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5.10.10 (오전) 청춘캠프 2일째, 경주역사기행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청춘캠프 2일째를 맞이하여 400여명의 청년들과 경주역사기행을 한 후 ‘통일코리아와 청년의 역할’을 주제로 강연했습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예불과 기도로 하루를 시작한 스님은 아침 식사를 한 후 아침 8시에 경주로 향했습니다. 법흥왕릉 앞에서 청년들을 기다리며 원고 교정 업무를 보다가 9시 30분에 청년들이 도착하자 함께 법흥왕릉으로 올라갔습니다. 

 


▲ 법흥왕릉으로 올라가는 길

 

청년들도 저 멀리서 황금 들녘을 사이로 법흥왕릉을 향해 걸어 올라왔습니다.

 


 

오늘은 하루 종일 신라의 삼국통일과 관련이 깊은 유적들을 차례대로 순례할 예정입니다. 순례는 법흥왕릉을 첫 코스로 시작되었습니다. 스님은 법흥왕릉 앞에 모인 청년들에게 “무덤 앞에 왔으니 먼저 인사를 드리는 게 예의겠죠”라며 선 채로 합장 삼배를 한 후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 법흥왕릉

 

먼저 약소국이였던 신라가 통일의 주역으로 올라설 수 있는 출발점을 만든 사람이 법흥왕이라고 하면서 이곳에서 역사기행을 출발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내물왕 때인 AD 400년에는 가야가 신라를 침공해서 신라가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때까지는 신라가 가야보다 문명 수준과 국력이 약했어요. 가야는 낙동강 유역에 6개의 부족국가를 갖고 있었고 바다 건너 지금의 일본 땅에도 가야의 부족국가가 있었습니다. 이 때 가야와 왜의 연합군이 신라를 침공했어요. 위기에 처한 신라의 내물왕은 고구려에 조공을 바쳐 신하의 예를 취하고 원군을 청했습니다. 당시 고구려 왕이 광개토대왕이에요. 광개토대왕은 5만 군대를 신라에 보내서 가야와 왜의 연합군을 격파했고, 신라는 국난을 피했습니다. 그래서 신라는 고구려에 조공을 바치는 속국이 되었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신라가 그만큼 약소국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작은 신라가 어떻게 삼국통일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되었을까요? 이걸 우리가 역사에서 연구해야 합니다. 아주 작은 약소국이었던 신라가 통일의 주역으로 올라설 수 있는 출발점을 만든 사람이 여기 있는 법흥왕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곳까지 왔어요.”

 

그러면서 스님은 가장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로 신라와 가야가 합의 통일을 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법흥왕 때 와서 율령 반포와 불교 공인 등 개혁 개방 정책을 쓰면서 국력이 신장되기 시작했고, 이 신장된 힘을 가지고 신라는 가야와의 통합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낸 것입니다. 스님은 그 과정에서 지금의 남북 관계를 풀어가는 해법이 있다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가야와 신라는 이웃이긴 하지만 130년 전에 가야가 신라를 침공해서 신라가 망할 정도의 위기에 처했던 철천지원수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시간이 흘러 거꾸로 가야는 약해지고 신라가 강해졌어요. 신라 쪽에서는 옛 원수를 생각해서 무력으로 가야를 침공해서 통합하고 원수를 갚자는 요구가 많았겠죠. 반면 가야는 옛날에 자기들이 잘 살았으니 지금은 약간 힘에 부치긴 해도 신라가 침공한다면 목숨 걸고 싸워서 침략을 막아야겠죠? 이것이 통상적인 관계예요. 

 


 

현대의 우리나라에 비춰보면 상황이 유사하죠? 과거에 북한이 잘 나가고 남쪽이 못 나갈 때 북한이 남쪽을 침략해서 남쪽이 망할 뻔 했는데 미국의 힘을 빌려서 간신히 막아냈어요. 그런데 60년이 지나면서 남쪽이 힘이 세지고 북쪽이 약해지니까 남쪽에서 북쪽을 붕괴시켜버리고 흡수통일하자는 주장들이 나옵니다. 이런 상황이 똑같이 전개되고 있어요.

 

그런데 이때 신라에서 힘으로 가야를 몰아붙이지 말고 가야와 협상해서 통일을 하자는 소위 평화적 통일론이 제기되었습니다. 신라 안에서도 반대하는 세력들이 있었겠죠. ‘무슨 소리냐, 원수를 갚아야지’ 하는 사람도 있고, ‘그래봐야 전쟁의 피해만 많다’고 걱정하는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가야 쪽에도 협상을 통한 통일에 찬성하는 사람도 있고 강력하게 반대하는 세력도 있었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합을 할 때 신라를 중심으로 통합하게 되었어요. 즉 신라가 강하니까 신라 중심으로 통합하되 대신 신라는 가야의 요구조건을 들어준 것입니다. 

 


 

두 가지 요구조건이 있었어요. 하나는 가야의 신앙, 사상을 신라가 인정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불교신앙을 신라가 먼저 공인하라는 것이 가야의 요구조건이었어요. 두 번째는 가야 지배층의 신분을 보장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통합 이후에 아무런 불이익을 받지 않고 통합된 나라에서 출세할 수 있는 길을 보장해달라고 했어요. 신라가 이걸 수용해줬습니다.

 

요즘에 빗대어 이야기하자면, 우리가 남북한을 통일하기 전에, 남한 중심으로 통합하겠다 한다면 북한을 포용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북한이 공산주의 국가라면 공산주의 활동을 우리가 먼저 허용해야 합니다. 즉 통일된 이후에도 자기들의 사상이나 이념을 가지고 마음껏 활동할 수 있도록 허용해줘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국가보안법을 철폐하고 공산주의 활동을 합법화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해서 북한이 남한에 통합되는 것에 동의를 하도록 했다는 겁니다. 

 


 

두 번째는 그 당시가 혈통사회니까 가야의 왕족을 신라의 왕족으로 인정해 준 겁니다. 이게 사실 굉장히 어렵습니다. 대부분 통합을 하면 약한 나라 쪽의 왕족은 전부 평민도 아닌 노예로 전락합니다. 그런데 신분을 그대로 인정해달라는 거예요. 남북한이 통합될 경우, 북쪽의 별 두 개짜리 소장이라고 하면 통합한국군에 그대로 부임하는 셈입니다. 북쪽 군대는 해산해버리고 남쪽 군대만 남기는 게 아니라 남북통합군을 편성하고 북쪽에서 장군이었던 사람도 사단장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해준 셈이에요. 북한에서 도지사 했던 사람은 도지사를 그대로 하도록 허용해준다는 이야기입니다. 왕만 빼고요. 가야가 신라의 한 주로 편성되었으니 가야 왕은 왕이라는 이름은 없어졌지만 가야 전체 지역을 총괄하는 성주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허용해달라는 요구를 신라가 받아들여 주었어요. 이것을 포용정책이라 합니다. 강자가 양보하면 포용이라 하고 약자가 양보하면 굴복이라고 해요. 

 

이렇게 해서 신라와 가야는 전쟁을 통한 통일이 아닌 합의 통일을 했습니다. 합의 통일을 할 때 그 중심을 가야가 아닌 신라에 두는 대신 신라는 가야의 신앙과 가야 사람들의 신분을 그대로 보장해주었어요. 그래서 신라와 가야가 통합을 이룬 것입니다. 그것을 성사시킨 사람이 법흥왕입니다.

 


 

그런데 신라와 가야가 합의통합을 하니까 단순히 영토와 인구만 늘어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야는 신라보다 문물이 앞서고, 철기문화가 발달해 있었습니다. 부산에서 밀양 가다 보면 낙동강변에 물금이라는 역이 있습니다. 물금은 삼국시대부터 유명한 철광석 산지입니다. 그 가야의 철기문화가 신라에 들어오면서 신라의 무기와 농기구가 급속도로 철기화되었습니다. 그래서 신라의 국력이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특히 낙동강 유역을 차지하면서 농업 생산량도 크게 늘었습니다. 

 

단순 통합에서 끝난 게 아니라 그 힘을 가지고 다음 왕, 즉 진흥왕 때 백제와 힘을 합해서 고구려가 점유하고 있던 한강 유역을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더 치고 올라가서 지금의 강원도, 함경남도까지 점령했어요. 한강유역 점령을 기록한 진흥왕순수비가 북한산순수비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함경남도에 비석이 둘 있어요. 마운령비와 황초령비입니다. 신라의 영토가 북쪽으로 어마어마하게 넓어졌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대가야가 신라에 통합되면서 낙동강 유역이 전부 신라 땅으로 들어왔습니다. 여기에는 창녕순수비가 있지요. 이렇게 영토가 세 배 정도 늘고 국부 또한 엄청나게 늘었습니다. 그리고 가야의 인재들이 신라의 인재로 들어오면서 다음에 삼국통일을 할 때 중요한 활약을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는 김유신 장군은 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증손자예요. 가야 출신 사람들이 신라에 와서 출세한 쪽은 주로 군대를 통해서였습니다. 남북한이 통일되면 북한 출신들이 남쪽에 와서 출세하는 길도 아마 군대일 겁니다. 그리고 예술 분야도 있어요. 가야금도 가야에서 신라로 들어온 악기입니다. 북한 사람들도 악기를 잘 다루잖아요. 

 


 

이렇게 해서 신라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이 힘을 가지고 신라는 삼국통일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된 거예요. 그 기초를 닦은 것은 법흥왕이고, 그 힘을 빌어서 신라의 영토를 세 배 이상 넓인 것은 다음 왕인 진흥왕이었습니다.”

 

신라와 가야의 합의 통일을 지금의 남북 관계에 비춰서 설명을 해주니 그 당시에 얼마나 쉽지 않은 결정을 했는지 금방 와 닿았습니다. 지금 남한이 그런 포용 정책을 취할 수 있는지 묻는다면 쉽게 대답할 수 없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스님은 신라와 가야의 통합의 시너지 효과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우리 역사 속에서 신라가 백제, 고구려를 통합한 삼국통일은 흡수 통일이었기 때문에 민족사 전체적으로는 손실도 있었지만, 신라와 가야의 합의 통일은 부작용 없이 국력이 비약적으로 성장했음을 봐야 합니다. 통합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통합이 국력을 크게 키워줬다는 거예요. 우리가 만약 힘으로 남북통일을 한다면 남북이 통일되는 것에 그칠 뿐입니다. 1 더하기 1이 2가 되는데 그치지만 남북이 합의통일을 한다면 1 더하기 1이 2가 아니라 5나 10이 됩니다. 남북이 합의통일을 하면 통일한국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힘이 중국과 일본까지 연대해 동아시아 공동체로 나아가는 기초가 되고, 다시 이것이 세계 문명이 동아시아로 오는 기초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남쪽이 북쪽을 무력으로 통합하게 되면 북한의 배후로 간섭을 하려드는 중국은 통일된 한반도와 적대관계가 되겠죠? 한중 양국이 적대관계가 되면 우리가 통일은 할지언정 통일 이후가 밝지 못합니다. 남북이 합의통일을 함으로 해서 단순 통일에서 머무르지 않고 이웃나라인 중국, 일본, 러시아, 미국과도 협력해서 아시아에 새로운 평화지대를 구성하고 협력을 강화시키는 기초를 닦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국가의 비전을 정할 때 통일을 끝으로 보면 안 돼요. 통일은 출발에 불과합니다. 통일이 출발이고 그 다음으로 동아시아 공동체, 그 다음으로 새로운 문명의 중심인 동아시아 시대를 가져오겠다는 목표 하에서 우리가 통일의 길을 가는 거예요. 

 

그래서 통일이 어떤 통일인지에 따라서 통일만으로 끝날 수도 있고, 통일 이후에 엄청난 혼란을 가져올 수도 있고, 통일이 시너지 효과를 낳아서 통일의 징검다리를 거치고 더 발전하는 길로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 국내의 예가 바로 신라와 가야의 통합입니다.”

 

역사기행의 시작부터 정말 가슴 뛰는 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다른 외국의 사례가 아니라 우리 역사 속에서도 이렇게 배울 점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역사가 현재 속에서 살아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어서 다음 순례 코스인 태종무열왕릉으로 향했습니다. 태종무열왕릉 앞에서도 먼저 다함께 합장 삼배로 인사를 올린 후 이야기를 이어나갔습니다. 이곳에서 스님은 태종무열왕이 된 기춘추가 삼국 통일에 어떤 기여를 했으며 특히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주변국과 어떻게 외교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교훈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 태종무열왕릉

 

“국가적 위기를 막기 위해서 외교를 시작했는데 그것이 기회가 되어서 삼국 통일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즉 내부적으로 정치를 안정시키고 신라의 군사력을 키운 것은 김유신이고 그것을 수, 당과 외교를 해서 위기를 막았을 뿐 아니라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쪽으로 외교전을 펼친 것은 김춘추예요. 그래서 김춘추가 삼국통일의 3대 영웅 중 한 사람입니다. 김춘추, 김유신, 여기에 통일을 완성시킨 문무대왕, 이 세분을 우리가 삼국통일의 영웅이라고 부릅니다.

 


 

이곳에서는 실제 통일 과정에서 일어나는 외교전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도 지금 통일로 가려면 외교전이 중요해요. 그래서 가야와의 통합에서는 남북관계를 어떻게 풀 거냐를 생각해야 하고, 실제로 주변국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외교전을 펼쳐갈 거냐는 신라의 삼국통일에서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그 외교전이 동맹국과 다시 전쟁을 치를지도 모르는 문제가 발생해요. 우리가 한중동맹을 했다가 나중에 다시 중국과 싸우게 될 수도 있고 한미동맹을 했다가 나중에 다시 미국과 싸우게 될 수도 있잖아요. 그 정도로 국가 이익이라는 관점이 분명한 가운데 동맹을 맺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통일의 과정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여기 있는 태종무열왕은 신라의 왕권을 강화하고, 즉 내정의 혼란을 막아내고, 외교전을 펼쳐서 실제로 통일에 중요한 기회를 만든 사람입니다.”

 


 

이렇게 설명을 마치고 태종무열왕릉을 비롯해 뒤이어 더 큰 규모로 조성되어 있는 4개의 무덤 주위를 한바퀴 산책하듯이 걸었습니다. 그리고 큰 무덤 앞에서 다같이 기념 사진을 찍었습니다. 신라의 청년들로 구성된 화랑도가 삼국통일에 많은 기여를 하였듯이 오늘 이 청년들도 남북통일에 많은 기여를 할 수 있기를 기원해 봅니다. 

 


 

태종무열왕릉을 걸어나오면서 스님은 역사의식을 갖도록 하는 가정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오늘은 역사기행으로 공부삼아 왔지만 다음에 올 때는 데이트하러 오세요. (청중 웃음) 결혼하면 애들 손잡고 여기 와서 역사 이야기도 해주면서 키우면 아이들이 역사의식을 갖게 됩니다. 우리 선조들을 보면 부모가 어릴 때부터 환웅 천왕이며 단군 왕검에 대한 이야기를 늘 해준 사람들은 나중에 역사의식이 뛰어납니다. 훌륭한 사람들의 어릴 때 학습 과정을 보면 집안의 가정교육이 그랬던 사례가 많습니다. 유대인들의 가정교육이 그래요. 학교에서 학습해서 그리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유대인들이 가정에서 창조주 하느님으로부터 자기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배웁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말은 달라도 공유하는 역사는 같습니다. 러시아 가서 사는 유대인들은 다 러시아말을 쓰고 프랑스에 살면 프랑스말을 씁니다. 그러나 역사는 말과 관계없이 똑같이 배워요. 우리는 지금 말을 더 중시하지만 역사의식이 훨씬 더 중요해요. 

 


 

중국에 있는 조선족들은 말과 글은 다 우리와 같지만 중국의 소수민족으로서의 중국 역사를 국사로 배웁니다. 조선 역사는 못 배워요. 그러니 우리와 공유하는 역사의식이 희박하고 중국 안의 한 소수민족으로서 살아갑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민족의 뿌리에 해당되는 역사를 제대로 안 가르칩니다. 역사학자들이 대부분 일제시대 때부터 공부해서 일본 교수로부터 배운 것으로부터 현대적 학문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그런 민족의 뿌리에 대한 역사는 거의 없습니다. 그런 전통 때문에 한국의 역사교육은 과거에 대한 지식만 좀 배울 뿐 역사의식이라고 할 만한 것과는 거리가 멀어요.”

 

역사의식을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하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태종무열왕릉을 빠져나왔습니다. 

 

다음은 김유신장군묘로 향했습니다. 김유신 장군 역시 김춘추와 함께 삼국통일의 주역 중에 한명이죠. 

 


▲ 김유신장군묘

 

김유신장군묘에서는 김유신의 면모를 볼 수 있는 여러 일화들을 재미있게 이야기해 주면서 청년들의 흥미를 유발한 뒤 나당 전쟁을 예로 들며 김유신 장군을 비롯해 당시 신라가 가졌던 자주적인 면모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선덕여왕과 진덕여왕 두 여왕을 모시면서 정치외교는 김춘추가 맡았고, 국방은 김유신이 맡았습니다. 이것은 나쁘게 말하면 군정유착이라 볼 수 있고, 좋게 말하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도록 국내 정치를 안정시켰다고 볼 수 있어요. 왕위쟁탈전 때문에 늘 시끄러웠는데 양쪽의 힘이 뭉치니까 누가 반란이나 모반을 일으켜도 금방 평정할 수 있었습니다.

 


 

660년에 백제가 멸망했고 태종무열왕이 661년에 죽었어요. 그리고 문무대왕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당나라가 신라와 협공을 해서 그 강대하던 고구려가 668년에 멸망했습니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 당나라는 거기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9개의 도독부를 설치해서 고구려를 직할통치했습니다. 신라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요. 분개한 신라가 항의하자 당나라는 오히려 신라에 계림도독부를 설치해버렸습니다. 그래서 신라 조정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이런 당나라에 복속되어 고개 숙이고 살 거냐, 부당함에 맞서 싸울 거냐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는데 문무대왕이 요즘 말로 민족주의자였고 김유신도 민족주의자였습니다. 그래서 당나라에 이대로 복속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대부분 이 전쟁은 이길 수 없는 전쟁이라며 반대했지만 신라는 결국 한반도에 들어와 있는 당나라군을 선제 공격해서 쫓아내버렸습니다. 

 

그래서 당나라 본토에서 신라로 20만 대군이 침공해 들어와 나당전쟁이 시작되었어요. 당나라는 신라 왕을 폐위시키고 당나라에 와 있는 왕의 동생인 김인문을 신라 왕으로 임명했습니다. 자기들 멋대로 ‘문무왕은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김인문 네가 왕이다’ 이렇게 해버려서 싸움이 붙은 게 나당전쟁입니다. 

 


 

이럴 때 김유신이 자기 조카이기도 한 문무대왕을 보필하며 노장으로서 활약해 삼국통일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신라를 나쁘게 본다면 외세와 협력해서 동족의 나라를 없앴다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사실 그런 면이 있어요. 그러나 한편 다른 시각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는 당나라와 전쟁을 벌일 정도의 자기 자주성을 갖고 그것을 지켰다고 보기도 합니다. 이렇듯 김유신은 무장으로서는 굉장히 뛰어난 사람이었다고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스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김유신 장군을 비롯한 당시 신라인들이 가졌던 자주성을 잠시나마 느껴볼 수 있었습니다.

 


▲ 김유신장군묘 둘레에 세밀하게 새겨진 십이지신상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스님

 

자리에서 일어난 스님은 여기서 같이 사진을 찍자 하며 김유신장군묘 앞에 있는 계단으로 향했습니다. 계단 위에 빼곡이 선 400여명의 청년들은 길가에 만발한 코스모스처럼 활짝 웃으며 기념 사진을 찍었습니다. 

 


 

김유신장군묘에서 조금 걸어내려와 흥무공원에 조별로 흩어져서 점심 식사 시간을 가졌습니다. 잔디밭에 앉아 선선한 가을 바람을 쐬며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며 먹는 점심은 꿀맛이었습니다. 

 


▲ 흥무공원에서의 점심 식사

 

배를 두둑이 하고 오후에는 도보 순례로 황룡사지, 능지탑, 선덕여왕릉, 사천왕사지를 차례로 찾아가 보았습니다. 다음 이야기에 계속됩니다...

 

※ 정토회에서 진행하는 '인도 성지순례' 참가자 접수가 시작되었습니다.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인도의 10대 성지를 내 발로 직접 밟아보고 그 감흥을 느껴보는 시간을 가져보세요. 아래 배너에서 직접 신청하실 수 있습니다.

 

 

전체댓글 23

0/200

정근환

잘 들었읍니다.

2015-10-13 17:31:52

베라

스님의 법문을 들으면 부처님에 대한 원대한 사랑과 존경을 느낍니다. 그리고 스님의 역사이야기를 들으면 한반도와 한민족에 대한 스님의 따뜻하고 잔잔한 사랑을 느낍니다...감사합니다.

2015-10-12 22:53:34

정영숙

청년들의 경주 역사 기행과 스님께서 신라에 대해 잘 알려 주시니 눈물로 감동되어 가슴 벅찹니다.
북한을 포용하는 통일이 되는 그날까지 모두가 한마음 되기를 간절히 발원합니다.

2015-10-12 17:3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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