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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정토회 성지순례단 C팀과 함께 부처님께서 6년 고행을 마치고 쓰러지셨던 네이란자라강을 건너 수자타의 공양을 받고 되살아난 곳을 순례한 후 다시 A팀을 맞이하기 위해 쉬라바스티로 향했습니다.
어제밤 수자타아카데미에서 하룻밤을 잔 성지순례단 C팀은 새벽 4시 20분에 일제히 기상해 새벽예불을 올린 후 4시 50분에 수자타아카데미 정문 앞에서 보드가야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깜깜한 새벽이라 렌턴을 하나씩 들고 줄을 지어서 걷기 시작했습니다.
수자타아카데미 정문을 나오니 가장 먼저 방갈비가 마을이 나타났습니다. JTS가 세운 유치원을 렌턴으로 비춰 먼 발치서 어렴풋이 본 후 천천이 마을 사이를 가로질렀습니다. 하늘에는 별이 쏟아질 듯 가득했습니다. 스님은 가장 앞장서서 걸으며 부처님의 삶과 관련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별이 많죠?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었다는 성도절이 며칠 안 남았어요. 오늘이 14일이니까 내일 모레네요. 동방에 샛별이 떴나 한번 보세요. 샛별이 있으면 날짜가 비슷한 거고, 없으면 날짜가 틀린 겁니다. (웃음)
부처님의 일생을 제대로 공부하려면 인도에 직접 와서 이렇게 경험해보면서 경전 기록과 비교해 봐야 합니다. 예컨대 ‘부처님이 아쇼카나무 꽃 가지를 잡고 태어났다’라고 하면 실제로 아쇼카꽃이 언제쯤 피는지를 보고 대강 몇 월인지 가늠해봐야 해요. ‘음력 12월 8일에 동방의 샛별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니까 음력 12월 8일 경에 이곳에 직접 와서 동방의 샛별이 보이는지와 남방에 전해 내려오는 바이샤카월 보름날에 샛별이 반짝이는지를 살펴보면 어느 쪽이 좀 더 맞겠는지 알 수 있어요.
전해 내려오는 옛날 이야기라고 해서 다 허무맹랑한 이야기도 아니고 다 객관적 사실인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조금만 과학적으로 검증하면 어떤 이유로 이런 이야기가 나왔고, 어떤 부분에 문제가 있는지 요즘은 다 찾을 수 있어요. 인류의 이동 경로도 언어뿐 아니라 유전자 분석을 해보면 대충 어떻게 이동했는지 알 수 있는 것과 같아요.”
송수신기로 스님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하늘 위를 바라보니 정말 동쪽에 반짝이는 샛별이 보였습니다. 부처님도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명상을 하시다가 아마 이 시간 즈음에 샛별을 보셨겠구나 싶었습니다. 항상 직접 경험해보고 연구하는 스님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참 동안 마을 길을 따라서 걷자 지금은 건기여서 모래 사장처럼 되어 있는 네이란자라 강이 저 멀리 보였습니다. 강 너머에는 붉은 불빛이 유독 밝게 보이는 곳이 있었는데, 그곳이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보드가야라고 스님은 알려주었습니다.
순례객들이 네이란자라강에 발을 내딛자 스님은 퀴즈를 하나 내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네이란자라강 입구에 있어요. 전정각산에서 부처님이 내려오셨을 때 여기가 아니라 강 저편, 즉 오른쪽으로 건너간 곳에서 목욕하다가 쓰러지셨어요. 여기서 제가 퀴즈를 하나 내겠습니다. 한번 맞춰보세요. 산에서 내려오자마자 강을 처음으로 만난 이곳에서 목욕을 하셨어야 할텐데 왜 굳이 저편으로 건너가셨을까요?”
스님이 낸 퀴즈를 풀고자 많은 순례객들이 이런저런 답변들을 내어 놓았습니다. 아무도 자신있게 답하지 못하고 웅성거리기만 하자 스님의 생각을 들려주었습니다.
“여기서 보면 강바닥이 다 평평해보이지만 산 위에 올라가서 보면 강바닥의 높이가 달라요. 우리가 출발한 지역은 높고, 숲과 마을이 있는 오른쪽 건너편은 낮아요. 그러니 물이 조금밖에 없을 때는 강물이 저쪽만 흐르고, 우기가 되어 물이 많아져야 여기까지 물이 차는 거예요. 강가강도 지금은 건기라서 앞쪽에만 물이 흐르는데 우기가 되면 그 너머 모래사장까지 물이 흐른다고 했잖아요.
그러니 부처님이 전정각산에서 내려오실 때가 우기는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죠. 그렇다고 지금처럼 물이 없는 때도 아니였겠죠. 원래 이때 쯤 저쪽으로 건너가려면 신발 벗고 건너야 하는데 올해는 특히 가물어서 강 전체가 말라버렸다고 해요.
여러분들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을지 몰라도 저는 현장 답사를 할 때 ‘어, 왜 쓰러진 곳이 저 건너편이지? 이쪽이어야 하지 않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나중에 전정각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내려다봤더니 평평한 줄 알았던 강바닥이 경사져 있었던 거예요. 여름에 큰 홍수 질 때만 전체에 물이 차고, 대부분은 강 한쪽으로만 물이 흐르는 거예요.”
스님의 설명을 듣고 나니 정말 그랬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닥이 온통 모래로 되어 있어서 발을 내딛기가 조금 힘겹기도 했지만, 스님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듣고 있다보니 어느새 강을 거의 다 건넜습니다.
그러자 강 건너편에서 마을 아이들이 마구 달려와 “나마스떼!” 하고 인사를 건냈습니다. 아직 해가 뜨지도 않은 새벽에 아이들이 달려와서 인사를 하자 스님이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어디서 우리를 이렇게 새벽부터 환영해 주겠어요?” (모두 웃음)
순례객 모두 박장대소를 했습니다. 성지순례를 하는 동안 어디를 가더라도 동네 아이들은 환영을 해주었습니다. 인도성지순례의 즐거움 중에 하나가 바로 동네 아이들의 이런 모습이죠. 졸졸 따라다니는 것을 귀찮아 할 수도 있지만 이것도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네이란자라강을 건너오자마자 곧바로 허물어진 탑터가 나타났습니다. 스님은 이곳이 바로 부처님께서 쓰러진 곳에 세워진 탑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스님의 설명이 없으면 그 누구도 알아보기 힘들만큼 논두렁 한 가운데에 위치해 있는데다가 많이 훼손되어 있었습니다.
스님은 탑을 바라보며 부처님이 쓰러지셨을 당시의 정황을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부처님은 여기 오셔서 물에 몸을 담그고 목욕을 하셨어요. 때를 벗기는 목욕이라기보다 6년간 지친 몸을 물에 담근 것이죠. 허기진 상태에서 물에 들어갔다가 일어나면 현기증이 나잖아요. 일어나다가 눈 앞이 핑 돌아서 아마 그냥 쓰러지셨나 봐요. 강바닥이 평평하니까 물살이 세지는 않지만 조금 떠내려가다가, 나뭇가지를 잡고 언덕으로 올라오셨다고 해요. 그때 잡은 나뭇가지 이름이 아사나나무라고 경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옛날 인도 사람들은 모든 산과 나무에 다 신이 깃들어 있고, 모든 존재마다 다 성품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이게 아트만 사상이에요. 독일어를 공부하면 명사에 여성과 남성이 따로 있듯이 모든 것에 정과 부정의 성품이 있다고 봤어요. 그래서 남자는 정하고 여자는 부정하고, 보리수는 정한 것에 들어가고 반얀트리는 부정한 것에 들어간다는 식으로 구분지었습니다. 그런 당시의 사고방식에 따라 경전에는 ‘나무의 신이 가지를 늘어뜨려서 부처님을 잡아 건져올렸다’라고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 당시의 사고방식, 즉 당시 경전을 기록한 사람의 사고방식이 그랬기 때문에 요즘처럼 ‘나뭇가지를 잡고 기어올라왔다’ 이러지 않고 ‘나무 신이 가지를 늘어뜨려 건져올렸다’라고 기록한 겁니다.
부처님이 나무그늘 밑에 앉아 계실 때 해의 움직임에 따라 그늘이 이동한 것도 ‘나무 신이 싯다르타를 위해서 가지를 옮겨 그늘을 드리웠다’라고 표현하는 게 인도의 전통문화적 사고방식이에요. 그러니까 그런 표현을 곧이곧대로 해석하면 안 돼요.
요즘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젠가 제가 둥게스와리에 가니까 사람들이 집에 소똥을 바르고 있어요. 이유를 물어보니까 저를 가리키며 신이 왔으니 영접하는 거래요. 여기에는 교육을 관장하는 신이 있는데, 어느 신도 누구 하나 학교를 지어준 적이 없어요. 그런데 외국에서 낯선 사람이 와서 학교를 짓고 아이들 공부를 가르치니까 인도인들의 사고방식으로는 신과 다름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모두 웃음)
경전을 읽을 때 신의 개념을 이런 식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신이라고 해도 기독교에서 말하는 절대자나 유일신 개념과는 달라요. 옛날에는 우리도 나무에는 목신이 있고, 물에는 수신이 있고, 산에는 산신이 있고, 뒷간에도 신이 있다고 했잖아요. 그런 개념이에요.
부처님이 쓰러지셨다는 자리에 훗날 아쇼카왕이 탑을 쌓았어요. 그렇다고 물에다 바로 탑을 쌓으면 떠내려가 버릴 테니까 쓰러진 자리 가까이의 물가에 탑을 쌓았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흔적만 남고 다 파괴되었어요. 옛날부터 여기가 성스러운 곳이라고 알려졌으니까 동네 사람들이 그 탑 자리 위에 힌두 사원을 하나 세웠는데 요즘은 그 사원마저 파괴되었습니다.
자, 여기서 부처님이 전정각산에서 내려오셨던 모습을 묘사한 대목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경전 독송을 하니 그 때의 모습이 다시 그림 그리듯이 머릿 속에 펼쳐졌습니다. 스님의 설명처럼 나무 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알고 나서 읽으니 내용이 더욱 실감나게 읽혀졌습니다.
경전 독송을 마치고 나서 스님은 우리가 정법을 보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부처님이 여기 쓰러져 있는 것을 저 앞 마을 촌장의 딸인 수자타라는 소녀가 발견했습니다. 경전에는 그 집 소가 4백 마리가 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현장에 와서 보면 알 수 있듯이 소들이 풀을 뜯다가 목이 마르면 물이 흐르는 이 강가로 옵니다. 수자타는 소젖을 짜러 강가로 왔다가 수행자가 쓰러져 있는 것을 봤어요. 그래서 우유에다가 곱게 간 쌀과 코코넛을 넣어 끓인 밀크 라이스, 즉 유미죽을 먹인 거예요. 죽을 드신 곳은 이곳이 아니고 여기서 500m 위쪽에 가면 있습니다. 수자타의 집도 좀 더 가깝고 지대도 약간 높아요. 거기 가면 수자타가 부처님께 공양 올린 곳임을 알리는 탑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정법을 보는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부처님이 갈비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몸으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면 사람들이 ‘아, 굶주림이 깨달음의 원인이구나’라고 오해할 수 있어요. 깨달음과 고행은 별개의 문제인데 몇 달이고 몇 년이고 음식을 안 먹고 굶주리며 고행을 하면 깨달을 수 있다고 오해하기 쉬워요. ‘누구는 잠을 안 잤다’, ‘누구는 허리를 땅에 안 붙였다’, ‘누구는 단식을 어느 정도 했다’ 이런 것을 깨달음과 연관시키면 안 되지만 우리 중생은 자꾸 그런 식으로 연관시켜서 신비화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어요.
두 번째, 그렇게 음식을 안 먹었는데도 부처님이 아주 건강하다는 오해가 또 생길 수 있어요. 즉 ‘부처님이 음식을 안 먹어도 사실 수가 있다’라는 식의 오해가 생길 수 있어요. 그래서 부처님은 실제로 음식을 받아드셔서 건강을 회복하셨습니다. 육체란 것은 음식을 먹어야 유지가 되잖아요. 음식에 탐착하지 말라는 것이지 음식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에요. 그런 의미에서 정법에 대한 관점이 아주 분명히 잡혀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가 여기에서 꼭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부처님은 출가하기 전 왕족이었기에 늘 하인을 두고 사셨어요. 옛날 양반은 반드시 개인 시중을 드는 종이 있어서 여자 같은 경우 결혼하면 종도 따라갔어요. 싯다르타 태자에게도 찬다카라는 마부가 항상 따라다녔어요. 그런데 부처님은 출가 이후에는 누구의 시봉을 받는 삶을 살지 않으셨습니다. 하인이나 종이 자기 생활을 받들도록 하지 않고 돌아가실 때까지 자기 삶을 자기가 유지했습니다.
다만 연세가 드시고 일이 많았기 때문에 아난존자가 시봉을 했지만 그것은 월급을 받고 한 노동이 아니었어요. 같은 도반으로서 제자가 스승을 시봉한 것이지 하인은 아니었잖아요. 이게 부처님 당시 상가의 모습이에요. 상가에서는 다 자기가 자기를 돌보거나 도반끼리 돕는 겁니다.
그런데 신라시대를 보세요. 의상이나 자장 같은 유명한 스님들이라 해도 그 시대가 계급사회다 보니 절에 반드시 사노, 즉 절의 노비를 거느리고 살았습니다. 그 사람들이 밥하고 일해서 스님들을 먹여 살렸어요. 이것은 그 사회의 계급제도가 그대로 유지되는 거예요. 그러나 부처님은 차원이 다른 삶을 사셨습니다. 신라시대의 유명한 승려 중 그런 계급 질서에서 벗어난 사람이 있다면 원효나 혜공 정도입니다. 그래서 원효는 학문으로 보면 의상이나 다른 사람과 비슷할지 몰라도 수행면에서는 차원이 다르다고 할 수 있어요.
오늘날 일본이든 한국이든 어디든 사찰 구조를 보면 다 절에서 월급을 주고 밥하는 공양주며 사무 보는 사람을 따로 둡니다. 지금의 사회, 즉 자본주의 시스템 아래에 놓여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정토회에서는 건물을 짓는 것은 어떻게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우리가 먹고사는 생활의 문제는 어떤 사람도 고용해서 쓰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늘 밥해주는 사람 따로 있고, 빨래해주는 사람 따로 있는 삶을 살다가 이렇게 같이 생활하면 불편하죠. 서로 도와주고 밥을 해주더라도 우리가 스스로 당번을 정해서 서로 나눠 하지, 누군가가 월급을 받고 일을 하는 게 아니에요.
제가 절에서 부목을 해봤는데, 우리가 생각할 때는 스님이고 공양주이지만 월급을 받고 일하면 그 사람에게는 스님이 아니라 사장이에요. 세속의 고용주 관계인 겁니다. 같은 수행자로 들어와서 누구는 부목하고 누구는 뭘 하는 식으로 역할 분담을 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 지금의 불교에서 스님들 대부분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 비추어 보면 학문적으로 불교가 어떻고 철학이 어떻다고 가르치는 교수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수행자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렇게 오늘날 우리 불교의 현실이 근본불교의 관점에서 볼 때 뭐가 잘못되었는지 생각해봐야 해요.
이게 꼭 틀렸다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대부분의 종교가 다 그러니까요. 그러나 우리가 정법을 이야기하거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야기할 때는 완전히 그렇게는 못하더라도 그걸 늘 염두에 두어서 내가 멀어졌더라도 어느 정도 멀어진 줄 알고 살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 많으니까 사람들 월급 주고 고용해서 시키면 된다’라고 해요. 옛날에 하인을 안 시키면 일이 안 된 것처럼 요즘 같은 사회에 전문가를 고용해서 일하지 않으니까 전문성이 떨어져서 정토회는 일이 잘 안 돼요. 자원봉사를 1년 하다 가버리고 3개월 하다 가버리는 식이니까요. 그러나 현재까지는 어쨌든 모든 걸 다 자원봉사자로 해결하면서 버티고 있습니다. 정토회 전체에 월급 받는 사람은 한 명도 고용한 적이 없어요.
그러나 방송국을 운영하거나 출판사를 운영하려면 사실 어려워요. 그러나 아직은 다 봉사자들이 하고 있어요. 여러분 같은 봉사자들이 총무 하고, 대표 하고, 여러 소임들을 맡아서 일을 다 하다 보니 다들 죽을 지경이지요. 가정생활 해야지, 직장생활 해야지, 정토회 소임도 맡아서 해야 하니까요. 그러나 우리는 수행자로서 하는 거니까 너무 욕심내지는 않는 거예요. 여기 인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자타아카데미에서 생활하는 대중들도 다 자원봉사자로서만 참여한다는 원칙이 서 있어요.”
정토회가 왜 모든 일을 자원봉사 방식으로만 운영해가려고 하는지 순례객들은 이제서야 이해가 되었다며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부처님은 평생 동안 걸식을 하고 나무 밑에서 자는 등 스스로 자기 삶을 유지했듯이 자본주의 사회 안에 살면서도 부처님의 그 정신을 계승하는 길은 바로 자원봉사 시스템을 확대해나가는 것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부처님이 쓰러지신 곳에 세워진 허물어진 탑터 앞에서 참 소중한 가르침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마을 사이로 난 논두렁 길을 따라 걷다가 정토회가 명상 센터를 짓기 위해 구입해 놓은 공터에 도착했습니다. 스님은 많은 여행객들이 수자타아카데미를 방문했다가 명상을 할 수 있게 해달라는 요청을 했는데 그 수요를 해결해주고자 이곳에 땅을 구입하게 되었다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 정토회 명상센터 부지
명상센터 부지에서 다함께 아침 식사를 했습니다. 수자타아카데미에서 주먹밥과 삶은 계란, 오렌지를 도시락으로 싸주어서 전기밥솥을 들고 오지 않고도 아주 맛있게 식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도시락을 먹고 있는데 저 멀리 강의 동편에서 아침 해가 서서히 떠올라 탄성을 자아내기도 했습니다.
▲ 일출을 보며 먹는 아침 식사
명상센터 부지를 나오자 대문 앞에는 스님으로부터 사탕을 받고자 많은 아이들이 긴 줄로 앉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한 명 한 명에게 사탕을 주며 환한 웃음을 보였습니다.
사탕을 주고 나서 스님은 뿌듯한 표정으로 왜 성지를 순례할 때마다 동네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눠주는지 그 이유를 알려주었습니다.
“제가 내생에 인도에 태어나면 제자가 많을 거예요. 사탕 먹고 이미 약속한 사람이 엄청나게 많아요. 옛날에는 한국말로 ‘이 사탕 하나 먹은 인연으로 다음 한 생을 바치겠습니다’라고 다 따라하도록 했어요. 요즘은 그냥 저 혼자 속으로만 말하지만요. 이처럼 공짜가 없다는 게 인연과보예요. (모두 웃음)
그리고 저는 다음 생에 쓸 돈도 많이 준비해놨어요. 세뱃돈을 주면서 ‘이생에 안 갚아도 되지만 다음 생에는 동그라미 네 개 더 붙여서 갚아라’라고 합니다. (모두 웃음)
그랬더니 어떤 사람은 ‘나는 이거 안 받겠습니다’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문제없다’며 받아요. 돈이 문제가 아니라 일단 갚으려면 만나야 하잖아요. 내생에도 다시 만날 수 있으니까 좋은 거래요. 그래서 ‘야, 그것 참 기특한 생각이다’라고 했어요.” (모두 감탄하며 박수)
걷는 동안 송수신기로 들려오는 스님의 이야기는 계속 웃음을 자아내었습니다. 스님과 함께 순례를 할 때만 느낄 수 있는 기쁨인 것 같습니다.
이어서 순례단은 부처님이 수자타의 공양을 받은 곳에 세워진 탑을 향해 걸었습니다. 다음 이야기에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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