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5.12.2 성남 통일의병 강연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성남시 수정청소년수련관에서 성남 시민들을 위해 “통일이야기”를 주제로 즉문즉설 강연을 했습니다. 

 

오늘도 스님은 여느 때와 같이 새벽 예불과 정진으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 새벽 예불

 

정진을 마치고 나서는 하루 종일 집무실에 머물며 새책 원고 집필 작업과 각종 보고서를 체크하며 업무를 보았습니다. 며칠 전부터 잇몸에 통증이 계속 있었지만 강연 일정 때문에 치료를 받지 못했는데 오늘은 치과에서 집중적인 치료를 받고 이비인후과에도 들러 목 치료도 받았습니다. 스님은 “치과 치료를 받을 때는 수행자 품위를 유지하기가 어렵다”면서 웃으셨습니다. 

 

비갠 오후의 맑은 기운이 느껴지는 수정청소년수련관은
 산자락에 둘러 싸인 아늑한 곳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 수정청소년수련관

 

일찌감치 모인 50여 명의 봉사자들은 오랫만에 만난 지인들과 반갑게 인사를 하기도 하며 시민들을 맞을 준비로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잠시 봉사자 모두가 모여 주의 사항을 듣습니다. "세상에는 예비의병과 통일의병만이 있으니 의병이라는 호칭으로 통일하시면 됩니다.  지금 이 순간이 통일의 시작이라는 마음으로 방긋 웃으며 임하시기 바랍니다."

 

이미 어두워진 오후 6시가 되자 시민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또렷한 눈망울의 작은 여자 아이 손을 잡고 어쩐지 서두르는 느낌의 여자분이 입구에 들어섰습니다. "질문할 수 있나요?" 하고 묻습니다. 급하게 꼭 묻고 싶은  질문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통일 관련 영상이 나오고 있는 강연장에는 딸아이 둘과 함께 온 남자분이 봉사자에게 사진촬영을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여쭤보니 본인은 육남매의 아버지이고, 오늘은 큰딸과 작은딸을 데리고 참석했고, 스님의 팬이라며 기분좋아했습니다. 또 아내와 함께 강연장을 찾은 한 시민은 홍보가 잘 안 된 것 같다며 시민들이 잘 몰라서 많이 참석하지 못한 상황을 아쉬워 하기도 했습니다. 

 


 

스님은 강연 시간 보다 1시간 일찍 도착해 6시부터 은수미 의원과 차담을 나누었습니다. 은 의원은 우리나라에서 노동문제와 관련해 많은 활동을 해온 노동전문가인데, 최근 고민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 스님의 조언을 구했고, 스님은 편안하게 스님의 생각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 은수미 국회의원(오른쪽)

 

이어서 6시 30분부터는 성남시 지역 인사들과 사전 간담회를 가졌습니다. 성남시의회 의원, 성남외국인주민복지센터장, 민주시민교육추진위원회 대표, 청소년지도위원장, 기업인 등 총 13명이 함께 자리했습니다. 

 


▲ 성남시 지역인사 사전 간담회

 

스님은 왜 지금 통일의병 운동을 하고자 하는지 개괄적인 설명을 한 후 통일 문제와 관련해 궁금한 점에 대해 질문을 받았습니다. 40여 분간 이어진 대화 도중 한 분은 통일정책이 일관성 있게 나아가야 하지 않겠느냐며 스님의 의견을 물었습니다. 이에 대해 스님은 어떻게 하면 통일정책이 정치적 논쟁에 이용당하지 않고 일관성 있게 추진될 수 있는지 그동안의 남북 관계를 예로 들어 설명해 주었습니다. 

 


 

“정부, 전문가들, 스님, 사회단체에서 통일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각자 조금씩은 다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 문제도 함께 공유해서 일관성 있는 방향을 형성한다면 통일로 나아가는데 더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통일을 보는 관점은 이념적 지향에 따라 다르고 역사적 상황에 따라서도 다릅니다. 예컨대 60~70년대의 통일운동세력은 북쪽에 대해 비교적 긍정적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중심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북쪽이 남쪽보다 잘 살았고 경제 외 여러 면에서도 긍정적 면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70~80년대로 넘어오면서 북은 경제적으로 쇠락하고 남쪽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어서 통일에 대한 시각도 달라졌어요. 남북 중 어느 누구도 상대를 일방적으로 제압할 만한 상황이 안 되었기에 남북이 대등한 입장으로 만나서 통일문제를 다루자는 식이 되었습니다. 70년대 이전까지는 통일문제를 북쪽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기에 남쪽에서도 동조한 성향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지금도 남아 있는데, 그때는 그게 옳았을지 몰라도 지금의 정세에서는 맞지 않다 보니 지금도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종북으로 몰리게 되었습니다. 30년 전에는 합당했던 관점도 지금 상황에서는 합리적이지 못한 거예요.

 


 

김대중 대통령은 남쪽이 우위에 서긴 했어도 통일문제에서는 남북이 서로 대등하게 접근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래서 북한은 수세에 몰리면서도 체면을 세웠고, 남쪽은 전에 수세로 몰렸다가 거꾸로 공세적으로 나오면서 균형을 잡았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북쪽에서 주장하는 연방제 통일안과 남쪽에서 주장한 민족공동체 통일 방안의 합의점을 찾은 것이지요. 전자는 연방제이고 후자는 국가연합인데, 낮은 단계의 연방제는 국가연합과 내용이 비슷하다고 해서 양쪽이 통일의 1단계 방안에 대해서 합의점을 잡았어요. 김대중 대통령이 마치 우리의 통일정책을 양보한 것처럼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은 오히려 북한이 약간 양보를 해서 최소 합의점을 잡은 겁니다. 북한이 애국적이라 그렇게 잡은 게 아니라 북한이 약간 열세에 처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어요. 남쪽의 통일방안은 각자의 체제를 유지하되 협력하자, 즉 한 개의 국가와 두 개의 독립된 정부를 가지고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북쪽이 거기에 동의했다는 것은 북쪽이 세력이 약화되면서 자기 체제를 지켜야 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는 뜻으로 볼 수 있어요.

 

거기서 다시 15년이 지난 지금은 국제적 위상을 보나 국력을 보나 남북이 공히 동등하게 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워요. 지금에 와서 가장 현실적인 통일론은 남쪽이 중심이 되어 북쪽을 포용하는 것입니다. 입장이 이렇다 보니 지금은 보수세력이 더 통일을 주장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보수세력의 입장은 북쪽을 포용하는 게 아니라 북쪽을 붕괴시키고 흡수통일을 하겠다는 것이어서, 전쟁을 유발하거나 실현불가능한 통일론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옛날처럼 남북이 동등하게 결합하는 통일방안을 적용하려니 그때와는 지금 상황이 많이 달라져서 맞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또다시 지금의 현실에 바탕을 두고 통일문제를 풀 수밖에 없습니다. 보수는 남쪽의 진보와 북쪽이 대화하면 남북대화가 아닌 좌파끼리의 대화라고 보는 겁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 관점이 그렇습니다. 그러니 남한의 보수와 북한이 대화를 해야 진정한 남북대화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는 이상은 남한 안의 좌우 대립이 끝나지 않아요. 

 

그러므로 남한에서 진보가 정권을 잡아서 북한과 대화하려면 남한의 보수와 합의한 만큼만 남북 대화를 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남한에 분열이 일어납니다. 반대로 남한의 보수가 정권을 잡으면 북한과 대화를 해야 하고요. 진보는 북한과의 대화를 반대하지 않으니까 그렇게 하면 저절로 남한의 여론이 통합됩니다. 그런데 과거 김대중 정부는 남북대화의 물꼬는 텄지만 남쪽의 보수와 합의를 이루려는 노력이 좀 부족했어요. 그것이 결국 남한 안에서 남남갈등으로 이어져 지금 같은 상황이 되었습니다. 당시 남한의 야권이나 보수세력과 더 긴밀한 합의를 했어야 하는데 남북관계를 푸는 데만 너무 집중한 거 아니냐는 거예요. 그리고 보수는 정권이 바뀌었을 때 진보세력이 풀어놓은 남북관계와 그 정책을 계승해줘야 하는데 계승은커녕 뒤엎어버리니까 남북관계가 파탄났어요. 이런 것들을 서로 대화하면서 국민합의를 해가야 해요. 

 


 

남한의 보수세력을 제외시켜버린 상태에서는 남북대화를 지속할 수 없습니다. 국민 여론이 반반이긴 하지만 그래도 보수가 조금 더 많고, 미국이라는 배후가 있기 때문에 남한의 진보세력만 가지고는 현실적으로 남북통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현실을 인식해야 해요. 통일을 하려면 남한의 보수세력이 어느 정도 동의하는 통일론이어야 합니다. 극보수까지는 아니더라도 중도보수까지는 동의를 얻어야 해요. 그런 합리적인 안들을 만들어서 실제로 어떻게 대화를 해나갈지 고민해야 합니다. 남북대화만 할 게 아니라 남남대화도 같이 해나가야 해요. 

 

과거에 통일을 주장할 때는 이런 문제가 없었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그런데도 계속 과거의 이념적 지향으로만 접근하면 아무리 통일을 주장해도 통일의 가능성은 없어요. 남한 안에서 70% 정도까지의 지지를 얻지 못하면 통일이 실제로 추진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북한에 더 비중을 두는 통일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실 남한 안에서는 세력이 약해져서 소수가 되었습니다. 통일을 하려면 그런 주장도 다 허용해줘야 하는데, 지금은 오히려 그걸 다 척결하는 쪽으로 가고 있어요. 통일 정책도 합의 통일을 하자는 게 아니라 힘으로 밀어붙여 통일하겠다는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65년 전 북한이 저질렀던 과오를 지금 남한이 저지를 위험이 있어요. 그때는 힘이 있는 북한 쪽에서 힘으로 밀어붙여서 통일을 하려 했는데, 지금은 거꾸로 남한이 절대적인 힘의 우위에 섰으니까 또 힘으로 밀어붙여서 문제를 해결하려 합니다. 이건 굉장히 위험한 시각입니다. 북한도 그때 한 달 만에 다 밀어붙였어요. 그런데 미국의 개입이라는 변수를 미처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북한을 힘으로 밀어붙이면 중국이 즉각 개입하리라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대통령님이 중국 가서 이야기해 보니 개입 안 할 것 같다고 하지만 턱도 없는 소리예요. 중국의 정책 자체가 그렇게 안 되어 있어요. 휴전선을 넘어오면 이미 침공이라고 보고, 압록강으로부터 200km 안으로 들어오면 중국에 대한 침공이라고 봐서 즉각 군사적으로 개입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중국과 싸우면 이기기가 어렵고, 설령 이긴다 하더라도 북한의 화력으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입어요. 전후복구만 해서 되는 게 아니에요. 중국 경제가 바로 우리 턱밑까지 추격해 들어왔는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중공업 시설이 파괴되면 그걸 복구하는 사이 중국에 뒤처집니다. 무력 통일도 하나의 방식이긴 하지만 위험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굳이 그런 위험을 무릅쓸 필요는 없습니다. 

 


 

평화적으로 통일하려면 합의를 해야 하고, 합의를 하려면 상대가 아무리 약해도 상대의 요구를 어느 정도는 수용해줘야 합니다. 그걸 포용이라고 하잖아요. 김대중 대통령의 좋은 점은 그런 포용정책을 썼다는 겁니다. 북한의 자존심이 상하지 않도록 어느 정도 포용해주면서 남북 관계를 풀어나갔어요. 다만 남북관계를 풀 때 남한의 당시 야당과 충분히 대화를 나누고 생각을 공유했어야 하는데 그걸 좀 못했기에 야당 측에서 ‘이것은 통일정책이 아니라 북한과의 야합이다’라고 몰아버린 겁니다. 처음에는 다들 통일의 발목을 잡는 턱도 없는 소리라고 했어요.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희한하게도 ‘북한에게 끌려다닌다’는 주장이 국민들에게 먹혀들어갔습니다. 

 

인도적 지원 문제도 그렇습니다. 인도적 지원은 사람들이 굶어죽기 때문에 식량을 지원했으니, 굶어죽는 사태가 막아지는 데 도움이 되었느냐는 것만 가지고 평가를 해야 해요. 그런데 ‘굶어죽는 사람들을 위해서 지원했는데 왜 저놈들은 미사일 만들고 핵 개발하느냐’ 이렇게 몰고 가요. 그건 사실 전혀 논리가 맞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걸 방어해내지 못했어요. ‘저놈들은 지원 받으면서도 큰소리치는데 우리는 도와주면서 굽실거린다. 또 우리가 이렇게 많이 지원해줬는데 저놈들은 핵무장한다’ 이런 선전이 우리 국민들에게 먹혀들어서 북한에 대한 저항감이 커진 거예요.

 

그 당시 중고등학교를 다녔던 지금의 25세 이하 젊은이들은 반북적 성향이 굉장히 강합니다. 그 청년들이 중고등학교 다닐 때 북한이 쳐들어온다는 둥 하며 언론에서 이야기하고, 정권을 3대째 세습하는 모습을 보고 해서 북한에 대한 나쁜 이미지가 머리에 각인되어서 성인이 된 뒤까지 이어지는 거예요. 이걸 두고 종편이 선전을 잘못했다고 비난해본들 시정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과제는 ‘이걸 어떻게 극복할 거냐’인데 자꾸 진영 논리로만 접근하면 해결점이 없습니다. 말로 주장한다고 통일이 되는 건 아닙니다. 

 

어떻게 국민의 다수지지, 즉 50% 이상, 적어도 60%의 지지를 얻어서 통일을 강력하게 추진할 정부를 구성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진보세력끼리 아무리 모여 봐야 50%를 못 넘어요. 그 정책으로는 통일을 못합니다. 그런 면에서 조금 합리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과거 김대중 정부 정책에서 정당한 부분은 우리가 계승하고, 국민 통합의 문제에 소홀했던 것은 보완을 해야죠. 독일은 그랬습니다. 사회당 정부가 동독과의 관계를 풀어놓은 상태에서 보수정권이 들어섰는데, 국내 정책은 다 보수로 바꿨지만 대동독 정책은 진보정권이 해놓은 것을 그대로 인수했습니다. 그러니까 통일이 된 거예요. 보수정권 때 통일이 이루어졌고, 지원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우리는 ‘남북 좌파들이 야합했다’ 해서 모든 합의를 다 무시해버렸기 때문에 남북 불신이 극도로 증폭된 것은 물론 남남갈등도 극심해져 버렸습니다.

 


 

이게 우리의 현실이에요. 누구의 잘잘못을 가리는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게 대한민국의 현실인데, 이런 현실 속에서 어떻게 통일로 나아갈 것인지를 해결과제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도 다 대한민국 국민이고 투표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데서 새롭게 좀 접근해보면 좋겠습니다. 한국 안의 정치문제에 통일문제를 자꾸 개입시키면 또 정치싸움밖에 안 돼요. 통일정책은 한국 내 정치적 투쟁을 넘어서는 관점에서 수립해서 앞으로 정권이 바뀌어도 계승해갈 수 있는 정책이어야 합니다. 그러니 정부가 추진하는 통일정책은 반드시 여야 합의를 거치도록 하면 정권이 바뀌어도 그 정책이 안 바뀝니다. 한쪽에서만 추진하면 정권이 바뀌었을 때 바로 뒤집어버리거든요.”

 

스님의 일목요연한 설명을 들으며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이 가져온 성과와 한계, 이를 계승하여 앞으로는 어떻게 통일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모두들 스님의 혜안에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의 뜻을 내비쳤습니다. 

 

이렇게 사전 간담회를 마치고 다함께 기념 사진을 찍은 후 강연장으로 함께 들어갔습니다. 

 


▲ 성남시 지역 인사 분들과 함께

 

빈자리가 곳곳에 보이는 가운데 스님이 무대 위로 걸어나왔습니다. 환한 웃음으로 인사를 한 후 “저녁 못 드신 분은 집에 가서 드시라”고 스님이 특유의 위트를 던지자 청중들의 얼굴도 순간 환해졌습니다. 

 


 

이어서 오늘 강연의 취지와 성격에 대해 간단히 언급한 후 곧바로 질문을 받았습니다. 

 

“이번 강연은 통일의병이 주최한 것이니 개인 질문은 적게 다루고 공동체와  민족,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스님의 이야기가 끝나자 세 명이 손을 들고 질문을 청했습니다. 첫번째 질문자는 가정에 무관심한 남편과 사는 것이 행복하지가 않아 이혼하고 싶은데, 남편은 아이를 절대 줄 수가 없다고 해서 고민이라고 했고, 두번째 질문자는  본인이 납북자 가족인데 납북자 가족들에 대한 연구 활동을 해보고 싶지만 차일 피일 미루고 있다며 스님의 조언을 구했고, 세 번째 질문자는 군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안보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요즘은 통일정책이 예전보다 통일에서 멀어지도록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스님께서 보시는 통일의 전망 그리고 북한과의 관계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또 국민들의 안보 수준을 높일 수 있는 방법도 함께 물었습니다. 

 

오늘 강연은 비가 와서 그런지 조용하고 가라앉은 듯한 분위기였고 시민들도 한껏 진중하고 집중된 모습으로 강연을 들었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두 번째 질문인 납북자 가족 문제에 대한 질문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합니다. 스님은 질문자와의 문답 속에서 분단이 한 개인의 내면과 가족 관계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자세히 알려주었습니다. 분단은 사회적인 문제일 뿐만 아니라 개인의 내면 깊숙이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지금 심리학 박사과정에 있습니다. 그런데 제 문제를 고민하다가 가족 이야기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됐어요. 저희는 납북자가족으로 아버지가 외아들이셨어요. 저는 이혼을 했는데 ‘가족이 다 겪은 외상으로 인해서 지금의 내가 고통 받고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까지 올라가면서 이 주제를 연구해보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납북자에 대한 관심을 사실 많은 분들이 갖고 있진 않아요. 또 이런 연구는 돈도 명예도 되지 않으니 다른 분들이 나서서 하실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저는 그런 일을 겪은 가족의 일원이기도 하고, 제가 성인이 되었으니 아버지나 돌아가신 할머니의 마음을 좀 헤아려보고 싶은 마음에서 이 주제를 연구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시간강사로 일하며 생계를 해결하느라 힘들고 제 그릇이 작다 보니 진척을 잘 못했습니다. 스님의 통일 이야기를 듣다 보면 납북자에 대한 관심이 더 이상 뒤로 미루어져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통일과 관련된 많은 혜안을 가진 스님께서는 납북자 가족에 대한 생각이 어떠신지요? 스님의 말씀을 듣고 제 연구에 대한 자세와 태도와 생각을 정비하는 기회를 갖고 싶어서 여쭙습니다.”

 

“어떻게 납북이 되셨어요?”

 

“아버지가 태어나기 전에 할아버지가 납북되셔서 할머니께서 혼자 아버지를 낳아 키우셨어요. 할머니가 13형제 중 장녀였기에 굉장히 힘들게 살다 18살에 시집갔는데 19살에 남편이 납북되는 일을 당하신 거예요. 아들을 혼자 낳아 키우느라 너무 힘들게 키우셨고, 그런 어려움들 때문에 저희 부모님이 갈등을 겪고, 그러다보니 저도 자라서 부모님을 미워하고 남편과도 이혼하게 된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가 6.25 때 납북됐어요, 그 뒤에 납북됐어요?”

 

“6.25 때로 알고 있습니다.”

 


 

“전쟁 중에 그리 되셨다는 이야기네요. 그냥 납북이 된 거예요, 전쟁에 나갔다가 실종이 된 거예요?” 

 

“할아버지가 공무원이셨대요. 그런데 성정이 올곧아서 바른 말씀을 잘 하시다 보니 평소 마을에서 좀 못마땅해 하는 사람이 있었나 봐요. 점심 식사를 하다가 ‘잠깐 가자’는 호출을 받고 ‘죄 지은 것도 없으니 금방 다녀오겠다’ 하고 가셨는데 그 길로 이제...”

 

“납북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어요. 당시 남쪽 정부에서 고위직에 있거나, 과학자거나, 문학가거나, 예컨대 쓸 만한 사람이기 때문에 데려가서 자기들 정부에 요직으로 앉히거나 중요한 기술자로 쓰기 위해 납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스스로 가는 월북이 있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해방 전후의 그 당시에는 지성인 혹은 지식인 소리 듣는 사람은 거의 대부분이 사회주의자였습니다. 당시 사회분위기가 그랬어요. 게다가 당시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친일 관료들을 다시 데려다 썼습니다. 경찰을 만들려니 일제시대 때 경찰하던 사람들을 데려다 쓰고, 행정을 하려니 일제시대 때 관리 했던 사람을 데려다 쓰고, 재판을 하려니 일제시대 때 판사 하던 사람을 데려다 쓰고, 군대를 만들려니 일제시대에 일본군인 하다 온 사람을 쓰게 된 거예요. 이렇게 친일파를 전문가라고 해서 복권시켜 등용하니 친일청산을 제대로 못한 겁니다. 

 

그런데 미국이 볼 때는 어쨌든 국가 재건을 하려면 기술을 가진 사람이 필요하니까 일제 강점기 때 그런 기술을 갖고 일한 사람들을 재등용한 거예요. 미국이 한국의 독립과 자주성에 큰 관심이 있는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요즘도 일본 재무장과 관련해 우리한테 ‘위안부니 뭐니 지나간 이야기는 그리 중요하지 않으니 그만하라’ 이렇게 압력을 가하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그게 단순히 지나간 이야기가 아니라 뼈에 사무친 이야기잖아요. 이렇게 서로 견해가 다른 거예요. 미국은 기술적인 면만 생각해서 등용했고, 우리가 보면 친일파가 죄다 재등용된 거예요. 해방될 때 다 죽을 줄 알고 숨어있던 친일파가 이렇게 등용되고, 또 당시 독립운동 한 사람들이 대부분 사회주의자다 보니 반발이 심했습니다. 그러니 다시 권력을 잡은 사람들이 자기를 방어하기 위해서 반공으로 분위기를 몰아가서 독립운동 한 사람을 거꾸로 공산주의자로 몰아 척결했어요. 이게 한국사회를 지금까지도 괴롭히는 갈등의 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제가 물어보려고 하는 것은 할아버지가 그런 사람으로서 약간의 자발성을 갖고 북으로 갔는지, 즉 월북인지, 아니면 납치되다시피 끌려간 것인지 입니다. 거기에 따라서 또 평가가 다를 수 있어서 물어보는 겁니다.”

 

“후자였던 것 같고요. 그때 굉장히 젊으셨기 때문에...”

 

“북쪽에 간 뒤에는 어떻게 됐는지 연락이 일체 없고요?”

 

“수년 전 이산가족 찾기를 할 때 아버지께서 찾으려고 노력하셨어요. 처음에는 찾았다고 했는데, 행사 전날 동명이인이라고 통보받아 만남이 무산되고 굉장히 실망하셨어요. 그때까지는 할머니도 살아 계셨기에 마지막 기회라고 했는데 놓쳐서 굉장히 안타까워 하셨어요.”

 

“알았어요. 그러면 어쨌든 납북인 걸 확인했습니다. 6.25 전쟁 때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참 많아요. 노근리 학살 사건이나 4.3 사건 등이 그렇죠. 그걸 지금까지는 ‘4.3 제주 반란’이나 ‘여수 순천 반란’으로 부르면서 죄다 일방적으로 매도했어요. 그래서 오랜 세월을 모함과 오해 속에서 보내야 했지만 억울한 사람들이 수십 년을 꾸준히 노력한 끝에 결국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 들어와서 ‘제주도 양민 학살 사건’이라고 복권되었습니다. 광주 민주화 항쟁도 처음에는 폭동이라고 했지만 수십 년간 민주화 투쟁을 거친 끝에 ‘광주 민주화 항쟁’으로 복권되었고, 망월동 묘지도 국립묘지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밝혀진 사건들은 가족이든 동지든 목격자든 너무너무 억울하다는 누군가가 온갖 모함과 핍박을 겪고 오해를 사면서도 남아서 줄기차게 자료를 모으고 증언을 채취했기 때문에 밝혀진 거예요. 이보다 더 많은 사건들은 아직 역사 속에 묻혀 있습니다. 나서서 줄기차게 문제를 제기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노무현 대통령 때는 진실화해위원회라고 해서 이런 피해자들의 하소연을 받아주고 재조사하고 재판도 다시 하도록 도와주는 국가 부서를 만들기도 했는데, 이명박 대통령 때 와서 다 없애버렸죠. 

 


 

질문자가 심리학을 전공했다니 납북자 가족들의 심리에 대한 연구를 해보면 좋겠습니다.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밥벌이는 청소를 하든 심리학 강의를 하든 질문자의 책임이고 자유예요. 밥벌이를 해결한 나머지 시간에는 틈나는 대로 납북자 가족들을 만나 사연도 듣고 심리를 연구해보세요. 그러면 질문자의 연구는 단순히 납북자 가족에서 그치지 않고 이산가족의 문제가 되고, 분단의 문제가 됩니다. 

 

또 질문자는 이산가족이 됨으로 해서 한 가정 안에 이 분단이 미치는 영향을 직접 체험했어요. 할머니가 남편 없이 혼자 사느라 정신적으로 힘들게 살아서 아버지를 키웠어요. 할머니가 나빠서 그런 게 아니라 힘들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심리적으로 당연히 불안과 억압이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성장해 어머니와 결혼하니 자기의 그 업식이 아내를 상대로 폭발했어요. 어머니는 이런 남편을 만난 게 억울하니까 또 힘들어하며 질문자를 키웠고요. 그래서 질문자는 아버지에 대한 저항감이 생겼고, 남편을 만나 살다가 남편의 행동이나 어떤 부분이 계기가 되어 질문자가 아버지에게 가지고 있던 상처가 덧나서 자기도 모르게 저항하게 되고, 그래서 이혼까지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가정의 불화를 잘 살펴보세요. 분단이 됨으로 해서 우리가 말하는 여러 가지 국가적 불행만 발생한 게 게 아니라,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그 까르마가 쭉 이어집니다. 한 대(代)로 끝나는 게 아니라, 겉보기에는 멀쩡히 먹고 살지만 내재되어 계속 흘러내려가요. 질문자의 아이에게도, 손자에게도 계속 이어질 겁니다. 

 

질문자는 이런 문제를 심리학적으로 접근해 연구해보세요. 자기 가계니까 조사하기 쉽잖아요. 돌아가시긴 했지만 할머니가 어땠는지 아버지한테 이야기 들어서 조사하고 그것이 아버지에게 어떤 영향을 줬는지 살펴보고요. 아버지의 그런 까르마를 어머니가 이해하고 수용해줬다면 질문자에게 전이가 안 됐을 텐데, 어머니도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저 억울하다고 대응하다 보니 까르마와 상처가 질문자에게 내려왔어요. 남편이 질문자를 수용해주든 질문자가 남편을 수용해줬다면 아이에게는 전이가 안 될 텐데 질문자도 상처를 어쩌지 못해 그게 아이에게 또 전이 되었어요. 아이가 방글방글 웃으니까 내가 이렇게 살아도 애한테 무슨 피해를 주는지 모를 뿐이에요. 조금 전에 스님이 이혼하겠다는 아이 엄마에게 엄마 자격이 없다고 말하니까 여러분들은 ‘스님은 애를 안 낳아봐서, 남자라서 저런 소리 하지’ 이런 생각하면서 억울하게만 여기지, 도대체 이 까르마의 흐름을 모릅니다. 

 


 

분단으로 인해서 납치가 일어났어요. 그리고 그 상처가 한 대에 끝나는 게 아닙니다. 심리학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는 문제예요. 이것이 요즘 말로 하면 ‘트라우마’입니다. 베트남전에 참전했다가 다리 부러지고 팔 부러져서 돌아온 것만 치료를 했지, 사람을 죽이면서 느꼈던 마음의 충격이나 아픔은 치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이 끝나고 돌아온 군인들이 미국 사회에 적응 못하는 문제가 생겼어요. 그래서 육체의 상처처럼 정신에도 상처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트라우마’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요즘은 무슨 사건이 생기면 몸만 치료하는 게 아니라 다 마음의 치료를 병행합니다. 교통사고가 나도 몸뚱이만 치료하는 게 아니라 놀람병을 치료해야 해요. 운전하다가 한번 사고를 당하면 다음에 운전대를 못 잡거나 차가 덜컹거리기만 해도 놀라는 것은 트라우마, 즉 정신적인 상처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트라우마가 치유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컨트롤이 잘 안되는 거예요. 이런 점을 알아서 상처를 치유해가는 게 우리의 마음 공부입니다. 

 

그러니 질문자가 경험한 자기 가계부터 연구해보고 예컨대 다른 가계 열 가족을 더 연구해보세요. 이 전체의 공통점은 뭐고 차이점은 뭔지, 열 가계 중 한 가계라도 이걸 극복한 사례가 있다면 그걸 어느 어에서 누가 어떻게 극복해냈는지, 나머지는 대부분 극복을 못 하고 유전인자 처럼 상처가 대를 이허 흘러내려가는 이유는 무엇인지 연구해보세요. 

 

그 까르마와 상처가 지금 우리 민족 전체 공동체에도 흘러내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북한에서 태어나서 아버지가 일제시대 판사를 했던 사람의 예를 들어볼게요. 광복된 뒤에 공산주의자들이 들어오더니 ‘친일 청산’이라고 해서 아버지를 잡아가고 재산을 몰수해버렸어요. 아이 혼자 살아남아서 남쪽으로 도망왔습니다. 그러면 이 상처 때문에 ‘공산주의’라고 하면 ‘무조건 때려죽일 놈, 철천지원수’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을 보고 비상식적인 극보수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면 안 돼요. 그 사람은 그런 상처를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제의 지배와 분단, 좌우 대립으로 인한 전쟁, 그 이후 남과 북 모두에 들어선 독재 정권들, 이런 역사가 사람들에게 준 상처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통일이 돼야 역사도 바로잡히고 이 상처도 치유가 되는 거예요. 지금은 그런 이야기 해봤자 동조할 사람이 없으니까 저도 요즘은 통일 되면 경제적으로 큰 이익이라는 이야기를 주로 하지만, 실제로는 이 보이지 않는 마음의 상처가 엄청납니다. 통일은 이걸 청산할 수 있어요. 

 


 

그러니 질문자가 가족의 입장에서 이것을 연구하는 것은 통일에도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남북의 정치문제 같은 건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질문자는 자기 문제, 즉 나의 상처로부터 출발해보세요. ‘이 상처가 결국은 민족의 상처로부터 왔다. 사회로부터 나에게 오고, 이런 우리들이 모여서 또 사회의 상처를 온존시켜간다’ 이런 것을 연구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연구로 박사 학위 따겠다거나 돈 벌 생각은 하지 마세요. 꾸준히 30년 연구해서 나이가 60, 70 쯤 되면 전문가가 될 수 있어요. 아무도 안 알아줘도 통일된 뒤에는 ‘아, 그 분이 이런 아픔을 연구해서 이렇게 정리해 놓았구나’ 하고 알아줄 사람이 있을 겁니다. 그걸 해서 밥벌이로 삼겠다고 하면 관심없는 정부에 대해 실망하여 불평하고 자신을 한탄하게 돼요. 

 

소재는 아주 좋습니다. 그건 질문자가 인생을 어떻게 살 거냐 하는 문제예요. ‘그런 거 연구해서 뭐하나. 그건 밥이 안 된다’ 해서 자기 밥벌이만 할 수도 있지만, 요즘은 한국 사회가 그래도 살 만한 사회니까 통일부 같은 곳에 프로젝트를 제출해 볼수도 있어요. 나의 아픔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 분단이 가져온 우리의 아픔을 살펴보고, 앞으로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 이 사람들의 치유를 어떻게 해야 할지도 아우를 수 있잖아요. 통일부나 통일 관련 단체에 그런 프로젝트가 선정되면 먹고 사는 문제도 해결되고 연구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프로젝트를 준다는 보장이 전혀 없잖아요. 그러니 먹고 사는 건 질문자가 해결하고, 프로젝트 제출은  계속하고, 연구도 꾸준히 계속하라는 겁니다. 스님도 이런 통일 강연을 누가 돈 대줘서 하는 게 아니잖아요.”

 


 

“맞는 말씀인데요. 제가 그릇이 좀 작고 불안감이 굉장히 높은 사람이어서 아직은 어렵습니다.”

 

“그릇이 작으면 안 하면 되죠. (청중 웃음) 할 수 있는 아무런 대책이 없는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어요. 질문자가 그 연구를 하려면 그런 방향으로 해나가면 되고, 못 하겠다면 그냥 안 하면 됩니다.

 


 

그런데 핵심은 이거예요. ‘내 괴로움이 이산가족 때문에 생겼다’ 이런 말을 하면 안 됩니다. 그 출발점은 맞는 말이긴 하지만, 내가 사생아로 태어났든, 이산가족 집안에서 태어났든, 성추행을 당했든, 과거는 다 지나간 이야기예요. 지금 나는 그런 우여곡절을 겪고도 이렇게 살아있습니다. 그러니 나는 행복할 권리가 있고, 행복할 수 있어요. 수행자라면 이렇게 해탈을 해야 해요. 내가 먼저 행복해진 뒤에 이런 문제를 연구하는 건 괜찮습니다. 그런데 ‘이런 배경이 있기에 나는 괴로워할 수밖에 없다’라고 자기의 괴로움을 합리화하기 위해서라면 그런 연구를 맨날 해봐야 나한테 하나도 득이 안 됩니다. 저도 제가 어떻게 고문당하고 어떻게 살았는지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하면 끝도 없어요. (청중 웃음)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과거에 내가 어떻게 살았든 지금의 나는 행복해야 합니다. 과거는 너무 따질 필요가 없어요.”

 


 

“네, 그런 차원에서 그 연구를 하겠다는 쪽으로 생각을 굳히려고 노력해 보겠습니다. 길게 보려 하고, 이걸로 돈을 벌거나 하는 건 아예 생각하지 않고요. 스님께서 방금 해주신 말씀도 잘 이해했습니다. 재미있게 연구해 보겠습니다.” (청중 웃음과 박수)

 

환하게 웃는 질문자를 향해 청중들은 뜨거운 격려의 박수를 보내주었습니다. 오늘 강연에서는 통일 문제를 심리적인 측면과 가족적인 측면에서도 바라볼 수 있어 참 유익했던 것 같습니다. 

 


 

세 명의 질문 밖에 받지 못했는데 벌써 약속한 2시간이 모두 흘렀습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강연을 마치면서 스님은 ‘코리아 리스크’와 ‘코리아 브랜드’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면서 왜 지금 이 시기에 통일의병 운동이 필요한지 다시 한 번 강조해 주었습니다. 

 

“국제사회에서는 ‘코리아 리스크’라는 것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괜찮은 나라임에도 국제사회에는 저평가가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투자했다가 한반도에 전쟁이 났다 하면 완전히 죽이 되니까요. 남북 갈등 때문에 제대로 평가를 못받고 있어요. 그런데 만약 통일이 되면 코리아 브랜드가 굉장히 올라갑니다. 삼성, 현대 이런 대기업들은 자기들 이름으로 세계에 알려졌지 코리아 브랜드로 세계에 알려진 게 아니에요. 그런데 코리아 브랜드가 높아지면 우리가 독일제라고 하면 신뢰를 하듯이 세계 사람들이 한국제라고 하면 신뢰를 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한국에 있는 모든 중소기업들이 경쟁력을 가지게 됩니다. 지금은 삼성과 현대와 같은 특정한 재벌 기업만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고 있지 중소기업은 자기 브랜들를 만들 수 없어요. 코리아 브랜드를 만들어야 전체 산업이 다 살 수가 있습니다. 

 


 

이런 희망적인 미래는 우리가 지금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럴려면 통일을 강력히 추진할 정부를 국민의 힘으로 구성해내야 합니다. 민간이 어떻게 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통일은 정치, 외교, 군사, 경제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정부가 딱 통일을 하겠다고 마음을 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치 군사적으로 완전히 통일되는 것은 지금 당장 급한 것이 아니에요. 통일을 하겠다고 정부가 방침을 정하는 것이 제일 중요해요. 그렇게 되면 바로 교류 협력을 시작할 수 있어요. 정치 군사적인 통일은 시간이 좀 더 걸릴 수 밖에 없어요. 그러니 우리는 중국을 보고 좀 배워야 해요. 중국은 대만이 독립만 하지 않으면 자유롭게 풀어주고 30년이고 50년이고 기다려 줍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통일된 것과 똑같아요. 그런 것처럼 우리도 사실상의 통일을 먼저 하고, 정치 군사적인 통일은 북한 주민들이 스스로 선택할 때까지 시간 여유를 주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경제통합입니다. 남북 경제통합을 해야 남한도 빨리 경제 불황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너무 빨리 통합을 하려고 무리수를 두어서는 안 됩니다. 북한 주민들의 소득수준을 우리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면 천문학적인 돈이 필요합니다. 하자고 해도 안 할 판입니다. 우선 경제 통합을 해야 됩니다. 경제 통합만 되어도 엄청난 이익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나무를 심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통일이 되면 북한 주민들에게 일당을 하루 5만원은 줘야 하는데, 지금은 일당이 하루 천원 밖에 안되기 때문에 저렴한 비용으로 북한 전역에 나무를 심을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선투자라고 합니다. 통일이 당장 안 되더라도 이렇게 나무 심는 것과 같은 비군사적인 분야에서의 투자는 지금이라도 해야 합니다. 돈도 적게 들 뿐만 아니라 나무가 자라는데는 또 시간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비전을 가진 지도자가 우리 민족을 이끌도록 여러분들이 나라의 주인으로서 행동해야 합니다. 이런 입장을 국민들이 가지고 강력하게 요구하면 모든 정치세력들이 통일 방안을 만들어 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특정한 정치 세력의 하수인이 될 필요가 없습니다. 북한은 주민이 지도자를 선택할 권한이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헌법 제1조 1항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되어 있잖아요. 국민이 정부를 구성할 권리를 갖고 있기 때문에 바로 국민이 통일 지향적 정부를 구성할 수 있는 겁니다. 

 


 

이제는 평화 통일 정책이 선거에서 가장 큰 이슈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여야가 다 평화 통일 정책을 갖고 경쟁을 하게 되어서 그 내용이 비슷해지면 이제는 누가 당선이 되어도 상관이 없게 됩니다. 이렇게 비슷하게 되어야 야당이 여당의 발목을 잡지 않고 국회에서 합의를 해주게 될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으면 한쪽이 추진해도 다른 한쪽이 반대해서 국론 분열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니 국민이 각성해야 이 문제가 해결되지 그 외에는 방법이 없어요. 그래서 이렇게 통일의병 만들기 운동을 하는 거예요. 국민이 일어나서 나라의 운명을 개척하자는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 모두 통일의병에 참여해야 되겠죠? 강연장 나갈 때 다 등록하셔서 성남에서부터 통일운동이 일어나도록 해야 합니다. 알았죠?”

 

“네!”  

 

스님의 간곡한 호소에 모두들 큰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2시간 동안 열정적인 강연을 해준 스님에게 박수 갈채를 보냈습니다. 

 


 

이어서 참석한 청중들 모두가 손에 손을 잡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를 함께 불렀습니다. 엄마와  대학생인 듯한 딸이 다정하게 손을 잡고 서로를 따뜻하게 보며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입가에 미소를 짓게 했습니다. 

 


▲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 합창

 

강연장을 나가는 시민 한 분은  밝고 기분 좋은 얼굴로 “좋은 말씀 잘 듣고 갑니다” 며 환한 미소를 보여주었습니다. 또 다른 분은 “강연은 잘 들었는데 오히려 마음이 무겁다”면서 책임감을 느끼는 표정을 내비치기도 했습니다. 

 

책 사인회가 별도로 없어서 곧바로 무대 앞에서 강연을 준비한 통일의병들과 함께 기념 사진을 찍었습니다. 활짝 웃는 얼굴에는 보람과 기쁨이 가득해 보였습니다. 다만 이렇게 좋은 강연에 빈 자리가 많이 보여 아쉬울 따름이었습니다. 

 


▲ 오늘 강연을 준비한 통일의병들

 

수정청소년수련관을 나온 스님은 통일의병들에게 수고했다고 격려를 해준 후 곧바로 서울 정토회관으로 돌아왔습니다. 강연이 일찍 끝난 덕분에 스님은 늦은 시간까지 집무실에서 업무를 더 볼 수 있었습니다. 

 


 

내일은 아침 7시부터 하루 종일 평화재단에서 실무자들과 미팅과 회의를 연이어 가질 예정입니다. 저녁 7시 30분에는 평화리더십아카데미 졸업식 행사에 참여해 축하 강연을 해준 후 밤 11시 30분부터는 민족의 평화와 통일을 발원하며 시작한 천일 기도 중 100일째 기도일을 맞이하여 기념 법회를 한 후 릴레이 기도에 함께 동참할 예정입니다. 


※ 카카오톡으로 '법륜 스님의 하루'를 매일 받아보세요. 아래 배너를 누르고 친구 추가!


전체댓글 26

0/200

버섯

스님 항상 감사합니다~~♡

2015-12-07 08:50:46

김영원

네 당연히 통일은 해야죠

2015-12-06 19:03:26

박연희

스님 좋은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

2015-12-05 02:17:08

전체 댓글 보기

스님의하루 최신글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