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6.1.16 (인도 11일째) 성지순례단 A팀 기원정사 순례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정토회 성지순례단 A팀을 이끌고 부처님께서 성도 후 가장 오래 머무신 곳인 쉬라바스티에서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순례했습니다. 

 

새벽예불 후 160여 명의 순례단은 가사를 정갈히 수하고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천축선원을 출발하여 기원정사까지 한 줄로 서서 천천히 걸었습니다. 앞뒤 간격이 떨어지지 않게 왼발 오른발을 알아차리며 행선을 하면서 기다랗게 줄을 지어 새벽 안개를 갈랐습니다. 

 


 

천이백 비구가 기러기떼처럼 긴 행렬로 탁발을 하러 갔던 것처럼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정진을 하듯이 걷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과 같았습니다. 

 


 

가는 도중 어느덧 날이 밝아 자전거를 탄 주민들도 보이고, 어린 아이들이 꽃을 팔기도 했습니다. 스님은 한 인도인이 준 꽃을 한송이 들고 기원정사로 들어섰습니다. 

 

아침이 밝자 공원처럼 깔끔하게 꾸며놓은 기원정사가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순례단은 향에 불을 붙이고 긴 행렬을 이루며 기원정사 곳곳을 스님을 따라 물 흐르듯이 밟아보며 부처님과 당시 제자들의 숨결을 느껴보았습니다. 

 


 

부처님이 머무셨다는 자리에 세워진 ‘간다 쿠티’라는 곳을 바라보며 멈춰서서 삼배를 한 후 법회가 열리는 공터로 이동해 예불을 정성껏 올렸습니다. 부처님께서 가장 오래 머무셨다는 바로 이곳에서 예불을 올린다니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감격스러웠습니다. 

 


 

예불을 마치고 나서 스님은 간절한 목소리로 순례단을 위해 발원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스님은 성지 어느 곳을 가든 항상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발원하시는데 오늘따라 머나먼 이국 땅에서 다시 듣는 간절한 기도는 지금의 남북관계를 떠올릴 때 더욱 가슴이 아리는 것 같았습니다. 

 


 

이어서 순례단이 모두 자리에 앉자, 스님은 기원정사의 창건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주었습니다. 너무나 생생하게 묘사해 주어서 벽돌 더미에 불과한 유적지가 영화를 보듯이 재현되는 기분이었습니다. 

 

“여기가 기원정사입니다. 인도 말로는 ‘제따 바나’라고 해요. ‘제따’는 사람 이름이고 ‘바나’는 숲이라는 뜻이에요. 우리말로는 ‘기원정사’, 금강경에는 ‘기수급고독원’이라고 표기된 곳입니다. 

 


 

춥지만 그래도 여기 오니까 다른 성지보다는 아늑하죠? 다른 곳은 그냥 길가 같은데 여기는 사찰 같은 기분이 들어요. 부처님이 처음으로 기증받으신 절이 죽림정사입니다. 죽림정사에서 본 연못 이름이 칼란다카 연못이에요. 부처님이 성도 후 왕사성에 머물면서 교화활동을 왕성히 하셨는데 교화 3년째 되던 해에 칼란다카 연못을 부처님께 기증한 사람이 칼란다카 장자입니다. 장자는 요즘 말로 하면 사업가에 해당합니다. 사업을 해서 왕사성에서 손꼽히는 큰 부자였던 이 분은 부처님법에 귀의해서 아주 독실한 신자가 되었습니다. 

 

칼란다카 장자는 사위성에 사는 수닷타 장자와 사업상 서로 교류도 있고 개인적으로도 절친했습니다. 수닷타 장자가 왕사성에 가면 친구인 칼란다카 장자의 집에 머물면서 대화도 나누고 사업도 함께 했으므로 늘 아주 반갑게 맞이해줬어요. 그런데 이번에 왕사성을 방문했을 때는 친구 본인이 안 나오고 하인이 나와서 주인이 좀 바쁘니까 응접실에서 기다리라고 안내하는 거예요. 한참을 기다린 뒤에야 친구가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면서 헐레벌떡 오는 거예요. 그래서 조금 섭섭했는지 수닷타 장자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뭐가 그리 바쁜가? 아들딸 시집 장가라도 보내는가?’

‘아이고, 내가 아들 장가보내고 딸 시집보내는 그런 일로 자네같이 귀한 손님을 기다리게 하겠는가?’ 

‘그러면 그것보다 더 큰 일이 뭐가 있어서 그러나?’

‘부처님이 내 식사 초대에 응하셔서 내일 우리 집에 식사하러 오신다네. 그래서 부처님과 일행분들께 대접할 음식을 일일이 감독하고 같이 준비하느라 바빴어.’

‘부처님이라니? 아니, 이 세상에 부처님이 출현했단 말인가?’

‘아니, 자네는 그것도 몰랐는가?’

 

 

부처님은 그때 이미 왕사성에서는 유명하셨어요. 여러분들이 가서 봤듯이 빔비사라왕, 사리푸트라, 목갈리나, 마하가섭 존자 등이 모두 귀의해서 이미 천이백오십 대중이 성립했을 때이니까요. 그러나 사위성에서는 아직 소식을 듣지 못했기에 수닷타 장자는 친구에게서 부처님의 설법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친구의 이야기만 듣고도 감복을 한 거예요. 친구가 ‘자네는 정말 복이 많네. 부처님 만나기가 쉽지 않은데 내일 여기에서 부처님을 친견할 수 있어.’라고 말한 후 늦은 밤이라 자러 들어간 뒤에도 수닷타 장자는 흥분이 되어서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잠을 설치고 새벽녘 자욱한 안개 속에서 집을 나와 산책을 하다가 나무 밑에 누가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어요. 앉아 있는 자세가 너무나 편안하고 여법해서 저 분이 부처님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절을 하면서 ‘혹시 부처님이 아니십니까?’라고 했더니 ‘그렇소. 내 이미 당신을 기다린 지 오래요.’ 이러는 거예요. 누가 처음으로 인사하는데 부처님이 ‘내 이미 당신을 기다린 지 오래 됐소’라고 답한 사람이 마하가섭존자를 비롯해 모두 세 사람인데 수닷타 장자가 그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법을 청했고, 법을 듣고 수닷타 장자가 초견성(初見性)을 했습니다. 금강경에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이런 표현이 나오지요? 바로 그 수다원, 즉 첫 번째 단계의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걸 빨리어로는 ‘소따빠나’라고 해요. 

 

초견성을 얻은 수닷타 장자는 너무너무 기뻐서 부처님을 사위성으로 초대했습니다. ‘부처님, 저에게 한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저희 나라에도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을 텐데 저희 나라로 와 주십시오.’ 이렇게 초대하자 부처님이 침묵으로 승낙하셨어요. 

 

그래서 수닷타 장자는 장사고 뭐고 다 그만두고 부랴부랴 말을 타고 사위성으로 돌아와 부처님이 3개월 후에 와서 머무를 처소, 즉 부처님과 1250명의 비구 대중이 머무를 장소를 마련하러 나섰습니다. 죽림정사를 이미 봐서 모델로 삼을 수 있었어요. 수행자의 처소는 성에서 너무 가까우면 번다하고, 성에서 너무 멀면 걸식하거나 생활하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성으로부터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 즉 조용하면서도 비교적 마을에 가까운 곳이 되어야 합니다. 왕사성의 북문에서 죽림정사까지의 거리랑 사위성의 서문에서 기원정사까지의 거리가 거의 같습니다. 성문 밖으로 500~700미터 정도, 즉 1킬로미터가 채 안 되는 위치에요. 

 


 

주위를 살펴보니 여기가 적격이라 땅 주인을 알아봤더니 이 나라의 태자인 거예요. 이 큰 제국의 왕자가 소유한 땅이니까 당연히 팔지 않겠죠. 우리 같으면 안 되겠다고 바로 포기했겠지만 수닷타 장자는 이 좋은 숲을 반드시 부처님의 처소로 마련해드리고 싶었기에 태자를 찾아갔어요. 이 태자 이름이 ‘제따’입니다. 한자로는 ‘기타’라고 하고 빨리어로는 ‘제따’예요. 태자에게 찾아가서 서문 밖에 있는 이 땅을 사고 싶다니까 안 판대요. 그러자 장자가 ‘돈은 얼마든지 드리겠소’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백지수표를 준 거예요. 

 

그럴 때 바로 싫다고 거절하지 않는 게 당시의 예법이었습니다. 바로 ‘안 됩니다’라거나 ‘싫습니다’라는 말을 못 해요. 뭔가 거기에 대한 답을 해줘야 합니다. 그래서 ‘얼마든지 주겠소’라고 하니까 태자가 안 팔겠다는 뜻은 보여야겠고 답은 해야 하니까 ‘그러면 이 땅에 그 면적만큼 황금을 까시오’라고 답한 겁니다. 사실상 안 팔겠다는 뜻으로 가격을 터무니없이 매긴 거예요. 그럴 때 ‘그건 너무 비쌉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 하지 말고 실제로 받을 금액을 말하세요’라고 할 수 없었어요. 이미 자기가 얼마든지 좋다며 백지수표를 냈기 때문에 가격 흥정은 더 이상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장자가 ‘알았습니다’ 이러고 갔어요.

 

태자는 장자가 포기하고 돌아간 줄 알았지만 수닷타 장자는 그 값으로 사려고 마음을 먹은 거예요. 그래서 금고를 열어 금화를 죄다 마차에 실어와 숲에다 깔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부자라고 해도 금으로 땅을 덮어봤자 얼마나 덮겠어요? 숲 입구에 조금 깔고 나니 금이 다 떨어져 버렸어요. 태자가 와서 보니까 턱도 없잖아요. 그래서 속으로 ‘그것 봐라, 네가 돈 좀 있다고 까불더니. 이제 안 사겠지’라고 생각하고 이제 포기하는 거냐고 물었더니 아니래요. 그러더니 이번에는 자기가 가진 어음을 전부 금으로 바꾸고 비밀창고에 두었던 돈까지 다 꺼내왔어요. 땅에 금을 까느라 친구들에게 빌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졸지에 집도 다 팔고 장자는 하루 아침에 거지가 됐어요. 그래도 턱없이 조금밖에 못 깔았어요.

 

수닷타 장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개중에는 이런 설도 있어요. 그렇게 돈이 다 떨어졌는데도 장자는 포기를 하지 않고 구걸을 했어요. 요즘 말로 하면 보시 받으러 다녔다는 겁니다. 돈을 어쩌는지 보려고 태자가 금화를 한 닢 줬더니 거지가 된 장자가 그 금화를 가지고 바로 숲으로 달려가서 다시 땅에 깔았다고 합니다. (모두 웃음) 

 


 

그 모습을 보고 감동한 태자가 ‘도대체 무엇을 하려고 이 땅을 이렇게까지 구하려 하는가?’라고 물었더니 장자가 ‘부처님과 제자들이 머무실 땅을 구하려고 그럽니다’라고 답했어요. 태자가 그 답을 듣고 더 놀랐어요. 사업하는 사람이 이토록 탐을 내는 걸 보고 땅에 대단한 보물이라도 묻혀 있는 줄 알았는데 사업과는 전혀 관계없고 수행자들이 머물 처소를 마련하려고 그런다잖아요. 

 

도대체 그 부처님이 어떤 사람인데 당신이 이렇게까지 하느냐고 물었더니 장자가 부처님이 어떤 분인지 설명했습니다. 설명을 들은 기타 태자가 수닷타 장자의 정성에도 감동하고 부처님에 대해서도 감동해서 나머지 땅을 기증해준 겁니다. 돈을 안 받고 준 건 아니에요. 지금까지 낸 돈만 받고 나머지 땅을 다 그냥 내어준 겁니다. 받은 금액은 원래 제시했던 금액의 10분의 1도 안 되지만 사실 땅값은 받을 만큼 다 받은 셈이에요. 그러나 제시한 금액에는 턱없이 못 미치기 때문에 이 숲은 기타 태자가 기증한 셈이 된 겁니다. 

 

기타 태자가 기증한 땅에 급고독 장자가 정사를 지었다고 해서 기원정사를 ‘기수급고독원’이라고도 부릅니다. 지금 둘러보면 건물터가 많지만 이 건물들은 모두 200~300년 지난 뒤에 지은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건물을 짓지 않았고, 지어도 기껏해야 초막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수닷타 장자가 제따바나를 얻어서 부처님과 제자들이 머무를 처소를 마련했고, 부처님은 죽림정사에 이어 두 번째 정사를 기증받았습니다. 수닷타 장자의 기원정사 창건 이야기는 여러 설화에서 두고두고 회자되었습니다. 박물관에 가보면 금을 실은 수레와 땅바닥에 깔린 금을 묘사한 그림이나 벽화가 수없이 많아요. 수닷타 장자는 교단에 기여한 정도는 물론이고 신심의 깊이와 수행 정도에서도 부처님의 10대 제자에 버금갑니다. 

 

그런데 이곳 사위성은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으로는 강국이었지만 신흥강국이어서 문화수준은 떨어지는 편이었어요. 그래서 이 지역에는 소위 삿된 외도들이 판을 치고 기복이 성했습니다. 누가 신통을 보이면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모이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바른 정법에 귀의하기가 어려운 상태였어요. 그래서 초기에는 이곳에서 교화하기가 좀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부처님과 불법을 이해하게 되면서 나중에는 여기에서 많은 출가자들과 후원자들이 나타납니다. 이 지역 사람들이 부처님께 ‘유행을 하실 때는 몰라도 우기 때 안거는 여기서 해주시면 좋겠습니다’라고 청했어요. 그래서 부처님이 45년 교화 활동 중 24안거를 여기서 했다고 해요. 이곳 기원정사에서 19안거를 하고 베사카 부인이 지은 동원정사에서 다섯 번 혹은 여섯 번의 안거를 해서 총 24안거 혹은 25안거를 했다고 합니다. 동원정사에 머무신 회수는 기록이 약간 차이나지만 기원정사에서 19안거를 했다는 기록은 일관됩니다. 전체 안거의 절반 이상을 사위성에서 머무르신 거예요.

 

이런 걸 보면 부처님이 이곳 사위성과 기원정사를 얼마나 아꼈는지 알 수 있어요. 어제 우리가 하루 만에 왔을 정도로 여기는 카필라성에서 가깝습니다. 게다가 이곳 사람들은 언어나 종족이 석가족과 거의 같은 계열이어서 문화도 유사점이 많았을 겁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부처님이 우리나라 사람인데 미국에 가서 이름을 날리다가 북경에 와서 활동하시는 것과 비슷해요. 북경은 서울과 가깝기도 하고 문화나 언어, 음식 같은 데서 여러 가지 유사성이 많으니까 안거는 미국 뉴욕보다는 중국 북경 쪽에서 많이 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곳은 한국 불자들에게 특별히 더 유명합니다. 첫째, 금강경이 설해진 장소라고 알려진 곳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3.1독립운동의 불교계 대표이신 백용성 스님께서 ‘4대 성지를 가꾸어라’라고 하시면서 하나를 더 보태셨어요. 4대 성지는 부처님이 태어나신 곳, 도를 이루신 곳, 설법하신 곳, 열반하신 곳인데 여기에 부처님의 장기 주석지인 사위성의 기원정사를 잘 가꾸라는 말씀을 더하셨습니다. 8대 성지나 10대 성지가 아니라 이렇게 5대 성지를 지칭하셨어요.

 


 

이렇게 기원정사는 절이 지어진 계기가 아주 신심 깊은 재가 신자에 의해서 이루어졌어요. 또 부처님이 가장 오래 머무신 곳입니다. 가장 오래 머무셨으니까 설법도 여기에서 가장 많이 하셨겠죠. 그래서 경전을 보면 설법한 장소가 제따바나일 때가 가장 많습니다. 아함경 내용 중 거의 절반 가까이가 사위성 제따바나에서 설해졌어요. 금강경에서도 경이 설해진 장소가 제따바나, 즉 기원정사로 되어 있습니다. 조계종은 특히 금강경을 소위 경전으로 삼기 때문에 불자들이 늘 금강경을 독송하잖아요. 그래서 특히 한국 불교인들에게는 이 기원정사가 더 소중하게 다가옵니다. 4대 성지를 제외하면 여기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어요.”

 

스님의 실감나는 이야기에 순례단은 흠뻑 몰입되었습니다. 특히 수닷타장자가 기원정사를 마련한 것이 단순한 기부가 아니라 파산이 될 정도로 온갖 정성을 기울인 것이였다는 말씀은 새삼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경전을 읽을 때와 달리 스님의 육성으로 직접 들으니 수닷타장자의 신심이 얼마나 컸는지 가슴으로 다가왔습니다. 

 

이어서 스님의 설명이 경전 속에서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 또 이곳 사위성에서 일어난 수많은 부처님의 교화 사례들을 경전으로 읽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특히 이곳 사위성은 금강경이 설해진 곳으로 한국 불자들에게는 널리 알려진 곳인데, 금강경도 함께 독송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금강경이 설해진 곳에서 금강경을 직접 읽으니 이루 말할 수 없는 감격스러운 기분이 들었습니다. 

 

경전 독송을 마치자 아침 안개가 짙게 드리우면서 제법 한기가 느껴졌습니다. 스님은 추위를 느끼는 대중들을 배려하며 따뜻한 국이 준비되어 있다고 하면서 식사 시간을 주었습니다. 너무 추운지 어떤 조는 둥글게 원을 만들어 방한 체조를 하기도 해서 큰 웃음을 주기도 했습니다. 

 


▲ 추위를 이기고자 방한 체조를 하는 순례객들

 

천축선원에서 배달해 온 따뜻한 된장국은 추위를 녹이기에 충분했고 맛도 일품이었습니다. 맛있게 식사를 하고 나니 드디어 햇살이 비치기 시작했습니다. 

 


 

 


 

이어서 다시 법회 장소에 모여 스님의 설법이 이어졌습니다. 오늘은 하루 종일 이렇게 쉬라바스티에 머물며 스님의 법비를 맞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스님은 이곳 사위성에서 있었던 갖가지 교화 사례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 중에서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이야기들도 많았는데 그 이야기들이 모두 이곳 사위성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하니 더 귀를 쫑긋 세우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 말리카부인이 이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소중하다고 이야기한 대목과 프라세나짓왕과의 대화 내용은 무척 감명 깊게 다가왔습니다. 

 

“옛날의 왕조 사회에서 백성에게 ‘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것, 제일 귀한 게 누구냐?’리고 물으면 왕이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또 결혼한 부인에게 ‘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게 누구냐?’라고 물으면 남편이라고 대답해요. 그런데 이 여인은 굉장하지요? 남편이 왕이 아니어도 남편이라고 대답해야 하는데 하물며 남편이 왕이면 당연히 ‘당신입니다’라고 해야 할 텐데 ‘나 자신입니다’라고 대답한 거예요. 옛날에 이런 말 하면 그대로 죽임을 당할 일이에요. 그런데 죽이지 않은 왕도 대단하죠. 그 말을 듣고 부처님께 여쭈니까 ‘그렇다. 이 세상에서 그 무엇이 소중하다 해도 자기 자신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라고 답하신 것은 아주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프라세나짓왕과 부처님의 대화 중 아주 유명한 대화가 있습니다. ‘훌륭한 왕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렇게 프라세나짓왕이 부처님께 여쭸어요. 그러면 보통 군대가 강해야 한다는 둥의 이야기를 주로 할 텐데,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백성 사랑하기를 외아들 사랑하듯이 하십시오.’

 


 

모든 산천초목까지 다 왕의 소유였던 절대왕정 시대에 백성을 외아들 사랑하듯이 하라고 말한 거예요. 전 세계 어떤 사람도 절대 왕정 시대에 이렇게 이야기한 사람이 없어요. ‘가난한 자를 돕고 외로운 자를 위로하라. 그러면 굳이 왕이 복을 구하기 위해서 고행을 할 필요가 없다’라고도 하셨고, ‘왕이 만약에 지혜가 없다면 한 나라를 바르게 이끌기 어려운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자기 생명도 제대로 유지하지 못 한다’ 이런 말씀까지 하셨어요. 대통령은 국민의 머슴이라고 하는 오늘날의 주권재민 시대에도 청와대에 가서 이렇게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백성들 하나 하나의 고통을 자기 자식의 고통처럼 보고 대하라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도 우리 사회를 보면 세월호 사건이든 강정마을이든 대통령이 정말 자기 자식이며 자기 가족의 일처럼 생각해서 풀어나가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잖아요. 그러니 붓다가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외에도 스님은 부처님이 고통받는 사위성 대중들을 교화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들려주었습니다. 옛날 이야기를 듣듯 눈을 감고 수신기로 들려오는 스님의 목소리는 마음까지 편안하게 해주었습니다. 

 

이어서 스님은 이번 순례객 중에서 어제 한국에서 아버님이 돌아가신 분이 있다고 하면서 다함께 천도재를 같이 지내주자고 했습니다. 순례를 포기하고 곧바로 한국으로 돌아갈 수도 있는 문제이지만 스님은 부처님의 성지인 바로 이곳에서 천도재를 함께 지내줄테니 순례를 함께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갈 것을 제안하면서 상주를 위로하고 천도재를 여법하게 지내주었습니다. 

 


 

“영가시여,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냄새 맡을 수도 없고, 만져볼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지금에 이르러 영가의 본래 면목이 무엇인고? 

 

영가시여, 만약에 영가가 살아 생전에 아무리 좋은 일을 했다 하더라도 죽어가는 생명을 한없이 살리고, 가난한자를 한없이 돌보고, 괴로워하는 자를 한없이 위로하고, 진실을 말하고 위로한 온갖 공덕을 쌓았다 하더라도 지금에 이르러 이 법사의 질문에 답할 수 없다면 그것은 꿈속에서 지은 공덕과 같아 해탈 열반에 이르지 못할지니. 영가시여, 살아 생전에 사람을 해치고, 남의 물건을 뺏고, 남을 괴롭히고, 거짓말을 하고, 욕설을 하고, 술 먹고 취했다 하더라도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이 법사의 질문에 능히 답을 할 수 있다면 갖가지 모든 죄업이 꿈 속에서 저지른 것과 같아 능히 눈을 뜨고 꿈을 깨면 그 죄업이 흔적조차 없는 것과 같습니다. 영가시여, 영식을 오롯이 하여 이 법사의 질문에 능히 답해 보시오. 

 

영가가 이 법사의 질문에 단박에 깨달음을 얻으면 즉시 해탈과 열반의 세계로 나아갈 것이지만, 만약 영가가 이 질문에 단박에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면 오늘 여기 모인 청중들이 부처님께서 장기 주석하신 이 성스러운 사위성 기수급고독원에서 영가를 위하여 해탈주를 독송할테니 이 해탈주를 잘 듣고 저 아마타 부처님이 계시는 극락세계로 왕생하시어 아미타 부처님을 친견하고 아미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어 마침내 해탈열반을 성취하소서.”

 

스님의 설법이 끝나자 대중들은 아버님 상을 당한 순례객을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해탈주를 함께 독송해 주었습니다. 상주가 된 분은 법을 설해준 스님과 대중들에게 삼배를 하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이어서 자유시간이 주어졌습니다. 그동안 일정에 쫓기어 성지에 도착해도 예불 올리고 설명이 끝나면 곧바로 버스에 다시 탑승하기 바빴는데, 오늘은 시간이 많이 주어져서 기원정사 곳곳을 거닐어보고, 혼자서 정진도 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순례객들은 아난존자가 부처님에게 물을 떠다주었다고 하는 우물, 부처님이 안 계실 때 부처님을 대신해서 모셨다고 하는 보리수나무, 부처님이 열아홉 발자국 행선을 했다고 하는 곳 등을 천천히 거닐어 보기도 하고, 부처님의 처소인 간다 쿠티 앞에서 108배 절을 하거나 명상을 하기도 했습니다. 

 


▲ 부처님이 머무셨던 처소, 간다 쿠티

 


▲ 부처님이 열아홉 발자국 행선을 했다고 하는 곳

 

그리고 대중들이 정진을 하고 있는 사이 스님은 순례단 전체를 위해 일대 일 사진을 찍어 주었습니다. 순례객들에게는 이 사진 한 장이 평생을 두고 남을 기념이 될 것입니다. 마치 대학 졸업 사진을 찍듯이 모두들 가슴 설레여 하며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습니다. 

 


▲ 스님과 일대 일로 기념사진을 찍는 시간

 

이렇게 기원정사에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낸 후 순례단은 다시 장구한 행렬을 이루며 부처님의 제자들이 탁발을 하기 위해 걸어갔던 그 길을 따라 사위성으로 들어갔습니다. 

 

사위성 서문을 지나 곧이어 앙굴리말라스투파, 수닷타장자의 스투파가 차례로 나타났습니다. 먼저 앙굴리말라스투파를 참배한 후 스님으로부터 살인자 앙굴리말라가 어떻게 부처님을 만나 교화가 되었고, 그의 마지막 죽음은 어떠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함께 그에 관련된 경전을 독송했습니다. 

 


▲ 앙굴리말라스투파

 

또 수닷타 장자의 스투파에서는 탑 위까지 줄을 지어 올라가 참배를 한 후 탑을 향해 삼배를 올렸습니다. 

 


▲ 수닷타장자 스투파

 

이어서 다시 사위성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습니다. 이 코스는 27번째 성지순례를 오면서 처음으로 가보는 길입니다. 어제 스님이 답사를 마치고 새롭게 만든 코스입니다. 

 

사위성 안으로 들어가니 황량한 정글이 나타났습니다. 당시에는 가장 번성했을 도시였 텐데 황무지로 변해 있었고, 인적이라곤 구걸하는 아이들만 지치지 않고 끝까지 순례객을 따라왔습니다. 

 


▲ 사위성 안으로 들어가는 순례단

 

사위성 동문으로 나오니 부처님이 비구니를 위해 지었다고 하는 왕사 터가 나왔고, 다시 논길을 따라 조금 더 가니 베사카부인이 지었다고 하는 풀바람 비하르(PULVARAM BIHAR). ‘동원정사’가 나타났습니다. 어제 스님이 답사한 바로 그곳입니다. 

 

 


 

순례단은 동원정사 유적지를 오른쪽으로 세 바퀴 돈 후 자리를 펴고 앉아 스님으로부터 베사카부인의 깊은 신심을 보여주는 여러 일화들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습니다. 

 


▲ 동원정사, 풀바람 비하르

 

동원정사를 참배하는 것으로 쉬라바스티에서의 순례 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 새벽에 순례를 시작했는데 벌써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습니다. 다시 천축선원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유채꽃이 만발해 있어서 하루 종일 순례를 하느라 걸었던 노곤함을 달래 주었습니다. 

 


 

스님은 “여러분이 언제 한번 이런 시골길을 걸어보겠어요?” 하면서 순례를 마친 대중들의 기운을 북돋아 주었습니다. 

 

조별로 전기밥솥에 밥을 지어 맛있게 저녁 식사를 한 후 7시부터는 다시 저녁 법회가 열렸습니다. 스님은 이제 마지막 순례지로 상카시아만 남겨 놓고 있는 대중들을 위해 총정리가 될 수 있는 법문을 들려주었습니다. 

 


 

순례단이 그동안 돌아본 바라나시, 전정각산, 보드가야, 라즈길, 바이샬리, 쿠시나가라, 룸비니, 카필라바스투, 랑그람, 쿠단, 삐쁘라하와 등을 주욱 상기시켜주며 그곳에서 알아야 핵심 내용들을 다시 짚어 주었습니다. 14일 동안의 순례가 다시 한눈에 그려지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순례객들은 순례를 하면서 들었던 다양한 의문들을 스님께 질문했고, 스님은 명쾌한 답변을 들려주었습니다. 

 


 

2시간 30분 동안의 강연을 모두 마치고 스님은 마지막으로 이제 순례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면 어떤 삶의 자세를 가지고 살면 좋을지 격려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성지순례를 하면서 느낀 점이 좀 있어요?”

 

“네!” (큰 목소리로 대답)

 


 

“첫째, 성지를 참배한 것 말고도 인도에 와서 보고 배운 것이 참 많았지요? 그러니 한국에 돌아가면 너무 물질에 연연하는 삶에 대해 좀 재고를 해보셨으면 해요. 그러면 죽을 때까지 근심 걱정이 끝이 안 나요. 조금 한 템포 떨어져서 삶을 바라보는 그런 자세가 필요합니다. 

 

둘째, 우리가 불교에 대해서 너무 추상적으로 공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2600년 전이었는데도 얼마나 합리적이고 바르고 균형잡혀 있으셨습니까. 그 가르침은 지금 들어봐도 기가 막힌 얘기잖아요. 오늘날도 부처님 만큼 그렇게 유머있고 위트있고 똑바르게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우리는 왕이 되려고 꿈을 꾸는데 부처님은 왕자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왕위를 버렸다는 것이 중요한 거예요. 그 길은 해탈과 열반으로 가는 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는 부처님의 법에 귀의하는 자세와 부처님의 인격을 닮아가려는 삶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나는 부족하다’ 자꾸 이러지 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이라도 닮아가려는 태도가 필요해요. 부처님과 당시 수행자들의 삶을 우리의 삶과 비교해보면 우리는 그 때보다 더 잘 먹잖아요. 어디에 자도 그때보다 더 잘 자고요. 무엇을 입어도 그때보다는 잘 입고요. 일부러 입던 옷을 벗고 분소의를 입으라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먹고 입고 자는 것 가지고 안달하지 말고 집착하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누군가가 특별히 더 좋은 옷을 주지 않아도 지금 입고 있는 이 정도 옷은 입고 살 수 있잖아요. 그렇게 안달하지 않아도 어차피 먹게 되어 있고, 자게 되어 있고, 입게 되어 있어요. 적당하게 먹을수록 여러분들 건강에도 좋아요. 요즘 시대는 전부 다 비만이 문제이지 영양 실조가 문제가 아니에요. 그러니 때가 지나면 안 먹어야 해요. 일부러 먹기 싫어서 안 먹는 것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주는 대로 그냥 먹는 겁니다. 이렇게 살면 사는 것이 훨씬 편해져요. 

 

마음이 편안해지면 내가 갖고 있는 재능도 효과가 더 나요. 그러면 능력이 더 생긴다는 것이 아니라 효율이 더 생겨요. 재능을 다른 곳에 낭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나도 좋고 남도 좋은 길이 있어요. 또 이 길은 현재만 좋은 길이 아니고 미래도 좋은 길이에요. 

 

그리고 정토회가 가는 방향은 진보적인 방향이기 때문에 지금은 어떨지 몰라도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잘 되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들은 이것을 아직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차를 타면 가만히 있어도 목적지에 가게 되어 있는 것처럼 여러분도 정토회에 몸을 담고 있으면 앞으로 가게 되어 있어요. 본인이 안달이 나서 자꾸 내려서 문제죠. 그래서 제가 ‘붙어만 있어라’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당장 다 버리고 들어와서 머리 깍고 스님이 되라는 얘기는 안 하잖아요. 다만 너무 세속적인 것에 가치를 두지 말라는 겁니다. 

 

약간 한발 떨어지면 훨씬 행복하고 자유로운 상태에서 하던 일을 다 해나갈 수 있어요. 한 템포만 늦추면 안달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편안하게 해나갈 수 있어요. 스님도 침대에 누워서 안 잘 뿐이지 차를 타고 가면서 자든 어떻게든 다 자면서 사는 거예요. 잠을 안 자고 어떻게 살겠어요? 대신 몇 시에 누워서 자고, 몇 시에 일어난다는 것이 없어서 좀 문제이긴 하지만요. 

 

인도에서 한국식으로 살려하면 좀 힘들어요. 그런데 한국식으로 살겠다는 생각만 놓아버리면 인도만큼 살기 편한 곳이 없어요. 다른 나라에 가면 그 나라 사람들 눈치 보고 잔뜩 긴장하며 살아야 하는데 여기는 긴장하고 살 것이 하나도 없어요. 얼마나 편한지 몰라요. 그러나 내 식대로 살려고 하면 뜻대로 잘 안 되어서 힘들어져요. 그러니 떠내려가는 물에 맡겨 놓고 그냥 살면 돼요. 그러면서 내 계획은 내 계획대로 갖고 있되 그것을 고집만 안 하면 됩니다. 

 


 

성지순례도 절대로 인도식으로만 하지 않아요. 우리식으로 해요. 그런데 고집하면 갈등이 생겨요. 고집은 안 해요. 길이 막히면 내려서 밥 먹으면 되고, 국경을 막아도 별 차질이 안 생기잖아요. 왜냐하면 중간에 몇 시간씩 차질이 생겨도 늘이고 줄일 수 있도록 스폰지를 다 넣어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룸비니 갈 때 몇 시간 늦게 가도 차질이 안 생겨요. 그 날은 가는 일정만 잡아 놓았거든요. 어제 늦게 도착해서 천불화현탑을 못보면 오늘 가서 보고 밥을 한 시간 늦게 먹으면 되잖아요. 이렇게 노하우가 쌓여 있기 때문에 우리 계획대로 가되 그러나 순간순간은 인도 현지 사정에 맞춰야 해요. 여기에 안달하면 성질이 나서 못 살아요. 버스가 털렁털렁 흔들리면 흔들리는 대로 맞추되 계획은 딱 세워놓고 조정해 가면서 살면 되듯이 인생도 그렇게 한번 살아보세요.”

 

스님의 격려는 순례단 모두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스님은 과로가 누적되어 편두통이 계속 있으신지 목 뒤에 파스를 계속 붙이고 있었음에도 열정적인 강연을 해주었습니다. 

 

온 힘을 기울여 성지에 대해 설명하고, 부처님의 삶을 다시 재해석해 주고, 대중들이 순례를 잘 하도록 사전답사까지 꼼꼼히 챙겨준 스님에게 순례단은 뜨거운 박수 갈채를 보냈습니다. 

 


 

내일 순례단 A팀은 새벽 3시 20분에 기상해 4시에 상카시아로 출발합니다. 스님은 새벽에 A팀을 배웅한 후 오후에는 다시 B팀을 맞이해 천불화현탑을 함께 참배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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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댓글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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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화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감동 또 감동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사랑하고 사랑합니다. 그저 그렇게 그저 이렇게사는것인지 알았습니다. 내 지금 삶이 얼마나 감사하고 곰 고마운지 알겠 습니다.

2016-02-04 16:53:51

베라

스님 감사합니다. <br />집착이 내려놓아진 것 같다가도, <br />다시금 일초의 시간이 지나가지도 않았는데, <br />다시 내가 집착이 되어 있습니다..<br />건강하시고 의미있는 순례행사가 되길 기원합니다.

2016-02-02 23:01:18

원만행

스님고맙습니다

2016-01-28 17: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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