으로 돌아가는 길에 명나라와 청나라 시기에 요서 지방의 중심도시였던 흥성에 잠시 들러 4대문과 성벽이 지금까지도 잘 남아있는 흥성성곽의 모습을 둘러본 후 심양으로 이동해 오후 4시 비행기로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입니다.

※ 민족의 역사를 올바르게 정립하고, 연해주 독립운동의 성지인 '신한촌'의 역사 회복과 재건을 위해 대중 여러분들의 후원금을 받습니다. 소정의 기금 출연으로 역사 회복에 동행하는 마음과 정성을 함께 담아 주시기 바랍니다.

  • 계좌번호 : 국민은행 578601-01-272869
  • 예금주 : (사)좋은벗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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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랑향가

불향을 드리오니, 스님의 불법이 세상 만 천지에 퍼져지시길 바랍니다. 요하 문명의 역사가 눈 앞에 들어옵니다. 감사드리나이다.

2024-06-30 20:33:01

이지은

정말 스님존경합니다 쉽지많은 여정에 우리배달민족계레들을 위하여 역사를 깨우치게해주셔서 정말감사합니다 후원도 조만간하고 싶습니다 스님 항상건강하세요 많은분들이 카톡친구로 스님등록해보세요 좋은글이 아침마다 정화시켜줍니다^^

2018-03-11 20:50:32

이윤정

홍산문명 유적을 찾아 우리 배달민족의 뿌리를 느낄 수 있어 감동입니다~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 애쓰시는 스님, 감사합니다.

2016-05-12 13:4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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