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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경전반 특강수련에 참가해 그동안 수업을 들으며 궁금했던 점에 대한 질문을 받고 답해주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오늘도 새벽 예불과 기도로 하루를 시작한 스님은 새벽 5시 30분에 아침식사를 한 후 6시에 특강수련이 열리는 문경정토수련원 대수련장에 들어섰습니다.
▲ 문경 정토수련원 대수련장
전국에서 모인 경전반 학생 300여 명도 새벽정진을 마치고 명상을 하며 스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죽비 삼성과 함께 스님과 경전반 학생들의 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스님은 간밤에 잘 주무셨는지, 문경의 겨울 화장실이 재래식이라 불편할 수 있는데 괜찮았는지, 혹시 문경 정토수련원에 처음 와보는 사람은 없는지 등을 물어보며 가볍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의문나는 것을 물어보는 시간이라며 법문을 시작했습니다.
“이번 시간은 여러분들이 경전반 공부를 하면서 의문 나는 것을 물어보는 시간입니다. 수업 중 의문이 날 때마다 물어보는 것이 가장 좋지만, 현재 그럴 형편이 못 돼서 이렇게 한꺼번에 모여서 질문을 하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이어서 사전에 질문을 신청한 사람이 무려 24명이나 된다고 하면서 모든 질문에 대해 답변을 하려면 시간이 부족하니 거두절미하고 곧바로 답변을 시작했습니다.
스님은 24명의 질문에 대해 물이 흘러내려가듯 막힘없이 차례대로 답해 주었습니다. 약속한 시간은 새벽 6시부터 9시까지 3시간이었지만, 답변을 모두 끝마치니 9시 30분이 되었습니다. 3시간 30분 동안 스님은 쉼없이 열정적으로 법문을 해주었습니다.
경전반 학생들이다보니 금강경 공부하는 시간이 많았는데, 그래서 그런지 금강경 중에서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에 대한 질문이 많았습니다. 스님은 반복되는 질문에도 다양한 비유를 들어가며 재미있게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그 중에서 금강경과 관련된 3명의 질문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합니다.
“금강경에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짓지 말라는 내용이 여러 번 나옵니다. 이 상들이 각기 어떻게 다른지 궁금합니다.”
“수업 중에 한 시간 내내 설명했는데 수업에 빠졌나 봐요.(모두 웃음) 상(相)은 ‘모양 상’ 자입니다. 모양을 짓는 것을 상이라고 합니다. 예컨대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이 아니라 그냥 한 사람일 뿐입니다. 내가 보기에, 내가 생각하기에, 내가 인식하기에 나쁘게 생각한 것인데 우리는 이걸 ‘저 사람이 나쁜 사람이니까 내가 나쁘다고 알았다’라고 착각합니다.
알이 붉은 안경을 끼고 흰 벽을 보면 붉게 보입니다. 그럴 때 사실은 ‘내 눈에 붉게 보인다’ 입니다. ‘네 눈에는 어떠냐?’ ‘파랗게 보인다.’ ‘네 눈에는 파랗게 보이는구나. 그런데 왜 내 눈에는 빨갛게 보이지?’ 이렇게 하다 보면 ‘아, 내 안경알은 붉은 색이고 네 안경알은 푸른색이어서 내 눈에는 붉게 보이고 네 눈에는 파랗게 보이는구나’ 이렇게 어떤 해답이 나옵니다. 그런데 ‘저 벽의 색깔이 붉은 거야’ 라고 하고 다른 사람은 ‘그건 푸른 거야’라고 하니까 ‘붉은 걸 어떻게 푸르다고 말하냐’, ‘그게 푸르지 어떻게 붉냐’ 이렇게 갈등이 생깁니다. ‘내 눈에 붉게 보인다’ 이게 실재입니다. ‘저건 붉은 거야’라는 말에는 객관적으로 붉은 색이기 때문에 내가 붉다고 인식했다는 뜻이 숨어 있어요. 푸른 걸 보고 붉다고 인식한 게 아니라, 붉으니까 붉다고 인식했다는 겁니다. 그러나 사실은 저게 실제로 푸른지 붉은지 객관적으로는 알 수 없고 아무튼 내 눈에는 붉게 보이는 것뿐입니다. ‘내 눈에 붉게 보인다’, ‘내 생각에는 그 사람이 나쁜 사람 같다’ 이게 진실이에요. 그런데 ‘그 놈이 나쁜 거야’라고 하면 이걸 상이라고 합니다. 객관화시켰다는 거예요.
탁자 위의 이 컵을 마이크와 비교해보면 작지만 녹음기와 비교해보면 큽니다. 그런데 여러분더러 이 컵이 큰지 작은지 물으면 작다고 합니다. 왜 작으냐고 물으면 ‘작으니까 작다고 하죠’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아요.
이 컵은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닙니다. 마이크와 비교해서 바라보는 이 인연에서는 나에게 작다고 인식되고, 녹음기와의 인연에서는 크다고 인식되는 것 뿐입니다. 인연에 따라 크다고 인식되기도 하고 작다고 인식되기도 합니다. 즉, ‘크다, 작다’는 나의 인식상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연과 관계없이 이 컵은 작다고 말합니다. ‘작으니까 작다고 하고, 크니까 크다고 하고, 붉으니까 붉다고 하고, 나쁜 사람이니까 나쁜 사람이라고 하지. 내가 그걸 왜 왜곡시키겠어?’ 우리는 지금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어떤지 잘 몰라요. 일단 내 눈에는, 내가 인식하기에는, 내 생각에는 그렇게 보일 뿐이에요. 그렇게 하면 한 사람은 작다고 하고 다른 사람은 크다고 해서 서로 생각이 달라도 아무런 문제가 안 돼요. ‘저 사람 입장에서는 저렇게 작게 보이는구나’, ‘저 사람 입장에서는 크게 보이는구나’ 이렇게 서로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자기의 주관적 인식을 객관이라고 생각하면 ‘미친 놈, 어떻게 저걸 크다고 하지?’ 이러고 싸우게 됩니다.
상이라는 것은 주관을 객관화시킨 거예요. 우리가 인식하는 일체가 사실은 다 주관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그걸 다 객관화시키기 때문에 시비와 갈등, 즉 분별이 생깁니다. 이걸 두고 ‘상을 짓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상을 짓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상을 짓지 말라는 말은 크다고도 말하지 말고, 작다고도 말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녹음기와 비교해서 보는 이 인연에서는 컵을 작다고 하지, 크다고 하지 않잖아요. 이 컵이 작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작다고 할 수가 없고, 다만 이 인연에서 작다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 논리가 금강경에 계속 나와요. 금강이 금강이 아니라 그 이름이 금강이라고 하잖아요.
‘상을 짓지 말라’ 이게 핵심이에요. 상을 짓기 때문에 온갖 시비분별이 일어나고 갈등과 괴로움이 생깁니다. 나도 모르게 상을 지었다 하더라도 ‘아, 내가 상을 지었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게 곧 상을 짓지 않는 것입니다.
아상은 ‘나다’ 하는 것입니다. ‘그건 내 거야’, ‘내가 어디를 갔더니 말이야...’ 이렇게 이 몸뚱이 하나를 가지고 ‘나’라고 고집하는 걸 ‘아상(我相)’이라고 합니다. 내 생각, 내 물건, 이렇게 ‘나’를 붙이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라는 것도 붙이죠. ‘이건 우리 집 거야’, ‘우리 아버지야’ 이렇게 한국 사람들은 ‘나’와 ‘우리’를 같이 씁니다. 미국에서는 ‘내 아버지’라고 하지 ‘우리 아버지’라고는 안 해요, 그런데 우리는 내 동생도 아버지라 부르고 나도 아버지라 부르니까 그냥 ‘우리 아버지’라고 씁니다. 이렇게 우리로 나를 삼기도 합니다. ‘우리 나라’, ‘우리 집안’은 ‘내 나라’, ‘내 집안’과 같은 뜻입니다. 우리로 나를 삼는 것 중 가장 작은 것이 가족이고, 제일 큰 게 인류 즉 인간입니다. 나 중심적 사고가 아상이고 사람 중심적 사고가 ‘인상(人相)’입니다. 뭔가 묶어서 ‘우리’라는 한 덩어리를 나로 삼는 거예요.
그 다음에 생명을 가진 존재만 묶어 상을 짓기도 합니다. 생물과 무생물을 구분해서 생명은 소중하고 무생물은 덜 소중하다고 생각한다면 ‘중생상(衆生相)’에 들어갑니다. 우리가 ‘중생’이라고 할 때는 무생물은 포함하지 않고 생물만 포함합니다.
‘수자상(壽者相)’이라고 하면 유형의 존재, 즉 모양 있는 존재만 포함합니다. 보이지 않고 느낄 수도 없는 무형물에 대해서는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유형의 존재는 영원하지 않고 항상 변합니다. 항상 생기고 사라지는 수명을 가진 존재입니다.
이만큼 울타리를 치고 ‘나다’ 하면 아상, 이만큼 더 울타리를 넓혀서 치면 인상, 좀 더 넓혀서 울타리 치면 중생상, 더 넓혀서 울타리를 치면 수자상입니다. 그런데 존재라는 것은 여러분도 알겠지만 모양 있는 것과 모양 없는 것이 오고갑니다. 우주는 성주괴공(成住壞空)합니다. 모양 없는 데서 모양 있음이 드러나고, 모양 있는 것이 모양 없음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구분할 수가 없어요. 또 형상 있는 것을 유전자의 설계도에 따라 조립해 놓으면 생명이라고 하고 조립을 해체하면 무생물이라고 합니다. 유전자의 설계도에 따라서 물질을 조립하면 생명작용이 일어나고, 조립을 풀면 그냥 물질작용에 머무를 뿐이에요. 또 생명작용 중에서 고도로 발달한 정신작용이 나타나는 존재를 사람이라고 부를 뿐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구분 짓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사실은 거기에 어떤 구분도 없어요. 구분이 없다고 하니 어떤 경우든 절대로 구분지어 불러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컵이 어떤 인연에서는 작다고 불리고, 어떤 인연에서는 크다고 불리듯이, 근본적으로는 구분 지을 수 없지만 인연에 따라서는 이건 ‘나’라고 부르고 이건 ‘너’라고 부르는 겁니다. 우리와 너희, 우리 나라와 너희 나라, 사람과 사람 아닌 것이라고 인연을 따라 부르지만 엄격하게 따지면 그것은 구분되어진 것은 아니에요. 자석의 양끝을 N극과 S극이라고 이름 붙여 부르지만 사실 N극과 S극은 분리할 수 없어요. 자석을 둘로 자르면 거기서 다시 N극과 S극이 나옵니다. 양극단만 보면 서로 다른 것 같지만 그 작용은 분리되어질 수는 없는 것과 같습니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구분해 설명하는 이유의 핵심은 상을 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나’라는 상을 짓고 ‘우리’라는 상을 짓고 ‘생명’이라는 상을 짓고 ‘존재’라는 상을 지으니까 구분해 설명했을 뿐, 결국은 그 어떤 상이든 상은 짓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금강경을 읽을 때마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대한 언급이 계속 반복해서 나오는데 무슨 뜻이지 잘 이해를 하지 못했던 분들은 아마 답답하셨을 겁니다. 오늘 스님의 명쾌한 설명을 들으니 속이 후련해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어진 질문에서는 금강경의 핵심 구절인 사구게의 뜻을 묻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스님은 수업 시간에 몇 시간에 걸쳐서 자세히 설명해 주었기 때문에 같은 질문을 계속하니 답답하실 뻔도 한데 웃음으로 받아주면서 자상하게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금강경에 사구게가 자주 나오는데 그때 법문을 놓쳐서 공부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청중 웃음) 정토불교대학도 모두 개근했는데 경전반을 그날 딱 한번 결석해서 아쉽습니다. 사구게 법문을 다시 해주시면 열심히 공부해서 수행, 보시, 봉사를 실천하겠습니다.”
“금강경의 첫 사구게는 이렇습니다.
범소유상 게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범소유상’은 ‘무릇 모양이 있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착하다, 악하다, 길다, 짧다 하는 온갖 분별상은 모양에 들어갑니다. 개시허망, ‘모두 허망한 것이다’라고 했어요. 모든 모양 있는 것은 다 허망한 것입니다. 여기서 허망하다는 것은 허무하다는 게 아니라 텅 비었다, 실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약견제상비상’은 ‘만약 네가 제상이 비상인 줄 본다면’입니다. 악하니 선하니 옳으니 그르니 하는 모든 상이 비상, 즉 상이라고 할 것이 없어서 작다고 하지만 작다고 할 것이 없고 크다고 하지만 크다고 할 것이 없습니다. 그걸 안다면 즉견여래라, 곧 부처를 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깨달음에요.
금강경 후반부에 가면 같은 이야기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유위법이라는 건 모양 지어서 생긴 거예요. 일체의 유위법은 여몽환포영, 즉 꿈 같고 환상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다는 겁니다. 꿈은 뭔가 실체가 있는 것 같지만 깨보면 아무것도 없고, 환상도 있는 것 같지만 신기루처럼 그 자리에 가보면 없고, 물거품도 있는 것 같지만 만져보면 없고, 그림자도 있는 것 같지만 없어요. 실체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여로역여전, 아침 이슬 같고 번갯불 같다고 했습니다. 이슬은 아침에는 있지만 금방 낮에 보면 없고 번갯불은 순간 지나고 보면 없습니다.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없다는 걸 여러 비유를 들어 설명한 거예요. 이 말 전체는 허망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심리적으로 허무하다는 개념과는 달라요. 있는 것 같지만 가보니 텅 비어서 아무것도 없더라는 이야기입니다. 나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나쁘다고 할 구석이 없는 것처럼, 무릇 상을 지은 것들은 다 실체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반야심경에도 상의 허망함과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관자재보살은 관세음보살님이고 행심반야바라밀다시는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에, 즉 깨달음을 향해 수행하실 때에’라는 뜻입니다. 조견은 ‘비추어본다’는 뜻이고, 오온개공은 ‘오온이 모두 공하다’는 뜻입니다. 즉 텅 비었다는 뜻이에요. 관세음보살님께서 깨달음을 향해 수행하실 때 오온이 모두 공한 줄 비추어 보니 도일체고액, 즉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났습니다. 열반을 증득했다, 해탈을 증득했다는 뜻입니다. 해탈과 열반을 증득한 자를 부처라고 이름합니다.
제법이 공한 줄 아는 게 곧 부처이기 때문에 여러분들도 깨달으면 곧 부처라고 말하는 겁니다. 깨닫는다는 것은 제법의 실상을 안다는 거예요. 제법의 실상을 안다는 것은 텅 빈 줄을 안다, 본래 실체가 없는 줄 안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 존재를 크니 작으니 새 것이니 헌 것이니 할 게 없다는 겁니다. 다만 그때그때의 인연을 따라서 그렇게 부르고 그렇게 작용하는 것입니다. 이 물건을 물컵이라고 부르지만 물컵이라고 반드시 정해진 건 없습니다. 물을 담으니까 물컵이에요. 커피를 담으면 커피잔이고, 술을 담으면 술잔이고, 밥을 담으면 밥그릇이고, 약을 담으면 약그릇이고, 아이가 오줌을 누려는 걸 얼른 받으면 요강이에요. 이렇게 인연을 따라서 그때그때 나투는 것입니다.”
스님의 명쾌한 설명에 다시 한번 큰 박수가 쏟아졌습니다. 맨 뒤에서 스님의 답변을 경청하던 경전반 학생 한 분은 혼잣말로 “정말 쉽게 설명해주시네. 너무 감사하다” 며 아주 기쁜 표정을 지었습니다.
이쯤하면 금강경에 대한 질문이 안 나올줄 알았는데, 또 의문이 난다며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는 공덕에 대한 물음이었습니다.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는 것만으로도 큰 공덕이 있다고 하는데 어떤 공덕이 있는지요?”
“금강경의 내용은 어떤 존재를 우리가 인식할 때 왜곡해서 인식하지 마라, 사실을 사실대로 인식하라는 것입니다. 왜곡해서 인식하기 때문에 모든 고뇌와 번뇌가 생겨요. 사실을 사실대로 인식하게 되면 번뇌는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니 이 진리를 깨닫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공덕이라고 했어요. 돈을 100만원 얻는 게 최고의 공덕이 아니라 번뇌가 사라지는 게 최고의 공덕인 겁니다.
그런데 이 공덕이라는 단어에 혹해서 ‘수백만 원 보시하는 것보다 더 큰 공덕이 된다니 돈도 아끼고 좋다’며 금강경을 다만 읽기만 한다면 금강경의 내용에 어긋납니다. 인쇄기술이 없던 옛날에는 경전 한 권 얻기가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러니 이런 좋은 내용을 내가 구해서 항상 지니고 다니고, 또 이걸 베껴 써서 남한테 전하면 이 좋은 가르침으로 나와 남을 포함한 많은 사람이 해탈할 수 있으니 이보다 더 큰 공덕이 어디 있느냐, 수백만 원 돈을 주고받는 것보다 억만 배 더 공덕이 크다고 한 거예요. 그래서 ‘수지독송 위타인설(受持讀誦 爲他人說)’이란 말이 나온 거예요.
그런데 복에 미쳐서 ‘돈 천 만원 보시하기 아까운데 잘 됐다. 금강경 100권 딱 찍어서 나누어 주면 공덕이 엄청나게 크고 이걸 주문처럼 달달 외워 읽으면 공덕이 온댄다’ 한다면 이건 금강경의 내용이 아닙니다. 깨달아서 번뇌가 사라지는 것이 나고 죽는 삶을 억천 번 거듭하는 것보다 더 공덕이 크다는 이야기예요. 물량으로 뭘 보시해서 얻는 공덕과 깨달음의 공덕은 비교가 될 수 없습니다. 차원이 달라요. 이건 무루복(無漏福)이고 저건 유루복(有漏福)이라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우리 정토회에서는 복을 빌라고 하지 않고 수행하라고 합니다. 수행의 공덕이 가장 크기 때문이에요. 수행을 하면 내가 자유와 행복으로 나아갑니다.
물질을 얻으면 일시적으로는 행복한 것 같지만 그것이 오래 가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돈이 가장 많다는 모 기업 회장이 다른 건 몰라도 돈 때문에 싸울 일은 없을 것 같은데 돈 가지고 싸우잖아요. 그것도 형님과 싸우면서 ‘한 푼도 못 준다’라고 했어요. 인도 아이들이 저한테 ‘박시시, 박시시’ 하고 매달려서 동전을 받아가 놓고 또 달라고 하기를 거듭하기에 제가 바랑에서 발우를 꺼내 아이들 앞에 들이밀면서 ‘박시시, 박시시’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아이들이 웃으면서 돈을 제 발우에 집어넣었어요. (청중 웃음)
인도의 거지 아이들도 이렇게 한 푼은 줍니다. 그런데 그 회장은 자기 형님에게 한 푼도 못 준대요. 누가 더 가난합니까? 대한민국 최고 부자라는 사람이, 그것도 자기 돈도 아니고 부모 유산을 가지고, 남도 아닌 형님한테 한 푼도 못 준다는 거예요. 본인이 기자에게 한 말입니다. 심지어는 한 푼도 안주기 위해서 대법원 아니라 헌법재판소까지도 가겠다는 말도 직접 했어요. 그래서 저는 이분이야말로 보살이라고 생각합니다. (청중 웃음) 자기를 확 나쁘게 만들어서 세상 사람에게 진실을 보여주는 역행보살이에요. 다른 사람이 말했으면 도움이 안 되는데 최고 부자인 사람이 말했기 때문에 굉장한 교훈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 가득히 채워 보시한다고 하더라도 이 제법이 공한 이치를 깨쳐서 해탈하는 공덕과는 비교할수 없다고 하는 거예요. 제법이 공한 이치를 깨닫는 그 짧은 문장이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또는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입니다. 그걸 수지독송, 즉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라는 거예요. 그냥 종이에 박아서 품에 넣어 다니고 입으로 읽고 외우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이치를 깨달으라는 말입니다. 그 이치를 깨친다면 그 공덕은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해탈의 공덕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금강경의 핵심 내용에 대해 다시 한 번 깊이있게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감로의 법문을 설해주신 스님께 모두들 합장을 하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이렇게 모든 질문에 대해 답변을 마치고 나니 3시간 30분이 훌쩍 지나 있었습니다. 스님은 긴 시간 동안 법문을 들은 여러분들이야말로 정말 대단하다고 칭찬하면서 마지막 정리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부지런히 답변을 해주었는데도 3시간 하고도 30분을 더 했어요. 하는 저도 그렇지만 여러분도 대단합니다. 듣기보다 말하는 게 훨씬 쉬워요. 하다가 조는 사람은 없지만 듣다가 조는 사람은 많거든요. 저도 거기 앉아서 들으면 아마 졸았을 겁니다. (청중 웃음)
불법을 너무 꽉 막힌 것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부처님은 그렇게 쫀쫀하지 않고 확 트인 분입니다. 확 트였다고 해서 막행막식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질서정연하시고 윤리도덕적인 분이지만 윤리도덕에 묶여 계시는 고지식한 분이 아니고, 그렇다고 방탕하신 분도 아닙니다. 윤리도덕에 맞게 질서정연히 생활하시지만 그런 형식에 묶여 계시지 않는 자유로운 분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도 절에 오면 겁먹을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자리에 앉을 때 줄을 똑바로 맞추어 앉고 화장실 갈 때도 조용히 질서를 지켜야 해요. 그런데 우리 정토행자들도 이것이 잘 안 되어서 제가 앞으로 생활교육을 좀 시키려고 해요. 법당에도 딱 들어오면 들어오는 순서대로 앉습니다. 어간(御間)이라고 하는 전통을 지키는 경우가 아니면 들어오는 순서대로 앞에서부터 앉아요. 가장자리로 들어오게 되어 있으면 안쪽에서부터 앉고 안쪽으로 들어오게 되어 있으면 가장자리부터 앉아서 뒤에 들어오는 사람이 쉽게 앉을 수 있도록 배려해주고, 일어날 때는 문쪽에서부터 차례로 빠져줍니다. 벌떼처럼 우르르 들어오고 우르르 나가지 말고요.
그렇다고 군대처럼 누가 매를 쥐고 감독하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들 지켜나가는 거예요. 신발도 벗으면 가운데 자리부터 집어넣지 않아요. 항상 먼저 오는 사람이 구석이나 앞에서부터 열을 맞춰 집어넣습니다. 절이라는 게 원래 모든 게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고 조용한 게 기본 특징입니다. 소리 질러 부르지도 않고, 특별한 일 아니면 뛰어다니지도 않고, 조용한 가운데 질서를 지키는 게 수행자의 자세입니다. 그런 자세로 수행정진 잘 하십시오.”
스님의 이야기를 들으니 아무곳에나 넣고 왔던 신발이며, 법당에 들어오면 맨 뒷자리부터 앉았던 버릇이며, 깨어있지 못했던 갖가지 기억들이 생각났습니다. 나도 부처님처럼 탁 트여 있지만 질서정연한 생활을 해나가야겠다는 다짐이 일었습니다.
이렇게 긴 시간 동안의 법문을 마친 후 대수련장을 나온 스님은 곧이어 공동체 생활을 책임지는 대중대표단과 함께 간담회 시간을 가졌습니다. 정토회는 각종 수련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문경공동체와 다양한 사회활동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서울공동체로 나뉘어져 있는데, 오늘은 문경과 서울에 각각 대중대표단이 모두 참석했습니다.
▲ 정토회 공동체 대중대표단 회의
대중대표단은 그동안 대중생활을 꾸려가면서 의문이 났던 점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스님에게 물어보았고, 스님은 어떻게 대중생활을 이끌어나가야 하는지 스님의 경험담과 더불어 많은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대중대표단과의 회의를 마치고 나서는 봉화 정토수련원을 향했습니다. 이곳에서는 희광 법사님이 혼자서 어렵게 수련원을 꾸려가고 있는데 어떤 지원을 해주면 좋을지, 주변에 어떤 땅을 구입해서 농사일을 본격적으로 해볼 수 있을지 등을 점검한 후 함께 점심 식사도 했습니다.
▲ 봉화 정토수련원
그리고 희광 법사님에게는 잘 익은 과일을 건넨 후 수련원을 나왔습니다.
오후 2시에 봉화 정토수련원을 출발하여 5시 20분에 서울 정토회관에 도착했습니다. 스님은 서울에 도착해서도 찾아온 손님과 연이어 미팅을 갖고, 원고 교정 업무도 본 후 오늘 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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