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6.1.10 (인도 5일째) 성지순례 B팀 사르나트 순례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정토회 성지순례단 B팀을 이끌고 부처님이 처음으로 법바퀴를 굴린 초전법륜성지 사르나트를 안내한 후 강가강을 함께 둘러보았습니다. 

 

새벽 5시에 일제히 기상해서 각자 숙소에서 예불과 기도를 마친 순례단은 6시 30분에 ‘사르나트’로 향했습니다. 날씨가 어제보다 더 쌀쌀해진 가운데 한기가 조금씩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길가에는 집집마다 모닥불을 피우고 몸을 녹이는 사람들이 곳곳에 보였습니다. 

 

A팀이 순례할 때와 마찬가지로 매표소 직원이 정문을 열어주자 스님이 가장 앞에 서서 순례단을 이끌고 사르나트에 들어섰습니다. 순례단 모두 향을 피우고 합장한 채로 ‘석가모니불’을 염하면서 한 발 한 발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스님의 뒤를 좇았습니다. 

 


▲ 다르마라지크 수투파

 

먼저 부처님이 처음으로 다섯 비구에게 법을 설한 곳에 세워진 다르마라지크수투파를 한 바퀴 돌고, 이어서 두 번째로 법을 설한 곳에 세워진 다메크수투파를 세바퀴 돌았습니다. 장대한 행렬이 이어졌습니다. 

 


▲ 다메크 수투파

 

웅장한 모습으로 서 있는 다메크수투파 앞에서 순례단은 예불공양을 올렸습니다. 예불이 끝나자 스님이 간절한 마음을 담아 축원 및 발원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먼 길을 달려온 순례단의 건강과 순례 공덕의 회향을 발원하자 순례단도 스님과 한 마음이 되어 그렇게 할 것을 다짐했습니다.  

 


▲ 예불 공양

 

스님은 예불공양을 마치고 자리에 앉은 순례단을 향해 이곳 사르나트에 대해 안내를 해주었습니다. 특히 부처님이 사르나트에 오셨을 때 일어난 많은 일화들을 실감나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먼저 부처님께서 보드가야에서 깨달음을 얻고 이곳 사르나트로 오기까지의 과정, 사르나트에서 다섯 비구를 만나 처음으로 법을 설하는 모습을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저희들이 도착한 이곳이 부처님께서 처음 설법하신 초전법륜성지, 사르나트, 녹야원입니다. 여러분들은 조금 전 입구를 통해 들어오면서 탑의 기초석이 있는 동그란 부분을 한 바퀴 돌았는데요, 거기가 초전법륜성지, 즉 부처님께서 첫 번째로 설법을 하신 곳입니다. 탑 이름은 다르마라지크수투파, ‘법륜탑’ 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설법한 자리가 지금 여러분들이 보고 있는 이 앞의 탑입니다. 이 탑은 다메크수투파라고 합니다. 다르마라지크수투파가 더 크고, 더 중요하지만 그것은 파괴됐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처님께서 두 번째로 설법하신 곳을 상징하는 이 다메크수투파 앞에서 부처님께 예불공양을 올렸습니다.  

 


 

이곳 사르나트가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 여러분들이 아셔야 합니다. 이곳은 초전법륜성지이고, 불법승 삼보가 성립된 곳입니다. 그리고 이곳은 재가신자에게도 굉장히 의미가 있는 곳입니다.” 

 

이어서 이 지역 최고 부자의 외동 아들이였던 야사의 출가 과정과 전법 선언을 하기까지의 과정을 재미있게 들려주었습니다. 

 

“부처님을 포함해서 여섯 명의 아라한들이 이곳에서 정진을 하고 있는데, 아주 잘 차려입은 한 젊은이가 말을 타고 이 숲을 지나갔습니다. 부처님이 그 젊은이를 보시더니 ‘저 젊은이가 내일 아침이면 이곳에 와서 나의 제자가 되겠구나’ 하셨어요. 그러니까 다섯 명의 제자들이 ‘아이고, 부처님. 저 청년은 이곳 카시국의 최고 부자인 구리가장자의 외동아들입니다. 그는 온갖 친구들과 어울려 쾌락을 즐기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가 출가한다는 것은 가능하지가 않습니다’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젊은이는 화려하게 차려입고 말을 타고 지나가다가 어떤 여인의 시체를 봤습니다. 그리고 그 시체에서 너무 냄새가 나니까 인상을 팍 썼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멀리 떨어져 있는 시체를 보고도 인상을 쓰며 지나가는데, 여러 시체들이 섞여있는 곳에 태연하게 앉아있는 수행자, 즉 부처님을 보고 너무 인상이 깊어서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느냐?’고 생각하며 지나갔습니다. 그 젊은이가 바로 야사입니다. 

 

야사가 그날 밤 파티가 열린 연회장에서 무희들과 어울려 노래하고, 춤추고, 술 마시며 놀다가 술에 취해서 잠이 들었는데, 새벽녘에 깨어서 주위를 둘러보니까 촛불이 휘황하게 타고 있는 가운데, 어제 저녁에 같이 놀던 그 아름다운 무희들이 전부 술에 취해서 엎어지고, 자빠져서 잠자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무희들은 술을 먹고 자고 있었으니까, 어떤 사람은 코도 골고, 어떤 사람은 토해 놓고, 어떤 사람은 가슴을 드러내놓고 자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야사는 어제 시타림에서 이리 저리 버려져 뒹굴던 시체들이 연상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의 이 아름다운 연회장이 어찌 무덤과 같은 것인가?’라며 괴로워했습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어젯밤에 아름다운 무희들과 춤을 춘 것은 ‘락’이고, 지금 시체더미처럼 보이는 것은 ‘고’입니다. 그러니까 그때 야사는 ‘락이 곧 고’임을 자각한 것입니다. ‘인생이 고다, 일체가 고다’ 하는 건 ‘일체는 고와 락의 윤회다’는 뜻입니다. 야사가 그날 새벽녘에 떠올린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어제 시체더미 속에서도 편안하게 있던 한 수행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치 나방이 불을 따라 날아가듯이, 어제 자기가 본 수행자에게 마음이 끌려서, 이곳 사르나트로 오는 길에는 바루나 강이 있는데, 그 강에 신발을 벗어놓고 강을 건너 이 숲으로 와서 부처님을 만났습니다. 부처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야사를 맞았고, 야사는 부처님께 엎드려서 ‘괴로워 죽겠다’고 하소연을 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법을 설했고, 야사는 그 법을 듣고 단박에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 출가를 청하니까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오라, 비구여. 여기 법이 잘 설해져 있도다. 그러니 이 법에 따라 정진해서 괴로움에서 벗어나라.’ 

 


 

그래서 야사는 출가사문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다섯 비구는 부처님의 제자로서는 첫 번째 제자이긴 하지만 이들은 원래 수행자였다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깨달은 것이고, 야사는 어제까지만 해도 세속에서 오욕락을 즐기던 사람인데 바로 이렇게 단박에 깨달은 것입니다. 야사가 그렇게 단박에 깨달을 수 있었던 이유는 간밤에 '락'이 곧 '고'임을 자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부처님은 야사 비구와 그 가족을 교화했습니다. 그런데 ‘야사가 출가수행자가 되었다’는 소문이 나니까, 바라나시에 사는 야사의 절친한 친구네 4명이 ‘야사처럼 그렇게 놀기 좋아하는 애가 출가수행자가 되다니’라며 믿지 않았습니다. 경전에는 그 친구들이 ‘그렇게 훌륭한 친구가 출가수행자가 되었다니 우리도 한번 가보자’라고 했다고 좋게 기록되어 있기도 하고, 다른 경전에는 ‘저건 틀림없이 그 수행자가 괴력으로 야사를 꼬였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구하러 가자’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기도 합니다. 어쨌든 그 친구 네 명이 부처님을 찾아왔다가 야사 비구가 편안하게 있는 것을 보고 우려를 덜었고, 야사 비구의 권유로 부처님의 설법을 들은 뒤 모두 출가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인도에는 300여 개의 나라가 있었는데, 그 중 대국이 16개 국이었습니다. 야사 비구가 부잣집 아들이다 보니까 국제적으로 놀았는지, 국제적으로 50명의 절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들이 서로 연락을 해서 또 야사를 찾아왔습니다. 그 50명의 친구들도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총 60명의 아라한이 생겼습니다. 첫 번째가 다섯 비구, 두 번째가 야사와 네 명의 친구, 세 번째가 50명의 친구, 이렇게 해서 총 60명이 되었고, 부처님까지 포함하면 총 61명의 아라한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그 60명의 제자들을 두고 전법 선언을 했습니다. 

 

‘나는 신과 인간의 모든 굴레로부터 벗어났다. 너희들도 해탈을 얻었다. 자, 이제 전법의 길을 떠나거라. 사람들과 신들의 안락과 이익을 위하여 처음도 중간도 끝도 조리 있게 법을 설하라.’ 

 

그래서 60명의 아라한이 흩어지게 됩니다. 또 부처님께서는 ‘나도 우루벨라촌으로 가서 교화설법을 하겠다’라고 선언하시고, 부처님은 혼자서 우루벨라촌, 즉 지금의 보드가야가 있는 지역, 다시 말하면 부처님께서 6년 고행하신 그 근방으로 가셔서 ‘우루벨라 가섭, 나디 가섭, 가야 가섭’ 등 1,000명의 비구를 교화하게 됩니다. 그 사람들은 원래 불을 섬기는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을 교화해서 1,000명의 대중을 이끌고 마가다국의 수도인 왕사성으로 가서 빔비사라왕을 교화하고, 빔비사라왕으로부터 죽림정사를 기증받게 됩니다. 

 


 

이런 교화의 역사가 바로 바라나시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곳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불법승 삼보가 최초로 성립된 곳일 뿐만 아니라 교화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는 점이 인상깊게 다가왔습니다. 사르나트가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 스님의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더 가슴 깊이 느껴졌습니다. 

 

스님의 법문이 끝나자 서서히 동이 트기 시작했습니다. 이어서 스님이 설명해준 내용들이 경전 속에서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 다함께 독송해 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경전 독송을 마치고 나서 한 참가자에게 소감을 물어보니 “그냥 경전을 읽을 때는 잘 와닿지가 않았는데, 스님의 설명을 듣고 나서 다시 경전을 읽으니 한 구절 한 구절이 전혀 새롭게 다가온다”며 감격스러움을 표현해 주었습니다. 성지에 직접 와서 스님과 법사님의 안내를 직접 들어야 하는 이유를 이제서야 제대로 알 것 같습니다. 

 

다음은 부처님께서 처음으로 법바퀴를 굴리신 그 때의 정황을 떠올려보며 명상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아침 일찍 입장한 덕분에 관광객이 별로 없어 아주 고요한 가운데 명상을 할 수 있었습니다. 

 


 

명상을 마치고 나니 배속에서 꼬르륵꼬르륵 소리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스님은 큰 아쇼카 나무가 있는 한쪽 구석을 가르키며 식사 장소를 알려주었습니다. 

 


▲ 조별 식사 시간

 

순례단 모두가 조별로 식사를 하러 간 사이 스님은 법회를 했던 다메크수투파 앞에서 자리를 지켜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잠시만 방심하면 인도 아이들이 물건을 훔쳐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식사를 마치고 수투파 앞으로 모두 모이자 곧이어 수계식이 열렸습니다. 스님은 순례단 B팀 160여 명에게 삼귀의 오계를 설하고 순례 기간 동안 출가수행자의 마음으로 오계를 잘 지킬 것을 물어보았습니다. 순례단은 “잘 지키겠습니다” 하고 크게 대답했습니다. 

 


▲ 수계식

 

수계를 받은 대중에게 법사님들이 가사와 바랑을 한 명 한 명에게 직접 나눠주었습니다. 노란색 가사를 여법하게 수하자 방금 전까지 단순한 관광객이였던 사람들이 일순간 수행자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 연비

 

스님은 가사를 수한 순례단을 향해 환한 웃음으로 격려해주었습니다. 

 


 

“가사를 수하니 모두 승려 같네요. 머리만 깍으면 딱 좋겠는데, 머리도 깍을까요?” 

 

“잘 안들려요.” (모두 웃음)

 

“머리 깍기 싫으니까 안 들린다고 그러네요. (웃음) 승려 생활이라고 해봤자 딱 12일이에요. 12일 동안은 예불할 때도 가사를 딱 수하고 해야 됩니다. 성지를 참배할 때도 반드시 입구에서 딱 가사를 수하고, 향을 하나씩 들고 들어가야 합니다. 알았지요?”

 

“예.”

 


 

이렇게 A팀 160여 명에 이어 B팀에서도 수행자 160여 명이 새롭게 탄생했습니다. 수계식을 마친 대중들은 부처님이 법을 설한 곳에 세워진 수투파를 향해 삼배를 하면서 수행자의 마음을 다시 가슴에 새겼습니다.  

 

 

 

이어서 스님은 사르나트에 있는 수투파와 유적들이 어떻게 형성이 되어졌는지 역사적 변천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부처님이 이곳 사르나트에서 머무셨던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2,600년 전입니다. 부처님이 계실 때는 여기가 숲이었습니다. 그것도 시체를 가져다 버리는, 사람들이 ‘부정 탄다’고 말하는 숲이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머무셨기 때문에 이 땅이 부정한 곳에서 성스러운 곳으로 바뀐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시고 200년이 지나도록 여기엔 건물이 없었습니다. 수행자는 인공적으로 지은 건물 안에 들어가서 자지 않았고, 그저 인공적으로 짓는다는 게 비를 피하는 초막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고 200년 후에 전인도를 통일한 아쇼카대왕이 부처님을 너무 존경해서 불교에 귀의를 해습니다. 그래서 우리처럼 부처님의 발자취를 하나하나 다 찾아갔습니다. ‘이곳이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곳이다’ 라고 하면 거기에 기념탑을 세우고, 또 ‘수자타의 집이 여기다’ 그러면 거기도 기념탑을 세우고, ‘여기가 부처님께서 수자타의 공양을 받은 곳이다’ 그러면 거기도 기념탑을 세우고, ‘여기서 6년 동안 고행하셨다’ 그러면 거기도 기념탑을 세우고, ‘여기서 물 드셨다’ 그러면 거기도 기념탑을 세우는 식으로, 부처님께서 태어나신 때부터 열반하신 때까지 발자취를 모두 찾아가 탑을 세웠는데, 얼마나 많이 세웠느냐 하면, 인도에서 ‘수도 없이 많이 세웠다’는 의미로 ‘8만 4천개의 탑을 세웠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원래 부처님의 진신사리탑은 여덟 개가 있었는데, 그 중에 한 개는 못 건드리고, 나머지 일곱 개 탑에서 사리를 일부 꺼내어서 자신이 탑을 세운 곳마다 넣어서 모든 부처님의 발자취를 징표로 남겼습니다. 그리고 8대 성지에는 ‘아쇼카 석주’라고 하는 기둥도 세웠습니다. ‘여기는 부처님이 태어나신 곳이다’, ‘여기는 처음으로 설법하신 곳이다’라는 식으로 전부 기둥에 표시를 했습니다. 만약에 아쇼카왕이 그런 표시를 안 했더라면 우리는 지금 이곳이 초전법륜성지인지도 몰랐을 것입니다. 인도에서 불교가 없어진지 700년이 되었기 때문에 성지가 다 황무지나 정글이 돼버렸거든요. 그래서 지금으로부터 130년 전에 영국 사람들이 탐사를 하면서 아쇼카왕이 세운 석주를 발견하고, 또 거기에 기록돼 있는 문장도 발견해서 지금 우리가 이렇게 부처님의 발자취를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현장 법사님이 ‘룸비니에서 어디만큼 동쪽으로 가니까 뭐가 있더라’고 기록한 것도 근거가 되어서 지금 부처님 성지가 대부분 복원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아쇼카왕 시대에 처음으로 기념탑이 세워졌습니다. 다만 절은 안 지었습니다. 아쇼카왕 당시를 ‘마우리아왕조’라고 하는데, 그게 B.C. 3세기입니다. 최초로 조각과 같은 형태를 만든 것은 마우리아왕조 시대입니다. 그리고 마우리아왕조가 망하고, 인도 전체가 다시 통일된 때가 A.D 1세기에서 3세기입니다. 이 때가 쿠산왕조 시대이고, 가장 유명한 왕은 카니시카왕입니다. 이 왕조는 원래 아프가니스탄에서 일어난 뒤 마치 아리안족이 남하해서 내려왔듯이 인도 대륙까지 점령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아프가니스탄에 가면 1세기 내지 3세기 시대의 탑이 수 천 군데에 있습니다. 그것을 탈레반들이 대포를 쏴서 완전히 파괴하거나 부수었습니다. 제가 아프카니스탄에서 구호활동을 할 당시에 직접 돌아볼 수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아프카니스탄이 무슬림 국가이지만 원래 불교 국가였습니다. 

 

이 쿠산왕조 시대에 불상이 처음 나옵니다. 원래는 감히 부처님을 사람 모양으로 그리지 못했어요. 대신 마우리아왕조 시대에는 부처님을 보리수나 발바닥 모양으로 상징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우리아왕조가 멸망하고 알렉산더대왕이 펀잡 지방까지 쳐들어 왔어요. 그 영향을 받아서 조각이 발달합니다. 그게 간다라예술이라는 겁니다. 이 간다라예술 시대의 불상을 보면 조각이 사람 모양으로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되기 시작합니다. 또 쿠산왕조 시대 때 많은 절이 지어지기 시작합니다. 성지에 탑만 있는 게 아니라 스님들이 사는 집, 즉 절이 지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쿠샨 왕조가 망한 뒤 5세기에 들어선 왕조가 굽타 왕조입니다. 여기 있는 탑들은 대부분 굽타왕조 시대, 즉 지금으로부터 한 1,600년 전의 것입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고구려의 광개토대왕 이후인 장수왕 시대에 해당됩니다. 원래 있던 탑에다가 다음 시대에 더 덧붙여서 더 크게 만들고, 다음 시대에도 더 덧붙여서 더 크게 만들다 보니 탑이 이렇게 커진 것입니다. 처음부터 이렇게 크게 만든 게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탑을 발굴하다 보면 여기까지는 마우리아시대의 것, 여기서부터는 쿠산시대의 것, 이 바깥은 굽타시대의 것, 또 이 바깥은 어느 시대의 것이라고 구분할 수가 있습니다. 사르나트에 있는 현재의 건축물들은 대부분 굽타시대의 것입니다. 여기서 나온 조각들도 대부분 굽타시대, 즉 5세기의 것입니다.”

 

이 외에도 스님은 이곳 주변에 자리잡은 건물들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려주었습니다. 설명을 다 듣고 나니 ‘그래서 오늘날 이런 모습이 되었구나’ 하고 알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다함께 단체 사진을 찍었습니다. 학교 다닐 때처럼 네 줄로 서서 '반팔 나란히'를 한 다음 좌양좌를 하니 가지런한 모양새가 되었습니다. 모두 환하게 웃으며 성지에서의 감격을 사진 한 장에 담아 두었습니다. 

 


▲ B팀 단체 사진

 

그리고 스님은 조별로도 한 장씩 사진을 찍어주었습니다. 뙤약볕에도 불구하고 스님은 순례단을 위해 계속 웃음을 보여주었습니다. 

 


▲ 조별 사진

 

이어서 무변심 법사님, 묘당 법사님, 여광 법사님, 대광 법사님, 네 분의 안내로 사르나트 지역의 유적지 곳곳을 모두 둘러보았습니다. 법사님들을 따라 차량별로 흩어진 순례단은 부처님이 첫 안거를 보내신 곳에 지어진 물간다쿠티, 아쇼카대왕이 세운 석주, 사르나트박물관, 담마팔라 전법사가 세운 신물간다쿠티 비하르 등을 자세히 들여다 보았습니다. 

 

이렇게 사르나트 순례를 모두 마치고 다섯 비구가 부처님을 영접한 자리에 세워진 영불탑으로 향했습니다. 영불탑의 앞면과 옆면, 뒷면까지 둘러본 후 탑 꼭대기에 있는 건물에 대해 모두들 의아해 하자 스님이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 영불탑. 차우간디수투파.

 

“탑 꼭대기에 있는 이상한 건물이 보이죠? 저것은 불교의 탑이 아닙니다. 무굴제국을 세운 사람이 처음 전쟁에서 패했을 때, 여기에 비구니 스님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곳으로 도망 와서 숨어 있다가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나중에 대제국을 건설하자, 그걸 기념해서 탑 위에 저렇게 세운 것입니다. 그러니 저것은 무슬림이 세운 것입니다.”

 

영불탑을 짧게 둘러본 후 곧바로 강가강으로 향했습니다. 마침 오늘은 일요일인데다가 시크교의 축제날이었습니다. 산스크리트대학에서 하차해 고돌리아촉까지는 무사히 들어갔으나 고돌리아촉부터 수많은 인파들이 축제 행렬을 구경하느라 발디딜 틈이 없었습니다. 

 


 

겨우 인파를 뚫고 강가강 주변 다사스와메드 가트에 도착했습니다. 스님은 대중들보다 일찍 도착해 오는 순서대로 탈 수 있게 배를 잡아 주었습니다. 

 


▲ 다사스와메드 가트

 

배가 모두 출발하자 스님의 안내가 이어졌습니다. 오늘은 A팀과는 다른 코스로 배를 타게 되었습니다. 지난번 A팀 때는 버스가 갓길 주차를 해서 벌금을 물고 먼 곳으로 이동이 되어 한참을 걸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B팀 때는 스님의 제안에 따라 다사스와메드가트에서 배를 타고 강 하류로 내려가서 라즈가트에서 배에서 내리는 코스로 변경했습니다. 

 


 

유유히 강가강을 따라 내려가니 저 멀리 뿌연 연기가 솟아오르는 곳에 화장터가 보였습니다. 스님은 배를 화장터 가까이에 다가가게 한 후 인도인들의 화장하는 문화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 앞에 보이는 곳이 그 유명한 강가강의 화장터입니다. 지금 누군가가 뭘 들고 강물 쪽으로 내려오고 있지요? 저 사람이 들고 있는 게 시신이고, 시신을 덮은 천이 분소의입니다. 저렇게 들고 와서 강물에 한 번 적셨다가 계단에 둔 뒤에 불에 태우는 겁니다. 살았을 때도 죄업를 씻기 위해 강물에 목욕을 하지만, 죽었을 때도 한 번 강물에 적셔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장작을 쌓고, 그 위에 시신을 놓고, 다시 그 위에 장작을 쌓습니다. 그런 뒤에 장작더미 가장 밑에 지푸라기 같은 걸로 불을 붙입니다. 우리도 옛날에 상여를 메고 다리나 개울을 건널 때 상여꾼들이 ‘상여가 안 간다’며 제자리에 있으면 상주가 행여에 돈을 꽂아줘야 상여꾼들이 움직였듯이 여기도 ‘장작에 불이 안 붙는다’면서 불을 안 붙이고 있으면 상주가 와서 돈을 줘야 불을 붙이고 그럽니다. 

 

이 전체가 화장터입니다. 한꺼번에 열 군데, 스므 군데씩 화장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지금 불붙고 있는 데는 전부 다 화장이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불이 붙는 데를 보세요. 시신이 보이지요? 시신이 불에 다 타면, 그 재를 모두 쓸어서 강에 넣어버립니다. 

 


 

기름이 지글지글 끓어서 바닥으로 떨어지고 그럽니다. 삼겹살 굽듯이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삼겹살 구워서 먹는걸 좋아하는데, 그것도 다 남의 시신을 먹는 것 아닙니까? 뭐가 맛있다고 그렇게 구워먹습니까?” (모두 웃음)

 


 

시체가 타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 대중들에게 스님이 삼겹살은 뭐가 그렇게 맛있다고 구워먹냐고 하자 정신이 번쩍 차려지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시체가 타는 모습을 본 몇몇 사람들은 마음을 쉽게 진정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스님이 돌아가신 영가들을 위해 다함께 기도를 하자고 했습니다. 

 

“자, 그럼 기도하겠습니다. 합장하십시오. ‘나무아미타불’ 열 번 하겠습니다.” 

 


 

간절히 염불을 한 후 다시 한번 화장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다시 스님의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화장하려는 사람이 돈을 많이 주면 장작을 많이 쌓고, 적게 주면 적게 쌓아서 시신을 태워줍니다. 입구에서 구걸하는 사람들도 최소한 장작값은 벌어놓아야 자기가 죽었을 때 화장을 할 수 있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저 사람들이 구걸하는 자리 밑에 보면 자기가 죽을 때 쓸 장작값은 모아놓고 있습니다. 

 


 

화장이 끝났을 때 시체가 하나도 안 남고 모조리 타야 되니까, 마지막에는 향나무를 뿌립니다. 그러면 마치 기름이라도 부은 것처럼 불이 확 타올라서 시체가 흔적도 없이 타는 겁니다. 화장이 끝나면 뼈만 남고 흔적도 없이 타야 되는데, 어린애들은 보통은 반만 타다가 맙니다. 그러면 강물에 쓸어 넣어버립니다. 한국에서도 애기들 무덤은 안 만들잖습니까. 여기도 애기들이 죽으면 몸에 돌을 매달아서 강에 던지는 식으로 수장도 합니다. 

 


 

여기는 우는 사람이 아무도 없지요? 상주는 머리를 빡빡 깎고 꽁지만 조금 남겨 놓습니다. 저기에 머리를 빡빡 깎은 사람들은 상주라는 뜻입니다.”

 

강가강 화장터의 풍경이 순례객들에게 많은 충격을 던져준 것 같았습니다.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인도인들의 모습이 우리에겐 아직 낯선 풍경이라는 사실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었습니다. 

 


▲ 라즈가트

 

이렇게 강가강 순례까지 마치고 나서 다시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숙소에서는 한국에서 가져온 전기밥솥으로 조별로 저녁 식사를 해먹었습니다. 

 

밥솥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기 시작하자 김치, 깻잎, 고추장, 멸치볶음 등 온갖 반찬들이 꼬깃꼬깃 비닐에 싸인 채 하나씩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정토회 성지순례의 백미는 바로 이렇게 식사를 조별로 직접 해 먹는 재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순례객들은 “돈 절약, 시간 절약, 배탈 예방, 입맛 최고, 일석사조인 것 같다” 하면서 맛있게 식사를 했습니다. 

 


▲ 조별 식사 시간

 

저녁 6시부터는 저녁 강연이 열렸습니다. 스님은 12일 동안 법사님들과 함께 부처님의 10대 성지를 순례하는 대중들에게 “자세한 설명은 성지에서 법사님들께 직접 들을 수 있다”고 하면서 10대 성지 전체와 부처님의 일생 전반에 대해 개괄적인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그 중에서 오늘은 부처님의 사문유관과 유성출가에 대한 스님의 법문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사문유관’이라고 해서, 동쪽 문으로 나가서 늙은 사람을 보고, 남쪽 문으로 나가서 병든 사람을 보고, 서쪽 문으로 나가서 죽은 사람을 보면서, 삶의 생노병사에 대한 깊은 고뇌를 하셨고, 결국 북쪽 문으로 나가서 사문류 계통의 수행자를 만나 그로부터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고 출가를 결심하게 됩니다. 

 


 

기존의 브라만교에서는 아무런 답을 못 찾다가, 그 사문을 만나게 되면서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되었고, 그래서 출가도 결심했지만, 부모의 강력한 반대로 출가의 뜻을 이루지는 못하고 있었어요. 열아홉 살에 처음으로 출가를 결심하셨고, 스물아홉 살에 출가를 하셨으니까 거의 10년 동안, 이미 마음은 냈지만 부모의 반대 속에서 수행생활을 했습니다. 세속에 있으면서 수행생활을 한 것입니다. 부처님의 ‘6년 고행’만을 ‘수행’이라고 하면 너무 짧지요. 몸은 비록 세속에 있었지만 이미 엄청난 사색과 수행을 하셨기 때문에 출가하신 이후 금방 스승의 경지에 오를 수 있었던 겁니다. 결국 부처님은 밤에 성벽을 넘어서 몰래 출가를 했습니다. 부모가 도저히 승인을 안 해 주니까 ‘유성출가’, 즉 몰래 성을 넘어서 출가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왕’이나 ‘왕궁’이라는 것은 우리가 부러워하는 대상이잖습니까. 그래서 노래를 잘해도 가수왕이라고 하고, 뭐든지 좋은 것에는 왕을 붙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세속은 얼마나 왕이 되기를 추구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바로 그 왕위를 버리셨습니다. 왕이 된다는 것은 물질적으로도 제일 많이 갖고, 권력적으로도 제일 많이 갖고, 인기도 제일 많이 갖게 되는 것을 뜻하는데, 부처님께서는 그것이 행복의 길이 아니라며 버리신 겁니다. 

 

이것을 볼 때 현재의 우리 불교는 출가정신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다 부처님이 버리신 그 ‘왕위’를 얻기 위해서 부처님의 이름을 부르며 ‘달라’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그게 얼마나 큰 모순입니까. 숫제 어느 신에게 빌면서 ‘나 왕 되게 해 주세요’, ‘나 뭐 되게 해 주세요’라고 하는 것은 그래도 논리적으로는 앞뒤가 맞습니다. 신은 우리가 빌면 해 준다고 전제를 하니까요. 그러나 적어도 부처님의 이름을 빌어서 이런 복을 구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은 그 복이 행복으로 가는 길, 열반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며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그 ‘버림’이 얼마나 확실한 것이었느냐? 출가하셔서 마가다국의 수도 왕사성에 이르러 탁발을 하고 있었는데, 그때는 부처님께서 깨닫기 전으로써 수행자였을 때입니다. 그때 빔비사라왕과 길에서 만나게 됩니다. 왕이 보니까 수행자의 자태가 원만하거든요. 그래서 신하들에게 ‘저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봐라’라고 하니 신하들이 알아보고는 ‘저 분은 카필라성의 왕자였는데, 지금은 출가하여 수행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라고 보고를 했습니다. 그 당시에 왕자가 출가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는지 ‘왕자가 출가했다’는 소문이 벌써 세상에 퍼져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빔비사라 왕이 수행자에 대한 예를 갖추면서 ‘당신은 누구요? 왕자가 출가를 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당신이 그 사람이오?’라고 물으니 부처님께서 ‘맞습니다. 제가 바로 카필라성의 고타마 시타르타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빔비사라 왕이 ‘당신같이 훌륭한 사람이 수행자가 되는 것은 너무 아깝소. 그러니 내 여동생과 결혼을 해서 내 나라를 같이 다스립시다’ 라고 첫 번째 제안을 했습니다. 카필라성은 빔비사라왕이 다스리는 마가다국의 1개 주에도 해당이 안 될 정도로 작은 나라인데 왕은 부처님께 대국을 같이 경영하자고 제안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대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침묵으로 거절을 한 것입니다. 그러자 왕은 같이 경영을 하자는 제안이 부처님의 마음에 안 차나 보다 싶어서 두 번째로 ‘그렇다면 당신이 이 나라를 다스리시오’라며 선뜻 왕위를 내어줄 의향을 보였습니다. 그래도 부처님께서는 승인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왕은 세 번째로 ‘이분이 남의 것을 갖는 걸 미안해서 그러나 보다’ 싶어서 ‘나에게 강한 군대가 있는데, 내가 이 군대를 당신에게 빌려줄 테니, 이 군대로 이웃나라를 쳐서 대국을 만드시오’라고 제안을 했는데, 그때서야 부처님께서는 ‘대왕이시여, 어떤 사람이 입안에 있는 가래가 필요 없다고 탁 뱉었는데, 남이 뱉은 가래를 보고 자기 것보다 더 굵다며 그것을 집어먹을 사람이 있겠습니까?’라고 되물었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기에는 그런 사람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없어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왕위’를 ‘내 입에 있는 가래’에 비유하셨던 것입니다. ‘내가 내 나라의 왕위도 버리고 나왔는데, 내가 왜 남의 나라를 다스리겠으며, 남의 나라를 빼앗아서 다스리는 것은 더더욱 당치도 않다’는 뜻인 것이지요. 우리가 그렇게 추구하는 ‘왕위’라는 것에 대한 붓다의 자세가 어떠했는지를 이 일화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이 분명치 않으면, 우리가 출가 수행을 하면서도 늘 흔들리게 됩니다. 이렇게 부처님께서는 유성출가, 즉 왕위를 버리고, 성을 뛰어넘어 출가하신 분입니다.”

 

부처님은 왕위를 버리시고 출가하셨는데, 왜 오늘날 우리들은 그런 왕위를 다시 찾고 있냐는 물음은 순례객들에게 성지순례 기간 동안 풀어야 할 큰 화두를 던져준 것 같았습니다. 

 

이 외에도 스님은 부처님의 일생과 10대 성지에 대해서 약 두 시간 동안 강의를 해주었습니다. 스님께서 몸이 아프셔서 강연 중간에 한 차례 휴식을 해야 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스님은 한 가지라도 순례객들에게 더 알려주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시는 모습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은 강연을 마치면서 법사님들과 12일 동안 성지순례를 떠날 대중들에게 격려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이런 부처님의 삶을 잘 새겨서 좋은 마음으로 이 순례를 다니십시다. 인도까지 와서 인도사람 미워하고, 인도정부 욕하고 다니면 누구만 손해입니까? 나만 손해입니다. 그러니 좋게 생각하는 버릇을 자꾸 들이는 게 필요합니다. 

 

다만 조심은 해야 되겠지요. 순례가 재미있도록 하되 조심도 해야 됩니다. 긴장할 정도는 아니더라도 유의는 해야지, 막 방심해서 일행도 잃고 길도 잃어서 우왕좌왕하지 않도록 하세요.”

 

건강이 좋지 않음에도 대중들의 안위를 더 걱정하는 스님의 애틋한 마음이 느껴져서 마음이 짠해졌습니다. 

 


 

이렇게 오늘 일정을 모두 마치고 순례객들은 모두 숙소로 돌아가 먼길을 떠날 채비를 했습니다. 내일 스님은 성지순례 C팀을 마중하기 위해 바라나시 공항에 다녀온 후 저녁에는 입재 법문을 해줄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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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댓글 53

0/200

김승희

스님 감사합니다.

2016-01-13 06:28:00

최정심

대광법사님 이렇게보니 더욱더반갑습니다 몸건강하시고 좋은기운많이받으셔요

2016-01-12 20:41:39

신용재

모두 뜻깊은 순례되시길 바라며, 건강히 돌아오시길 빕니다, 법륜스님의 깊은 보살핌에 감사드립니다~

2016-01-12 14:2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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