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6.1.8 (인도 3일째) 성지순례 A팀 사르나트 순례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성지순례 A팀을 이끌고 붓다가 깨달음을 얻고 처음으로 법을 설한 곳인 ‘사르나트’를 순례한 후 강가강을 둘러보았습니다. 

 

새벽 5시에 각자 숙소에서 예불과 기도를 마친 정토회 성지순례단 A팀은 짐을 싣고 6시 30분에 사르나트로 향했습니다. 아직 문이 열리지 않아 정문에서 잠시 기다리다가 문이 열리자마자 입장을 시작했습니다. 

 


 

120여 명의 순례객은 길게 줄을 선 채 향을 하나씩 들고 목탁 소리에 맞춰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천천히 탑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먼저 붓다가 처음으로 법을 설했다고 하는 ‘다르마라지크 수투파’를 한바퀴 돌았습니다. 

 


▲ 붓다가 처음으로 법을 설한 곳, 다르마라지크 수투파

 

부처님과 그 제자들이 탁발을 하기 위해 차례로 줄을 서서 마을로 걸어갔듯이 순례단도 마치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부처님이 처음으로 법을 설한 곳에 왔다는 감격에 벌써부터 눈시울을 붉히는 분들이 보였습니다. 

 


 

다음은 두 번째로 법을 설한 곳에 세워진 ‘다메크 수투파’를 세바퀴 돌았습니다. 다메크 수투파는 아주 크고 웅장해서 멀리서도 한 눈에 그 모습이 드러났습니다. 

 


 

스님은 순례단의 맨 앞에 서서 탑돌이를 마쳤고, 곧이어 탑을 향해 사시공양 예불이 이어졌습니다. 한국에서 의례적으로 하던 예불과는 정말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부처님이 법을 설하셨던 바로 그 자리에서 하는 예불이기 때문입니다. 

 


▲ 예불 공양

 

정성을 다해 머리 숙여 예불을 한 후 스님은 순례단을 위해 발원 및 축원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성지순례단 A팀 모두 아무런 사고 없이 무사히 성지순례를 마치고 그 공덕을 고통받는 이웃들에게 널리 회향하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순례단이 모두 자리에 앉아 바로 스님의 안내가 이어졌습니다. 

 

“여러분들은 오늘 이곳에서 수계를 받게 됩니다. 성지순례기간 동안 여행객이 아닌 순례자로서, 즉 출가수행자로서 수계를 받고 가사도 받아서 앞으로 예불할 때는 반드시 스님들처럼 가사를 수하고 예불을 하겠습니다.

 


 

부처님이 룸비니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육신을 두고 하는 말이고, 정확하게 붓다가 이 세상에 출현한 것은 보드가야에서 깨달음을 얻었을 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붓다가 깨달음을 얻었다 하더라도 우리는 붓다를 알 수가 없습니다. 어리석은 우리 중생에게 있어서의 부처님은 바로 이곳에서 처음 설법을 하심으로 해서 출현하게 된 거예요. 중생에게 붓다가 출현한 곳은 붓다가 설법을 하셔서 어리석은 우리를 깨우쳐줌으로써 우리도 붓다가 되는 길을 열어준 이곳 초전법륜 성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곳에서 순례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45년간 설법을 하시고 쿠시나가라에서 완전한 열반에 드셨습니다. 붓다는 육신을 버림으로 해서 모든 중생의 가슴 속에 붓다의 씨앗을 심었고, 그 결과 일체 중생이 붓다가 되는 길을 열어놓으셨어요.

 

붓다는 보드가야에서 깨달음을 얻으시고 그 자리에 49일간 머물며 깨달음의 기쁨을 즐기셨습니다. 이것을 법열(法悅), 즉 법의 기쁨이라고 해요. 법의 기쁨을 즐기신 후에 이 좋은 법을 혼자 간직하기에는 너무 아까워서 세상을 둘러봤더니 세상 사람들이 다 어리석음에 둘러싸여 괴로워하고 있었어요. ‘이 좋은 법을 그들에게 전해서 그들 또한 이 자유와 행복을 만끽하도록 해줘야겠다.’ 

 


 

누가 이 법을 듣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지 생각해보니까 붓다가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 중에서는 마지막 스승이었던 웃타카 라마푸트라가 가장 지혜로운 자였어요. 그분이라면 이 법을 듣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붓다가 신통을 통해서 살펴보니 스승이 이미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그 전에 만났던 아라라 까라마라는 스승을 다시 떠올려서 살펴보니 그 분 또한 바로 전날 밤에 돌아가셨어요. 두 분의 스승 모두 이미 돌아가셨기에 법을 이야기하고 나눌 수가 없었어요. 

 

세 번째로 떠올린 사람들이 자기와 함께 6년간 수행했던 다섯 명의 도반들이었습니다. 이 도반들은 붓다가 중도를 발견해서 고행을 버리고 새로운 길을 가자 수행을 포기했다고 단정해서 붓다를 떠났던 이들이에요. 여섯 명이 같이 수행할 때는 고타마 싯다르타가 너무너무 극심한 고행을 성실히 하니까 도반들이 그 모습을 보고 친구이지만 존경했습니다. 그러다 부처님께서 고행을 버리자 모두 실망해서 ‘저 사람은 더 이상 수행자가 아니다’라고 하고는 전정각산을 떠나 이곳 바라나시 근교의 사르나트에 있는 고행림, 즉 시체를 갖다 버리던 시타림으로 왔어요. 당시의 붓다는 자신의 정진에 집중하느라 도반들에게 신경 쓸 여유가 없었습니다. 자기를 비판하고 떠났지만 그들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들이었기에 부처님께서는 법을 전하러 스스로 이곳까지 걸어오셨습니다. ‘사람들이여, 내가 깨달았으니 나에게 오라’고 한 것이 아니라 법을 전할 사람을 찾아서 붓다 스스로 이곳까지 오셨어요. 여기까지 오는 길이 250km 가량 되는데 11일 만에 오셨다고도 하고 15일만에 오셨다고도 합니다. 대략 보름 정도를 걸어오셨다고 볼 수 있어요.

 

부처님께서는 이곳으로 오는 길에 한 바라문을 만났어요. 부처님의 자세가 너무나 바르고 원만하니까 바라문이 부처님께 ‘당신은 누구를 스승으로 하는 어떤 수행자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나는 누구를 스승으로 삼고 있지 않소. 나는 원만히 깨달았기 때문에 더 이상 나를 가르칠 스승은 없습니다. 나는 일체를 깨달았습니다.’라고 대답했어요. 부처님은 사실대로 말했지만, 이 사람에게는 조금 건방지게 들렸는지 ‘흥!’ 하며 가버렸다고 경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바라문은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서 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깨달음을 얻을 좋은 기회를 놓친 거예요. 

 


 

부처님이 계속 걸어와서 바라나시에 도착하니 드넓은 강가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뱃사공에게 ‘나를 좀 건네줄 수 있소?’라고 청하니 ‘당연히 건네 드리겠습니다. 다만 저는 먹고 살아야 하니 뱃삯을 주셔야 합니다.’라고 했어요. 가진 게 없어 뱃삯을 줄 수 없다 하니 사공도 건네줄 수 없다고 했어요. 그래서 부처님께서 그 강을 뛰어넘어버렸다고 해요. 훌훌 날아서 건너버리니까 뱃사공이 놀라서 기절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라문이 자기의 생각에 사로잡혀서 붓다를 보지 못했다면, 사공은 자기 먹고 사는 데 급급해서 붓다를 알아보지 못한 거예요. 

 

그렇게 바라나시로 오신 부처님은 서쪽문으로 들어가셔서 탁발을 하고 동쪽문으로 나오셔서 바라나시의 북쪽에 있는 사르나트에 도착하셨습니다. 다섯 친구가 수행을 하다가 고타마 싯다르타가 오는 걸 보고 자기들끼리 이야기하기를, ‘저기 고타마 싯다르타가 온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수행을 포기한 사람이니 가까이 오더라도 수행자로서는 예우를 하지 말자’라고 했어요. 요즘으로 치면 같이 출가한 스님 여섯 명이 공부하다가 한 명이 속퇴를 했는데 몇 년 만에 돌아온 것과 같아요. 그러면 옛날의 친구이긴 하지만 절에서 이 사람을 스님으로는 대우할 수 없으니 속인으로 대우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출가수행자로서는 예우를 하지 말자고 한 거예요. 

 

출가수행자에 대한 당시의 예우는 두 가지였어요. 하나는 먼 길을 맨발로 걸어왔으니 발 씻을 물을 주는 것이고 하나는 앉을 자리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하지 말자고 미리 이야기를 했는데, 정작 부처님이 가까이 오자 자기도 모르게 한 사람은 일어나서 ‘여기 앉으십시오’ 하고 자리를 권하고, 한 사람은 물을 떠와서 ‘발을 씻으십시오’ 라고 권했습니다. 생각은 예우하지 말자고 했지만 몸은 예우하는 쪽으로 간 거예요. 마음에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생각으로는 예우하자고 하면서 마음이 내키지 않을 때가 많아요. 그런데 이 사람들은 생각으로는 하지 말자고 했지만 마음에 이미 6년간 같이 살아온 신뢰가 있으니까 마음이 저절로 움직인 겁니다. 

 

그렇게 자리에 앉으신 부처님께 한 도반이 ‘고타마시여, 신수가 참 좋구려’라고 말을 걸었어요. 요즘 말로 하면 ‘야, 얼굴 좋다’ 이렇게 말한 셈이죠. 좋게 말하면 칭찬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수행 포기하고 맛있는 것 먹더니 좋아졌구나’ 이런 뜻입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나를 더 이상 고타마라 부르지 마시오. 나를 여래라 부르시오’ 라고 답했습니다. 친구들이 ‘그러면 당신이 깨달았단 말이오? 그렇게 극심한 고행을 하고도 못 깨달았는데 수행을 포기하고 어떻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소?’ 라고 반박하자 부처님께서는 ‘나는 수행을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라고 답하셨습니다.

 


 

도반들은 부처님의 친구들이었지만 부처님을 믿지 않았어요. 그들은 부처님이 수행을 포기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러자 부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함께 지냈던 지난 6년 동안 내가 한 번이라도 거짓말 한 적이 있소?’ 고타마는 거짓말 한 적이 실제로 한 번도 없었으니 새삼스럽게 거짓말 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제서야 친구들이 의심을 풀고 ‘그렇다면 당신이 깨달은 그 좋은 법을 우리들에게도 들려주십시오’ 이렇게 법을 청했습니다. 

 

고타마와 도반들이 만난 곳은 여기서 남쪽으로 1km 정도 되는 곳에 있는 영불탑(迎佛塔) 자리입니다. ‘부처님을 환영한 탑’이라는 뜻이지만 실제로는 환영하지 않았어요. 그렇다고 환영을 안 한 탑이라고 부를 수는 없으니 이름이 영불탑입니다. 부처님은 영불탑에서 1km 정도 더 숲속으로 들어오셔서 아까 본 다르마라지크 스투파가 있던 자리에 앉으셔서 초저녁에 명상을 하셨습니다. 초야에 명상을 해서 마음을 고요히 하시고, 중야에 즉 한밤 중에는 명상을 풀고 마음을 편안히 가지도록 하고, 후야에 즉 새벽녘에 비로소 설법을 하셨습니다. 

 

그때 처음 설법한 내용이 중도(中道)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수행자라면 쾌락과 고행을 둘 다 버리고 쾌락에 대한 집착도 고행에 대한 집착도 모두 놓아야 한다는 거예요. 쾌락은 당시 주류 사회의 수행법이고, 고행은 거기에 반대한 비주류의 수행법이라고 볼 수 있어요. 이 두 가지를 다 버려야 한다, 즉 중도를 행해야 한다는 게 첫 번째 설법이에요. 그리고 그 중도에는 여덟 가지 바른 길이 있다 하여 팔정도(八正道)를 설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이것이 고다[苦諦]’, ‘이것이 고의 원인이다[集諦]’, ‘이것이 고의 소멸이다[滅諦]’, ‘이것이 고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道諦]’라고 하는 사성제(四聖諦)를 설하셨습니다. 첫 설법에서 말씀하신 중도, 팔정도, 사성제, 이 세 가지가 불교의 핵심사상이에요. 

 


 

이 첫 법문을 듣고 다섯 명 중 한 명인 콘단야가 탁 깨달았어요. ‘깨달음의 장’을 하다 보면 앞이 꽉 막혀서 밤새도록 고민하다가 어느 순간에 탁 깨닫는 사람이 있는 것과 같아요. 콘단야가 깨달아서 얼굴이 환해진 것을 부처님이 보시고 ‘콘단야가 깨달았다! 콘단야가 깨달았다!’ 하며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그가 이 법을 이해했다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오직 부처님 한 분밖에 이 법을 알지 못했는데 콘단야가 깨달았다는 것은 이 법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는 뜻이잖아요. 그래서 부처님은 당신이 깨달을 때보다 더 기뻐하셨다고 해요.

 

콘단야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부처님께 절을 올렸습니다. 스승으로서 예우한 거예요. 원래 다들 친구였는데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서 스승으로서 예우하는 모습을 보고 깨닫지 못한 네 명은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마치 ‘깨달음의 장’에서 깨달은 이의 대답을 듣고 못 깨달은 사람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아요. 

 

그렇게 3일 더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두 명이 또 깨달았어요. 3일 내내 공부에 집중한 거예요. 깨달은 세 명이 탁발을 하고, 부처님과 나머지 두 명은 계속 더 정진했습니다. 그렇게 다시 3일 만에 나머지 두 명이 더 깨달아서 1주일 만에 다섯 명이 다 깨달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삼보(三寶)가 성립되었습니다. 보드가야에서 스스로 깨달은 이 붓다가 나왔고, 이곳 사르나트에서 깨달은 이가 깨닫지 못한 이를 위해 가르침을 편 담마가 나왔고, 그 가르침을 듣고 깨닫지 못한 이가 깨달은 상가가 구성되었어요. 그냥 머리 깎고 스님이 되면 상가가 되는 게 아니에요. 깨달은 이의 가르침을 듣고 깨달아야 상가의 구성원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스스로 깨달은 이 '붓다', 깨달은 이가 깨닫지 못한 이를 깨닫게 해주기 위한 가르침인 '담마', 깨닫지 못한 이가 깨달은 이의 가르침을 듣고 깨달아서 이루는 '상가', 이렇게 불법승(佛法僧) 삼보가 성립되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최고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불법승 삼보입니다. 붓다, 담마, 상가 중 하나만 없어도 우리는 해탈과 열반을 증득할 수 없습니다. 상가가 없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아요. 붓다 혼자만 깨닫고, 붓다의 가르침을 들어서 깨달음을 얻은 이가 아무도 없다면 우리 역시 공부해봐야 헛수고잖아요. 그러니 붓다, 담마, 상가 이 세 가지가 수행자에게 가장 중요합니다. 그 불법승 삼보가 바로 여기에서 성립되었습니다.”

 

성지에서 듣는 스님의 법문은 그 감동이 배가 되는 것 같습니다. 특히 뱃사공은 먹고 사는 데 급급해서, 바라문은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서 부처님의 법을 듣지 못했다는 이야기에 많은 대중들이 공감을 했습니다. 어쩌면 지금도 같은 이유로 부처님의 법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이어서 스님은 야사 등 청년 55명의 출가와 전법 선언, 최초로 재가수행자가 된 구리가 장자에 대한 이야기도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사르나트 성지에 대한 설명을 마치고 다함께 경전을 독송했습니다. 경전에는 바라나시 사르나트에서 일어난 부처님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스님의 설명을 자세히 듣고 나서 그 일이 있었던 현장에 직접 와서 읽으니, 한 구절 한 구절이 정말 가슴으로 다가왔습니다. 

 


 

경전 독송을 마치고 나서는 부처님 당시에 이곳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려보며, 또 성지에 온 감흥을 편안하게 지켜보며, 명상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스님도 고요히 선정에 들었습니다. 

 


 

몇몇 분들에게 물어보니 명상을 하면서 ‘언제 또 이곳에 다시 와볼까’ 하는 생각이 들어 정말 감정이 북받쳤다고 합니다. 

 

동이 틀 무렵에 법회를 시작했는데 벌써 햇살이 따가울 정도로 날이 밝아져 있었습니다. 스님이 순례객들에게 “배고파요? 밥 먹고 수계식을 할까요? 지금 바로 수계식을 할까요?” 라고 물어보자 다들 이구동성으로 “밥 먹고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탑에서 멀리 떨어진 외진 곳으로 모두 이동해 조별로 돗자리를 깔고 앉아 아침 겸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어제밤 숙소에서 미리 해놓은 보온밥통에 담긴 밥과 한국에서 가져온 깻잎, 김치, 고추장 등으로 맛있게 점심을 먹었습니다.  

 


 

이어서 수계식이 열렸습니다. 이곳 바라나시에서는 야사라는 젊은 청년이 출가를 했고, 야사의 아버지도 야사를 찾으러 왔다가 부처님께 귀의하게 되면서 최초로 삼귀의 오계 수계를 받은 재가수행자가 탄생하게 됩니다. 최초의 삼귀의 오계 수계식이 열린 바로 그 자리에서 오늘 한국에서 온 160여명의 순례객들 또한 수계를 받게 된 것입니다. 

 


 


 

가사와 바랑을 모두에게 나눠준 후 스님은 순례객들에게 “이제 진짜로 수행승이 된 것 같네요” 하며 웃었습니다. 특히 앞모습은 조금 부족해 보여도 뒷모습은 아주 가지런하고 정돈되어 보였습니다. 

 


 

수계식을 여법하게 마치자 이제 160여 명의 수행자가 탄생했습니다. 스님은 가사를 수한 순례객들에게 환하게 웃으면서 다시 한번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승려생활이라고 해도 12일 정도 밖에 안 돼요. 그 정도야 어떻게든 할 수 있겠지요?”

 

“예!” (모두 큰 소리로 대답)

 

“이제 먹고 입고 자는 건 잊어버리고 편안하게 성지순례를 하십시오. 상카시아에 가서 마칠 때 출가수행자 생활을 계속하겠다는 사람은 저와 함께 가고, 집으로 가겠다는 사람은 그때 가사를 반납하면 됩니다. (웃음) 

 


 

이튿날 아그라에 갈 때는 가져온 좋은 옷이 있으면 한나절 관광할 때 입을 수 있게 봐줄 거예요. 그러나 그 외의 일정 중에는 모두들 수행자로서 항상 가사를 수하고 스님과 똑같이 생활해야 합니다. 원래 부처님 당시에는 스님과 신도가 따로 없고 출가수행자, 재가수행자 이렇게 수행자만 있었습니다. 우리는 재가수행자로서 여법하게 순례를 해보겠습니다.”

 

가사를 수한 160여 명의 수행자들은 큰 박수와 큰 목소리로 12일 동안 수행생활을 해볼 것을 다짐했습니다. 

 

이렇게 오전 내내 초전법륜성지인 사르나트에서 시간을 보낸 후 마지막으로 스님은 각 차량별로 선주 법사님, 덕생 법사님, 자광 법사님의 안내에 따라 주변을 더 자세히 둘러보라고 하면서 이곳 주변에는 어떤 건물들이 있는지 설명해 주었습니다. 

 

“왼쪽으로 보이는 절과 탑은 불교가 아니라 자이나교의 것입니다. 불교가 없어지고 그 자리가 비어 있으니까 자이나교가 자기들 성지라며 절을 지어버린 거예요. 이제 세월이 오래 됐으니까 어쩔 도리 없이 자이나교의 것이 되었습니다. 

 


 

이 뒤쪽은 1800년대 말, 즉 지금으로부터 130년 전에 ‘아나가리카 담마팔라’라는 스리랑카 사람이 복원한 절입니다. ‘아나가리카’는 출가 스님이 아니라 재가 법사를 뜻해요. 이 분은 ‘마하보디 소사이어티(MahaBodhi Society)’라는 단체를 만들어서 평생을 인도성지 복원운동에 바쳤습니다. 저기 보이는 허물어진 절터가 부처님이 머물렀던 자리에 세워졌던 '물간다쿠티'예요. 담마팔라는 유적지는 그냥 놓아두고 그 옆의 빈터에 물간다쿠티를 다시 복원했어요. 복원한 절을 새로운 물간다쿠티라고 해서 ‘나야 물간다쿠티’라고 부릅니다. 신(新) 녹야정사라는 뜻입니다. 

 

이 담장 너머는 마하보디 소사이어티가 관리하는 땅이고, 저기는 자이나교에서 관리하는 땅이고, 여기는 지금껏 버려져 있다가 최근에야 인도 정부가 울타리를 치고 복원해서 입장료를 받고 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옛날에는 울타리도 없이 버려져 있어서 주변의 외국 절들이 조금씩 청소하는 게 고작이었지만, 요즘 인도 경제가 조금 좋아지면서 성지 정비를 활발히 하는 편입니다. 20년 전만 해도 전부 그냥 버려져서 도굴도 많이 당했어요. 우리 같은 순례객이 오면 온갖 걸 들고 와서 사라고 하는데 대부분은 모조품이지만 개중에는 진짜도 꽤 있었어요. (모두 웃음) 

 


 

아직도 문화재가 제대로 보호되지 않는 이유는 첫째, 인도에는 문화재가 너무 많아요. 둘째, 인도는 현재 힌두교 국가니까 불교에 대해서 적대적이지는 않지만 국가 신앙이 아니라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았어요. 그래서 유적이 많이 파괴되었는데, 이제는 인도가 세계적으로 내세울 만한 대표적인 것이 불교가 되다 보니 최근 들어 유적복원사업을 비롯한 불교문화 진흥사업이 크게 강화되는 추세입니다. 또 불교 신자들의 인도순례가 워낙 많고 특히 인도와 외교적으로 밀접한 스리랑카, 태국 등 주위의 동남아 국가들이 대부분 불교국가여서 지금은 불교에 굉장히 우호적입니다. 

 


 

현재 불교 성지의 대부분은 다 힌두교 소유입니다. 불교가 없어진 뒤 그 유적들을 다 힌두교에서 차지하고 관리해왔기 때문이에요. 내일 방문할 부다가야 대탑도 소유주는 힌두교입니다. 돌려달라고 계속 싸운 결과 지금은 이사회가 불교인 4명, 힌두교인 5명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래도 위원장은 힌두교인입니다. 우리가 보시금을 내면 탑 관리에 쓰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힌두교에 소유권이 있어요. 그런 형편을 염두에 두고 둘러보시면 되겠습니다.”

 

부처님의 발자취가 곳곳에 남아있지만 그동안 관리조차 제대로 되고 있지 않았다는 이야기에 무척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앞으로 다섯 생애는 인도에 태어나겠다는 원을 세웠다는 이야기를 왜 스님이 자주 하시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습니다. 인도에 다시 새롭게 불교가 꽃피우길 기원해 봅니다. 

 

마지막으로 수계식을 모두 마친 후 다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했습니다. 평생 동안 딱 한 장만 찍을 수 있는 사진을 위해 모두 가지런히 줄을 맞춰 섰습니다. 

 


 

그리고 스님은 조별로도 사진을  함께 찍어 주었습니다. 스님과 일대일로 사진찍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개인 사진은 쉬라바스티에 가서 찍어주겠다고 하자 모두들 안심하고 즐겁게 조별 사진을 찍었습니다. 

 


 

이어서 법사님들이 차량 한 대씩 맡아서 성지 주위를 안내했고, 스님도 차량 한 대를 맡아서 안내를 시작했습니다. 승단 안에서 분쟁이 생겼을 때 판결을 하던 곳, 부처님이 최초로 설법한 자리 바로 옆에 세워진 물간다쿠티, 아쇼카왕이 이곳은 부처님의 성지임을 기념해서 세운 아쇼카 석주, 최초로 설법한 자리인 다르마라지크 스투파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 분쟁을 조정하던 법정

 


▲ 물간다쿠티

 


▲ 아쇼카 석주

 

사르나트를 나와서는 자이나교 사원을 지나 신물간다쿠티로 향했습니다. 참배할 사람들은 법당 안으로 들어가서 참배를 하고, 나머지는 스님을 따라 뒤쪽 사르나트 동물원 주위를 따라서 산책하면서 담마 팔라 전법사의 기념탑을 먼 발치서 바라보았습니다. 

 

신물간다쿠티 주변에는 아쇼카트리가 아주 많았습니다. 마야부인이 산기를 느끼고 이 아쇼카트리를 잡고 부처님을 낳았다고 하지요. 인도에 직접 오니 경전에 등장하는 나무들을 직접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신물간다쿠티 주위에 빼곡이 늘어선 아쇼카트리

 

이렇게 사르나트 순례를 모두 마치고 다섯 비구가 부처님을 영접한 곳에 세워진 영불탑을 참배했습니다. 보통 앞면과 옆면만 보고 나오는데, 스님의 안내 덕분에 보수 공사가 이뤄지고 있는 뒷면도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 영불탑

 

다음은 강가강으로 향했습니다. 강가강은 인도인들이 가장 신성시 여기는 강입니다. 이곳에서 목욕을 하면 죄를 씻을 수 있다고 믿고 있고, 사람이 죽으면 강가에서 화장을 해서 이 강에 뿌리기도 합니다. 

 

강가강으로 들어가는 골목길은 무척 복잡하고 많은 인파로 붐벼서 산스크리트대학 앞에 버스를 주차하고, 순례객 모두 자전거릭샤를 타고 강가강으로 향했습니다. 오토릭샤, 자전거릭샤, 오토바이, 승용차, 인력거, 각양 각색의 버스, 도로 한가운데에 누워 있는 소, 온갖 운반 수단이 뒤엉킨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이 길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먼저 가서 배를 예약하려고 오토릭샤를 탔는데, 오토릭샤가 강가강 가까이에 진입하는 것이 금지되어 버려서 결국 한참을 걸어야 했습니다. 

 


 

먼저 도착한 순서대로 30명, 40명씩 배를 한 대씩 타고 출발했습니다. 

 


▲ 강가강 

 

4대의 배가 모두 출발이 되자 스님은 강가 강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강 주변에는 목욕을 할 수 있도록 계단을 만들어놓았습니다. 물이 내려가면 내려가는 대로 내려갈 수 있고, 물이 차면 차는 대로 또 올라갈 수 있어요. 우기에는 계단이 없는 저 위쪽까지 물이 차올라서 강이 바다처럼 보여요. 바라나시 앞을 흐르는 강가강은 야무나 강과 강가강 두 개가 합쳐져서 흐르는 거예요. 바라나시 위쪽의 알라하바드에서 합쳐져 내려옵니다. 그러다가 파트마에 가면 그하그라하강과 간타키강과 숀강까지 네 개의 강이 합쳐집니다. 지금은 낮이라 보이지 않지만 밤에는 여기서 횃불을 피워놓고 브라만들이 ‘뿌자’라고 하는 전통 제사를 많이 지냅니다.

 


 

인도 사람들은 여기서 목욕을 하면 죄가 다 없어진다고 믿고 있어요. 그래서 손을 담그면 나중에 손만 천국에 가요.” (모두 웃음) 

 

“입만 담그면요?”

 

“그럼 입만 천국에 가요.” (모두 웃음) 

 


 

스님의 유머에 순례객 모두 한바탕 크게 웃었습니다. 

 

이렇게 스님이 설명을 하고 있는데, 과자를 파는 어린 아이가 와서 스님에게 과자를 좀 사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스님이 얼마냐고 묻자 아이는 10루피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스님이 10루피를 주면서 2개를 달라고 하자 아이는 손사래를 치면서 1개만 주었습니다. 스님이 “장사 잘하네” 하며 웃자, 순례객들도 모두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스님은 과자를 사주면서 아이에게 갈매기를 불러 모아 보라고 했습니다. 아이가 신이 난 듯 “아오~”, “아오~”를 크게 외치자 순식간에 갈매기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즐거움을 선사해 준 아이에게 모두 환호를 했습니다. 

 


 

이어서 배가 다시 방향을 틀어 계속 가더니 드디어 화장터 가까이에 이르렀습니다. 다시 스님의 설명해 주었습니다. 

 

“저기 가면 대나무를 두 개 걸친 사이에 또 작은 대나무를 걸치고 그 위에 시신을 얹는 걸 볼 수 있어요. 그걸 두 명, 혹은 네 명이 메고 여기 가져와서 물에다 한번 적셨다 건져서 불에 태워요. 

 


▲ 계단에 황금색 천으로 덮어진 것이 시체

 

시신을 덮은 저 황금빛 천이 분소의입니다. 분소의는 떨어진 옷, 즉 헌 옷의 개념이 아니에요. 시신을 덮었던 부정한 옷이라고 해서 아무도 손을 대지 않고, 거지조차도 손대지 않고 버립니다. 

 

여기 나무 많이 재놨잖아요. 저렇게 시신을 태워요. 저기 계단에 갖다 둔 시신이 보입니까? 여기 버려둔 것 같은 대나무 두 개를 사다리처럼 만들고 그 위에 시신을 얹어서 오는 거예요. 위에 덮은 저 옷이 분소의예요. 저기 보여요? 다리가 불에 타다가 뚝 떨어진 게 있으면 대나무를 써서 거두어 올리기도 합니다. 화장이 끝나면 불을 물로 대충 끄고 강에다 집어 넣어버려요. 몸의 일부가 덜 탄 것은 갈매기들이 파먹어요. 

 

자, 돌아가신 영가들을 위해 나무아미타불 10번만 하겠습니다.” 

 


 

스님의 제안에 따라 모두들 합장하고 아미타불을 지극한 마음으로 염했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왕생극락 하옵소서.”

 


 

웃고 즐기던 마음도 순간 숙연해졌습니다. 인도 사람들은 죽음도 그냥 삶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습니다. 

 

이렇게 강가강을 둘러본 후 다시 복잡하게 얽힌 도로 위로 나왔습니다. 시간 여유가 좀 생겨서 조별로 삼삼오오 흩어져 길가에서 짜이 한 잔 씩을 사먹었습니다. 스님도 법사님들과 함께 골목길로 들어가 라시 한 잔을 사먹었습니다. 

 


▲ 라시 가게

 

라시는 요플레와 맛이 비슷했습니다. 라시를 담았던 토기를 어떻게 처리할지 몰라 주위를 두리번 거리자 가게 주인이 땅바닥을 가르켰습니다. 여러 번 더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아쉽지만 인도인들의 문화에 그냥 순응해 봅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는 바루나강을 건넜습니다. 다리를 건너며 스님은 “이 강이 바로 야사 비구가 신발을 벗어 놓고 부처님께로 건너갔다는 바로 그 강입니다.” 라고 알려주었습니다. 특히 청년들은 다리 위에 잠시 멈춰 서서 출가를 고민하던 야사 비구를 생각하며 잠깐 사색에 잠겨 보기도 했습니다. 

 


▲ 바루나강

 

숙소로 돌아와서 세면과 휴식을 취한 후 저녁 6시 30분부터 다시 스님의 강연이 이어졌습니다. 이번 성지순례에는 스님이 모든 성지를 안내하지 않고 시작할 때 바라나시 일정과 마지막에 쉬라바스티 일정만 안내합니다. 그래서 저녁에는 부처님의 일생 전체와 이번 성지순례 코스 전반에 대해 스님이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한국에서 인도로 출발하기 전날 연이어 아홉 번의 미팅을 가지면서 몸에 무리가 많이 갔는데, 그래서 그런지 어제부터 몸살기운과 함께 편두통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님은 목 뒤에 파스를 붙인 채 강연을 계속 했습니다. 

 


 

부처님은 어떤 모습으로 태어나서 돌아가실 때 모습은 어떠했는지, 부처님은 어떤 깨달음을 얻으셨는지, 그 가르침은 무엇이었는지, 10대 성지를 순례할 때 각 성지마다 꼭 알아야 할 점은 무엇인지, 성지순례를 통해 우리가 배우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약 두 시간 동안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마지막으로 궁금한 점에 대해 질문을 받는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그 중에 한 가지 질문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합니다. 사회적 실천활동을 많이 하고 있는 정토회의 모습이 부처님의 삶과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를 묻는 질문에 스님은 명쾌한 답변을 들려주었습니다. 

 


 

“석가탄신일 즈음 BBC에서 방영한 부처님의 생애 다큐멘터리를 봤는데 명상이며 개인의 깨달음에 관련된 내용이 많았습니다. 서양 사람들도 그런 쪽으로 많이 수행하고 있는지 소승불교화된 느낌이 들고, 사회 변화에 대한 내용은 많지 않아서 아쉬웠습니다. 

 

정토회는 대승불교의 맥을 이었기에 평화재단이며 JTS 등의 사회활동 기구를 두고 사회변화를 위한 활동들을 많이 하잖아요. 그런데 부처님 당시에는 부처님이나 상가가 어떤 재단을 만든 것도 아니고 그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 조직적인 활동을 한 것 같진 않습니다. 개인의 수행을 강조하는 소승불교적인 모습과 우리가 지금 하는 활동을 비교해본다면 어떤 것이 그 당시의 모습에 가까울지 궁금합니다.”

 

“사회적인 비판의식은 그것을 가진다고 해도 오래 가기는 어렵습니다. 예컨대 불교를 믿는 사람이 많아져서 왕과 귀족들도 모두 불교를 믿어서 불교가 기득권화 되면 자연히 변질이 일어납니다. 기독교도 그래요. 기독교는 원래 가장 가난한 자들이 중심이 된 민중해방적 신앙인데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완전히 기득권화 되었어요. 

 


 

불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은 여성 해방을 주장하셔서 비구니제도를 두었지만, 부처님이 열반하신지 500여 년 만에 인도에서 비구니제도가 없어졌어요. 인도의 전통문화에서는 여자는 해탈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에요. 해탈할 수 없는데 출가해서 무엇 하겠어요? 여자는 일단 죽어서 다음 생에 남자부터 된 뒤에 출가를 해야 한다는 겁니다. 설령 부처님 당시에 워낙 남녀 차별이 심해서 여성출가를 허용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오늘날 우리는 여성출가를 허용해야 해요. 그런데 부처님 당시에는 여성출가를 허용했는데 오늘날 남방불교에서는 여성출가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게 전통이기 때문이에요. 부처님의 가르침을 원래 모습 그대로 본받아온다고 하면서도 이런 문화적인 측면에는 굉장히 비불교적인 요소가 들어 있는 겁니다.

 

달라이 라마로 대표되는 티벳불교는 굉장히 종교적으로 훌륭하고 인격적으로도 좋은 평가를 받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사람이 죽어서 환생한다고 하잖아요. 환생을 정말 한다면 모든 사람이 환생해야 말이 될 텐데, 일부 몇 명만 환생한다고 합니다. ‘린포체’는 ‘환생자’라는 뜻인데, 3천 명 정도만이 환생했다고 인정받습니다. 왕의 아들이면 무조건 왕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듯이, 환생자라고 확인된 사람은 일반인과 완전히 다른 교육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3천 명의 환생자 중 여자가 한 명도 없어요. (청중 웃음) 

 


 

그런 건 부처님의 가르침인 담마가 아니라 문화라고 볼 수 있겠죠. 불교와 힌두교가 섞이면서 나온 하나의 고유한 신앙체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달라이 라마는 전세계를 다니며 활동하는 지성인이지만, 그들의 교리 중에는 이런 모순이 있어요.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는 모순이 없지만 이렇게 신앙화되면 모순이 생겨요. 남방불교에도 여성출가를 불허한다는 모순이 있고, 티벳 불교에도 환생자 중 여자가 없다는 모순이 있습니다. 이렇듯 현실에서 그분들이 훌륭하다고 해서 다 진리는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은 당시 인도 사회에서 사회적이거나 정치적인 조직을 실제로 만들지는 않으셨어요. 그렇다고 사회를 외면한 것은 아닙니다. 로히니 강을 경계로 둔 꼴리족과 석가족이 물 때문에 전쟁을 할 뻔 했을 때 부처님이 직접 가셔서 ‘물이 귀하냐? 피가 귀하냐?’라고 말리신 적이 있습니다. 

 

또 아자타사투 왕이 밧지족과 전쟁 준비를 할 때 승패가 어떻게 될지 부처님께 묻자 그 질문에 대한 대답 대신 ‘밧지족이 민주화되어 있는 나라인가’를 물어보면서 나라가 망하지 않는 7가지 법을 이야기하십니다. 그걸 들은 왕이 밧지족은 망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아서 전쟁을 일으키려던 마음을 접었습니다. ‘전쟁 하지 말라’ 이런 말씀을 직접적으로 하진 않으셨지만 이렇게 전쟁을 막으셨어요. 

 


 

석가족을 멸망시키기 위해 코살라국의 왕이 군사를 앞세우고 쳐들어 올 때는 그 길목에서 세 번이나 뙤약볕에 앉아 요즘 말로 하면 단식 농성을 하셨어요. 그러나 세 번째에도 그걸 짓밟고 가려고 했을 때 저항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남녀차별이나 계급차별 같은 문제에 대해 굉장히 단호하게 대응하셨습니다. 

 

이런 예들을 보면 부처님은 사회의 평등의식과 인권의식을 분명히 갖고 계셨지만 그걸 정치 운동화하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승불교가 너무 개인적으로 흐르다 보니까 이건 불교의 근본에서 벗어난 게 아니냐고 해서 좀 더 사회 실천적인 요구를 한 게 대승불교의 흥기입니다.

 

그러니 첫째, 가르침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 최대한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부처님이 여성출가를 허용하지 않으셨다면 부처님이 허용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우리도 안 해야 할까요? 부처님이 당시에 허용하지 않으셨다 해도 우리는 해야 할까요?”

 

“해야 해요.”

 


 

“그래요. 부처님의 시대에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그것이 설령 평등하다고 하더라도 그 역사적 조건에서는 실현하지 못 할 게 있고, 오늘날 실현할 게 있기 때문입니다. 꼭 여성에 대한 사례가 아니더라도 부처님의 여러 가르침을 두루 살펴서 부처님이 평등성을 갖고 계셨는지 여부를 봐야지, 부처님이 그 때 안 하셨다고 무조건 지금도 안 해야 한다는 건 옳지 않아요.

 

인천 사람이 서울 가는 길을 물으면 동쪽으로 가라고 하지만, 춘천 사람이 물으면 서쪽으로 가라고 해야 해요. 동쪽으로 가라고 하면 동해 바다에 빠져 죽으니까요. 그런데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께 찾아와 물어본 춘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면 경전에는 동쪽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소승과 대승의 서로 다른 입장이 나오는 거예요. 경전에는 ‘동쪽으로 가라’라는 기록뿐인데 춘천 사람이 물으면 뭐라고 대답할지가 딜레마입니다. 

 

그래서 소승에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경율(經律)에 더해 ‘논(論)’이라는 게 있습니다. 경율론(經律論) 삼장(三藏)이라고 하잖아요. ‘부처님이 인천 사람에게 동쪽으로 가라고 하신 것은 춘천 사람에게는 곧 서쪽으로 가라는 뜻이다’ 이렇게 해석을 해줘야 해요. 이게 ‘논(論)’입니다. 아무렇게나 해석하면 안 돼요. 예컨대 북쪽으로 가라는 뜻이라고 하면 안 됩니다. 부처님께서 오신다 해도 똑같이 말씀하실 정도로 정확도가 있어야 논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보디사트바, 즉 보살의 지위에 오른 이가 설명해야 ‘논’이라는 이름을 붙여줍니다.

 


 

이렇게 설명하는 게 소승의 논이라면 대승불교인들은 굳이 그렇게 복잡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봤어요. 그래서 ‘춘천 사람이 부처님께 서울 가는 길을 물었더니 부처님께서 서쪽으로 가라고 말씀하셨다’라고 기록해버렸습니다. 그래서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소승의 입장에서는 자기들이 지금까지 본 경전 중에 그런 말이 없었으니까 대승경전은 부처님이 직접 설하신 말씀이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이걸 대승비불설(大乘非佛說)이라고 해요. 그런데 대승은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신다면 당연히 춘천 사람에게는 서쪽으로 가라고 하시지 않겠느냐? 그러니 굳이 복잡하게 이야기할 것 없이 서쪽으로 가라고 말씀하셨다고 기록해도 괜찮다’라는 입장입니다. 이것이 소대승의 불설(佛說)‧비불설(非佛說) 논쟁입니다. 

 

‘글자를 넘어버리면 바로 서쪽이라는 답이 나오는데 뭘 그깟 글자에 매여서 그러느냐?’ 이것이 대승의 주장이에요. 그래서 동쪽이라는 언어에 집착하지 말라, 즉 법집(法執)에 사로잡히지 말라고 하면서 ‘공(空)’을 이야기합니다. 반면 소승은 부처님이 하시지 않은 말을 대승이 마음대로 지어내어서 한다고 해서 ‘대승비불설’을 주장하기에 서로 논쟁이 됩니다.

 

역사적 사실이 어떤지를 굳이 하나하나 따져서 비교한다면 소승의 이야기가 맞고, 큰 틀에서 철학적으로 본다면 대승의 이야기가 틀리지 않습니다. 비유를 들어보자면 제가 정토불교대학에서 부처님 가르침을 이야기하고 그걸 해석해서 여러분들의 생활에 적용시켜 이야기한다면 소승의 방식입니다. 지금처럼 그냥 여러분과 대화를 나누면서 교리니 뭐니 하는 설명 없이 바로 이야기하는 즉문즉설은 대승의 방식이에요. 다만 대승의 문제는 자기 이야기라고 하면 설득력이 떨어지니까 그 말을 부처님이 했다고 말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야 그냥 제 수준에서 하니까 논쟁거리가 안 되지만, 스님이 말해놓고는 부처님이 했다고 해버리니까 논쟁거리가 되는 경우가 많겠지요. 

 


 

그러니 ‘소승이냐, 대승이냐’보다는 ‘그게 진실이냐’라는 측면에서 접근하면 좋겠습니다. 자꾸 대승을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접근하면 모순이 생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믿음의 측면에서 대승을 받아들이면 현장에 왔을 때 모순이 생깁니다. 부처님이 태어나실 때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天上天下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라는 말을 정말로 했는지 따져서 접근하면 모순이 되지만, 그것을 상징적 언어로 받아들여 접근하면 모순이 없듯이, 대승의 가르침은 ‘그것이 진실이냐’라는 측면에서 접근해 분별하면 됩니다. ‘실제로 그 말을 썼느냐, 안 썼느냐’를 자꾸 따져서 접근하면 모순이 생겨요.”

 

정토회에서 하고 있는 다양한 사회 활동이 부처님의 삶과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를 명확히 알 수 있었습니다. 질문한 청년은 아주 만족해 하며 자리에 앉았습니다. 

 

이 외에도 질문을 하고자 하는 분들이 더 있었지만 스님의 건강이 좋지 않아 일찍 강연을 마쳤습니다. 그럼에도 순례객들은 아픈 몸으로도 많은 법문을 설해 준 스님에게 큰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이렇게 성지순례 둘째날 일정을 모두 마친 후 순례객들은 숙소로 돌아가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정토회 성지순례단 A팀은 내일 새벽 4시 20분에 기상해서 부처님이 6년간 고행한 전정각산 아래에 세워진 수자타아카데미로 향합니다. 그리고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신 보드가야 대탑 참배를 시작으로 법사님들과 함께하는 12일 동안의 성지순례를 시작합니다. 

 

스님은 내일 다시 바라나시 공항으로 나가서 성지순례단 B팀을 마중한 후 저녁에는 입재식 강연을 해줄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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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댓글 57

0/200

박봉미

고맙습니다.<br />글을 읽으며 성지순례 일원인듯 감동이 밀려옵니다._((()))_

2016-01-13 09:53:12

정근환

잘 읽어보았읍니다.현장의 감각과감성이 마음에인치됩니다 계속읽어보겠읍니다.감사합니다.

2016-01-11 21:40:11

김영린

스님~~ 건강잘챙기십시요
스님 법문들을수 있음에 감사하고 , 행복합니다~~^^
밝게웃으시는 스님 얼굴이 부처님 얼굴 입니다.

2016-01-11 14:3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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