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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용성진종조사의 열반일을 맞이해 조사님의 탄생성지인 전북 장수 죽림정사에서 정토회 봄경전반 학생들과 함께 기념법회 및 즉문즉설을 시간을 가졌습니다.
서울에서 아침 6시에 출발한 스님은 9시 30분에 죽림정사에 도착했습니다. 죽림정사는 소백산맥의 산세가 웅장한 전북 장수 장안산 자락 아늑한 터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독립운동가이자 불교의 대선사였던 용성진종조사님의 생가터를 불심도문 큰스님이 복원하여 지은 절입니다.
▲ 전북 장수 죽림정사
그리고 오늘은 조사님이 열반하신지 76주기가 되는 날입니다. 조사님의 탄생성지에서 열반일 기념법회를 하게 된 것을 뜻깊게 여기며 죽림정사 정광 사무국장이 앞에 나와 조사님의 행장을 낭독하였습니다.
용성진종조사는 서기 1864년 음력 5월 8일 전북 장수군 번안면 죽림리에서 태어났으며, 14세시에 교룡산성 덕밀암에 출가하였으며 23세에 오도를 했습니다. 그 뒤 전국 각 사암들을 찾아 다니면서 수도정진 하였으며, 44세시에는 중국불교계의 선지식들과 불법의 진리를 논하기도 했습니다.
▲ 용성진종조사 (용성기념관 입구)
1910년 경술치욕을 맞이한 용성진종조사는 산중수행을 정리하고 1911년 48세 되던 해에 종로구 봉익동에 민가를 구입해서 수리, 개조하여 대각사 간판을 내걸고 불교중흥과 민족중흥을 발원하여 불교계의 혁신작업과 독립운동을 전개했습니다. 1919년 3월 1일에는 만해 한용운 대사와 함께 민족대표 33인 중 불교계 대표로 참여하여 독립선언서에 4번째 서명하였으며 이로인해 서대문 감옥에서 1년 6개월 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1921년 출옥과 더불어 삼장역회를 조직하여 한문으로 되어 있던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였으며, 1922년에는 일제의 탄압을 피하여 중국 길림성 안도현 명월촌과 봉녕촌에 대규모의 대각교당을 설립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했습니다. 1926년에는 민족정신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시행되고 있던 왜색불교의 폐단을 지적하고 중지할 것을 요구하는 건백서를 2차에 걸쳐 제출하면서 전통불교의 맥을 계승하기도 했습니다. 1927년 64세시에는 창작 찬불가를 작시, 작곡하고 노구에도 불구하고 대각사에 일요학교를 설립하여 오르간을 손수 치기도 하였으며, 같은 해 함양에 화과원을 만들어 사원경제의 자립을 부르짖는 선농불교를 솔선수범 하였습니다.
이후 20여 종의 경전을 번역하였고, 20여 종의 저술도 남겼습니다. 그러다가 1940년 2월 24일 대각사에서 입적하니 세수는 77세이고 법랍은 61하이며 석가모니 부처님의 정법안장을 전수한 전등 68대 조사인 동시에 조선불교 중흥율 제6조입니다.
이렇게 행장 낭독에 이어서 용성조사가 작사한 ‘온 겨레의 노래’를 함께 불렀습니다.
▲ ‘온 겨레의 노래’를 함께 부르는 대중들
“백두산이 아빠되어 단군겨레 이루었고♬ 한라산이 엄마되어 단일기백 이루었네.
북녘송화 남녘낙동 젖줄되어 흐르르니♬ 자손만대 이어가며 이강산을 가꿔가세.”
노래를 힘차게 함께 부르는 가운데 북녘을 송화강까지라고 작사한 점이 눈에 띄었습니다. 아마도 고구려 발해 시대의 역사까지 헤아렸기 때문일 겁니다.
이어서 죽림정사 주지를 맡고 있는 법륜 스님의 기념법문이 있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온 400여 명의 정토회 봄경전반 학생들은 청법가와 삼배로 스님에게 법을 청했습니다.
▲ 용성교육관
스님은 용성진종조사님이 주창한 불교의 지성화, 대중화, 생활화 3대 지침이 현재 정토회를 통해 어떻게 계승되고 있는지 그 맥락을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용성진종조사님의 생애를 요약해보면 첫째가 불교중흥을 위해 노력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근세불교의 중흥조라고 하는 거예요. 그 첫째가 불법의 참모습을 알리고 내세우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불교라는 것이 미신 마냥 아주 형편없는 이미지였기 때문에 ‘불교의 참모습은 그렇지 않다. 불법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상이요, 철학이요, 종교다’ 하는 것을 내세우셨어요. 이것을 ‘불교의 지성화’라고 합니다. 불법이 얼마나 위대한지 알리고 정립하는 작업을 첫 번째로 하신 겁니다. 왜곡된 불교를 바로잡고자 부처님의 정법(正法)을 바로 세우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석가여래부촉법 제68세로 등단하신 거예요. 부처님의 정법이 조선조 영조에 이르렀을 때 조정에서는 환성지안(喚醒志安)조사에게 사약을 내려 돌아가시게 했어요. 즉 순교를 하신 겁니다. 이렇게 환성지안조사가 순교하신 뒤 정법의 맥이 끊어졌기 때문에 이를 복원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용성진종조사를 ‘환성지안조사의 후신’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이게 정법안장(正法眼藏)이에요. 그러면 환성지안조사는 법을 어디서 받았습니까? 이렇게 해서 계속 올라가면 석가모니 부처님에게 이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용성진종조사님의 열반일에 다례재를 지낼 때 인도로부터 중국을 거쳐 우리 해동 조선에 이르기까지 그 분의 모든 뿌리가 되는, 즉 스승이 되는 분들을 한 분 한 분 다 모셔서 예배를 드리는 겁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법을 첫 번째로 계승하신 마하가섭 존자, 두 번째로 계승하신 아난다 존자, 세 번째 계승하신 상나화수 존자 등. 그리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역대 조사만이 아니라 원효대사, 의상대사 등 신라 5교 9산이 다 예배에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유명한 담징을 비롯해 그림을 잘 그린 사람이며 조각을 잘 한 사람 양지 등도 여러분들이 절을 올린 대상에 들어 있어요. 우리의 스승이자 뿌리에 해당되는 분들을 다 따지자면 수천, 수만이 되겠죠. 이게 역사성이고 뿌리에요.
그리고 불법은 수행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래서 5대 수행, 즉 참선하고 염불하고 주력하고 간경(看經)하고 불사(佛事)하는 5대 수행을 정립하셨습니다. 이렇게 큰스님은 불교의 지성화를 이끄셨습니다. 정토회의 표현으로 하자면 이게 ‘바른 불교’입니다. 바른 불교관을 정립한 거예요.
그런데 아무리 바른 불교, 좋은 불교라 하더라도 대중이 모르면 아무 소용이 없잖아요. 그래서 두 번째 하신 일이 ‘불교의 대중화’예요.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첫 번째로는 어려운 한문 경전을 누구나 다 알 수 있도록 한글로 번역하시고, 인쇄하시고, 유포하셨습니다.
▲ 용성진종조사가 펴낸 조선글 화엄경
그리고 시내에 대각교당이라는 포교당을 내서 산속에 있던 불교를 누구나 다 시내에서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했어요. 재가자들에게도 삼귀의 오계를 줘서 그냥 복이나 비는 신자가 아니라 수행할 수 있는 길을 가르치셨어요. 다시 말해 재가수행자가 되는 길을 열어놓았습니다.
정토회도 ‘쉬운 불교’를 추구합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즉문즉설을 듣든 여기 경전반에 다니든 다른 곳보다는 좀 쉽죠? 여러분들이 옛날에 났으면 죄다 절에 가서 복이나 빌지, 불법이 뭔지도 몰랐을 거예요. 우리가 이렇게 쉽게 공부할 수 있도록 큰스님께서 이런 작업을 시작해주셨습니다. 그런데 70년, 80년, 100년 전 당시에 비해서는 굉장히 쉽게 만들어주셨지만 요즘 우리가 듣기에는 그것도 어려워서 제가 이제 여러분들 수준에 맞도록 더 쉽게 고쳤습니다. 요새 청년들은 이것마저도 어렵다고 난리를 피워서 즉문즉설을 통해 또 더 쉽게 하고 있어요. 이게 불교의 대중화입니다.
세 번째가 ‘불교의 생활화’입니다. 아무리 쉬워도 불교 수행 따로 있고 내 생활 따로 있으면 안 돼요. 밥 먹는 게 수행이고, 부부관계가 수행이고, 회사 다니는 게 수행입니다. 그게 수행인 줄은 알아요?”
“예.”
“즉문즉설의 내용은 전부 일상생활 속에서 어떻게 마음을 가질 거냐에 대한 거예요. 수행이 따로 있지 않고 우리 일상의 삶 속에 있다는 게 불교의 생활화예요. 그래서 큰스님께서 하신 게 선농일치(禪農一致)입니다. 화과원을 세우고 선농당을 세운 건 농사짓는 것이 곧 수행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큰스님께서는 수행자가 그냥 앉아서 참선만 하는 게 아니라 농사를 지으면서 곧 수행하도록 하셨어요. 화과원은 백운산에 만든 과수 농장입니다. 깊은 산 속에, 그것도 높은 곳에 과수원을 만들어놓은 이유가 뭘까요? 첫째는 생산불교를 하자는 것이고, 두 번째는 독립운동자금을 모으자는 거예요. 형사들이 그 산꼭대기까지는 안 따라오니까요. 또 다른 하나는 중국에다가 농지를 사서 개간해서 선농당을 만들었어요. 해외에 있으니까 형사들이 일일이 따라갈 수 없었겠죠.
큰스님이 이렇게 하려면 누군가 뒤에서 돈 대는 사람이 있었겠지요? 남원의 만석꾼이고 큰스님의 절친한 친구이자 후원자인 임동수 거사님이 전부 돈을 댔습니다. 그분이 바로 여기 불심도문 큰스님의 증조할아버지십니다.(대중 감탄하며 웃음)
‘불교의 지성화, 불교의 대중화, 불교의 생활화’ 이 세 가지가 포교, 전법의 3대 지침이에요. 이것을 지금의 정토회 식으로 표현하면 ‘바른 불교, 쉬운 불교, 생활 불교’입니다. 이렇게 해서 불교를 새로운 불교로 바꾸었습니다. 아예 불교라는 이름까지 대각교(大覺敎)로 바꾸고, 한때는 스님도 스님이라 하지 말고 선생님이라고 부르라 할 정도였습니다. 그럴 만큼 ‘이 전통의 묵은 때 속에서는 안 된다’ 하는 각오가 컸던 겁니다.
그리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전 생애를 바친 독립운동가로서 3.1독립운동의 막후 기둥이셨고, 3.1독립선언을 할 때 불교계를 대표해서 서명을 하셨어요. 그때 한용운 스님은 나이가 39세 정도였고 용성스님은 56세였으니 한번 생각해봐요. 불교계의 어른인 용성스님이 독립운동에 참여했기 때문에 불교계가 참여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던 거예요. 그리고 감옥에서 나오셔서는 일제가 늘 따라다니니까 (직접 활동을 하시기보다는)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서 보내거나 사람을 모아서 보내는 일을 하셨어요.
▲ 3.1독립선언을 할 당시 민족대표 33인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잡아주셨어요. 한반도기를 독립운동 깃발로 쓰자는 주장에 한반도기를 쓰면 우리 땅을 한반도만으로 축약시켜 버리는 셈이 되므로 안 된다고 반대하셨어요. ‘온 겨레의 노래’ 가사에서도 남녘은 낙동, 북녘은 ‘압록, 두만’이라고 하지 않고 ‘송하’라고 했어요. 깃발도 태극기를 쓰도록 했고요. 물론 그 전에도 태극기가 있기는 했지만 독립운동에서 어떤 깃발을 쓸지 논의할 때 태극기로 하자고 정해주셨습니다. 대한제국 부흥운동을 하는 게 아니라 대한민국 수립운동을 하자고 하신 분도 큰스님이고요. 그러니 도문 큰스님께서 ‘용성스님이야말로 대한민국의 국부(國父)다’라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국호를 정하셨으니까요.
이렇게 나라의 독립을 위해 평생 노력하셨지만 결국은 독립을 보지 못한채 1940년에 열반에 드셨습니다. 오늘이 그 열반일입니다. 열반의 게송은 이렇습니다.
제행지무상(諸行之無常)이요, 만법지구적(萬法之俱寂)이라.
포화천리출(匏花穿籬出)이요, 한와마전상(閑臥麻田上)이다.
‘제행지무상이요.’ 제행무상이란 말 알죠? 모든 세상의 행이 다 무상하다, 영원한 게 없다, 다 변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모든 행이 떳떳함이 없다’라고 합니다.
‘만법지구적이라.’ 만 가지 법이 다 고요적적하도다. ‘고요하도다’라는 말은 제법무아(諸法無我)라는 뜻입니다. 만법이 다 아(我)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고요적적한 거예요.
‘포화천리출이요.’ 포화는 박꽃입니다. ‘박꽃이 울타리를 뚫고 나가니’라는 뜻입니다.
‘한와마전상이다.’ ‘한와’는 한가로이 누워 있다는 말이고 ‘마전’은 삼밭입니다. ‘한가로이 누워 있도다’라는 뜻입니다.
왜 이런 열반송을 남기셨을까요? 아도화상이 돌아가실 때 ‘큰스님께서 돌아가시면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물었더니 ‘내년 봄에 칡넝쿨을 따라가보라’라고 했어요. 용성스님이 돌아가실 때도 ‘큰스님께서 가시면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물었더니 이런 열반송을 남기고 입적하셨습니다.”
용성진종조사님의 업적과 정토회의 바른불교, 쉬운불교, 생활불교의 3대 방향이 일맥상통하고 있다는 말씀에 대중들은 무척 놀라워 하면서 크게 박수를 쳤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은 이런 용성진종조사의 삶을 오늘날에 진정으로 계승하는 길은 바로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을 이룩하는 것임을 강조하면서 기념법문을 마쳤습니다.
“오늘은 용성조사 제 76주기 열반기념일입니다. 용성조사께서 77세를 사셨다는데 77세는 만으로 따지면 76년이에요. 그러니 태어나셔서 사신 해수와 돌아가신 뒤 해수가 올해로 똑같아요. 그런데 우리는 분단된 지 70년이 지났는데도 분단 극복, 통일은 고사하고 남북 간의 평화도 제대로 유지 못 하는 슬픈 역사를 안고 있듯이, 큰스님께서 열반하시고 76년이 지났는데도 나라의 독립과 통일은 물론이고 우리 불교계마저도 큰스님의 그러한 불교운동, 즉 불교가 사회적인 리더십을 갖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구태를 벗지 못하며 사회적 리더십을 갖추지 못하고 오히려 손가락질 받는 일이 허다하니 후인으로서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러니 오늘 열반일을 맞아서 우리부터라도 바로 이 두 가지를 실천해야겠습니다. 다시 말해 바른 불교를 이 땅에 실현하고자 수행하고 전법하는 것이 하나이고, 큰스님께서 그렇게도 바라셨던 나라의 독립을 위해 일하는 것이 또 하나입니다. 해방은 됐지만 분단이 되었으니 우리가 이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뤄야 완전한 독립이라고 할 수 있어요. 분단됐을 뿐 아니라 아직도 강대국에 휘둘리고 있는 이런 상태는 완전한 독립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당시의 시대적 과제가 나라의 독립이었다면 지금 우리의 시대적 과제는 평화적 통일입니다.
그러니 평화적으로 남북을 통일해서 큰스님께서 바라시던 새로운 대한민국을 건설하는 것이 우리들의 또 하나의 사명입니다. ‘불자가 복이나 빌면 되지, 뭘 이런 걸 하고 다니나’ 하는 생각이 드시는 분은 다른 절에 가세요.(모두 웃음)
여기는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이 바른 불교를 하고, 그것을 널리 전하는 전법정신이 있고, 역사의식을 갖춰서 나라와 백성을 구하는 정신이 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그러니 그런 뜻이 있으면 정토회에 다니시고, 그런 뜻이 없으면 그냥 신도가 부족하다고 어서오시라는 주위의 다른 절로 가세요. 공연히 여기 와서 ‘왜 복을 안 빌어주느냐’, ‘극락이 있느냐, 없느냐’ 하지 말고요. 지금 사는 것도 제대로 못 살면서 죽은 뒤를 걱정하고 앉아 있어요.(모두 웃음)
그리고 ‘불교가 왜 수행이나 하지 않고...’라고 하는데, 그런 말을 하면서 수행이나 하면 또 괜찮지만 그 말은 사실 ‘복이나 빌지, 무슨 사회에 관여하느냐’ 라는 뜻이잖아요. 적어도 여기서는 그런 이야기 하면 안 돼요. 아시겠죠?”
“예.”
스님의 강한 어조에 모두들 큰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족보를 보고나니 우리는 뿌리가 있는 집안이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의 느낌이랄까요. 그런 뿌듯함이 가슴 속에 차올랐습니다. 또 스님이 왜 통일운동에 매진하는지 그 역사적 배경도 함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시대는 다르지만 용성진종조사님과 법륜 스님의 행적은 무척이나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역사성에 대해 돌아보며 가슴이 뭉클해지는 시간이었습니다.
기념법문이 끝나자 곧바로 즉문즉설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정토회 봄 경전반 학생들은 그동안 영상을 통해서만 스님을 뵈어오다가 가까이서 직접 스님을 볼 수 있게 되었다며 무척이나 기뻐하는 표정이었습니다. 스님이 “무엇이든 물어보세요”라며 대화의 시간을 갖자고 하니 여기저기서 손을 들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 중 한 분의 질문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시어머니가 불평을 늘어놓은 것을 들어주기가 무척 힘이 드는데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결혼한 지 20년 되었습니다. 결혼해서 시금치도 안 먹고 시청 앞도 안 지나간다는 분들을 보면 별로 이해가 안 됐고, 시부모님이라고 해서 딱히 싫다는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습니다. 특히나 시어머니는 예전 분들이 다 그리 살아오셨듯 좀 안 됐다, 애처롭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이상하게 어머님에게 좀 안 좋은 마음이 일어납니다. 어머님 당신이나 아버님이 드시는 걸 잘 챙기지 못하시면서 자식들에게는 챙겨주길 바라는 말씀을 하실 때, 특히 제가 이야기를 잘 들어드리는 편이라서 형제간에 있었던 불편함 같은 것을 제게 자꾸만 이야기하실 때 싫은 마음이 일어납니다. 정토불교대학을 졸업하고 경전반까지 다니니까 예전보다 좀 더 이해를 해야 할 텐데도 요즘 오히려 더 마음이 좁아지는 것 같아서 아침에 수행할 때 어떤 기도를 어떤 마음으로 해야 할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정토회는 부처님의 근본불교를 대승불교로 계승해서 그것을 다시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하는 선불교로 계승한 불교예요. ‘절을 얼마 해야 한다, 경을 얼마 읽는다, 주력을 얼마 한다’ 이런 걸 중요시하는 게 아니라 바로 문제의 본질을 탁 꿰뚫어서 해탈하는 길을 추구하는 불교를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시어머니가 자식들이나 형제간에 있었던 이런저런 불편한 이야기를 나한테 한다고 그게 왜 불편해요?”
“예전에는 제가 별로 싫은 마음 없이 들어드렸는데 요즘에 이상하게 싫은 마음이 들어서요.”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이 이상하다면 질문자가 자기 마음을 보세요. 어머니가 옛날보다 말을 많이 하니까 불편해요? 노골적으로 하니까 불편해요? 어머니는 옛날에 하던 그대로인데 내가 요즘 그걸 못 받아들여요? 질문자가 보기엔 어느 쪽이에요?”
“그대로인데 제가 못 받아들입니다.”
“왜 못 받아들이는데요?”
“그걸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빨리 시어머니한테 가서 대화를 해보면서 연구를 해보세요.(모두 큰 웃음) ‘전에는 그런 이야기를 들어도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왜 마음이 안 좋을까?’ 이걸 연구해 봐요. 자기 마음이잖아요.
자기가 알 수 없는 것이라면 제가 이야기를 해주겠어요. 그런데 ‘어머니는 옛날과 똑같이 이야기하는데, 옛날에는 내 마음이 안 불편했는데 지금은 왜 내 마음이 불편할까?’ 이건 자기가 연구해야 할 과제 아니에요? 그걸 제가 말해줘서는 안 되지요. 말해준다면 스님이 점쟁이 취급밖에 더 받겠어요? 그건 스스로 연구해야죠. ‘네가 누고?’ 라고 물었는데 ‘스님, 내가 누구예요?’ 이렇게 물으면 안 되잖아요. 그건 자기가 연구해야 할 과제예요. 자기가 연구해야 될 걸 남한테 물으면 어떡해요?(모두 웃음)
문제의 핵심은 ‘왜 마음이 불편할까?’입니다. 어머니가 말하는 게 전에는 안 불편했는데 지금은 왜 불편할까요? 그동안은 어머니가 말을 안 해서 내가 안 불편했고 지금은 말을 하니 불편하다면 ‘아, 내가 어머니와의 예전 관계에서는 전혀 공부가 안 됐구나. 어머니가 아무 일도 말씀 안 하시니까 내가 안 불편했는데, 말씀하니까 나도 똑같이 경계에 끄달리고 불편하구나.’ 이렇게 알고 어머니를 이해하는 마음을 냄으로 해서 내가 불편하지 않은 경지로 나아가게 됩니다.
어머니는 똑같이 있는데, 어제는 괜찮았던 게 오늘은 불편하다면 이유가 뭘까요? 이유가 어머니한테 있는 건 아닐 거예요. 그러면 나한테 이유가 있는 거니까 ‘내가 왜 그럴까?’ 하고 지금부터 계속 참구를 해봐요. 그걸 참구하려면 어머니 이야기를 많이 들어야 하겠죠?(모두 웃음)
그냥 여기 앉아서 ‘왜 내가 마음이 불편할까?’ 생각하는 건 공상에 불과해요. 어머니가 그런 이야기를 자꾸 하는 걸 내가 들으면서 마음이 불편할 때 ‘왜 불편하지?’ 이래야 지금 참구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 사람이 욕을 하면 내가 왜 기분 나쁠까’ 이러고 있는 건 혼자서 생각만 하는 거예요. 생각은 수행이 아니라 번뇌예요. 그 사람이 이야기할 때 그걸 듣고 내가 화가 나면 바로 그때 ‘왜 화가 나지?’하고 살펴봐야 진짜 참구입니다. ‘내가 왜 화가 날까?’ 이걸 제대로 참구하려면 남이 나를 욕해서 내가 화나는 것을 많이 경험해야 합니다. 그래야 연습을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화만 내다가 놓쳐버려요. 화가 나려고 할 때 화를 낼 게 아니라 바로 그때가 원인을 규명할 시간이에요. 그러니 오늘 빨리 시어머니한테 가서 ‘어머니, 다른 사람 흉 많이 봐주세요’ 이래야 합니다.”(모두 큰 웃음)
“시어머니께서 다른 형제나 동서, 형님들에 대해서 흉을 보거나 욕을 하시는 게 저는 좀 불편하고 싫어요.”
“그게 왜 불편한데요?”
“다른 사람한테 불만이 있으면 이러저러해서 이렇다고 본인에게 직접 이야기하는 게 더 좋다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좋은 말이지만 질문자는 실제로 그게 되던가요? 사람이 그리 되나요? 여러분은 스님한테 불만이 있으면 스님한테 와서 이야기하는 게 잘 됩니까? 자기들끼리 ‘법륜 스님 왜 저러지, 왜 정치 이야기 하지’ 이러잖아요. 그런 비현실적인 이야기는 하지 마세요.(모두 박장대소)
이렇게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니까 스님이 지적해주잖아요. 어머니가 도사나 부처도 아닌데 어떻게 그걸 일일이 큰며느리한테 직접 이야기하는 게 되겠어요. 속은 답답하고 본인한테는 이야기를 못 하겠으니까 질문자한테 하는 거죠. 나쁘게 이야기하면 질문자가 만만해서 이야기하는 거고, 좋게 이야기하면 믿을 수 있으니까 이야기하는 거예요. ‘답답하니 너한테라도 이야기해야겠다’ 해서 이야기하니까 ‘어머니가 저리 불편하시구나’ 하고 이해하면 됩니다. 그걸 ‘큰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나쁘게 하시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안 돼요. 그건 질문자가 또 상상하는 거예요. 큰며느리하고 아무 관계없는 일이에요. 어머니가 별을 보고 불편하게 생각한다고 그게 별 탓은 아니잖아요. 어머니가 추운 날씨를 불평한다면 그건 날씨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어머니 마음일 뿐이에요. 그러니까 어머니가 큰며느리를 나쁘게 생각한다고 해서 그걸 큰며느리 잘못이라고 보면 안 돼요. ‘어머니가 그걸 보고 지금 불편해하시는구나’ 이렇게 그냥 이해하면 됩니다.”
“감사합니다.”(질문자 웃음, 청중도 모두 웃음과 박수)
“그러니까 이것이 바로 ‘생활 불교’라는 걸 알아야 해요. 밥 먹을 때 무슨 기도를 하고 밥 먹는 게 생활불교가 아니예요. 생활에서 일어나는 것을 지금 여기에서 바로 공부하는 게 생활 불교예요. 지금 시어머니와 대화하면서도 불편한 마음을 보고 그 원인을 찾으면 그게 수행이에요. 무슨 딴 짓을 해야 수행이 아니에요. 그래야 수행이 삶 속에서 딱딱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처처불상(處處佛像) 사사불공(事事佛供)’이라고 하잖아요. 우리가 사는 삶에서, 번뇌가 일어나는 그곳에서 바로 공부를 해나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안 그러면 다 죽은 수행이고 죽은 불교예요. 경전반에서 공부하면서 배운 것들을 생활에 적용해야 해요. 알았죠?”
“예!”(우렁찬 대답)
질문자는 스님 말씀대로 수행해 보겠다며 크게 대답하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스님의 답변을 듣고 나니 앞서 용성진종조사님이 지침으로 제시한 ‘불교의 생활화’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더욱더 생생하게 와 닿았습니다.
이렇게 기념식을 마친 후 모두 대웅전 계단에 올라가 기념 사진을 찍었습니다. 봄 햇살이 따사롭게 비치는 가운데 곳곳에 피어난 봄꽃처럼 경전반 학생들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활짝 피어 있었습니다.
▲ 경전반 학생들과 기념사진
삼삼오오 곳곳에 흩어져 집에서 싸온 도시락으로 점심식사를 한 후 오후 2시 30분부터는 묘수 법사님과 무변심 법사님의 안내로 사찰 순례 시간을 가졌습니다. 법사님들은 교육관 외벽에 그려진 그림들을 포함하여 경내 곳곳에 담긴 의미들을 재미있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 법사님들의 안내로 진행된 사찰순례
죽림정사에서 나온 스님은 곧바로 서울로 향했습니다. 서울에서 미팅을 가진 후 내일부터 1박2일 동안 청년대학생 경주역사기행을 안내하기 위해 밤 9시에 다시 경주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내일은 청년대학생 400여 명과 함께하는 경주역사기행이 아침 9시 30분부터 태종무열왕릉 앞에서 시작됩니다. 벚꽃 내리는 경주에서 삼국통일의 숨결이 서린 곳곳을 둘러본 후 저녁에는 ‘역사의식과 통일의 중요성’에 대해 특강을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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