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6.4.3 청년대학생 경주역사기행 2일째(1) 대왕암, 감은사지, 불국사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경주역사기행 2일째를 맞이하여 오전에 문무대왕릉과 감은사지, 불국사를 차례로 안내한 후 오후에는 청년대학생들의 개인 고민에 대해 상담해주는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새벽 6시 30분에 경주에서 문무대왕릉으로 출발했습니다. 문무대왕릉은 경주시 양북면 앞바다에 있습니다. 바닷가에 도착한 청년대학생들은 눈 앞에 펼쳐진 바다를 보자 환호를 했습니다. 어제는 벚꽃 구경, 오늘은 바다 구경, 청년대학생들은 연일 자연과 마주하는 기쁨을 만끽했습니다.  

 


▲ 문무대왕릉

 

어제 하루 종일 스님으로부터 통일과 역사 이야기를 들었는데, 오늘 아침 문무대왕의 무덤 앞에 당도한 청년대학생들은 먼저 눈을 감고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발원문’을 낭독했습니다. 

 


 

“잠시 헤어진 시간은 70년이지만 우리 핏줄 속에 면면이 이어져 온 신시 개천 6천 년의 역사 속에서 찬란한 민족 문화를 꽃피웠던 웅대한 그 기상을 민족의 평화와 통일로 되살리고자 합니다. 청년들이 꿈을 실현할 수 있는 미래의 통일코리아로 거듭나게 하소서. 선조들의 민족혼을 등불로 삼아 민족의 화합과 통일의 길을 밝혀 한 걸음 한 걸음 서로 의지하며 함께 나아가게 하소서.” 

 


 

대한민국의 미래를 책임질 청년대학생들이 삼국통일을 이룩한 문무대왕의 무덤 앞에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발원하는 모습에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이어서 스님이 문무대왕릉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미리 진행측에서 문무대왕릉을 위에서 찍은 사진을 스마트폰으로 공유해 놓아서 대중들은 그 사진을 보며 스님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저기 보이는 강이 대종천입니다. 대종천이 바다와 만나는 이곳에 바위섬이 하나 있는데 이 바위섬에 문무대왕의 유골을 묻었어요. 저 바위를 ‘대왕암’이라고 부릅니다. 이 동네 사람들은 조상 대대로 저 바위를 대왕암이라고 불렀고, 문무대왕의 수중능이라고 익히 알려져 있었습니다. 

 


 

문무대왕은 661년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660년에 백제가 멸망했는데 그때까지는 태종무열왕이 집권을 했고, 백제가 멸망하고 이듬해에 태종무열왕이 죽고, 첫째 아들 법민 태자가 왕위에 올라서 문무왕이 되었습니다. 문무왕은 668년에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당나라와 8년 간 전쟁을 한 끝에 676년에 당나라 군대를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통일국가를 만들었습니다. 681년에 돌아가셨으니까 해수로는 21년 간 왕위에 있었고 실제로는 통일이 되자마자 돌아가신 택이에요. 돌아가실 때 유훈을 이렇게 남겼다고 해요. 

 

‘우리 민족이 신라, 백제, 고구려 삼국으로 나뉘어 끊임없이 전쟁을 해서 백성들이 늘 불안하고 삶이 고달팠다. 이제 삼국이 하나로 통일이 되어서 나라가 안정되고 백성들도 편안해졌다. 그렇지만 아직도 바다 건너에는 왜구가 있어서 늘 우리를 노리고 있기 때문에 내가 죽어서 동해바다 용이 되어 왜구의 침략을 막겠다. 그러니 내가 죽으면 화장을 해서 그 유골을 동해 바다에 묻어다오. 그리고 장례 절차는 아주 간소하게 해라. 공연히 장례 절차를 복잡하게 한다고 해서 영혼이 좋은 곳에 가는 것이 아니다. 국가의 녹을 낭비하지 말고 장례 절차를 아주 간소하게 하고 무덤 같은 것도 만들지 말고 바다에 유골을 묻어다오.’

 


 

문무대왕이 이런 신앙을 갖게 된 것은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삼국통일의 과정에서 당나라와 전쟁을 했을 때 도저히 승리가 불가능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잖아요. 이것은 사람의 힘보다는 부처님과 호국 선신의 도움으로 막아내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이후 불교에 대한 믿음이 더욱 강해진 거에요. 그래서 불교식으로 자신을 화장해 달라고 한 겁니다. 그리고 태풍이 두 번이나 일어나서 당나라 군대가 수장되었기 때문에 용왕에 대한 신앙도 깊어진 거에요. 그래서 자기 스스로 용왕이 되어서 나라를 지키겠다고 한 겁니다.  

 

앞에서 보면 바위가 두쪽으로 나뉜 것 같은데, 위에서 내려다보면 바위가 십자 모양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큰 바위를 십자 모양으로 파서 수로를 낸 겁니다. 그래서 물길이 동서남북에서 다 들어갈 수 있게 했고, 가운데에는 다시 연못을 동그랗게 팠어요. 거기에 큰 돌을 하나 얹어서 눌러 놓았습니다. 

 


 

사진으로 보면 손으로 들 수 있을 것처럼 작아 보이지만 길이가 3.6m 폭이 1.9m, 두께가 0.7m 가 되는 큰 돌입니다. 발굴할 때 그 돌을 기중기로 들어올렸는데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해요. 원래는 그곳에 유골이나 유골함을 넣어야 맞겠죠. 왜냐하면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는 사리탑과 양식이 비슷하기 때문이에요. 인도의 사리탑도 사리를 모시는 탑에 사람이 들어가는 문이 동서남북으로 다 있거든요. 그것처럼 문무대왕의 무덤도 사리탑처럼 물길이 동서남북으로 들어가게 만든 겁니다.  

 


 

문무왕의 다음 왕이 신문왕입니다. 저기 산이 하나 보이죠? 어느날 신문왕이 저 산 위에서 보니까 움직이는 바위섬이 하나 떠내려오는 거에요. 바위섬 위에 대나무가 있었는데 낮이 되면 두 개가 되었다가 밤이 되면 합해서 하나가 되는 겁니다. 그것을 기이하게 생각해서 그 대나무를 잘라 피리를 만들었는데 그게 ‘만파식적’입니다. 나라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그 피리를 불면 파도도 잠자고 모든 세상이 평화로워졌다고 해요. 신문왕이 바위섬을 내려다 보았던 그 자리에 지은 정자가 ‘이견대’입니다.” 

    

철석이는 파도 소리를 배경으로 스님의 구수한 목소리가 더욱더 귀에 쏙쏙 들어왔습니다. 

 

막 출발하려는 찰나 청년대학생들 모두가 스님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싶어 했습니다. 대왕암을 배경으로 400여 명의 청년대학생들이 나란히 서서 손을 흔들며 사진을 찍었습니다. 

 


 

대왕암을 출발한 청년대학생들은 대종천을 따라 5분 거리에 있는 ‘감은사지’로 향했습니다. 주차장에 도착하기 전부터 저 멀리 높이 솟은 감은사지 삼층석탑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 감은사지

 

스님은 먼저 도착해 청년대학생들을 기다리다가 모두 도착하자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이곳이 ‘감은사지(感恩寺址)’입니다. 이곳은 일반 절과 비교해서 특이한 점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법당의 바닥 구조에요. 여러분이 올라온 계단, 그 앞에 연못이 있어요. 연못 앞으로 도로가 나 있는데요, 그 쪽으로 대종천(大鍾川)이 흘렀는데 거기서 물을 끌어와서 연못을 만들었어요. 그 연못으로부터 이 법당 밑까지 용이 올 수 있도록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용이 저 바다에서 대종천을 타고 이 연못으로 들어와서 법당 밑에서 법문을 들을 수 있도록 한 겁니다. 보통 법당 바닥은 흙으로 채워져 있는 데 여기는 그렇지 않습니다. 마치 밑에 물이 있는 것처럼 물 위에 징검다리를 놓고 마루를 걸쳐놓은 격으로 지었어요. 여기 와서 보시면 그렇게 돼 있습니다. 

 


 

이 절은 682년(신문왕 2년)에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니까 681년에 문무대왕(文武大王)이 죽고 그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서 신문왕이 세운 거예요. 감은사지의 이 탑은 우리나라 석탑 중에 제일 큰 것에 속합니다. 조금 후에 불국사에 가보시면 다보탑과 석가탑이 있는 데 그것보다 이 탑이 규모가 더 큽니다. 꼭대기의 상륜부가 다 부서졌지만 그 철심은 그대로 남아 있잖아요. 이것까지 포함하면 제일 큰 탑에 속합니다. 신라의 탑 중에 큰 규모로 꼽는 탑이 3개 있는데 지금 보고 있는 감은사지 삼층석탑과 고선사지 삼층석탑, 나원리 오층석탑이 그것입니다. 

 


 

또 하나는 절이 지어진 계기인데요. 이 감은사는 왜구를 물리치기 위해서 세운 절입니다. 어제 말씀드렸는데 통일을 발원하며 지은 탑이 황룡사(皇龍寺) 9층탑이라고 했지요? 이 황룡사가 신라에서 제일 큰 절이면서 호국사찰이었습니다. 우리가 가보려고 했는데 길이 막혀서 못 갔어요. 어제 우리가 갔던 사천왕사(四天王寺)는 통일 전쟁 후 당나라를 물리치기 위해서 세웠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러니까 이 절들은 포교를 위해서 세운 절이 아니라 나라를 지키는 정신으로 세운 절이기 때문에 호국사찰(護國寺刹)이라고 합니다. 신라의 3대 호국사찰은 황룡사, 사천왕사, 감은사입니다.”

 

스님의 설명이 끝나자 청년대학생들은 우람한 삼층석탑과 법당 밑까지 용이 들어올 수 있게 했다는 흔적을 자세히 살펴보며 사진도 찍고 잠시 자유시간도 가졌습니다. 

 


▲ 용이 들어올 수 있게 만든 법당 터

 

법당 터 뒤쪽에 큰 나무 아래에서는 기타 연주를 하며 흥겨운 마당이 펼쳐지기도 했습니다. 만파식적 이야기를 들었으니 세상을 평화롭게 해줄 아름다운 연주를 들려주는가 싶어 잔뜩 기대를 했는데 싱겁게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청년들은 서로의 웃음에 취해 봄날씨를 즐겼습니다. 

 


 

감은사지를 출발해 다음은 불국사로 향했습니다. 청년대학생들이 모두 불국사 입구에 도착하자 스님은 ‘불국사 안내도’를 가리키며 불국사의 독특한 가람 배치에 대해 설명해 주었습니다. 

 


 

법화경에 근거한 석가모니불의 사바세계, 정토삼부경에 근거한 아미타불의 극락세계, 화엄경에 근거한 비로자나불의 연화장세계를 형상화하여 각각 건물이 지어졌다는 설명을 듣고 나니 왜 절의 이름이 불국사인지 알겠고, 각 건물들도 새롭게 보였습니다. 불국사에 자주 왔던 청년들도 사진만 찍고 가기 바빴는데 이제는 제법 그럴듯하게 설명도 할 수 있을 듯 하다며 좋아했습니다. 

 


▲ 불국사

 

불국사에 오면 가장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는 곳인 청운교와 백운교 앞에서 스님은 다시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먼저 불국사가 어떤 사연으로 창건이 되었는지 창건주인 김대성에 대한 일화를 들려주었습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불국사는 751년에 짓기 시작해서 774년에 완공을 했다고 하니까 한 23년 걸린 셈입니다. 절을 완성시키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지요. 현재 우리가 둘러보고 있는 부분은 원래 절의 4분의 1 규모입니다. 임진왜란 때 다 불타버린 후 복원한 게 4분의 1정도 밖에 안 된 겁니다. 왜 그랬느냐 하면 처음에 절을 지을 때는 국가적인 지원을 받고 지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뒤에는 정부가 불교를 탄압하던 시기였으니까 국가적 지원을 받지를 못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님들이 나무를 베고 직접 목수가 되어 지어야 하니까 다 복원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러면 이 절을 창건한 창건주는 누구일까요? 보통 어느 절이나 창건설화가 있잖아요. 불국사는 재가신자가 창건주입니다. 불국사를 지은 사람은 김대성(金大城, 700년∼774년)입니다. 왕족으로서 진골 출신인데, 신라의 재상인 중시(中侍), 요즘 말로 국무총리를 지낸 분이에요. 김대성이 출생하게 된 일화는 이렇습니다. 김대성의 아버지도 재상이었는데 자식이 없었습니다. 옛날에는 자식이 없으면 큰일이었잖아요. 그래서 자식 낳기 위해서 열심히 기도를 했어요. 그때 한 고승이 얼마 있으면 자식이 생길 것이라고 예언을 했습니다. 정말 얼마 후에 아이가 생겨서 낳게 됐는데 태어난 아이가 한 손을 꼭 쥐고 펴지 않고 있었어요. 아무리 그 손을 펴려고 해도 펴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스님을 초청해서 아이를 보였더니 스님이 말하기를 사연이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스님이 염불을 하시니 손이 펴졌습니다. 그런데 아이의 손바닥에는 ‘대성’이라고 글자가 적혀 있었습니다. 그 사유란 이렇습니다. 

 

경주 건천 모량리에 아주 가난한 종 신분의 모자가 살았어요. 아들은 ‘대성’이라는 이름으로 어머니와 토굴에 살면서 주인집에 가서 일해 주고 밥이나 얻어먹고 살았는데 어느 날 주인집에 어떤 스님이 와서 절을 짓는다고 시주하라고 했어요. 그러자 주인은 쌀 몇 섬과 비단 몇 필을 시주했습니다. 종은 ‘주인은 참 좋겠다. 전생에 복을 많이 지어서 이생에도 부자이고 또 이생에서 저렇게 복을 지으니 다음 생에도 부자가 되겠구나. 그런데 나는 전생에 지은 복이 없어서 이렇게 가난하고, 또 이생에서도 가난하니 복을 못 짓고 다음 생에도 가난하게 살겠구나.’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너무 슬픈 나머지 토굴로 돌아와 어머니께 그 얘기를 하면서 ‘어머니 우리도 복을 좀 지읍시다.’라고 하니 어머니는 ‘네 말은 맞는 말이지만 한 끼 먹을거리도 없는 데 어떻게 복을 짓겠느냐. 정신 차려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주인집에서 시주를 요청했던 그 스님이 자기네 토굴에 와서도 요령을 흔들며 시주를 요청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머니가 먹을 양식도 없다며 줄 게 없다고 하니까 아들이 ‘어머니, 우리 시주합시다. 저 강변에 뙈기밭이 좀 있지 않습니까? 그걸 드립시다.’라고 말했어요. 어머니는 아쉬웠지만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간곡한 청에 못 이겨서 전 재산을 시주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가진 것을 모두 털어 시주를 했는데 일주일 만에 아들이 죽어버렸어요. 그러니까 동네사람들은 ‘그것 봐라. 사람이 다 분수에 맞게 살아야하는데 제 분수도 모르고 허튼 짓을 하니 명대로 못살았다’ 라고 비난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이 죽어서 바로 이 재상집에 태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이가 자기 손에 ‘대성’이라고 쥐고 태어났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사유를 재상집에서 들으니까 안 믿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실제로 토굴에 사람을 한번 보내봤어요. 그랬더니 정말 그 마을에 그  젊은이가 1년 전에 죽었고 이름이 대성이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기 이름을 대성이라고 짓고 그 어머니를 모시고 와서 아이의 유모로 삼았습니다. 그러니 김대성은 이생의 부모님과 전생의 부모님을 다 모시고 산 격입니다. 신기하지요?(모두 웃음) 

 


 

시간이 흘러 아이가 자라 청년이 되어 토함산에 사냥을 나갔는데 활로 곰을 쏘아 죽였어요. 그런데 꿈에 그 곰이 계속 나타나 쫓아오는 악몽을 꾸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 곰의 원혼을 달래려고 이 불국사에 시주를 했습니다. 여기 불국사는 김대성이 처음 지은 절이 아니고 이미 절이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김대성이 성장해서 재상까지 지내고 은퇴하자 전 재산을 쏟아서 현생의 부모 은혜를 갚기 위해 이 불국사를 중창하고, 전생의 부모 은혜를 갚기 위해 석굴암을 짓습니다. 그러니 불국사는 효사상과 관계가 깊은 절입니다. 그런데 김대성은 이것을 완성시키지 못하고 죽게 되자 공사비가 너무 많이 들어 감당이 안 되니 국가에 헌납을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국가에서 완성을 했어요.” 

 

스님이 옛날 이야기를 너무 재미있게 해주어서 어떤 청년은 입을 헤벌리고 있었는데 스님이 이를 보며 한마디 하자 순식간에 웃음 바다가 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이생의 부모님과 전생의 부모님을 함께 모시고 살았다는 이야기는 정말 신기했습니다. 

 

불국사는 산중에 사찰을 지으면서 평지 사찰처럼 가람 배치를 하기 위해 축대를 많이 쌓았는데 스님은 이 축대를 쌓은 방식에서도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며 그 내용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여기 보이는 것이 축대입니다. 맨 밑에는 다듬지 않은 자연석으로 쌓았어요. 자연석도 큰 것만 사용하지 않고 작은 것도 사용했어요. 언뜻 보기에는 좀 이상하게 쌓았지요. 그런데 이것이 상징하는 바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큰 나무도 있고 작은 나무도 있고, 큰 돌도 있고 작은 돌도 있고, 큰 사람도 있고 작은 사람도 있고, 넉넉한 사람도 있고 좁은 사람도 있어요. 그러니까 맨 밑에는 ‘세계의 기초는 다양하다’ 즉 다양성을 상징합니다. 다시 말하면 중생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든 것을 다 똑같이 만들려고 하잖아요. 똑같이 좋게 다듬으려고 해요. 그러면 안 됩니다. 생긴 게 다 다르듯이 서로 다 달라요. 

 

중생의 세계 위에 있는 축대가 보살의 세계입니다. 보살의 세계란 무엇인가요? 저기 가운데에 기둥이 하나씩 있지요. 그 기둥들 사이에 돌들이 주욱 끼어 있어요. 여기서 보면 다듬은 것 같은데 가까이 가서 보면 자연석입니다.(모두 놀람) 

 


 

그런데 강변에 가보면 네 면이 모두 판판한 돌은 드문데 한 면이 판판한 돌들은 많아요. 그 판판한 쪽 한 면을 밖으로 보이게 쌓은 겁니다. 그러니 자연석인데 인공적인 것처럼 보여요. 저렇게 쌓으면서도 무너지지 않게 하려면 핵심은 기둥입니다. 잘 다듬은 기둥이 딱 자리를 잡고 있으면 그 사이에 끼워 넣는 돌은 아무 돌이나 가능하되 한 면만 딱 맞춰서 끼워 넣으면 저런 모양이 됩니다. 그러니까 이 사바세계에는 온갖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이 사바세계가 부처의 세계가 되려면 여러분들이 다 깨달아야 하는 게 아니고 100명 가운데 1명, 1000명 가운데 1명만 딱 중심을 잡아줘도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중간에 끼어있는 사람들은 흐리멍텅하게 살아도 세상이 바르게 됩니다. 

 

그러니 모든 사람을 다 똑바르게 만들려고 하면 안 됩니다. 100명 가운데 한 명, 1000명 가운데 한 명인 사람이 바로 리더인데, 리더만 이렇게 딱 자리를 제대로 잡으면 남아있는 사람들은 자유롭게 살아도 괜찮아요. 그런데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이 돌처럼 한 면은 괜찮은 면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한 가지 측면에서는 괜찮은 면이 있습니다. 여러분들 친구들을 한번 보세요. 저 친구는 다른 건 몰라도 노래 하나는 잘한다, 저 친구는 정직하다, 이런 경우가 있지요?”

 

“예”

 


 

“그런 장점들을 모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기둥은 수행을 해서 딱 중심을 잡아주는 보살을 뜻하고, 나머지 돌들은 한 가지 측면은 똑바른 일반 사람들을 뜻합니다. 이들이 어우러진 것이 보살의 세계입니다. 그러니까 축대를 쌓은 방식을 보면 맨 아래는 중생의 세계를 표현했고, 그 위에 보살의 세계를 표현했고, 또 그 위에 부처의 세계인 불국사를 지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을 완벽하게 만들려고 하면 살기가 힘들어져요.

 

그것처럼 우리는 규칙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규칙을 무조건 강제하면 사람이 숨이 막혀서 못 살아요. 그렇다고 규칙을 풀어놓으면 혼란스러워서 못 삽니다. 그러니 나는 규칙을 지키되 남에 대해서는 조금 열어놓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만약 리더가 된다면, 자기는 모범적으로 규칙을 지키고 살되 다른 사람들은 조금 흐트러져도 봐줘야 된다는 겁니다. 친하다고 봐주라는 게 아니라 사람이니까 다 100% 규칙을 지키기가 어렵잖습니까. 그런 자유로움을 ‘중도(中道)’라고 합니다. 질서가 있어 강하되 부드러워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제 맘대로 살든지, 아니면 내가 지키면 남도 꼭 지키라고 너무 잔소리를 해서 못살게 하잖아요.(모두 웃음)

 


 

여기는 돌 하나 쌓는 데도 이렇게 다 경전의 내용을 가지고 쌓았어요. 이런 곳을 그저 휙 둘러보고 사진만 찍으면 안 되겠지요.”

 

축대를 쌓는 방식에 이렇게 깊은 의미가 담겨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청년들은 스님의 설명에 감탄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은 청년들이 앉아 있는 이곳 청운교·백운교 앞마당에 ‘구품연지’라고 부른 연못이 있었다고 하면서 그 의미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지금 앉아있는 여기는 ‘구품연지(九品蓮池)’라는 연못이 있었던 자리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다시 태어날 때 극락세계에 태어난다고 하잖아요. 그 때 9등급으로 나눠서 태어난다고 해서 ‘구품’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모든 사람이 다 극락에 태어날 수 있다는 겁니다. 

 


▲ 구품연지가 있었던 자리

 

그러나 수행한 사람은 즉시 태어나는 1등급인 상상품입니다. 이 방에서 문 열고 저 방에 가듯이 이생을 마치면 저 생에 바로 태어나는 겁니다. 그런 사람은 죽었다고 울 필요가 없겠지요. 그러니 우는 건 우리가 몰라서 우는 거예요. 2등급은 12시간 안에, 3등급은 하루 만에, 4등급은 3일 만에, 5등급은 일주일 만에, 6등급은 21일 만에, 7등급은 49일 만에 다시 태어납니다. 이 7등급이 보통 사람들입니다. 아주 악독한 사람은 아니고, 술도 한 잔 하고 싸움도 하는 그런 보통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7등급까지는 그래도 참회하고 옆에서 도와주면 극락왕생하는 사람들이에요. 지옥까지는 안 갔다 와도 됩니다. 

 

그런데 8등급부터는 조금 다릅니다. 8등급은 스님이 되거나 불교신자이면서도 절에 와서 절 돈을 훔쳐가고 절에 있는 보물도 훔쳐가는 등 나쁜 짓하는 사람들입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것보다도 못 합니다. 그래서 지옥에 가서 뜨거운 맛을 좀 보고 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9등급의 사람들은 어떤 사람일까요? 부모를 죽인 사람, 불상을 파괴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극악무도하다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도 극락세계에 갈 수 있다는 겁니까? 없다는 겁니까?”

 

“있다는 겁니다.”

 

“네. 그러나 무조건 가는 건 아니고, 지옥에 가서 3겁 정도 고통을 겪고 난 후에 왕생극락한다는 식입니다. 그렇게 해서 9품의 중생을 다 구제한다는 뜻으로 ‘구품연지’ 라고 부른 겁니다.”

 

어떤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모든 중생을 다 구제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는 설명이 무척 인상 깊게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이런 큰 의미를 담고 있는 구품연지가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복원이 되지 못하고 그냥 흙으로 덮어져 있어서 안타깝게 느껴졌습니다. 

 

이렇게 설명을 모두 마치고 불국사 경내로 들어갔습니다. 먼저 다보탑을 보고, 자하문을 나와 청운교와 백운교를 내려다 본 후 석가탑을 둘러보고, 대웅전과 무설전에 대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 무설전

 

무설전 뒤로 경사가 가파른 계단을 오르니 관음전이 나타났습니다. 관음전 담벼락에 서서 다시 무설전 쪽을 바라보는데 그 풍경이 정말 멋스러웠습니다. 스님은 “여기서 사진을 찍으면 한국의 미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 관음전에서 바라본 풍경

 

관음전을 내려와 비로전을 참배한 후 마지막으로 극락전과 안양문, 연화교와 칠보교를 둘러보고 불국사를 나왔습니다. 스님은 가는 곳마다 그곳에 얽힌 설화와 의미들을 재미있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청년들은 “다른 건 몰라도 불국사만큼은 꼭 법륜 스님의 설명을 들어야 할 것 같다”며 아주 만족스러워 했습니다. 

 

스님은 불국사의 경치를 가장 잘 찍을 수 있는 포토존을 알려주면서 이곳에서 조별로 사진을 찍으라고 안내한 후 먼저 주차장으로 내려왔습니다. 

 


 

불국사 사찰순례 후에는 다시 숙소로 돌아와 점심 식사를 한 후 12시 30분부터 개인 고민에 대해 묻고 답하는 즉문즉설 시간을 2시간 남짓 가졌습니다. 어제는 ‘역사와 통일’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면 오늘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인생 고민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즉문즉설 이야기는 다음 글에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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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댓글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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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정

스님은 뭐든 참 쉽고 재미나게 얘기해 주시네요~ 이번엔 문무대왕릉부터 불국사까지 여러가지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주셔서 저도 함께 경주역사기행에 동참한듯 정말 재밌게 읽었습니다. 글구 포토존까지 알려주시는 센스~에 엄지 척입니다. 글 올려주신 수행팀께도 감사드려요. ^^

2016-04-07 01:07:05

한지은

스님 감사합니다 ^^

2016-04-06 16:10:19

해탈월

100명중에 한사람.. 1000명중에 한사람.. 스님의 가르침을 받은 청년들이 세상속에서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분명 지금보다 멋진 세상이 되겠지요...?

2016-04-06 08:4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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