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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자전거를 타고 부처님이 가장 오래 머무신 곳인 사위성을 한 바퀴 순례한 후 성지순례단 B팀을 천불화현탑에서 맞이하고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새벽 3시 20분이 되자 성지순례단 A팀이 일제히 기상하여 상카시아로 떠날 채비를 했습니다. 순례객들이 모두 버스에 탑승하자 스님은 천축선원 입구에 서서 출발하는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
“순례 잘 마치고 한국에서 봐요.”
▲ 상카시아로 떠나는 A팀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있는 스님
환한 웃음으로 배웅해 주는 스님에게 순례객들도 창밖으로 손을 흔들었습니다.
아침 식사 후에는 천축선원의 대인 스님과 다실에서 차담을 나누었고, 차담을 마치고 나서는 그저께 동원정사를 답사한 것에 이어서 사위성을 답사하기 위해 길을 나섰습니다. 스님은 예전부터 사위성 전체를 둘러보고 싶었다고 합니다.
천축선원에서는 승용차를 타고 가면 어떻겠느냐고 했지만 스님은 “눈에 익힐려면 걸어다니는 것이 가장 좋지만 그러려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고, 승용차를 타면 시골길을 가지 못한다”고 하면서 자전거를 타고 천축선원을 나왔습니다. 각종 물건들을 판매하는 시장통을 지나니 한적한 시골길이 나왔습니다.
스님은 ‘자전거를 타고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이 마을 저 마을을 다녀보는 것이 꿈’이라고 자주 이야기를 하셨는데, 이렇게 잠시 여유 시간이 주어지니 “오늘 아니면 기회가 없다”고 하며 신나게 자전거 패달을 밟았습니다.
시골길을 한참 달리니 기원정사 뒤쪽으로 아주 큰 규모의 태국 절이 자리를 잡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웅장한 크기에 금칠을 해서 멀리서 봐도 한 눈에 보였습니다. 게다가 기원정사 뒤쪽의 아주 너른 땅을 모두 구입해서 일반인들의 출입을 막고 있기도 했습니다. 스님은 “성지 바로 가까이에 이렇게 큰 절을 짓는 것은 이곳을 순례하는 전세계 사람들에게 예의가 아닌 것 같다”고 하면서 아쉬운 마음을 내비쳤습니다.
▲ 거대한 규모로 지은 태국 절
사위성의 서쪽에서 시작한 자전거 순례는 사위성 북쪽에 넓게 흐르고 있는 랍띠강에 이르렀습니다. 강폭이 크고 깊이도 꽤 있어 보였습니다. 스님은 강물에 손을 담그고 땀을 식히며 주위의 지형지세를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 사위성 주위를 흐르는 랍띠강
경전에는 사위성 주위에 강이 흐르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지금은 강이 흐르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스님은 지형을 유심히 살펴본 후 “지금은 강이 이리로 흐르지만, 부처님 당시에는 사위성 바로 앞으로 강이 흘러서 해자 역할을 했던 것 같다”고 얘기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지리시간에 배운 우각호에 대해 설명해 주었습니다. 즉, 곡류하던 하천이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측면 침식이 심해져 경로가 점차 바뀌다가 결국 새로운 물길이 만들어져 예전의 물길 일부가 쇠뿔(우각) 모양의 호수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부처님 당시에 사위성 성벽을 따라 흘렀으리라 추정되는 물길의 흔적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스님의 예상대로 북쪽 성벽에는 누가 봐도 성벽을 방어하기 위한 해자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물길의 흔적이 선명히 남아 있었습니다. 더욱이 해자가 있었기 때문에 그런지 북쪽 성벽은 다른 쪽 성벽보다 높이가 비교적 낮았습니다.
▲ 사위성 앞에 자연 해자를 이루며 강이 흘렀던 흔적
스님은 자전거를 타고 사위성 성벽을 따라 계속 갔습니다. 시골길이라 너무 울퉁불퉁 해서 자전거는 자꾸 덜컹덜컹 하고 엉덩이에 불이 나는 것 같았습니다. 한 차례 자전거에서 넘어지기도 했지만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스님의 관심은 오직 사위성 성벽의 규모와 크기, 해자를 이루었던 흔적에 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 저 멀리 언덕처럼 보이는 것이 사위성 북쪽 성벽
성을 둘러싸고 바깥에 난 길이 너무 험해 결국 성 안으로 들어와서 동문 쪽으로 나가 다시 북문 쪽으로 되돌아와서 성벽을 살펴보았습니다. 멀리서 보면 그냥 언덕 같았지만 가까이 가서 보니 온통 벽돌 무더기였습니다. 조금만 땅을 파면 벽돌이 부서져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이 나지막한 언덕들은 부처님 당시에는 벽돌로 높이 쌓아 올려진 성벽이였던 겁니다.
▲ 성벽을 이루고 있었던 벽돌더미
스님은 다시 사위성의 남문 쪽을 향했습니다. 길이 험하면 자전거에서 내려 걷기도 하고, 평탄한 길이 나오면 다시 자전거에 올라타기를 반복했습니다.
이렇게 사위성의 서문, 북문, 동문, 남문을 따라 한바퀴를 모두 둘러보고 나니 꼬박 3시간이 걸렸습니다. 스님은 “사위성이 정말 크지? 고구려의 국내성이나 신라의 반월성에 비해 이 사위성이 10배는 더 큰 것 같다”며 발해의 상경용천부 보다도 훨씬 큰 것 같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리고 “자전거를 타지 않고 걸어갔으면 아마 하루종일 걸어도 못 둘러보았을 것”이라며 웃음을 보였습니다.
사위성 순례를 무사히 마치고 스님이 천축선원으로 자전거를 타고 들어오자 대인 스님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반갑게 스님을 맞이해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몇 년 전에는 사위성을 혼자서 순례하던 한국인이 피살을 당한 채 시체로 발견된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스님은 “길이 험해서 엉덩이가 얼마나 아픈지...” 하면서 천축선원에서 차려준 늦은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식사 후에는 휴식을 취하며 성지순례단 B팀이 도착했다는 연락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네팔에서 인도로 넘어오는 국경에서 이미그레이션을 통과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려서 오후 3시에 도착 예정이던 B팀은 5시 30분이 되어서야 쉬라바스티 천불화현탑에 도착했습니다.
먼 길을 달려온 순례단을 향해 스님은 환한 웃음으로 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 버스에서 내린 순례객들은 가사를 수하고 향을 피운 채 길게 줄을 지어 천불화현탑으로 올라갔습니다.
▲ 천불화현탑
먼저 탑을 바라보면서 다함께 저녁예불을 올렸습니다. 해가 점점 지고 있는 가운데 순례객들의 “지심귀명례” 하는 소리가 저녁 노을과 함께 은은히 울려퍼졌습니다.
예불을 마치고 나서 스님은 순례단을 위해 간절한 목소리로 축원 및 발원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저희 한국에서 온 정토행자 대중 일동은 부처님의 10대 성지를 순례하는 중 오늘 이렇게 쉬라바스티 사위성에서 부처님이 천불로 화현하신 천불화현탑에 예불하고 찬탄하고 참회하고 발원하옵니다.
이와 같이 천불화현탑을 순례하고 예불 올린 공덕으로 순례 대중들 모두 건강하고 마음이 맑고 행복하고 자유로워 부처님 가르침대로 해탈과 열반을 성취할 수 있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이와 같이 쉬라바스티 천불화현탑을 참배한 인연 공덕 우리가 태어나고 자란 대한민국에 회향하오니 남북 간에 긴장이 해소되고, 화해하고 협력하여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없는 평화가 정착되고 남북이 서로 상생하는 통일이 속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천룡팔부 신중님들은 옹호하여 주옵소서.
오늘 이와 같이 천불화현탑 순례 참배 인연 공덕 먼저 돌아가신 조상 영가님들께 회향하오니 조상 영가님들 뿐만 아니라 유주무주 모든 고혼들 또한 모두 왕생극락케 하옵소서.
오늘 저희의 이런 발원을 제불보살님들께서는 증명하여 주옵시고 천룡팔부 신중님들은 이 발원이 성취될 수 있도록 옹호하여 주옵소서.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지난번 바라나시에 이어서 다시 한번 순례를 무사히 마칠 것과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간절히 발원하는 스님의 목소리를 듣고 많은 순례객들이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천불화현탑 참배를 마치고 천축선원으로 들어온 순례단은 곧바로 저녁 식사 시간을 가졌습니다. 천축선원에서 따뜻한 국을 준비해 주어서 맛있게 식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저녁 7시 30분부터는 천축선원 주지 대인 스님을 모시고 저녁 법회가 열렸습니다. 대인 스님은 순례단을 환영해 주면서 짧은 인사말로 법문을 대신해 주었습니다.
천축선원 주지 대인 스님은 그동안은 주로 순례객들을 위한 일을 많이 해왔는데, 이제는 지역의 가난한 주민들을 위해 집도 지어주고, 아픈 사람들을 위해 보건소를 운영해서 치료도 해주고, 새해에는 학교와 도서관도 완공해서 3월에 개교를 한다고 합니다. 또 인도불교 부흥을 위해 승려들 교육 문제를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도 스님과 늘 의논하고 같이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이런 대인 스님의 활발한 활동에 대해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이어서 순례객들이 그동안 순례를 하면서 궁금한 점에 대해 묻고 답하는 즉문즉설 시간이 펼쳐졌습니다. 스님이 “무엇이든 물어보세요”라고 하자 여러 사람이 손을 들고 질문을 했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왜 인도는 부처님이 태어난 나라인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가난하고 평화롭지 못한지 물었던 내용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합니다. 인도를 다니다보면 왜 이 사람들은 아직도 이렇게 가난하게 살아가는지 의문이 드는데 스님의 답변을 들으니 명쾌하게 이해가 되었습니다.
“인도는 부처님이 태어난 나라잖아요. 부처님과 같은 위대한 성인이 난 곳이면 당연히 우리들보다 잘 살고, 평화롭고, 자유롭고 해야 될 텐데 왜 우리보다 못 사는 나라가 되었는지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60년 전에 이보다 훨씬 못 살았어요. 일제강점기 때 우리 나라 사람들 사는 모습을 찍어놓은 사진을 보면 인도의 불가촉천민보다 못합니다. 양반과 상놈 차별도 더 심했고, 사는 것도 더 못 살았어요.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아이를 낳으면 소위 ‘반타작’을 했어요. 저도 그래서 호적 나이가 실제 나이보다 두 살 어립니다. 대부분 두세 살 안에 죽기 때문에 호적에 빨간줄 긋기 싫어서 그냥 두었다가 동생을 보면 비로소 호적에 올려줬어요. 그러면 어느 하나가 죽더라도 빨간줄 안 긋잖아요. 그래서 저희 집은 죄다 형의 호적상 나이가 동생의 나이와 똑같습니다. 동생이 안 생기더라도 보통 두세 살까지는 키워보고 그때까지 안 죽어야 비로소 호적에 올렸어요. (모두 웃음)
그래서 첫째, 질문자는 지금의 한국과 인도만 봐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중국도 100여 년 전에는 자기들 보다 훨씬 작은 나라인 일본에게도 먹힐 정도로 형편없었지만 지금은 다르잖아요. 앞으로 20년 뒤에는 중국이 한국보다 더 나아질 수도 있어요.
이게 제행무상입니다. 인도도 부처님이 출현하시고 아쇼카왕 시대에는 전 세계에서 최고 가는 문명을 자랑했습니다. 내일 가보시면 알겠지만 2,600년 전에 지어진 사위성의 크기가 경주 반월성의 10배는 될 만큼 어마어마합니다. 여긴 굉장한 나라예요. 그러나 모든 나라는 흥망성쇠를 거듭하잖아요. 인도도 그래요. BC 3세기 아쇼카왕 때는 세계 최고의 문명을 가졌고, 그 이후의 쿠샨왕조나 굽타왕조 시대까지도 문명의 규모며 기술 수준이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습니다. 16세기에도 무굴제국이라는 무슬림 대제국을 건설했죠. 그러다 무굴제국이 망하고 서구의 침략을 받으면서 피폐해진 거예요.
그런데 지금 인도가 다시 일어나고 있어요. 이제 막 잠을 깨서 일어나는 중입니다. 그러니 50년 뒤에 평가하면 ‘인도는 이렇게 잘 사는데 한국은 왜 이렇게 못 사나?’라고 할 수도 있어요. 우리는 남북 간에 긴장이 고조되어서 전쟁이라도 일어난다면 끝장이에요. 원자력발전소 몇 개 터지고, 북한 핵 몇 개 터지면 형편 없어지는 건 순식간입니다. 모든 나라가 흥망성쇠를 거듭하는 가운데, 우리는 최근에 4~50년 전부터 지금까지 흥하는 국면에 놓여 있었고, 인도는 그동안 쇠하는 국면에 있다가 이제 흥하는 쪽으로 막 돌아선 참이라 그래요.
두 번째로, 우리가 순례하는 이 지역이 힌두스탄 대평원인 것을 감안해야 합니다. 이 지역은 농업이 중심인 시대에는 최고로 문명이 발달했던 지역입니다. 그러나 농촌이라는 것은 보수적이잖아요. 농업에 안주하기 때문에 카스트제도도 남아 있고, 여러 가지가 쉽사리 변하지 않아요. 그런데 인도의 산업화는 이 힌두스탄 평원에서 일어나는 게 아니에요. 남쪽의 벵갈로르, 서쪽의 뭄바이 등지에서는 이미 굉장히 소득이 높습니다. 미국에 이민 와서 사는 한국사람과 인도사람을 비교해보면 인도사람의 소득이 훨씬 높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똑같이 이민 와서 사는 인도사람은 저렇게 소득 수준이 높은데 한국사람은 기독교인이라서 저러나?’ 라고 이야기할 수 없고, ‘미국에 오래 산 흑인이나 스페니쉬는 왜 새로 이민 온 한국 사람보다 못 사는 게 천주교를 믿어서 그러나?’ 라고 할 수 없어요. 이렇게 흥망성쇠를 거듭하고 있는 중에 단편적인 것만 보고 비교하면 안 됩니다.
그런 사고방식이 잘못된 사고방식이에요. 지금의 모습만 보고 이야기하는 것은 일부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믿는 나라는 잘 사는데 왜 불교 믿는 나라는 못 사느냐?’라고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기독교 믿는 나라 중에는 필리핀도 있고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도 있잖아요. 반면 기독교 안 믿는 나라인 일본은 장기 불황이라고 하면서도 얼마나 잘 살아요?
그러니 특정한 비유를 그렇게 들어서 이야기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남자가 여러 여자를 데리고 살고 싶으면 염소를 비유로 들고, 여자가 여러 남자를 데리고 살고 싶으면 벌을 비유로 들면 되잖아요. 일부일처 제도를 주장하려면 하늘에는 태양이 하나고 달이 하나인 것을 가져와 비유하면 돼요. 비유라는 것은 이렇게 위험합니다. 전부 자기가 필요할 때 자의적으로 갖다 붙이는 것이거든요. 공자님 같은 사람이 태어난 중국도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에는 아편이다 뭐다 해서 피폐했는데, 그렇다고 그게 다 공자님 책임일까요? (대중 웃음)
그러니 그런 비유와는 관계가 없고, 다만 우리 모두는 흥망성쇠를 거듭하고 있는 중입니다. 부처님이 인도에 태어났다고 해서 인도가 내내 부강하라는 법은 없어요.
세 번째는, 불법은 내가 어떻게 행복하고 자유로워지는가에 대한 것이지 물질 문명이 얼마나 발달하는가에 대한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자꾸 그렇게들 개념을 해석하려 듭니다. 그러니 인도사람들이 이렇게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한국사람들보다 더 행복하다고 하면 ‘이건 부처님 덕이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돼요. ‘한국은 경제력이 세계 13위이고 1인당 GDP가 28위인데도 왜 행복지수는 117위냐?’ 하고 물으면, 인도사람들은 ‘한국사람들이 힌두교를 안 믿어서 그렇다’ 라고 할 겁니다. 비난할 의도를 가진다면 ‘기독교를 많이 믿으니 그렇지’라고 이야기할지도 몰라요. (모두 웃음)
그러니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옳지 않은 비유이고 사고방식입니다. 인도 안에서도 우리가 다니는 지역은 농경사회를 기반으로 하는 지역이기에 현재의 산업화 과정에서는 가장 낙후한 지역이자 봉건 잔재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지역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당시에는 여기가 가장 문명이 발달한 지역이었어요. 농경사회에서는 비옥한 토지를 갖춘 지역이 유리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농경에 기반을 둔 지역이 낙후하는 것이 전 세계적인 추세입니다. 우리도 지금 그렇잖아요. 비옥한 토지를 자랑하는 전라도 지역이 오히려 낙후되었습니다. 옛날에는 전라도가 훨씬 잘 살았어요. 음식만 봐도 경상도 음식은 짜고 먹을 게 별로 없는데 전라도 음식은 풍성하잖아요. 물자가 풍부했기 때문에 그래요. 그렇게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질문자는 “네, 명쾌하게 이해가 되었습니다.” 하며 웃으면서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동안 순례를 하면서 구걸하는 아이들, 수많은 병자들을 길거리에서 보았는데, 스님의 답변을 들으니 ‘그렇구나’ 하고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이 외에도 순례객들은 정말 많은 질문들을 했습니다. 스님은 모든 질문에 대해 정성을 다해 답변을 해주었습니다.
약 2시간 동안의 법회가 모두 끝나자 다시 한 번 열정적으로 법문을 들려준 스님에게 모두 큰 박수를 보냈고 사홍서원을 끝으로 밤 10시가 다 되어서 법회를 마쳤습니다.
스님은 “내일은 새벽부터 하루 종일 사위성 주위를 걸으며 순례를 하기 때문에 피곤할 수 있으니 오늘은 푹 주무세요” 라고 하면서 법회를 마쳤습니다.
순례객들은 일찍 잠들러 숙소로 돌아갔고, 스님은 늦게까지 원고 교정을 보다가 오늘 일정을 마쳤습니다. 내일은 새벽 4시 30분에 기상해서 천축선원을 출발해 기원정사까지 행선을 하며 걷고, 오전 내내 기원정사에서 시간을 보낸 후, 오후에는 앙굴리말라 탑과 수닷타 장자의 탑을 참배하고, 마지막으로 베사카 부인이 지은 동원정사를 순례한 후 숙소로 돌아올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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