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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정토회 활동가들과 함께한 연말 명상수련 5일째를 맞이하여 그동안 정진한 공덕에 대해 발원을 한 후 대중들의 소감문 발표를 경청하고 격려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새벽 4시, 도량석 소리와 함께 일어난 대중들은 천천히 포행을 하며 명상 장소인 대수련장에 모였습니다. 스님은 대중들보다 먼저 대수련장에 도착해 법상 위에 앉아 명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고요한 정적이 흐르고 있는 가운데 새벽 명상이 끝나고 곧이어 예불과 스님의 발원 기도가 이어졌습니다. 스님은 5일 동안 부지런히 수행 정진한 대중들을 위해 간절한 마음을 담아 발원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스님의 발원 기도를 들으며 곳곳에서 눈물을 닦는 분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우러러 발원하옵니다. 오늘 문경 정토수련원에서 저희 정토행자 대중 일동은 5일간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정진한 후 이와 같이 부처님께 예배하고 참회하면서 발원하옵니다.
저희들은 어리석어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의 기억과 상처에 집착하여 그 업식에 충동적으로 반응하며 괴로움과 슬픔과 침울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과 온갖 상을 지어 근심하고 걱정하며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몸은 여기 지금 들숨과 날숨 사이에 살아가고 있지만, 생각은 언제나 과거의 영상 속이나 미래의 상상 속에 빠져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꿈속에서 강도를 만나 두려움 속에서 도망다니며 이곳 저곳 피할 곳을 찾듯이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이시여, 그러하오나 저희에게 꿈속의 안온한 피신처를 주실 것이 아니라, 비록 매정하다 느끼고 부처님을 외면할지 몰라도 ‘눈 떠라, 꿈을 깨라’고 일갈해 저희가 영원히 강도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일깨워 주옵소서. 강도를 피하는 길은 다만 눈뜨는 것일 뿐임을 예부터 오늘에 이르도록 부처님의 가르침은 변함없이 일관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눈뜨는 소식은 온데간데 없어졌습니다. 게다가 강도를 만나면 어떻게 어디로 피할 것인지 알려주는 가르침으로 변질되어 세간을 풍미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비록 아직 미약하지만 그래도 부처님의 본래 가르침인 깨달음을 통한 해탈과 열반, 참자유와 참행복을 구하는 이 길을 추구합니다.
오늘 같은 세상에 부처님의 정법을 잊지 않고 그 길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비록 한줌밖에 되지 않아도 이렇게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참으로 소중하고 소중한 일입니다. 이 작은 씨앗들이 아직은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한겨울이라 대지 깊이 숨어 웅크리고 있지만, 이제 곧 봄날이 오면 싹이 트고 쑥쑥 자라 아름다운 꽃을 피울 것입니다.
저희들은 다가오는 새로운 정법의 시대에 좋은 씨앗이 되고자 가족들의 반대와 친구들의 만류와 세상의 온갖 장애를 무릅쓰고 세상을 거슬러 이같이 정진하고 있사옵니다. 비록 저희들이 아직도 어리석어 꿈에서 깨지 못하여 강도를 두려워하고, 강도가 없는 안온한 땅을 구하기를 그치지 못하고 강도를 탓하는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이 모두가 꿈이어서 눈만 뜨면, 강도도 없고, 피할 것도 없고, 도움을 구할 것도 없고, 도움을 줄 자도 없음을 꿈 속에서라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눈 뜨는 그 깨달음을 얻지 못하여 열반을 체험하지 못한 것일 뿐이니 저희들의 이 길을 불보살님께서는 귀중히 여기시어 격려하고 옹호하여 주시옵소서.
이 험난한 세상에서 온갖 고통을 이기는 힘은 세력도 아니고 돈도 아닙니다. 오직 저희 행자들이 어떠한 경우에도 자유롭고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이 자유와 행복을 우리 주위에 괴로워하고 속박받는 사람들에게 널리 전하여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보다 자유롭고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만이 저희들의 유일한 발원이오니 저희가 이 길을 꾸준히 근면하고 성실하게 갈 수 있도록 제불보살님들은 옹호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저희가 정진하고 발원한 이 공덕을 일체 중생에게 회향하오니 괴로움에 빠진 모든 중생들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며, 한반도에 다시는 전쟁이 없는 항구적인 평화가 도래하고, 분단이 극복되어 통일한국이 성취되고, 나아가 주변국들과 함께 어우러져 사는 동아시아의 시대가 도래하기를 바라옵니다.
이 발원 공덕 영가님들께 회향하오니 먼저 돌아가신 조상 영가님과 유주무주 모든 고혼들까지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저 극락세계로 왕생하옵소서. 또한 극락에도 머무르지 않고 다시 이 세상에 오시어 저희의 이 발원이 성취될 수 있도록 옹호하는 신장이 되어 주옵소서.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스님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며 이런 크나큰 축원을 받기에 부끄러운 마음마저 들었습니다.
이어서 대중들은 스님의 발원을 오롯이 가슴에 새기며 108배 정진과 명상, 경전 독송을 함께 했습니다. 이렇게 기도가 끝나고 곧바로 소감문을 작성하고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스님은 소감문을 들으면서 첨언해 줄 내용에 대해 메모를 하면서 한 명 한 명의 발표를 경청했습니다.
각 조를 대표한 19명의 발표를 모두 들은 후 다시 법상에 오른 스님은 소감문을 들으며 느꼈던 소감과 몇 가지 조언을 덧붙여 주었습니다. 네 가지를 예로 들며 스스로가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면 좋겠다고 하면서 내가 자유롭고 행복해지는 것이 가장 큰 경쟁력임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여러분들이 법당 운영하랴 행정 하랴 굉장히 힘들고 어려운 건 잘 압니다. 물론 직접 경험하고 있는 여러분만큼은 모르겠지만 저도 이야기를 들어서 어느 정도는 알아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웃을 수 있어야 해요. 법당 총무나 부총무를 맡은 내가 바쁘다고 인상 쓰고 힘들어 하고 괴로워 하고 ‘이거 언제 그만둘까’ 이런 생각에 빠진다면 다른 사람이 그런 나를 보면서 왜 정토법당에 계속 나오겠어요? 대중들도 자기가 힘드니까 이 괴로움에서 좀 벗어나 행복하고 싶어서 정토법당에 왔는데 정토법당에서 보는 사람들이 저리 괴로워하면 거기서 뭘 얻겠어요? (모두 웃음)
여러분들은 나름대로 애쓰고 있지만, 그러나 정토법당을 운영하느라 애쓰는 게 100이라면 힘들어하고 인상 써서 내치는 게 200이에요. (모두 웃음)
그런 걸 두고 ‘아무런 공덕이 없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힘들다고 하면 제가 늘 이렇게 말하잖아요. ‘너무 부담 갖지 마세요. 내가 법문 듣는 게 좋은 지를 우선 생각해보세요.’
나도 법문 듣기 싫은데 다른 사람에게 억지로 법문을 들으라고 하는 것이라면 안 됩니다. 우선 내가 노는 것보다 법문 듣는 게 더 좋아야 해요. 그래서 아무도 안 나오면 나 혼자서라도 듣는 겁니다. 어차피 내가 들을 거라 법문을 틀었는데 다른 사람이 와서 같이 들으면 더 좋고, 셋이 들으면 더 좋고요. 길 가다가 누굴 만나면 ‘아이고, 나 오늘 법문 듣는데 오세요. 같이 들읍시다’ 이렇게 할 수 있잖아요. 법문 들어서 행복해진 이 마음을 같이 나눌 수도 있고, 그러다 보면 찾아온 사람들에게 차 한 잔 줄 수도 있겠지요. 그에 따른 약간의 일거리가 있으면 이런 좋음을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니 그 정도 수고는 할 수 있잖아요.
일이 조금 많아진다면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해야죠. ‘우리가 사람이 많아져서 도움이 조금 필요해졌어요. 조금만 일찍 와서 청소를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이렇게 내가 책임을 지고 해나가면서 ‘좀 도와주세요’ 라고 해야 다른 사람들이 부담을 느끼지 않아요. ‘당신도 법문을 들으니 이걸 책임지고 하시오’ 하니까 상대가 부담스러워 도망가는 거예요. 일이 많아서 나도 모르게 짜증낼 때가 있지만 그건 잠깐이고, 크게는 이게 재미가 있고 기분이 좋아서 힘들어도 보람이 있어야 사람이 모여듭니다. 사람을 모으는 데는 효율적으로 잘 관리하는 경영 마인드도 필요하지만 그건 부차적인 거예요. 하는 사람이 이 일에 흥이 나 있는 게 사람을 끌어들이는 가장 크고 좋은 힘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를 보면 민주화 운동이든 통일운동이든 노동자들 투쟁이든 내내 악쓰면서 하잖아요. 악쓰는 걸 보면 안쓰럽긴 한데 나는 거기에 가고 싶지 않는 거예요. 가난하게 사는 걸 보면 불쌍해서 보시는 좀 해도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은 거예요.
검소하게 살아도 사람들이 얼굴이 밝고 편안해 보이면 나는 가진 게 많은데도 이 사람들보다 덜 행복하니까 ‘여기에 뭐가 있나’ 싶잖아요. (모두 웃음)
그러니 제일 중요한 것은 여러분들이 행복한 것입니다. 여기 사는 여러분들이 서로 흔쾌히 이야기를 나누고, 가끔 티격태격하더라도 금방 참회하고 밝게 웃으며 서로 어울리면 바깥의 사람들도 여기에 오면 편안함을 느껴요. 그런데 여기가 좋다고 해서 왔는데, 와서 가만히 보니 팀장이라는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싸우고 성질내고 토라져서 이틀씩 말도 서로 안 하고 있으면 말은 안 하지만 ‘여기서 몇 년을 배웠다는 사람이 저러는데 나머지는 내가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라는 회의가 들게 마련이에요. 인상쓰고 토라지는 건 내 까르마니까 그렇다 하더라도 ‘아까 성질내서 미안하다’ 이렇게 금방 돌이켜주는 맛이 있어야 함께하지요. 물론 저는 그런 수준 안 되는 사람이라도 데리고 있어야 일이 되니까 데리고 있긴 하지만요. (모두 박장대소)
그래서 첫째, 자기가 행복해야 합니다. 일이 힘들어 불평하다가도 금방 내려놓고 탁 밝아지려면 수행적 관점이 분명해야 해요. 수행자의 기준은 내가 얼마나 행복하냐입니다.
두 번째로 좀 자유로워야 합니다. 원칙을 딱 세워 지키더라도 상대가 뭐라고 하면 ‘그래그래, 알았다’ 이렇게 가끔은 놔주는 것도 좀 있어야 해요. 늘 밧줄에 묶이듯 원칙에만 꽉 묶여서 살면 누가 좋아 보이겠어요? (모두 웃음)
그렇다고 원칙도 없이 헤벌레 하고 살면 이미 헤벌레 하고 사는 세상과 다를 게 없으니 굳이 여기 올 이유가 없어요. 여기 원칙이 있기 때문에 모이는데, 그게 너무 옥죄이면 사람이 힘들어집니다.
이렇게 자유와 행복이 있어야 해요. 계율을 지키되 거기에 묶이지 않아야 합니다. 즉 나에게는 원칙을 지키되 타인에게는 조금 열어두고, 윗사람들은 원칙을 지키되 아랫사람들에게는 조금 열어두는 것이 필요해요. 가진 사람과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는 딱 정확하게 법을 적용하되 서민들과 아랫사람들에게는 그걸 곧이곧대로만 적용하지 말고 조금 융통성있게 적용해줘야 세상이 잘 돌아갈 텐데, 위에는 법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만큼 엉망으로 하면서 아랫 사람들은 담뱃값 정도 되는 촌지를 받았다고 목을 치잖아요. 자기들은 수백억 원씩 떼먹고도 들어갔다 3일 만에 나오는데요.
이처럼 질서가 딱 서 있되 약간의 자유로움이 있어야 하고, 내가 아직 부족하여 경계에 끄달려서 성질내더라도 금방 탁 돌이켜서 어우러질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게 안 되니까 밖에서 정토회 하는 일을 보고 호감을 느껴 찾아왔던 사람들도 왔다가 다시 가버려요. 법당에 가면 총무란 사람이 성질이나 내고, 수련원에 오니까 팀장이라는 사람이 짜증이나 내면, 월급 받는 것도 아닌데 왜 여기에 붙어 있겠어요? 자기 부족한 걸 누군가로부터 수용받아야 계속 있을 텐데 오히려 자기가 남의 부족함을 다 감당해줘야 하니까요.
우리가 해탈과 열반을 추구하는 사람이니 그에 근접하려면 우리가 먼저 이렇게 해야 합니다. 어려운 상황에서 저돌적으로 투쟁할 땐 투쟁하더라도 평상시로 돌아갈 때는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는 자세가 되어야 경쟁력이 있어요. 우리가 다른 뭘로 경쟁하겠어요? 돈으로 경쟁하면 재벌 앞에선 한 주먹도 안 되고, 권력으로 경쟁하면 일개 부대 수준도 안 되는데요.
우리의 힘은 우리 삶의 자유로움과 행복입니다. 부처님과 제자들의 위대함도 거기에 있습니다. 남의 집에 가서 밥 얻어먹고 나무 밑에서 자고 옷 주워 입는 건 세상에서 가장 천대받을 만한 수준의 거지나 다름없는 행색인데도 그들이 가장 자유롭고, 행복하고, 두려움 없이 살았기에 수많은 왕들과 부자들이 귀의한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삶을 보고 사람들이 귀의를 해야 하는데 오히려 그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불쌍하게 여긴다면 인생 끝이에요. (모두 웃음)
그리고 우리가 소중하다는 걸 우리 스스로 좀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대한민국 안이든 밖이든 사람들을 만나보면 관심사가 늘 돈 이야기, 음식 이야기, 옷 이야기, 출세 이야기, 배우자며 자식이 뭐 했다는 이야기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첫째, 적어도 자유와 행복이라는 주제, 즉 해탈과 열반을 향해서 살아가잖아요. 이것만 해도 굉장한 거예요. 앉아서 이야기를 나눠보면 어떻게 하면 더 자유로워지고 행복해지는가, 즉 열반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은 열 명 중 한 명도 드물어요. 세상이 다 그런 가운데서 우리는 해탈과 열반이라는 주제를 갖고 있고, 그래도 매일 아침마다 해탈과 열반에 향해서 수행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잖아요. (대중 웃음)
두 번째,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열이나 백에 하나 있다손 치더라도 자기 해탈과 열반에만 관심 있지, 이걸 통해 다른 사람도 좀 더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전법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스님들마저도 어디 큰 부자에게서 49재나 생일 불공 하나 받을 궁리, 건물 지을 때 돈 낼 사람을 찾을 궁리만 하고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도 젊을 때는 스님들이 그런다고 비난을 많이 했지만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어요. 그것도 그냥 세상의 일부일 뿐입니다. 불교라고 해도 이름만 불교지 불교와는 아무 관계가 없어요. 절에 다니는 신도도 마찬가지예요. 다 ‘여기서 빌면 돈 더 많이 버나’에만 관심 있습니다. 누가 교회 다녀서 더 잘됐다고 하면 다들 내일 당장 교회 갈 사람들이에요. 이런 가운데서 이 좋은 법을 혼자 알지 않고 주변에 전하려는 자세를 가지고 있다는 건 굉장한 일입니다.
세 번째, 우리는 여기에만 머무르지 않고 사회적 실천까지 하잖아요. 환경에 대해 생각해서 화장실 휴지라도 덜 써보려고 노력하잖아요. 현실에서 잘 안 되는 건 알지만, 어쨌든 그런 생각이라도 하고, 어디 가서 물건 하나 살 때 ‘포장은 하지 말아 주세요’ 이런 말이라도 할 줄 알잖아요. 불쌍한 사람 돕기 위해서 거리 모금도 나가잖아요. 우리 주변을 둘러보세요. 얼굴도 모르는 아프리카며 인도 사람, 북한 사람을 위해 길거리에서 모금하기는커녕 자기 돈을 내는 사람도 별로 없어요. 평화와 통일에 대해 고민하고 참여하는 것은 더더욱 말할 것도 없고요. 이런 생각을 갖는 사람이 대한민국에 몇 명 안 됩니다. 그런 걸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조차도 대부분은 이름을 어떻게 붙여서 세력을 키울 궁리, 돈을 더 벌 궁리, 더 위로 올라갈 궁리만 합니다.
네 번째, 이렇게 사회적 실천도 하는 가운데 우리는 또 다른 종교와 다른 민족, 우리와 다른 사람들에게 포용적이기까지 해요. 여러분들이 여기에 안 다녔다면 자기 까르마에 따라 동성애자를 혐오할 수도 있고, 신체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싫어할 수도 있고, 외국인 노동자를 싫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까르마가 우리에게 아직 남아 있다 해도 적어도 우리가 여기서 공식적으로는 성, 인종, 신체장애 여부,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을 하지 말자고 배우잖아요. 나에게 업식이 남아서 못 하는 건 못 하더라도, 그런 것을 배우고 그런 인식을 넓혀나가고 있습니다. 불교인이나 기독교인 중에서 다른 종교에 대해 배타적이지 않은 사람은 얼마 없어요. 다만 그 배타성이 강하고 덜하다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 정도의 수준만 되어도 지성적인 면에서는 대한민국 상위 1퍼센트 안에 들고도 남아요. 대한민국 5천만 인구 중에 이런 사람은 사실 50만 명도 안 됩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 사람이 50만 명만 되면 나라가 바뀐다고 하잖아요. 그게 곧 정토회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이 50만 명, 즉 인구의 1퍼센트만 되면 세상이 바뀌는 거예요.
그러니 우리 개개인이 부족한 건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지금 이 지구의 인류공동체 70억 구성원 중에서도 가장 미래지향적이고 인류 보편적인 것을 지향하며 그 길에 서 있다는 자부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일에 내가 조금이라도 참여할 수 있다는 걸 보람되게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해요. 밥 한 숟가락 더 먹고 옷 한 벌 더 사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이렇게 부족한 건 부족하더라도 내면의 가치관이 어느 정도 정립이 되어야 흔들리지 않고 남이 뭐라고 해도 포용성을 발휘할 수 있어요. ‘알았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 이렇게 웃어주고 또 내 갈 길은 가는 힘이 생기는 거예요.
저도 여러분도 우리 개개인은 다 부족하지만 우리의 지향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있습니다. 기독교, 불교를 논할 때 말하는 불교가 아니라 부처님의 보편타당한 가르침이에요.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보편타당한 깨달음’이라는 뜻입니다. 합리적이고 사실이며 모든 사람에게 다 통할 수 있는 가르침, 그것이 진리입니다. 불교인이 아닌 다른 종교인도 수용할 수 있고, 한국 사람만이 아닌 다른 민족도 수용할 수 있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들으면 다 공감할 수 있는 보편타당한 진리의 길을 우리가 지금 함께 가고 있어요.
그러니 여러분들이 이 길을 조금 더 가볍게 가시면 좋겠습니다. 앞으로 갈 길이 멀잖아요. 중간에 장애가 생기면 힘들게 갈 때도 간혹 있지만 크게 봐서는 웃으며 자유롭게 이 길을 함께 가자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대중 박수)
웃으며 자유롭게 이 길을 함께 가자는 격려 말씀에 모두들 크게 기뻐하며 큰 박수를 보냈습니다. 활동가들에게는 정말로 큰 힘이 되는 말씀이었습니다.
기쁜 마음과 감동의 여운을 뒤로 하고 대중들은 문경 정토수련원 곳곳에 흩어져 대청소를 했습니다.
마음을 청소하듯이 곳곳을 처음 사용하던 그대로 깨끗하게 돌려놓은 후 다시 대수련장에 모여 회향식을 가졌습니다.
회향식 이야기는 다음 이야기에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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