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6.1.13 (인도 8일째)
오전
수자타아카데미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바라나시를 출발하여 부처님이 6년 고행한 전정각산과 이곳 천민들을 위해 스님이 세운 학교 ‘수자타아카데미’에 대해 안내했습니다. 

새벽 5시가 되자 정토회 성지순례단 C팀은 바라나시 사르나트 숙소에서 일제히 함께 출발했습니다. 오늘은 먼 길을 가야 하기 때문에 버스 안에서 유수스님의 집전으로 새벽예불과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고속도로를 한참 달리자 서서히 동이 트기 시작했습니다. 인도 사람들은 기차를 많이 이용하기 때문에 도로에는 대부분 트럭이 줄지어 가고 있었습니다. 



해가 뜨고 나서 조금 있으니 중간에 긴 다리가 나타나 순례단의 단잠을 깨우기도 했습니다. 스님은 순례단이 가고 있는 이 길이 부처님께서 성도 후 걸어갔던 길이라고 알려주면서 다리가 놓인 이 강은 숀강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우리가 지나가는 이 길을 따라서 부처님께서 성도 후 첫 번째로 이 길을 걸어오셔서 다섯 비구를 교화하셨고, 우리처럼 다시 이 길을 따라서 보드가야로 가셔서 우루벨라 가섭 등 1천명을 교화하셨어요. 그때 오고 가셨던 길이 바로 이 길이예요. 

자, 이제 강이 하나 보이죠? 이 강은 숀강입니다. 5개의 강이 강가강으로 합류해요. 야무나강, 강가강, 그하그하라강, 간타키강은 히말리야 간에서 내려오는 강줄기이고요. 데칸고원에서 시작해서 북쪽으로 흘러서 강가강으로 합류하는 강줄기가 숀강이예요. 폭이 굉장히 넓습니다. 지금은 건기라서 사막처럼 모래만 보이는데, 우기가 되면 끝이 안 보일 정도로 마치 바다 같습니다. 다리에 전봇대가 주욱 세워져 있죠? 총 몇 개나 되는지 한번 세어보세요.” 



숀강을 건너 다시 한참을 달린 후 도로 가에 버스를 세우고 잠시 아침 겸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스님은 적당한 식사 장소를 찾기 위해 차를 세우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는데, 나중에 이유를 알고 보니 운전 기사들도 인도 음식을 사먹을 수 있고, 우리들도 도시락을 꺼내 먹을 수 있는, 두 가지를 모두 충족시키는 장소를 찾다 보니 그랬다고 합니다. 운전 기사들까지 세심히 배려하는 스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 전기밥솥을 갖고 다니며 이동 중에 적당한 장소가 나타나면 어디서든 식사를 하는 순례단

식사를 마치고 다시 열심히 달려 12시가 넘어서 드디어 가야 근교에 이르렀습니다. 가야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가야산이었습니다. 버스 창밖으로 보이는 가야산을 가리키며 스님은 짧게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왼쪽에 보이는 것이 가야산입니다. 코끼리 모양처럼 생겼다고 해서 상두산이라고도 불립니다. 이곳에서 부처님이 1000명의 비구를 두고 설법을 했다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라즈길에서 가야로 오셔서 바로 저 가야산 위에 올라가서 주위를 둘러보고는 네이란자라 강 동편이 수행하기가 좋겠다고 하면서 전정각산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전정각산 아래에서 6년 정진하시고 보드가야에서 깨달음을 얻으신 후 바라나시로 가셨습니다. 바라나시에서 오비구를 교화하고 다시 이곳으로 와서 우루벨라 가섭, 나디 가섭, 가야 가섭을 교화하고, 그들을 따르던 1000명의 비구를 이곳 가야산 아래에 모아놓고 설법을 했다고 전해지는 자리입니다.”



직접 올라가보지는 못했지만 경전 속에 나오는 지명이 지금도 그대로 존재하는 것을 보니 부처님의 삶이 역사적 사실로서 더 가깝게 다가왔습니다.  

버스는 다시 네이란자라강을 건넜습니다. 건기여서 강물이 많지 않았습니다. 



“이 강이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실 때 나오는 네이란자라 강입니다. 왼쪽에 힌두 템플이 많이 보이는데 저곳이 부처님이 교화한 나디 가섭의 수행터입니다. 저 아래로 가면 가야 시내가 나옵니다...” 

네이란자라 강을 건너자 얼마 지나지 않아 전정각산이 바로 보였습니다. 수자타아카데미로 들어가는 길에는 도로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였습니다. 스님이 처음 이곳에 방문했을 때는 걸어서 들어가야 했다고 하는데, 오늘 순례객들은 버스를 타고 학교 앞까지 들어갔습니다. 


▲ 전정각산

수자타아카데미 앞에는 많은 학생들이 꽃목걸이를 들고 순례객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스님과 순례객들이 버스에서 내리자 학생들이 차례대로 한 명 한 명에게 꽃목걸이를 걸어주며 환영해주었습니다. 스님은 여러 사람으로부터 꽃목걸이를 받아서 목이 무거울 정도였습니다. 




먼저 정문 앞에 자리한 전정각사 법당에 들어가 참배를 한 후 고 설성봉 거사님의 부도탑을 참배했습니다. 고 설성봉 거사님은 한국 JTS의 스텝으로 파견되어서 기술학교를 건축하신 분입니다. 



수자타아카데미가 생기고 나서 무장한 강도 집단으로부터 세 번 습격을 받았는데, 설성봉거사님은 세 번째 습격 때 총격에 맞아서 이곳에서 사망하셨습니다. 2002년 1월 10일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래서 이곳에 부도탑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설성봉 거사님의 서거 이후로는 학교가 한 번도 습격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설성봉 거사님이 돌아가신 후 이곳에 경찰 한 개 소대가 10년 이상 계속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곳은 굉장히 위험한 곳이었는데 설성봉 거사님의 희생으로 인해 결과적으로는 이 지역의 치안이 안정되었습니다. 그래서 JTS에서는 설성봉 거사님의 기일을 맞이하여 이곳에서 늘 재를 지내는데, A팀이 와서 먼저 재를 지냈기 때문에 C팀은 설성봉 거사님의 왕생극락을 기원하며 해탈주 삼독을 했습니다. 



설성봉님의 영정 사진을 보며 많은 순례객들이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수자타아카데미의 오늘이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희생과 노고가 있었는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어서 스님이 직접 수자타아카데미 곳곳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지이바카병원, 기숙사, 대강당, 게스트하우스, 홍보관, 교무실, 초등학교 건물, 기술학교 건물, 식당 등을 차례대로 둘러보았습니다. 모두들 생각했던 것보다 웅장한 규모의 건물들을 보고, 그동안 다녀갔던 봉사자들의 노고에 감탄했습니다. 


▲ 지이바카병원


▲ 기숙사


▲ 초등학교, 중학교, 기술학교

학교 투어를 마치자 수자타아카데미 학생들이 짜이와 비스켓을 정성껏 마련해 주었습니다. 순례객들은 학생들이 따라주는 짜이 한 잔과 비스켓을 받아들고 매우 기뻐했습니다. 


▲ 순례객들에게 짜이와 비스켓을 나눠주고 있는 수자타아카데미 학생들

짜이를 마시고 나서는 쁘락보디홀 대강당에서 학생들이 준비한 순례단 환영행사가 열렸습니다. 수자타아카데미 학생들이 순례객들을 위해 그동안 갈고 닦은 춤과 노래 솜씨를 멋지게 보여주었습니다. 


▲ 쁘락보디홀 대강당

신나는 인도 음악에 맞춰 저학년팀, 고학년팀, 남학생팀, 여학생팀 등 다채로운 공연이 펼쳐졌습니다. 저학년팀은 아주 애교스럽고 귀여운 춤들을 보여주었고, 여학생팀은 예쁜 인도옷을 입고 나와서 너무나 아름다운 춤동작을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태권도를 보여 준 아이들은 예년과 달리 힘찬 기합 소리가 아닌 신나는 음악 반주에 맞춰 태권도 시범을 보여주어서 큰 웃음을 선사했습니다. 



순례객들은 구걸하던 아이들이 이렇게 달라진 모습을 보고 큰 감동을 받은 모습이었습니다. 멋진 공연을 보며 박수치고 웃음을 보였지만, 웃는 얼굴에는 감동의 눈물이 고여 있었습니다. 이 아이들은 수자타아카데미가 아니었다면 지금도 전정각산 아래에서 구걸을 하며 살아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이들의 멋진 공연이 끝나고, 학교의 설립자인 스님이 무대로 올라와 학생들을 격려해 주었습니다. 학생들은 오늘 공연을 위해 오랜 시간 연습했다고 합니다. 

“나마스떼! 그동안 잘 지냈어요?” 

“네!” 



“공부 잘 하고 있어요?”

“네!” 

“올해 1년 동안 한 번도 결석 안 한 사람 손들어 보세요.”

“저요!” (많은 학생들이 손을 듬)



“올해는 수자타아카데미가 설립된지 22년이 됩니다. 이제 한참 청년의 나이입니다. 처음에 시작할 때는 나무 밑에서 아주 작게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 건물이 조금씩 조금씩 지어지고 아이들이 점점 자라면서 이렇게 커지게 되었습니다. 

지금 선생님들은 대부분 수자타아카데미 출신들입니다. 여러분들도 앞으로 열심히 공부해서 학교 선생님이 되거나, 의사가 되거나, 마을의 지도자가 되거나,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한국에서 오신 분들은 여러분들이 얼굴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동안 여러분들이 공부할 수 있게 후원을 해주신 분들입니다. 그동안 우리들을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는 뜻으로 큰 박수를 쳐주시기 바랍니다.“ 

“단야바드!” (감사합니다는 뜻의 인도말)  



“이번에 오신 분들은 한국에서만 오신 분들이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왔습니다. 제가 소개를 좀 해드릴게요.” 

스님은 미국, 캐나다, 일본, 독일, 베트남, 사우디아라비아, 등 전세계에서 온 순례객들 한 명 한 명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학생들은 환영의 박수를 크게 쳤습니다. 



“이렇게 세계 각국에서 오셨어요. 여러분들은 인도에서 태어났지만 여러분들도 앞으로 공부를 잘 하면 인도 뿐만 아니라 전세계 어떤 나라에 가서도 일할 수 있습니다. 인도에서만 살고 싶어요? 다른 나라에도 가보고 싶어요?” 

“다른 나라에도 가보고 싶어요.”

“그렇게 하려면 공부를 잘해야 해요. 선생님 말씀도 잘 듣고, 부모님 말씀도 잘 듣고, 집안일도 잘 하고, 학교 청소도 잘 해야 해요. 알았지요?”

“네!”

“오늘 공연 잘 봤어요. 제가 매년 올 때마다 똑같은 것만 봤는데, 오늘은 모든 공연이 다 처음 본 거였어요. 그런데 텔레비전에서 나온 거 보고 따라한 거예요? 텔레비전에서 나온 것보다는 여러분들이 동네에서 막 추는 춤이 있잖아요. 그걸 보여줬으면 더 좋았을텐데... 지금 한번 나와서 보여줘봐요.” (웃음) 

그러자 아이들이 서로 나와서 막춤을 추었습니다. 동네 어른들이 연주해주는 전통 타악기에 맞춰 아이들이 늘 추는 춤이라고 합니다. 수십 명이 무대로 나와 몸을 흔들자 순식간에 행사장은 열기가 후끈 달아올랐습니다. 아이들의 막춤에 순례객들도 흥이 나서 함께 무대로 나와 몸을 흔들었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순례객들은 박장대소를 하고, 그렇게 한국인 순례자들과 천민마을 아이들은 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말은 서로 통하지 않지만, 이렇게 웃음과 눈빛, 신나는 춤으로 하나가 된 것입니다. 

아이들은 스님을 향해 꽃가루를 날렸고, 이렇게 설립자를 잊지 않고 매년 정성껏 반겨주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순례객들은 다시 한 번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감동의 무대를 뒤로 하고 순례객들은 수자타아카데미를 빠져나와서 전정각산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학교 정문 앞은 부처님이 6년 간 고행했다고 하는 시타림이 있었던 곳입니다. 이곳에는 허물어진 탑터가 남아 있는데, 여기서부터 스님의 설명이 시작되었습니다. 



“학교 앞을 나오면 바로 돌무더기가 보입니다. 경전에서는 부처님이 시체더미 속에서 수행정진 하셨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여인이 죽기 전에 이곳에 버려졌는데 아직 의식이 있었나 봐요. ‘내 옷을 저 수행자가 입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하자, 부처님께서 그 여인에게 덮여 있던 옷을 입었다고 해요. 그러자 그 여인이 천상에 났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것을 기념해서 이곳에 수투파을 세웠는데 기초석만 남고, 마을 가까이에 있다보니 벽돌은 다 없어졌어요.

이 산은 부처님이 6년간 고행을 했다는 전정각산입니다. 깨달음을 얻기 전에 머문 산이라고 해서 인도말로는 ‘쁘락 보디 힐’입니다. 이 지역 이름은 ‘부정한 땅’ 이라는 뜻을 가진 ‘둥게스와리’입니다. 저 위에 하얀 건물이 보이는데, 저기에 부처님이 6년 고행하실 때 주로 머무신 동굴이 있습니다. 부처님은 이곳에 오래 계셨기 때문에 부처님의 그림자가 남아있다고 해서 ‘유영굴’이라고 부릅니다.”



스님은 유영굴까지 올라가는 동안 가쁜 숨을 몰아쉬며 수자타아카데미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제가 1993년도에 인도에 왔을 때 이 유영굴을 참배하려고 보드가야에서 여기까지 걸어와서 처음 방문을 했어요. 올라가는 길이 오솔길이었는데 지금 여기 할머니들이 앉아 있듯이 조그마한 애들이 입구에서부터 저기 유영굴까지 줄을 서서 주욱 앉아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오늘 무슨 요일이니? 학교가 쉬는 날이니?’ 라고 물어보니 아니래요. 그래서 ‘일요일도 아닌데 왜 학교도 안 가고 여기 있니?’ 하니까 여기는 학교가 없대요. 애들이 수백 명이 있는데 학교가 없는 것이 말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유영굴을 참배하고 마을로 내려와서 마을 어른들과  얘기를 해봤어요. 그런데 진짜 학교가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학교를 짓자 해서 시작이 된 겁니다. 



‘아이들도 너희들의 아이들이고, 나라도 너희 나라이지 않냐. 나는 출가해서 아이도 없는데 왜 나 혼자 학교를 지어야 하느냐. 너희들도 뭐라도 좀 해라.’ 하니까 자기들은 가난해서 아무 것도 할 것이 없대요. 그래서 ‘땅이라도 내놔라’ 하니까 그렇게 가난한 사람들이 땅을 1가트씩 10명이 보시를 했어요. 1가트는 45평입니다. 그곳이 처음으로 수자타아카데미가 지어진 터입니다. 저는 이 동네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보시를 받아낸 사람이예요. (웃음) 

이렇게 해서 학교를 짓기 시작했는데, 일단 나무 밑에서 아이들을 모아놓고 가르치려고 보니까 동네 청년 중에 한 명이 초등학교 4학년까지 다녔다고 하고, 다른 한 명이 8학년까지 다녔다고 해서, 그 둘이 선생님을 하라고 하고 학교를 시작했어요. 저는 우물에서 물통으로 물을 퍼날라가면서 건물을 짓기 시작해서 1년 동안 한 층을 지었어요. 

그런데 강도가 습격해서 선생님들이 두들겨 맞고, 밥 해먹던 도구며 숟가락까지 다 빼앗기자 겁을 내서 철수를 하겠다고 하기에 제가 다시 와서 학교를 열었어요. 이런 우여곡절 끝에 학교가 열려서 공부가 계속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교실 세 칸에 교무실 한 칸이면 충분하겠다 싶었는데, 아침 조회 때마다 아이들이 자꾸 쓰러지는 거예요. 그래서 의사를 데려와서 건강검진을 시켰어요. 의사가 하는 말이 약이 급한 것이 아니라 영양실조가 심하기 때문에 숫제 우유 하나와 비스켓 하나를 주는 게 낫다는 겁니다. 그래서 급식을 시작했어요. 



학생 수를 150명 정도로 예상하고 급식을 시작했는데, 급식을 하니까 졸지에 학생 수가 300명이 되었어요. 그래서 1층 공사가 끝나기도 전에 아이들이 늘어나서 2층을 또 지은 거예요. 그러다보니 건물 짓는데 3년이 걸리게 되었습니다.” 

22년 전 스님이 유영굴을 참배하고 내려오면서 이곳 마을 사람들과 의논해서 수자타아카데미가 처음 열리게 되었다는 설명을 스님과 함께 유영굴로 올라가면서 직접 들으니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아직도 유영굴로 올라가는 오솔길에는 병자들이 누워서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스님은 수자타아카데미에서는 지난 22년 동안 ‘구걸하지 않겠습니다’ 라는 교육과 캠페인을 꾸준히 해왔음을 알려주었습니다. 한 수행자의 발원이 어떤 변화를 가져오고 있는지 눈 앞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유영굴 앞에는 너른 공터가 있었습니다. 스님은 순례객들을 공터에 앉게 한 다음 전정각산과 관련된 부처님의 일화를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다음 이야기에 계속 이어집니다.

▼ 배고픈 사람은 먹어야 합니다, 아픈 사람은 치료받아야 합니다, 아이들은 제 때에 배워야 합니다. JTS는 인도 불가촉 천민 마을 둥게스와리 아이들을 위해 수자타아카데미를 설립하고 기아, 질병, 문맹 퇴치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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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댓글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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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봉봉님아

스님의 하루를 읽다보면<br />나만을 위해 사는 제자신을 반성하게 됩니다<br />살아계신 보살님 법륜스님 존경합니다_()_

2016-01-26 19:28:57

김희선

소식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그 바쁜 순례기간에 운전기사들 점심까지 고려하여 장소를 잡는 스님의 마음에 고개가 숙여집니다 한 사람의 수행자의 발원이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가...다시 저를 돌아보게 됩니다

2016-01-17 07:01:28

묘각임호경

불가능은없다 는말을보았습니다

2016-01-16 17:0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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