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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 시흥시에서 열린 즉문즉설 강연을 마친 후 스님은 점심도 먹지 못하고 곧바로 야단법석 북 콘서트가 열리는 조계사 불교역사문화기념관으로 향했습니다.
콘서트장으로 가기 전에 급히 병원에 들러야 했습니다. 그제와 어제 연달아 비를 맞고 걸었고, 또 어제는 3시간짜리 강연을 3번을 하다 보니 몸에 무리가 갔는지 입안이 헐고 목이 붓고 편두통이 심해졌다며 스님은 급히 병원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 병원 진료
오후 북 콘서트와 저녁 강연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응급처방을 한 뒤 곧바로 조계사로 향했습니다. 스님의 건강이 많이 염려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오후 2시 40분에 조계사에 도착한 스님은 먼저 불교역사문화기념관 1층에 들러 조계종 자성과쇄신추진결사본부장인 도법 스님을 만나 환담을 하였습니다. 두 분은 좌우 대립이 심한 한국 사회의 문제점과 최근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에 대해 대화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 도법 스님과 환담
이어서 오후 3시부터는 불교역사문화기념관 지하 2층에 자리한 전통불교문화예술공연장에서 스님의 새 책 ‘야단법석’의 북 콘서트가 열렸습니다.
▲ 조계사 불교역사문화기념관
공연장 입구에는 포토존과 야단법석 구매 코너, 다과 코너 등 다양한 부스들이 마련되어 풍성함을 더했습니다.
▲ 스님의 새 책 '야단법석'
4대 인터넷 서점에서 사전 신청을 한 분들 중심으로 300여 명이 자리를 가득 메운 가운데 열렬한 환호와 박수로 북 콘서트가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조성환 님의 피리 연주가 강연장에 울려 펴지자 아주 차분한 분위기가 되면서 가을의 정취를 물씬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늘 북 콘서트의 주제와도 맞는 멋진 연주를 들려준 조성환 님에게 청중들도 힘찬 박수를 보내주었습니다.
▲ 피리 연주자 조성환님
오늘 북 콘서트의 사회를 맡은 분은 KBS 1라디오에서 ‘인문학 산책’을 진행하고 있는 이주향 교수님입니다. 이 교수님은 감미로운 목소리로 청중들을 집중시키며 말문을 열었습니다.
먼저 야단법석 책이 나오기까지 세계 115개 도시를 순회했던 스님의 기나긴 여정을 영상으로 만나보았습니다.
▲ 스님이 지난 115일 동안 걸어온 세계 100회 강연 모습이 담긴 영상
이 교수님은 “사람이 절망인 시대,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면 인간관계가 기적이라고 느낄 때가 있다”라고 하면서 “꽃보다 아름다운 분, 사람이 희망인 분입니다.” 라며 스님을 무대 위로 모셨습니다.
▲ 야단법석 북콘서트
이 교수님은 “600페이지에 육박하는 내용을 거의 다 읽고 왔다”고 하면서 “책을 읽기가 참 쉬웠는데, 그만큼 메시지가 너무나 명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책을 읽은 소감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책 내용 중에서 의미있게 다가왔던 부분들을 짚어가며 스님에게 몇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주향 교수님은 왜 책의 이름을 야단법석이라고 지었는지, 왜 하루 1개 도시에서의 강연을 고집했는지, 사랑 받으려고 하면 100% 실패한다고 얘기하셨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행복에 대해서도 욕심을 내면 안된다고 하셨는데 그 의미는 무엇인지, 또 자기를 이기는 것이 가장 큰 장부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또 매일 아침 108배를 해보라고 권유한 대목이 인상적인데 그 이유는 무엇인지 등 다양한 질문을 스님에게 했습니다.
스님은 각각의 질문에 대해 명쾌한 답변을 들려주었습니다. 그 중에서 야단법석 책에서 자기를 이기는 것이 가장 큰 장부라고 이야기한 이유와 자기 자신을 이기는 방법에 대해 질문한 내용과 스님의 답변을 잠깐 소개하겠습니다. 알아차림이 왜 수행의 핵심이 되는지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 오늘 사회를 맡은 이주향 교수님
“야단법석 책 속에서 밖의 100만 대군을 이기는 것보다 자기 자신을 이기는 것이 더 큰 장부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이 대목이 무척 인상적이었는데요.”
“부처님이 계신 건물 이름을 ‘대웅전’이라고 그러잖아요. 이 세상에서 그 어떤 영웅보다도 부처님보다 더 큰 영웅은 없다. 즉, 가장 큰 영웅이라는 뜻으로 ‘대웅’ 이라고 하는데 붓다는 바로 자기를 이긴 자입니다. 그래서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자기를 이겼다고 할 때 그 ‘자기’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자기의 까르마, 업(業)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 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해요. 그래서 이 업에 늘 끌려다니면서 살기 때문에 운명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당신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다고 하는 것이죠. 그만큼 고치기가 어렵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운명론을 부정하시고 이 운명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해탈의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자유와 행복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 이것을 건강에 비유하면 이렇습니다. 이 방안을 무균 상태로 만들었다면 우리가 병들 이유가 없겠죠. 이것이 바로 천당, 극락이라고 말해지는 이상 세계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해탈과 열반은 이런 무균 상태에서 건강한 것이 아니고 우리 몸에 어떤 세균이 들어와도 능히 이겨 낼 면역력을 갖추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방안 뿐만 아니라 천하 어디를 다녀도 병들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면역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태가 바로 해탈입니다.
아무런 장애가 없어서 행복한 것이 아니고 어떤 장애가 벌어지더라도 내가 거기에 구애받지 않는 것이 해탈입니다. 어떤 객관적인 상황을 두고 좋은 세상 나쁜 세상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나 다 그런 경지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잘 안 되는 이유는 우리의 까르마가 경계에 부딪히면 그 경계에 자동적으로 반응하고 끌려가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까르마에 대한 충동적 반응이라고 그럽니다. 의식에서 통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와 버리는 겁니다. 그러나 이 반응을 자기가 그 즉시 바로 알아차리면 충동적으로 반응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깨어있음이라고 말합니다. 이 정도가 되어야 진짜 자기를 이기는 영웅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그렇다면 자기 까르마를 아는 방법이 있을 것 같아요. 그것이 수행일 것이고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주시죠.”
“화가 일어날 때 화를 참는 것이 아니라 화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심리가 불편할 때 자기 상태를 딱 알아차려서 진정을 시키는 것입니다 .‘너 또 욕심내고 있구나’ 이렇게 자기 마음을 자기가 알아차리는 겁니다. 그러면 옆에 사람이 볼 때는 ‘저 친구는 화도 안 내고 욕심도 안 내고 사람 참 좋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본인은 자신이 화가 있고 욕심이 있는 줄을 잘 알고 있어요. 세상 사람들은 나를 모르는데 나는 나를 압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넌 욕심도 없니?’ 라고 물으면 ‘아니야. 나도 욕심이 있어. 욕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 이렇게 사실대로 얘기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야, 저 사람은 겸손까지 하네’ 이렇게 얘기합니다. (청중 웃음)
이렇게 내가 나를 알아야 합니다. 이 알아차림이라는 것은 밖을 주시해서 알아차린다는 뜻이 아니고, 자신의 기분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린다는 뜻입니다. 생각을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생각을 알아차리는 것은 쉬워요. 그러나 기분이나 마음 작용은 무의식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의식이 잘 못알아차립니다. 그래서 아주 예의주시해야 순간적으로 반응하는 기분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12연기에서는 ‘수(受)’, 즉 느낌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수’에서 맹목적인 충동으로 일어나는 것이 ‘애(愛)’ 즉 마음입니다. 마음은 감정입니다. 이 마음을 알아차려야 하는데, 그래서 신심명에서는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 사랑하고 미워하지 않으면 된다’고 표현을 합니다. 여기서 사랑과 미움은 남녀 간의 감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좋고 싫고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좋고 싫고로부터 자유롭지가 못하죠. 좋으면 반드시 가지려고 하고, 싫으면 멀리하려고 합니다. 이 좋고 싫고 하는 감정을 12연기에는 ‘애’라고 합니다. 좋다는 것을 ‘갈애’라고 하고, 싫다는 것을 ‘혐오’라고 합니다. 이 좋고 싫고가 일어나면 반드시 집착이 일어나요. 이 집착을 ‘취(取)’라고 합니다.
그래서 좋고 싫고 하는 감정은 일어나지만 거기에 끌려가지 않고 의지로 차단하는 것이 계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율을 지켜야 합니다. 좋고 싫은 감정이 일어나지만 적어도 말하고 행동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화가 났는데 화를 안 내면 내가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한 번 두 번 참게 되지만 압력이 쌓여서 나중에 폭발을 하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계율을 범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폭발하지 않도록 계율을 굳건히 지켜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꾸 터지게 돼요. 그래서 계율을 지키는 것도 큰 수행이지만 그것만으로는 해탈에 이를 수 없습니다. 계율을 지킨다고 행복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로 그 전 단계로 가야 합니다. 그것은 선정을 닦는 것입니다. 선정을 닦기 위해서는 첫째, 마음이 들뜨지 않고 고요해야 합니다. 둘째, 집중을 해야 합니다. 셋째, 뚜렷이 알아차림이 있어야 합니다. 즉, 아주 고요한 가운데 아주 뚜렷한 알아차림이 유지되는 것이 선정입니다. 이 선정에 든 상태에서는 느낌이 일어날 때나 마음에서 감정이 일어나는 순간을 아주 금방 알아차릴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선정을 닦는 것입니다. 고요한 것만이 선정이 아니라 거기에는 뚜렷한 알아차림이 있어야 선정입니다.
그러나 알아차림을 유지하려면 긴장이 돼요. 그래서 고요함을 놓치게 됩니다. 알아차림을 유지하기 위해서 긴장을 하거나 애를 쓰게 되면 고요해질 수가 없습니다. 이를 악 다물고 하면 그것은 선정이 아닙니다. 선정은 모든 긴장을 풀고 편안한 가운데 임해야 합니다. 그러면 졸리고 멍청해집니다. 그리고 망상이 치성해요. 온갖 잡념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온갖 잡념이 일어나고 졸리는 가운데도 뚜럿이 알아차림을 유지해야 합니다. 이것이 연습되면 상대를 보고 기분이 팍 나쁘면 벌써 자신이 감지를 할 수 있어요. 호흡이 가빠지거나 몸에 열이 나거나 하기 때문에 벌써 ‘너 화날 조짐이 보여’ 이렇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화가 나면 ‘너 화 나고 있어’ 하고 바로 알아차려지는 것입니다.
화가 나서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하는데 이를 악 다물고 참는 것은 계율은 지키는 것에 해당합니다. 이건 알아차림이 아니예요. 선정은 마음이 들뜨거나 상할 때 바로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알아차림이 유지되면 그 기분이 자연적으로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이기는 방법은 첫째, 계율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미 감정이 일어나버리면 그럼에도 말이나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도 자기가 자기를 이기는 것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기기는 이기는데 자기를 억압하고 있기 때문에 나중에 폭발해서 계율을 어겨버릴 가능성도 높고, 본인이 스트레스를 받게 되어 괴롭습니다. 그래서 그 전 단계인 ‘알아차림’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선 느낌을 알아차리고, 느낌에서 놓치면 그 다음 단계인 마음을 알아차리면 이 감정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면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알아차림을 통해서 저절로 감정이 조절이 되는 것입니다. 이 때 ‘해야지!’ 하는 의지를 불러일이키면 안 됩니다. 이렇게 알아차림이 지속되면 자기를 이기는 쪽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이기게 되는 것이지 이기기 위해 이를 악 다물면 이기지 못합니다.”
스님 말씀을 들으니 바깥 대상이나 지식이 아니라 나의 감정 자체가 내 공부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이 무척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그러면서 나 자신을 온전하게 긍정하게 되는 것 같았습니다.
이 교수님은 스님의 명쾌한 답변에 여러 차례 감탄을 하며 계속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이렇게 교수님과 스님의 야단법석 책에 대한 대화를 모두 마친 후 이후에는 청중들과 함께하는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전 세계를 누비며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더불어 지혜를 들려준 스님인데, 오늘 북콘서트에도 스님의 위로와 지혜가 필요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청중들은 강연장에 들어오면서 미리 자신이 스님에게 묻고 싶은 질문을 질문지함에 넣어둔 상태였습니다.
질문지함이 무대 위로 올라오자 먼저 스님이 손을 넣어 질문지 한 장을 뽑았습니다. 이 교수님이 질문지를 적은 사람의 이름을 부르자 직접 그 분이 일어나서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 청중들이 미리 써놓은 질문지를 하나 고르고 있는 스님
첫 번째로 뽑힌 분은 남동생이 사업을 하다가 부도를 내게 되었는데 뒤늦게 부모님이 사는 집을 동생에게 이전해준 사실을 알게 되었다며 오빠는 이 사실에 대해 분개하고 있고, 자신은 부모님의 집을 찾아드리고 싶은 마음인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고, 두 번째 질문자는 자신이 아끼는 팀원이 고등학교 동창의 합당하지 않은 유혹에 자꾸 넘어가는 것 같아 어떻게 해야할지 물었고, 세 번째 질문자는 수면제를 먹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 어떻게 이 습관을 고칠 수 있을지 물었고, 네 번째 질문자는 매사에 남탓하는 습관을 어떻게 고칠 수 있는지 질문했습니다.
그 중에서 남탓하는 습관과 아버지에 대한 감사함이 없는 자신을 어떻게 고칠 수 있는지 물었던 내용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합니다. 자신의 습관을 어떻게 바꾸어나갈 수 있는지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문제가 잘 안 풀리면 항상 남탓을 했어요. 결혼 전에는 아빠 탓을 하고, 결혼한 후에는 시어머니 탓을 했고요. 이런 안 좋은 모습을 좀 바꾸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남탓을 하지 않고 제 탓을 하면서 지낼 수 있을까요?”
“네, 남 탓을 안 하면 됩니다.” (웃음)
“그리고 친정 아버지에게 감사한 마음이 없어서 아이들에게도 나쁜 영향을 주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하면 아버지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아버지에 대해 감사하면 됩니다.” (웃음)
“더 물어봐도 되요? 저도 알고는 있는데요. 아버지를 보면 그게 잘 안돼요.”
“어릴 때 친정 어머니가 자기가 있는 데서 남편 탓, 시어머니 탓을 많이 했어요?”
“아버지가 술을 많이 잡수셔서 아버지에 대해 불만이 많이 있으셨어요.”
“어머니가 아버지 때문에 늘 힘들어해서 아이 안고 아버지를 원망하고 투덜댔기 때문에 자기의 무의식 세계에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가 좀 부정적이예요.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고의 습관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나중에 커서 ‘아버지는 괜찮은 사람이다’ 라고 이성적으로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아버지를 보면 마음에서는 거부 반응이 일어납니다. 보면 그냥 짜증이 나는 겁니다. 이것은 생각이 통제를 못합니다. 부딪히면 자동으로 거부 반응이 일어나고 또 찬찬히 되돌아보면 아버지는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릴 때 부모가 자식을 야단치고 너무 많이 간섭을 하면 아이들의 심리에는 거부 반응이 형성되지만 그러나 부모가 자신에게 잘 해준 것에 대해서는 고마운 마음이 들어서 정신적인 갈등이 아주 심해집니다. 부모 때문에 못 살겠다고 하면서 집을 나와 놓고는 또 늘 부모를 걱정합니다. 그런 것처럼 질문자는 무의식 세계에 아버지에 대한 거부 반응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릴 때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무지로 인해서 그럴 수가 있어요. 그런데 지금 커서 다시 돌아보니 아버지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이해가 되잖아요. 질문자는 어렸을 때 아버지의 어떤 모습 때문에 가장 힘들었어요?“
“아버지의 사업이 많이 힘들어지면서 아버지한테 굉장히 짜증을 많이 내었어요.”
“그것이 근본 원인은 아니에요. 아버지에 대한 호의적인 감정이 있으면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하면 오히려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 정상이예요. 아버지의 사업 실패를 보고 짜증이 났다면 그것보다 훨씬 이전에 아버지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이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질문자가 그것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질문자가 엄마의 업을 물려받은 것입니다. 엄마가 아빠 때문에 힘들어하는 모습을 그대로 물려 받았기 때문에 그것은 고치기 어렵습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듯이요.
그래서 나의 바탕이 그렇게 형성되었기 때문에 아버지를 보면 반갑고, 호의적이 되기는 어려워요. 그렇게 되려고 너무 욕심을 내게 되면 그렇게 안 되는 나를 또 학대하게 돼요.
그러나 커서 다시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니 아버지가 나한테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잖아요. 나를 공부시키고 키워주신 분이잖아요. 그러니 절을 하면서 이렇게 기도하세요.
‘아버지, 저를 사랑하고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절을 하면서 이렇게 자꾸 반복하게 되면 암시 효과가 있습니다. 자기가 자기에게 끊임없이 암시하는 겁니다. 일종의 자기 최면이죠. 자기에게 끊임없이 암시를 하면 무의식의 바탕에 아버지에 대한 부정적인 업이 형성되어 있어서 처음에는 상충이 되니까 거부 반응이 생겨서 절을 하고 싶지가 않아요. 짚어 치우고 싶은데 지속적으로 절을 하면 거부 반응이 감사한 마음으로 조금씩 바뀌어 가요. 그러면 아버지에 대해 호의적이 될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로 호의적으로 바뀌었는지는 아버지를 만나서 테스트를 해보면 돼요. 백일마다 한번씩 아버지를 만나서 대화를 나눠보면 혼자서 기도할 때는 호의적이 된 것 같은데 탁 부딪혀보면 거부 반응이 쏙 튀어나옵니다. ‘아, 아직도 바닥은 청소가 안 되었구나’ 알 수 있죠. 그러면 또 돌아가서 열심히 기도하고, 부딪히면 또 돌아가서 열심히 기도하고, 이렇게 반복하면 자신의 까르마가 변해나갑니다.
대신 욕심을 내면 안 돼요. 이걸 빨리 바꾸려고 하면 자학 증상이 생겨요. 빨리 안 바뀌는 나를 내가 또 나무라게 되거든요. 그러니 바뀌기는 바뀌지만 바뀌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시작하면 안 바뀐다고 좌절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지난번 보다는 거부 반응이 조금 약하네’ 이렇게 신기해 하면서 재미가 붙습니다.
완전히 소멸되려면 부처님이나 예수님처럼 한번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생사를 건 수행을 통해 까르마를 완전히 소멸하면 몰라도 그렇지 않고 우리들의 수준에서 수행을 하면 완전히 없앨 수는 없고 그 거부반응을 약화시킬 수는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탓하는 것도 여기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남편을 만나면 남편을 탓하고, 아이를 만나면 아이를 탓하고, 시어머니를 만나면 시어머니를 탓하고, 절에 오면 스님을 탓하게 됩니다. 탓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현실이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감사하니까 감사 기도를 자꾸 하면 감사한 쪽으로 조금씩 나아가게 됩니다. 목표는 감사한 쪽이고, 현실은 탓하는 것인데, 수행은 그 사이에 놓인 과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계속 절을 하시면 조금씩 개선이 될 겁니다. 감사 기도를 많이 하시면 좋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질문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습니다. 스님 말씀을 듣다 보니 내가 머리를 싸메고 고민하는 일들이야 말로 나를 알아가는 거울이 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주향 교수님은 어떤 질문에도 막힘 없이 명쾌한 대답을 들려주는 스님에게 냉철한 지혜를 가진 사람 같다며 감탄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청중들은 각자 자신의 고민들을 더 꺼내놓고 스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했지만 마칠 시간이 다 되어 아쉬움을 달래야 했습니다.
북콘서트를 마무리하면서 이 교수님은 오늘 참석한 청중들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씀 들려달라고 스님에게 부탁했습니다. 스님은 살아있는 모든 사람은 행복할 권리가 있다고 강조하면서 긍정적 사고의 중요성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살아있는 모든 사람은 행복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권리를 제대로 행세를 못해요. ‘아이가 말을 안 들어요.’, ‘남편이 맨날 늦게 들어와요.’ 이렇게 자기는 괴로울 수 밖에 없다고 이미 정해놓고 그 이유를 찾아요. 그런데 제가 듣기에는 괴로워해야 할 이유가 별로 안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남편이 죽어서 울고 있는 한 도반의 장례식장에 가서 문상을 하고 나서는 그 분의 귀에 대고 그랬어요. ‘당신은 좋겠소. 시집 한 번 더 갈 수 있잖아.’ (청중 웃음)
일반 사람 같았으면 뺨때기를 맞았을 수도 있었겠지만, 도를 공부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이런 이야기를 서로 나눌 수가 있는 거예요. 죽었다는 관점에서 보면 슬프지만, 결혼을 한 번 더 할 기회가 생겼다는 관점에서 보면 기분 좋은 일이예요. 결혼을 한 번 더 할 필요가 없겠다 싶으면 혼자 살면 되죠. 즉 선택의 폭이 넓어진 거에요. 왜냐하면 스님은 결혼을 해보지도 못했는데 그래도 결혼을 한 번 해봤잖아요. 그래서 불행해 할 요소가 아니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불행하다고만 생각을 하거든요. 어떻게 사물을 보느냐 이 문제입니다.
부처님은 있는 왕위도 버리고 출가를 했잖아요. 그런데 국회의원 떨어졌다고 해서 그게 괴로워할 일이예요? 국회의원 선거에 나와보지도 못한 사람들도 수두룩 한데요. 재산을 잃어버렸다는 것이 슬픈 일이예요? 아니예요. 어차피 부처가 되려면 있는 재산도 다 버려야 하는데요. 뭘.
우리가 사물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그 일은 좋은 일이 되기도 하고 나쁜 일이 되기도 합니다. 그 일 자체는 공(空)이에요. 그 일 자체는 좋은 일도 아니고 나쁜 일도 아니에요. 그 사람 자체는 좋은 사람도 아니고 나쁜 사람도 아니에요.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고 합시다. 내 쪽에서 보면 배신자이지만 그런데 상대편 여자가 볼 때는 더 진실한 사랑이 됩니다. 총각도 아니고 아내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피해까지 감수하고 나를 사랑해준다고 평가할 수 있는 일이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냥 책 속에 있는 내용 따로 현실 따로 이렇게 이해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심이 깊지 못한 것입니다. 존재 자체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고 다만 그것일 뿐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그것은 좋은 일이 되기도 하고 나쁜 일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체유심조입니다. 금이라고 하면 금이 되고 똥이라고 하면 똥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분별이 다 마음에서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괴로움이란 것은 사물을 부정적으로 보고 거기에 사로잡혀 있을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내려놓으면 괴로움이 사라지고, 사물을 긍정적으로 보면 즐거워집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사물을 매사에 부정적으로 봅니다. 그래서 자기의 괴로움을 합리화합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스스로 중생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주인이 되고 싶어요? 종이 되고 싶어요?“
“주인이 되고 싶습니다.”
“진짜예요? 테스트를 한 번 해볼게요. 두 사람이 밭에서 일을 하는데 저 둘 중에 누가 주인이고 누가 객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고맙습니다 인사를 하면 누가 주인이예요? 인사하는 사람이 주인이예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돈을 주면 누가 주인이예요? 돈을 주는 사람이 주인이예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인사를 하고 싶어해요? 인사를 받고 싶어해요?”
“인사를 받고 싶어해요.”
“돈을 주고 싶어해요? 돈을 받고 싶어해요?”
“돈을 받고 싶어해요.” (청중 웃음)
“거 봐요. 주인이 되기 싫잖아요. 내가 주인이 되기 싫어서 주인이 안 되는 것이지 내가 주인이 되려고 하는데 못 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여러분들의 눈에는 종이 되는 것이 좋아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주인이 못 되는 거예요. 부처가 되는 것이 어려워서 못 되는 것이 아니고, 되기 싫기 때문에 안 되는 겁니다. 아무리 큰 바가지를 들고 빗물을 받아도 거꾸로 들고 있으면 물이 안 고입니다. 즉, 주인이 되기 싫다는 겁니다. 행복하기 싫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내면 행복해지는데, 사랑 받으려고 하면 내가 상대에게 종속되잖아요. 내 행복이 상대의 손에 달려있게 되잖아요. 상대에 따라서 내 행복과 불행이 좌우되잖아요. 그래서 사랑 받으려고 하지 말고 사랑하라 말하는 것입니다. 도움 받으려고 하지 말고 베풀어라. 이해 받으려고 하지 말고 이해해라. 이것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고 내가 자유롭고 행복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부처님과 예수님이 무슨 억한 심정이 있어서 우리를 괴롭히려고 하겠어요? 우리 자신을 가장 행복하고 자유롭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과거에 사생아로 태어났든, 고아로 자랐든, 어릴 때 성추행을 당했든, 사업에 실패했든, 자식이 없든, 자식이 먼저 죽었든, 누가 돌아가셨든, 그 수많은 경험을 겪고도 여러분들은 지금 살았어요? 죽었어요?“
“살았어요.”
“살아있는 사람은 행복할 권리가 있어요. 자식이 죽었다고 해서 불행해야할 아무런 이유가 없어요. 나의 자유와 행복은 다른 누구에게 양보할 수 있는 게 아니예요. 사랑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 아니고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괴로운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들도 주인이 될 권리, 행복할 권리를 마음껏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살아있는 모든 사람은 행복할 권리가 있다는 스님의 간곡한 호소에 청중들도 뜨거운 박수를 보냈습니다.
마지막 순서는 재즈 가수 말로의 멋진 공연이 펼쳐졌습니다. 가을과 초겨울이 다가오고 있는 요즘에 듣기에는 너무나 안성맞춤인 아름다운 목소리를 들려주었습니다.
▲ 재즈가수 말로
말로 씨는 멋진 노래를 들려준 후 “좋은 강연을 듣고 맑은 정신을 가지신 분들에게 이런 공연을 하게 되어 너무 영광”이라며 기쁜 마음을 나누어 주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북콘서트를 모두 마친 후 이어서 스님이 참가한 청중들 모두에게 책 사인을 해주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 야단법석 책 사인회
청중들은 스님과 눈을 마주치며 소중한 가르침을 준 스님에게 거듭 감사 인사를 했습니다. 특히 어떤 분은 “스님 책을 읽으며 제 인생이 얼마나 행복해졌는지 몰라요” 라며 그 기쁨을 감출 줄 몰라 했습니다.
사인회를 모두 마치고 나서는 오늘 강연을 준비한 정토회 컨텐츠사업국 자원봉사자들과 모두와 함께 기념 사진을 찍었습니다. 활짝 웃는 얼굴 속에는 오늘도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전할 수 있어 보람 있었다는 뿌듯함이 가득 묻어 있었습니다.
▲ 오늘 북콘서트를 함께 준비한 정토회 컨텐츠사업국 자원봉사자들
스님은 북콘서트를 마친 후 폴짝 폴짝 뛰듯이 계단을 지나 곧바로 저녁 강연이 열리는 인천시 계양구청으로 향했습니다. 차가 막히게 되면 강연 시간에 늦을 수도 있는 상황이라 많이 서둘렀습니다.
저녁 7시부터는 인천시 계양구청에서 청년들을 위한 즉문즉설 강연이 열렸습니다. 다음 이야기에 계속 됩니다...
※ 법륜 스님의 세계 100회 강연을 한 권의 책으로 엮은 '야단법석'을 지금 인터넷 서점에서 만나보세요. 14만 킬로미터의 여정에서 만난 2만 2천여 명 세계인과의 행복한 대화가 생생하게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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