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5.12.12 (오전) 정토회 제2차 통일의병대회 제1부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정토회 제2차 통일의병대회에 참가한 400여 명의 대중들과 함께 경주 역사기행을 한 후 통일의병 임명장 수여식을 했습니다. 

 

오늘도 새벽 예불과 기도로 하루를 시작한 스님은 원고 교정 업무를 보다가 아침 7시에 통일의병대회가 열리는 경주로 향했습니다. 

 

아침 7시 30분이 되자 전국에서 새벽부터 출발한 통일의병들이 법흥왕릉 앞으로 모여들었습니다. 1차 통일의병대회는 참가인원이 1500여 명이나 되다보니 법흥왕릉에 모두 집결할 수가 없어 황룡사지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번 2차 통일의병대회는 인원이 400여 명 밖에 되지 않아 법흥왕릉에서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법흥왕릉에서 통일의병대회를 시작하는 이유는 오늘날 남북이 통일하기 위해서는 법흥왕의 업적에서 배울점이 많기 때문입니다. 

 


 

법흥왕릉 앞에 400여 명의 대중들이 모두 도착하자 스님은 환한 웃음과 함께 송수신기로 대중들에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 법흥왕릉

 

울에서 출발한 통일의병들은 새벽 3시에 출발했다고 합니다. 스님은 모두들 먼 길 오시느라 수고했다고 격려한 후 오늘 통일의병대회를 하게 된 취지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개인이 어떻게 수행할 거냐는 문제를 고민해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함께 고민하고자 하는 과제는 개인을 넘어서서 함께 사는 공동체, 즉 민족공동체 및 국가공동체를 어떻게 더 발전시킬 수 있느냐입니다. 공동체가 발전하면 그 구성원인 우리 개개인들도 좀 더 행복해질 수 있지만, 공동체의 안전이 허물어지고 경제가 붕괴되고 정치가 혼란해지면 그 속에 사는 개개인들도 불행해집니다. 

 


 

조선 말엽에 국가가 혼란스러울 때 얼마나 백성들이 힘들었고, 일제의 침략에 나라를 빼앗겼을 때 2천만 동포가 얼마나 고통을 겪었는지 알잖아요. 그 피해가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나라를 빼앗기니까 젊은 여성들이 군인들의 노리개로 잡혀가고, 청년 학생들이 일본군에 징집되어 목숨을 잃고, 젊은이들이 탄광 등지에 강제 징용되어 시달리다 죽어가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평상시에는 공동체가 우리 개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잘 모르지만, 공동체가 붕괴되면 개인이 겪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요즘 시리아나 이라크를 보면 알 수 있잖아요. 종교며 정치적 이념 차이로 내전이 일어나니까 국민들이 힘들어지고, 또 그 내전을 틈타 세계 강대국들이 다 개입하잖아요. 전란을 피해 조국을 떠나 남의 나라로 피난을 가면서 각국으로부터 또 얼마나 천대를 받고 범죄자 취급을 당합니까? 

 


 

지금 우리는 우리 개인, 우리 집, 우리 가족, 우리 아이들 공부만 중요하게 여기지만, 공동체가 붕괴되면 우리가 지금 소중히 하는 것들이 훨씬 더 어려워집니다. 우리 개개인이 조금만 공동체를 위해 관심을 갖고 힘을 쏟으면 우리 가족, 우리 개인의 안전도 함께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은 우리 국가 공동체 및 민족 공동체의 안전과 평화, 발전을 함께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겠습니다.”

 

이렇게 공동체의 발전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자 한 후 본격적으로 역사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먼저 이곳 법흥왕릉에 온 이유와 법흥왕의 업적이 지금의 남북 통일에 시사하는 점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불교가 공인되고 4년 만에 신라와 가야가 통합을 하게 됩니다. 이 때 큰 쟁점이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가야의 왕족, 즉 지배층의 신분을 어떻게 할 거냐는 문제였어요. 통합된 나라에서 가야 출신이라도 하등 출세에 장애가 없도록, 즉 가야의 왕족을 신라의 왕족으로 받아들여 신분 보장을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가 요즘 말로 종교, 믿음, 사상에 대한 보장입니다. 즉 불교를 공인하는 거예요. 

 


 

통합하는 두 나라 중 신라가 더 힘이 세니까 신라가 통일의 중심이 되고 가야가 신라의 일부로 통합되는 대신, 가야 측에서는 가야 사람들에게 불이익이 없어야 한다고 요구했습니다. 첫째, 믿음, 즉 신앙에 대한 불이익이 없어야 하고 두 번째, 신분에 대한 불이익이 없어야 한다고 했어요. 이것을 신라가 받아들인 거예요. 

 

이게 지난 뒤에는 쉬워 보이지만 현실에서는 쉽지가 않습니다. 요즘 남북관계에 비유한다면 남한이 중심이 되어 남북통일이 이루어진다면 우리가 북한의 공산주의 정치활동을 전부 허용하는 것과 같습니다. 즉 국가보안법을 철폐하고 공산주의 활동을 전면적으로 허용해서 북한 출신도 통일된 나라에서 어떤 정치적인 활동, 권리 행사에 장애가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겁니다. 신분 보장도 북한에서 군 장성으로 있었던 사람이라면 통일한국의 군대에서 사단장도, 사령관도 맡을 수 있도록 해달라는 거예요. 함경북도처럼 지금 북한에 해당하는 지역은 통일 후에도 북한 출신이 지사를 맡고요. 이렇게 모든 정치활동의 자유를 보장하고 공무원을 비롯한 어떤 신분에서도 과거의 전력을 갖고 차별하지 않는 걸 현재 우리가 실현하기 쉽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보수 세력은 ‘빨갱이’라면 무조건 없애야 한다고만 하잖아요. 반대로 북한 안에도 북한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의 힘이 만만치 않습니다. 일반 주민들이야 통합하자고 하지만, 권력층은 ‘우리가 어떻게 세운 나라인데 이걸 잃느냐’고 이야기할 거예요. 북한은 역사가 70년인데도 그러니 500년 역사를 가진 가야 내의 반발은 굉장했겠지요. 그런데도 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이 신라와 통합하는 결단을 내리고, 신라는 가야의 옛 땅을 가야 왕이 다스리도록 자치권을 보장해주는 관용을 보였습니다. 그렇게 했는데도 조상이 물려준 나라를 지키지 못했다 해서 구형왕의 무덤은 가야 땅인 김해가 아닌 산청군 금서면 지리산 자락에 있습니다. 조상이 물려준 나라를 버리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보여주는 일화예요. 

 


 

어쨌든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 신라와 가야는 합의통일을 했습니다. 합의통일의 결과 손실은 하나도 없고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거두었어요. 첫째, 가야는 철기문화가 아주 발달했습니다. 물금 철광이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거예요. 이런 가야의 야금술, 즉 철을 다루는 기술이 신라에 보급되면서 신라의 무기와 농기구가 급속도로 좋아졌습니다. 두 번째, 낙동강 유역의 김해평야를 차지하게 되면서 농산물이 엄청나게 풍부해졌습니다. 세 번째, 가야의 인재들이 신라에 대거 들어오면서 인재 풀이 급격히 넓어졌어요. 훗날 삼국통일의 주역이 되는 김유신 이하 많은 대장군들이 다 가야 출신입니다. 이렇게 1과 1을 더해 2가 아니라 3, 5, 10이 되는 현상이 일어났어요. 그래서 법흥왕 다음인 진흥왕 대에 오면 신라는 백제와 연합해서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 유역을 점령하고, 계속 북쪽으로 올라가서 오늘날 강원도와 함경남도 함흥까지 점령하게 됩니다.

 

우리는 늘 통일의 문제를 다룰 때 자꾸 독일 통일을 이야기하는데, 남북의 통일과 관련해 우리 역사 속에서는 신라와 가야의 통합을 보고 배워야 합니다. 둘이 어떻게 통합했으며, 그 통합의 방식에 따라 통일의 효과가 얼마나 컸고 비약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는지를 생각해봐야 해요. 옛 역사를 보면서 당연히 그랬을 것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지금 그 현실에 놓인다면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고, 옛 역사를 보면서 바보같이 왜 그랬냐고 하지만 우리가 실제로 당해보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현실에 자꾸 안주하게 되면 결국은 실패한 역사로 흘러가게 됩니다. 우리가 현실을 극복 과제로 볼 거냐, 그냥 현실에 따라갈 거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지난번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황룡사에서 출발했습니다만, 오늘은 인원이 적어서 신라 통일만 볼 게 아니라 신라가 통일을 이룰 수 있는 출발점이 되었던 가야와의 합의통합부터 살펴보고자 법흥왕릉을 출발점으로 잡았습니다. 

 

우리도 남북통일만 생각할 게 아니라 남북통일을 첫 단계로 삼아 더 나아가야 해요. 통일을 통해 주변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국가가 되고, 주변 국가와 협력해서 동아시아 공동체를 이루고, 다시 세계 문명의 중심으로 나아가는 시너지 효과를 생각하면서 통일을 해야지, 그냥 통합해서 영토 조금 넓어지는 정도의 남북통일에만 매달려서는 안 돼요. 

 


 

그러니 이곳 법흥왕릉에서 그 어려운 시기에 어려운 결단을 내린 법흥왕과 당시의 역사의 주역들을 다시 한 번 새겨봅시다. 여러분이 이차돈은 못 되더라도 그 당시 가야 쪽이나 신라 쪽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들의 후손일 수도 있습니다.” (모두 웃음) 

 


 

우리가 가야와 신라의 통합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람들의 후손일 수도 있다고 하자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나왔습니다. 

 

스님은 동쪽에 치우친 작은 부족 국가에 불과했던 신라가 어떻게 삼국 통일의 주역으로 등장할 수 있었는지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런 후 이곳에 왔으니 법흥왕에게 인사를 드리고 가야 하지 않겠느냐며 대중들을 모두 일으켜 세우고 능을 향해 다함께 합장하고 삼배를 했습니다. 

 


 

그리고 돌아서서 다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했습니다. “통일의병 화이팅!”을 외치며 삼국 통일의 기틀을 닦은 법흥왕처럼 통일의병들도 남북 통일의 기틀을 닦을 것을 다짐해 보았습니다. 

 


 

다음은 황룡사지로 향했습니다. 스님은 차 안에서 이동 중인 잠깐 사이에 계속 원고 교정 업무를 보았습니다. 

 


 

스님이 처음 출가를 하신 곳이라고 하는 분황사를 지나 황룡사지 9층 목탑이 자리했었다고 하는 넓은 터에 도착했습니다. 초겨울이었지만 날씨는 제법 따뜻해서 법문을 듣고 함께 기도를 하기에는 딱 안성맞춤인 날씨였습니다.  

 


▲ 황룡사라는 이름의 연원인 황룡이 나왔다는 우물

 

황룡사지에는 민족의 역사와 의병의 역사를 상징하는 28개의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며 통일의병대회를 장엄하고 있었습니다. 가운데에는 청룡과 황룡의 깃발이, 왼쪽으로는 한나라로부터 시작해 배달나라, 단군 조선,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발해, 고려, 조선, 대한민국, 북한을 모두 계승하는 마음을 담아 통일코리아 깃발을 그 마지막에 세웠고, 오른쪽으로는 다물군, 고구려 부흥군, 백제 부흥군, 고려 항몽의병, 임진의병, 병자의병, 동학혁명군, 을미의병, 정미의병, 독립군, 순국열사, 산업역군, 민주투사를 모두 계승하는 마음을 담아 통일의병 깃발을 그 마지막에 세워서 통일에 대한 염원을 표현했습니다. 펄럭이는 깃발 속에는 통일의병들의 역사 의식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신라시대 당시에도 이곳에서 법회가 열렸다고 하는 황룡사지 금당터 위에 400여 명의 통일의병들이 빼곡이 자리하자 스님이 다시 법문을 시작했습니다. 먼저 장엄하게 늘어서 있는 깃발들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여기 제 뒤에 서 있는 깃발들을 한번 보세요. 우리나라 역사가 여기에 있습니다. 9천 년 전 환인 하나님께서 처음 세우신 한나라, 환인의 아들인 환웅천황께서 6천 년 전 세운 최초의 우리 나라인 배달나라, 배달의 후예로서 단군왕검께서 세우신 조선나라, 해모수가 세운 부여나라, 부여를 계승한 고구려, 부여를 계승한 백제, 이렇게 이어집니다. 그 다음이 신라, 가야, 그리고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로 나뉘어졌다가 다시 고려로 통합되고, 조선으로, 현재 남북이 분단되어 북한과 대한민국으로 이어지고, 지금 우리가 통일 코리아를 염원하고 있습니다. 

 


 

나라가 어려움에 처했는데 관군이 힘이 없고 부족할 때마다 우리는 국민이 일어나서 나라를 구한 역사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첫 번째 의병이 다물군입니다. 한나라에게 고조선의 영토를 일부 빼앗기고 한사군이 설치됐을 때 한나라 군대의 침공을 막고 쫓아내고자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의병이 다물군입니다. 다물군의 후예가 주몽이고, 다물의 정신을 계승한 것이 고구려예요. 고구려는 고조선의 옛 영토를 되찾자고 해서 세운 나라입니다. 고구려가 망했을 때는 고구려 부흥군, 백제가 망했을 때는 백제 부흥군이 일어났습니다. 원나라, 몽골이 침입했을 때 고려에서는 제주도까지 가서도 끝까지 저항한 삼별초군, 항몽의병이 있었어요. 조선시대에 왜가 침입했을 때는 임진의병이 일어났고, 임진의병 중 특히 중요한 역할을 했던 승병이 있었습니다. 청나라가 침입했을 때 청나라에 대항하고자 병자의병이 일어났고, 그 다음에 동학혁명군이 있었고, 명성황후 시해 당시 전국에서 일어난 을미의병이 있었고, 군대가 해산 당했을 때 다시 전국에서 정미의병이 일어났습니다. 나라가 망했을 때는 독립군이 활동했고, 나라를 지키기 위한 전쟁 속에서 순국열사들이 있었고, 가난을 극복하고자 나선 산업역군이 있었고, 독재에 항거해서 민주화를 달성한 민주투사가 있었고, 이제 여러분들이 통일의병이 되어 남북을 통일하고자 나섰습니다. 

 


 

우리 통일코리아는 이렇게 한나라로부터 계승되어 면면히 이어온 나라이고, 우리 통일의병은 이렇게 다물군으로부터 면면히 이어온 의병의 전통을 계승했습니다. 그러니 자랑스럽게 생각하세요.” (청중 박수)

 

이어서 황룡사가 지어진 연원과 그 과정에 대해 설명한 후 저 뒤에 9층 목탑을 보라고 하면서 우리도 당시의 신라인들처럼 통일 발원 기도를 함께 하자고 했습니다. 

 

“뒤를 돌아보면 황룡사 9층 목탑이라고 하는 어마어마하게 큰 목탑지가 있습니다. 가운데에서 9층목탑의 중심을 잡아주는 심초석에 쇠기둥을 높이 박고 전체를 엮어서 9층탑을 쌓았습니다. 이 탑이 남아 있었다면 중국이나 일본에 못지않은 거대한 탑이겠지만 몽골 침입 때 불타서 사라졌어요. 제가 분황사에 살 때 이 금당과 황룡사 9층탑을 복원하겠다는 원을 세웠지만 아직 이루지를 못 했습니다. 통일을 기원하면서 우리가 이 탑을 다시 세우고 통일을 맞이한다면 참 좋겠죠. 

 


▲ 황룡사지 9층목탑이 있었던 자리를 바라보며

 

이 탑을 세우면서 신라인들은 국난을 극복하게 해 달라, 즉 적의 침공을 막아달라며 평화를 발원했습니다. 나아가서는 삼국이 통일이 돼서 지속적 평화가 유지되도록 해 달라고 발원했어요. 그래서 이 목탑은 통일을 발원한 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덕여왕 때 이렇게 탑을 세우고 통일을 발원했고,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후에 통일이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도 여기에서 통일 발원 기도를 할 텐데, 우선 통일에 앞서 평화를 기원해야 합니다. 한반도에 다시는 전쟁이 없어야 한다는 평화에 대한 기도를 해야 해요. 그러나 전쟁만 없다고 되는 게 아니라 우리가 희망을 가지려면 나아가서 통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니 남북통일 발원을 신라가 그랬듯 이곳에서 우리가 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우리도 나라의 위기를 맞았습니다. 북한도 국가의 붕괴 위기를 맞았고, 남한은 그동안의 발전이 정체되면서 여러 사회적 갈등이 증폭되고 있어요. 발전해 왔는데도 희망이 없어요. 새로운 희망을 가지려면 통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니 여기서 신라인들이 그랬듯 이 탑을 향해 평화와 통일을 함께 기원하겠습니다.

 


▲ 금당터에 앉아 스님의 설명을 듣고 있는 통일의병들

 

기도는 당시 신라인들이 했던 기도를 따라하겠습니다. 모든 부처님의 법신인 비로자나 여래불을 염원하는 다라니가 ‘비로자나 여래불 총귀다라니’인데 여기서 10분간 총귀다라니를 염송하며 나라의 통일을 발원하겠습니다.”

 

목탁 소리와 함께 기도가 시작되었습니다. 모두들 간절한 마음으로 남북의 평화적 통일을 발원하며 총귀다라니를 염송했습니다. 

 

“나무 마하 비로자나 여래불 총귀다라니. 나무 이바이바제 구하구하제 다라니제 니하라제 비니마니제 사바하...” 

 


 

두 손을 모으고 간절한 마음으로 10분간 염송을 한 대중들은 기도를 마치고 이어서 28개의 깃발을 앞세우고 행진을 시작했습니다. 먼저 염불을 하면서 황룡사 9층 목탑지 주위를 돌았습니다. 

 

“나무 도량교주 관세음보살, 나무 도량교주 관세음보살...” 

 


 

긴 행렬이 질서정연하게 나란히 줄을 서서 관세음보살을 염하며 황룡사지를 나와 선덕여왕릉이 있는 낭산으로 향했습니다. 

 

낭산으로 향하는 길은 논두렁 길이었는데 추수를 마친 논이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반갑게 통일의병들을 맞이해주는 것만 같았습니다. 

 


▲ 황룡사지에서 낭산으로 향하는 길

 

행진을 하는 동안에는 라디오방송을 듣듯 각 지역별로 통일의병들이 나와 오늘 통일의병이 된 소감과 더불어 구호를 외치고 통일 노래를 불렀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가요를 통일을 염원하는 내용으로 가사를 바꿔불러서 큰 웃음을 주는 분도 있었고, ‘서울에서 평양까지’ 노래를 부르며 정말로 서울에서 평양까지 오늘처럼 행진을 할 수 있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기원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힘차게 “통일, 해버리자!” 라고 구호를 외치기도 했습니다. 

 


 

행진을 하면서 통일의병들의 목소리를 송수신기로 함께 전해 들으며 통일에 대한 염원도 점점 더 커져갔습니다. 

 


 

1시간 정도의 행진이 끝날 무렵 낭산 기슭에 위치한 능지탑에 도착했습니다. 능지탑 주위를 하나의 원으로 빙 둘러선 후 다함께 탑을 향해 선 채로 합장 삼배를 했습니다. 

 


▲ 능지탑

 

이어서 이곳 능지탑은 어떤 의미가 있는 곳인지 스님이 설명해 주었습니다.  

 

“668년에 고구려가 멸망하고, 676년에 당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통일을 달성한 후 왕위에 오른 지 20년 만인 680년에 문무대왕이 운명하게 됩니다. 그때는 백제도 멸망했고, 고구려도 멸망했고, 당나라와는 화친을 했기에 위협적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유일하게 바다 건너 왜는 건재해 있었어요. 그래서 문무왕이 이런 유언을 남겼어요. ‘내가 동해바다 용이 되어서 왜구의 침략을 막겠으니 나를 화장해서 내 뼈를 동해바다에 묻어 달라.’ 

 


 

옆에서 스님이 ‘아무리 용이 힘이 있다 해도 축생인데 사람이 어찌 축생계로 가겠습니까?’ 하고 말리니 ‘나라만 지킬 수 있다면 내가 축생이 된들 어떠랴’라고 했어요. 왕의 유언에 따라 왕의 시신을 성스러운 이곳에서 화장하고, 그 유골을 모아 동해바다 바위에 안치했습니다. 그게 대왕암이에요. 

 

그리고 용이 된 왕이 늘 부처님의 법문을 들을 수 있도록 그 가까이에 감은사라는 절을 지었습니다. 왕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의 이름이에요. 감은사는 대웅전까지 용이 된 왕이 올 수 있도록 물길을 내어 특이하게 지은 절입니다. 그리고 화장을 한 이곳에는 화장한 재를 가지고 왕의 뜻을 기리는 탑을 쌓았는데 이것은 부처님을 위한 탑이 아니라 능 대신 쌓은 탑입니다. 그래서 능지탑이라 부릅니다. 

 


 

원래는 허물어져 있었는데 저희 스승이신 불심도문 큰스님께서 이 땅을 구입해서 탑을 복원했어요. 참고로 할 모형이 없어서 문화재 전문가들도 원형이 어떤지를 잘 몰라요. 그래서 현재의 모양 같은 탑을 쌓았는데, 뒤쪽을 보면 탑재가 아직 많이 남아 있습니다. 원래는 이런 모양이 아니고 2층이나 3층이 아니었을까 추정하고 있습니다.”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문무대왕의 애국심이 가슴뭉클하게 다가왔습니다. 문무대왕처럼 백성들의 안위를 깊이 헤아리는 지도자들이 요즘은 보기 드문 현실이 안타깝게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허물어져 방치된 문화재를 한 스님이 사재를 들여 복원했다는 사실도 무척 감명깊게 다가왔습니다. 법륜 스님의 역사 의식도 이런 스승의 모습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렇게 능지탑을 한바퀴 돌고 선덕여왕릉으로 향했습니다. 울창한 솔숲을 지나자 선덕여왕릉이 보였습니다. 

 


▲ 선덕여왕릉

 

선덕여왕릉에서는 모두들 삼삼오오 자리를 펴고 앉아 점심 식사 시간을 가졌습니다. 각자 싸 온 도시락을 꺼내 함께 나눠먹으며 행진을 하느라 허기진 배를 채웠습니다. 

 


 

예상보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 선덕여왕릉에 대한 설명은 하지 않고 참배만 하고 곧바로 사천왕사로 내려왔습니다. 

 


▲ 사천왕사지

 

사천왕사에 모든 대중들이 자리하자 스님은 먼저 앞서 하지 못한 선덕여왕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이곳 사천왕사가 지어지게 된 배경과 이곳에서 우리가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특히 신라의 삼국통일이 갖는 성과와 한계에 대한 이야기는 오늘날 남북통일에도 많은 교훈으로 삼을 수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당나라가 2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신라 안에서는 엄청난 내분이 일어났습니다. 싸워 이길 수도 없는 당나라를 왜 건드려서 공연히 나라를 위태롭게 만드느냐는 쪽과, 아무리 그래도 약속을 지키지 않고 신라까지도 집어삼키려 드는 당나라에 굴복할 수 없다는 쪽이 맞섰습니다. 그런데 문무대왕이 소위 강경파 민족주의자들의 편을 들어서 당나라와 싸우는 쪽으로 결정이 났어요. 

 


 

그런데 싸운다 해도 실제로 무력을 갖고는 이길 수가 없잖아요. 그때 신라인들은 신앙으로 이 위기를 극복한 겁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신라가 당나라를 이길 수 없으니 신불(神佛), 즉 부처님과 보살님과 신들의 힘을 빌려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이런 쪽으로 정통하다고 하는 명랑법사를 청해서 상의를 했더니 이건 신들의 힘을 빌려야 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명랑법사의 지시에 따라 당시 신라에서 제일 성스럽다고 여겼던 신유림에 절을 지었어요. 신들이 노니는 곳이라 하여 신유림인데, 바로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입니다. 

 

신유림에 사대 천왕의 힘을 빌리는 사천왕사를 지어서 기도를 하면 당나라 군대를 물리칠 수 있다고 해서 여기다가 터를 닦고 기도를 하게 된 거예요. 그런데 터를 다 닦기도 전에 벌써 당나라에서 군대가 출발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다가 급히 임시로 절을 꾸몄습니다. 대나무 기둥을 세우고 비단을 쳐서 벽을 만들고, 짚으로 신상을 엮어 오방신을 모셨어요. 사방에 사천왕이 있고 가운데에 제석천(도리천)이 있는 거예요. 이렇게 오방신을 모시고 12명의 유가승 승려들이 문두루비법을 행했더니 신라를 침공하려고 산둥반도에서 배를 타고 오던 20만 당나라 대군이 서해에서 폭풍을 만나 죄다 물에 빠져 죽어버리고 한 명도 상륙을 못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신라가 위기를 극복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런 신라의 삼국통일에서 얻는 교훈을 잘 새겨야 합니다. 우선 동맹관계, 외교관계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 당시 중국이 통일되면서 당나라가 요즘의 미국처럼 급성장하는 국제정세를 잘 살펴서 최강대국과 동맹관계를 맺음으로써 나라의 위기를 오히려 통일의 기회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한편 민족사의 정통성을 계승하는 역사의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민족사를 축소시켜버린 단점도 있습니다. 우리도 지금처럼 너무 남한 중심적 사고만 하게 되면 민족사가 반토막이 날 위험이 있습니다. 요즘은 ‘못사는 북한과 통일해서 뭐 하나?’, ‘중국에서 북한을 관할해도 상관없다’ 이런 의식이 팽배해 있잖아요. 신라가 잘한 건 본받고, 신라가 실수한 것은 우리가 되풀이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신라를 비판하지만 지금 살펴보면 우리가 신라보다 못해요. 신라가 당나라와 8년 전쟁을 해서 결국은 자주국가를 건설한 것 같은 끈기와 의지를 우리도 가져야 합니다. 반미를 하자는 게 아니라 한미동맹을 견고하게 하되 어느 정도 자주성을 갖는 한미동맹을 해야 합니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 문제에서만큼은 미국의 이익을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이익이 우선돼야 한다는 입장을 아주 분명히 가져야 해요. 

 

그런데 현재 우리 한국의 정치지도자들은 그런 사람들이 드물죠. 그래서 미국이 중국 봉쇄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을 이용하는 데 휩쓸리거나, 미국의 봉쇄를 뚫고 나가려는 중국의 요구에 휘둘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강대국 사이에서 우리의 자주권을 잃고 여기저기 휘둘리다가 북한은 중국의 하위변수가, 우리는 미국의 하위변수가 되어서 새로운 미중 패권경쟁시대에 또다시 분단과 갈등을 겪어야 해요. 

 


 

지금 처한 이 위기를 잘 활용해서 통일을 이루어야 합니다. 통일 한국을 이루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균형을 잡음으로 해서 한국뿐 아니라 동아시아를 평화지대로 만드는 역할을 우리가 해내야 합니다. 이런 것이 우리가 통일 한국을 만들고자 하는 중요한 목표예요. 

 

그런 논지에서, 우리가 여기서 올리는 기도는 통일을 발원하는 기도일 뿐만 아니라, 통일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불상사를 미연에 막고, 또 일어나더라도 그 장애를 능히 극복해 내고자 하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하되, 사람의 힘이 부족하면 하늘의 힘이라도 빌려야 해요. 도와만 준다면 모든 힘을 빌려서 통일을 하고 통일의 장애를 극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첫째로 환인 하나님, 환웅 천황님, 단군 왕검님부터 해모수, 고주몽 등에 이르는 조상신의 옹호를 받고, 둘째로 신라인들이 여기서 기도했던 제석천, 사왕천, 팔부신장의 옹호를 받아야 합니다. 부처님에게까지 빌 필요는 없겠죠. 부처님처럼 점잖으신 분이 뭐 이런 데까지 관여하시겠어요? 이런 건 신들에게 맡겨야 해요. (모두 웃음) 

 


 

그래서 여기 사천왕사에서 민족의 자주독립, 자주통일국가를 건설하고 거기에 장애되는 요인이 생기지 않도록 10분 정도 간절한 마음을 모아 기도를 하겠습니다.” 

 

스님의 설명에 이어서 곧바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사천왕사에서는 제석천왕 제구예진언을 함께 염송했습니다. 

 

“나무 제석천왕 제구예진언. 아지부 뎨리나 아지부 뎨리나 미아 뎨리나 오소 뎨리나 아부다 뎨리나 구소 뎨리나 사바하”

 


 

기도하는 통일의병들의 간절한 마음이 역대 조상신과 제석천, 사왕천, 팔부신장에게도 전달이 되어 이들의 옹호 속에서 하루 빨리 남북 통일이 성취되기를 기원해 봅니다. 

 

이렇게 경주역사기행을 모두 마치고 다함께 버스를 타고 동국대학교 100주년 기념관으로 향했습니다. 

 

오후 1시 30분부터는 동국대 100주년 기념관에서 통일의병학교 경과 보고와 통일의병 임명장 및 뺏지 수여, 도문큰스님의 통일 발원 법문과 기도, 법륜 스님의 ‘통일의병의 길’에 대한 법문, 통일의병 선언문 낭독 등의 실내 프로그램이 이어졌습니다. 다음 이야기에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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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댓글 43

0/200

김성규

이장엄한 모습을보고 글로서나마 보고있으니 왜인지모르게 눈물이날까요?
현실인데 감동적인 영화를보는것같습니다

2015-12-22 03:13:31

^^^^

&lt;원래는 허물어져 있었는데 저희 스승이신 불심도문 큰스님께서 이 땅을 구입해서 탑을 복원했어요&gt;<br />&lt;그래서 명랑법사의 지시에 따라 당시 신라에서 제일 성스럽다고 여겼던 신유림에 절을 지었어요. 신들이 노니는 곳이라 하여 신유림인데, 바로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입니다. <br />신유림에 사대 천왕의 힘을 빌리는 사천왕사를 지어서 기도를 하면 당나라 군대를 물리칠 수 있다고 해서 여기다가 터를 닦고 기도를 하게 된 거예요. 그런데 터를 다 닦기도 전에 벌써 당나라에서 군대가 출발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다가 급히 임시로 절을 꾸몄습니다. 대나무 기둥을 세우고 비단을 쳐서 벽을 만들고, 짚으로 신상을 엮어 오방신을 모셨어요. 사방에 사천왕이 있고 가운데에 제석천(도리천)이 있는 거예요. 이렇게 오방신을 모시고 12명의 유가승 승려들이 문두루비법을 행했더니 신라를 침공하려고 산둥반도에서 배를 타고 오던 20만 당나라 대군이 서해에서 폭풍을 만나 죄다 물에 빠져 죽어버리고 한 명도 상륙을 못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신라가 위기를 극복했다고 전해집니다.&gt; 스님과 법사님들 추워보이세요ㅠ<br />

2015-12-17 01:28:18

이규원

모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2015-12-15 18:3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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