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6.1.18 (인도 13일째) 성지순례단 B팀 쉬라바스티 순례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정토회 성지순례단 B팀을 이끌고 부처님의 발자취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 쉬라바스티를 순례한 후 저녁에는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새벽 6시에 예불과 기도를 마친 성지순례단 B팀은 한 줄로 서서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기원정사로 향했습니다. 맨 앞에는 스님이 앞장섰습니다. 새벽 안개를 가르며 고요히 걸어가는 기나긴 행렬을 보니 이곳 사위성에서 설해진 금강경의 한 구절이 그대로 재현이 된 것 같았습니다.  

 


 

‘한 때 부처님께서 사위성의 기수급고독원에 대비구중 천이백오십 인과 함께 계셨다. 그 때 부처님께서 공양 때가 되어 큰 옷 입으시고 발우를 지니신 채 사위성에 들어가시어 차례로 밥을 빌어 본 곳으로 돌아오시어 공양을 마치신 뒤 의발을 거두시고 발을 씻으신 다음 자리를 펴고 앉으셨다.’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10대 성지순례를 하고 있는 순례단은 이제 순례의 막바지에 이르러 기원정사에 당도하자 눈물이 날 것 같은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스님은 손에 향을 든 순례단을 이끌고 기원정사 곳곳을 탑돌이하고 참배했습니다. 부처님이 법을 설하신 자리, 부처님이 머무신 처소, 아난 존자가 물을 떠서 부처님께 드렸다는 우물 터, 부처님이 열아홉 발자국 행선했던 자리, 부처님이 안 계실 때 부처님을 대신해서 생각하기 위해 심은 보리수 나무, 라훌라 존자의 처소, 앙굴리말라의 처소, 후대 승려들이 머문 승방터 등을 모두 참배한 후, 법회를 하기 위해 부처님이 머문 처소인 ‘간다 쿠티’ 앞에 다시 섰습니다. 

 


▲ 부처님이 수행승들을 위해 설법을 했던 장소

 


▲ 아난다가 부처님께 물을 떠다 주었다고 하는 우물

 


▲ 라훌라 존자가 머무른 처소

 

"지심정례공양..." 예참 불공과 함께 160여 명의 순례단이 간다 쿠티를 향해 엎드려 절을 하자 동쪽에서 붉은 해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부처님이 가장 오래 머무셨다고 하는 바로 이곳에서 예불을 올리는 이 순간은 순례객 모두에게 평생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을 것입니다. 

 


▲ 아침 예불

 

예불을 마치고 스님은 순례객을 위해 축원 및 발원 기도를 해주었고, 이어서 이곳 기원정사가 어떻게 만들어지게 되었는지 창건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경전 속에 등장하는 사위성에서 일어난 갖가지 교화 사례들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또 스님의 설명을 듣고 나서는 실제 경전 속에서는 그 내용이 어떻게 묘사되어 있는지 함께 독송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아함경의 절반 가까이가 이곳 사위성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하니 오늘 독송한 내용 말고도 어마어마한 사례들이 있음을 짐작해 볼 수 있었습니다. 

 


▲ 경전 독송

 

경전 독송을 마치고 나서 스님은 부처님이 특히 사위성에서 외도들의 모함을 많이 받았다고 하면서 이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새겨야 하는지 강조했습니다. 

 

“사위성은 신흥강국으로 등장한 코살라국의 새로운 도시였기에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는 풍요로웠지만 문명이나 문화로 보면 수준이 좀 낮았나 봅니다. 그래서 삿된 외도들이 성행했어요. 부처님이 여기에서 외도들의 모함을 특히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방금 읽은 경전에 나와 있듯이 여러 가지 모함을 받고 승가가 오해를 받을 때마다 수닷타 장자나 베사카 부인이 나서서 문제를 해결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왕사성에 계실 때도 많은 사람이 부처님의 제자가 되니까 이런 비난의 소리가 들렸다고 해요. 

 


 

‘어제는 누구의 아들을 빼앗아가더니 오늘은 누구의 남편을 빼앗아가네. 내일은 또 누구의 제자를 빼앗아 갈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에게 귀의하는 것을 빼앗겼다는 관점으로 보고 이렇게 비난했어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런 말에는 이렇게 대답하라고 했어요. 

 

‘여래는 진리를 설하는 자다. 법다이 설하는데 어찌 따르지 않겠는가?’ 

 


 

이렇게 해서 그 비난이 멈추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우리도 일을 하다 보면 본의 아니게 비난을 받게 되어 억울한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처럼 위대하신 분도 오해와 비난을 받았는데 어찌 우리 같은 사람들이 오해와 비난을 받지 않을 수 있겠어요? 그러니 수행 중에 베푸는 보시도 중요하고, 계를 청정히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억울하고 분한 일을 잘 참아내는 인욕 또한 매우 중요한 수행입니다.” 

 

성지에서 직접 읽는 경전 독송의 감동도 컸지만, 스님이 핵심을 다시 짚어주니 당시 상황이 더욱 생생하게 다가왔습니다. 

 

이어서 스님은 순례객 모두 매번 성지에 도착할 때마다 예불을 정성껏 올렸는데, 예불문의 의미가 무엇인지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삼귀의를 좀 더 자세히 풀어놓은 것이 예불문입니다. 우리가 늘 조석으로 예불을 하고 다녔지요? 이 예불문은 ‘오분향 예불문’이라고 합니다. 다섯 가지 향을 부처님께 올리고 예불한다고 해서 ‘오분향 예불문’이라고 하고, 절을 일곱 번 한다고 해서 ‘칠정례 예불문’이라고도 합니다.

 


 

인도에서는 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전단향처럼 좋은 향 다섯 가지를 꽂아서 향기를 피우면서 제사를 지내요. 그런데 우리가 부처님께 올리는 향은 그런 전단향이니 무슨 향이니 하는 게 아닙니다. 

 

첫째, 계향 즉 ‘계율을 청정하게 지킨다’, 또는 ‘언행이 바르다’고 이르는 인격의 향기예요. 계를 청정히 지키는 향기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겁니다. 둘째, 그 마음이 편안하고 고요한 선정의 향기로 공양을 올립니다. 셋째, 어리석음을 없앤 지혜로운 향기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립니다. 넷째, 온갖 속박을 끊어버리고 자유로운 해탈의 향기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겁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남에게 이익을 주기보다는 손해를 끼칠 때가 많아요. 그런데 나를 때리는 사람, 내 물건에 자꾸 손해끼치는 사람, 나한테 성추행하는 사람, 나한테 욕설하고 사기 치는 사람, 술 마시고 행패 부리는 사람과는 같이 살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사람은 부모라도 힘들고, 배우자라 해도 힘들고, 그런 자식이 있어도 힘듭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하지 않는 사람, 즉 ‘그 사람은 나를 절대로 해치지 않는다, 그 사람은 나에게 절대로 손해 끼치지 않는다, 그 사람은 절대로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 그 사람은 나한테 절대로 사기 치거나 욕설하지 않는다, 그 사람은 나한테 행패 부리지 않는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을 보통 ‘착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첫 번째로, 우리는 착한 사람 즉 남에게 해를 안 끼치는 사람이 돼야 해요.

 


 

그런데 ‘우리 마누라나 남편은 착하기는 한데 늘 불안정하다’ 라는 경우가 있습니다. 늘 안절부절 못하는 사람도 같이 살기엔 좀 힘들어요. 그래서 착한 것만 갖고는 안 되고, 두 번째로 마음이 편안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세 번째로, 착하기도 하고 마음도 편안한데 앞뒤가 꽉 막혀서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 있어요.그러면 속이 터지죠. 이렇게 어리석은 사람과도 같이 살기 좀 힘들어요. 그러니 지혜로워야 합니다. 사람이 좀 영리해서 말귀도 금방금방 알아듣고 일머리도 금방금방 돌아가야 같이 살기 쉽잖아요. 

 

네 번째로, 매사에 부정적인 사람이 있어요. ‘그건 안 되겠는데요’, ‘그거 해봐도 안 될 거예요’ 라며 늘 사물을 부정적으로만 보는 사람이에요. 그게 아니라 뭐든지 이야기하면 ‘네. 해보죠, 뭐’ 혹은 ‘네, 해봅시다’ 라고 할 수 있어야 해요. 이처럼 어떤 윤리나 도덕이나 의식에 꽉 묶여 있는 게 아니라 마음이 좀 자유롭고 열려 있는 사람이 가지는 향기가 해탈의 향기예요. 

 

다섯 번째로, 해탈지견향은 부처님의 지혜예요. 우리가 궁극적으로 가야 할 마지막 단계입니다.

 

이런 다섯 가지 향기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립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예불을 올릴 때 ‘계향’이라고 말할 때는 ‘계율을 청정히 지키겠습니다’ 라고 다짐해야 해요. ‘정향’이라고 말할 때는 ‘마음을 고요히 하는 선정을 닦겠습니다’라고 다짐하고, ‘혜향’ 할 때는 ‘지혜를 증득하겠습니다’ 라고 다짐하세요. 

 


 

이 다섯 가지로 시방에 계시는 한량없는 불법승 삼보님께 공양을 올리는 것입니다. 다른 것으로 공양을 올리는 게 아니라 이렇게 수행의 다섯 가지 향으로 공양을 올린 뒤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는 것이 예불입니다.

 

자, 그럼 이곳 사위성 기수급고독원에서 각자 한가하게 정진을 좀 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예불문에 이렇게 깊은 뜻이 담겨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그 뜻에 더욱더 집중해서 예불을 해봐야겠다는 다짐이 생겼습니다. 

 

스님의 설명이 끝나자 순례객들은 기원정사 곳곳에 흩어져 개인 정진을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나무 밑에서 명상을 하는 사람, 조별로 모여서 공동 정진을 하는 사람들, 간다 쿠티를 바라보며 300배 절을 하는 사람 등 모두들 성지에서 받은 감동을 정진을 통해 자신의 내면으로 승화하고 있었습니다.  

 


 


▲ 개인 정진 시간

 

대중들이 정진을 하고 있는 사이 차량별로 줄을 서서 스님과 일대일로 기념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사진관에서 증명사진을 찍듯이 모두들 설레여 하며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활짝 웃었습니다. 

 


▲ 기념사진 촬영

 

이렇게 기원정사에서 법회를 모두 마친 후 다함께 사위성을 향해 걸었습니다. 대중 일동이 길게 줄을 서서 차례대로 걷기 시작하자 스님의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 기원정사에서 사위성으로 들어가는 순례단

 

“이제 사위성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천이백오십명이 기러기떼처럼 한 줄로 성 안으로 들어가서 골목 골목으로 흩어진 다음 걸식을 하고 나서 기원정사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것을 금강경에는 ‘환지본처’라고 표현하죠. 본래 자리로 돌아오셔서 공양을 드셨다는 뜻입니다. 천이백오십 대중이 매일 가서 걸식을 해도 괜찮을 정도였으니 이 사위성이 얼마나 크고 부유했는지 가늠해 볼 수 있죠.” 

 

부처님 당시를 재현하듯 긴 행렬을 이루며 기원정사에서 사위성으로 향했습니다. 160여 명이 한 줄로 가도 이렇게 긴 행렬이 되는데 천이백오십 명이 줄을 지어 걷는 모습이 어땠을지 상상이 가지 않았습니다. 스님 말씀처럼 사위성은 정말로 큰 규모였으리라 짐작해 볼 뿐입니다. 

 

사위성 서문 쪽으로 들어서자 두 개의 큰 탑이 한 눈에 보였습니다. 스님이 송수신기로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왼쪽에 보이는 이것은 앙굴리말라를 기념하는 탑이고, 저기 오른쪽에 있는 것은 수닷타 장자를 기념하는 탑입니다. 수닷타 장자는 선한 사람으로서 위대한 사람이고, 앙굴리말라는 악인이었다가 참회해서 위대한 사람이 되었어요. 먼저 앙굴리말라 수투파를 정근하면서 참배하겠습니다.”

 


▲ 왼쪽이 앙굴리말라 스투파, 오른쪽이 수닷타 장자 스투파

 

대중들은 스님을 따라 앙굴리말라 스투파를 오른쪽으로 한 바퀴 돌고 삼배를 한 후 자리를 깔고 앉았습니다. 

 


▲ 앙굴리말라 스투파

 

스님은 부처님이 어떻게 99명을 죽인 살인자 앙굴리말라를 교화했는지 당시의 모습을 영화보듯이 실감나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앞에 있는 탑은 앙굴리말라를 기념해서 세운 앙굴리말라 수투파입니다. ‘앙굴리’는 ‘손가락’, ‘말라’는 ‘염주’라는 뜻입니다. 앙굴리말라는 원래 이 지역의 부유하고 좋은 집안 출신이었습니다. 그런데 부모님이 아들을 공부시키려고 여기서 서북쪽인 파키스탄 지역에 당시 유명했던 탁실라라는 교육 도시로 유학을 보냈어요. ‘부처님의 일생’에서 여러분들이 보시다시피 어린 시절은 ‘유학기’라고 해서 공부하는 시기예요. 그래서 7~8살 때 유학을 보내서 16~17살까지 공부를 마친 뒤 돌아오는데, 그 당시에는 멀리 유학을 가면 우리의 옛날 서당처럼 스승의 집에 기숙하면서 공부를 했어요. 그런데 앙굴리말라를 가르친 훌륭한 스승은 나이가 아주 많았습니다. 아마 50~60살 정도였던 것 같지만, 당시에는 50살만 되어도 할아버지였으니까 요즘으로 치면 7~80살 정도 된 느낌이었나 봐요. 그런데 부인은 20대 중반이어서 아주 젊었습니다. 앙굴리말라가 어린 시절에 그 집에 들어가 공부하니까 스승의 부인인 사모님이 엄마처럼 잘 보살폈는데, 아이도 공부를 잘하고 똑똑해서 귀여움을 받았다고 해요. 

 


 

그러다 스승이 아이를 질투해서 문제가 생겼어요. 스승의 질투가 원인인 것은 맞지만, 질투가 생긴 이유에 대한 설명은 기록에 따라 조금씩 다릅니다. 하나는 유학 온 아이가 스승의 사랑을 독차지 하니까 그 지역 출신 학생들이 모함했다는 거예요. 앙굴리말라가 15~16살이 되어 당시 기준으로는 장성했으니까 스승에게 ‘앙굴리말라와 사모님 사이가 수상하다’라고 고자질을 했어요. 스승이 줄곧 그 말을 믿지 않다가, 어느날 외출을 했다가 돌아오니 사모님이 손으로 밥을 앙굴리말라의 입에 떠넣어주는 모습을 보고 질투심을 느꼈다고 해요. 인도 사람들은 손으로 밥을 먹잖아요. 떠넣어준 것은 어릴 때 해주던 버릇 때문이 아니었나 싶어요.

 

또 다른 이야기로는 밥을 먹다가 방안에 쥐가 들어왔대요. 둘이서 쥐를 잡는다고 법석을 피우다가 옷자락이 엉키고 살갗이 드러났는데 마침 그때 스승이 돌아와서 보고 두 사람 사이를 오해했다고 기록한 것도 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남편은 나이가 많고 제자는 용모 반반한 청년이다 보니 사모님이 앙굴리말라에게 연정을 품었다고 해요. 그래서 스승이 멀리 외출하고 둘만 있을 때 사랑을 나누자고 청했는데 앙굴리말라가 거절했다고 해요. 자기가 몇 년을 극진히 사랑으로 대해줬는데 자기 사랑을 받아주지 않으니까 굉장히 자존심도 상했고, 이 아이의 성격으로 보아 남편에게 이야기할 것 같으니 자기가 죽을 위기에 처했다는 생각도 들었겠죠. 그래서 남편이 돌아올 시간에 맞춰 옷을 찢고 흐트러뜨린 뒤 막 울었다는 거예요. 놀란 남편이 무슨 일인지 물었더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소? 내가 이 아이를 엄마처럼 돌봤는데 당신이 없는 사이 이 아이가 나를 추행하려 했소’ 라고 이야기했대요. 그래서 남편은 제자를 사랑하던 마음은 없어지고 제자를 나쁘게 생각하게 되었어요.

 

구체적인 사정이 어떻든 오해가 생겼어요. 그래서 스승은 제자에게 ‘네게 가르칠 것은 다 가르쳤으니 고향으로 돌아가거라’ 라고 말했는데 이 아이 입장에서는 스승이 훌륭한 분이니 배울 게 더 있다고 생각해서 ‘아닙니다, 아직 저는 더 배울 게 많습니다’ 라고 답했어요. 있겠다고 하니 더 수상하게 보이잖아요. 가라는 스승과 계속 있겠다는 제자 사이의 실랑이가 한동안 이어지다가 스승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실은 더 가르칠 수 있는 것이 딱 하나 남았다. 승천, 즉 산 육신을 가진 채 바로 하늘나라에 가는 게 마지막 공부인데 그것은 실제로 행하기가 너무나 어려우니 가르쳐줘봐야 네가 할 수 없다.’

 

그러자 이 청년이 ‘저는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 어떤 사람이 못 한다 하더라도 저는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맹세한 거예요. 그래서 가르쳐준 비법이라는 게 사람을 100명 죽여서 그 손가락 1,000개로 염주를 만들어 목에 걸면 바로 승천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바로 사로잡힘이에요. 청년은 거기에 딱 빠져서 그날부터 수행이랍시고 사람을 죽인 뒤 손가락을 엮어서 목에 걸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본래 이름은 없어지고 ‘앙굴리말라’, 즉 손가락 염주를 한 희대의 살인마가 되었어요.

 

그러자 당시 사회에 소문이 퍼져서 사람들이 전부 두려워하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사람을 죽여야 손가락 염주를 완성할 텐데 사람들이 도망가니까 사람을 따라 자꾸 내려와서 이제 쉬라바스티로 내려온다는 소문이 났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왕에게 탄원해서 요즘 말로 하자면 치안이 허술하니까 빨리 잡아달라고 졸랐습니다. 병사 몇 명쯤 보내봐야 숲속에서 갑자기 나타나서 공격하니까 도로 다 잡혀 죽임을 당했어요. 그러다 보니 괴력을 가져서 누구도 감당할 수 없다는 헛소문까지 났어요. 어떤 확신을 가지면 두려움이 없으니까 실제로 그렇게 되는 면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경전의 기록이 또 두 가지로 다릅니다. 하나는 앙굴리말라가 99명을 죽이고 마지막 1명만 죽이면 승천한다고 믿는 상태에서 쉬라바스티 가까이에 왔다는 거예요. 왕이 나서서 이 사람을 잡겠다고 하니 그 어머니가 부처님께 찾아와서 아들을 살려달라고 요청했다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부처님이 길을 가는데 사람들이 도망쳐오면서 ‘부처님, 그 길을 가지 마지 마십시오. 그리로 앙굴리말라가 옵니다’라고 외쳤대요. 그런데 부처님께서 ‘여래는 두려움이 없소’ 이렇게 답하고 계속 길을 갑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도망치는 사람들을 거슬러서 길을 갔습니다. 한참을 가니까 숲에서 칼과 방패를 든 앙굴리말라가 나타났어요. 앙굴리말라는 한 사람만 더 죽이면 자기가 승천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다들 도망가서 사람을 만나기 어렵던 중에 부처님을 만난 거예요. 그래서 칼을 쥐고 ‘사문아, 게 섰거라!’ 하고 고함을 지르며 쫓아왔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러거나 말거나 평소 걷던 대로 천천히 걸어가셨어요. 그런데 앙굴리말라가 아무리 쫓아가도 부처님에게 닿지를 않는 거예요. 멈추라고 마구 소리를 지르다가 헐레벌떡 쫓아와서 부처님 앞을 막아서면서 ‘왜 멈추라는데 멈추지 않았느냐?’ 이렇게 화를 냈어요. 그런데 부처님은 살려 달라고 애원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편안한 자세로 ‘나는 이미 멈춘 지 오래다. 멈추지 않는 것은 바로 너다’ 이렇게 말했어요. 부처님의 특이한 화법입니다. 화제를 바꿔버려요. 

 

그러자 죽여야 한다는 생각은 온 데 간 데 없고, 이 말에 발끈한 앙굴리말라가 문제제기를 했어요. ‘말도 안 된다. 너는 계속 걸었고 나는 지금 멈춰 있는데 왜 네가 멈췄고 나는 멈추지 않았다고 하느냐?’ 그러자 부처님께서 이렇게 답하셨어요. ‘나는 남을 해치는 것을 멈춘 지 오래되었으나 너는 아직 남을 해치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나는 성냄을 멈춘 지 오래 되었으나 너는 아직 성냄을 멈추지 못했다.’ 

 


 

앙굴리말라는 스승의 술수에 걸려들어 정신을 잃었다가 이 말에 번쩍 정신이 들었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자기가 너무나 몹쓸 짓을 저지르고 엄청난 죄를 지은 거예요. 그래서 방패와 칼을 던지고 무릎을 꿇으며 출가하기를 원했습니다. 부처님께서 그가 이미 진리에 눈을 뜨고 깨달음을 얻은 줄 알고 ‘오라, 비구여. 여기 법이 잘 설해져 있도다. 부지런히 정진해서 괴로움이 소멸되는 열반의 세계로 가라’ 라고 출가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출가사문이 된 앙굴리말라를 데리고 기원정사로 돌아왔을 때 마침 프라세나짓 왕이 부처님께 인사를 왔어요. 정사에 들어올 때는 누구든지 무장을 해제해야 하니까 병사들을 밖에 세워두고 왕만 들어와 인사를 올리는데, 정사 밖에 잘 무장된 날랜 병사 1,000명으로 구성된 군대를 세워 두었어요. 게다가 그 중 500명은 기마부대예요. 그래서 부처님이 물어보셔습니다. 

 

‘무슨 일이오? 전쟁이라도 났소?’

‘아닙니다, 들어보셨는지 모르지만 앙굴리말라라는 희대의 살인자가 나타나서 온 나라 백성들이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직접 군대를 끌고 잡으러 가는 중에 부처님께 인사드리러 들렀습니다.’

‘대왕이시여, 만약 그 앙굴리말라가 모든 악행을 멈추고 출가하여 수행자가 되었다면 어떻겠소?’

‘정말 그런 일이 있다면 제가 그분께 예를 갖추고 공양을 올리겠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그 살인자가 악행을 멈출 리 만무하며 출가사문이 될 리는 더욱 만무합니다.’ 

 

그러자 부처님이 옆에 앉아 있는 비구를 가리키며 ‘이 존자가 바로 앙굴리말라요’ 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왕이 갑자기 온몸을 사시나무 떨 듯이 떠는 거예요. 괴력을 가졌다는 희대의 살인마를 지금 무장해제하고 호위병 한 명도 없이 마주했으니 두려울 수밖에 없지요. 그러자 부처님이 ‘대왕이여, 두려워하지 마시오. 그는 아힘사요. 더 이상 누구도 해치지 않는 사람이오.’라고 말했습니다. 앙굴리말라의 법명은 ‘아힘사’입니다. ‘비폭력’, ‘불살생’이라는 뜻이에요. 그 말을 듣고 보니 정말로 안온한 수행자여서 대왕이 절을 하고 필요한 게 무엇이든 공양을 올리겠다고 하니까 앙굴리말라가 ‘저는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저는 만족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공양을 사양했어요. 그때 왕이 부처님을 찬탄했습니다. ‘참으로 세존께서는 거룩하십니다. 누구도 조복하지 못할 사람을 조복하고, 길들이지 못할 사람을 길들이셨습니다. 우리는 창과 칼을 가지고도 다스리지 못한 사람을 부처님은 오직 말씀으로 그를 조복하고 다스렸습니다.’

 

춘다의 공양이 붓다를 위대하게 했듯이 앙굴리말라는 부처님을 더욱 더 위대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앙굴리말라 같은 사람이 법에 귀의해서 성자가 됨으로 해서 여래의 법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보였으니까요. 

 

우리 정토회도 그런 것 같아요. 착한 사람이 정토회에 와서 수행자가 되면 별로 영향력이 없는데, 성질 더럽고 못된 사람이 법문 듣고 변하니까 ‘어쩌다가 저렇게 됐냐’며 주위에서 난리가 나서 나중에는 형제며 가족들이 모두 정토회에 옵니다. (모두 웃음) 

 


 

그런데 앙굴리말라가 출가 스님이 되었다는 소문이 나니까 또 문제가 되었어요. 앙굴리말라가 출가하기 전에는 집집마다 줄을 묶고 줄에 종을 달아서 앙굴리말라가 나타나면 서로들 비상연락을 했습니다. 누가 줄을 잡아당겨 종소리로 알리면 온 도시가 전부 대문을 잠그고 창문을 닫을 정도로 두려움에 떨었어요. 그런데 앙굴리말라가 출가사문이 됐다니까 아침에 탁발하러 오는 스님들 중 누가 앙굴리말라인지 모르잖아요. 그래서 전부 문을 걸어 잠그고 아무도 공양을 안 주는 거에요. 앙굴리말라를 출가시켜 놓으니까 다른 사람들까지 밥도 못 얻어먹게 생겼어요. 상가의 이미지가 확 떨어져 버렸습니다. 

 

앙굴리말라도 발우를 들고 탁발하러 어느 집에 들어갔는데 그 집에서 여인이 아이를 낳고 있었어요. 막 아기 머리가 나오던 참인데 ‘앙굴리말라가 온다’라고 누가 소리치니까 여인이 놀라서 그만 까무러쳐 버렸어요. 애가 나오다가 멈췄으니 산모도 아이도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이 되었어요. 앙굴리말라가 기원정사로 와서 부처님께 지금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하니까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앙굴리말라여, 다시 그 집으로 가거라. 그 집으로 가서 이렇게 말해라. 내가 이 세상에서 태어난 이래로 한 번도 살생을 한 적이 없다.’

 

그 동안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였는데 말이 안 맞지요?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래로’는 ‘출가한 이래로’라는 뜻입니다. 그 전은 다 꿈속의 이야기나 다름없으니까요. 그래서 그 집에 가서 이렇게 말했더니 여인이 정신을 차리고 아이를 무사히 낳았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가 알려지면서 이제는 앙굴리말라가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되었어요. 그러자 그 동안은 겁내서 도망가던 사람들이 이제는 보복을 하려 들었습니다. 그래서 앙굴리말라가 성내에 탁발을 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돌멩이를 던지고 몽둥이로 쳐서 결국은 깊은 상처를 입고 죽게 되었습니다. 여기서도 기록이 조금씩 달라요. 부처님이 소식을 듣고 앙굴리말라가 쓰러진 곳에 왔다고도 하고, 앙굴리말라가 피투성이가 되어 정사로 돌아왔다고도 합니다. 아무튼 부처님이 오셨을 때 앙굴리말라는 이렇게 말했어요. 

 

‘여래시여, 저는 아무런 후회가 없습니다.’

 

돌과 몽둥이에 맞아 죽으면서도 마음에 진심(瞋心)이 일어나지 않고 편안히 열반에 들었습니다. 앙굴리말라는 아라한과를 증득했기에 순교를 할 때도 아무런 번뇌가 없었어요.

 

이것이 앙굴리말라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사위성 사람들이 앙굴리말라를 위한 탑을 이곳에 세운 것입니다. 처음에 제가 왔을 때는 여기에서 앙굴리말라가 숨었다고 하면서 ‘앙굴리말라 굴’이라고 했어요. 저쪽으로 가서 보면 탑에 희한하게 굴이 뚫려 있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기어서 들어가 보고, 굴을 통과하면 오래 산다는 속설도 있었는데 지금은 막아놨네요. 생각해보면 시내 한복판인데 앙굴리말라가 여기에 숨어 있다가 나왔을 리가 없어요. 그러니 이곳은 앙굴리말라가 탁발하러 왔다가 돌에 맞아서 열반에 든 곳이어서 기념탑을 세운 것 같아요.

 

저 건너편은 선인으로서, 즉 착한 사람으로서 제일 유명한 사람인 수닷타 장자의 집터예요. 그래서 저기에 또 그를 기리는 탑을 쌓아서 지금은 두 탑이 마주보고 있게 되었습니다.

 


 

앙굴리말라를 교화한 이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합니다. 이렇게 부처님의 법은 악한 이나 착한 이나 지혜로운 자나 어리석은 자나 모든 사람에게 평등합니다. ‘그가 과거에 어땠나’ 하는 것은 꿈속의 이야기이고, 어떤 사람이든 깨달을 수 있고, 깨달으면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다만 과거에 지은 과보는 받아야 해요. 그래서 앙굴리말라는 과거에 지은 악업의 과보를 받기 위해서 목숨을 버렸습니다. 목숨을 버리는 것이 열반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안 됩니다. 그는 일체의 두려움과 성냄도 없이 편안하게 자신의 삶과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자, 그럼 경전에 나오는 앙굴리말라의 이야기를 독송해보겠습니다.”

 

스님이 말씀해준 내용이 경전 속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 독송해 보았습니다. 부처님이 기절한 임산부를 보고 당황해하는 앙굴리말라를 보고 ‘내가 이 세상에서 태어난 이래로 한 번도 살생을 한 적이 없다’고 말해라고 하는 대목과 마을 사람들에게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저는 아무런 후회가 없습니다’ 라고 말하는 대목은 언제 들어도 큰 감동입니다. 

 

이렇게 앙굴리말라 스투파 참배를 마치고 이어서 수닷타 장자의 스투파로 건너가 참배를 했습니다. 

 


▲ 앙굴리말라 스투파를 나와서 수닷타 장자 스투파로 이동하는 순례단

 

비록 지금은 허물어져 있지만 기단의 규모를 보니 당시에는 얼마나 크게 세워졌을지 가늠해 볼 수 있었습니다. 

 


▲ 수닷타 장자 스투파

 

다시 순례객들은 지금은 정글로 변한 사위성의 한복판을 가로질러 사위성의 동문으로 나와 베사카 부인이 지었다고 하는 동원정사를 참배했습니다. 

 


▲ 정글로 변한 사위성 안

 

동원정사에서 스님은 베사카 부인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또 실감나게 들려주었습니다. 

 


▲ 베사카 부인이 지은 동원정사

 

이렇게 순례를 마치고 나서 대중들은 숙소로 돌아와 세면을 마치고 조별로 모여 전기밥솥으로 밥을 해먹었습니다. 식사 후 6시부터는 스님의 성지순례 총정리 강연과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약 10여 명이 그동안 순례를 하면서 들었던 의문에 대해 온갖 질문들을 쏟아내었습니다. 스님의 답변을 들으며 의문이 하나씩 하나씩 풀어지자 대중들의 얼굴도 점점 밝아져 갔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 부처님이 탁발을 하셨던 것은 어떤 수행적 의미가 있는 것인지 물었던 내용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합니다. 오늘 순례객들은 기원정사에서 사위성으로 직접 탁발을 하듯이 걸어가면서 많은 감흥을 느꼈는데, 스님의 설명을 듣고 나니 더 깊이 부처님의 삶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사위성을 순례하면서 탁발하는 것에 대해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부처님 당시도 그렇고 지금도 많은 수행자들이 탁발을 하시는데 그것이 어떤 수행적 의미를 가지는지, 그렇지 않으면 또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머리를 깎고 집을 나오고 탁발하는 것은 부처님이 처음 만든 게 아니라 그런 인도의 문화에 부처님도 동참한 거예요. 브라마니즘에 반대한 비주류, 즉 사문류에 부처님도 합류했다고 말할 수 있어요. 당시에는 ‘사문류’가 비주류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었기에 육사외도도 다 사문류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지금은 자이나교와 불교를 제외한 그 당시 사상들이 다 없어져 버렸어요. 그리고 우리 나라에는 자이나교가 없다 보니 이제 출가사문은 불교에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건 그 당시 하나의 수행적 문화였다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그걸 바꿀 수도 있는데 굳이 그대로 살리는 의미는 일체의 생존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먹고 입고 자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거예요. 먹는 것은 그냥 얻어서 먹으면 되고, 입는 것은 남이 버린 옷을 주워서 입으면 되고, 자는 것은 아무데서나 자면 돼요. 그렇게 놓아버릴 수 있어야 우리가 해탈을 추구하는 수행에 전념할 수 있다는 뜻이 있습니다. 

 

또 하나, 탁발에는 만인을 평등하게 본다는 뜻이 있습니다. 제가 옛날에 만행을 해봤는데 얻어 먹어보면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나’라는 것을 털끝만큼이라도 움켜쥐고 있으면 얻어먹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여러분들이 JTS 모금할 때 나눠주는 팜플렛을 상대가 안 받아도 좀 머쓱하고, 모금함을 가져가서 이야기해도 열 명이면 열 명 다 그냥 가버리면 좀 머쓱하잖아요. 그냥 내 돈 확 집어넣고 와버리고 싶어져요. (대중 웃음) 

 


 

또 이 몸을 유지하는 약으로 밥을 먹기 위해서 탁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보시해 주는 사람은 내 생존을 영위해주는 사람이에요. 비록 그 사람이 아무리 가난하고 천민이라도 내가 그 집에서 밥을 빌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그 사람에게 잘난 척하지 않고 겸손해야 하니까 가장 낮은 자의 아래에 놓이게 됩니다. 

 

또 한 끼 밥을 빌어서 먹는 걸 해결하니까 권력자나 부자에게 굳이 굽신거릴 이유가 없어요. 나에게 집이나 돈 같은 게 필요하면 돈 가진 사람이나 지위 높은 사람에게 잘 보일 필요가 있겠지만, 나에게 아무것도 필요가 없는데 임금이 있으면 뭐하고 부자가 있으면 뭐하겠어요? 그러니 임금한테도 고개를 숙이지 않습니다. 임금 앞에서는 일부러 고개를 숙이지 않고 뻣뻣하게 군다는 뜻이 아니라, 임금에게 고개를 숙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고, 밥을 빌어서 먹기 위해서는 천민한테도 고개를 숙여야 한다는 거예요. 이 말은 가장 낮은 자의 아래에 서고 가장 높은 자의 위에 선다는 뜻입니다. 이게 출가사문의 길입니다. 만인을 평등하게 본다는 뜻입니다. 즉 ‘세상에는 차별이 있지만 붓다는 세상을 평등하게 본다’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걸식은 수행에 큰 도움이 됩니다. 

 

여러분들이 JTS 모금하는 것도 일종의 걸식 연습과 비슷해서 수행에 굉장히 도움이 돼요. 사실은 불교 교리 100번 공부하는 것보다 그거 한 번 해보는 게 더 나아요. 몇 번 해보면 괜찮아지지만 처음 할 땐 굉장히 어색합니다. 스님 강연 홍보한다고 길거리에서 1인용 피켓 들고 서 있어도 처음엔 좀 부끄럽잖아요. 괜히 다들 나만 보는 것 같고, 혹여 친구라도 만나면 ‘미쳤다’ 소리 들을 것 같고 온갖 생각이 들어요. (대중 웃음)

 


 

우리는 다 ‘나’라는 걸 움켜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만 탁 놓아버리면 편안해요. 그런데 이것은 무슨 불교 교리를 외우거나 불교학 박사학위를 딴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에요. 실제로 행해보면서 ‘아, 내가 지금 상을 짓고 집착하고 있구나’ 이런 걸 자각하고 자꾸 놓아보다 보면 어떤 것도 편안해지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연습은 수행에 큰 도움이 됩니다.”

 

단순히 남의 밥을 빌어먹는 것이 아니라 내 수행에도 큰 도움이 되는 것이 탁발이고 모금활동임을 명확히 알 수 있었습니다. 부처님은 평생 동안 탁발을 함으로써 가장 낮은 자의 아래에 서고 가장 높은 자의 위에 섰다는 말씀은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모든 질문에 대해 답변을 마치니 3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습니다. 스님은 목에 파스를 붙이고 건강이 좋지 않아 보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순례객들에게 “밤새 이야기해 보자”며 마음을 내었지만 모두들 피곤한 기색이었습니다. 그러자 스님은 웃으면서 마지막으로 순례객들을 위해 격려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여러분들이 괴로운 이유는 기대가 높기 때문이예요. 나무 밑에서 잔다고 생각하고 성지순례를 오면 이 정도 숙소는 정말 괜찮게 느껴져요. 처음에 올 때 나무 밑에서 자는 수준이라고 미리 이야기 듣고 왔으니까 지금 괜찮지, 그냥 왔으면 시위를 하고 난리를 피웠겠죠. 스님 머리가 남아 있었으면 다 뜯겼을 거예요. (모두 박장대소) 

 


 

성지순례하는 것만 공부가 아니라 이렇게 살아보는 것이 다 공부입니다. 여러분들이 침낭에서 자고, 밥도 그냥 밥통에 해서 하루 두 끼 먹고, 차에서 졸면서도 이렇게 웃고 재미있게 살 수 있다면 집에 가서 못 웃을 일이 뭐가 있겠어요? 아무리 남편이며 아내가 뭐라고 한들 저보다야 잘 해줄 거 아니에요. 남편이며 아내가 저처럼 여러분들을 붙잡고 종일 끌고 다니면 ‘사람 죽이려고 하나?’ 이러고 대번에 싸움이 났겠죠. 안그래요? (대중 웃음)

 

여러분들이 이런 경험을 통해서 자기의 삶을 조금씩 자유롭게 하는 법을 터득해가야 합니다. 제가 일부러 고생시키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니에요. 자기 삶을 자유롭게 하려고 우리가 지금 이런 공부를 하는 거예요. 똑같은 벽돌 더미인데 그거 하나 더 보면 뭐하고, 덜 보면 뭐하겠어요? (대중 웃음) 

 


 

눈감고 마음을 코끝에 집중해서 들숨과 날숨을 관해버리면 시간도 없어지고 공간도 없어져요. 여기 앉아서 코끝을 보나, 한국에 앉아서 코끝을 보나, 어제 보나, 오늘 보나, 일체의 시공간이 사라지고 그냥 숨 들락거리는 것밖에 안 남아요. 그런 공부를 하는 사람에게 사실 성지가 어디 있고 오지가 어디 있겠어요? 그렇게 항상 우리는 공(空)으로, 텅 빈 자리로 돌아가야 하지만 그래도 이왕 성지에 왔으니 성스럽게 생각하는 마음도 내야 하겠죠. 먹는 거야 뭘 먹어도 좋지만 맛있는 걸 먹을 때는 맛있게 먹어야 해요. 맛에 집착하지 말라고 해서 맛있는 걸 굳이 인상 쓰고 먹을 필요는 없어요. (모두 웃음)

 

그렇게 해서 여러분들의 삶이 점점 자유로워지도록 하라는 게 붓다의 가르침이지, ‘부처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쳐라’ 이런 게 불교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가장 행복해지는 게 스님이 원하는 바지, ‘법륜 스님이 최고다’ 이런 걸 원하는 게 아니에요. 자기가 가장 행복해지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법에 귀의하면 그 길로 갈 수 있다 해서 법에 귀의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을 가져서 이번 성지 순례를 통해 자기 삶을 행복하게 한 사람은 불법에 가까워진 사람이고, 성지 순례 하는 동안 괴로운 사람은 집에 가도 괴롭고 어디를 가도 괴로워요. 여기 가도 괴롭고, 저기 이사해도 괴롭고, 혼자 살아도 괴롭고, 결혼해도 괴롭고, 늙어도 괴롭고, 젊어도 괴롭습니다. 그런데 자기를 행복하게 하는 사람은 혼자 살면 귀찮은 게 없어 좋고, 같이 살면 심심하지 않아서 좋고, 늙으면 할 일 없어 좋고, 젊으면 할 일이 많아서 좋고, 이렇게 다 좋아요. 몸이 아파도 괜찮아요. 아프면 좀 누워 있을 수 있어서 좋고, 온갖 약도 먹어볼 수 있어서 좋아요. 안 아프면 그런 약을 언제 또 먹어보겠어요? 이 세상에서 인간이 마련한 다양한 약도 한번 먹어봐야 할 거 아니에요. (대중 웃음)  

 


 

또 아프면 시봉도 좀 받을 수 있고 주변에서 걱정도 좀 해줍니다. 세상만사가 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아요. 그렇게 해서 여러분들이 조금씩 조금씩 더 자유로워져가야 합니다.

 

내일은 새벽 3시 20분에 기상하는 것 알고 있죠? 일찍 나가보는 것도 좋아요. 3시 반에 일어난다고 해도 한국 시간으로는 7시입니다. 7시에 일어나는 게 뭐가 힘들어요? (대중 웃음) 그러니 너무 이르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어차피 한국 가면 한국 시간으로 살아야 하니까 아예 지금부터 한국 시간으로 계산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여기 와서 3시, 4시에 일어나도 하나도 피곤하지 않은 것은 한국 시간으로는 아침 7시, 8시에 일어나는 셈이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는 거예요. 여기서 괜히 시차 적응했다가 한국에 돌아가서 또 힘들여 바꾸느니 여기서도 그냥 한국 시간 그대로 생활하면 되니까 얼마나 좋아요? 

 

이렇게 해서 여행이 여러분들에게 큰 공덕이 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대중 박수)

 


 

스님의 이야기를 들으니 절로 힘이 났습니다. 몸이 편찮으심에도 오히려 대중들을 더욱 격려해주는 스님에게 모두 뜨겁게 박수를 치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아무리 고단한 상황도 어떻게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느껴질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자각할 수 있었습니다. 대중들이 마음을 보는 순례를 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강조하는 스님의 모습 속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성지순례단 B팀의 쉬라바스티 순례 일정도 모두 끝이 났습니다. B팀은 내일 새벽 3시 20분에 기상해서 상카시아를 향해 출발합니다. 스님은 이어서 C팀을 환영 마중하고 천불화현탑을 참배한 후 즉문즉설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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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댓글 43

0/200

문수화

스님 _()()()_ 옥체강건히 보존하십시요.
엊저녁꿈에 스님 많이 야위셨습니다. 합장.합장하옵니다.
스님 _()()()_

2016-01-21 22:20:21

김승희

스님 감사합니다 ~^^

2016-01-21 11:49:58

강호곤

감사합니다 나무관세음보살!!

2016-01-21 08:5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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