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5.10.10 (오후) 청춘캠프 2일째, 통일 강연


 

오전에 순례한 법흥왕릉, 태종무열왕릉, 김유신장군묘에 이어서 오후에는 도보 순례로 황룡사지, 능지탑, 선덕여왕릉, 사천왕사지를 차례로 찾아가 보았습니다. 

 

먼저 황룡사지에 도착했습니다. 광활한 터를 바라보며 이곳에 높이 솟았을 9층탑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 황룡사지

 

황룡사의 금당은 380평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요즘도 저렇게 큰 법당을 짓기가 어려운데 6세기 경에 저런 건물을 지었다고 하니 놀라울 따름이었습니다. 진흥왕 때 시작해서 선덕여왕 때까지 4대 왕에 걸쳐 93년의 세월 동안 지었을 만큼 큰 절이었던 것이죠. 황룡사 9층탑은 높이가 227척이니 아마 지금의 아파트 높이로 치면 어림잡아 25층 정도 될 것 같습니다. 중국이나 일본의 그 어떤 탑보다 규모가 큰 탑이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자부심도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거대한 탑은 몽고의 9차 침입 때 불타버렸다고 합니다. 

 

이어서 스님은 지금 청년들이 앉아 있는 이곳이 황룡사에서 법회가 열렸던 백고좌 강당 터라고 알려주면서 이곳을 참배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황룡사 9층탑은 신라가 통일을 발원한 곳입니다. 통일을 발원한 것은 선덕여왕 때고 통일을 완성한 것은 문무대왕 때입니다. 선덕여왕이 발원했지만 진덕여왕과 태종무열왕을 거치고 문무대왕에 와서 통일이 완성되었습니다. 시간적으로는 30여 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그 통일의 출발, 기초는 선덕여왕이 쌓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선덕여왕은 지혜로운 분이였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사람들이 많이 얕보았습니다. 신하 중에도 여자가 왕이 되는 것을 탐탁찮게 여기는 사람도 있었고, 특히 당태종이 이걸 두고 굉장히 조소했습니다. 당시 자장율사가 당나라에 유학 중이었는데 어느 날 기도를 하고 있는데 웬 선인 나타나서 이렇게 말했대요. ‘신라는 여자가 임금이 되어 있으니 덕은 있지만 위엄은 없어 외적의 침입이 잦다, 빨리 귀국해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고 기도하면 적의 침입을 막게 될 것이다’. 

 

1층은 왜, 2층은 중화, 3층은 오월... 6층은 말갈... 9층은 예맥, 이렇듯 신라 당시 주위에 신라와 관계 맺고 있는 나라가 아홉 나라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아홉 나라의 침입을 막고 국가를 보우하기 위해서 탑을 쌓았다고 해요. 부처님을 기리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부처님과 불보살의 힘을 빌려서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탑을 쌓은 겁니다. 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은 통일이었습니다. 완전한 평화는 통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오늘 여러분들도 황룡사 9층탑 앞에서 남북통일을 발원해야 합니다. 그래서 10년 후나 20년 후, 혹은 30년 후에 언젠가는 통일이 완성될 수 있겠죠. 시간이 정확이 얼마나 걸릴지는 알 수 없어요. 5년 후가 될 수도 있고 10년 후가 될 수도 있고 30년 후가 될 수도 있지만,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이 없어야 한다는 점은 변함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이룩한 것을 소실해서는 안 되고 최소한 유지는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희망을 가지고 더 발전하려면 통일밖에 길이 없습니다. 평화는 지금의 상태를 보장하고자 하는 것이고 통일은 우리가 더 발전하는 비전을 갖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곳에서 통일을 발원해야 합니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건축물을 지을 정도로 신라인들이 국난을 극복하고자 하는 정성이 지극했음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들은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로 나아가고자 하는 그 정성이 어느 정도일까 돌아봐지는 시간이었습니다. 

 

스님의 설명이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난 청년들은 스님의 설명을 들으며 강당터부터 시작해서 금당터, 9층 탑터를 차례대로 둘러보았습니다. 

 


 


 


 

9층탑이 있었던 자리를 지나 황룡사지를 빠져나온 청년들은 걸어서 신라인의 얼이 깃든 낭산으로 향했습니다. 

 


 

황룡사지에서 낭산으로 가는 시골길에는 황금 들녘이 펼쳐졌습니다. 추수를 앞두고 누렇게 익은 벼들이 가을 바람에 흩날리며 가을 정취를 만끽하게 해주었습니다. 

 


 

청년들은 “연휴에 집에 있었으면 이런 아름다운 풍경을 보지 못했을 것”이라며 도보 순례를 기쁜 마음으로 즐겼습니다. 

 


 

가을 정취를 만끽하는 사이 어느덧 능지탑에 다달았습니다. 가을 햇살이 따갑게 내리쬐는 가운데 탑 뒤로 넓직한 그늘이 보이자 스님은 그늘 속에 자리를 잡고 청년들이 모두 그늘에 앉도록 안내해 주었습니다. 

 


▲ 능지탑

 

그늘이 모자라자 청년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스님은 자리를 옮겨 햇살이 있는 곳에 모자를 쓰고 앉아서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신라는 이제 당나라와 연합해서 백제를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마지막으로 동맹국이었던 당나라와 8년에 걸친 기나긴 전쟁을 벌였습니다. 그 결과 당나라가 신라 땅에서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이제 당나라와 화친을 맺었으니 신라는 더 이상 아무런 적이 없을 것 같은데, 유일하게 한 나라가 남았어요. 바다 건너에 있는 왜가 신라의 유일한 적국으로 남았습니다. 그래서 문무대왕은 자기가 동해바다의 용이 되어 왜적을 막겠다는 원을 세웁니다.

 


 

그러니까 어떤 스님이 ‘아무리 나라를 지키는 것도 좋지만 축생이 되려고 합니까’ 하고 말렸어요, 용은 축생이잖아요. 육도윤회 중에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천상이거든요. 축생은 아무리 힘이 세도 인간보다 아래예요. 그러자 문무대왕이 ‘나라만 지킬 수 있다면 내가 축생이 된들 어떠하리오’라고 답했어요. 이게 신라 당시 지도자들의 헌신적인 모습입니다. 비슷한 말을 한 사람이 또 있어요. 김구 선생입니다. ‘나라가 독립만 된다면 내가 중앙청의 수위가 돼도 좋다’ 이렇게 말했잖아요. 문무대왕은 ‘내가 죽거든 화장해서 그 뼈를 동해바다에 묻어다오. 내가 동해의 용이 되겠다’라고 했어요. 그래서 대왕이 죽은 뒤 이곳에서 화장을 했습니다. 여기가 가장 성스러운 곳이라고 해서 여기서 화장을 하고, 뼈를 추슬러서 동해바다의 바위섬에 묻었습니다. 그것을 대왕암이라 합니다.

 

문무대왕은 무덤이 없어요. 화장하고 그 뼈를 동해에 묻었으니 무덤이 필요 없잖아요. 그래서 화장한 재를 가지고 이곳에 무덤을 대신해 문무대왕의 호국정신을 기리는 탑을 세웠습니다. 탑은 불교건축물이지만 세속적 의미로 보면 이것은 문무대왕의 무덤에 해당하는 거예요. 그래서 능지탑이라고 부릅니다.

 


 

문무대왕의 아들이 왕위에 올라 신문왕이 되었습니다. 신문왕은 대왕의 은혜에 감사한다 해서 바닷가 조금 안쪽에 감은사라는 절을 짓고, 감은사에서 바다까지 강을 따라 수로를 내어 대웅전 아래까지 물길이 들어가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대왕암의 호국룡이 언제든지 법당에 와서 부처님의 법문을 늘 들을 수 있도록 했어요. ‘감은’은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중 앞으로 훌륭한 사람이 나타나 남북을 평화롭게 통일한다면 제가 감은사를 지어드리겠습니다. 하하하.” (청중 웃음) 

 


 

남북 통일에 기여하면 스님이 감은사를 지어주겠다고 하자 청년들도 크게 웃었습니다. 아마도 통일의 혜택을 누리고 살아갈 청년들이 평생을 통일을 위해 몸바친 스님을 위해 감은사를 지어주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호국의 정신이 깃든 능지탑을 뒤로하고 선덕여왕릉으로 향했습니다. 솔숲 길을 지나 낭산을 오르니 선덕여왕릉이 보였습니다. 

 


 

무덤 한쪽에 빼곡이 앉은 청년들에게 스님은 선덕여왕과 관련된 신령스러운 설화 3가지를 재미있게 이야기해 주면서 지금도 배울 점이 많은 선덕여왕의 리더십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 선덕여왕릉

 

“여왕은 자기 당대에 통일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통일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김춘추, 김유신 등 통일의 주역들이 전부 30대에 선덕여왕을 보필했던 친위세력입니다. 그 사람들이 결국 30년 후 삼국통일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재를 양성하고 다양한 문물을 진작시킨 왕으로 추앙을 받고 있습니다.

 


 

이제는 옛날과 달리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활동하는 시대입니다. 세계 각국에는 여왕뿐 아니라 여성 대통령도 나오고 여성 수상도 많잖아요. 여성도 남성과 다름없이 아주 활발한 활동을 펼치는 시대죠. 선덕여왕의 이런 리더십은 지금도 배울만하다 싶습니다. 

 


 

남성들이 가진 폭력적 리더십보다는 어머니가 갖는 포용적 리더십을 여성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데, 대처리즘 같은 것도 보면 좀 폭력적 리더십입니다. 리더십이라고 하면 뭔가 센 걸 리더십이라고 하지만 꼭 그런 것만 리더십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유로이 활동할 수 있도록 기초를 닦고 마련해주는 것이 앞으로 미래의 리더십입니다.”

 

여성 지도자의 포용적 리더십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니 우리나라의 현 대통령의 모습과 자연스레 비교를 하게 되면서 무엇이 훌륭한 리더십인지 많은 것을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선덕여왕릉을 내려온 청년들은 오늘의 마지막 순례 장소인 사천왕사로 향했습니다. 한낮을 따깝게 비추던 가을 햇살이 산 너머로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오후 햇살을 받으며 스님은 사천왕사는 당시에 어떤 연유로 지어진 절인지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 사천왕사지

 

“당나라는 20만 대군을 훈련시켜서 신라를 침공하려 합니다. 신라는 신앙심으로 이를 막아내야 한다고 해서 명랑법사에게 도움을 요청했어요. 명랑법사는 그 당시에 신을 부려 기적을 행하는 종파를 이끌고 있었는데, 국난 극복 요청을 받고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이룰 수가 없습니다. 신의 은덕을 입어야 합니다.’라고 했어요. 여기가 신라 대대로 성스럽게 여기는 성스러운 터인데 ‘신유림’이라고 했습니다. 신들이 노는 곳이라는 뜻이에요. 이 신유림에 사천왕사라는 절을 지어 제석 환인과 사천왕과 팔부 신장의 도움을 얻어야 당나라군을 물리칠 수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급히 사천왕사를 짓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유가승 12명이 문두루 비법을 행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그 기도를 했더니 서해 바다에서 폭풍이 일어났습니다. 20만 당나라군을 싣고 오던 배가 서해바다에서 폭풍에 휘말려 모조리 파선되어 버렸습니다. 믿거나 말거나지만요. (청중 웃음) 

 


 

그래서 이 사천왕사는 불교와는 관계가 없는 절, 나라를 지키기 위한 절이에요.”

 

이어서 스님은 신라의 삼국통일이 갖는 의미와 한계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어쨌든 신라는 그렇게 해서 결과적으로는 역사의 주인공으로 성장했습니다. 동쪽에 치우친 작은 나라였던 신라가 어떻게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우리가 배울 점이 굉장히 많습니다. 또 삼국통일의 과정에서 신라가 국제적 역학관계를 잘 이용한 것도 배울 게 있어요. 

 


 

반면, 신라는 역사의식이 없었어요. 민족사의 정통성을 계승한 국가가 아닙니다. 환인의 한나라, 환웅의 배달 나라, 그리고 단군의 조선 나라의 역사를 계승한 역사의식이 신라에는 없었습니다. 박혁거세가 신라의 왕이 되었다 뿐이지 신라 이전에는 어떤 나라인지가 없어요. 그런데 고구려는 부여를 계승한 나라이고 부여는 조선을 계승한 나라였어요. 조선은 배달나라를 계승했고 배달나라는 환인의 한나라를 계승했고, 이게 아주 분명하잖아요. 환웅은 환인의 아들이었고 단군은 환웅의 아들이었고 해모수는 단군의 아들이었고 주몽은 해모수의 아들이었고, 이렇게 역사가 계승되어 갔습니다. 이것이 민족사의 정통이에요.

 

그런데 신라는 동쪽에 치우친 부족국가가 발전해서 벼락부자가 되듯 갑자기 커진 국가니까 역사의식이 부족했어요. 그래서 제 나라의 이익밖에 모를 뿐 민족사 전체의 이익을 보는 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사를 축소시키는 우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신라의 잘못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어쨌든 그런 부족한 면이 있는 겁니다. 지금 우리 남한도 어려운 조건 속에서 상당히 부강해진 데 비해서 남한의 지도자나 국민들은 역사의식이 부족합니다. 민족사의 정통을 계승하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없어요. 북한의 존재가 귀찮으니까 중국이 북한을 관리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자꾸 중국에 가서 북한 좀 어떻게 해보라는 소리가 나오죠. 남한의 지도자가 남한을 지키고 발전시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북한까지 포함한 전 민족의 이익과 발전을 생각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게 민족의 지도자예요. 

 

 

그래서 우리가 자칫 잘못하면 현재의 남한은 신라 꼴이 날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주변의 강대국들 사이에 끼어서 우리의 적대국인 북한을 멸망시키고 위험은 제거할지 몰라도 북한이 중국에게 관리되는 보호국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요. 이런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과거 역사를 통해서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신라가 어떻게 부강해졌느냐에서 배울 점이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민족사 전체로 보면 손실이 생겼는가를 알아야 해요. 우리 민족사의 축소를 가져온 요인은 신라의 역사의식 부재였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역사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발해가 멸망하면서 우리는 역사의식을 잃어버렸어요. 그래서 고려부터는 동아시아의 변방으로 전락하게 된 겁니다. 동아시아의 변방으로 전락한 게 지금 천 년이 넘어버렸어요. 우리가 만약 통일을 해서 동아시아의 변방으로 전락했던 것으로부터 동아시아의 자주국가로 돌아서면 일제 식민지배로부터 벗어난 백년의 한을 푸는 데 그치지 않고 어쩌면 천년의 한을 풀게 될 것입니다. 그럴 가능성이 있는 기회가 지금 주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의 선택이 매우 중요합니다.”

 


 

신라의 비약적 성장 과정에서는 많은 배울 점이 있지만 역사 의식의 부재는 큰 손실을 가져오게 되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렇게 사천왕사에서의 설명까지 마치니 정말 오늘 하루는 2천년의 역사를 넘나들며 기나긴 여행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스님의 역사 이야기는 이렇게 과거 이야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를 끊임없이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역사기행을 마치고 나니 지금 우리들의 시대적 과제는 ‘통일’이라는 것이 더욱 분명하게 다가왔습니다. 

 

사천왕사 순례를 마친 청년들은 곧바로 숙소인 보문 청소년수련원으로 향했습니다. 오늘은 하루 종일 걸었더니 스님도 피곤함이 있었는지 잠시 휴식을 취했고, 청년들은 저녁 식사를 하며 잠시 여유시간을 가졌습니다. 

 

저녁 7시 30분부터는 수련원 대강당에서 ‘통일코리아를 향한 청년의 상상력’을 주제로 스님의 통일 강연이 열렸습니다. 원래는 10명 정도가 오늘 역사기행을 하면서 그리고 평소에 통일 관련해 궁금한 것을 묻고 답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했는데, 첫 번째 질문자에 대한 답변이 길어지면서 스님은 질문 하나만 받고 그 속에 통일코리아의 비전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들을 들려주었습니다. 

 


▲ 보문 청소년수련원

 

오늘은 한 여학생이 첫 번째로 질문한 내용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당시 신라에 비해 오늘날 한국은 자주성이 약한데 이에 대한 스님의 의견을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오전에 무열왕릉에 가서 스님이 해주신 말씀 중에 신라가 당나라와 손을 잡긴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당나라와도 전쟁을 해서 영토를 회복하고자 했다고 하시면서 신라는 그런 자주 의식이 있었지만 지금 우리나라는 미국에 대해서 그런 자주의식이 있을까 물어보신 것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친일파도 대거 정리되지 못했고, 오늘날 대한민국은 신라처럼 외세를 몰아내고 자주적일 수 있을까 의문이 듭니다.”

 

“네, 저도 그런 의문이 들고 있어요. (청중 웃음) 

 


 

“통일을 하려면 어떻게 내부를 통합해서 외세에 대응을 잘 할 수 있을까요?”

 

“예전과는 많이 달라져서 외세를 몰아내야 한다고 너무 생각하면 안 돼요. 요즘은 전 세계가 서로 협력해서 살아가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웃 나라에 대해서 너무 배타적이여서는 안 돼요. 그렇다고 너무 이웃 나라에 종속이 되어서 끌려다녀도 안 돼요. 남한은 좀 종속적인 면이 강하고, 북한은 너무 배타적인 면이 강해요. 자주적이되 협력적이어야 합니다.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갖되 이웃 나라와 상호 협력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한국이 미국에 대해서 반미를 하는 것은 국가 이익에 별로 도움이 안 됩니다. 미국과는 긴밀한 협력과 동맹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국익에 이롭습니다. 과거에는 한미 관계가 돈독했지만 그것은 미국에 종속된 한미 관계였습니다. 즉, 미국이 하자는 대로 하는 한미 관계였습니다. 앞으로는 자주적 한미 관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종속적 한미 동맹과 자주적 한미 동맹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친미에서 반미로 간다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한반도를 둘러싼 이해 관계에 대해서는 미국의 이해 관계를 우선하는 방향으로 따라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전 세계에 대한 이해 관계는 우리가 미국의 이해 관계에 동조해주지만 한반도에 대한 이해 관계는 한국의 이해가 먼저 되고 미국이 여기에 협력해주는 정도는 최소한 회복해야 합니다. 만약 이것도 회복 못한다면 그것은 종속적 한미 관계입니다. 

 


 

옛날에는 우리가 북한의 침략에 대해서 우리를 지킬 수 없었고, 그래서 미국이 도와주는 수준이였기 때문에 종속적 한미 관계를 통해 나라를 지킨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고맙게 생각했지만, 지금의 대한민국은 옛날의 대한민국이 아니고 경제력이 세계 13위가 될 정도의 규모있는 나라가 되었음에도 종속적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옛날에 조선이 청나라의 속국 역할을 했던 것이나 조선이 명나라에 대해서 사대주의적인 예를 취해서 한글을 만들자고 할 때도 ‘어떻게 우리가 한글을 만들면 되나?’ 이렇게 말했던 수준의 사대주의에서는 벗어나야 합니다. 또 이것을 잘못 오해해서 반미로 가서도 안 되고 과거에 해오던 대로 종속적 한미 관계로 가서도 안 됩니다. 

 

그렇게 나아가기 위해서는 통일을 해야 합니다. 통일을 하면 통일한국은 미중의 세력 균형이 될 수 있어요. 미국 쪽에 조금 더 서 있지만 중국과도 균형을 이루어서 세력 균형을 잘 잡게 되면 우리만 잘 되는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가 평화지대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런 통일한국이 되려면 북한이 잘 해야 될까요? 북한은 일본도 못 움직이고, 중국도 못 움직이고, 미국도 못 움직여요. 그러나 한국 정부가 딱 제대로 잡히면 미국, 중국, 일본도 좀 움직일 수가 있습니다. 미국과 동맹 관계를 유지하면서 설득을 하면 우리한테 유리하게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한국 정부가 역할을 잘 하는 것입니다. 북한 정부는 우리가 아무리 잘 하라고 얘기해도 안 들으면 그만이잖아요. 그러나 한국 정부는 우리가 한국에 살고 있고 헌법에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고 되어 있으니까 우리가 그런 정부를 선택하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도 아무 관심이 없잖아요. 

 


 

현재 우리나라는 이것도 문제이고 저것도 문제이고 여러가지 문제가 있지만, 또 청년들을 지원하는 정책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통일 문제에 있어서 정말 의지가 분명하고 치우치지 않은 합당한 정책을 자주적으로 풀어갈 수 있는 사람과 세력을 지지해서 그런 정부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국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것이 1번 우선 순위입니다. 그리고 2번은 경제 민주화를 통해 양극화를 해소하는 것입니다. 3번은 정치적인 권력이 너무 대통령과 중앙 정부에게 집중되어 있는 문제를 개선하는 것입니다. 지방자치가 거의 연방 수준으로 분권이 되어야 하고, 대통령의 권한도 내각으로 옮겨가서 민주주의를 왜곡시키는 제왕적 대통령제와 지역주의에 기반한 양당제를 다당제로 바꿔나가고, 다당제에 의한 연립정부 형식으로 나아가야 국민들의 다양한 요구가 수용될 수가 있습니다.”

 

한미동맹을 종속적인 관계에서 자주적인 관계로 바꿔나가야 하는 이유에 대해 아주 쉽게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이어서 남북이 평화적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 지금 당면한 과제는 무엇인지, 앞으로 예상되는 어려움은 무엇인지, 통일을 위해서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다양한 예를 들어가며 쉽게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강연을 모두 마치자 사회자가 나와서 다시 한번 스님에게 청년들을 격려하는 이야기를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스님은 “지금까지 2시간이 넘도록 이미 격려를 해주었는데...” 하면서도 청년들 위해 균형잡힌 시각을 갖고 자기 권리를 찾을 줄 알아야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통일을 위해 청년들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여러분들이 너무 이기적이면 안 되지만 자기 권리도 찾을 줄 몰라서는 안됩니다. 자기 권리를 찾을 줄 모르면 착한 것이 아니고 바보예요. 자기 권리 주장이 너무 지나치면 그것은 탐욕이에요. 재벌은 지금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탐욕을 부리는 것입니다. 개인도 탐욕을 버려야 하지만, 국가는 탐욕을 규제해줘야 합니다. 그리고 개인은 자기 권리를 찾을 줄 알아야 하고, 국가는 개인의 권리를 보장해줘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탐욕을 개인의 권리처럼 방치하고, 개인의 권리를 욕심부리는 거 아닌가 하면서 주장하지 마라고 그럽니다. 여러분들이 탐욕은 버리되 권리는 주장할 줄 알아야 합니다. 청년으로서의 권리, 시민으로서의 권리, 애기 엄마로서의 권리,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주장할 줄 알아야 합니다. 

 

크게는 두 가지 권리가 있어요. 우리는 정부에 이렇게 하라고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있어요. 그럴 때 반정부적이라고 해도 기죽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법에 보장된 국민의 권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안 될 때는 선거 때 권력을 교체할 권리가 법에 보장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청춘콘서트를 하는 이유는 첫째, 청년들에게 기운을 불어넣어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래도 살만하다, 다시 일어나 봐라, 이렇게 위로도 하고 격려도 하지만 둘째는 우리가 힘을 합해 우리 사회의 미래를 위해서 주장할 것은 주장해야 합니다. 이렇게 공동체의 이익을 위하는 쪽으로 여러분들이 좀 적극적으로 참여해주시면 좋겠다 싶어요. 여러분들 생각은 어때요?“ 

 

“네! 맞습니다.” 

 


 

“여러분들이 앞장서서 대한민국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역할을 적극적으로 해주셨으면 해요. 직장 그만두라는 얘기가 아니예요. 연애나 결혼을 하지 마라는 얘기도 아니고, 아이도 낫지 마라는 얘기도 아니예요. 여러분들이 갖고 있는 에너지의 다만 얼마라도 우리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서 쓰자는 겁니다.“ 

 

2시간 동안 열정적으로 강연을 해주고 마지막에 당부의 말씀도 아낌 없이 해준 스님에게 청년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보내며 감사의 마음을 표했습니다. 

 


 

정말 오늘 하루는 신라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역사, 정치, 경제, 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서 종합적으로 우리의 모습을 고찰해 보는 시간을 가진 것 같습니다. 스님의 지혜가 묻어난 방대한 이야기들이 청년들의 가슴 속에 어떻게 담겨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청년들이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에 작은 기여라도 할 수 있기를 기원하며 보문 청소년수련원을 나왔습니다. 

 

스님은 수련원을 출발하여 곧바로 울산 두북으로 향했습니다. 하루 종일 법문을 하느라 피곤했는지 감기약을 챙겨 드시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내일은 용성조사님의 오도 기념일을 맞이하여 다례제에 참석한 후 정토 경전반을 수강하는 600여명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기념 법문과 즉문즉설 강연을 할 예정입니다. 

 

※ 정토회에서 진행하는 '인도 성지순례' 참가자 접수가 시작되었습니다.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인도의 10대 성지를 내 발로 직접 밟아보고 그 감흥을 느껴보는 시간을 가져보세요. 아래 배너에서 직접 신청하실 수 있습니다.

 

 

전체댓글 28

0/200

수미상

늘 건강하시길 빌고빕니다?
스님 오래오래 함께 해주세요()()()

2015-10-19 10:41:50

정근환

잘 읽었읍니다.

2015-10-16 18:31:19

정은경

스승님 오래오래 스승님으로 계셔주세요. 꼭 통일도 이루구요

2015-10-13 23:46:05

전체 댓글 보기

스님의하루 최신글

목록보기