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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요하문명 답사 3일째를 맞이하여 4000년 전에 쌓은 성자산 산성을 답사한 후 세계 최고(最古)의 신석기문화인 9000년 전 유물이 발굴된 소하서문화를 찾아가는 여정을 가졌습니다. 이어서 오후에는 동석병용기 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인 소하연문화 유적을 답사했습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5시 30분에 숙소를 출발하는 것으로 답사 일정을 시작했습니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성자산 산성입니다. 오한기 시내에서 국도 위로 올라타는 순간 저 멀리 지평선 너머에서 해가 뜨기 시작했습니다.
30분 만에 성자산 주위에 도착했지만 정작 도로에서 산 가까이에 이르는데 1시간이 넘게 걸렸습니다. 비포장 도로를 계속 가야했기 때문입니다. 스님이 빠른 길을 지도에서 찾았지만 이미 운전기사가 비포장 도로에 접어든 후였습니다.
성자산 가까이에 이르자 능선에 하얀 비석 두 개가 금방 눈에 들어왔습니다. 스님이 “저기다!” 하는 순간 조춘호 선생님과 운전 기사님의 얼굴에도 웃음이 환하게 번졌습니다.
비석 앞에는 ‘성자산 유지’라고 적혀 있고, 비석 뒤에는 긴 설명글과 함께 기원 전 2,000년 경에 쌓은 석성이라고 표기되어 있었습니다.
스님은 “이 위에 올라가면 석성을 쌓은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며 정상을 향해 손을 가리켰습니다.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바람이 어찌나 강하게 부는지 몸이 흔들릴 정도였습니다.
얼굴이 얼얼할 정도로 찬바람을 맞는 가운데 금새 산 정상에 도착했습니다. 정상 주위를 빙 돌아가며 석성을 쌓은 흔적이 바로 보였습니다. 스님은 이것이 외성이라고 하면서 안에는 내성이 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외성을 쌓았던 곳을 밟고 그 위를 천천히 걸으며 주위 풍광을 조망해 보았습니다. 사방이 탁 트여 있어서 어디서 적이 쳐들어 오더라도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외성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오니 내성을 쌓았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돌들은 대부분 세로로 길쭉한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4000년 전의 유적이니까 돌을 다듬어서 모양을 만든 것 같지는 않고 비슷한 모양으로 돌을 깨어서 성을 쌓았던 것으로 보였습니다.
조금 더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 동남쪽 외성 밖에 아주 평평하게 다듬은 큰 바위가 보였습니다. 바위 위에는 작은 구멍들이 여러 개 나 있어서 눈길을 끌었습니다.
이리저리 조심스럽게 살펴보던 스님은 “여기가 제사를 지내는 곳이 아니었을까 싶다”면서 “기록에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별자리를 표시한 것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북두칠성 같지 않느냐?”며 웃음을 보였습니다.
큰 바위는 어찌나 평평하게 잘 다듬었는지 눈을 바위와 수평을 맞추고 보면 햇빛이 거울처럼 반사되어 살짝 눈이 부실 정도였습니다. 스님은 평평한 바위 위에 앉아 태양을 바라보고 잠시 명상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스님이 명상을 하는 모습은 보고 조춘호 선생님은 “태양의 후예임을 보여주시네요”라며 웃음을 보였습니다. 최근 한국에서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제목을 농담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스님은 이 말을 듣고 ”이얍!“ 하며 기압을 불어 넣고선 환한 웃음을 보였습니다.
다시 외성을 따라 성 주위를 한바퀴를 빙 돈 후 내성 가운데의 정상 부위에 올라갔습니다. 정상 부위에는 이곳이 ‘성자산 유적’ 임을 알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었는데, 지금은 갈라지고 깨어져서 땅바닥에 그냥 세워둔 모습이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이곳에서 많은 적석총과 하늘신에게 제사를 지낸 제단터, 그리고 사람들이 살았거나 공무를 보았을 건물터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특히 외성과 내성으로 잘 조성된 성벽은 예사롭지 않아 보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봐도 물이 있었다는 흔적은 찾기 어려웠는데,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물도 없이 어떻게 지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아무튼 스님은 전체를 둘러본 후 이렇게 소견을 말했습니다.
“이 정도 규모의 산성을 쌓으려면 국가 단계에 진입한 사회 조직이 아니면 어렵습니다. 소수의 무리를 거느리고선 이 정도 규모의 산성을 쌓을 수가 없어요. 축성 연대를 보면 4000년 전이니까 단군 시기와 비슷합니다.”
이 유적은 초기 국가의 유적일 가능성이 높다는 설명이었습니다. 또 기록에 따르면 정상에서는 덧띠무늬 토기도 여러 편 수습되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문양입니다. 성을 쌓는 방식도 그렇고 여러 모로 생각해볼 때 ‘그렇다면 혹시 고조선 유적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솟구쳤습니다.
모든 것이 사실로 밝혀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쉬움을 뒤로 하고 다음 유적지로 향하기 위해 산을 내려왔습니다.
이제 스님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시대 유적인 소하서 문화를 찾아 길을 나섰습니다. 자료에 따르면 소하서문화 유적은 총 세 군데에서 발굴되었습니다. 첫째가 목두영자향 소하서촌, 둘째가 우고토향 천근영자촌, 셋째가 마니한향 고력판촌입니다. 먼저 고력판촌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고력판촌에 도착하기 전 어느 마을에서 요나라 시대 때 만든 거대한 불탑을 하나 만났습니다. 요나라 때 만들어서 금나라, 원나라 때까지 이어졌던 탑이라고 하는데, 밭 한 가운데에 덩그러니 솟아있는 모습이 엉뚱하기도 했지만 그 규모에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안내 푯말에는 ‘영창로 유지’라고 적혀있고, 설명글에서는 탑이 13층 높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멀리서만 보았는데도 굉장히 큰 규모임이 느껴졌습니다.
소하서문화에서 발굴된 유물은 9000년 전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시리아, 이라크 등 소아시아 지역에서 발굴된 유물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대략 8000년 전의 것들입니다. 그러니 소하서문화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화인 셈입니다.
신석기시대 유적이어서 그런지 점점 사막 쪽으로 깊숙이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초기 원시인들은 건조한 초원 지대에 살았다는 얘기가 절로 실감이 났습니다. 모래 바람이 거세게 일고, 밀가루처럼 부드러운 모래들이 차가 지나갈 때마다 먼지를 가득 일으켰습니다.
지나가는 촌부에게 길을 묻기를 수 차례 한 끝에 겨우 고력판촌에 도착했습니다. 나이 60이 넘어 보이는 한 촌부는 30년 전에 저 산 뒤편에서 많은 학자들이 발굴 작업을 했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촌부가 말한 산을 향해 가던 중 모래 사장이 깊어져서 차가 더 이상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운전기사가 차를 계속 몰기를 망설이자 스님은 차에서 내려 걷기 시작했습니다.
모래밭길은 신발이 푹푹 빠지기도 했지만 시간이 넉넉치가 않아 스님은 거의 뛰다시피 산 정상을 향해 올라갔습니다. 마을 주민이 알려준 대로 산 정상에 올라서니 뒤편으로 나무가 주욱 심어진 가운데 유독 나무가 심어지지 않은 평평한 사각형 모양의 작은 평지가 보였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9000년 전의 유물들이 다량 발굴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를 기념하거나 알리는 비석이나 표시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이 발굴된 곳인데 표지판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아쉽기만 했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중국인들의 인류문화사 의식이 아직 미미하거나, 황하문명보다 월등히 앞서는 유물이다보니 다른 이유일 수도 있겠고, 도굴을 우려해서 흔적을 감추려 했을지도 모릅니다. 이유가 어떻든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마을을 나왔습니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우고토향 천근영자촌입니다. 고력판촌, 천근영자촌, 소하서촌 모두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세 군데를 모두 찾아가 보기로 했습니다.
천근영자촌에서 다시 마을 주민에게 길을 물었습니다. 그리고 마을 어귀의 몇 집에 들어가 이곳에 유적지 발굴이 있었던 적이 있었는지, 비석이 세워진 곳이 있는지 두어 차례 수소문을 해보았지만 아는 이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모두들 태어난 이래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발굴 작업이 1987년과 1988년 사이에 있었기 때문에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일이다보니 이를 기억하는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는 않아 보였습니다. 시간이 없어 천근영자촌에서는 탐사를 포기하고 이제 마지막 발굴지인 소하서촌을 향해 이동했습니다. 하지만 어제 오한기박물관에서는 천근영자촌에서 출토된 소하서문화 유적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습니다. 원통형 토기 파편이 전시되어 있어 9000년 전의 역사를 잠시나마 엿보았습니다.
먼저 목두영자향을 찾아갔습니다. 그곳에서 다시 마을 주민을 찾아 길을 물었습니다. 겨우겨우 수소문한 끝에 소하서촌까지 도착할 수 있었고, 소하서촌에서 다시 마을 사람 집에 들어가 발굴 현장을 물어보았습니다. 소하서촌이라고 마을 이름이 붙여진 이유는 이곳에 작은 강이 흐르기 때문입니다. 소하강의 서편 마을을 소하서촌이라고 부르는데, 지금은 마을 이름이 바뀌어서 찾기가 무척 힘이 들었습니다.
여러 사람들에게 수소문한 끝에 ‘향’ 사무소에 들어가서 물어보고야 마을 이름이 바뀐 줄 알았습니다. 현재의 마을 이름은 ‘영자’촌이라 부르고 있었고, 현재 ‘소하서’촌이라고 부르는 지명은 유물과 관계없는 곳이었습니다. 관계자의 안내를 받지 않고는 찾기가 여간 어렵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 우리가 찾아간소하서 유적은 한국에서 출간된 어떤 책에도 답사 내용이 없었습니다.
다행히 발굴 당시에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는 마을 사람을 만나 같이 그곳을 찾아가 볼 수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은 지금은 밭으로 변한 넓은 땅을 가리키며 여기서 발굴이 있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당시에는 이 일대 전체에 마을 사람들의 출입을 모두 막았고, 모든 유물을 체로 거르는 모습도 멀리서 볼 수 있었고, 차가 와서 많은 유물을 싣고 갔다고 합니다. 인근에서 마을 사람 중 한 사람이 약초를 캐다가 옥기를 하나 발견했는데 그게 발굴의 시초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소중한 유물들이 발굴된 곳이었는데 역시 안내 표지판 하나 세워놓지 않은 것이 좀 의아했습니다. 아쉽지만 발굴현장을 뒤로 하고 안내해 준 마을 사람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소하서촌을 나왔습니다.
그래도 어제는 오한기박물관에서 소하서촌의 발굴 모습 사진과 그곳에서 출토된 돌도끼(마제석기)를 직접 확인해 볼 수는 있었습니다.
번듯한 표지판 하나 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9000년 전 선조들이 살았던 곳을 직접 발로 밟아보았다는 것에 위안을 삼아봅니다.
적봉시로 바로 가려고 하다가 시간이 많이 늦어져서 이곳 근처에서 유적지 한 곳을 더 보고 가기로 했습니다. 동석병용기시대의 대표적인 유물들이 발견되어 소하연 문화라고 부르게 된 곳, 소하연촌을 찾아갔습니다.
해가 질 무렵 오후 4시가 다 되어 소하연촌에 도착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현재의 소하연촌이 있고, 옛날 소하연촌이 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사연인 즉 비가 올 때마다 집마당까지 물이 들어차서 30가구에 해당하는 마을 전체를 이곳 현재의 소하연촌으로 이주시켰다고 합니다. 유적지 발굴은 옛날 소하연촌에서 이뤄졌다고 해서 그곳을 다시 찾아갔습니다.
초행길이라 길을 많이 헤맬 것 같고, 또 해가 곧 질 무렵이어서 젊은 시절에 유적지 발굴 현장을 직접 보았다는 마을 할아버지 한 분을 차에 태우고 답사에 나섰습니다. 소하연역을 지나 기차길 옆을 따라 난 비포장 도로를 한참 동안 가니 발굴지가 나타났습니다.
마을 할아버지는 넓은 평야에 밭 한 가운데를 가리키며 여기서 발굴이 있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발굴 당시에는 낮은 언덕이 있었다고 하고, 저쪽 미루나무와 이쪽 미루나무 사이 전체에 당시 마을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마을 서쪽 언덕이 발굴 현장이었던 것입니다.
소화연문화는 동석병용기시대로 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를 잇는 고리 역할을 합니다. 소하연문화를 뒤이어서 초기 청동기시대인 하가점하층문화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곳 소하연촌에서 발굴된 유물 중에서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갑골문 이전의 원시 상형문자인 '도부문자'의 발견입니다. 소하연문화 대남구묘지에서 출토된 토기 가운데 몸통 주위에 7개의 도부 문자가 새겨진 것이 발견되었습니다.(아래 사진)
역시 이곳에도 어떤 안내 표지판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언덕이 없어지고 모두 밭으로 변해 있어서 그 누구도 이곳이 유적이 발견된 곳임을 알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마을 할아버지와 함께 마을에 얽힌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정겹게 주고 받았습니다. 할아버지는 젊은이들이 자꾸 농촌을 떠나고, 농촌 총각이 장가를 가려면 20만 위안이라는 큰 돈을 줘야 할 정도라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한국이나 중국이나 농촌 문제는 정말 심각한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오늘 답사 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 오늘은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는지 운전기사님이 저녁도 안 먹고 자겠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허탕에 허탕을 친 하루였습니다.
소하연촌을 나와 곧바로 적봉시로 향했습니다. 저녁 6시 30분에 적봉시에 도착해 숙소를 잡았습니다. 적봉시는 홍산문화 유적이 대규모로 발굴된 곳입니다. 드디어 배달 문명의 연원, 홍산문화의 얼이 서려 있는 바로 그곳에 발을 내디딘 것입니다.
답사를 모두 마치고 나서 스님은 함께 일정을 동행한 조춘호 선생님에게 오늘 답사한 소감과 더불어 이런 얘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오늘은 성과를 남긴 게 별로 없죠?(웃음) 오늘 성과는 두 가지예요. 첫째, 9000년 전에 선조들이 살았던 곳을 직접 가봤다는 겁니다. 둘째, 직접 가보니 이곳은 대중들을 데리고 올 만한 곳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는 겁니다. 한국에서 발간된 어떤 책에도 소하서유적을 찾아가 보았다는 기록은 없는데, ‘아, 유적지가 이렇게 변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었구나’ 하고 알 수 있었어요. 그러니 ‘대중을 데리고는 가볼 만한 곳이 못 되는구나’ 하고 알게 된 것은 큰 성과예요.(웃음) 답사를 할 때는 이렇게 확인을 직접 해보는 것이 중요해요. 만약 기행단을 이끌고 이곳에 안내를 해준다면 우리처럼 이렇게 길을 잘못 들어서 돌아가고 하면 안 되잖아요. 가장 빠른 길로 효과적으로 가야하기 때문에 답사가 반드시 필요한 겁니다. 또 유적지에 직접 가봐야 이곳이 볼 만한 곳인지, 굳이 오지 않아도 되는 곳인지 판단할 수가 있죠.” 조 선생님은 스님의 이야기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어떤 실패도 경험으로 삼아야 한다는 스님의 법문이 떠올랐습니다. 고생은 많이 했지만 마지막에 스님이 들려준 한마디 덕분에 아쉬움은 금세 사라졌습니다. 꼼꼼히 답사하고, 시행착오를 거듭하고, 그 속에서 교훈을 얻어내는 스님의 모습 속에서 오늘도 많은 것을 배웁니다.
원래 계획은 근처 파림좌기에 있는 요나라 상경을 돌아볼 예정이었는데, 답사 일정이 계속 늦어져서 상경 답사는 포기하고 내일은 홍산문화 유적지만 답사하기로 했습니다.
※ 민족의 역사를 올바르게 정립하고, 연해주 독립운동의 성지인 '신한촌'의 역사 회복과 재건을 위해 대중 여러분들의 후원금을 받습니다. 소정의 기금 출연으로 역사 회복에 동행하는 마음과 정성을 함께 담아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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