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검색
원하시는 검색어를 입력해 주세요
안녕하세요? 오늘은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것을 기념하는 불기 2559년 열반일입니다. 스님은 열반일을 맞이해 서울 정토회관에 모인 300여 명의 대중들을 위해 ‘열반의 의미’에 대해 기념법문을 했습니다.
어제 새벽 1시에 울산 두북을 출발한 스님은 5시에 서울 정토회관에 도착했습니다. 곧바로 아침 7시 30분부터 평화재단을 찾아온 손님들과 연이어 미팅과 회의를 가졌습니다. 오후 1시에 미팅과 회의를 모두 마친 후 오후에는 치과 진료를 받았습니다.
오늘은 아침 7시 30분부터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종교인 모임이 있었습니다. 종교인 모임을 마친 후 10시부터는 서울 정토회관 1층 법당에서 부처님 열반일을 맞이해 기념법회가 열렸습니다. 법당을 가득 메운 300여 명의 대중들은 청법가와 삼배로 스님에게 법을 청했습니다.
법상에 오른 스님은 “지난 일주일 동안 정진 잘 하셨습니까?”라고 인사를 건넸습니다. 대중들이 큰 목소리로 “네!” 하고 대답하자, 스님은 “수고 많으셨어요” 라고 격려하면서 법문을 시작했습니다. 대중들은 지난주 부처님 출가 기념일로부터 오늘까지 8일 동안 매일 스님의 영상 법문을 듣고 300배 정진을 함께 했습니다.
이어서 스님은 ‘열반’이라는 용어가 일반인들에게는 많이 낯선 용어인데 ‘열반’의 의미가 무엇인지 설명해 주었습니다.
“오늘은 불기 2559년 음력 2월 15일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열반절입니다. 열반이라는 용어는 두 가지 의미로 쓰고 있습니다. 첫번째 의미는 모든 고뇌가 사라졌다는 뜻입니다. 산스크리트어로는 ‘니르바나’, 빨리어로는 ‘닙빠나’라고 표현하는데, 이것을 우리식 한문으로 옮겨서 표현하다보니 ‘열반’이라고 부르게 된 겁니다. 인도말을 발음을 따서 옮긴 것이기 때문에 무슨 ‘열’자인지 무슨 ‘반’자인지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 뜻을 풀이하자면, 모든 고뇌가 소멸하고 아주 고요한 상태에 있다고 해서 ‘적멸’이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두 번째 의미는 부처님께서 돌아가신 것을 뜻합니다. 부처님께서 돌아가신 것은 완전한 고요함에 드신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완전한 열반, 즉 ‘반열반에 드셨다’라고 표현합니다. 부처님께서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을 때는 모든 고뇌가 사라진 경지에 이르셨다고 해서 ‘열반을 증득하셨다’ 라고 말한다면, 부처님께서 돌아가실 때는 완전한 열반에 드셨다고 해서 ‘반열반에 드셨다’라고 말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살아있을 때도 이미 열반적정의 경지에 있으셨기 때문에 돌아가시는 것이나 살아있을 때나 아무런 차이가 없으셨어요. 우리는 어려움에 처하거나 죽음 앞에 이르면 두려움이 생기잖아요.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죽음 앞에서도 아무런 두려움이 없으셨어요. 이미 모든 고뇌가 사라진 경지에 드셨기 때문입니다. 마치 우리가 저녁에 잠잘 때 편안하게 쉬는 것처럼 부처님께서는 생의 마지막을 그렇게 보내셨어요.
그런데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있으면 병이 들잖아요. 통증도 있고 밥을 안 먹으면 배도 고프고요. 또 친한 사람이 죽거나 어려움에 처하면 슬픔에 빠지지는 않더라도 약간의 슬픔은 일어날 수 있지요. 고뇌가 사라졌다고 해서 돌멩이처럼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육신을 버림으로 해서 어떤 흔들림도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해서 열반에 드셨다고 표현하는 겁니다. 그래서 ‘열반을 증득했다’는 것은 깨달음을 얻었다는 뜻이고, ‘열반에 드셨다’는 것은 한 생을 마쳤다는 뜻입니다. 깨달음을 얻은 것은 기쁨을 뜻하고 죽는 것은 슬픔을 뜻하니까 열반이라는 용어가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지 않나 싶지만 모두 같은 뜻으로 쓰인 겁니다.
부처님은 항상 고요 적정에 있었기 때문에 돌아가신다고 해서 흔들림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오실 때나 가실 때나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고 해서 ‘타타가타’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가고 옴이 여여하다라고 해서 이것을 한문으로 옮기면 ‘여래’ 라고 표현합니다. ‘오늘이 열반절이다’ 하는 말은, 세속으로 말하면 ‘부처님이 돌아가신 날이다’ 하는 뜻이고, 원래의 의미는 ‘부처님이 고요적정함에 드셨다’ 하는 뜻입니다.”
열반의 의미를 이해한 대중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표했습니다. 그리고 스님은 부처님이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한 해를 자세히 기록해 놓은 열반경의 내용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열반경에 드러난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들의 삶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스님은 많은 것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여러 경전들 중에 ‘열반경’이라는 경전이 있습니다. 열반경에는 부처님이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한 해가 일기처럼 기록되어 있어요. 부처님이 쿠시나라가에 도착할 때까지의 하루하루 생활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그 출발점이 당시 최대의 제국인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그라하’, 즉 왕사성입니다. 왕사성 밖에 언덕이 있는데 그 언덕 이름이 ‘그리드라쿠타’예요. 우리말로 옮기면 ‘독수리봉’인데, 한문으로 옮기면 ‘영축산’이라고 불리우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제자들에게 설법하는 장면으로 경전이 시작됩니다.
열반경 속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그 중에 하나가 500명의 유녀를 거느린 암나팔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자신이 갖고 있던 망고 동산에 부처님이 와 계신다고 하자 암나팔리가 마차를 타고 와서 부처님께 인사를 드리자 부처님께서 좋은 법문을 해주었어요. 이 법문을 듣고 암나팔리가 크게 깨달았어요. 너무 기뻐서 다음날 아침에 부처님과 제자들을 자신의 집에 식사 초대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때 바이샬리의 리차비족 왕족들도 부처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오다가 암나팔리와 마주치게 됩니다. 암나팔리는 먼저 와서 친견하고 돌아가는 길이었고, 리차비족 왕족들은 친견하러 가는 길이었는데, 암나팔리는 내일 아침 공양을 준비해야 하니까 급한 마음에 서두르다 보니 서로 부딪치게 되었어요. 진흙이 튀고 해서 옷을 다 버리게 되니까 왕족들이 화가 나서 야단을 치면서 이렇게 문답이 오갑니다.
“버릇없이 왜 그러느냐?”
“아이고, 어르신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급한 일이 있어서 실례를 했습니다.”
“뭐가 그리 급하냐?”
“내일 아침에 제가 부처님을 식사 초대 했습니다.”
그런데 왕족들이 생각해보니까 세계적으로 유명하신 부처님인데 당연히 왕족들이 제일 먼저 초대하는 것이 맞잖아요. 그런데 기생이 먼저 초대를 했으니 자신들의 체면이 구겨졌다고 여긴 겁니다. 그래서 다시 묻습니다.
“그 초대권을 우리한테 넘겨주면 어떻겠느냐?”
“싫습니다.”
그러자 다시 묻습니다.
“10만금을 주겠다. 초대권을 넘겨 주겠느냐?”
그러나 암나팔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10만금이 아니라 이 나라를 다 준다고 해도 싫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제자들이 가진 당당함이었습니다. 왕족들이 보기에는 도대체 무엇을 깨달았기에 몸을 팔아 돈을 버는 기생 주제에 왕족의 요청을 안 듣는 정도가 아니라 나라를 준다고 해도 싫다는 정도의 당당함이 있는 것인가 싶었던 겁니다. 이런 재미있는 스토리가 열반경 속에는 주욱 펼쳐집니다.
그렇게 해서 부처님께서는 쿠시나가라에 도착한 뒤 사라나무 숲으로 들어가셔서 열반에 드셨습니다. 사라나무는 느티나무나 보리수처럼 옆으로 가지가 뻗는 큰 나무가 아니고, 미루나무처럼 위로 키만 크는 나무입니다. 그런 나무가 빽빽하게 심어진 나무와 나무 사이의 그늘에 자리를 깔았던 거예요. 두 그루 사이에 드리워진 그늘에 웃옷을 벗어서 네 겹으로 깔고, 오른쪽 옆구리를 땅에 대고, 얼굴은 서쪽, 머리는 북쪽, 다리는 남쪽을 향하게 누우신 뒤 ‘오늘 저녁에 여기서 열반에 들겠다’고 선언을 하셨어요.
그러자 아난존자가 너무 슬퍼서 혼자 울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부처님께서는 아난존자를 위로하는 설법을 하셨습니다.
“아난다여, 슬퍼하지 마라. 여래는 육신이 아니라 깨달음의 지혜다. 육신은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 깨달음의 지혜는 영원히 너희 곁에 남아 있으리라.”
이후 아난존자의 질문과 부처님의 답이 계속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늘 부처님을 생각하면서 살았는데, 부처님이 계시지 않으면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까?”
“4대 성지를 생각하라”
4대 성지는 부처님께서 태어나신 룸비니, 부처님께서 도를 이루신 보드가야, 부처님께서 최초로 설법하신 사르나트,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쿠시나가라를 말합니다.
“우리는 늘 부처님을 스승으로 모셨는데,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뒤에 우리는 누구를 스승으로 삼아야 합니까?”
“나의 가르침인 계를 스승으로 삼아라. 계를 지니고 있으면 나와 함께 있는 것과 같고, 비록 나와 같이 있다 하더라도 계를 지키지 않으면 나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니라.”
“우리는 늘 부처님을 의지하고 살았는데, 부처님이 계시지 않으면 우리는 무엇을 의지해야 됩니까?”
“사념처에 의지하라.”
사념처란 첫째, 관신부정, 즉 몸이라는 것은 청정한 것이 아니다. 둘째, 관수시고, 즉 느낌이라는 것은 사실 괴로움이다. 셋째, 관심무상, 즉 마음이라는 것은 늘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으로써 항상한 게 아니다. 넷째, 관법무아, 즉 모든 존재는 실아(實我)가 없다. 이렇게 네 가지를 말합니다. 이것을 관하는 것이 명상이고 위빠싸나입니다.
“우리는 늘 부처님께 공양을 올려서 큰 공덕을 지었는데, 부처님이 계시지 않을 때 우리는 어디에 공양을 올려야 큰 공덕을 지을 수 있습니까?”
“네 가지를 공양하라.”
네 가지는 첫째, 배고픈 자에게 음식을 공양해서 배불리 먹게 하고, 둘째, 병든 자에게 약을 공양해서 병을 낫게 하고, 셋째, 가난한 자를 돕고 외로운 자를 위로하며, 넷째, 청정하게 수행하는 자를 잘 외호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의 공덕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이 네 가지 중에 앞에 있는세 가지를 따서 만든 게 JTS의 슬로건이에요. ‘배고픈 자는 먹어야 하고, 병든 자는 치료받아야 하며, 아이들은 제 때에 배워야 한다’는 게 그것입니다. 굶고, 병드는 건 생존의 문제입니다. 이 문제들을 제외하고 가난을 가장 뚜렷하게 상징하는 징표가 바로 제 아이를 가르치지 못하는 거예요. 얼마나 가난하면 제 아이를 공부시키지 못하겠습니까. 그래서 그게 누구의 아이든 아이들은 모두 기초교육을 받아야 된다는 겁니다.
그렇듯이 남북관계가 나쁠지라도 북한 사람들이 굶어죽으면 음식을 지원해야 되고, 병들면 치료약을 보내야 되고, 아이들은 모두 초등학교까지는 공부할 수 있도록 교육교재 등을 지원해야 됩니다. 그래서 JTS를 만들어서 필리핀의 무슬림 지역이나 원주민 지역, 인도의 불가촉천민 마을처럼 가난한 곳에 지원을 하는 겁니다. 심지어 불상을 막 때려 부순 아프가니스탄 사람들한테도 지원을 해야 합니다. 불상을 때려 부순 건 어른들이지 그 아이들이 아니니까요. 어떤 사람들은 막 흥분을 해서 “그놈들은 굶어죽어도 싸!”라고 하던데, 폭언을 하는 그 감정은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문명사회를 살아가는 문명인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 옛날 봉건제 사회에서도 부처님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예요. 예수님은 천국에 가는 기준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과 같다”고 하셨잖아요. 가장 작은 자에 대해서 여섯 가지로 설명합니다.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는 것, 배고픈 자에게 음식을 주는 것, 헐벗은 자에게 옷을 주는 것, 병든 자에게 약을 주는 것, 나그네 된 자를 영접하는 것, 감옥에 갇힌 자를 면회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나그네 된 자’란 요즘 말로 난민, 이주노동자를 뜻하고, ‘감옥에 갇힌 자’란 양심과 신념을 지키다가 부당하게 옥살이하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솔직히 우리 나라 인구의 절반 이상이 종교인이고, 그 중에 불교와 기독교가 제일 많은데, 각기 가르침대로만 산다면, 지금 이 나라가 이렇게 되지는 않을 겁니다. 무엇을 위해서 절에 다니고, 교회에 다니는지 모르겠어요.(모두 웃음)
부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아난존자의 질문에 하나하나 설해주시기를 마치신 후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기 전에 뵈려고 온 많은 사람들의 인사도 다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밤이 깊어지자, 부처님께서 편안하게 열반에 드시게 하려고 모두 조용히 하며 밖에서 기다리는데, 120세의 수바드라가 와서는 “나는 부처님을 만나야 되겠다. 나한테 의문이 있는데,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면 못 물어보니까 지금 꼭 물어봐야 되겠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난존자는 “더 이상은 안 된다”고 하며 수바드라와 실랑이를 하게 됐습니다. 부처님께서 “웬일이냐?”고 물어서 아난존자가 “영감 하나가 와서 죽기 살기로 뵙자고 청합니다. 제가 안 된다고 했는데도 고집을 부립니다” 라고 하니까 부처님께서 “들여보내라. 그는 나에게 법을 물으러 왔다”고 하신 뒤 수바드라에게 “무슨 일인지 얘기하시오” 라고 말합니다. 수바드라가 “누구는 이렇게 주장하고, 누구는 저렇게 주장하는데, 이 사람은 저 사람이 틀렸다고 하고, 저 사람은 이 사람이 틀렸다고 하니 어느 게 맞고 어느 게 틀렸습니까? 아니면 다 틀렸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수바드라는 자기의 질문을 하지 않고 세상의 논쟁에 대해 질문을 했던 건데,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수바드라여, 나는 그들에 대해서 다 알고 있다. 마음 속에 욕심과 질투를 품고 얘기하면 그가 무슨 얘기를 하든 그건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다. 그러니 옳으니 그르니 따질 필요가 없다. 여덟 가지 삿된 것을 버리고, 여덟 가지 바른 길을 실천하라.”
그런 후 팔정도를 설해 주시고, 사성제를 설해 주셨는데, 수바드라는 그것을 듣고 깨달았습니다. 이 분이 부처님의 마지막 제자가 되신 분입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다시 이렇게 말씀하시고 열반에 드십니다.
“나는 집을 나와서 51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근면 성실하게 부지런히 정진하고 살았다. 그러니 너희들도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해라.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이.”
그날이 바로 오늘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법문의 핵심은 부지런히 정진하라는 겁니다. 여러분들도 꾸준히 근면하게 성실하게 정진해야 합니다. 된다, 안 된다에 너무 치우치지 말고, 자기가 지은 업은 태산 같은데 며칠 정진해서 다 없앨 것처럼 난리 피우지 말고, 그저 ‘이렇게 하루 사는 것만 해도 고맙습니다’ 하는 마음으로,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죄인을 이렇게 살아있게 해 주는 것만 해도 고맙습니다’ 하는 마음으로 꾸준히 정진하세요. 늙었다고 한탄하지도 말고, 병 좀 들었다고 한탄하지도 말고, 재산 없다고 한탄하지도 말고, 혼자라고 한탄하지도 말고, 그저 ‘살아있는 것만 해도 참 감사합니다’ 하는 마음으로 꾸준히 해 나가면 누구나 다 안온의 경지에 이를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부처님 한 분의 편안함이 우리 모두의 편안함으로, 부처님 한 분의 열반이 우리 모두의 열반으로, 마치 한 알의 씨앗이 썩어서 수많은 열매를 맺듯이 우리 모든 중생들에게도 부처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이런 뜻으로 열반일을 기리는 것이니 그 뜻을 잘 아시고, 그 소중함을 잘 아셔서, 오늘 출가열반일 1주일 정진은 회향하더라도 부처님의 열반 당시 마지막 말씀인 부지런히 근면하고 성실하게 정진하라는 말씀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부처님 한 분의 열반이 우리 모두의 열반으로 열린 날이라는 말씀에 모두들 큰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마지막으로 법문을 마치면서 스님은 품위 있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당부했습니다.
“세상살이에 대해서 조금 품위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저 유행 따라 가을바람에 휘날리는 낙엽처럼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리고 그러지 말고, 돈이 좀 있어도 수수하게 살면 좋잖아요. 없는 사람이 그렇게 살면 ‘극빈’이라 말하고, 있는 사람이 그렇게 살면 ‘청빈’이라고 말합니다. 속에 좀 들었는 데도 이렇게 안 내세우고 목에 힘 빼고 살면 ‘겸손하다’ 라고 말하고, 그저 없는 주제에 눈치 살펴가면서 굽신거리면서 살면 ‘비굴하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비굴해서는 안 되고, 당당해야 되고, 그렇다고 교만하면 안 되고 겸손해야 합니다. 늘 마음은 부자로서 풍요로운 마음을 가지되 사는 모습은 청빈하게 사세요. 그렇다고 부처님처럼 다 떨어진 옷을 입고 나무 밑에서 자라고는 안 할 테니까, 돈 좀 있다고 무조건 집 큰 것 사고, 차 큰 것 사고 그러지 마세요. 또 가방에 물건만 담기면 되지 몇 백 몇 천 만원짜리 명품 가방 사서 들고 다니지 말고요. 자기가 속이 허하니까 물건으로 자꾸 채우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 이제는 사는 품위가 달라져야 돼요. 나쁜 의미의 귀족이 아니라 좋은 의미의 귀티를 내면서 사세요. 마음을 좀 풍요롭게 가지고요. 늘 쪼들리고 비굴하고 눈치 보며 살지 말고요. 부처님 법을 공부하는 사람이 뭐가 겁날 게 있어서 그래요? 암나팔리와 같이 그렇게 당당하게 사세요. ‘내가 비록 기생을 하더라도 인간적으로 비굴하게 살진 않는다’ 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열반일을 기해서 부처님으로부터 이런 좋은 선물을 받아 지니기 바랍니다.”
부처님의 마지막 열반의 모습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늘 감동이 있는 것 같습니다. 부지런히 정진하라는 말씀, 비굴하지 말고 당당하고,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라는 말씀, 마음은 풍요롭게 가지되 청빈한 삶을 살아라는 말씀을 가슴에 깊이 새겨 봅니다.
법문이 끝나자 대중들은 지난 8일 동안 계속 해온 300배 정진을 이어서 했습니다. 한 배 한 배 절을 하면서 오늘 스님이 법문해 준 부처님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오롯이 새겨보았습니다.
열반일 기념법회를 모두 마친 후에는 실무자들과 함께 여름에 있을 동북아 역사기행, 겨울에 있을 인도 성지순례에 대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또 저녁에는 불교계 관계자들이 찾아와서 스님과 대화의 시간을 가진 후 오늘 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
내일은 오전 10시에 카톨릭 월례모임 초청으로 강연을 한 후 오후 4시에는 원불교 김대선 교무님의 요청으로 전주에서 초청 강연을 할 예정입니다.
-------
전체댓글 41
전체 댓글 보기스님의하루 최신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