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6.1.9 (인도 4일째) 성지순례 B팀 입재식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새벽 5시에 성지순례 A팀을 보드가야로 떠나보낸 후 오후 1시에는 성지순례 B팀을 마중 환영하고, 저녁에는 성지순례 입재 법문을 했습니다. 

 

새벽 4시 20분이 되자 숙소 각 방마다 알람소리가 울렸습니다. 4시 50분까지 모든 짐을 싣고 출발 준비가 끝나자 버스가 주차되어 있는 곳으로 스님이 걸어나왔습니다. 

 


 

버스가 시동을 걸고 출발하자 스님은 순례객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송수신기로 말했습니다. 

 

“쉬라바스티에서 다시 만나요. 그 때까지 즐겁게 순례하고 오세요!”

  

순례객들도 창밖으로 손을 흔들며 웃음으로 답했습니다. 

 

이렇게 정토회 성지순례단 A팀을 보드가야로 떠나보낸 후 오전에는 원고 교정 업무와 성지순례 준비 상황을 점검한 후 오전 11시가 되자 다시 성지순례단 B팀을 환영 마중하기 위해 바라나시 공항으로 출발했습니다. 

 

스님은 보자기로 싼 꽃목걸이를 풀어헤치고 순례객이 나올 때까지 뙤약볕 아래서 기다렸습니다. 긴 줄을 지어 순례객이 차례대로 출국장을 빠져나오자 스님이 환한 웃음으로 한 명 한 명에게 꽃목걸이를 걸어주었습니다. 

 

“환영합니다.” 

 


 

스님의 한 마디에 순례객들은 어제밤 공항에서 노숙을 했던 고생스러움이 모두 녹아나는 기분이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어떡해서 우리에게 이런 영광이!” 하면서 매우 기뻐했습니다.  

 


 

순례객 모두가 버스에 올라타자 드디어 바라나시 근교에 위치한 사르나트로 향해 출발했습니다. 송수신기를 통해 스님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버스 안에서 일제히 환호가 터져나왔습니다.  

 

“사르나트 녹야원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스님, 반가워요!” 

 


 

“어제 저녁에 잘 주무셨어요?”

 

“네!” 

 

“얼굴 표정을 보니까 제대로 못 잔 것 같은데요. 성지순례를 하는 동안은 이렇게 노숙하듯이 계속 다녀야 해요. 그런데 오늘과 내일 일정인 바라나시와 끝나는 날 일정인 아그라에서만 호텔에서 자고 나머지 일정은 전부 순례자 숙소에서 잡니다. 그래서 침낭을 꼭 챙겨야 해요. 

 

침낭과 여권만 있으면 아무 문제가 없어요. 14일 동안 밥은 안 먹어도 죽지는 않아요. 그래도 밥을 먹고 다녀야 하니까 전기밥솥을 잘 챙겨다녀야 하고요. 잠을 자려면 침낭이 꼭 있어야 되고요. 예불 공양을 올려야 하니까 가사, 깔판, 경전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해서 이제부터는 순례자로서 14박 15일 동안 지내는 겁니다. 알겠지요?”

 

“네!”

 


 

“저희들이 도착한 이곳은 바라나시 국제공항입니다. 바라나시 시에서 서북쪽에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동남쪽으로 내려가서 사르나트로 갑니다. 

 

바라나시는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입니다. 도시의 역사가 4천년 정도 됩니다. 물론 바라나시보다 더 먼저 생긴 도시들이 있겠지만 그 도시들은 지금은 폐허가 되어 사람이 살지 않아요. 지금도 사람이 사는 도시 중에 부처님 당시에도 큰 도시였는데 지금도 큰 도시인 것은 바라나시가 유일합니다. 왕사성, 사위성, 바이샬리, 카필라바스투는 지금 작은 시골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바라나시는 힌두교의 최대 성지입니다. 강가강의 주변에 도시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는 곳은 바라나시에서 북쪽으로 10km 정도 떨어져 있는 사르나트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사람이 죽으면 그 시체를 갖다 버렸던 시타림이었어요. 부처님께서 그곳에서 처음으로 설법을 하셨기 때문에 초전법륜성지가 되었습니다. 그곳에는 사슴이 많이 살았나봐요. 그래서 사슴동산, 녹야원이라고 불리웠습니다. 

 

어제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세수도 못했으니까 오늘 숙소에 들어가면 세수도 하시고 보름 동안 다닐 짐정리까지 다 해놓고 저녁식사 후에 입재식을 하겠습니다.”

 

스님의 환영 인사와 간단한 안내가 끝나자 이제 순례객들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한국에서는 늘 깨끗한 거리를 다녔는데, 하루 아침에 쓰레기와 짐승, 사람이 뒤섞인 혼잡한 거리를 보니 모두들 혀를 차며 감탄사를 연발했습니다. “아이고, 저런 곳에 도대체 사람이 살 수가 있나?”, “소가 도로에 누워서 안 비키네요.”, “저기 사람들 바글바글한 것 좀 보세요.”

 


 


 

낯선 인도의 풍경이 모두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나 봅니다. 40분 남짓 지나자 드디어 숙소에 도착했습니다. 숙소를 배정 받고 짐을 푼 후 어제밤 공항에서 뒤척이며 잔 피로를 풀었습니다. 

 

오후 5시가 되자 방콕 공항을 경유해서 온 또다른 팀이 숙소에 도착했습니다. 스님은 숙소 입구에서 한 명 한 명에게 꽃목걸이를 걸어주었습니다. 역시 모두들 무척이나 기뻐했습니다. 

 


 

저녁 6시부터는 만찬과 더불어 입재식과 입재 법문이 이어졌습니다. 식당에서 밥을 먹는 것은 오늘 첫날과 마지막 날 단 이틀 뿐입니다. 뷔페로 준비된 인도 음식들을 하나씩 접시에 담아와서 맛있게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스님이 일어서서 어떤 사람들이 순례에 참가했는지 하나 하나 소개를 해주었습니다.

 

서울정토회부터 시작해서 차례대로 서대문, 성동, 노원, 제주, 송파, 양천, 수원, 용인, 분당, 남양주, 춘천, 원주, 강릉, 인천, 일산, 안양, 부천, 대전, 천안, 청주, 광주, 순천, 목포정토회까지 전국 경향 각지에서 160여 명이 참가했습니다. 각 지역이 불려질 때마다 소속 정토회 참가자들은 환호를 하면서 손을 들었습니다. 특히 제주도와 남양주, 안양에서 많이 참가해 큰 박수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번 순례를 준비할 스텝들에 대한 소개가 있었습니다. 1호차를 담당하면서 인도JTS에서 8년이나 근무한 여광 법사님, 2호차를 담당하면서 성지를 안내해 줄 무변심 법사님, 3호차를 담당하면서 인도JTS에서 5년 동안 근무한 대광 법사님, 4호차를 담당한 묘당 법사님, 인도인 스텝인 아미타부, 실무를 맡은 임혜진님이 차례로 소개되자 순례객들은 큰 박수로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특히 마지막에 “바라나시와 쉬라바스티 일정 안내를 맡은 법륜입니다.” 라고 스님이 당신을 소개하자 행사장은 떠나갈 듯한 함성과 환호가 터져나왔습니다. 

 

 

이어서 “순례에서 가장 중요한 건 목숨이죠. 우리들의 목숨을 담보해 줄 운전 기사님들을 소개합니다.” 라고 하자 스님이 소개될 때 질렀던 함성 만큼이나 큰 함성이 터져나왔습니다. 

 


 

박지나 JTS 대표님과 여광 법사님이 기사님들 모두에게 선물을 건네자 기사님들 중 한 분이 답례로 인도 노래를 멋지게 불러주었습니다. 

 


 

스님도 “지금까지 인도인들이 불렀던 노래 중에서 가장 잘 부른 것 같다”고 칭찬을 해주었습니다. 

 

이렇게 소개를 모두 마치고, 순례객들은 삼귀의, 반야심경, 청법가, 삼배를 하며 스님에게 입재 법문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성지순례를 할 때의 마음 자세, 인도의 기후, 지형 등 자연환경과 사회 문화적 환경에 대해 알기 쉽게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먼저 순례를 하는 마음 자세에 대해서는 그동안 26번의 성지순례 기간 동안 있었던 온갖 사례들을 이야기 다양한 예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러면서 마음을 살피는 순례를 해볼 것을 제안했습니다. 

 

“화장실을 어떻게 가는지 걱정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가다가 차를 세우고 “왼쪽 남자, 오른쪽 여자”라고 하면 그냥 가서 간단하게 누고 와야 됩니다. 여기는 화장실이 없는 게 아니라 화장실 아닌 곳이 없습니다. (모두 웃음) 

 


 

다만 동네에 가서 누면 안 됩니다. 인도 사람들도 아무 데나 누는 건 아니고, 다 벌판에, 사람이 없는 데로 가서 누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들도 어차피 일주일만 지내고 나면 볼일 보러 갈 때 버스와의 간격이 점점 좁아져서, 심지어 버스 옆에서 눠서 민망할 정도입니다. (모두 웃음)

 

그래도 한 10미터는 떨어져야지, 너무 차 옆 붙어서 누면 안 됩니다. 첫날은 한 200미터까지 걸어가서 누던데, 그러다가 점점 가까워져서 일주일 지나면 아무 데서나 그냥 눕니다.  그래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첫째, 우리 순례자들이 ‘인도에는 화장실이 없다’고 하니까 인도 스텝이 ‘인도에는 화장실 아닌 곳이 없다’고 했던 것이고, 둘째, 너무 차 옆에서 누는 걸 보고 ‘아이고, 좀 다른 데로 가지. 엉덩이가 다 보이잖아’ 라고 하니까 누군가가 ‘보는 자기만 괴롭지, 뭐’ 라고 했던 것입니다. (모두 웃음)

 


 

그러니까 보더라도 못 본 척 하세요. “봤다”고 하지 마세요. 그래야 아무 데나 누지요. 안 그러면 멀리 가야 되잖습니까. 그렇게 생활을 간편하게 해야 됩니다. 

 

이렇게 한 열흘 살고 한국에 가면 여러분들이 뭘 먹어도 이 보다 잘 먹고, 뭘 입어도 이보다 잘 입고, 어디에 자도 이보다 잘 자기 때문에, 한국에서 살면서 먹고, 입고, 자는 것에 대해서 신경을 꺼도 됩니다. 완전히 의식주로부터 해방이 되는 것이지요. 물론 며칠 지나면 원래대로 돌아가는 게 문제지만요. 

 

그래서 이 여행은 순례이기도 하지만, 마치 여러분들이 깨달음의 장에 가서 5일 동안 많은 걸 느끼고 오듯이, 새로운 걸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잠자리도 불편하고, 땀나도 씻지도 못하고, 국이 없어서 밥도 안 넘어간다’라고 생각하면 여행 내내 인상 쓰면서 괴롭게 보내야 됩니다. 

 

그러나 정말 순례자의 마음을 가지면 여행 내내 기쁠 뿐만 아니라 한국에 돌아가서도 사람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 동안 늘 전전긍긍하던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니까요. 순례 다녀와서 인생이 확 바뀌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보살님은 남편이 죽은 뒤 아이 셋을 키우느라고 굉장히 살기 어렵다고 생각해서 성지순례를 올까말까 망설였는데, 성지순례를 하면서 자기가 가진 게 너무 많다는 걸 자각했답니다. 그래서 그분은 지금 아주 자유롭게 자신 있게 산답니다. 순례의 공덕이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인상 쓰고 다니지 말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성지순례에는 첫째 ‘바깥 구경’, 즉 바깥에 있는 성지를 보는 게 있고요, 둘째 ‘경계에 부딪쳐서 일어나는 자기 마음이 얼마나 죽 끊듯이 시쭉빼쭉 하는지’를 보는 게 있습니다. 자기의 분별심을 늘 살피면서 간다면 아마 순례 중에 깨달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순례를 하면서 바깥에 있는 다양한 것들을 구경하기도 하지만, 경계에 부딪쳐서 아주 다양하게 일어나는 자기 마음을 놓치지 말고 구경할 수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그것은 더 큰 의미의 성지순례가 될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스님이 직접 재미있게 생활 안내를 해주자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나왔습니다. 이 외에도 스님은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을 통해 순례객들이 어떻게 수행을 할 수 있는지 재미있게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다음은 부처님이 태어나셨던 인도의 기후, 자연, 사회문화, 역사적인 환경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세계 4대 문명의 하나인 인더스 문명은 인더스 강 유역에서 발생한 문명입니다. 그럼 이 문명의 주체는 누구겠습니까? 인도 대륙에 원래 살고 있던 민족을 흑인 계열의 ‘드라비다족’이라고 하는데, 인더스 문명의 창조자는 이 드라비다족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약 3,500년 전에 아프가니스탄 지역에 살던 종족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백인 계열이었는데, 이 사람들이 힌두쿠시를 넘어서 파키스탄, 즉 인도 북쪽에 있는 펀잡 지방으로 남하해서 내려왔습니다. 그렇게 내려와서 서쪽으로 간 사람들을 ‘서아리안’이라고 합니다. 이 서아리안이 중동의 이란 그리고 유럽까지 건너가서 오늘날 유럽 민족이 됐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펀잡 지방에서 동쪽으로 이동한 사람들을 ‘동아리안’이라고 합니다. 이 동아리안족이 바로 브라만문명의 창시자들입니다. 

 

이렇게 3,500년 전에 남하해서 내려왔을 때 이 사람들은 원래 유목민족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연 신을 찬미했습니다. 그렇게 ‘찬미’한 여러 가지 노래를 우리가 ‘베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베다문명’이 발달했습니다. 

 

그 다음에 이 사람들이 갠지스강 유역의 힌두스탄 평원을 점점 정복해 들어갔습니다. 그러면서 이 지역에 새로운 나라를 많이 세웠는데, 이 시대를 ‘종교시대’라고 합니다. 종교시대에 들어가서 카스트제도가 정립되었습니다. 신을 찬미하는 브라만계급, 정복을 하는 무사계급인 크사트리아 계급, 목축하고 농사짓고 장사하는 바이샤계급, 즉 평민계급. 그리고 원주민들을 노예로 부렸는데 그 노예 계급을 수드라라고 합니다. 이렇게 4개의 계급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리고 정복이 거의 다 끝나자 제일 한가한 사람들이 무사계급들이 됩니다. 그래서 무사계급에서 많은 사색가가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브라만 계급이 아니기 때문에 종교적인 역할은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로 철학적 사색을 많이 하면서 소위 ‘철학시대’가 도래하게 됩니다. 이걸 ‘우파니샤드 철학’이라고 합니다. 가장 핵심 되는 사상은 ‘범아일여설’입니다. 저 우주에 ‘브라만’이라는 신이 있고, 나에게는 ‘아트만’이라고 하는 자아가 있는데, 이 ‘범아’가 하나가 되는 것이 해탈이고 구원이라는 게 ‘범아일여설’입니다. 

 

그 다음에 네 번째 시기가, 브라만 문명의 쇠퇴기입니다. 즉 브라만 사상의 많은 모순이 발생하게 되면서 전통으로 내려온 주류의 브라만들과 브라만사상에 문제제기를 하는 비주류의 사문이 출현했습니다. 혈통으로서의 종교인이 아니고 자기가 선택해서 출가하고 종교인이 되는, 즉 수행자가 되는 새로운 현상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걸 ‘사문류’라 그럽니다. 이렇게 브라만의 가르침에 대해 모순을 많이 제기하면서, 마치 중국의 춘추시대에 출현했던 백가쟁명처럼 온갖 주장이 나오게 됩니다. 유물론을 비롯해서 신을 부정하는 얘기 등등 많은 사상이 나오는데, 이 시기를 ‘브라만 문명의 쇠퇴기’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3,500년 전부터 시작된 브라만 문명은 부처님이 출현한 2,600년 전부터 쇠퇴기에 들어갑니다. 브라만 문명의 쇠퇴기, 즉 사상적, 정치적으로 굉장히 혼란한 시기, 소위 ‘대혼란의 시기’에 부처님이 출현하신 것입니다. 

 

부처님이 출현한 당시에 국제질서는 어땠을까요? 지금 지구상에는 UN에 가입한 나라만 200여 개가 되잖습니까. 그 당시 인도 대륙에는 크고, 작은 나라가 300여 개가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16개의 대국이 있었고요. 그 중에 초강대국인 ‘G2’가 마가다국과 코살라국이었습니다. 마가다국의 수도가 왕사성이고, 코살라국의 수도가 사위성입니다. 부처님은 그 ‘G2’의 수도에서 제일 교화활동을 많이 하신 겁니다. 요즘으로 치면 뉴욕과 베이징에서 주로 활동을 하신 것이고, 또 ‘G7’에 해당되는 런던, 파리, 베를린, 도쿄, 모스크바 등에서도 활동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는 16대국에 다 다니시면서, 즉 인도의 전 세계를 다니시면서 교화활동을 하신 것입니다. 

 

지금의 인도 지도로 본다면 부처님의 활동 무대는 북인도에 속합니다. 북인도라고 해도 지금의 카슈미르 지역이 아니고, 델리에서 캘거타 사이의 힌두스탄 평원이 주로 부처님의 활동 무대였습니다. 이 지역에는 산이 거의 없고 전부 평원입니다. 

 


 

제일 위쪽은 히말라야 아래의 룸비니인데, 부처님이 태어나신 곳이 바로 히말라야 산 아래에 속하는 카필라성의 룸비니입니다. 거기도 평원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50㎞만 북쪽으로 가면 바로 히말라야 산맥이 시작됩니다. 여름엔 저 북쪽으로 히말라야 산맥이 병풍처럼 보였겠지만 실제 부처님이 태어나신 곳은 평지였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이 도를 이루신 보드가야는 데칸고원의 끝자락입니다. 그러니까 200m 내지 300m 높이의 언덕 같은 산이 있는 지역입니다. ‘부처님이 수행했다’고 하는 라즈길이나 보드가야에는 200m 내지 300m의 낮은 산들이 있습니다. 전정각산도 히말라야 같은 산이 아닙니다. 이 두 군데를 빼고, 여러분들이 13일 동안 전인도를 다니시면서 산이라고는 조그만한것도 하나 구경을 못 하고, 대평원만 계속 다니게 되는 겁니다. 

 

부처님은 카필라성의 룸비니, 즉 작은 나라의 왕자로 태어나셔서 남쪽으로 내려가서, 그 당시에 최고의 번성지인 ‘왕들의 집’, 즉 ‘라자그라하’라고 불리는 왕사성에서 스승을 만나 공부를 하셨고, 그곳을 떠나 가야로 와서 6년 수행을 하시다가 성도를 하셨는데 그래서 그 지역은 ‘보드가야’라고 불리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카시국의 바라나시에 와서, 내일 우리가 가게 될 사르나트에서 처음으로 설법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보드가야 우르벨라촌으로 가서 천 명의 수행자를 교화하시고, 다시 왕사성으로 오셔서 빔비사라왕을 교화하고, 수다타 장자의 초대를 받아 2대 초강대국이었던 사위성의 쉬라바스티로 가셔서 교화활동을 펴셨습니다. 그리고 성도 후 6년, 출가 후 12년 만에 고향인 카필라성으로 돌아가셔서 석가족을 위해서 교화하셨습니다. 그렇게 전지역을 다니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런 자연과 역사, 사회적 조건 속에서 태어나 살면서 활동을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글자만 보면 안 됩니다. 그런 말이, 그런 질문, 그런 대답이 있는 사회적, 역사적 배경을 알고 우리가 법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에는 산이 많으니까 이상세계가 ‘산 너머’잖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아리랑 고개를 넘는다’고 표현하는데, 인도문화에서는 강폭이 넓으니까 못 건너가잖습니까. 인도인들에게 이상세계는 ‘강 건너 저 언덕’입니다. 그래서 ‘피안’, 즉 ‘저 언덕’이라는 말을 많이 쓰고, 또 ‘저 언덕으로 넘어가는’ 것이 주로 ‘배’로 묘사가 되어서 ‘반야용선’이라는 말도 쓰지요. 그런 용어들이 다 인도의 자연환경과 관계가 있는 겁니다. 

 

스님들이 탁발을 하거나 한 벌의 옷을 입고 사는 문화는 이곳의 기후에서나 가능하지, 한국의 기후에서는 한 벌의 얇은 옷을 입고 추운 겨울을 못 견딜 것입니다. 그러나 남방불교, 즉 남쪽의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같은 따뜻한 나라에서는 인도의 전통을 그대로 유지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그런 복장으로는 살 수가 없어서 승복도 바뀐 것입니다. 

 

저도 여기 와서 있어보면,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은 인도보다 훨씬 따뜻하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열대우림지역이니까요. 그런데 인도는 겨울에 춥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나 수행자들이 겨울에는 참 추웠겠다’는 걸 알 수 있고요. 또 여기는 안개가 너무 짙게 낍니다. 그래서 안개가 자욱한 속에서 만남이 이루지는 것도 여기 와서 직접 기후를 경험해 봐야 이해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춥다, 덥다”만 하지 말고, ‘이런 기후, 이런 추위와 더위에서 어떻게 지내셨을까?’도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또 여기서는 “박시시”, 즉 걸식을 요구하는 것이 천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거지를 굉장히 천하게 보는데, 여기는 공무원도 “박시시”라고 합니다. 우리가 볼 때는 그러는 게 좀 이상하지만 여기서는 “선의를 베푸시오”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요구한다고 꼭 다 줘야 되는 건 아닙니다. 이런 문화의 차이가 있다는 걸 이해하시면 됩니다. 특히 중국은 이런 것과 상반되는 문화라서, 걸식문화가 유지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절에서 밥을 해 먹게 된 것인데, 남방불교 스님들은 절에서 밥해 먹는 걸 보고 “절이 살림집이냐? 무슨 수행자들이 저러느냐?”고 하는 겁니다. 기후환경과 사회적 배경이 다르면 생활도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살았던 자연적인, 시대적인 배경에 대해 풍부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은 현재 인도에서 불교는 어떤 비중과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에 대해 설명해 주었습니다. 

 

“근세에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했다가, 무슬림을 믿는 파기스탄과 방글라데시, 힌두교를 믿는 인도, 불교를 믿는 스리랑카로 나뉘어 독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도 대륙 안에는 무슬림이 약 11%, 힌두교가 80%, 불교는 0.5%, 자이나교도 0.5%, 시크교가 한 2%, 기독교가 한 2%입니다. 그래서 인도는 현재 힌두교 국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불교인들은 동쪽인 버마의 경계지점에 많이 있는데, 그 사람들은 다 소수 민족입니다. 그들도 우리처럼 황인종인데, 그 사람들이 소수민족으로서 소승불교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히말라야 산맥이 있는 곳에서는 티벳불교를 믿고 있습니다. 여기도 소수민족입니다. 그 다음에 뭄바이를 중심으로 해서 중서부가 마하쉬트라 주인데, 인도 독립의 영웅이라는 천민 출신의 ‘암베드카르’가 힌두교로는 카스트 해방을 못 이끌기 때문에 불교로 개종을 해서 그 카스트 전체가 불교로 개종을 했습니다. 그게 200만 명 내지 300만 명이 됩니다. 

 

그래서 인도에는 동쪽의 소승불교, 북쪽의 탄트라, 즉 밀교, 최근에 일어난 신불교, 이렇게 해서 500만 명 내지 600만 명 정도 되는 불교 인구가 있습니다. 이 중에 소수민족들은 별로 힘이 없고, 암베드카르 계열은 정치적 파워가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계급해방론을 주장하면서 정당도 만들었는데, 그 정당은 인도 내에서 세 번째로 큰 정당으로서 연정을 통해 집권당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인도에서 불교는 거의 소수인데다가 주로 동쪽이나 북쪽에 치우친 소수민족 중심이기 때문에 대륙에서는 거의 보이지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대부분의 성지가 다 힌두교의 소유로 돼버렸습니다. 부다가야 대탑까지도 힌두교 소유일 정도입니다. 그런데 힌두교에서는 불교를 배척하지는 않고, 자신들의 일부로 봅니다. 그래서 부처님을 비쉬누신의 여덟 번째 화신으로 보고 있습니다. 불교는 인도에서 일어났지만 힌두교와는 완전히 다른, 굉장히 합리적이고 이치적인 가르침인데, 세월이 흐르면서 무슬림의 침입을 받고 나서 나중에 힌두교로 흡입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성지순례를 떠나기 전 그 배경이 되는 많은 지식들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스님의 설명을 듣고 나니 인도인들의 행동과 삶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할 수가 있었습니다. 

 

두 시간 동안 열정적으로 강연을 해 준 스님에게 순례객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 갈채를 보냈습니다. 

 


 

스님이 “궁금한 점이 있으면 물어보세요” 라고 말하자 아무도 손을 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마도 한국에서 출발해 이틀 동안 먼길을 오느라 너무 피곤한 것 같았습니다. 사홍서원을 끝으로 강연을 마친 후 순례객들은 숙소로 올라가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내일은 새벽 4시 20분에 일어나 예불과 기도를 각자 숙소에서 한 후 6시 30분에 초전법륜성지인 ‘사르나트’로 이동합니다. 오전에는 사르나트에서 수계식을 하고, 오후에는 강가강을 둘러볼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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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댓글 30

0/200

박경애

가고싶은 인도 성지순례 ?

2016-01-22 00:36:14

박경애

가고싶다?

2016-01-22 00:33:47

오진수

웃음 꽃이 함박 피었네요<br />행복 하세요

2016-01-15 06: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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