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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6시부터 3시간 30분 동안 있었던 정토불교대학 특강수련에 이어서 오전 10시에는 정토회 행자대학원을 졸업하는 행자님 한 분이 찾아와 스님께 인사 드리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정토회 ‘행자대학원’ 과정은 3년 교육과정으로 문경 정토수련원에서 1년, 서울 공동체에서 사회실천 활동 6개월, 인도JTS에 파견되어 1년, 다시 문경 행자원에서 6개월을 지내며 일과 수행의 통일을 배우고 실천하는 과정입니다.
오늘 스님에게 인사를 하러 찾아온 행자님은 제8기 행자대학원 과정을 무사히 마치고 오늘 2월에 졸업을 하게 됩니다. 원래 처음 시작할 때는 7명이 함께 시작했지만 모두 도중에 그만두는 바람에 이 행자님 한 분만 끝까지 남아서 졸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행자반장과 졸업하는 행자님이 스님에게 삼배로 인사를 올렸습니다.
두 분은 졸업 수련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지난 일주일 동안 스님과 동행을 하며 스님 가까이에서 일상 속에서의 수행을 배우는 시간을 가졌는데요. 먼저 스님이 일주일 동안 같이 다녀보니 어땠는지 소감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행자님은 “법문에서 하시는 말씀 그대로 소박하게 사시는 모습을 보니 금강경 제1분에 나오는 부처님의 일상이 떠올랐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러면서 “공의 도리를 깨우쳐주기 위해 같은 원리를 지치지 않고 수없이 반복하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본 것이 가슴에 많이 남는다”고 했습니다.
이어서 스님은 혹시 개인적인 고민이 있다면 말해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행자님은 두 가지 고민을 이야기했습니다. 먼저 남을 포용하지 못하고, 또 포용하지 못하는 자신을 자책하는 마음이 자주 일어나는 문제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스님은 자상하게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저는 남을 못 봐주는 마음, 그래서 갈구는 마음, ‘악심(惡心)’까지 있습니다. 그래서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라든지 행자대학원 도반들도 못 봐줬습니다. 그리고 자책의 정도나 빈도가 강합니다. 지난번에 정진을 하다가 그런 제 마음을 알아차리니까 스스로가 무서웠습니다. 그게 ‘살심(殺心)’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강도가 세다’, 그래서 ‘두렵다’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여쭤봅니다.”
“그런 마음은 누구에게나 다 있어요. 스님도 고문을 당할 때 ‘이 자식들,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하는 독한 마음이 있었는데, 그 마음이 누그러진 이유는, 그 사람들이 나한테 사과를 해서도 아니고, 내가 참선해서 깨친 것도 아니에요. ‘그 사람들도 그냥 일반 사람이구나’ 하는 걸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고문하는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듣고 있자니 ‘이 인연에서는 저 사람들이 나한테 악마 같은 역할을 하지마는, 집에 가면 자상한 남편이고, 사랑스러운 아들이고, 직장에서는 동료들이구나’ 하는 것을 이해하게 되면서 미움과 증오심이 많이 사라졌던 겁니다.
그러니까 악심이 생기는 건 ‘어떻게 저런 행동을 할 수 있나?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나?’ 하고 이해가 안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질문자가 그 사람의 까르마를 보면서, 그 사람이 자란 환경에 비추어서 그 사람의 살아온 습관이나 사고방식을 보면서 ‘아, 저 사람은 저렇게 말할 수 있겠다’, ‘저런 경우에 저 사람은 저런 행동을 할 수도 있겠구나’, ‘저 사람이 저래서 저런 말을 했겠구나’ 이렇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상대를 이해하면 악심이 없어지는 거예요.
그렇다고 ‘그게 옳다’ 라든지 ‘그렇게 해도 된다’는 건 아니에요. 그러나 내가 ‘그 사람이 그렇게 하는 행위나 말은 이해가 된다’ 하면 내 속의 악심은 없어진다는 거예요. 다만 내가 생각할 때 바람직하지 않다 싶으면 개선하려고 노력을 해야지요. ‘내가 보기에는 아닌 것 같은데, 이렇게 하면 어떻겠느냐? 내가 옳고 너는 그르다는 게 아니라 이게 더 합당하고 이치에 맞는 거 아니냐? 더 효율적인 거 아니냐?’ 이렇게 접근을 하면 됩니다. 그런데 우린 늘 자기 생각이 옳다고 고집하기 때문에 자기 생각을 주장하거나 상대를 비난하는 쪽으로 가게 되지요. 그러나 우리의 습관이 그런 거니까 그런 내 모습도 인정을 해야 합니다. 그런 나마저도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런 식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나한테도 이런 모습이 있는 거구나’ 하고 스스로 이해해야 합니다. 상대가 나한테 이해받을 권리가 있듯이 나 또한 이해받을 권리가 있으니까요.
그러나 ‘내가 이해하는 것’과 ‘바람직한 것’은 다릅니다. 바람직하지 않은 건 개선을 해 나가야 됩니다. 그러나 개선이 잘 안 된다고 질문자가 나쁜 인간은 아니고, 다만 좀 이해가 부족할 뿐입니다. 쉽게 말하면, 자기 옳다는 생각이 너무 강한 것이지요. 대신 행자님은 일은 잘할 겁니다. 우리 정토회에서 일을 빨리빨리 잘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옳다는 생각이 강하고, 다른 사람이 일을 못하는 걸 못 봐내고, 소통이 잘 안 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걸 과제로 삼아야지요. ‘간섭하지 마라’ 하니까 외면한다든지, ‘외면하지 마라’ 하니까 간섭하는 식으로 가면 안 되고, 간섭도 외면도 다 버려야 됩니다. 미워하는 것도 버리고, 외면하는 것도 버려야지요. 상대를 이해하게 되면 나한테 있는 증오심이나 미움은 사라집니다. 또 행자님은 ‘정토를 만들겠다’는 원이 있으니까, 그들을 인도해야 한다는 목표가 있잖아요.
반면 그렇게 안 되는 것도 내 현실이니까, 목표를 분명히 하면서 꾸준히 해 나가면 올해보다는 내년이, 내년보다는 내후년이 나아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해를 거듭 해도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그건 좀 문제입니다. 그런데 한꺼번에 없어지는 건 아니니까 ‘아직 습관이 남아있지만 그래도 작년보다는 조금 나아졌다’ 이렇게 가면 됩니다.”
행자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보였습니다. 목표를 분명히 하고 앞으로 나아가되 잘 안되는 현실 또한 수용하면서 가야 한다는 말씀이 많은 위안이 된 것 같았습니다.
이어서 행자님은 두 번째 고민을 물었습니다. 주인된 마음으로 한 가지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눈치를 자주 보게 된다는 고민이었습니다. 스님은 이에 대해서도 자상한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제가 일을 할 때는 남 눈치 살살 봐가면서 욕먹지 않을 만큼만 하고, 대충 하고, 그러면서 집중을 잘 못하더라고요. 그리고 항상 주인된 마음 없이 눈치만 보며 적당히 하니까 흥미도 없고 기분도 쳐집니다. 서울공동체에서 지낼 때도 그랬고, 인도에서 지낼 때도 그랬습니다. 지금은 행자원으로 다시 돌아왔는데도 계속 그런 식으로 살고 있더라고요. 제가 그런 줄 잘 몰랐는데, 이번 학기 들어서 ‘패턴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런 줄 알게 되었는데도 개선이 잘 안 됩니다. 계속 다른 데 기웃거리고, 이 사람 저 사람한테 말 거는 식으로 집중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특별히 다른 곳에 관심을 갖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업(業)이라고 합니다. 108배를 할 때 가만히 자기를 살펴보세요. 예를 들어 ‘절반만 하면 하기 싫고 꾀가 나고 안 하면 안 될까 하는 생각이 든다’, ‘70배쯤 하면 그런 생각이 든다’는 등의 동일한 패턴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1000배를 한다면 한 500배에서 그렇다든지, 700배에서 그렇다든지, 시작할 때는 주로 그렇지만 하다 보면 괜찮다든지, 시작할 때 약간 거부반응이 있지만 해 버리면 괜찮다든지, 시작할 때는 좋은 마음으로 하는데 중간쯤 가면 꼭 그렇다든지, 중간만 넘어서면 마무리할 때까지 꼭 집어치워버린다든지 하는 자기 패턴을 알아야 되거든요. 그게 업입니다.
어릴 때부터 살아오면서 형성된 것이기도 하고,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기도 합니다. 그것을 분명한 극복과제로 삼아버리면 그런 일이 일어날 때 극복이 됩니다. 모를 때는 하다가 그만 두는 쪽으로 가게 되는데, 알고 있으니까 ‘아, 이거 극복대상이다’ 하면서 뛰어넘을 수 있게 되는 거예요. 내가 눈치 보는 까르마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 눈치 보게 될 때 마다 ‘아, 또 업식이 나타나는구나’ 하며 눈치 보는 자기를 알아차리면 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기 업식을 알아야 됩니다. 내가 어떤 심정이나 성질을 갖고 있다는 걸 알아서 거기에 맞춰서 살 수도 있겠지만, ‘이건 극복해야 되겠다’ 싶다면 그것을 과제로 분명히 삼고 정진을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일상생활에서 분별심이 많다면 ‘이 정도 수준의 분별심은 그냥 갖고 살지, 뭐’ 이렇게 받아들이고 그걸 문제 삼지도 말고, 분별심 낸 걸 참회만 하고 그 과보를 받으면 됩니다. 하지만 ‘그걸 고쳐야겠다’고 생각하면 계속 지켜보면서 그런 현상이 일어날 때 이것을 극복하는 훈련을 해야지요. 동일한 패턴이 열 번, 스무 번 반복된다면 그건 윤회이지만 그렇게 반복되더라도 극복하려는 목표를 세워놓고 지켜본다면 그건 연습이거든요.”
스님은 고민이 더 있는지 물었고, 행자님은 더 이상 고민이 없다고 말하며 밝게 웃었습니다. 그러자 스님은 행자님이 행자대학원을 졸업하면 정토회의 사회활동 부서에 배치되어 다양한 실천 활동을 하게 될 것을 헤아리며 사회 활동을 하면서도 어떻게 수행을 놓치지 않을 수 있는지 그 자세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정토회에서 활동한다는 것은 수행자로서 사회활동을 하는 것이지, 개인으로서 사회활동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군데에 앉아서 평생 선정을 닦다가 죽는 것도 ‘수행자’라고 할 수 있지만, 꼭 앉아있을 필요는 없잖아요. 평정심만 유지한다면 움직일 수도 있고, 오고 갈 수도 있고, 일할 수도 있고, 사람을 만날 수도 있는 거예요. 그랬을 때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괴로움, 분별심, 분노 등은 수행의 과제로 삼으면 됩니다. 그것을 뛰어넘어서 사회활동을 하는 건 수행자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일상이 다 수행이 되는 거예요. 일을 할 때는 일을 맵시 있게 하는 것도 수행입니다. 맵시 있게 하려고 하는데 집착이 되고, 또 집착하는 자기를 한탄하면 그건 수행을 놓치는 겁니다. 또 안 된다고 포기를 해 버려도 그건 수행을 놓치는 겁니다.
수행이라는 것은 꾸준히 연구하는 자세입니다. 농사를 지어도 수행자가 농사를 지으면 농사의 결과, 즉 ‘잘 지었나, 못 지었나’가 우선이 아니고, 일단 준비를 해서 농사를 짓고, 거기서 발생하는 부족한 점을 발견하면 보완해서 다음에 또 해 보고, 다시 또 해 보면서 농사짓는 겁니다. 그냥 ‘농사짓는 게 재밌다’ 해서 쾌락으로 하는 게 아니라 그런 이치를 터득해 가면서 하는 겁니다. 마음에 호기심이 있으면 재미있어집니다. 그렇지요?”
“예.”
“노래하고 춤추니까 재미있다고 하는 것과 성격이 다른 거예요. 이런 자세를 유지하면 일상에서도 수행을 할 수가 있습니다. ‘불교지식은 필요 없다’거나 ‘불교지식을 가져야 된다’가 아니고, 필요한 지식은 틈틈이 습득해 나가는 겁니다. ‘공부할 시간이 없어서, 지식습득을 못해서 문제가 있다’면 지식에 집착하는 거고, ‘할 필요가 뭐 있어?’ 한다면 이것은 무식으로 가는 길입니다. 학습할 생각이 없는 것이니까요.
이 세상에 필요한 일을 우리가 다 할 순 없는 겁니다. 정토회도 농장을 만들어야 된다는 필요성을 진작부터 갖고 있었지만 20년이 되도록 아직 못하고 있잖아요. 현실적으로 할 수가 없기 때문에 못 하고 있는데, 그렇다고 그런 목표를 없애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리해서 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꾸준히 ‘한다면 어떻게 할 거냐?’를 생각하면서 조금씩 하다가, 이제 기회가 오면 하면 되는 겁니다. 저도 지금 작은 텃밭을 경작하고 있는데, 이런 것을 ‘실험’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심심하니까 소일거리로 해 보는 게 아니라 터도 조금 밖에 없고, 시간도 조금 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시간이 되는 만큼 연습을 해 보는 겁니다. 그런 자세로 공부를 해 나가면 됩니다.
수행이라는 것은 이치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이치를 파악하고 그 이치를 이용해서 효율을 높이는 게 과학이잖습니까. 수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이렇게 저렇게 작용하는 걸 파악해서 그걸 가지고 삶을 효율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열심히 일을 하다가 때로는 아무 것도 안 하고 한 달 동안 가만히 있어 볼 수도 있어야 됩니다. 그렇게 아무 것도 안 할 때도 편안해야지 ‘심심하구나’ 하면 그건 일에 집착하는 거예요.
이것을 물에 비유하면 이렇습니다. 물은 자기를 고집하지 않기 때문에 그릇 따라 모양이 변하고, 경사가 완만하면 천천히 흐르고, 경사가 급하면 빠르게 흐르며, 웅덩이를 만나면 고이고, 낭떠러지를 만나면 떨어집니다. 그런 것처럼 우리도 주어진 환경 따라 적응할 수 있어야 됩니다. 자기를 고집하기 때문에 그게 잘 안 되는 거거든요. 또 반대로 우리는 필요하면 환경을 바꿀 수도 있는 겁니다.
예를 들어 아무 데나 감자 심고, 고구마 심는 게 아니라, 토질을 조사해서 토질에 맞게 곡식을 심는 경우가 있을 테고, 고구마를 심기는 해야겠는데 토질이 고구마에 적당하지 않다면 토질을 개선해야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개선을 하려면 노력이 필요합니다. 토질에 딱 맞춰서 곡식을 심는 게 제일 간단합니다. 환경에 적응하는 게 제일 쉬운 길이에요. 그러나 그것만 길은 아니에요. 때로는 감자 심을 모래땅에 고구마를 심어야 될 때도 있을 텐데, 막상 심어보니 고구마가 잘 안 된다면 다른 데 가서 찰흙을 파다가 넣어준다든지, 거름을 더 집어넣든지 해서 토질을 개선해야 됩니다.
환경을 하나도 훼손하지 않고, 나무로 집을 지으면 일손이 적게 들겠지요? 그러나 건물에 필요한 땅이 하필 둔덕이라면 땅을 깎아서라도 지어야 되지요.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과 ‘환경에 적응하는 것’은 늘 중도적이어야 됩니다. 치우치면 안 돼요. 치우치면 ‘적응’만 주장하거나 ‘개발’만 주장하게 되는 겁니다. 적응과 개발이라는 것은 같이 가야 됩니다.”
수행은 이치를 터득해가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면서 스님은 다양한 비유를 들려주었습니다. 스님은 생활 속에서 모든 일에 대해 연구를 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경험과 사례를 들려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행자님에게 언제 졸업하는지 물어본 후 졸업을 하게 되더라도 수행하는 자세는 똑같은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다만 책임을 맡아서 일을 하게 되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주인된 자세가 중요함을 덧붙이며 행자대학원 졸업에 대한 격려 말씀을 마쳤습니다.
“2월에 졸업인가요?”
“예.”
“졸업이라는 것이 특별한 일이 아니고 일상과 똑같은 겁니다. 다만 일정한 학습기간을 마치고 졸업하게 되면 학생신분을 벗어나서 한 부서에서 뭐든 책임을 맡아서 일을 하게 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 수행을 꾸준히 같이 해나가야 됩니다.
예를 들어 ‘밥하라’ 그러면 밥하는 것도 수행입니다. 밥을 이렇게도 해 보고, 저렇게도 해 보고, 쌀을 먼저 씻어 놓아보기도 하고, 불을 크게 대거나 작게 대보기도 해 보고, 찹쌀을 섞어 보기도 하고 안 섞어 보기도 하면서 연구를 하는 게 수행입니다. 김치를 담글 때도 배추가 맛있어야 되는 건지, 절일 때 잘 절여야 되는 건지, 양념을 뭘로 해야 맛있게 되는 건지, 어떤 온도가 보관하기에 적당한지를 연구하면서 김치를 담그는 게 수행입니다. 행자님에게 김치공장을 맡기면 김치를 연구하고, 농사를 맡기면 농사에 대해서 연구하고, 통일 운동을 맡기면 통일을 연구하고, 아이들 가르치는 걸 맡기면 아이들 가르치는 걸 연구하면, 그게 수행입니다.
성과를 자꾸 내려고 하면 욕심에 치우치고, 주어진 것만 한다면 그건 게으른 겁니다. ‘주인’은 종과 다른 겁니다. 주인은 자기 농사이니까 열심히 지을 수밖에 없는데, 그렇더라도 아프다면 쉬겠다고 결정할 수가 있잖아요. 그런데 종은 그게 안 되고, 아파도 나가서 일해야 되고, 건강해도 오늘 휴일이라면 놀아야 됩니다. 그러나 주인은 휴일이라고 놀 이유가 뭐가 있어요? 안 아프면 일하는 것이지요. 휴일이라 가게 문을 닫아야 한다면 집에서라도 일을 하잖아요. 그게 주인과 종업원의 차이입니다. ‘놀아라’ 한다고 노는 주인은 없습니다. 일을 하지요. 그러나 일해야 되는 상황인데도 좀 아프다면 스스로 휴식을 결정할 수도 있는 겁니다. 정토회에서 ‘수행자’는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행자님은 정토회에 살고 있으니까 여기서 주어진 규칙을 지키기도 해야겠지만 본인이 주인 입장임을 알아야 합니다. 주인이라고 다 자기 마음대로 하는 건 아니에요. 그런데 규칙을 따르다 보면 종속적으로 되기가 쉽고, ‘주인 되라’ 그러면 자기 마음대로 하기가 쉽습니다. 행자님은 정토회에서 혼자 사는 게 아니기 때문에 전체가 잘 되도록 하는 자기 역할이 있겠지만, 그러나 또 그 안에서 주인으로서 연구하고, 아이디어도 내고, 조정도 하고, 그래서 건의도 하고, 안 되면 또 다시 조정해서 해 보고 이래야 합니다.
종업원들은 한두 번 해 보고 안 되면 ‘거, 뭐, 시키는 대로 하면 되지 내가 머리 쓸 이유가 뭐가 있나?’ 하고 포기해 버리잖아요. 일이라는 것은 늘 연구를 해야 됩니다. 김치를 저장하기 위해서 비닐로 포장을 하더라도 어떻게 포장해야 효과적인가를 연구하고, 또 포장한 김치를 들 때도 탁 들다가 약간 삐끗하면 ‘아, 포장할 때는 안전하게 한다고 했지만 이렇게 밑이 터질 염려도 있겠구나’ 알아차려서, 더 연구를 해서 포장에 신경을 쓴다든지 이렇게 자꾸 해 보면서 터득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늘 깨어있어야 합니다. 일을 하면서 늘 이치에 맞게 연구하고, 실수가 있었다면 그에 대해서 욕할 게 아니라 그 실수의 원인을 연구해야 되고, 또 실수를 했을 때 지적을 받으면 ‘아, 감사합니다’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죽어라고 김치 담가서 포장해 놨더니 그 밑이 좀 터졌다고 야단치느냐 ’는 식으로 접근하면 공부에 진척이 생기지 않습니다.”
스님의 애정이 깃든 말씀에 행자님은 환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특히 지난 일주일 동안 스님 가까이에서 김치를 포장하고 배달하는 일을 함께 하면서 직접 피부로 느낀 점이 많기에 스님의 말씀이 더 와닿았던 것 같습니다.
행자님과의 일문일답 형식으로 모임이 진행되었지만 스님의 말씀은 직장생활을 하든, 가정생활을 하든, 언제 어느 곳에서든 적용할 수 있는 소중한 가르침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많은 분들에게 삶의 나침반이 되길 바랍니다.
▲ 스님의 낡고 해진 신발. 밑창이 떨어진 것을 스님은 본드로 다시 붙여서 신고 있습니다. 행자님은 이런 검소한 삶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합니다.
행자반장과 행자님은 감사한 마음을 담아 스님에게 합장으로 인사를 한 후 문경 정토수련원을 출발하는 스님을 배웅했습니다. 곱게 차수를 한 채 스님의 차량이 시야에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습니다.
문경 정토수련원을 출발한 스님은 오후 1시가 되어 울산 두북에 도착했습니다. 두북에 도착해서는 아랫방에 보관하고 있던 감 상자에서 홍시가 된 것을 분류해 모으는 등 소일을 한 후 오늘은 수행팀 전체가 휴식을 취했습니다.
스님은 밤늦게 다시 새책 원고 교정 업무를 보았습니다. 내일까지 끝내야 한다면서 늦게까지 일하시는 것을 보니 약간 마음에 부담을 갖고 계시는 듯 했습니다.
내일은 두북 정토수련원에 들러 선물용 김장김치의 포장상태와 택배 주문을 살펴본 후 서울로 올라갈 예정입니다. 저녁 7시부터는 관악구청 8층 대강당에서 서울시민들을 위해 ‘통일이야기’를 주제로 즉문즉설 강연이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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