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6.1.14 (인도 9일째 제2편)
수자타의 공양


 

부처님이 6년 고행 후 전정각산에서 내려와 쓰러지셨던 자리에 세워진 탑을 참배한 후 다시 마을 사이로 난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조금 더 걸으니 무덤 같이 생긴 작은 탑터가 보였습니다. 스님은 이곳이 부처님이 수자타로부터 공양을 받으셨던 곳이라고 알려주면서 먼저 탑을 향해 삼배를 했습니다. 

 


▲ 부처님이 수자타로부터 공양을 받은 곳

 

스님은 삼배를 마친 후 곧바로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오른쪽 앞에 무덤같이 생긴 작은 탑이 보이지요? 여기가 부처님이 수자타로부터 공양을 받으신 곳이에요. 여기는 부처님이 앉았던 자리, 여기는 수자타가 앉았던 자리입니다. 공양 올렸던 자리에 이렇게 탑을 쌓았어요. 

 

뒤쪽을 보면 동네에 큰 탑이 있는데 저곳이 수자타의 집터예요. 그리고 왼쪽에 있는 절이 수자타템플이에요. 수자타의 공양터 주위에 수행자들이 많이 찾아와서 수행하니까 훗날 절이 지어졌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불교가 없어지고 지금은 힌두 절이 되었습니다. 수자타템플이라는 이름은 그대로 있지만 지금은 힌두 사원이에요.”

 


 

수자타템플이 힌두 사원이 되어 있다는 이야기는 무척 씁쓸하게 들렸습니다. 성지를 가꾸는 일이 아직 더디기만 한 것이 무척 아쉬웠습니다.  

 

수자타로부터 부처님이 공양받는 장면이 기록된 내용에 대해 경전 독송을 함께 한 후 순례단은 우루벨라 가섭이 수행했다고 하는 곳으로 향했습니다. 

 

마을 길을 따라 걷고 있는데, 아이들이 계속 스님을 따라와 구걸을 했습니다. 중국말로 스님을 뜻하는 ‘스부’를 계속 말하며 심지어 스님의 옷자락을 잡아 당기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이 너무나 집요하게 따라와서 그 모습을 본 순례객 중 한 명이 스님에게 물었습니다. “스님, 사탕 하나 주고 아이들 그만 따라오게 하면 안 돼요?” 

 


 

그러자 스님은 길을 계속 걸으면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왜 수자타아카데미를 세우게 되었는지 스님의 고민이 담긴 진솔한 이야기였습니다. 

 

“한 개만 줘서 떨어질 아이들이면 벌써 그렇게 했지요. 한 개만 주겠다는 것은 정말로 아이들을 위해서 그러는 거예요? 자기를 위해서 그러는 거예요? 자기를 위해서 그런 거잖아요. 여러분들은 그렇게 얄팍한 생각을 하니까 해결이 안 되지요.

 


▲ 구걸을 하며 한참 동안 스님 뒤를 쫓아온 아이들

 

그래도 여러분들은 저보다는 나아요. 저는 제일 처음에 인도 왔을 때 실수를 많이 했어요. 캘커타에 도착해서 물을 함부로 먹지 말라고 해서 밤에 물을 사러 나갔어요. 그런데 누가 컴컴한 데서 제 팔을 잡으면서 구걸을 하는데 아무리 뿌리쳐도 자꾸 따라와요. 컴컴한 데서는 몰랐는데 가로등 밑에 가서 보니 아기를 안은 아주머니였어요. 손을 자꾸 아기 입에 댔다가 배에 대기를 반복해서 아기가 배고프다는 뜻인 줄 알았어요. 잡아당기는 대로 따라 가봤더니 조그마한 구멍가게로 데려가서 분유통을 손가락으로 가리켜요. ‘분유 사달라는 소리구나’ 싶어서 제가 ‘How much?’ 라고 가격을 물었어요. 그랬더니 가게 주인이 ‘식스티 루피’, 즉 60루피라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인도 오기 전에 사전교육을 단단히 받았거든요. 아이들이 ‘박시시’를 요구할 때는 아무리 많이 줘도 1루피 이상 주면 안 된다고 들었어요. 1991년도니까 벌써 25년 전이어서 물가가 그랬는데, 60루피라고 하니까 깜짝 놀라서 그냥 도망가 버렸어요. 그래도 사달라는 거 안 사주고 온 게 마음에 계속 걸리잖아요. 그래서 게스트하우스에 들어와서 안내하는 교수님한테 60루피가 우리 돈으로 얼마인지 물었더니 2,400원이라는 거예요. 2,400원 달라는데 그걸 마치 전 재산이라도 달라고 한 양 도망을 와버린 거예요. 마음이 아파서 돈을 가지고 다시 나가봤지만 어느새 없어져 버리고 안 보였어요. 그래서 혼자서 반성을 많이 했죠. 

 

어릴 때 마음 같으면 주고도 남았을 텐데 첫 번째로는 승려가 되면서 냉정해졌고, 두 번째로는 사회운동 하면서 불쌍한 사람이나 개인을 돕는 것보다 사회제도를 바꾸는 걸 중시하다 보니 자선 같은 걸 좀 부정적으로 생각했어요. 병 주고 약 주는 것처럼 생각했거든요. 그러다보니 이제 제 마음이 너무 냉정해진 거예요. 마음은 따뜻하지만 생각이 냉정해야 하는데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내 마음은 가난한 사람 앞에서 오히려 따뜻하게 작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 나를 보고 반성이 되니까 가방을 뒤져서 기본적인 옷만 빼고 나머지 수건이며 옷이며 돈이며 전부 다 꺼내서 캘커타 거리에서 달라는 대로 막 나눠줬어요. 그렇게 되니 이제 순례고 뭐고 아무것도 안 되는 거예요. 아이들이 지금 우리 대중들처럼 무리를 지어 제 뒤를 따라다녔거든요. 한국에서 함께 온 일행들이 ‘그래, 너 잘났다’ 하고 얼마나 불평이 많았는지 몰라요. 그래서 나중에는 완전히 왕따가 됐어요. 

 

그러다가 어느 시골길에서 밥을 먹는데 동네 아이들이 있기에 과자를 줄려고 ‘이리 와, 이리 와’ 하고 불렀어요. 그런데 아이들이 보기만 하고 안 와요. 사탕을 준다고 하니까 애들이 오는 게 아니라 도망을 가버리는 거예요. 그때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어요. 

 

‘가난해서 거지가 생기는 게 아니라 뭘 줘서 거지가 생기는 것이구나.’

 

관광지에서만 아이들이 이렇게 구걸을 하지, 관광객이 없는 일반 마을에서는 아이들이 구걸하는 게 전혀 없고 뭘 주면 오히려 부끄러워서 도망가는 거예요. ‘아, 내가 참 생각을 잘못했구나’ 싶었어요. 그 뒤로는 아무리 따라다니며 졸라도 안 주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안 주는 원칙을 딱 정해서 다녔는데, 저기 수자타수투파에서 다리 못 쓰고 두 팔로 걷는 아이가 계속 따라다녀요. 그때는 안 주기로 마음 먹은 뒤라서 몸이 불편한 아이고 뭐고 무조건 안 줬어요. 그런데 그 아이가 여기까지 따라오니까 또 번뇌가 생기잖아요. ‘안 주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그 애는 어쨌든 뭐든지 하나 얻어야 먹고 살아가는데...’  (모두 웃음) 

 


 

그 때부터는 ‘주긴 줘야 하는데 어떻게 주어야 하나? 거지가 되도록 줘서는 안 된다’ 이게 화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깊은 고민이 되면서 학교를 짓게 되었어요. 다른 곳이 아닌 수자타템플에서 그런 아이를 만났기 때문에 ‘수자타아카데미’를 지은 거예요. 1991년에 여기서 그 경험을 하고 원래 여기다 학교를 지으려고 했어요. 그때는 인도에 처음 왔으니 아는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어서, 이걸 화두로 두고 고민만 하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1993년도에 유영굴을 참배하고 내려오는 길에 구걸하는 아이들을 보고 학교를 짓기 시작한 거예요. 

 

제가 말씀드리는 요지는 사람이 꼭 잘한 것만 좋은 것도 아니고, 잘못한 것도 결과가 좋을 수가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 잘못했다고 너무 양심의 가책만 느끼고 울고불고 하지 마세요. 운다고 뭐가 되는 게 아니잖아요. 잘못했으면 잘못한 줄 알아서 확실히 반성하고 앞으로 정신 차리고 살면 돼요.”

 

작은 실수였지만 그것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으니 도리어 큰 일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는 말씀은 큰 울림으로 남았습니다. 수자타아카데미도 스님의 작은 실수와 참회에서 시작이 되었던 것입니다. 

 

모래 사장이 넓게 펼쳐진 곳에 숲이 있었는데 그 숲 속에 우루벨라 가섭의 수행터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흰색 벽으로 둘러쳐진 건물의 좁은 문으로 들어서자 우물처럼 생긴 작은 화룡굴이 보였습니다. 

 


▲ 우루벨라 가섭의 수행터

 

이곳에서 스님은 부처님이 우루벨라 가섭을 교화한 이야기를 재미있고 실감나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도착한 이곳이 우리벨라 가섭의 수행 도량이었습니다. 여기에서 강을 따라 내려가면 그 동생인 나디 가섭과 가야 가섭의 수행 도량이 있었습니다. 당시 수행자가 1000명이나 되었던 큰 교단이었어요. 이 나라의 왕인 빔비사라 왕이 1년에 한 번씩은 이분에게 공양을 올릴 정도로 유명한 분이셨어요. 부처님은 이 근처인 전정각산에서 수행하셨으니까 이 분들이 어떻게 수행했는지 잘 아셨겠죠. 그래서 5비구를 교화한 뒤에 나도 우루벨라촌으로 가겠다고 하셨던 이유는 이 분들이 깨달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보셨기 때문에 그러셨던 겁니다. 

 


 

이곳에 오셔서 하룻밤을 자고 가려고 청하자 우루벨라 가섭은 화룡이 있는 굴에서 자라고 한 겁니다. 굴이라고 하는 것이 옆으로 생긴 굴이 아니라 우물처럼 웅덩이를 파고 그 안에 뱀을 보관했던 겁니다. 우루벨라 가섭은 아침이 되어서 죽은 줄 알았던 부처님이 잘 쉬었다고 하면서 나와서 깜짝 놀라 했습니다. 부처님이 신통력으로 제압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좀더 사실적인 이야기로는 부처님이 굴 속에서 명상을 하고 있으니까 뱀이 나와서 몸을 칭칭 감고 지나갔는데 부처님은 무념무상의 상태로 있었다고 합니다. 뱀이 나무 위로 올라갈 때 나뭇가지를 꽉꽉 물면서 올라가요, 그냥 올라가요? 그냥 올라가지요. 그것처럼 부처님이 하나의 무정물처럼 편안하게 있으니까 뱀이 그냥 지나간 겁니다. 우리는 긴장을 하고 울찔하니까 뱀이 물게 되는 것이겠죠. 

 

이 외에도 우루벨라 가섭은 부처님과 360가지 신통력 경쟁을 했다고 해요. 우루벨라 가섭의 교만을 꺾기가 그만큼 어려웠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루는 부처님이 우루벨라 가섭에게 ‘마음 속에 질투심이 있는 한은 해탈하기 어렵소‘ 이렇게 말하자 그 때서야 우루벨라 가섭은 자기도 자기의 본심을 몰랐는데 그 본심을 딱 알아차리는 순간 마음이 확 밝아졌어요. 그래서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저의 스승이 되어 주십시오. 저도 출가하겠습니다.’ 라고 하니까 부처님께서 ‘그렇게 경솔하게 결정하지 마십시오. 당신 밑에는 오백명의 제자가 있지 않습니까?’ 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우루벨라 가섭이 제자들에게 ‘나는 오늘 큰 스승을 만났다. 나는 이 분의 제자가 되기로 했으니 너희는 너희 갈 길을 가라.’고 하자 제자들 또한 ‘우리는 스승님을 존경하고 살았는데, 스승님이 더 큰 스승의 제자가 되신다니 우리 또한 그분을 모시겠습니다.’라고 해서 다같이 출가를 하게 됩니다.

 


 

이어서 나디 가섭과 가야 가섭도 함께 출가를 하게 되어 1000명의 제자가 생겼는데, 부처님께서 이 1000명의 비구를 두고 설법한 내용이 ‘탐진치 삼독의 불을 꺼라’는 것입니다. 즉, 너희들이 그동안 불을 섬겼는데 그 불은 껐다. 그러나 밖의 불을 끈 것이지 마음 속에 탐진치 삼독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그러니 부지런히 정진해서 삼독의 불을 끄라고 하신 겁니다. 이 1000명의 대중을 이끌고 왕사성으로 들어갔습니다.”

 

정말로 이곳에는 화룡이 있었던 우물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현장에 오니 경전에 기록된 내용이 거짓이 아니고 모두 사실이었음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보드가야로 향하는 다리를 건너기 전 마지막으로 아주 웅장한 규모로 세워진 수자타의 공양을 기념한 탑 앞에 도착했습니다. 스님은 수자타의 공양이 갖는 의미에 대해 짧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 수자타의 공양을 기념한 탑

 

“이 수자타의 공양은 훗날 최고의 공양으로 칭송 받습니다. 수자타의 공양은 사실 수자타를 위대하게 만들었죠. 왜냐하면 부처님인 줄 알면 누구나 다 공양을 올릴 수 있지만, 수자타는 쓰러져 있는 길가의 노숙자에게 공양을 올렸는데 그 분이 나중에 부처님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다시 강을 하나 더 건너서 저쪽 편으로 가면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셨다고 하는 보드가야가 나옵니다.” 

 

순례단은 탑을 한 바퀴 돌면서 석가모니불 정근을 했습니다. 탑의 규모가 워낙 커서 한 참을 돌아야 했습니다. 후세 사람들이 얼마나 이 탑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기렸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수자타의 공양탑을 돌아서 나온 후 스님은 해마다 10대 성지를 순례하면서 탑의 규모를 비교했을 때 느낀 점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규모로 보면 보드가야 대탑보다 수자타의 공양탑이 훨씬 더 큽니다. 쉬라바스티에 가면 천불화현탑도 어마어마하게 크고, 부처님께 발우를 받은 걸 기념하는 케사리아의 봉발탑도 어마어마하게 커요. 재가 신자들이 탑을 쌓다 보니 그런 공덕이나 기적에 관련되는 탑이 규모가 큰 경향이 있어요. 후대에 그런 곳에 더 보시를 더 많이 해서 그런 것 같아요. 그러니 당시 사람들도 얼마나 복을 구했는지를 엿볼 수 있지요.” 

 

탑의 규모가 시사하는 점을 캐치해 내는 스님의 안목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습니다. 

 

드디어 순례단은 보드가야로 향하는 긴 다리를 만났습니다. 강 건너 편에는 높이 우뚝 솟은 대탑이 한 눈에 보였습니다. 부처님은 대탑이 세워진 바로 그곳에서 마지막 49일 동안의 정진 끝에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 보드가야로 가는 다리

 

가사를 수하고 보드가야 대탑을 참배하러 들어가는 순례객들에게 스님은 합장을 하며 인사를 한 후 순례단 C팀과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가사를 수한 대중들의 모습이 아주 흐뭇해 보였는지 스님은 “이제 진짜 중 같다” 하면서 웃음을 보였습니다. 

 


▲ 성지순례 C팀과 작별 인사

 

보드가야 대탑 앞에는 대탑을 관리하고 있는 마하보디템플이 있는데, 스님은 해마다 대탑을 참배할 때 보시금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마하보디템플 주지 스님을 찾아가 인사를 하고 보시금을 전달했습니다. 

 


▲ 마하보디템플 주지 스님과 인사

 

마하보디 템플 주지 스님도 스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직접 제작한 인도 달력을 선물했습니다. 

 


 

이렇게 순례단 C팀과의 일정을 모두 마치고 스님은 쉬라바스티로 향했습니다. 쉬라바스티는 부처님께서 24번의 안거를 보낸 곳으로 가장 오래 머무신 곳입니다. 스님은 쉬라바스티에서 다시 A팀, B팀, C팀을 차례대로 맞이할 예정입니다. 

 

보드가야에서 쉬라바스티는 자동차로 15시간 동안 가야 하는 먼 거립니다. 스님과 수행팀 일행은 긴 여정을 앞두고 운전기사와 함께 차 앞에서 기념 사진을 한 장 찍고 출발했습니다. 

 


▲ 보드가야에서 쉬라바스티까지 15시간 동안의 대장정을 앞두고

 

중간에 한 번 내려서 점심 식사를 한 것을 제외하곤 조금도 쉬지 않고 달렸습니다. 

 


 

아침 9시 30분에 보드가야에서 출발했는데 밤 11시가 넘어서 쉬라바스티의 한국절 천축선원에 도착했습니다. 그래도 쉬지 않고 달린 덕분에 13시간 30분 만에 왔으니 1시간 30분이나 당겨 도착한 셈입니다. 

 


▲ 천축선원

 

내일은 쉬라바스티에서 어떻게 성지순례를 할지 사전 답사를 한 후 저녁에는 순례단 A팀을 맞이하고 법문도 해줄 예정입니다. 

 

▼ 배고픈 사람은 먹어야 합니다, 아픈 사람은 치료받아야 합니다, 아이들은 제 때에 배워야 합니다. JTS는 인도 불가촉 천민 마을 둥게스와리 아이들을 위해 수자타아카데미를 설립하고 기아, 질병, 문맹 퇴치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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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댓글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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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선

수자타아카데가 생기게 된 이야기를 들으니 감동입니다.
스님 감사합니다. 글로 옮겨주셔서 고맙습니다.

2016-01-20 07:43:33

조병숙

스님 아주좋아요

2016-01-19 23:03:03

유애경월광

고맙습니다 .

2016-01-19 18: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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