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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평화재단에서 주관하는 평화리더십아카데미 수강생들을 위해 경주 역사기행을 안내한 후 ‘통일코리아의 비전’에 대해 강연했습니다.
오늘도 새벽 4시에 일어나 예불과 기도로 하루를 시작한 스님은 아침 식사 후 새책 출간을 위한 원고 교정 업무를 보다가 경주로 출발하기 전 감을 따는 일을 했습니다. 내일 서울시청 광장에서 열리는 청춘콘서트 페스티발에 정의화 국회의장님과 김제동씨가 참석하는데 두북에서 딴 감을 선물해 주기 위해 스님은 부쩍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 나무에서 방금 딴 감을 깨끗이 닦아 포장하고 있는 스님
방금 나무에서 딴 감을 행주로 깨끗이 닦고 박스에 가지런히 담아 포장을 한 후 차에 싣고 경주로 출발했습니다.
10시 30분에 경주 법흥왕릉에 도착해 소나무 아래에 앉아 서울에서 출발해 경주로 내려오고 있는 평화리더십아카데미 수강생들을 기다렸습니다. 스님은 가만히 눈을 감고 햇살을 쬐며 “아이고, 가을 햇살이 얼마나 좋니?” 라며 지긋히 웃었습니다.
11시가 되자 수강생들이 모두 도착하고 드디어 경주 역사기행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스님의 안내로 경주 역사기행을 함께하는 분들은 모두 15명입니다. 얼마전 정토회의 제1차 통일의병대회를 같은 코스로 진행했는데 그 때 참가자가 1500명이었음을 생각하면 100분의 1에 불과하지만, 스님은 1500명을 안내할 때와 똑같이 정성을 기울여 안내를 해주었습니다. 수강생들은 “스님께 개인 과외를 받는 것 같다”며 모두 기뻐했습니다.
▲ 법흥왕릉
법흥왕릉 앞에서 삼배로 인사를 한 후 곧바로 스님의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스님은 법흥왕의 가장 큰 업적은 개혁 개방 정책을 통한 신라와 가야의 합의 통일이었다고 하면서 이것이 지금의 남북 통일에 주는 교훈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보통 독일의 통일 등 다른 나라의 사례를 공부하는 경우가 많은데 스님은 우리 역사 속에서도 배울 점이 정말 많다며 의미있는 몇가지 교훈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여기는 법흥왕릉입니다. 법흥왕은 신라와 가야를 통합한 왕이에요. 이곳에서 신라와 가야의 통합의 과정과 결과가 어땠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통합에는 무력통합과 합의통합이 있습니다. 신라의 보수 세력은 당연히 무력통합을 강력히 주장했겠지요. 가야의 강경세력도 끝까지 저항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합리적인 사람들은 가야의 요구조건을 신라가 들어줘서 합의 통합의 길을 열어야 한다고 봤습니다. 가야 쪽에서도 우리의 요구조건만 들어준다면 굳이 전쟁까지 할 필요 없이 합의해서 통합하는 게 낫지 않느냐는 의견이 점점 커졌어요.
이렇게 양쪽의 강경세력은 반대하고 합리적인 세력은 합의를 주선하는 가운데 가야가 요구한 조건이 두 가지였어요. 첫째는 사상, 즉 가야의 신앙인 불교를 인정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니 불교 금지국가였던 신라가 통일 전에 먼저 불교를 공인해야 했습니다. 지금과 비유하자면 남한이 주도하는 통일을 하자고 하니까 북한에서 절대로 굴복할 수 없다고 반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옛날에는 북한이 남한보다 세기도 했으니까요. 또 우리 보수세력 중에는 옛날 6.25 때나 그 동안의 갈등에 대한 보복을 하려 드는 사람이 많아요. 그러나 합리적인 사람은 북한을 포용해서 합의통일을 하자고 할 것입니다. 북쪽 내부에서도 굳이 이렇게 대립하지 말고 통합해서 같이 살자는 사람들이 있겠죠. 이런 가운데서 북쪽이 첫 번째 요구로 공산주의 활동을 허용하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지금 공산주의 활동을 국가보안법으로 금지하고 있는데 이것부터 먼저 허용하라고 요구한 셈이에요.
그러니 신라 안에서는 불교 허용 여부를 두고 찬반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나이 많은 보수세력은 절대로 안 된다고 했고 젊은 세력은 불교를 허용하자고 해서 신라 내부에서 엄청난 갈등이 생겼어요. 그 갈등이 폭발한 사건이 이차돈의 순교입니다. 527년에 이차돈이 죽고 528년에 불교가 공인되면서 가야에게는 신라와 통합할 수 있는 길이 하나 열렸습니다.
가야가 내건 두 번째 요구 조건은 가야의 지배층, 즉 왕족을 신라의 왕족으로 인정해달라는 것이었어요. 신분 보장을 해달라는 이야기죠. 보통 다른 나라를 통합하면 전쟁에 진 나라의 왕족과 귀족은 노예가 되잖습니까? 그런데 왕족은 왕족으로, 귀족은 귀족으로 똑같이 인정해달라고 하는 거예요. 남북 통일에 빗대어 생각해보면, 북한의 사단장이나 장군 출신도 통일 한국의 군대에서 그에 준하는 지위를 갖도록 인정해달라는 거예요. 북한의 도지사라면 도지사 그대로 인정하고요. 그걸 우리나라에서 받아들일까요?
문제는 둘 다 동등한 입장이 아니라 신라를 중심으로 해서 통일한다는 대전제였어요. 나라 이름을 ‘신라가야’라고 하는 게 아니라 ‘신라’라고 하고, 왕도 신라왕이 그대로 왕인 거예요. 신라가 되겠다는 조건으로 가야 측에서 이렇게 요구 조건을 내건 거예요. 오늘날 남북에 빗대어 말하면 나라 이름을 ‘조선대한민국’이라고 하거나 반반씩 섞은 연방제를 하는 게 아니라, ‘대한민국’으로 나라 이름을 통일하고 남한 중심의 통일을 하는 대신에 북쪽의 요구를 수용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북쪽에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고, 남한의 보수세력에서 받아들이기도 쉽지 않은 문제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합의를 한 거예요.
그래서 김수로왕의 후손이자 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은 이제 나라가 없어졌으니 왕은 아니지만 대신 신라의 공주와 결혼해서, 가야의 영역이였던 땅을 통치할 권한을 받았습니다. 일종의 특별시로 만들어서 그 통치권한을 줬습니다. 그리고 장손은 대대로 신라의 공주와 결혼하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합의를 보고, 나머지도 다 신라의 귀족으로 받아들여줬어요.
요즘 식으로 말하면 하나는 정치활동의 자유, 사상·이념의 자유를 준 것이고, 또 하나는 지배층의 신분을 보장해준 겁니다. 이렇게 전쟁 없이 합의통일을 하니까 가야인들이 신라에서 아무런 차별을 안 받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로 말하자면 통일국가에서 북한 출신이거나 과거에 북한에서 관리를 하거나 공산당 활동을 했다고 해서 차별하는 일 없이 모두 받아들인 셈입니다.”
스님의 설명을 듣고 나니 사상의 자유와 지배층의 신분을 보장해준 신라의 포용 정책과 지금의 남한 지도층이 갖고 있는 포용성이 너무나 비교가 되었습니다. 이어서 스님은 신라와 가야의 합의 통일로 인해 신라가 얼마나 비약적으로 성장했는지도 설명해 주었는데, 현재 남한의 지도층이 이런 역사 인식을 갖고 있는지 반문을 하면서 아쉬운 마음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스님은 삼국통일을 세가지 시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고 하면서 150년에 걸친 삼국 통일 과정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신라와 가야의 합의 통합이 시너지 효과를 가져온 것처럼 지금의 남북 통일이 세계 문명의 중심으로 도약하는 첫발이 될 수 있다는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신라 시대를 크게 셋으로 나누면 부족국가 시대, 삼국 통일을 이루어가는 시기, 통일 이후의 시기로 볼 수 있습니다. 통일을 이루어가는 시기를 다시 셋으로 나누면 법흥왕과 진흥왕의 기초를 닦기 시기, 진지왕과 진평왕을 거치며 통일로 나아가는 험난한 시기, 선덕여왕에서 진덕여왕을 거쳐 무열왕, 문무왕까지 이어지는 통일의 시기입니다. 이 세 시기가 각기 50년 정도씩 됩니다. 다시 말하면 동쪽에 치우친 작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까지 150년이 걸렸는데, 그 150년을 다시 나누어 첫 번째 50년은 신라가 부흥하는 시기, 두 번째 50년은 그 성장한 신라를 유지시키는 시기, 세 번째는 그걸 기반으로 삼국을 통일하는 시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여기서 공부할 것은 첫 번째 시기입니다. 나중에 삼국 통일의 시기에는 외교 문제도 있고 군사작전을 갖고 무력 통일을 하다 보니 통일의 부작용도 많이 생겼어요. 그래서 신라의 삼국 통일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평가와 비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라와 가야의 통합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신라와 가야의 통합과정이야말로 우리가 남북통일에 실제로 참고해야 할 사항입니다. 삼국통일은 그냥 통일로만 끝났잖아요. 그런데 신라와 가야의 통합은 두 나라의 합병이 합병으로 그치지 않고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것처럼 남북 통일을 통일로만 끝낼 것이냐, 통일을 기반으로 동아시아 공동체를 만들고 세계 문명의 주역으로 성장하는 긴 프로젝트의 일부로 통일을 볼 것이냐의 문제예요. 이렇게 크게 보고 통일을 그 1단계라 생각한다면 우리가 북한에 양보를 좀 해도 괜찮아요. 그런데 딱 ‘통일’이라는 이것밖에 없다고 생각하면 왜 양보를 해야 되느냐고 하게 됩니다. 우리의 통일도 신라와 가야의 통합에서 참고를 좀 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바쁜 중에 여기까지 온 거예요.”
동아시아 공동체와 세계 문명의 주역이라는 큰 그림을 그리고 나서 다시 남북의 통일 문제를 바라보니 북한에 대한 포용적 자세도 더 커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역사기행의 첫 코스부터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펼쳐지니 모두들 한껏 설레여하는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법흥왕릉을 내려와 다음은 태종무열왕릉으로 이동했습니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참가자 중 한 명이 “신라의 삼국통일도 150년이라는 기나긴 과정이 있었는데 우리는 지금의 남북 통일을 너무 성급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소감을 이야기했는데, 스님은 “지금 우리도 벌써 분단 70년의 통일 과정을 겪고 있지 않느냐”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태종무열왕릉에 들어서서는 제일 먼저 비석의 머릿돌과 받침돌만 남아 있고 몸돌은 없어진 태종무열왕릉비를 살펴보았습니다. 받침돌에 조각된 돌 거북은 목을 높이 쳐들고 발을 기운차게 뻗으며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으로 신라의 진취적인 기상을 잘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 태종무열왕릉비
다함께 태종무열왕릉을 참배한 후 이어서 스님은 태종무열왕이 어떤 어려움을 겪고 왕위에 즉위하게 되었는지 또 신라의 삼국 통일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 설명해 주었습니다.
“돌궐, 고구려, 백제, 왜가 종적으로 동맹관계가 되면서 신라는 완전히 고립되어버렸어요. 북쪽에는 고구려, 서쪽에는 백제, 남동쪽에는 왜가 버티고 있었습니다. 신라는 영토가 넓어졌지만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던 겁니다. 덩치 불리기에 급급해서 기업 합병을 잘못하면 망하는 것처럼, 나라가 망할 위기에 놓였어요.
이걸 극복하려고 신라가 중국으로 간 거예요. 마침 그 때 중국에서는 수나라가 전국을 통일했으니 수에 조공을 바치는 신하의 나라가 되기로 하고 도움을 청한 거예요. 그래서 수에 가서 ‘고구려더러 신라 치지 말라고 해다오’ 그러니까 수가 ‘그래, 해주마’ 하고 고구려에 신라 건드리지 말라고 했지만, 고구려가 말을 안 들었어요. 요즘 대통령이 계속 중국 가서 북한에 압력 넣어 달라 해도 북한에서 말 안 듣는 것과 똑같아요. 그래서 천하를 통일한 수나라가 기분이 나빠서 고구려를 침공한 거예요. 1차, 2차, 3차, 4차 침공을 연달아 실패해서 나중에는 113만 대군을 끌고 갔지만 을지문덕에게 패하고 결국 수나라가 망해버렸어요. 그걸 계승한 게 당나라예요.
신라가 이번에는 또 당나라한테 가서 부탁했어요. 그래서 당나라가 고구려한테 ‘좀 가만히 있어라’ 이랬는데 고구려는 또 말을 안 들어요. 그래서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한 것이 소위 고당전쟁입니다. 이런 전쟁들이 사실은 모두 신라와 관계가 있습니다. 신라가 처음부터 수나라며 당나라에 부탁하고 싶어서 간 게 아니라, 국제적으로 고립되어 나라가 위기에 처하니까 어쩔 수 없이 부탁을 하게 된 겁니다. 그때 이 외교를 주로 한 사람이 태종무열왕이 된 김춘추입니다.”
이 외에도 주로 외교를 담당했던 김춘추의 역할을 스님은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지금도 한반도를 둘러싼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강대국을 어떻게 설득하고 활용하느냐에 따라 통일에 유리한 국면을 만들 수 있는데 김춘추의 이런 외교적 역할 속에서도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어서 태종무열왕릉의 뒤에 연이어 4개의 큰 무덤이 있었는데, 이 무덤들은 아직 누구의 무덤이 밝혀지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선도산 기슭으로 올라갔습니다. 선도산 기슭에는 진지왕과 진흥왕의 무덤이 있었습니다.
▲ 진지왕릉
진지왕은 태종무열왕의 할아버지인데 드라마를 통해 널리 알려진 인물인 미실 공주의 음모에 의해 4년 만에 폐위가 된 왕입니다. 이런 사실로 태종무열왕은 왕위에 오르는데 많은 제약이 따랐죠. 그리고 진흥왕은 법흥왕의 업적을 이어서 신라의 영토를 광범위하게 확장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죠. 참가자들은 각각을 참배한 후 김춘추와 김유신이 어떻게 결혼 동맹을 맺게 되었는지 재미있는 에피스도를 들으며 주차장으로 걸어내려 왔습니다.
이어서 김유신장군묘를 참배하고 김유신 장군에 얽힌 설화와 삼국 통일에 기여한 김유신 장군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후 황룡사지로 이동했습니다.
동양 최대의 9층 목탑이 있었던 자리인 황룡사지는 지금 현재 허허벌판만 남아 있는 곳입니다. 황룡사 9층 목탑은 몽고란 때 불에 타서 소실되었지만 지금으로 치면 아파트 25층 높이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탑이였습니다.
▲ 황룡사지
스님은 왜 신라의 선덕여왕이 이런 어마어마한 탑을 쌓을 생각을 했는지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자장율사가 중국에 유학을 와서 기도를 하고 있는데 어떤 신선이 나타났어요. ‘우리나라가 늘 침공을 받는데 어떻게 하면 좋으냐’라고 하니 그 신선이 하는 말이 ‘너희 나라 왕은 지혜는 있으나 여자라서 덕이 없다. 위용을 갖추려면 황룡사에 9층탑을 쌓아 그 탑의 위용으로 외세를 진압해라‘ 이렇게 알려주었어요. 기록을 보면 1층은 왜, 2층은 거란, 3층은 여진, 이런 식으로 각 층에 해당하는 나라 이름이 죽 나옵니다. 황룡사 9층탑은 부처님을 위해 지은 탑이 아니라, 불보살의 힘을 빌어 신라 주변의 아홉 나라의 적을 방어하고 나라를 지키고자 세운 탑입니다. 이런 것을 호국사찰이라고 하죠.
그런데 탑을 지으려 하니 당시 신라의 기술로는 이 정도로 큰 규모의 탑을 지을 수 없어서 백제에 기술자를 청했어요. 그래서 아비지 등 200명의 백제 기술자들이 와서 탑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목탑 세우는 과정은 9층짜리 건물을 세우는 것과 비슷해요. 대들보를 올리려 할 때, 아비지가 백제가 망하는 꿈을 꿨어요. 그래서 공사를 마무리할 마음이 나지 않아 미루고 있으니까 자장율사가 신인을 데려와서 밤에 대들보를 올렸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처럼 황룡사 9층탑은 선덕여왕 때 신라가 통일을 발원한 탑입니다. 이때는 아직 통일이 되는 시기는 아니에요. 선덕여왕 때 통일을 발원했고, 선덕여왕이 죽고 30년 뒤에 통일이 되었습니다.”
황룡사지에서는 선덕여왕 때처럼 통일 발원 기도를 해야 한다는 말씀에 참가자들도 9층탑 자리를 거닐며 간절히 한반도의 통일을 기원해 보았습니다.
다음은 황룡사지를 빠져나와 들판 사이에 난 오솔길을 따라 능지탑과 선덕여왕릉, 사천왕사지가 있는 낭산으로 향했습니다. 황룡사지를 걸어나오며 스님은 “다들 배고프죠?” 하면서 경주 황남빵을 2개씩 나눠주었습니다.
방금 갓 만들어서 따끈따끈한 황남빵을 입으로 호호 불어 먹으며 참가자들은 무척 기뻐했습니다.
낭산으로 향하는 길에는 들판 곳곳에 추수를 마치고 가지런히 볏짚을 놓인 모습과 청명한 가을 하늘, 선선한 바람, 맨드라미 꽃, 주렁주렁 열린 감나무 등 가을의 정취가 완연했습니다.
황복사지 삼층탑을 지나 능지탑에 도착한 스님은 이어서 능지탑이 있는 ‘배반’이라는 마을 이름의 유래와 문무왕의 호국정신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이 동네 이름이 ‘배반’인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삼국통일을 완성한 문무대왕이 자기가 죽은 뒤를 생각해보니 고구려도 멸망했고, 백제도 멸망했고, 당나라와는 화친을 했으니 이제 신라의 적이 딱 한 나라 남았어요. 바다 건너 왜가 있었습니다. 왜는 신라와는 원래 앙숙이었어요. 왜는 처음에는 가야의 일부였다가, 다음에는 백제의 일부였다가, 백제가 고구려와 동맹을 맺으니까 고구려하고 사이는 좋아졌는데 신라와는 늘 갈등이 많았습니다. 문무대왕이 보기에 나라에 위험이 되는 외적이 있다면 이제 왜 뿐이니까, 자기가 죽어서 동해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보호하겠다고 했습니다.
▲ 능지탑
신라는 당나라와 싸울 때 사천왕사에서 신에게 기도해서 침공을 막았어요. 서해바다의 용이 폭풍을 일으켜 당나라 군선을 침몰시켰다고 해요. 그러니 문무대왕의 입장에서는 그 용에 대한 신앙이 깊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문무대왕이 죽어서 동해바다의 용이 되겠다 하니 어떤 스님이 ‘아무리 그래도 축생이 아니냐’며 만류했어요. 그러자 ‘나라만 지킬 수 있다면 내가 축생이 된들 어떠리’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런 게 신라 지도자들의 호국정신이었습니다. 그 비슷한 말을 한 사람이 있는데 혹시 아세요? 김구 선생입니다. ‘나라만 독립된다면 내가 수위가 된들 어떠리’ 라고 했어요. 문무대왕은 자기를 화장해서 동해바다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여기가 문무대왕을 화장한 자리입니다.
여기에 탑이 있으니까 불교 신자는 부처님을 생각하며 절을 하고, 불교 신자가 아닌 사람들은 문무대왕의 은혜를 생각하며 절을 했습니다. 이렇게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다 한 번씩 절을 하다 보니 동네 이름이 ‘절하는 곳’이라는 뜻을 갖게 되었어요. 옛날에는 배반리, 요즘은 배반동입니다.”
죽어서도 백성을 편안케 하고자 했던 문무왕의 마음을 가만히 느껴보며 지금 우리는 얼마나 고통받는 서민들의 아픔을 헤아리고 있는지 되돌아 보았습니다.
그리고 스님은 이곳 능지탑이 어떻게 복원이 되었는지 은사 스님인 도문 큰스님의 노력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이곳은 원래 폐허로 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저희 은사 스님이신 도문 큰스님이 구입해서 복원을 해서 시청에 기증을 했어요. 복원하는 비용까지 다 큰스님이 부담했어요. 지금은 정부가 다 복원을 하지만 그 때만 해도 정부가 돈이 없었을 때이니까요.”
참가자들은 민간인이 사비를 들여서 이곳을 복원했다는 사실에 모두 감탄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능지탑을 지나 시원한 솔숲길을 따라 언덕으로 올라가니 솔숲 한 가운데에 아담하게 자리잡은 선덕여왕릉에 도착했습니다.
선덕여왕릉을 참배한 후 스님은 선덕여왕이 재위하던 시기는 국난의 시기였다고 하면서 위기가 곧 기회임을 강조한 후 남북 통일도 지금이 곧 위기이자 기회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첨성대도 선덕여왕이 세웠고, 분황사도 선덕여왕 때 지었고, 황룡사 9층탑도 선덕여왕이 지었어요. 삼국통일을 발원하는 9층탑을 선덕여왕 때 지었다는 것은 하나는 국난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던 의미가 있고, 또 하나는 국난 위기의 극복을 곧 통일의 길로 삼고자 했던 의미가 있습니다.
▲ 선덕여왕릉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지금 우리는 영구분단의 위기에 놓인 동시에 통일의 기회를 앞에 두고 있습니다. 세력 판도가 바뀌기 때문입니다. 세력 판도가 고정되어 있을 때는 현상 변경을 못 합니다. 중국이 부상하면서 세력 판도가 바뀌잖아요. 이건 사실 위기이지만 동시에 기회이기도 합니다. 고정되어 있던 판이 흔들리니까요.
지금은 미국 중심의 세계에서 미중의 G2 시대로 바뀌고 있잖아요. 이 세력 교체기를 이용해서 우리가 통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 영구 분단으로 가게 됩니다. 대부분의 경우 기회와 위기는 같이 옵니다. 기회를 놓치면 위기가 되고, 위기를 잘 극복하면 기회가 됩니다. 예컨대 자본주의의 위기였던 70년대 오일 쇼크를 잘 극복하면서 자본주의가 승리하고 사회주의가 몰락했어요. 사회주의는 위기를 극복하지 못해서 기회를 잃어버렸어요.
이렇게 한쪽은 위기, 한쪽은 기회가 도래하고 있는데 현재의 정치인들이나 상황을 보면 기회를 놓치고 위기 쪽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노력해도 제가 보기에는 힘들 것 같아요. 그러면 안 하면 되지 않느냐? 그건 아니에요. 안 될 확률이 높을 뿐이지, 될 확률이 조금이라도 있으니까요. (웃음)
인생이란 것은 10퍼센트의 확률이라도 있으면 도전하는 거예요. 뒤집기를 하면 앞으로 나아가고, 뒤집기를 못하면 과보를 받겠죠. 그런데 이렇게 수가 작아서 뭐가 되겠어요? 500명이 와도 될까 말까인데요. 그러니 오늘 참가한 여러분들은 한 명당 백 명을 맡았다고 생각해야 해요.” (모두 웃음)
일당 100명씩을 맡아야 한다는 이야기에 모두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특히 위기가 곧 기회라고 하면서 10%라도 확률이 있다면 도전해야 하는 것이라는 말씀은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선덕여왕과 관련된 신비스러운 3가지 설화와 선덕여왕의 리더십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후 산을 내려왔습니다. 오후 3시 20분이 되어 드디어 오늘의 마지막 답사 장소인 사천왕사지에 도착했습니다. 한낮의 따뜻한 햇살이 산 너머로 뉘엿 뉘엿 그 모습을 숨기고 싸늘한 찬바람이 불기 시작할 무렵이었습니다.
▲ 사천왕사지
사천왕사에서 당시에 문두루 비법을 행했다고 하는 터에 건물지에 서서 스님은 사천왕사지에서는 어떤 기도를 해야 하는지, 통일을 위해 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모아내어야 함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나당 전쟁이 시작되면서 당나라가 침공해 온다고 의상이 신라에 알려주자 신라 조정에는 난리가 났어요. 지금 미국이 최신 무기와 20만 미군을 동원해 한국을 침공한다면 우리 군인이 60만이라도 당해 낼까요? 턱도 없어요. 그러니 ‘미리 항복해야 한다, 사신을 보내 사죄를 해야 한다’는 사람들과 ‘아니다, 우리는 잘못이 없다. 약속을 안 지킨 건 당나라이니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사람들로 내부가 완전히 분열되었습니다. 그런데 문무대왕이 ‘싸우자’라고 결론을 내렸어요.
그런데 당나라와 싸우기로 결정하고 의견을 물어보니,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으니 신불의 힘을 빌려야 한다고 해요. 그래서 신통력을 행하는, 일종의 밀교 계통 불교인 유가승의 대가인 명랑법사가 이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명랑법사가 말하길, 신유림에 절을 짓고 여기서 문두루 비법을 행해야 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왕이 명령을 내려 이곳에 절을 짓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이곳 사천왕사는 최대의 호국사찰입니다. 종교를 떠나서 이것의 의미를 오늘에 살린다면, 앞으로 통일을 하려면 황룡사 9층탑을 쌓아서 통일을 발원해야 하고, 통일 중에 생길 분란을 잠재우려면 사천왕사를 복원해서 여기서 기도를 해야 합니다.
앞으로 중국과 싸울지 미국과 싸울지 일본과 싸울지 모르지만 가능하면 안 싸우는 게 좋잖아요. 그래서 지난번에 정토회 통일의병들은 황룡사지에서 통일을 발원하고 여기 사천왕사지에 와서 미래의 갈등을 대비한 통일 기도를 했어요. 종교적으로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그런 발원을 한 겁니다. 이런 마음을 우리가 모아내야 합니다.”
통일 이후에 생길 주변국들과의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선 국민들의 마음을 더욱 하나로 모아내어야 한다는 점을 상기하며 마지막으로 다시한번 간절한 발원을 하며 사천왕사를 걸어나왔습니다.
사천왕사지 앞에는 비석을 세웠던 거북이 모양의 받침돌 두 개가 도로가에 횡그러니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발가락의 모양이 마치 살아있는 거북이처럼 보일 정도로 정교하게 잘 조각되어 있었지만 거북이의 머리는 덩그러니 잘려나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일제 시대 때 민족 정기를 막는다는 목적으로 훼손이 된 것 같아 보였습니다.
스님은 “학창 시절에 이 받침돌을 보호하려고 리어카를 가져와서 옮기려고 하고, 별짓을 다했는데 너무 무거워서 꼼짝도 안 했다”고 하면서 당시 문화재의 보존을 위한 마음이 어떠했는지 이야기해 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40여년이 흐른 지금도 도로가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모습이 안타깝게 느껴졌습니다.
이렇게 경주역사기행을 모두 마치고 나서 곧바로 저녁 강연이 열리는 보문단지 내 코롱 호텔로 향했습니다. 오후 6시 45분부터는 ‘신라의 삼국 통일로 본 통일코리아의 비전’을 주제로 특강 시간을 가졌습니다.
▲ 저녁 특강
스님은 먼저 오늘 하루 종일 역사기행을 하며 이야기 나눈 신라의 삼국 통일 과정에 대해 개괄적으로 정리해 주면서 과연 지금 남북이 신라와 가야의 합의 통일처럼 평화적 통일을 하게 되면 어떤 시너지 효과를 가져올 수 기조 강연을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통일을 위해서는 국민이 통일 의병으로 나서야 한다고 하면서 강연을 마무리해 주었습니다.
“통일은 남한이 중심이 되어서 준비를 해야 하지만, 또한 통일은 우리가 결정하는 게 아니라 북한에서 동의하도록 해야 합니다. 북한에서 동의할 때까지 5년이 걸리면 5년, 10년이 걸리면 10년, 20년이 걸리면 20년을 기다려야 합니다. 중국을 보세요. 대만과 아직 통일을 안 하고 ‘너 좋을 때 해라.’ 이렇게 내버려 두지만 경제는 신속하게 통합을 해요. 그것처럼 북한 인민들이 빨리 생존권이 확보되려면, 그리고 남한 경제가 성장 동력을 가지려면 이렇게 경제는 신속하게 통합해서 북한 개발 정책으로 나가야 됩니다. 그리고 남북이 통일이 되어야 미중의 경쟁 구도에서 우리가 중심을 잡을 수가 있어요. 아니면 우리가 미중의 하위 변수로 전락해서 우리가 서로 갈등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여니, 야니, 진보니, 보수니, 경상도니, 전라도니 이런 지나간 프레임은 내려놓고 ‘대한민국이 살 길은 통일인데 누가 평화적으로 통일을 할거냐.’를 중점적으로 생각해야 해요. 통일을 하기 위해서는 첫째, 미국을 설득해 내야 되고, 둘째, 북한을 포용해내야 되는데 이게 핵심 키입니다. 이렇게 해서 통일을 국가의 최대 목표로 추진할 사람과 정체세력을 지지해줘야 합니다. ‘누구라도 좋다, 어떤 정당이든 좋다. 누가 통일을 국가의 최대 목표로 추진할 거냐’ 이렇게 해야 합니다.
이제는 국민들이 딱 힘을 가지고 정치인들을 끝까지 경쟁 붙여서 ‘누구든지 우리의 지지를 받으려면 통일 정책을 이렇게 해라. 제일 근접한 사람을 찍어주겠다.’ 이렇게 해서 임박할 때까지 밀고 가서 양쪽이 그 비슷비슷하게 오도록 하면 누가 되든 상관이 없잖아요. 그리고 그 이후에도 국민운동을 계속 추동을 해야 되요. 통일하겠다고 해놓고 안하는 사람들이 워낙 많으니까요.
이렇게 할 수 있으면 통일의 기회를 잡을 수 있고 이렇게 할 수가 없으면 통일의 기회를 놓치고 대한민국이 이 정도 선에서 위기로 넘어간다, 이렇게 보시면 되요. 왜냐하면 지금 정치인들 중에는 그렇게 할 사람이 없어요.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국민 밖에 없어요. 정치인 한 두 명 설득해서 될 것 같으면 왜 이렇게 15명 데려다 놓고 이렇게 하루종일 이야기하고 있겠어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딱 마음을 내서 일당백으로 하면 기회가 옵니다. 세상이라는 건 늘 안 될 때는 이래서 안된다 하지만 되고 나면 어때요. ‘아. 그래서 됐다.’ 이러거든요. 문제는 누가 이렇게 되도록 하느냐, 이게 핵심이에요. 그래서 사람들이 ‘난 교사인데, 난 생활인인데, 사업하는데 왜 나보고 그런 일을 하라고 하냐?’ 이래서 ‘의병’이라는 이름을 붙인 거예요. 의병은 직업에 관계없이 누구나 다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앞장서서 나라를 구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왜 지금 의병 운동이 일어나야 하는지 모두들 스님의 말씀에 공감을 하며 큰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남은 것은 국민 밖에 없다는 스님의 간곡한 호소를 들으니 왜 스님이 정치 지도자가 아닌 아카데미 수강생 15명을 위해서도 이렇게 정성을 다해 강연을 해주는지 그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습니다.
이렇게 기조 강연을 마치고 나니 2시간이 훌쩍 지나 있어서 두 명의 질문만 추가로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중 통일된 한국이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주변국들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통일을 만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질문한 내용에 대해서는 이렇게 답변을 하며 강연을 마무리해 주었습니다.
“우선 남북이 통합경제를 하면 남한만 이익인 게 아니라 북한도 이익이에요. 다시 말하면 북한 개발을 하면 고급 노동력은 남한에서 들어갈 거 아니에요. 그러니 청년들의 일자리와 괜찮은 일자리가 확 늘어나겠지요. 그러면 일반 노동은 북한 사람들이 하게 될테니까 값싼 일자리가 엄청나게 늘어날 거 아니에요. 그럼 북한 주민들도 살아나게 되고 우리도 또 청년 일자리가 엄청나게 늘어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북한 개발은 남북 상간의 이익이에요.
과거에는 세계의 생산 공장 기지가 한국이었잖아요. 그러다가 지금 중국으로 옮겨 갔는데, 이것을 인도로 가져갈려고 지금 모디 총리가 굉장히 노력하잖아요. 그것처럼 북한도 중요한 중저가 상품 생산 기지가 될 수 있어요. 만약에 한국의 자본 기술과 북한의 노동력이 결합하면 한국은 굉장한 생산 시설 기반을 구축할 수 있어요. 독일이 유럽에서 경쟁력이 있는 이유는 생산 시설을 갖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통일은 남북에게 상호 상승효과를 가져와요.
그런데 남한이 만약 북한을 밀어부쳐서 통일을 하게 되면 중국과 적대 관계가 될 거 아니에요? 그러나 합의 통일하면 통일 된 국가가 중국과도 적대관계가 안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통일 된 한국이 중심이 되어서 일본과 중국을 연결해서 동아시아 공동체를 우리가 주선 할 수가 있어요.
소위 말해서 동아시아 공동체,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환동해 경제권을 형성할 수가 있어요. 일본, 남북한, 동북3성, 연해주, 이렇게 합쳐지면 땅은 유럽만큼 크고 인구는 3~4억 정도 됩니다. 동북3성이 인구가 1억이 훨씬 넘거든요. 일본이 1억 3천, 한국이 남북한 합하면 7천만이 넘잖아요. 연해주까지 하면 3억이 넘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것은 유럽 공동체 만한 규모가 형성이 되는 것이고, 중국까지 합하면 세계 최대의 경제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통일은 통일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통일은 1단계이고 그 다음은 동아시아 공동체로 가야 합니다. 그리고 동아시아 공동체가 되면 세계 최고의 경제권이 될 뿐만 아니라 협력하는 구조가 되면 창조적인 문명이 나오게 되는 거예요. 저는 창조성에 있어서 한국이 좀 노력하면 일본과 중국보다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지 않겠냐 이렇게 봐요.
즉, 우리가 비젼을 그려본다면 21세기 말에는 세계 문명의 중심이 동아시아로 옮겨 올수 있다는 거에요. 중국하고 결합해서 양을 키우고 그 핵심은 일본과 한국의 기술력과 민주주의, 이런 것이 되겠죠. 그렇게 문명의 꽃을 피우려면 민주주의도 발전해야 하고, 인권도 신장되어야 하고, 여성차별 문제도 해결되어야 하고 전 세계가 우러러 볼만한 시스템을 마련해야 되잖아요. 한국이 그렇게 하면 중국은 따라합니다. 경제 개발도 한국이 경제 성장 하는 걸 보고 중국이 받아들인 거예요. ‘한국도 하는데 우리는 왜 못해.’ 이러거든요. 그렇게 우리가 민주주의를 하면 ‘한국도 하는데 왜 우리는 왜 못해’ 전부 이렇게 될 수가 있어요. 이게 영향력이에요. 그래서 한국의 발전은 중국을 견인 시키는데 굉장히 좋아요.
그런데 한국이 혼자서 중국을 상대하기는 힘들어요. 중국이 성장하면 한국은 고목 나무의 매미가 됩니다. 일본하고 협력을 해야 그래도 중국에 대항해서 고목 나무의 매미는 안 될 수 있어요. 그리고 일본하고 한국은 문명사적으로 보면 같은 동북아 문명권이잖아요. 동아시아에는 중국 문명권과 동북아 문명권 이 두 개가 있어요. 동북아 문명의 창조자가 우리잖아요. 그러니까 이렇게 협력하는 게 필요해요. 100년을 그려보면 아주 그림이 좋아요. 그런데 이것은 통일 없이는 불가능해요.
그래서 우리 젊은이들이 이런 그림을 가지고 한 세대를 노력해볼만 하잖아요. 우리 선배들이 그 가난한 나라를 산업화로 일궈놓았고, 또 우리 선배들이 감옥가면서 민주화를 해놓았잖아요. 이걸 딛고 우리는 통일을 이루면서 정치도 개선을 하고 다당제로 전환을 해서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고 지방 분권도 하고 경제 민주화도 하고 복지 시스템도 마련하고 남북한 통합도 할 수 있는 겁니다.
남북한이 통일되면 노벨 평화상은 이미 따 놓은 거예요. 통일이 되면 이산가족의 아픔이라든지 이런 게 소설로 나오면 노벨 문학상도 이미 따 놓은 거예요. (청중웃음) 세계인들에게 한국이 더 이상 ‘굶어죽는다, 싸운다, 독재다.’ 이런 이미지로 남으면 안 돼요. 우리가 코리아 브랜드를 키워야 하는데 지금은 북한 때문에 코리아 브랜드를 키우기가 굉장히 어려워요. 인도의 시골에 가도 ‘전쟁 한다는데 어떻게 되요? 굶어 죽는다는데 어떻게 되요? 미사일, 핵실험 어떻게 되요?’ 이런 걸 묻거든요. 그런데 통일이 되면 코리아 브랜드가 굉장히 올라갑니다.
독일 브랜드는 어떤 특정 제품 선전을 안 하잖아요. 독일제라고 하면 그냥 다 좋다고 하잖아요. 그런 것처럼 삼성이나 현대는 자기 브랜드를 갖고 세계화를 하지만 중소기업은 자기 브랜드를 갖고 세계화를 할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통일을 해서 코리아 브랜드로도 ‘뭐든지 한국 거는 다 좋다.’ 이렇게 되도록 해야 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중소기업도 살아날 수가 있어요. 현재 한국의 시스템에서는 대기업을 다 없애버리고 중소기업만 육성할 수도 없잖아요. 대기업이 이미 국가를 다 장악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이걸 갖고 싸우지 말고 우리가 통일을 통해서 더 많은 영역의 중소기업이 살아나도록 하고, 북한에는 이런 대기업 방식으로 안하도록 만들면 균형을 좀 잡을 수 있겠지요.
그리고 또 우리가 복지사회를 건설해야 통일하기가 쉬워요. 왜 그럴까요? 북한 주민들이 생각할 때 남한에 사는 사람도 가난하면 굶어죽는다고 하면 통일을 할 필요성을 못 느끼잖아요. 그런데 복지가 어느 정도 갖춰지면 북한 주민들도 ‘거기 가서 사는 게 낫겠다.’ 이렇게 될 거 아니에요. 이렇게 통일의 유인 효과가 굉장히 커져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통일 비용과 복지 비용을 계속 저울질 하면서 통일이 되면 복지를 못한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우리가 복지를 하는 게 통일의 상승효과를 가져오고, 통일을 하는 게 성장을 가져오기 때문에, 복지에 재정 투자를 할 수 있는 여력을 갖게 해줍니다. 그래서 이것은 상반된 게 아닙니다.
통일 비용을 자꾸 얘기 하는 사람들은 통일 하지 말자는 이미지를 우리에게 심으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통일은 북한 사람들만 좋은 게 아니에요. 남한 사람들에게도 새로운 기회를 가져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통일 이미지는 ‘같은 민족이니까 같이 살아야 된다.’ 이런 인식을 자꾸 주니까 젊은이들이 ‘왜 꼭 같이 살아야 되나’ 이런 반론이 자꾸 제기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옛날 얘기는 좀 내려놓아야 해요. 그런데 또 요즘 반론은 그래요. ‘왜 통일을 자꾸 경제적으로만 계산하나.’ 그 말도 맞아요. 그런데 우리가 젊은이들을 설득하려면 통일은 경제 외적인 이익이 많지만 경제적으로도 이익이라는 걸 설명을 해야 되는 거예요. 이산가족의 아픔, 과거사의 청산, 이런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경제적으로도 이익이다. 경제적으로 손실이라고 해도 통일을 해야 되지만 경제적으로도 결코 손해가 아닌 이익이다.’ 이걸 우리가 안다면 통일을 반대할 이유가 없습니다.”
스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니 절로 가슴이 두근 두근 뛰었습니다. 오늘은 정말 하루 종일 신라와 가야의 합의통일에서 지금의 분단 현실, 그리고 통일 한국의 비전, 더 나아가 동아시아 공동체와 세계 문명의 중심이 되는 것까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방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콩닥 콩닥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평화리더십아카데미 참가자들은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강연을 마친 후 스님은 곧바로 문경 정토수련원으로 향했습니다. 밤 10시에 경주를 출발한 스님은 12시에 다 되어 문경에 도착해 오늘 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
내일은 새벽 6시부터 문경 정토수련원 대수련장에서 전국에서 모인 경전반 저녁부 수강생들을 위해 즉문즉설 강연을 3시간 동안 해준 후, 아침 10시에는 전국 불교대학과 경전반 저녁부 담당자들을 위해 즉문즉설 강연을 2시간 해준 후, 오후 4시부터는 서울 시청광장에서 열리는 ‘청춘콘서트, 행복의 나라 페스트발’에 참가해 김제동씨와 함께 청춘들을 위로하고 격려해주는 강연을 해줄 예정입니다.
※ 법륜 스님과 함께 하는 '인도 성지순례' 참가자 접수가 시작되었습니다.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인도의 10대 성지를 내 발로 직접 밟아보고 그 감흥을 느껴보는 시간을 가져보세요. 아래 배너에서 직접 신청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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