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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스님이 인도에 도착한지 16일째 되는 날입니다. 오늘 스님은 성지순례단 C팀을 이끌고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10대 성지를 순례하는 여정 중 마지막 순례지인 상카시아로 향했습니다.
새벽 3시 20분에 일어나 짐을 챙겨 버스에 올라탄 순례단은 4시 정각에 쉬라바스티를 출발했습니다. 이른 출발이지만 늦게 일어나 허둥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새벽에 출발하는 일정이 이제는 모두들 익숙해진 것 같았습니다.
버스에서는 곧바로 새벽예불과 천일결사 기도가 시작되었습니다. 버스 안이든 어디든 순례자들의 기도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기도가 끝나자 버스에 불이 꺼지고 모두들 깊은 잠이 들었습니다. 쉬라바스티를 출발하여 럭나우를 거쳐 상카시아로 가는 여정은 10시간에 이르는 대장정입니다. 성지순례 기간 중 가장 먼 거리를 이동하는 일정이기도 합니다.
창밖으로 날이 밝아오자 잠시 차를 세우고 화장실을 다녀오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순례 기간 동안 늘 그래왔듯 여자는 왼쪽, 남자는 오른쪽으로 흩어져 자연을 바라보며 시원하게 해결하고 버스에 다시 탔습니다. 어제 비가 내려서 그런지 뿌연 안개를 한껏 머금은 인도의 아침 공기가 제법 상쾌하게 느껴졌습니다.
한참을 달리다가 도로 변에 짜이가게가 있는 곳에 버스를 세우고 점심 식사 시간을 가졌습니다. 오순도순 야외에서 먹는 식사가 이제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상이 된 것 같습니다.
도로에 자욱한 안개는 운치를 더했습니다. 그동안 날씨가 제법 따뜻해서 이상기후라고 불릴 정도였는데 오늘은 안개가 자욱한 원래의 인도 겨울 날씨를 제대로 만끽했습니다.
먼 거리를 이동하는 동안 버스 안에서는 차량 별로 자기소개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동안 버스에서 내리고 올라타기 바빠서 소개도 제대로 못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오랜만에 한 분 한 분의 인생 이야기를 마음껏 들을 수 있었습니다. 서로가 내어놓는 진솔한 이야기에 마음이 활짝 열린 순례객 중에서는 신나게 노래를 한가락 뽑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모두들 ‘참 좋은 사람들을 성지순례에서 만났다’며 기쁜 표정이었습니다.
▲ 자기소개 시간
즐겁게 자기소개 시간이 이어지고 있는 사이 스님이 “곧 강가강이 5개의 지류로 나눠지기 전의 원류가 되는 강가강을 지날 것”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강변 모래사장 위에 기도를 하기 위해 모인 힌두교 순례자들이 빼곡이 천막을 치고 있는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순례객들은 스님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모두 잠에서 깨어 창밖을 바라보았습니다. 스님은 웃으면서 한마디를 보태었습니다.
▲ 5개의 지류로 나눠지기 전의 원류가 되는 강가강
“우리들이 하는 성지순례를 고생이라고 표현하는데, 이 사람들이 이렇게 하는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잖아요. 우리보다 훨씬 더 부자인 사람들도 저렇게 강변에 한 달씩 천막을 치고 기도를 해요. 굉장하죠?” (웃음)
힌두교 신자들이 얼마나 믿음이 굳건한지 알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믿음이 강했기 때문에 무슬림이 침공해도, 기독교가 들어와도 지금까지 이어져올 수 있었을 것입니다.
새벽 4시에 쉬라바스티를 출발한 버스는 오후 2시가 되어서야 드디어 상카시아에 도착했습니다. 약 10시간이 걸린 셈입니다. 가사를 수하고 향에 불을 붙이고 탑을 한 바퀴 돈 후 예참 불공이 시작되었습니다.
▲ 상카시아 스투파
이 탑은 부처님이 도리천에 올라가 어머니 마야부인을 위해 법을 설한 후 하강한 곳으로 하늘과 인간 세계를 잇는 상징적 의미를 지난 장소라고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부처님의 어머니 마야부인은 부처님이 태어난지 일주일만에 돌아가셔서 부처님의 법문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어느 해 안거 때 도리천궁으로 가셔서 마야부인에게 석 달간 법을 설하고 하강하셨다는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이후 아쇼카 왕은 이곳에 석주와 대규모 탑을 세웠다고 합니다.
예불을 마치고 이어서 스님은 10대 성지순례를 무사히 마친 대중들을 위해 간절히 축원 및 발원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순례한 인연공덕으로 한반도의 평화 통일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발원하는 스님의 모습에 순례객들도 합장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함께 기도했습니다.
발원 기도 후 스님은 다른 성지에서 했던 것과는 달리 해탈주 삼독을 함께 하자고 했습니다. 이곳은 부처님이 어머니의 은혜를 갚고자 했던 의미가 있는 곳이어서 우리들도 돌아가신 부모님과 조상 영가님들의 왕생극락을 발원하자는 것이지요.
이어서 스님은 상카시아 성지가 갖는 의미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저희가 도착한 이곳이 부처님의 8대 성지 가운데 8번째 성지인 상카시아입니다. 인도말로는 ‘상키사’라고 부릅니다. 유래는 이렇습니다. 부처님께서 어느 해 안거철에 어디에도 안 계셨다고 해요. 그래서 부처님이 어디 계시나 싶어서 모든 제자들에게 물어봐도 부처님과 안거를 같이 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중들은 목련존자가 신통 제일이니까 목련존자에게 부처님이 어디 계신지 알아봐 달라 부탁했습니다. 목련존자가 신통으로 온 우주를 살펴보니까 부처님께서 도리천에 계셨어요.
부처님의 어머니 마하 마야대비는 부처님이 태어나고 일주일 만에 돌아가셨어요. 나머지 대중은 다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해탈을 얻었는데 어머니는 먼저 돌아가셔서 이 좋은 법을 만나지 못하셨잖아요. 비록 복을 지어서 천상에는 났다 하더라도 그것이 해탈은 아닙니다. 어머니께서 도리천에 계신 것을 보고 부처님께서는 그곳으로 가서 설법을 하셨습니다.
부처님이 안 계시자 부처님을 너무 그리워한 대중들이 목련존자에게 ‘그럼 부처님이 언제쯤 오시냐?’ 묻자 ‘안거 끝나고 오신다’고 대답했습니다. 어디로 오실 것인지 여쭤보라고 하자 다시 목련존자가 가서 여쭈었더니 ‘상카시아 성 밖으로 오겠다’고 대답하셨다 해요. 저기가 상카시아 성인데 여기가 성 밖이예요. 그 때가 9월 보름이었어요. 인도 달력으로는 7월 보름입니다. 그래서 보름이 되자 이곳에 많은 대중들이 모여들었다고 해요. 부처님을 가운데로 모시고, 인드라신과 범천 즉 브라만 신이 옆에 시립을 해서 하강을 하셨어요.
그래서 이 모습을 표현한 조각에는 항상 계단이 세 개가 새겨져 있습니다. 하늘에서 사다리를 타고 내려왔다는 것을 표현한 겁니다. 그리고 가운데에 부처님이 계시고 양쪽에 두 신이 있는 모양입니다. 조각에 부처님의 얼굴을 새기기 전까지는 계단의 가운데에 부처님의 발자욱 두 개를 새겨 놓았어요.
▲ 상카시아스투파 앞에 모셔진 조각. 부처님의 하강 모습을 표현.
이 때 어떤 비구니 스님이 자신이 맨 앞에서 부처님이 내려오시는 것을 가장 먼저 마중했다고 했어요. 그래서 절을 하면서 ‘부처님, 제가 첫 번째로 마중을 했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니까 부처님께서 ‘아니다’ 그러셨어요. 비구니 스님이 주위를 아무리 돌아봐도 자기 말고는 아무도 없는데 그렇게 얘기하시니까 ‘그럼 누가 먼저 부처님을 마중했습니까’ 하니 부처님께서 ‘수보리가 가장 먼저 나를 보았느니라’ 하셨어요. 그런데 수보리는 그 때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영축산에 있었거든요. 수보리는 명상을 하다가 부처님을 뵈러 가려고 일어났는데 그 때 제법이 공한 도리를 깨쳤어요. 그래서 그 자리에 도로 앉았는데 이것을 부처님께서 아셨기 때문에 ‘수보리가 가장 먼저 나를 봤다’고 하신 겁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법을 보는 자 나를 본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육신을 보는 자가 아니라 진리를 보는 자가 나를 본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열반에 드실 때도 이런 말씀을 하셨죠. ‘여래는 육신이 아니라 깨달음의 지혜이니라.’ 이런 말씀 때문에 금강경에도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모두 다 진리를 보는 자가 여래를 본다는 얘기와 같은 뜻입니다.
그런데 아직 저도 도대체 어떤 사건이 있었기에 이런 이야기가 전해내려 오는지는 확실하게 잘 모르겠어요. 연구가 좀 더 되어서 어떤 사건이 이런 식으로 표현되었는지 밝혀보아야 할 것 같아요. 물론 신앙적으로는 당연히 부처님이 천상에 올라가셨다가 내려오셨다고 얘기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인류문화사적으로 보면 어떤 스토리가 이렇게 변한 것인지는 앞으로 우리가 더 연구를 해봐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브라만 신과 인드라 신이 부처님을 시립했다고 하는 것은 깨달은 자 ‘붓다’가 신들의 위에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붓다가 처음 깨달음을 얻었을 때도 ‘나는 신과 인간의 모든 굴레로부터 벗어났다’ 고 하셨잖아요. 또 태어나실 때 ‘천상천하 유아독존’ 이라고 표현된 부분, 또 여래의 10대 명호 중에 ‘천인사’, 즉 사람과 신들의 스승이라고 표현한 것 등을 보면 인도인들은 신의 세계관을 갖고 있었는데 깨달은 자, 붓다는 신들의 스승이 되는 위치에 있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인도에는 700만의 신이 있다고 할 정도인데, 그 당시 인도에서 최대의 신이 인드라신과 브라만신이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 두 신이 부처님을 시립하고 옹호했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렇게 인도의 불교는 신을 부정하지 않고 그 모든 신이 부처님을 옹호한다고 해서 불법을 옹호하는 호법 선신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종교의 신앙이나 믿음을 존중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믿음과 신앙으로는 해탈할 수가 없다는 점은 분명히 한 것이죠.
각자 자기 신앙을 갖는 것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여러분들 중에서도 카톨릭 신자나 종교가 없는 사람들이 있는데 불법을 공부하는 데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요. 부처님을 믿고 불법을 공부해도 되고, 하나님을 믿고 불법을 공부해도 되고, 종교 없이 불법을 공부해도 됩니다. 왜냐하면 불법은 일반 종교와는 차원이 다른 얘기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기존에 있던 여러 종교들과 갈등을 빚지 않았어요. 그래서 우리 나라에서도 대웅전 옆에 칠성각, 산신각을 지어서 각자의 전통 신앙을 믿을 수 있게 해주었잖아요. 그것처럼 저도 만약 서양에 가면 법당도 짓지만 그 옆에 성당도 하나 지어주고, 교회도 하나 지어주어서 각자 자기 신앙을 믿게 해줘야겠죠. 즉 남의 신앙에 대해서는 좋으니 나쁘니 하는 이야기를 안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개인의 자유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모두 웃음)
다만 여기서 생각해봐야 하는 것은, 스님으로 출가한다는 것은 가족 관계에서는 굉장히 불효가 되잖아요. 애지중지 키워 놓았는데 자식이 출가를 해버리면 부모 입장에서도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어요. 부인 입장에서도 남편이 출가를 하거나, 자식 입장에서도 부모가 출가를 하면, 얼마나 무책임하게 느껴지겠어요. 좋게 말하면 출가란 정으로 묶여 있는 인간 관계를 뛰어 넘어서 일체를 평등하게 본다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을 존중하기 때문에 나만, 내 가족만 위하는 태도를 넘어선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진리가 좋더라도 이런 것이 당시에 사회적으로 전파되는 과정에는 갈등 관계가 생길 수밖에 없었겠죠. 특히 우리 나라의 경우 효사상이 크니까 더 심했습니다.
그래서 상카시아의 설화는 ‘부처님의 출가가 불효가 아니다’, ‘출가가 가족 관계를 부정한 개념이라기 보다는 정에 매여서는 안 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는 것을 알려준다고 볼 수 있어요. 부처님도 출가하고 성도하신 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과 친척들을 다 출가시키고 해탈하도록 하셨잖아요. 우리 나라에서처럼 유교문화에서는 효를 너무 강조하다 보니 출가가 문제가 되었는데, 인도 문화에서는 출가 자체가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상카시아에서 이런 설화가 나온 것을 보면 가족 관계에 대한 부정적인 면을 아우르려고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모든 것을 다 끊어버릴 수 있어도 부모의 정은 끊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수행자가 되어 절에 들어와 있어도 마음 깊숙한 곳에는 부모에 대한 정이 다 남아 있어요. 이렇게 부모의 정이 남이 있는 것이 사실 수행에는 굉장히 장애입니다. 그러니 자식이 성년이 되거나 출가를 하게 되면 부모가 자식에 대해서 정을 좀 끊어줘야 해요. 그래야 자식이 자기 뜻대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왜 자꾸 자식에게 끈을 묶어서 옭아매려고 해요? 평생 동안 투자한 것 찾아먹으려고 그러는 거예요? (모두 웃음)
그래서 제일 좋은 것은 은혜를 안 입는 것인데 부모의 은혜는 안 입을 수가 없잖아요. 그런데 그 은혜 조금 줬다고 평생 따라다니면서 ‘내가 너를 키우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하잖아요. 불자라면 이것을 좀 풀어주셔야 해요. 스무 살까지는 보살펴주고 스무 살이 넘으면 정을 탁 끊어서 자유롭게 살도록 해주세요. 어려울 때 서로 돕고 살더라도 서로를 너무 속박하지는 말자 이런 얘기입니다.
그러니 이런 의미가 깃든 곳에서 순례를 마쳤으니 불보살님과 천신들에게도 감사해야 하지만 조상님들께도 감사해야겠죠? 그래서 방금 전에 해탈주를 함께한 것입니다. 부모님의 은혜를 안 입은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어요? 스님도 이런 말을 해도 어릴 때 부모님이 젖 먹이고 밥 먹이고 옷 입히고 해주었으니까 자랄 수 있었던 거잖아요. 부처님도 아무리 부처가 되었어도 부모님의 은혜는 갚아야 했겠죠. 부처님이 부모님의 은혜를 갚은 방법은 무엇이었겠어요? 바로 설법을 해서 깨우쳐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도 바로 이곳에서 부모님의 은혜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머니의 은혜’ 노래를 함께 불러 볼까요?”
“네”
스님의 제안에 따라 다함께 ‘어머님 은혜’ 노래를 불렀습니다.
“낳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
진 자리 마른 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오. 어머님의 은혜는 가이 없어라.”
많은 순례객들이 갑자기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훔치거나, 조용히 눈시울을 붉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머나먼 이국 땅에 와서 부모님의 은혜를 생각하니 그 마음이 더 애틋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부모님의 은혜는 아무리 헤아려도 그 은혜가 한량이 없겠죠.
스님의 설명이 끝나고 경전을 함께 독송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성지순례의 마지막 경전 독송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지순례를 마치면서 전법을 다짐하기 위해 부루나존자의 전법 이야기를 함께 읽었습니다. 부루나존자는 아주 거칠고 사나운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도 기꺼이 들어가서 전법을 하다가 순교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순례객들은 그 내용을 가슴에 새기며 우리도 이 좋은 법을 널리 전할 것을 다짐했습니다.
다시 버스를 타고 5분 쯤 가니 스님이 상카시아 석가족을 위해 담마센터를 지어주려고 마련한 부지가 나타났습니다. 아직 담마센터는 지어지지 않았고 주위에 벽만 네모나게 둘러쳐져 있었습니다. 순례단 일행이 부지 안으로 들어서자 많은 석가족 청년들이 나와서 환영을 해주었습니다.
스님은 짧게 이곳 부지에 대해 설명해 주었습니다.
▲ 상카시아 담마센터 부지
“이곳은 상카시아 석가족들을 위해서 담마센터를 지어주려고 저희가 사놓은 부지예요. 제일 안 쪽은 숙소와 학교를 짓고, 가운데에는 수천 명이 들어갈 수 있는 홀을 만들고, 입구에는 상카시아스투파를 재현해서 지어주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저희들이 방금 전 참배한 상카시아스투파가 석가족 불자들과 힌두교 브라만들 사이에 분쟁이 좀 있어요. 석가족들은 불교 탑이니까 자기들이 관리하겠다고 하고, 브라만들은 ‘무슨 소리냐. 우리가 조상 대대로 여기서 기도해 왔는데’ 이러고 있거든요. 그래서 제가 ‘싸우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내가 지어줄게’ 이랬거든요. 그런데 아직 못 지어주고 있어요. 돈도 돈이지만 공사할 사람이 없어요. (모두 웃음)
이 앞에 계신 분들이 모두 석가족 청년들입니다. 제가 전정각산에 앞에 수자타아카데미를 처음 세웠을 때 여기 있는 청년들이 와서 학교를 운영했어요. 다함께 인사를 하겠습니다. 나마스떼.”
이곳에 오겠다는 한국인 책임자가 아직 없어서 담마센터가 지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가 참 안타깝게 들렸습니다. 누군가가 인도불교 부흥을 발원하며 이곳에 오기를 간절히 기원해 보며 담마센터 부지를 돌아서서 나왔습니다.
원래는 이곳 부지에서 매년 회향식을 했는데 오늘은 날씨가 춥다며 석가족 청년들이 담마센터 부지 옆에 있는 법당 안에서 회향식을 할 수 하도록 준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순례객들은 모두 법당으로 이동했습니다.
법당 입구로 들어서자 석가족 청년들은 순례객 한 명 한 명에게 환영의 의미로 꽃목걸이를 걸어주었습니다. 스님이 맨 먼저 입장하자 스님에게는 엄청나게 큰 꽃목걸이를 걸어주어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두 사람이 스님의 꽃목걸이를 부축하는 가운데 스님이 먼저 앞으로 가자 뒤이어 순례객들이 법당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삼귀의 반야심경을 봉독하며 드디어 제27차 인도 성지순례 회향식이 거행되었습니다.
▲ 제27차 인도 성지순례 회향식
스님은 순례단으로부터 청법가와 삼배를 받고 순례를 회향하는 마음 자세에 대해 법문을 해주었습니다.
“우리는 부처님이 처음 법바퀴를 굴리신 바라나시 사르나트, 초전법륜 성지에서 구리가장자처럼 삼귀의 오계를 받고 가사를 수한 후 10대 성지를 하나하나 발로 밟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면서 또 거기서 설해진 경전을 읽으면서 순례를 했습니다. 부처님이 천상에서 하강했다고 하는 오늘 이곳 상카시아를 끝으로 이제 순례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출발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난 15일 동안 여러분 모두에게 주어진 조건은 거의 차이가 없었습니다. 같은 버스를 타고, 같은 곳에서 자고,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행동을 하는 등 똑같은 조건에 있었음에도 각자가 얻은 소득은 조금씩 다 다릅니다. 처한 환경이 달랐다면 몰라도 똑같은 환경 속에 있었음에도 우리가 얻은 소득이 각자 다르다면 그것을 우리는 자기 업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기 그릇에 따라서 얻은 소득이 다른 것입니다. 그러니 이 그릇을 앞으로 어떻게 만들어가는 것이 좋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그릇에 행복을 담을 수도 있고 불행을 담을 수도 있습니다. 그 그릇을 가볍게 할 수도 있고, 무겁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서 여러분들이 15일 간 순례를 한 인연 공덕으로 삶이 가벼워지고 더 기뻐지고, 나만을 생각하는 삶에서 가족, 이웃, 나라, 인류, 만생명을 생각하는 쪽으로 조금 넓어지거나, 그저 먹고 입고 자는 것에 급급하는 데서 해탈과 열반 쪽으로 인생을 바라보는 깊이가 깊어지거나, 이런 작은 변화들이 일어나길 바랍니다. 그래서 순례한 이 시간과 경비가 아깝지 않도록 결산을 잘 해나가시기 바랍니다.
어떤 분들은 ‘저는 별로 감흥이 없었는데 어떡하죠?’ 이런 질문들을 해요. 감흥이 없었던 것은 나쁜 것이 아니에요. 감흥이 없었으면 감흥이 없는 것이 현실이고, 기뻤다면 기쁜 것이 현실이에요. 그 어떤 것도 좋다거나 나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눈물이 안 난 것이 문제가 아니라 눈물이 날 것이라는 내 기대에 안 맞은 것일 뿐입니다. 눈물이 나야 할 이유도 없고, 감흥이 커야 할 이유도 없고, 감흥이 없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어떤 반응이든 내 업식에 따라서 일으킨 반응인데 내 업식에는 좋고 나쁨이 없습니다. ‘나는 이런 업식이구나’ 하고 다만 알아차릴 뿐이어야 합니다.
제가 3호차를 타고 왔는데 한 거사님이 나누기를 하면서 여기 와서 다른 건 몰라도 담배라도 하나 끊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해요. 그런데 우리가 순례를 하면서 중도를 배웠잖아요. 담배를 피우고 싶다고 해서 피우면 쾌락이고, 피우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으면 고행이 됩니다. 내가 얼마나 더 참을 수 있는가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피우고 싶어하는구나’ 이렇게 다만 알아차리는 연습을 해야 됩니다. 피우고 싶다고 해서 피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피우고 싶은 것을 이를 악 다물고 참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담배를 피우고 싶어 하는구나’ 알아차리면 됩니다. 피우고 싶어 하는 이유는 습관이 되었기 때문에, 즉 중독성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인이 아니라 업이 주인인 것입니다. 습관이 하자는 대로 내가 따라다니는 것이죠.
그러니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야겠다. 습관이 내 인생의 주인이 되도록 해서는 안 되겠다. 습관을 따라가지 않으니 이 습관이 난동을 부리는구나. 자기 하고싶은 대로 못하게 한다고 난리를 치는구나.’ 이렇게 다만 알 뿐이어야 합니다. 담배를 피워야 한다, 안 피워야 한다, 좋다, 나쁘다, 자꾸 이렇게 접근하지 말고, ‘이 욕구를 안 들어주니 다른 것으로 시비를 해서 불평불만을 만드는구나. 몸을 아프게 만드는구나. 30년 피운 것도 이렇게 난동이 심한데 몇 생을 습관들여 온 것은 얼마나 난동이 심하겠느냐.’ 이렇게 다만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것이 중도입니다.
거기에 끌러가면 노예가 되고, 그것을 억압하면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그러니 다만 알아차리고 내버려 둡니다. 난동을 피우면 난동을 피우는대로 그냥 놓아두면 시간이 흐르면 제풀에 꺾여서 나가 떨어집니다.
그러니 여기 와서 당장 업식을 바꾸거나 고치지는 못할지라도 지금까지 내가 노예로 살았던 그 업식에 내가 어떻게 대응을 할지 터득해서 이것 하나는 계속 연습을 해나가야 합니다. 비록 연습을 하다가 실패해서 업식을 따라가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 시도해 보고 또다시 시도해 봐야 합니다. 누에고치가 자기 입에서 난 실로 고치를 만들고 그 속에 갇혀서 답답하게 살아가듯이 내가 지은 업식에 내가 갇혀서 평생 감옥살이를 해왔는데, 누에고치가 나비가 되어 그 구멍을 뚫고 훨훨 날아가듯이 이제 여러분들도 업식의 굴레를 뚫고 자유롭고 행복한 해탈과 열반을 목표로 그 길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오늘 가사를 반납하게 되지만, 수행이 무슨 가사에 있겠습니까. 그러니 순례를 하는 기간 동안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되겠다 하는 이치를 알았다면 이것이 큰 소득입니다. 여러분들의 삶이 성지순례를 한 인연공덕으로 더 행복해지고 가벼워지고 자유로워지길 바랍니다.
사실 고생한 건 별로 없잖아요. 잘 놀았으니까요. 그럼에도 ‘그동안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하는 말로 인사를 드립니다.” (모두 웃음)
스님이 격려 말씀에 모두들 크게 웃으며 기쁜 마음이 되었습니다. 비록 성지순례는 이렇게 끝이 나지만 수행자로의 삶은 이제 새롭게 시작되는 것입니다.
스님의 법문이 끝나자 곧이어 가사를 반납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먼저 다함께 삼배를 하면서 ‘그동안 출가수행 잘했습니다. 밖에 가서도 수행 잘하겠습니다.’ 하고 다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순례객들이 호궤합장을 한 상태에서 수계식 때 받았던 가사를 고이 접어서 머리 위로 올리니 각 조별로 법사님들이 지나가면서 가사를 받았습니다.
가사를 여법하게 반납하는 대중들을 보며 스님은 “불가에서는 일곱 번까지 출가를 거듭할 수 있다”고 하면서 웃었습니다. 언제든 다시 출가를 하라는 말씀이었는데, 아마도 가사를 벗을 때의 시원섭섭한 마음을 달래주려 하셨나 봅니다.
이어서 순례객들은 13일 동안 성지순례를 안내하고 진행해 준 법사님들께 감사의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각 차량을 담당한 차장님들, 조원들을 위해 머슴 역할을 톡톡히 해준 조장님들, 실무 스텝들이 차례로 일어나자 역시 큰 박수를 보냈습니다.
▲ 순례를 안내해 준 법사님들께 감사의 박수를 보내는 순례객들
모두들 아쉬움이 컸는지 서로를 부둥켜 안으며 눈시울을 붉히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15일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24시간 고락을 함께했기에 정이 많이 들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사홍서원을 끝으로 회향식을 마친 후 법당 밖으로 나오니 석가족 청년들이 준비한 성지순례단 환영 행사가 조촐하게 열렸습니다. 이미 마당에는 석가족 청년들이 따뜻한 짜이와 식빵, 사브지를 정성껏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순례단은 짜이와 식빵, 사브지를 맛있게 먹으며 추위를 녹였습니다. 석가족 청년들은 “날씨가 추우니 짜이를 일인당 세 잔씩 마셔야 한다”고 하면서 웃음을 보였습니다.
상카시아에는 전 인도에서 석가족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데 약 200만명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대부분 힌두교이고 절도 없고 해서 스님은 오래 전부터 이곳 석가족 집성촌 마을에 불상 점안식을 해주고 법회와 수련도 일 년에 한 차례씩 해오고 있습니다. 스님은 순례객들에게 석가족 청년들의 불교 부흥 활동에 많은 후원과 관심을 가져줄 것을 당부했습니다.
이어서 석가족 청년들을 대표해서 수바스지가 순례단을 환영하는 인사말을 해주었습니다.
▲ 석가족 청년회 대표 수바스지
“한국에서 이곳까지 오셔서 성지순례를 무사히 마친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오늘 여러분들을 환영하기 위해 멀리서 석가족들이 왔습니다. 여기 오신 분들은 대부분 자녀들, 부인들과 함께 이 자리에 참석했습니다.
법륜 스님이 인도를 방문하셔서 25년 전부터 이곳에 석가족들을 위한 절도 지어주시고, 법문도 해주시고, 많은 지원을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매년 한국인들이 이곳에 방문해주시는 것을 무척 기쁘게 생각합니다. 전에는 1년에 한 팀씩 방문하셨는데 이번에는 세 팀씩 나뉘어서 와서 더 기쁘고 좋습니다.
짜이와 음식을 정성껏 준비했으니 맛있게 드세요. 성지순례를 마치셨으니 보다 더 행복해지셨으면 좋겠습니다.”
수바스지의 환영 인사에 순례단은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내며 응원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이 때 수바스지의 부인이 갑자기 보여서 스님이 덧붙여 소개를 해주었습니다.
“여기 옆에 분이 수바스지의 부인이에요. 수바스지는 20대 때 저를 만났어요. 제가 인도 불교 부흥을 위해 평생을 바칠 사람은 손을 들어라고 할 때 손을 든 사람이에요. 그런데 평생을 안 바치고 이 부인한테 장가를 갔어요.
그래서 제가 이 부인한테 ‘남편이 나와의 약속을 지켜야 하는데, 남편을 나한테 줄래? 아들을 나한테 줄래?’ 물으니까 자기 남편을 주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안 되고 3년 후에 준다고 대답했어요.” (모두 웃음)
스님과 수바스지 가족의 재미있고 깊은 인연에 모두 웃음을 터뜨리며 기뻐했습니다. 이어서 스님은 석가족 청년 한 사람 한 사람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소개가 될 때마다 큰 박수가 쏟아졌습니다.
그리고 스님은 석가족 청년들에게 인도불교 부흥을 위한 일에 사용하라고 보시금을 전달하면서 그 취지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저는 뭐든지 공짜로 주는 것은 없습니다. 항상 반반씩 함께 참여하도록 합니다. 자기들이 절을 지으면 저는 불상을 기증하고 그렇게 해왔습니다. 그래서 동네마다 절을 짓고 있어서 제가 매년 인도에 올 때마다 점안식을 해주거든요. 오늘 이 자리에서 그 불상 값을 기증하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박수)
석가족 청년들은 보시금을 받은 후 감사 인사를 하면서 자신들도 스님께 드릴 선물을 준비했다고 하면서 건넸습니다. 석가족들은 인도 과자 세 상자와 숄을 스님에게 전달했습니다.
소박한 선물에 순례객들은 웃으며 큰 박수를 보냈습니다.
웃고 박수를 치면서도 순례객들은 스님이 발원한 인도불교 부흥 사업이 이 석가족 청년들을 시작으로 활짝 꽃피우기를 간절히 기원해 보았습니다.
이렇게 석가족들과 순례단이 서로 조금씩 친해져갈 무렵, 이제는 행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석가족들은 아쉬운 마음이 컸는지 다함께 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습니다. 왁자지껄한 가운데 기념사진을 한 장 찍고 법당을 나왔습니다.
▲ 석가족과 정토회 성지순례단 모두 함께
옛날 고구려, 백제, 신라 시대에는 인도 승려들이 우리 나라에 불교를 전하러 왔었는데, 1700여 년이 지난 지금 인도에는 불교가 거의 사라지고, 이제 다시 우리들이 인도 사람들에게 불교를 전해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이 사실이 참 묘한 인연처럼 느껴졌습니다. 은혜를 받고 다시 그 은혜를 갚는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석가족들과 작별 인사를 한 후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숙소에서는 저녁 식사로 라면을 조별로 끓여 먹었습니다. 성지순례 기간 때 먹는 라면 맛은 천하일미였습니다.
식사 후 저녁에는 성지순례 회향의 기쁨을 다시 상기하며 조별로 마음 나누기 시간을 가졌습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서로 정이 많이 들었나 봅니다. 나누기가 진행되는 방마다 웃음과 박수가 끊이질 않았습니다.
▲ 성지순례를 회향하며 조별 마음나누기 시간
내일은 각자 방에서 새벽 5시에 예불과 기도를 한 후 6시에 아그라를 향해 출발합니다. 이제 성지순례를 모두 마쳤기 때문에 아그라에서는 타지마할과 아그라포트 등을 구경하며 순례자가 아닌 여행객이 되어보는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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