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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자타아카데미 학생들이 준비한 환영행사를 마친 후 스님은 정토회 순례단을 이끌고 부처님이 6년 고행한 전정각산에 올랐습니다.
전정각산의 중턱에는 부처님이 수행하며 머무셨다는 유영굴이 있었습니다. 유영굴 앞에는 너른 공터가 있었는데, 스님은 순례객들을 공터의 나무 그늘 아래에 앉게 한 후 전정각산과 관련된 부처님의 일화를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저희들이 도착한 이곳이 전정각산입니다. 들어보셨죠? ‘전정각’이라는 말은 ‘정각을 이루기 전에 계셨다’는 뜻으로 한문으로 ‘前正覺’입니다. 그래서 저희가 정문 앞에 지은 절 이름도 ‘전정각사’입니다. 인도 말로는 ‘뿌락 뽀디 힐’이고, 동네 사람들은 ‘둥게스워리’라고 부릅니다. 그러니 가야 지역에서는 “둥게스워리 가자”고 해야지, “전정각산 가자”고 하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습니다.
부처님께서 카필라성에서 출가를 하신 후 왕사성으로 오셔서 두 분의 스승을 모시고 수행을 하신 뒤에, 그분들의 경지에 이르렀지만, 그것이 완전한 해탈이 아님을 아시고, 스승 곁을 떠나서 이곳 가야로 오셨습니다. 왕사성에서 여기까지는 약 80㎞, 즉 200리가 됩니다. 그렇게 오셔서 가야산에 오르셨습니다. 그 산의 북쪽이 가야 시내입니다. 부처님께서 가야산에 오르셔서 주위를 주욱 둘러보니까 앞에 네이란자라강이 앞으로 흐르고, 그 강 동편에 수행하기 좋은 처소가 있었습니다.
여기는 가야 사람들이 시체를 가져다 버리는 시타림이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곳에 오셔서 ‘많은 수행자들이 수행을 제대로 안 한다. 그래서 나는 그 누구도 행하지 않은 깊은 정진을 하리라’ 고 결심을 하시고 용맹정진을 하시는데, 친구 다섯 명이 정말 존경할 만큼 정진을 하셨습니다. 여기는 시타림이라 사람이 사는 데가 아니니까 먹을 것도 없고, 걸식할 데도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음식도 거의 안 드셔서, 기록에 보면 ‘하루에 대추 한 알을 먹었다’고 되어 있고, 그것도 이틀에 한 알 먹다가 삼 일에 한 알 먹다가 일주일에 한 알 먹는 식으로 하셨답니다. 저는 ‘왜 대추일까?’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이 동네에 와서 살아보니까 여기 대추나무가 많더라고요. 원래 이런 험한 산에는 가시나무가 많은데, 대추나무가 바로 가시나무잖습니까. 잎도 좁고요. 그래서 대추나무는 이렇게 건조한 곳에 잘 살 수 있는 나무인 것입니다.
고행주의자들은 몸이 편안한 걸 구하면 안 되기 때문에 목욕도 하지 않고, 음식도 구하지 않고, 잠도 가능하면 안 잤습니다. 어쨌든 부처님께서는 여기에서 5년이나 용맹정진하셔서 한 마디로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셨는데, 특히 선정에 드셨을 때는 움직이질 않으셨나 봐요. 그래서 목욕도 하지 않은 몸에 먼지가 앉고, 때가 끼어서 이끼가 다 자랐다고 합니다. 그렇게 앉아서 꼼짝도 안 하니 마치 석고상처럼 보였는지 가끔 시타림에 물건을 주우러 오는 천민 아이들이 부처님을 두고 편이 나뉘어서 ‘저 수행자는 이미 죽었어’, ‘아니야, 아직 살았어’라고 입씨름을 했어요. 어떤 아이가 부처님을 향해 돌멩이를 탁 던지거나 막대기로 머리를 때려도 꼼짝하지 않으시니까 ‘봐라, 죽었잖아’, ‘아니야, 살았다니까’ 그러다가 아이들이 심지어 나뭇가지를 부처님의 귀에 꽂고 돌멩이로 칩니다. 죽었나 살았나 확인한다고 그런 거죠. 그 통증이 어땠을까요? 그래도 부처님은 가만히 계셨다고 합니다.
우리는 참선하다가 모기가 물어도 탁 치고 그러는데, 부처님께서는 심지어 숨을 멈추신 적도 있었습니다. 숨을 오래 멈춰보면 머리가 아프고, 가슴이 울룩불룩하면서 늑골이 칼로 도려내어지는 것 같거든요. 여러분들은 숨을 좀 멈춰보다가 답답하면 놓아버리니까 잘 모르겠지만 경전에 보면 그 묘사가 굉장합니다. 그런데 진짜 숨을 오래 멈추고 있어 보면 그 묘사가 어떻게 그렇게 정확한지요. 스님은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요? 저는 고문을 당해 봤잖아요. 숨 못 쉬는 고문을 당해 보니 그 묘사가 정확하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완전한 깨달음을 얻지 못하셨습니다. 우리도 뭐든 해 보면 알지만, ‘노력한다’든지 ‘참는다’는 건 뭘 말합니까? 긴장이 된다는 거죠. 결국 긴장한 상태는 마음이 편안한 상태는 아닙니다. 모든 긴장이 육체적, 정신적으로 풀어져야 선정이 깊이 들어가지, 긴장된 상태에서는 선정에 깊이 들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그렇게 고행을 하셨는데도 오히려 선정의 깊이는, 부처님이 어릴 때 새가 벌레를 쪼아 먹는 걸 보고 나무 밑에서 바로 초선정에 들어갔을 때 수준이 될까 말까 했던 겁니다.
우리는 바라는 게 이루어지면 기분이 좋은 상태를 ‘기분 좋음, 기쁨, 행복, 즐거움’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괴로울 때는 왜 괴롭습니까? 바라는 게 안 되어서 괴로운 거잖아요. 원하는 것만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행복할 거라고 생각해서 “하나님, 부처님” 온갖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의 신앙이 이런 수준인데, 이건 다 마왕의 아들이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100% 들어준다”는 게 마왕 파순의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욕망이라는 건 추구할수록 커지기 때문에 끝이 안 납니다. 그래서 ‘욕망을 억압해야 해탈이 온다’는 입장이 고행주의입니다. 즉, 어떤 욕구도 용납하지 않는 겁니다. 그건 결국 욕구를 억제한다는 건데, ‘억제’는 결국 ‘긴장’입니다.
부처님이 쾌락과 고행을 다해 보셔도 해탈을 못 했을 때 돌아보니까 이게 정반대의 길 같았는데, 사실은 하나였던 겁니다. 두가지 길 모두 욕구에 대한 반응이었습니다. 따라가거나 도피하거나 둘 다 욕구에 대한 반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욕구에 반응하지 않는, 즉 대응을 하지 않는 길을 발견하셨는데 그것은 욕구나 감각을 다만 욕구나 감각으로만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정념’, ‘알아차림’입니다. 다만 알아차릴 뿐 반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리가 아프면 펴거나 이를 악다물고 참는데 다만 통증을 통증으로만 느끼는 거예요. ‘통증이 있구나’ 하면서 통증을 통증으로만 느끼지, 아프다고 다리를 펴거나 아프지만 참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참거나 펴거나 두 가지 중 하나를 합니다. 통증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싫어하기 이전의 상태, 즉 다만 알아차림으로 돌아가야 되는 겁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제3의 길을 발견하시고 고행을 멈추셨습니다. 고행을 멈추었다는 걸 쾌락을 쫓아가는 것으로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참는 것만이 길이 아니라는 것이지 그걸 따라가야 된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내적 긴장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부처님께서는 새로운 길, 중도를 발견하시고 이 산을 따라 한 5㎞를 가서 네이란자라강으로 하산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내일 아침에 그 길을 따라가게 되는데, 부처님은 거기서 목욕을 하시고, 수자타의 공양을 받으시고 성도하셨는데 성도한 자리는 여기서 8㎞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여기서 왼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자연 샘터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산의 유일한 샘터로써 ‘고타마의 샘, 붓다의 샘’으로 불리는데 지금은 건기라 샘물이 말라 있습니다.
부처님은 이곳 전정각산에서 6년이나 계셨던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8대 성지에다 10대 성지라면 카필라성과 전정각산을 넣어야 됩니다. 그러면 전정각산을 바라보면서 함께 경전독송을 하겠습니다.“
설명을 마친 후 스님은 실제 경전 속에서는 이 모습이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지 살펴보자며 경전을 펼쳐 들었습니다. 순례객 모두 다함께 전정각산을 마주 보고 앉아 경전을 독송했습니다.
경전에는 부처님의 수행 모습을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해 놓아서 그 때의 정황을 머릿 속으로도 아주 선명히 그려볼 수 있었습니다.
이어서 이곳에서 극도의 고행을 행했던 부처님의 구도의 정열을 되새겨보며 잠시 명상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2600년이 지난 지금도 동네 아이들이 순례객을 따라 올라와 나무에 매달리며 장난을 치고 있었습니다.
스님으로부터 전정각산의 전체적인 조망에 대해 설명을 들은 후 순례객들은 스님을 따라 전정각산의 칼능선에 올라가 보았습니다. 해질녁 무렵이여서 노을이 아주 멋있었습니다.
산 아래에는 수자타아카데미가 한 눈에 보이고, 산을 둘러싸고 마을마다 JTS가 세운 유치원도 보였습니다.
칼능선을 따라 곳곳에 탑이 세워진 흔적이 보였습니다. 산에 있는 동글동글한 탑들은 현재 남아있는 것만 16개가 된다고 합니다. 거의 산꼭대기마다 탑이 있었습니다. 붓다가 이 산 어디서 명상했다는 걸 표시하기 위해 아쇼카왕이 쌓은 건데, 다른 데는 나중에 추가로 더 탑을 쌓았지만 여기는 오지이다 보니까 아쇼카왕 때 쌓은 원형 탑을 빼고는 손 댄 사람이 없어서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은 것이라고 스님이 알려주었습니다.
▲ 부처님이 머무신 곳곳에 세워진 탑
산을 오르며 흘렸던 땀은 전정각산 위에 부는 시원한 바람 덕분에 금방 다 식었고, 순례객들은 기념 사진을 찍거나 둥게스와리 마을을 바라보면서 상념에 잠기기도 했습니다. 멀리서 바라 본 둥게스와리 마을은 너무나 평온해 보였습니다. 물론 산 아래로 내려와서 가까이서 보면
마을 주민들의 삶은 너무나 비참하지만 말이죠.
▲ 전정각산 위에서 내려다 본 수자타아카데미
저녁 7시에 예불을 함께 올린 후 7시 30분부터는 지이바카병원 2층 홀에서 수자타아카데미와 인도JTS 소개가 있었습니다.
인도JTS 책임자로 있는 보광법사님이 전체 사업에 대해 소개해준 후 교육, 의료, 마을개발, 총무 등 각 파트별로 사업 소개가 이어졌습니다. 특히 결핵환자의 경우 299명이던 환자 수가 거의 대부분 완치되고 지금은 10명만 JTS에서 관리 중이라고 하자 순례객들은 크게 감동하며 박수를 보냈습니다.
▲ 교육 사업을 책임지고 있는 쁘리앙카님
또 지난 4년 동안 JTS의 영양식 지원으로 저체중아 비율이 88%였는데 지금은 10%만 심각한 것으로 판단되어 집중 관리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1993년 스님이 처음 학교를 세울 때는 이곳 마을에서 문자해독자는 단 2명에 불과했는데, 지금은 문맹률이 많아 낮아져서 전체 주민의 70%가 문자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 최근에는 염소 은행을 만들어서 염소를 분양하는 일을 시작했는데, 시범 분양을 받아간 스텝들로부터 반응이 아주 좋다고 합니다. 여러 가지 사업성과들에 대해 보고를 들으면서 순례객들은 감탄사를 연발했습니다.
▲ 작년부터 새롭게 시작한 염소 분양 사업, GOAT BANK
그리고 각 파트별로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스텝들에 대한 소개가 있었습니다. 인도인 스텝들은 대부분이 4살, 5살 등 어렸을 때 스님을 처음 만났다고 합니다. 어릴 때 스님이 마을에서 나눠주던 비스켓을 먹었던 기억을 이야기하는 인도인 스텝들의 모습에 순례객들은 또 한번 큰 박수를 보냈습니다. 구걸하던 아이들이 의젓한 선생님이 되어 있거나 학교의 리더가 되어 있는 모습은 그 자체로 큰 감동이었습니다.
소개가 모두 끝나고 인도인 스텝들은 스님과 순례객들을 위해 선물을 준비했다고 하면서 인도식 막춤을 보여주었습니다. 행사장은 온통 웃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한바탕 웃음이 지나가고 난 뒤, 스님의로부터 ‘수자타아카데미의 어제와 오늘’을 주제로 강연을 듣는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스님은 현재 인도JTS 사업이 해온 성과와 앞으로의 과제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이곳에서 구호활동을 시작한지 올해 23년째가 됩니다. 제가 1993년에 처음 여기를 방문했고, 학교를 시작한 것은 1994년 1월부터입니다. 그동안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죽기까지 했으니까요. 더 말할 것도 없겠지요. 어쨌든 그런 우여곡절 끝에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는 게 가장 중요한 사실입니다.
학교는 정말 많은 봉사자들의 봉사로 이루어졌습니다. 지금은 이 학교 출신 아이들이 자라서 봉사를 하고 있지만, 처음에는 모레 여러분들이 가게 될 부처님 성지, 상카시아에 사는 석가족 청년들이 이리로 내려와서 봉사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제가 누구든 인도 사람을 데리고 학교를 시작해야 했을 거잖아요? 그런데 가야와 보드가야에 있는 교수, 청년들을 데리고 시작해 보니까, 그들이 우리 정토회처럼 정직하게 안 하고, 구호품도 떼어먹는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겨서 석가족 청년들이 내려와서 학교를 운영하게 된 것입니다.
원래 학교를 시작할 때는 종교적인 것은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석가족 청년들이 불교신자이다 보니까 아이들한테 삼귀의도 가르치고, 나중에 유치원을 지어주니까 그 2층에 법당을 짓겠다고 해서, 아까 여러분들이 본 ‘전정각사’라는 법당을 짓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저의 처음 의도와는 달리 불교 재단에서 운영하는 학교 이미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주위에 있는 가야의 청년들이 와서 초기에 봉사를 많이 했습니다. 그러면서 들고, 날고, 이러면서 이런 저런 사고도 생기고, 그러면서 자꾸 교체가 되어가다가 지금은 이 학교의 학생 출신 선생님들이 전부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이 학교의 학생 출신이 아닌 사람은 쁘리앙카 교장선생님과 까메스와르 의사선생님 뿐이고, 나머지는 다 여기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다녔으니까, 나이는 서른 살이 채 안 되는데도 경력은 다 20년 이상 된 봉사자들입니다.
어쨌든 이런 과정을 거쳐서 현재에 이르렀습니다. 문맹 퇴치에는 거의 성공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문맹퇴치’는 유치원에서 계속 이어 나가고 있고, 초등학교는 가능하면 정부학교에 역할을 넘기고 있고, 여기는 예술학교나 기술학교를 하면 좋겠다 싶습니다. 뭔가 이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걸 가르쳐야지, 이 아이들은 공부해서 대학을 나온다고 해도 실업자밖에 안 되거든요. 여기는 대학을 나와 경찰이나 공무원 시험을 쳐서 통과한다고 해도 뒷돈이 어마어마하게 드니까요. 아무리 얘들이 안타까워도 우리가 불법적인 걸 도울 수는 없잖아요. 여기 전기가 22년째 안 들어왔던 이유도 우리가 뒷돈을 안 줘서 그런 거예요. 우리가 아마 뒷돈으로 줄 돈의 약 수백 배를 기름 값으로 썼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까지 와서 좋은 일을 하려는데 뒷돈을 써가면서 할 건 없잖습니까. 그래서 촛불 켜고 지내다가 외부 사람이 올 때만 발전기를 돌리는 식으로 버텼던 겁니다.
이제는 학교운영의 목적을 문명퇴치 수준에서 좀 바꿔보려고 초등교육을 정부 학교에 맡기고 폐지하려고 했지만 안 되는 이유가 정부학교는 대부분 그 지역 양민들이 다니거든요. 지역마다 양민과 천민이 섞여 사는데, 주로 우리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천민 아이들인데 정부학교에 보내도 적응을 못해요. 양민 아이들에게 기가 죽어 10명 중에 3명만 학교를 다니는 겁니다. 양민 아이들은 우리 학교에서 안 받으니까 정부학교에 100% 등록을 하는데, 천민 아이들은 정부학교를 안 가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다시 천민 아이들은 받는 걸로 했습니다.
그러니까 항상 신입생을 받을 때는 정부학교에 우선 등록하도록 하고, 정부학교에 등록 안 한 아이들만 여기서 받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학교에는 양민 아이들 비율이 점점 줄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지금 학교 교육에 조금 변화가 있게 된 겁니다.
그리고 수자타아카데미는 그동안은 정부에서 인가한 학교가 아니었어요. 그냥 문맹퇴치를 목적으로 만든 학교인데, 규모가 워낙 커지니까 지난해에 처음으로 사립 초등·중등학교 설립인가를 받은 겁니다. 왜냐하면 졸업생들이 상급학교를 갈 때 정부학교 이름을 빌려야 했는데, 전에는 무조건 빌려주더니 지금은 잘 안 해주려고 하거든요. 그래서 지금은 수자타아카데미 이름으로 졸업장을 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왜 정부학교로 등록을 안 했느냐고요? 몰라서 등록 안 한 게 아닙니다. 정부학교가 되면 자격 있는 교사를 둬야 하는데 인도 규정상 자격 있는 교사는 석사학위가 있어야 하거든요. 그리고 월급도 많이 줘야 합니다. 그런 자격을 갖춘 교사가 여기 와서 봉사할 리 만무하지요. 하물며 우리가 월급을 보장해 준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들은 봉사정신으로 일을 하지는 않을 겁니다. 또 우리의 시스템은 중학생이 되면 유치원생을 가르치고, 고등학생이 되면 초등학교 1, 2학년을 가르치고, 대학생이 되면 3, 4, 5학년을 가르치고, 스텝이 되면 중학생을 가르치고, 이렇게 서로 돌아가면서 가르치는 시스템인데, 우리가 정부 시스템으로 들어가면 운영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신청을 안 한 겁니다.
게다가 애초에 세웠던 ‘문맹퇴치’란 목적은 이제 이 지역에서 15개 마을마다 있는 유치원 교육으로 어느 정도 달성했기 때문에 이제는 사립학교로 가는 길밖에 없다 싶어서 인가를 내게 된 것입니다. ‘문맹퇴치’는 앞으로는 유치원을 더 강화하는 것으로 풀려고 합니다. 그리고 예전에는 유치원을 전부 중학생이 가르쳤는데, 그래서 중학교 1학년 때는 견습선생, 2학년은 담임선생, 3학년은 원장이었거든요. (웃음)
지금은 조금 더 높여서 유치원을 고등학생과 중학교 상급생이 가르치고, 대학생이 관리하는 것으로 바꿨고, 또 새롭게 쁘리앙카 교장선생님도 오시고, 보광법사님도 오시고 해서, ‘문맹퇴치’라는 목표에서 더 진일보한, 괜찮은 학교로 전환이 될 수밖에 없는 조건이 됐습니다. 그래서 교사들도 자격을 다시 획득하는 시스템으로 전환이 되어야 합니다. 인도에서 교사자격을 획득하려면 일반 대학보다 꽤 많은 돈이 듭니다. 그래도 어쨌든 장기적으로 그렇게 갈 수밖에 없겠지요.
병원도 지금껏 보건소 수준으로 운영했는데, 그 이유가 의사를 외부에서 데려온다고 해도 그 사람은 봉사가 잘 안 되잖습니까. 제이티에스는 ‘봉사자로만 구성한다’는 이념이니까, 월급 시스템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래서 이것도 지금 극복해야 될 문제입니다. 보건소 수준에서 병원 수준으로 가려면 한국에서 전문 의사나 은퇴한 의사가 와야 하는데, 봉사자를 구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파독 간호사 분들이 계시잖아요? 그분들 중에 여기 성지순례 왔다가 자기가 은퇴하면 오시겠다는 분이 계십니다.
인도의 의사들이 봉사자로 오긴 옵니다만 전업이 아니라 파트타임으로, 자기 병원에 가기 전에 여기 와서 하루에 2시간씩 봐주고 가는데 우리가 교통비는 드립니다. 인도는 중국처럼 ‘마을 의사’ 식으로, 정식 의과대학을 안 나와도 병원에 오래 근무한 경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동네에서만 의료활동을 할 수 있게 자격증을 주는데 상시적으로 있는 까메스와르 선생님은 그런 의사예요. 그런데 자격이 중요한 게 아니라 20년의 풍부한 임상경험이 있으니까 주치의나 다름없어요. 우리도 아프면 다 그 선생님한테 가야 돼요.
그런데 제일 핵심은 마을개발, 무엇보다 주택개량입니다. 여기서는 주택문제가 결핵 등 모든 질병의 원인이거든요. 그 다음에 소득 문제인데 그건 간단한 게 아니에요. 이곳의 소득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좀 어렵지만 협동조합이라는 방법이 있긴 합니다. 여기는 ‘고리채’ 문제가 있으니까 마을금고도 조성하고, 또 생산협동조합을 만들어서 동네에서 생산되는 것들을 공동판매하고, 또 조합을 만들어서 공동구매를 해서 서로 나누면, 시멘트 등을 싸게 구입할 수도 있지요.
그런 걸 하려면 젊은이들이 1년씩 파견 와서 봉사하는 정도로는 할 수가 없고, 사회적 경험도 풍부하고, 좀 장기적인 계획도 세울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러려면 첫째 경험이 많은 연세 드신 분이 필요한데, 그분들은 언어도 잘 안 되고, 고집이 세어서 공동생활이 잘 안 됩니다. 젊은이들은 음식도 이것저것 먹고, 말도 조금 하고, 적응도 잘 하는 대신에 전문지식이 없고요.
저 같은 사람이 이런 데 살면 참 좋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제가 어릴 때 살던 곳과 형편이 같으니까 특별히 배운 게 없어도 됩니다. 어릴 때 배웠던 낫질, 괭이질 하나도 여기서는 다 선진기술에 속하거든요. (모두 웃음) 살아온 경험 자체가 여기서는 기술이 되니까요. 그런데 그런 분들은 공동체 생활이 어려워요. 어쨌든 저희가 여기까지는 왔는데 앞으로 제일 중요한 건 돈도 아니고 인력입니다. 인력이 있어야 돈이 더 필요해지는데 인력이 없으니까 돈이 있어도 쓸 수가 없는 상태입니다.
성지순례를 할 때 우리 스스로 밥을 해 먹고, 숙소도 별로 좋지도 않고, 버스비 빼고는 돈 들 일이 별로 없는데 무슨 돈을 그렇게 많이 받나 싶지요. 여러분들 눈치 보니까 말은 안 해도 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이 학교를 짓는데 든 돈의 대부분은 성지순례에서 남은 돈입니다. (모두 박수)
제가 처음에 ‘학교 지을 돈을 어디서 구하나?’를 생각했을 때 두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하나는 제가 성지를 안내해서 돈을 버는 방법이고, 또 하나는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목탁을 치고 절을 하는 방법입니다. 그때 정토회는 작은 셋방 하나 얻어가지고 시작한 수준이었으니까 돈이 전혀 없었거든요. 그런데 마침 고생을 하더라도 성지순례에 동참하겠다는 사람들이 있어서, 제가 처음부터 이렇게 얘기하고 성지순례를 시작했어요.
‘따로 돈 내지 말고, 대신 호텔에 잘 거 순례자 숙소에서 자고, 호텔에서 밥 먹을 거 직접 해 먹자. 대신에 내가 안내는 잘 해줄 테니까 몸만 좀 고생하면 된다. 기분이 나면 나중에 돌아가서 보시를 더하더라도 따로 보시 안 해도 되니까 우선 순례 기간 동안 만이라도 검소하게 살고 남겨서 좋은 일에 쓰자’
그래서 한 번 성지순례를 하면 그것으로 건물 한 동 짓고, 2년 모아서 한 동 짓고, 이런 식으로 해 왔습니다.
저희가 인도에 세운 목표는 2가지입니다. 하나는 종교에 관계없이 인도의 어려운 사람을 돕자는 구호활동이고, 또 하나는 우리가 불교인으로서 인도 불교를 일으키는데 도움을 주자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게 상카시아의 석가족들에게 수련센터를 마련해 주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센터를 짓기 위해서 준비하고 있거든요. 우리가 그걸 위해서 한국에서 모금활동 같은 건 안 합니다. ‘절 지으니까 돈 내라’ 이런 소리를 안 하잖아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순례만 해도 보시를 한 게 됩니다. 그렇다고 따로 더 돈을 내도 안 받지는 않아요. (모두 웃음)
그런데 제가 여기서 돈을 써보면, 같은 돈인데 같지가 않습니다. 미국, 한국, 유럽에서 쓰는 1달러하고 여기서 쓰이는 1달러를 비교해 보면 여기서 쓰이는 게 10배의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있거든요. 여러분들이 절약한 커피 한 잔 값이 여기 아이들 10명의 급식비가 될 수도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기쁘게 고생을 하셔야 됩니다.”
“예.” (박수)
“그러니 여기서 고생한다고 입을 내밀고 그러면 겨우 복 지어놓고 그 복을 감하게 되는 겁니다. 인도에서 버스 빌리고, 버스기사 고용하는 데만 돈을 주지, 여기 스텝은 모두 봉사자로서 누구도 이 일을 하고 따로 돈 받는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인력충원이 잘 안 되어서 운영에 어려움이 있는 건 사실이에요. 여러분이 이렇게 와서 보시를 하는 것도 좋지만 제가 제일 원하는 보시는 ‘몸 보시’입니다. 자신들의 재능을 여기에 몇 년씩 보시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성지순례하고 공부해서 좋고, 또 여기 와서 고행함으로써 수행에도 도움이 되고, 또 그것이 그냥 수행으로만 끝나는 게 아니고 그 돈이 여기 아이들의 밥이 되고 책이 된다는 것입니다. 또 종교가 다른 사람들은 수자타아카데미에 쓰인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불교에 관심 있는 사람은 상카시아에 가보면 알겠지만 인도에 극소수 남아있는 경전 한 권, 법요집 한 권도 없는 불교인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성지순례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공덕을 짓는 것이 된다는 스님의 말씀에 순례객들은 무척 기뻐하며 큰 박수를 보냈습니다.
수자타아카데미에서 자원봉사하고 있는 스텝들 중에는 작년에 성지순례를 할 때 큰 감동을 받고나서 다시 이곳으로 봉사를 하러 온 거사님 한 분이 있었는데 오늘 스님 법문을 듣고 올해는 또 어떤 분이 이곳으로 봉사를 하러 올지 기대가 되었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에서도 마음을 내는 분이 있었으면 좋겠네요.
이렇게 강연을 모두 마친 후 오늘 일정을 모두 마무리했습니다. 순례객들이 잠자리에 든 사이 스님은 성지순례 스텝들과 함께 밤늦게까지 사무실에서 회의를 했습니다.
내일은 새벽 4시 20분에 기상해 예불을 올린 후 5시에 수자타아카데미를 출발해 보드가야까지 걸어서 이동할 예정입니다. 부처님이 이곳 전정각산에서 6년간 고행하시다가 고행을 멈추고 보드가야까지 걸어갔던 그 길을 따라 걸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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