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6.4.2 청년대학생 경주역사기행 1일째(1) 역사기행편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청년대학생들과 함께 벚꽃이 활짝 핀 경주 시내 곳곳을 거닐며 ‘신라의 삼국통일과 오늘날 남북통일의 교훈’에 대해 설명하고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아침 9시 30분, 태종무열왕릉 앞에 모인 380여 명의 청년대학생들은 스님이 걸어나오며 송수신기로 인사를 건내자 우레와 같은 박수로 환영을 했습니다. 

 


▲ 태종무열왕릉

 

스님도 환한 웃음을 머금으며 오늘 역사기행의 취지와 목표가 무엇인지에 대해 먼저 이야기했습니다. 

 

“여기는 역사 유적지이니까 옛 역사를 돌아보면서 꽃구경도 하세요. 역사공부를 즐겁게 하자는 말입니다. 그리고 역사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지도 살펴보려고 해요. 

 

만약 지금 상황을 천년 뒤에 후손들이 본다면 ‘아, 그때 사람들은 왜 그랬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겁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천 년 전 역사를 보면서 ‘왜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해서 백제를 멸망시켰을까?’ 하는 의문이 들잖아요. 이런 의문은 우리의 지금 생각이지, 그때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못 한 거예요. 현재 남북은 대립과 갈등을 하고 있는데, 지금 같아서는 일본, 미국, 중국과 손을 잡아서 북한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고 싶지요? 우리 대통령께서는 그렇게 하고 싶대요.(모두 웃음) 

 


 

그런데 그걸 천 년 후에 후손들이 보면 ‘바보같이 왜 그랬을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지금 우리가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게 백 년 후에 돌아봤을 때는 전혀 정당하지가 않을 수 있다는 거죠. 또 옛날 우리 선조들이 한 것을 두고 ‘이해 못하겠다. 왜 바보같이 그랬던 걸까?’ 하는데, 그 시대로 돌아가서 살아보면 ‘아, 이 당시에는 그렇게밖에 할 수가 없었구나’ 하는 걸 또 이해하게 될 거예요.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이렇게 역사기행을 하는 건 옛날에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을 이해하고, 또 오늘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는 기회도 될 겁니다. 이런 기회를 통해서 우리는 간접 인생경험을 쌓자는 겁니다. 직접 경험하는 게 제일 좋은데, 다 경험할 순 없으니까 남이 살았던 삶을 보면서 ‘아, 나도 이래야 되겠다’거나 ‘아, 나는 이러지 말아야 되겠다’는 간접교훈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오늘의 목표가 그러하니까, 너무 노는 데만 집중하느라 강의를 안 들어도 안 되고요. 너무 공부에만 집중해서 힘들어도 안 되겠지요? 그러니까 오늘은 약간 즐기면서 공부를 합시다.” 

 

꽃구경과 역사기행을 함께한다는 이야기에 청년대학생들은 환호를 하며 기뻐했습니다. 

 


 

스님은 오전에는 태종무열왕릉, 진흥왕릉, 김유신장군묘를 둘러보며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는데 있어서 정치적인, 외교적인, 경제적인, 군사적인 상황이 어떠했는지에 관해 얘기를 한 후 오후에는 능지탑, 선덕여왕릉, 사천왕사지를 둘러보며 삼국통일의 과정에서 신라인들의 정신적이고 신앙적인 모습은 어떠했는지에 관해 얘기를 했습니다. 또 저녁에는 이것들을 기초로 해서 지금의 남북문제나 국제관계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해 강연을 했습니다.

 

먼저 오늘 역사기행의 첫 출발지인 태종무열왕릉 앞에서는 부족국가에 불과했던 작은 나라 신라가 어떻게 삼국통일의 주역이 될 정도로 비약적으로 성장하게 되었는가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삼국 통일의 과정이 전체적으로 어떠했는지 그 흐름을 주욱 짚어 주었습니다. 

 


 

“신라가 비약적으로 성장하게 된 원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가야와의 합의통일입니다. 만약 지금의 남북도 합의통일을 하게 되면, 남북은 일본, 중국과도 친하고, 그래서 동아시아공동체를 이루는 중심국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력으로 북한을 정벌해서 통일을 하게 된다면, 무엇보다 전쟁 피해가 엄청날 것이고, 중국도 전쟁에 참여할 것이므로 승산도 없고, 설령 승전하더라도 중국과 원수가 되기 때문에 통일이 되더라도 통일 이후에 아무런 실익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평화적으로 합의를 통해 통일을 할 때만이 통일도 쉽고, 통일 이후의 시너지 효과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신라와 가야의 합의 통일이 그러했습니다. 우리가 역사공부를 이래서 하는 거예요. 그런데 작은 나라에 불과했던 신라가 왜 갑자기 비약적 발전을 하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학교에서 배운 적이 없지요?” 

 

“예, 없어요.”

 


 

“현재의 우리 삶에 교훈이 되는 공부를 해야 되는데, 학교에서는 외우는 공부만 하니까 문제입니다. 가야와의 합의통일로 신라는 비약적으로 성장해서 삼국의 일원이 됐고, 그러면서 소위 삼국시대가 시작됐습니다. 그것을 넘어서서 신라는 가야와의 합병 이후 130년 만에 오히려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가야와의 합병 이후에 신라를 비약적으로 성장시킨 사람이 누구냐 하면 법흥왕과 진흥왕이에요. 

 

이 넓어진 영토를 잘 관리한 왕이 진평왕이에요. 진흥왕의 작은아들인 진지왕이 재위 4년 만에 폐위되고, 진흥왕의 장손이자 진지왕의 조카인 진평왕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진평왕은 왕위에 53년을 있었기 때문에 왕위에 꽤 오래 있었죠. 이 시기에는 넓어진 영토를 관리하는 게 어려웠어요. 고구려와 백제가 모두 자기네 땅을 찾겠다고 침공해 왔거든요. 

 

이런 국난의 시기를 이어 받아서 통치했던 왕이 바로 선덕여왕입니다. 그래서 선덕여왕, 진덕여왕이 그 어려운 시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삼국통일을 발원하게 됩니다. 사실 엄격하게 말하면 통일은 아니지요. 고구려의 후예들이 발해를 세웠기 때문에 남북국시대라고 해야 됩니다. 신라는 처음부터 통일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던 게 아닙니다. 삼국이 서로 싸우는 과정에서 중국에 수나라, 당나라가 들어섰고, 한강 유역을 신라가 차지하면서 백제와 신라가 원수가 되고, 그 원수의 원수는 친구이니까, 철천지 원수였던 백제와 고구려가 이번엔 손을 잡아서 여제동맹을 맺게 됩니다. 고구려와 돌궐이 싸우다가 또 중국이 커지니까, 고구려와 돌궐이 동맹을 맺게 되고요. 그러니까 몽골, 고구려, 백제, 왜, 이렇게 4국이 동맹관계를 맺으니까, 신라는 오른쪽에 고립이 된 거예요. 그러니까 바다 건너에 있는 중국의 수나라, 당나라와 외교관계를 맺어서 결국 국제전쟁이 벌어지게 되지요. 그 국제전쟁의 결과로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신라가 역사의 주역이 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고구려의 옛 땅에는 다시 발해가 들어서지만 신라와 발해는 동족인데도 별로 사이가 안 좋았어요. 발해 입장에서는 신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킨 사람들이고, 신라 입장에서는 발해의 문화수준이 좀 떨어진다고 얕잡아보는 면이 있었기 때문에 서로 티격태격했을 뿐 교류가 많이 없었습니다. 이게 어떻게 보면 우리 민족의 큰 불행입니다. 

 


 

우리는 지금 태종무열왕릉 앞에 와있는데요. 태종무열왕, 즉 김춘추는 오늘날로 치면 외교부장관으로서 역할하면서 선덕여왕 때 대당 외교의 주축을 담당했습니다. 그래서 당나라와 협력해서 우호관계를 유지시켰고, 자기가 왕이 되자 당나라와 연합해서 백제를 멸망케 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삼국통일의 첫 단계를 밟은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왕위를 계승한 문무대왕 때 고구려가 멸망하는데, 이때 군사력을 좌지우지한 사람이 가야 마지막 왕의 증손자인 김유신 장군입니다. 가야인들은 삼국통일의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삼국통일을 말할 때 김춘추, 문무왕, 김유신을 삼국통일의 영웅이라고 합니다.”

 

막힘없이 줄줄줄 흘러나오는 스님의 역사이야기에 청년대학생들은 금방 몰입되었습니다. 스님은 과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다시 현재로 돌아와 그 교훈을 되새기고, 현재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다시 과거로 돌아가 무엇을 더 살펴야 하는지를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마치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타임머신을 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태종무열왕릉 뒤로는 태종무열왕릉보다 훨씬 더 큰 네 개의 무덤이 나란히 모셔져 있는데, 청년대학생들은 그 옆을 천천히 오르며 스님의 설명에 계속 집중했습니다. 스님은 이 네 개의 무덤은 누구의 무덤인지 수수께끼를 내었습니다. 무덤이 더 큰 데다가 윗자리에 모셨으니 태종무열왕릉보다 더 큰 영웅이어야 하는데 그런 왕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어리둥절해 있자 아직 역사적으로도 수수께끼가 풀리지 않았다고 알려주었습니다. 

 


▲ 아직 무덤의 주인공이 밝혀지지 않은 태종무열왕릉 뒤 네 개의 큰 무덤

 

봄햇살이 따사롭게 비치는 가운데 무덤의 주인이 밝혀지지 않은 하나의 무덤 앞에서 380여 명이 다함께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삼국통일의 주역인 태종무열왕릉에서 청년대학생들은 한반도 평화통일을 간절히 소원하며 “화이팅!”을 외쳤습니다.  

 


 

조금 더 뒤쪽으로 올라가니 진지왕, 진흥왕의 무덤이 나왔습니다. 길게 행렬을 이루며 무덤 주위를 한 바퀴 돈 후 마을로 내려왔습니다. 

 


▲ 진흥왕릉(뒤)과 진지왕릉(앞)

 

마을 어귀에는 복사꽃이 탐스럽게 피어 있어서 감탄을 자아내었습니다. 스님이 “저기에 복사꽃을 한번 보세요. 여러분들 얼굴이 더 예뻐요? 복사꽃이 더 예뻐요?” 라고 물으니 청년대학생들은 “우리 얼굴이요”라고 대답하며 웃었습니다. 젊음이 좋긴 좋은가 봅니다. 또 길가에는 민들레가 노랗게 피어 있어 발걸음을 가볍게 해주었습니다. 

 


▲ 복사꽃

 


▲ 민들레

 

태종무열왕릉에서 김유신장군묘까지는 걸어서 이동했는데 길가에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절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청년대학생들은 곳곳에서 감탄사를 연발하며 기뻐서 어쩔줄을 몰라했습니다. 스님도 무척 즐거워하면서 한마디 덧붙였습니다. “꽃이 이렇게 피어있는 것을 경상도 말로 뭐라고 하는지 알아? 오지게 피었다고 그래.”

 


▲ 벚꽃 나리는 길. 태종무열왕릉에서 김유신장군묘까지.

 

경상도에서 온 청년들은 스님 표현대로 “우와, 오지게 피었다” 하면서 활짝 핀 벚꽃을 마음껏 감상했습니다. 바람이 간간히 불 때면 벚꽃잎이 흩날리기도 해서 절로 탄성이 터져나왔습니다. 스님이 “노래 한 곡 해봐라”라고 하자 한 청년이 나와 버스커버스커의 ‘벚꽃 엔딩’을 감미롭게 불러주었습니다. 

 

“봄바람 휘날리며 ♬ 흩날리는 벚꽃 잎이 ♬ 울려 퍼질 이 거리를 ♬ 우우 둘이 걸어요”

 

스님은 노래를 듣고 나서 "왜 하필 둘이서만 걷노? 이 좋은 길을 걸을려면 여럿이 같이 걸어야지" 하며 웃었습니다. 역시 스님 다운 특유의 유머에 청년들도 함께 웃었습니다.  

 


▲ 김유신장군묘 앞 벚꽃길

 

특히 김유신장군묘 앞에는 벚꽃잎이 어찌나 절경을 이루었는지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았습니다. 삼삼오오 모여서 사진도 서로 찍어주고,  또 벚꽃에 흠뻑 취해 걷다 보니 어느새 김유신 장군묘에 도착했습니다. 

 


 

개나리꽃이 활짝 핀 한쪽 모통이에 자리잡은 청년대학생들은 다시 스님의 설명에 집중했습니다. 스님은 김유신 장군의 성품에 관련된 여러 일화들을 재미있게 들려주었는데, 특히 당나라를 한반도에서 몰아내야 한다는 자주의식이 강했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었습니다.   

 


▲ 김유신장군묘

 

“당 태종이 죽은 뒤인 당 고종 때 당나라와 신라가 협력해서 백제를 멸망시켰는데, 그러면 백제는 당연히 신라 것이 될 줄 알았는데, 당나라는 백제의 왕을 잡아가고, 그 왕의 아들을 왕으로 내세운 뒤 실질적 통치를 했습니다. 그래 놓고 자기네를 도와서 고구려 정벌을 같이 하자고 신라에게 제안합니다. 신라는 전쟁을 해서 얻은 게 하나도 없는 상태이니 기분이 나쁠 수밖에요. 그래서 김유신 같은 민족주의자들은 여기에 소극적으로 대응한 겁니다. 그런데 당나라는 ‘신라, 너희 없어도 충분히 할 수 있다’며 663년에 고구려를 침공했다가 연개소문한테 패해서 고구려 정벌에 실패합니다.

 


 

그러고 있는 중에 연개소문이 사망하자 그 아들들인 남생, 남건이 권력쟁탈전을 벌입니다. 형이 외출한 사이에 동생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정권을 잡아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형이 당나라 황제한테 도망가서 ‘군대 좀 빌려달라. 내가 저 나쁜 놈을 좀 치겠다’고 하니까 당나라는 협조를 해 줬습니다. 그래서 형을 앞장세워서 고구려를 침공했는데, 고구려에는 이미 내분이 일어난 상태이니까 전쟁에서 이길 수가 없었던 거예요. 그래서 고구려가 쉬이 멸망한 겁니다. 

 

그때 신라도 참가했는데, 이번에도 당나라가 고구려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해서 또 지배하니까 신라는 정말 화가 난 겁니다. 그래서 당나라 군대를 공격해 전쟁이 시작되었는데, 이 나당전쟁은 무려 8년이나 지속됐습니다. 예를 들어 한미연합군이 북한을 점령한 뒤에 ‘북한을 누가 관할할 거냐?’를 두고 한미 간에 전쟁이 나서 한국과 미국이 8년 전쟁을 했다면, 한국이 승전할 수 있을까요? 

 


 

통일할 때는 이런 것도 고려를 해서 전략을 짜야 합니다. 지금 남한은 북한을 공격하기 위해 중국, 일본, 미국과 협력을 한다고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과연 중국, 일본, 미국 중에 누가 우리의 적이 될지는 알 수가 없는 거예요.” 

 

신라가 당나라를 끌어들인 것을 가지고 자주성이 약했다고 흔히들 생각하는데 나당전쟁을 8년이나 해서 결국 당나라를 한반도에서 몰아내었다는 사실은 많은 시사점을 주었습니다. 

 

김유신 장군묘를 내려오면 흥무공원이 있는데, 이곳에 자리를 펴고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맛있게 도시락을 먹는 사이 스님은 벚꽃 나무 아래에서 40여 개가 넘는 조들과 일일이 기념사진을 찍어 주었습니다. 

 


▲ 흥무공원. 조별 기념사진 촬영 시간.

 

다시 청년대학생들은 황룡사지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차가 막힐 것을 우려한 스님이 먼저 이동해서 답사를 했는데, 경주 시내 곳곳이 주차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도로가 막혀 있었습니다. 스님은 “황룡사지로 가려고 하다가 도로에서 시간을 다 보내겠다” 하면서 황룡사지 일정을 취소하고 곧바로 능지탑으로 버스를 돌렸습니다.  

 

아쉬움이 남기는 했지만, 대신 스님은 능지탑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 능지탑

 

능지탑 앞에서는 무엇보다 문무대왕의 호국 정신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신라는 문무대왕에 와서 삼국 통일을 완성하게 됩니다. 신라의 주된 경쟁 상대였던 고구려와 백제는 멸망했지만 그 동맹국이었던 왜는 아직도 건재했기 때문에 문무대왕은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나는 죽어서 동해바다의 용이 되겠다. 그러니 내 시신을 동해바다에 묻어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한 스님이 ‘용이 아무리 힘이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보다는 한 단계 낮은 축생의 무리에 속한다. 그런데 어찌 용이 되겠다는 것인가?’라고 하니까 문무대왕은 ‘내가 축생이 된들 어떠리. 나라만 지킬 수 있다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 말과 비슷한 말 기억나는 게 있나요? ‘우리나라가 독립만 된다면 나는 그 정부청사의 문지기가 되어도 좋다.’ 김구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지요. 지도자가 솔선수범하는 이런 자세는 오늘날 통일을 위해 우리가 지녀야 할 마음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이곳은 문무대왕의 시신을 화장했던 곳입니다. 화장한 곳에다가 화장한 재로 탑을 쌓은 거예요. 탑이란 건 원래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는 건데, 이 탑은 부처님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탑이지요. 이런 탑을 무덤 대신 세운 탑이라고 해서 능탑이라고 하는데, 옆에 보면 ‘능지탑’이라고도 써있습니다. 

 

여러분들 왼쪽을 보시면, 아직 탑의 석재가 많이 남아있죠? 능탑은 신라에 이것 하나밖에 없는데 허물어졌으니까 그 정확한 모양을 몰라서 맞추지를 못 하는 거예요. 그래서 현재 복원이 어려운 상태입니다. 어쨌든 연꽃모양으로 탑을 쌓았다고 해서 연화탑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앞에 있는 동네 이름이 배반이에요. 이 앞을 지나다니는 사람은 누구나 다 문무대왕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모두 무릎을 꿇고 절을 하고 지나갔다고 해서 ‘엎드릴 배’, ‘반석 반’해서 동네 이름이 ‘배반’입니다.”

 

능지탑 참배를 마치고 다음은 선덕여왕릉으로 향했습니다. 능지탑과 선덕여왕릉은 낭산 자락에 함께 위치하고 있습니다.  

 


▲ 선덕여왕릉

 

선덕여왕릉 앞에 도착한 스님은 선덕여왕의 총명한 지혜를 보여주는 세 가지 일화를 재미있게 들려주었습니다. 그 중 여왕의 무덤이 왜 이곳에 위치하게 되었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선덕여왕이 재위 16년째 되던 해에 건강한 상태였는데도 불구하고 신하들을 불러놓고 ‘내가 4월 며칟날 죽겠다. 그러니 준비를 하라. 그리고 나를 도리천에 묻어달라’고 말했답니다. 신하들이 듣기에는 뜬금없는 소리잖아요. 신하들이 선덕여왕한테 ‘도리천이 어디입니까?’라고 물으니까 선덕여왕은 다시 ‘낭산의 남쪽 정상에 묻어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낭산 남쪽이 바로 우리가 서있는 이곳, 낭산의 정상입니다. 그런데 아주 건강하시던 선덕여왕님이 진짜 4월 며칟날에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선덕여왕의 유훈에 따라서 이 정상에 무덤을 쓴 것입니다. 

 


 

막상 묻긴 했어도 당시 신하들은 이곳이 과연 도리천이 맞는지 알 수가 없었겠지요. 그런데 이후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 전쟁이 나게 되는데, 신라 신앙의 여론으로는 ‘사람의 힘만으로는 당나라를 이길 수가 없다. 신의 힘을 빌려야 된다’고 했습니다. 국력이 비교가 안 되기 때문에 인간의 힘만으로 싸운다면 신라가 당나라에 백전백패할 게 뻔하니까, 신앙에 의지해서 ‘우리는 신이 보호하는 나라다. 그러니까 우리는 당나라를 막아낼 수가 있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래서 신의 힘을 빌리는데 능통한, 아주 도력이 높은 명랑법사라는 분이 계시는데, 그 스님한테 도움을 요청하면 길이 있을 것이라는 여론에 따라, 왕이 명랑법사를 불러서 ‘지금 당나라가 20만 대군을 끌고 신라를 공격해 오는데, 우리 힘만으로는 막을 수가 없다.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고 하니까 명랑법사가 ‘신의 힘을 빌려야 된다’고 하면서 ‘신들이 노는 곳, 성스러운 곳’이라는 장소로 안내했는데, 그곳이 바로 이 밑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귀신 신’자에 ‘놀 유’자를 쓴 신유림(神遊林)이라는 숲이 있었는데, 그곳에 사천왕사를 지은 겁니다. 인간계가 있고, 그 위에 사왕천이 있고, 그 위에 도리천이 있는데, 요 아래에 사천왕사가 지어진 후에 보니까 그 위인 이곳이 도리천이 된 거죠. 

 


 

그러니까 선덕여왕은 본인의 죽음을 내다 봤을 때 앞으로 30년 후에는 통일이 되리라는 것도 예측을 했고, 그 통일의 시기에 가장 가까이 있는 맹방인 당나라가 최대의 적이 되리라는 것도 어느 정도 예측을 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지만요.(모두 웃음) 그러나 이런 것으로 봤을 때 선덕여왕은 매우 영민한 사람으로서 직관력이 뛰어나서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고도 볼 수 있겠지요.” 

 

이 외에도 스님은 선덕여왕이 지닌 리더십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선덕여왕의 총명한 지혜에 대해 청년대학생들은 모두 감탄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여기에 스님이 “지금 우리나라도 여성이 대통령이 되었는데, 우리 대통령도 그런 것 같아요?”라고 묻자 청년대학생들은 그냥 웃기만 했습니다. 

 


 

선덕여왕릉을 내려오니 사천왕사가 있었던 터가 나왔습니다. 지금은 공터이지만 절과 탑을 세웠던 흔적들은 복원되어 있었습니다. 

 


▲ 사천왕사지

 

스님은 사천왕사지가 갖는 의미에 대해 설명해 주었습니다. 

 

“여기가 사천왕사입니다. 이 절은 통일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절입니다. 특정 종교의 건축물이라는 개념을 떠나서, 황룡사 9층탑은 우리 민족에게 통일발원탑이라고 한다면, 이곳 사천왕사지에 복원해야 할 탑은 통일완성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통일의 마지막을 평화롭게 정리하고, 정신적으로 통합하기 위해서 우리는 사천왕사지를 복원해야 됩니다. 저희 스승님인 불심도문 큰스님께서 버려져 있던 이 터를 사비를 들여 구입한 후에 다시 정부에 기증해서 발굴하게 한 것입니다. 

 


 

저 두 군데에 한번 올라가보세요. 삼국유사에 12명의 법사가 문두루비법을 행했다고 나오거든요. 그런데 올라가보면 주춧돌이 딱 12개입니다. 돌에 구멍이 다 뚫려있어요. 원래 주춧돌에는 구멍이 없는데, 어떻게 저랬는지, 무엇 때문에 저랫는지 모르겠어요. 아마 신상을 세운 자리가 아니겠느냐고 추측할 뿐입니다. 왼쪽 것은 다 그대로 있는데 하나만 무너졌고, 오른쪽 것은 그대로 있습니다. 똑같은 구멍 12개가 네모지게 딱 갖춰져 있어요. 일반 절에는 이런 것이 없습니다. 양쪽에 똑같이 돼있어요.” 

 

불심도문 큰스님이 사비를 들여 땅을 구입해서 발굴하게 했다는 얘기를 듣고선 모두들 놀라워 했습니다. 큰스님의 그런 투철한 역사의식의 영향을 법륜 스님도 받았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천왕사지를 끝으로 오늘 계획한 역사기행 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 청년대학생들은 버스에 다시 올라 숙소로 향했습니다. 숙소에서는 저녁식사 후 7시 30분부터 ‘통일이야기’를 주제로 즉문즉설 방식으로 대화를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저녁 강연 이야기는 다음 글에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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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댓글 23

0/200

리미

카톨릭 신자 이지만 스님말씀 기달리면서 하루를 보냅니다. 감사합니다~^^♡

2016-04-06 17:29:51

오유진

감사합니다~~♡♡

2016-04-06 01:16:46

규원

스님. 귀한법문 감사합니다.불심도문큰스님의 역사와 민족그리고 후손들에 대한 국가미래까지 염두하신 애정이 느꺼집니다.

2016-04-05 21:5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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