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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새벽 6시부터 9시 30분까지 약 3시간 동안 정토불교대학 특강수련에 참가한 350여 명의 학생들을 위해 즉문즉설 강연을 했습니다.
새벽 예불과 기도를 마친 후 새벽 5시 30분에 아침 식사를 하고 6시부터 특강수련 즉문즉설이 시작되었습니다.
어제부터 문경 정토수련원 대수련장에서 1박 2일 동안 특강수련을 하고 있는 정토불교대학생들도 새벽 4시에 일어나 4시 30분부터 새벽 예불과 기도를 마친 후 간단히 간식만 먹고 고요히 명상을 하며 스님을 기다렸습니다. 서울제주 지역과 대전충청 지역에서 정토불교대학을 듣고 있는 학생들 350여 명이 함께 자리한 가운데 죽비 삼성과 함께 법문이 시작되었습니다.
▲ 문경 정토수련원 대수련장
스님은 간밤에 모두 잘 잤는지 안부를 물은 후 이런 낯선 환경에서 불편함을 경험해보는 것도 좋은 수행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하면서 법문을 시작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잘 주무셨어요?”
“네.”
“매일 혼자 자다가 300여 명이 함께 자니까 잠이 잘 안 왔는지 대답이 신통찮네요. (대중 웃음) 은은한 음악을 틀어놓고 자면 잠이 잘 오는데, 여기는 코로 연주하는 음악을 여기저기서 틀어줍니다. 못 잔 사람은 잠을 안 자도 되는 사람이에요. 너무 졸리면 무당이 굿을 해도 잔다고 하잖아요. 또 화장실에 갔더니 엉덩이가 시원하죠? 문경에서는 화장실에도 늘 에어컨을 틀어둡니다. (대중 웃음)
불편함을 경험해보는 것도 수행이에요. 일상적으로 우리가 인식하기에는 시설이 열악하기 때문에 불편하다고 하지만, 더 정확하게 말하면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삶의 습관과 다르기 때문에 불편한 거예요. 애초부터 이런 환경에 사는 사람은 적응이 되어서 불편하지 않습니다. 제가 시골에서 서울에 처음 왔을 때는 서양식 좌변기가 불편했어요. 시설이 아주 좋았는데도 불편했어요.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습관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문경 갔더니 시설이 열악해서 불편하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세속적 관점, 즉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관점입니다. 이제는 마음공부를 하니까, 내가 살아온 삶의 습관과 다르기 때문에 불편을 느꼈다는 걸 알아야 해요. 다시 말해 이건 주관적인 문제입니다.
그러면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내 습관에 맞게 시설을 고치는 것, 즉 주변 환경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게 세속적 관점이에요. 다른 하나는 내 습관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이 업식을 소멸시킴으로써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는 거예요. ‘이렇게 살아야 한다’라고 하는 습관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 것이 수행적 관점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자유는 내 욕구대로 하는 것을 이릅니다. 수행에서 말하는 진정한 자유는 내 욕구대로 하겠다고 하는 이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관점이 서로 다릅니다.
동산에 뜬 달을 보고 어머니 살아계실 때 보름달을 보며 기도를 함께 하던 것이 생각나서 눈물이 났다고 합시다. 그때 ‘아, 오늘은 달마저도 나를 슬프게 하는구나’라고 한다면 좋은 시 구절이긴 하지만 이건 세속적 관점입니다. 수행적 관점은 슬픔이 일어난 원인이 달에 있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동산에 떠오르는 달을 보고 내가 슬퍼했어요. 나에게서 슬픔이 일어났습니다. 달에 원인이 있는 게 아니라 달이 나의 옛 추억을 자극해서 나에게서 슬픔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 차이가 정리되지 않으면 불교대학을 졸업해도 과학이나 역사 배우듯 ‘불교가 뭐고 수행이 뭐다’라는 지식만 쌓았지, 수행이 된 건 아니에요. 수행이 됐는지 여부는 내가 가진 고뇌가 해결이 되는지를 보면 알 수 있어요. 고뇌가 없어졌거나 줄어들었다면 수행으로 한 발 나아간 것이지만, 박사학위를 따도 될 만큼 불교 지식이 많아도 내 고뇌가 줄어들거나 사라지지 않으면 그건 수행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어요. 수행은 관점이 중요합니다. 내가 바라는 대로 세상을 바꾸어서 행복해지는 것은 욕망을 따라가는 세속적 관점입니다. 욕망으로부터 내가 자유로워지는 것이 해탈이고 수행이에요.
그러니 여러분들이 여기 와서 하룻밤 자는 것도 수행이 됩니다. ‘여기 와서 여럿이 자느라 잠을 설쳤다. 화장실이 불편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니 졸린다.’ 이런 불편을 느꼈을 때 ‘왜 여럿이 같이 자야 하나? 왜 화장실을 이따위로 만들어놨나? 왜 스님은 법문을 꼭두새벽에 하나?’ 이렇게 내 불편이 이러저러한 조건으로부터 생겨났다고 보면 세속적 관점입니다. 마왕 파순의 자식이에요. (대중 웃음)
그 불편을 통해 자기를 봐야 합니다. ‘내가 그동안 혼자 자는 잠버릇이 있었구나. 내가 좌식변기에 익숙했구나. 내가 아침에 늦게 일어나는 게 습관이 되었구나. 그래서 이 습관이 여기에 저항을 하는구나. 습관은 길들여진 것이고, 그 길들여진 대로 나아가려고 하는 관성이 있구나. 그래서 그렇게 안 되니까 마음이 불편하거나 짜증이 일어나는구나.’
불편을 느끼는 건 잘못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불편을 느낄 때 이 불편, 이 괴로움의 원인이 어디서 일어나는지 자기가 알아야 합니다. 화장실 갈 때 약간 가기 싫은 마음이 일어나는 것처럼, 불편함이 일어나는 것을 먼저 알아차려야 해요. 그리고 이 원인이 나의 업식으로부터 일어남을 알아서 여기로부터 내가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불편을 느끼다가 ‘어!’ 하고 나를 알아차림으로 해서 여기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수행입니다.
우리는 수행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이 세상이 다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어떤 환경에 처해도 거기로부터 내가 자유로워지는 게 수행이에요. 정토회 수련을 주관하는 사람들은 시설 개선을 고려할 수 있습니다. 참가자들이 지금껏 살아온 습관과 달라서 불편을 느끼니까 가능하면 시설을 그 사람들 습관에 맞도록 해주자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에요. 그러나 수행을 목적으로 여기 온 여러분들은 그렇게 생각하면 안 돼요. 어디를 가든 어떤 상황에서든 내가 괴롭지 않아야 그게 해탈입니다. 시설이 나쁘다고 해서 꼭 수행에 장애가 되는 건 아닙니다. 수행은 항상 자기에 깨어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저에게 요청된 강연 시간은 무려 3시간입니다. 저는 3시간을 앉아서 설법할 수 있는데 여러분은 3시간을 앉아서 들을 수 있을까요?”
“네!”
“저는 안 졸고 앉아서 법문할 수 있는데 여러분도 안 졸고 3시간 들을 수 있어요?”
“네!”
“저는 화장실에 안 가고 3시간 할 수 있는데 여러분도 그럴 수 있어요?”
“네!”
대답은 컸지만 모두 크게 웃었습니다. 새벽에 3시간 동안의 법문은 모두들 처음 경험해 보는 것이지만 이 모든 것이 수행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에 절로 마음이 났는가 봅니다.
이렇게 여는 인사를 마치고 드디어 본격적은 법문이 시작되었습니다. 스님은 법문이 시작되고 나서 한 번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3시간 30분 동안 26명의 질문에 대해 연이어 답변을 해주었습니다. 주어진 시간 안에 불교대학생들이 궁금해하는 것을 하나라도 더 해결해주려다보니 스님의 말도 평소보다 더 빨라지고 목소리도 더 높아졌습니다.
1번 질문자는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지 말라는 계율 중에서 그 생명에는 식물도 포함이 되는지, 식물을 먹어도 되면 동물도 먹어도 되는 것 아닌지 물었고, 2번 질문자는 모든 것을 베풀라는 가르침에 따르면 자신의 장기도 타인을 위해 모두 이식해야 하는지 물었고, 3번 질문자는 마음이라는 것은 경계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작용하는데, 선, 염불, 화두, 호흡관을 함께 수행해도 괜찮은지 물었고, 4번 질문자는 수행을 해보니 진척이 없고 미움을 비웠다가 채웠다가 반복하는데 이것이 윤회인지 물었고, 5번 질문자는 교회를 다닐 때는 죄의 사함을 얻었다고 해주어서 마음이 금방 밝아졌는데 불교에서는 인과 연이라고 하니까 다시 죄인이 된 것 같다며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여기까지 답변을 마치니 벌써 1시간이 지나갔습니다. 스님은 학생들이 졸지 않도록 하기 위해 무척 재미있는 비유를 들어주며 계속 웃게 만들어주기도 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모습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벽녘이라 눈을 비비며 하품을 하는 사람들이 몇몇 보였습니다.
그래서 스님은 “잠시 쉬어가는 시간을 갖자”며 노래를 한곡 불러줄 사람을 찾았습니다. 그러자 앞자리에 앉은 한 분이 번쩍 일어나서 멋들어지게 노래를 한자락 불러주었습니다.
“빗물이 몽실몽실 하늘나르며 ♬ 부처님의 노래를 불러주네.
새들이 넘실넘실 하늘나르며 ♬ 부처님의 노래를 곱게 부르네.”
박수를 치고 웃다보니 어느새 잠이 모두 깨고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해졌습니다. 그리고 스님은 또한번 청중들을 웃겨 주려고 한마디 덧붙였습니다.
“그래서 영상 강의가 좋은 거예요. 여러분들이 아무리 졸아도 영상 속에서 법문하다가 ‘너 왜 졸고있어?’ 이런 얘기를 절대 안 합니다. 오늘처럼 직강에서는 여러분들이 졸면 ‘왜 졸아요?’ 하고 얘기하잖아요. 그래서 앞으로도 가능하면 영상 강의를 많이 들으세요.” (웃음)
스님의 농담에 활짝 웃고 나니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다시 이어서 스님은 질문에 대한 답변을 이어갔습니다.
6번 질문자는 모든 법에는 옳고 그름이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고 하셨는데 불법도 모든 법에 포함되는 것인지 물었고, 7번 질문자는 사회 생활과 신앙 생활 둘 중에 사회 생활에 중점을 둘 수 밖에 없는데 괜찮은지 물었고, 8번 질문자는 세상의 변화와 발전은 욕망으로 인해 일어나는 것인데 욕망을 그저 바라보기만 하라고 가르치니 어리둥절하기만 하고, 그래서 불교국가인 동남아가 가난한 것 같다고 물었고, 9번 질문자는 깨달음의장을 다녀오니 화도 적어지고 불만도 거의 없어지고 편안한데 그냥 이렇게 편안하고만 있어도 되는지, 욕심을 버리고 열망을 가지려면 어떡해야 하는지 물었고, 10번 질문자는 고와 락은 욕구에서 비롯되니 욕구 없이 살아야 한다고 하는데 욕구 없이 어떻게 살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11번 질문자는 출가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돈에 연연할 수밖에 없는데 경계에 부딪힐 때마다 항상 고민이 된다고 물었고, 12번 질문자는 스님께서는 남의 인생에 간섭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저는 제 동생이 깨달음의 장도 다녀오고 정토불교대학도 다녔으면 좋겠다며 어떻게 권유해야 하는지 물었고, 13번 질문자는 스님의 가르침을 생활에 적용하고 싶은데 수행의 원칙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물었고, 14번 질문자는 상대가 나와 다름을 인정하고 지켜보는 것과 외면하는 것은 어떻게 다른지 물었고, 15번 질문자는 아무리 기도해도 부모님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지 않는데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16번 질문자는 스님께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누구인지 물었고, 17번 질문자는 자녀가 20세가 되면 독립적으로 살도록 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20세는 과거 기준이 아닌지, 사회 진출이 늦은 요즘 시대를 감안하면 30세로 높여야 하지 않는지 물었고, 18번 질문자는 최근 가정에서 정토법회를 열었는데 참석하는 인원이 점점 줄어들어 마음이 무겁다며 어떻게 전법을 해야 하는지 물었고, 19번 질문자는 정토불교대학과 경전반의 차이는 무엇인지 물었고, 20번 질문자는 함께 수행하는 도반과 어떻게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21번 질문자는 왜 불교에서는 108배를 하는지 물었고, 22번 질문자는 기독교 신자이지만 행복한 삶을 살고 싶어 정토불교대학을 다니고 있는데, 100일이 지난 지금 배신한 것은 아닌지 고민이 된다고 물었고, 23번 질문자는 정토회는 어떤 종파를 계승하고 있는지 물었고, 24번 질문자는 정토회를 다니면서 다른 사찰과 많이 다른 점을 보았는데, 기존 사찰에서 하는 방생 기도나 산신 기도 이런 것에 계속 참석해야 할지 물었고, 25번 질문자는 정토회를 만나서 너무 좋은데 특히 아내에게 권유하는게 잘 안된다며 어떻게 전법을 해야 하는지 물었고, 26번 질문자는 스님 법명 앞에 ‘지광’ 이라는 법호가 붙어 있는데 어떤 의미인지 물었습니다.
일일이 나열하기도 버거울만큼 많은 질문들이 쏟아졌고, 스님은 각각에 대해 막힘없이, 마치 물살이 가파른 계곡을 거침없이 유유자재하게 흘러내려가듯이 답변을 해주었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교회에 다닐 때는 죄의 사함을 받아서 좋았는데 불교를 알고나서부터는 인연과보를 알게 되어 더 마음이 무거웠다는 질문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합니다. 명쾌한 스님의 답변에 모두 박장대소를 하며 웃기도 하면서 성인의 진정한 가르침이 무엇인지 되돌아 볼 수 있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주 예수만 믿으면 죄 사함을 얻었다고 해서 마음이 금방 밝아지는데 불교에서는 인과 연의 이치라고 설명하니까 기도를 해도 마음이 무겁습니다. 교회 다닐 때는 죄 사함을 받았는데 여기 오니까 다시 죄인이 된 것 같아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르겠고 (대중 웃음) 아침 정진할 때 옛날의 죄업이 툭툭 떠올라 괴롭습니다. 스님의 밝은 법문으로 다시 죄 사함을 받고 싶습니다.”
“교회를 다시 가세요.” (대중 웃음)
“부처님 당시의 인도에서는, 사제인 브라만, 즉 바라문들이 말하길 ‘아무리 죄를 많이 지어도 성스러운 강가 강에 가서 목욕을 하면 죄가 다 씻겨내려가서 하늘나라에 태어난다다’라고 했어요. 부처님의 제자 중 가미니라는 젊은 제자가 그 말을 듣고 의문이 생겼어요.
‘아무리 죄를 지어도 목욕만 하면 죄 사함을 받는다면 밥 얻어먹고 나무 아래서 잠자고 다 떨어진 옷 입고 매일 명상하면서 힘들게 수행하지 않아도 되지 않나? 호의호식하고 남 때리고 물건 빼앗고 예쁜 여자는 추행하고 성질나면 욕하고 술 마셔서 취해도 강가 강에 몸만 담그면 죄가 다 없어진다면 왜 부처님은 우리더러 이렇게 힘든 길을 가라 그러실까?’
그래서 부처님에게 물었습니다. ‘저 바라문들이 말하기를 아무리 죄를 지어도 강가강에서 목욕만 하면 모든 죄가 다 사해지고 천국에 간다는데 그 말이 맞습니까?’
이 질문에 답하기가 참 어려워요. ‘틀렸어’라고 하면 남의 종교를 비방하는 게 됩니다. 비방하지 않으려고 ‘그 말도 일리가 있다’라고 하면 진리에 어긋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들의 말이 맞다면 강가 강에 사는 물고기가 가장 먼저 하늘나라에 가겠구나.’ (대중 웃음)
‘그들의 말이 맞다면’은 상대를 배척하지 않고 수용한 거예요. 사람은 목욕을 잠시 하고 말지만 물고기는 거기서 태어나고 평생 살다가 죽으니, 바라문들이 말하는 이치대로라면 물고기가 하늘나라에 가장 먼저 가겠죠. 이 말을 듣고 ‘그래서 하늘나라에 태어난다는 거예요? 안 태어난다는 거예요?’ 이렇게 묻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이게 깨우침이에요. 내가 의문을 가졌는데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내가 깨달아버리는 거예요. 부처님이 간다고 하니까 간다, 못간다고 하니까 못 간다고 하는 게 아닙니다. 부처님과 대화를 나누다가 내가 알아버린 거예요. 그러면 앞으로 다른 사람들이 하늘나라에 태어나는지 여부를 두고 아무리 논쟁을 벌여도 나는 상관이 없어요. 이걸 깨달아버렸으니까요. 그래서 가미니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알았습니다, 부처님. 알았습니다, 부처님. 잘 알았습니다, 부처님.’
여러분도 깨달았을 때는 이렇게 대답해야 해요. 이렇게 말하면 ‘작은 것이라도 깨쳤습니다’라는 뜻인데, 대답만 듣고 그냥 앉아버리면 ‘내 생각하고 다르네요’라는 뜻이에요. (모두 웃음)
비슷한 이야기를 하나 더 하겠습니다. 가미니가 또 질문했어요. ‘저 바라문들이 말하기를 사람이 아무리 죄를 많이 지어도 죽을 때 바라문들이 하늘나라에 태어나라고 축원해주면 하늘나라에 태어나고, 사람이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죽을 때 바라문들의 축원을 받지 못하면 지옥에 간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저라면 ‘아까 이야기했잖아!’ 하면서 죽비로 머리통을 후려쳤을 겁니다. (대중 웃음) 그래서 경전을 읽을 때마다 부처님과 예수님이 존경스럽습니다.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해도 일일이 대답해주시잖아요. 부처님은 가미니를 연못가로 데려가서 돌멩이를 연못에 집어던지셨어요.
‘가미니야, 돌멩이가 어떻게 되었느냐?’
‘물 밑으로 가라앉았습니다.’
‘왜 가라앉았느냐?’
‘돌멩이가 물보다 무거우니까요.’
‘그렇다면 이 둑에 바라문들이 둘러서서 돌멩이가 물 위로 뜨기를 기도하면 돌이 떠오르겠느냐?’
‘안 뜹니다.’
‘왜 안 뜨느냐?’
‘무거운 게 밑으로 가라앉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너의 말과 같다. 사람이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고, 남의 물건을 빼앗고, 성추행을 하고, 거짓말로 남을 괴롭히고, 술 마시고 취해서 남을 괴롭히면 그 지은 업은 검고 무거운 것이어서 저절로 지옥으로 가느니라.’
그리고 부처님은 연못에 기름병을 던졌습니다. 병이 가라앉자 긴 장대로 병을 깼어요. 그러자 병 속에 들었던 기름이 물 위로 떠올랐습니다.
‘가미니야, 기름이 어떻게 되었느냐?’
‘물 위에 떴습니다.’ ‘왜 물 위에 떴느냐?’
‘기름이 물보다 가벼우니까요.’
‘그렇다면 이 둑에 브라만들이 둘러서서 기름이 가라앉기를 기도하면 기름이 가라앉겠느냐?’
‘안 가라앉습니다.’
‘왜 그렇겠느냐?’
‘가벼운 게 위로 뜨는 것은 자연의 이치니까요.’
‘그렇다, 가미니여. 죽어가는 생명을 살려주고, 가난한 자를 위해서 베풀고, 괴로워하는 자를 위로하고, 진실을 말하고, 취하지 않아 맑은 정신을 가지면 그 지은 업은 희고 가벼운 것이어서 저절로 하늘나라로 가느니라.’
‘알았습니다, 부처님. 알았습니다, 부처님. 잘 알았습니다, 부처님.’
질문자는 이 이야기의 뜻을 알겠으면 절에 다니시고 ‘못된 짓 실컷 하고 죄 사함 받는 게 훨씬 편하고 좋다’ 그러면 교회 가시되, 불교대학은 이왕 입학했으니 마치고 가세요. (대중 웃음)
그런데 이건 기독교와 불교의 차이가 아닙니다. 부처님은 진리를 말씀하셨고, 부처님 이전의 인도 사람들은 마음대로 살다가 죽어도 하늘나라는 가고 싶다는 바람을 해결하기 위해서 이런 논리를 만든 거예요.
예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셨을까요? 마태복음 25장 31절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경 원문 그대로의 인용은 아니고, 쉽게 풀어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최후의 심판 날, 주께서 오셔서 산 자와 죽은 자를 다 일으켜 세워 양떼와 염소떼를 나누듯 좌우로 나눈 뒤 한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르셨어요.
‘천국이 너희의 것이니라.’
‘주여, 저희가 어떻게 천국에 갑니까?’
‘너희들은 내가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고, 헐벗었을 때 옷을 주고, 나그네 됐을 때 영접했고, 감옥에 갇혔을 때 면회를 왔느니라.’
‘주여, 저희가 언제 그런 일을 했습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자 하나에게 행한 것이 곧 나에게 행한 것이니라.’
그리고 반대편의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이르셨습니다.
‘너희들은 영원히 지옥의 불 속에 들어가리라.’
‘주여, 저희가 왜 지옥에 떨어져야 합니까?’
‘너희들은 내가 굶주릴 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나그네 됐을 때 영접하지 않았고, 내가 감옥에 갇혔을 때 면회 오지 않았느니라.’
‘주여, 언제 주께서 그러신 적이 있고 저희가 언제 주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는 것이 곧 나에게 하지 않는 것이니라.’
못된 짓 하면서 교회만 열심히 다닌다고 천국 가는 게 아니에요. 천국 가는 기준은 ‘네가 어떻게 행했느냐’입니다. 배고픈 자에게 먹을 걸 주었는가. 헐벗은 자에게 입을 것을 주었는가.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을 주었는가. 나그네를 잘 보호해주었는가. 나그네는 요즘 말로 하면 난민에 해당하겠지요. 억울하게 감옥에 간 사람을 보살폈는가. 부처님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가르침이 다른 게 아니에요. 성인의 가르침은 그런 용어를 쓰든 안 쓰든 다 인연과보를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교든 힌두교든 성인이 출현하기 이전의 가르침은 그저 못된 짓 하고도 죄 안 받고 쉽게 천당 갈 수 있다고 하고, 복은 하나도 안 지어놓고 자기에게 복을 달라고 하면 복을 준다고 가르쳤어요. 또 성인이 출현하기 이전은 인과응보의 사고방식이었지만, 성인이 출현한 이후의 가르침은 인연과보예요. 이게 다른 점입니다.
인과응보는 일본에 지진이 나서 많은 사람이 죽었을 때 ‘일제시대 때 못된 짓 하더니 천벌받았다’, ‘하나님 안 믿어서 벌 받았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장애아를 낳았을 때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런 애를 낳았나’ 라고 하는 것이 인과응보적 사고방식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장애인으로 태어난 것은 아무런 죄의 과보가 아니며, 장애인으로 태어났어도 그는 행복할 권리가 있고 인간으로서 존엄한 대우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전생에 죄를 많이 지어 이러저러하게 태어난 것이 아니며, 피부색이나 성별이나 장애 유무 같은 것으로 인간을 차별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불교입니다. 여자든 남자든, 한국 사람이든 일본 사람이든, 기독교인이든 불교인이든,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모든 사람은 다 부처가 될 성품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표현을 빌자면,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딸입니다.
사제들만 하나님의 아들이고 유대인만 구원을 받는 게 아니라 이방인도 구원받을 수 있어요. 전통 유대교에서는 구원의 기준이 유대인인지 여부였습니다. 인종적인 문제를 기준 삼았어요. 유대인이면 다 구원받고 유대인 아닌 이방인은 구원을 못 받는다고 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방인에게도 구원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 라고 하자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에 답하면서 ‘길에 강도를 당한 사람이 쓰러져 있는데 아무도 돌보지 않았다. 사제와 레위인이 그를 보고도 그냥 지나갔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이 지나가다가 그를 불쌍히 여겨서 보살폈다. 누가 쓰러져 있는 그에게 이웃인가?’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사마리아인이라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는 ‘너도 가서 그렇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게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입니다.
사마리아인은 당시 유대에서 멸시당하는 이방인이었어요. ‘네가 유대인이냐, 아니냐’가 구원의 기준이 아니라 ‘여기 병든 사람에게 네가 어떻게 행했느냐’가 기준이라는 이야기예요. 아까 말씀드린 최후의 심판 때와 같은 기준입니다. 이런 점을 똑똑히 알고 교회를 다니십시오. (대중 웃음)
예수님의 가르침과 관계없는 걸 구분하세요. 기도하면 죄가 사해진다고 믿는 건 좋지만, 그건 예수님의 참 가르침이 아니라 예전 사고방식입니다. 인연과보는 콩을 심어야 콩 싹이 트고 팥을 심으면 팥 싹이 튼다는 원리입니다. 복을 지어야 복을 받고, 저축을 해야 목돈을 타요. 빚을 냈으면 빚을 갚아야 하고, 갚기 싫으면 다음부터는 빚 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니 내가 어려움에 처한 것은 과거에 진 빚을 갚는 과정이거나 내가 지금 저축하는 과정, 이 둘 중 하나입니다. 그러니 어려움에 처한다고 괴로워할 이유가 하나도 없어요. 지은 인연의 과보를 기꺼이 받든지, 아니면 기꺼이 복을 지으면 됩니다. 이런저런 일은 생기지만 괴롭지는 않아야 해요.”
스님의 명쾌한 답변에 모두들 크게 웃으며 박수를 보냈습니다. 스님의 입에서 성경 구절이 막힘 없이 줄줄 나오자 곳곳에서 감탄하는 표정을 자아내었습니다. 부처님이든 예수님이든 성인들의 참된 가르침은 서로 통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고, 또 무엇이 참된 가르침인지도 구분할 수 있게 되어 가슴이 시원해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어진 질문에서는 정토회를 만나서 삶이 많이 행복해졌는데 어떻게 하면 아내에게도 정토회를 만날 수 있게 해줄 수 있을지에 대한 물음이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궁금해하는 내용일 것 같아 함께 소개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정토회를 소개할 때 잘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싶습니다. 저는 불법을 공부해서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좋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전하기가 어렵습니다. 특히 아내에게 전하는 것이 더 어려운데, 조심할 게 무엇이며 잘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아내나 남편, 가족에게 불법을 전하는 것은 가능하면 말로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말과 행위가 맞지 않으면 가까이 있는 사람의 신뢰를 얻기 힘들어요.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은 행동을 못 보고 말만 보지만, 가까이 있는 사람은 행동을 보기 때문에 말을 하면 시비거리가 됩니다. ‘남을 이해해라’ 하면 가까이 있는 사람은 대번에 ‘너는 왜 이해 안 하냐?’라고 하고, ‘사랑받으려 하지 말고 사랑해라’라고 하면 ‘너는 왜 나한테 안 하는데?’라고 받아쳐요. 그래서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말로 전하려 하면 전달이 안 돼요.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는 첫째, 말로 전하려 하지 마세요. 둘째, 자기가 아는 만큼 몸으로 보여주다가 상대가 느껴서 말을 꺼내면 요령 있게 대화를 풀어가세요. 좀 변했다 싶으면 상대가 먼저 이야기를 꺼냅니다. ‘여보, 당신 요즘 좀 변한 것 같다. 요즘은 화를 전보다 좀 덜 내네.’ ‘그래? 요즘 스님 유튜브 법문을 많이 봤더니 좀 변하긴 변했나 보다. 특별히 잘 한 것 같진 않은데, 변했다면 그건 스님 유튜브 법문 본 덕이다’ 이러면 ‘나도 좀 볼까?’ 이렇게 됩니다. ‘깨달음의 장 다녀왔더니 그렇다’, ‘요즘 불교대학 다니면서 느낀 바가 좀 많다’ 하면 ‘나도 다녀볼까?’라는 반응이 나오는 거예요. 그런 말이 나오려면 먼저 자기가 변한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은 행동을 먼저 보기 때문에 말부터 앞세우면 시비거리가 돼요.”
아내나 남편, 가족들에게는 어떻게 전법을 해야 하는지 깊이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사람의 심리를 꿰뚫고 얘기하실 수 있을까 하며 모두들 스님에게 감탄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이렇게 26명의 질문에 대해 모두 답변을 마치니 벌써 3시간 30분이 훌쩍 지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은 21번 질문부터 26번 질문까지 이어진, 기독교 신자이지만 정토회에 나와도 되는지, 정토회는 어떤 종파를 계승하고 있는지, 기존 사찰과 어떻게 다른지 등에 대한 일련의 내용들을 헤아리면서 정토회가 추구하는 정체성과 포용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야기하면서 강연을 마쳤습니다.
“여러분들은 기본 관점을 이렇게 가져야 해요. 제가 항상 여섯 가지 공부를 하라고 하죠? 첫째, 우주의 기원, 즉 물질의 기원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두 번째, 생명의 기원, 생명의 본질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세 번째, 인간 존재의 기원, 인간 종의 기원, 인간의 진화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네 번째, 인류 문명의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다섯 번째, 우리 민족의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여섯 번째, 정신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나에 대해서 알아야 하는데 그게 정신에 대해서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와 민족과 인류를, 그리고 인간과 생명을, 그리고 우주를 알아야 해요.
그런데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생명이라는 건 눈에 보이지도 않고, 생명이라는 큰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라는 것이 보이지도 않고, 인간이라고 하는 큰 관점에서 보면 한국 사람이라는 게 별로 보이지도 않고, 한국 사람이라는 큰 관점에서 보면 나라는 인간은 별로 보이지도 않아요. 이렇게 좀 큰 관점을 가지십시오. 그래야 사고가 편협해지지 않습니다. 교회 가면 교회가 옳고, 절에 가면 절이 옳고, 절 안에서도 이 종파에 가면 이게 옳고, 저 종파에 가면 저게 옳고, 같은 종파 안에서도 무슨 절 어느 스님이 최고이고, 이런 데 빠지면 안 됩니다.
정토회는 불교적 정통을 계승하지만 불교를 고집하지 않고, 대승불교를 계승하지만 대승불교를 고집하지 않고, 선(禪)을 계승하지만 선을 고집하지 않고, 조계종을 계승하지만 조계종을 고집하지 않고, 종교적 입장에 서 있지만 종교만을 고집하지 않고 과학까지도 아울러서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단체입니다. 여기서는 승속 개념도 없고 오직 수행자로, 즉 모두 부처 되겠다는 마음으로 공부하는 단체예요. 그래서 앞에 ‘수행공동체’라는 말을 붙였습니다. ‘대한불교 조계종 정토회’ ‘대승불교 정토회’ ‘선종 정토회’ 이런 말을 안 쓰고 ‘수행공동체 정토회’라고 해요. 수행자들의 모임이라는 겁니다. 수행자들이 포교도 하고, 수행자들이 구호활동도 하고, 수행자들이 농사도 짓고, 수행자들이 통일운동도 하고, 수행자들이 평화운동도 하는 거예요. 우리는 평화운동가도 아니고 독립운동가도 아니고 농사꾼도 아니에요. 수행자라는 것이 바탕에 깔리고 나머지는 역할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기독교인인지 불교인인지도 여기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불교적 전통에 서서 하기 때문에 굳이 따져물으면 불교라고 말할 뿐입니다. 그러니 어떤 신앙을 가져도 괜찮습니다. 개인이 하는 것은 자유예요. 그러나 정토회라는 이름으로 함께 무엇을 할 때 수행적 관점을 버리는 것은 안 됩니다. 아까 이것저것 섞어서 비벼먹고 싶다는 질문이 있었죠? 개인이 그렇게 하는 건 괜찮지만 정토회 수행을 그렇게 섞어찌개처럼 하면 안 돼요. 예컨대 개인이 복을 비는 건 자유예요. 혼자 법당에 와서 복 비는 것은 아무리 빌어도 정토회에서 간섭하지 않고, 사이비라는 소리도 안 합니다. 그건 인간의 오래된 욕구이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정토회가 집단적으로 모여서 ‘정토회에서 입시 기도하면 서울대학 간다’ 이런 건 하지 않습니다. 정토회는 수행단체이기 때문에, 정토회에서 공식적으로 하는 것은 수행에 어긋나지 않는 것만 합니다. 그러나 정토회에 소속된 개인들은 기본 계율을 어기지 않는 한에서는 모든 걸 자유롭게 해도 됩니다. 그런데 자기가 ‘어느 스님은 참선을 최고 수행이라 하던데 나도 해 봐야지’ 하는 것은 좋은데, 정토회 회원들에게 ‘우리, 참선하자’ 이러면 안 돼요. ‘정토회는 다양성을 인정한다면서 왜 안 됩니까?’ 이런 소리 하면 안 돼요. 다양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배타하지 않고 포용한다는 뜻이에요. 정토회는 정토회의 목적이 정해져 있습니다. 개인은 자유롭게 해도 되지만, 정토회라는 이름으로 함께할 때는 딱 원칙이 정해져 있어요.
이제 자기 정체성이 무엇이고 포용성이 무엇인지 이해하셨어요? 종교가 다르다고 기죽을 필요도 없고, 잘난 척할 필요도 없습니다. 여기 와서 ‘그럼 나는 절 안 해도 돼요?’ 이렇게 물을 필요 없어요. 수행자에게 해도 되고 말고가 어디 있어요? 그냥 남들이 하면 따라하면 됩니다. 그거 한다고 하나님이 벌주시진 않아요. 문화를 이해한다는 관점에서 보시면 좋겠습니다.”
스님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시야가 확 넓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떤 문화도 포용하되 수행적 관점은 굳건히 유지해가는 수행자가 되어야겠다는 다짐이 절로 일어났습니다.
3시간 30분 동안 잠시도 쉬지 않고 열정적인 강연을 해준 스님에게 정토불교대학생들은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대수련장을 나온 스님은 곧이어 명상원으로 이동했습니다. 내년 2월에 행자대학원 3년 과정을 졸업하게 되는 행자님이 찾아와 스님께 졸업 인사를 했습니다. 스님은 1월과 2월에 인도에 주로 계시기 때문에 일찍 찾아와 인사를 한 것입니다.
또 행자님은 지난 일주일 동안 스님과 동행하며 스님의 일상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배우는 시간을 가졌는데 이에 대한 소감을 이야기하면서 개인적인 고민을 묻고 답하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다음 이야기에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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